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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김살로메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8년 5월
평점 :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대충 책장을 넘기지만 현명한 사람은 공들여서 읽는다. 그들은 단 한 번 밖에 읽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독일의 소설가 장 파울(Jean Paul)의 말이다. 그가 하려는 말은 알겠는데 내 독서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라서 책을 과식하는 편이다. 관심 가는 책이나 감동을 많이 주는 책에는 무의식적으로도 손이 먼저 간다. 읽고 또 읽을 때마다 번번이 새로운 깨달음과 감동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생기는 이러한 정서적 반응은 책과 마음이 전기가 통하듯 강하게 교류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감정의 동기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마음에 위로와 감동을 주는 책은 꼭 소설만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진실이 담긴 수필을 읽고 감동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수필은 감동을 주는 삶의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일상적이고 진부한 ‘일기’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수필이 나오는 이유는 글쓴이들이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쉬운 글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수필은 자기 고백적 글쓰기다. 자기 고백적 글쓰기는 경험을 의미화하고 객관화함으로써 경험과 자신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글쓴이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느끼는 독자들의 반응, 즉 감정이다.
괴롭거나 부끄러운 일일수록 망각과 ‘추억 보정’에 기대어 잊어버리고 싶을 텐데 굳이 글쓰기로 풀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치유를 목적으로 글을 쓰고 싶어 한다. 그들은 부정적인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감정의 덩어리를 재료 삼아 글을 써서 견딜 만한 수준의 내용으로 다듬는다. 내게 이런 의미가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한결 그 일을 돌아보는 게 쉬워진다. 따라서 자기 고백적 글쓰기, 즉 수필은 아픔의 상처를 다른 느낌으로 재생한다는 뜻에서, 덧난 상처를 아물게 하는 ‘연고’가 될 수 있다.
“안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을 보냈다. 수몰민으로 대도시에 버려진 채 십 대와 청춘을 버겁게 앓았다. 그 시절의 트라우마가 글쓰기의 자양분이 되었다. 아픈 어제가 모여 꽃핀 오늘로 거듭나는, 치유로서의 글쓰기에 매혹을 느낀다.”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작가 소개」 중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잔잔하게 가슴 저미게 했던 느낌들을 차분한 글로 풀어내 첫 번째 수필집을 펴낸 소설가 김살로메. 그녀는 치유로서의 글쓰기, 자기 고백적 글쓰기에 깊은 관심이 있다. 그런 관심에 부응한 책이 바로 이 첫 번째 수필집이다. 그녀는 삶의 흔적을 찾듯 끼적거렸던 글들을 오롯이 담아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아시아, 2018)이란 수필집을 펴냈다. 김살로메의 수필은 특별히 화려한 문체를 자랑하거나 하지 않는다. 내용도 특별할 게 없다. 그저 일상의 세목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인데, 그 잔잔함이 요즘같이 과장되고 억지수를 써야만 겨우 존재를 인정받는 세태에서 오히려 적잖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일천 글자 분량의 수필은 소중한 일상을 엮은 마음의 동화 같은 글이다. 마음속 동화이기 때문에 흘러가 버린 시간에 대한 향수를 불러온다. 너무 바쁜 일상 때문에 잊고 살아온 너와의 관계에 대하여 소중했던 가치를 일깨워준다. 『엄마의 재봉틀』은 스치듯 사라진 일상 속 미세한 풍경을 되살린 글이다. 쉼 없이 돌아가는 재봉틀 소리는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소재가 된다.
엄마가 남긴 베갯잇, 방석, 이불보 등 다양한 소품들을 보면서 재봉틀을 돌리고 돌리던, 굳은살 밴 엄마 뒤꿈치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바늘 자국이 지나간 엄마 오른손 검지의 상처를 떠올리며 당신 노동의 숭고함을 되뇌는 것도 잊지 않겠지. (『엄마의 재봉틀』 23쪽)
많은 이들이 자신을 미워하거나 타인을 미워하면서 산다. 어린 시절 글쓴이는 재봉틀 소리를 싫어했고, 그것을 쉼 없이 돌리는 엄마의 삶을 ‘동조 없는 연민’[*]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어른이 된 글쓴이는 치유로서의 글쓰기를 통해 부끄러운 기억을 억압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눈앞에 그대로 펼쳐놓고 실체를 확인한다. 『엄마의 재봉틀』은 글쓴이의 마음뿐만 아니라 소중한 추억이 깃든 엄마의 물건을 보듬고 쓰다듬는 치유력을 지닌다.
김살로메는 경륜을 찬미하는 목소리가 드센 이 시대에 새삼 ‘진정한 어른 되기’를 고민하는 작가이다. 『꼰대라는 말』, 『시청과 견문』은 ‘어른 되기의 어려움’에 대한 수필이다. 글쓴이의 표현에 따르면 ‘시청(視聽)’은 흘깃 보는 것이고, ‘견문(見聞)’은 제대로 보고 듣는 것이다. 꼰대는 제대로 보고 들은 것이 없으면서도 ‘견문’했다고 큰소리친다. 그리고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젊은 세대를 가르치려고 한다. 꼰대는 “요즘 애들은”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어른은 시간이 지난다고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가다듬는 과정의 결과로 얻어지는 칭호이다. 수필집에는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한 작가의 내적 성찰이 돋보이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큰 것, 강한 것, 힘센 것, 자극적인 것이 세상의 중심에서 위압하는 이 시대에 김살로메는 작은 것, 소박한 것이 우리 삶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이야기한다. 독자는 그녀의 수필집에서 마치 진흙 속의 연꽃처럼 성찰과 마음의 다스림을 실천하는 한 사람의 성숙한 어른을 만난다.
독자는 교리적인 글에서보다는 정서에 호소하는 글에 감동한다. 문학에서의 감동이란 내면을 두드리는 언어의 힘에서 나온다. 일천 글자로 채워진 소박한 수필에 인간적 애정을 가지고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힘이 있다.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은 소박한 경수필만 모은 책이 아니다. 그 속에 세상을 밝고 긍정적으로 보면서 그 가운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글쓴이의 지혜가 있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생각했던 것을 얼마나 더 절실하고 강도 높게 살펴보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삶과 존재를 어떻게 바꾸는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요즘은 반성과 성찰이라는 감정 상태가 아예 없어서 사유를 거부하는 꼰대들도 글을 쓴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엉망진창이라고 해도 이 땅에는 순수한 영혼을 향한 지향을 일상에 잊지 않고 글을 쓰는 김살로메가 있기에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
[*] 『엄마의 재봉틀』 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