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김살로메 지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18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어리석은 사람은 대충 책장을 넘기지만 현명한 사람은 공들여서 읽는다. 그들은 단 한 번 밖에 읽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독일의 소설가 장 파울(Jean Paul)의 말이다. 그가 하려는 말은 알겠는데 내 독서방식과는 거리가 멀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라서 책을 과식하는 편이다. 관심 가는 책이나 감동을 많이 주는 책에는 무의식적으로도 손이 먼저 간다. 읽고 또 읽을 때마다 번번이 새로운 깨달음과 감동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면서 생기는 이러한 정서적 반응은 책과 마음이 전기가 통하듯 강하게 교류하고 있다는 증거다. 이때 중요한 것은 ‘내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감정의 동기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마음에 위로와 감동을 주는 책은 꼭 소설만이 아니다. 때에 따라서는 진실이 담긴 수필을 읽고 감동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수필은 감동을 주는 삶의 새로운 진실을 발견하는 일과는 거리가 먼 일상적이고 진부한 ‘일기’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보는 사람을 민망하게 만드는 수필이 나오는 이유는 글쓴이들이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쉬운 글로 잘못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수필은 자기 고백적 글쓰기다. 자기 고백적 글쓰기는 경험을 의미화하고 객관화함으로써 경험과 자신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만든다. 그리고 그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글쓴이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느끼는 독자들의 반응, 즉 감정이다.

 

괴롭거나 부끄러운 일일수록 망각과 ‘추억 보정’에 기대어 잊어버리고 싶을 텐데 굳이 글쓰기로 풀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치유를 목적으로 글을 쓰고 싶어 한다. 그들은 부정적인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감정의 덩어리를 재료 삼아 글을 써서 견딜 만한 수준의 내용으로 다듬는다. 내게 이런 의미가 있었다는 식으로 해석하게 되면 한결 그 일을 돌아보는 게 쉬워진다. 따라서 자기 고백적 글쓰기, 즉 수필은 아픔의 상처를 다른 느낌으로 재생한다는 뜻에서, 덧난 상처를 아물게 하는 ‘연고’가 될 수 있다.

 

 

 “안동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을 보냈다. 수몰민으로 대도시에 버려진 채 십 대와 청춘을 버겁게 앓았다. 그 시절의 트라우마가 글쓰기의 자양분이 되었다. 아픈 어제가 모여 꽃핀 오늘로 거듭나는, 치유로서의 글쓰기에 매혹을 느낀다.”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 작가 소개중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잔잔하게 가슴 저미게 했던 느낌들을 차분한 글로 풀어내 첫 번째 수필집을 펴낸 소설가 김살로메. 그녀는 치유로서의 글쓰기, 자기 고백적 글쓰기에 깊은 관심이 있다. 그런 관심에 부응한 책이 바로 이 첫 번째 수필집이다. 그녀는 삶의 흔적을 찾듯 끼적거렸던 글들을 오롯이 담아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아시아, 2018)이란 수필집을 펴냈다. 김살로메의 수필은 특별히 화려한 문체를 자랑하거나 하지 않는다. 내용도 특별할 게 없다. 그저 일상의 세목을 잔잔하게 그려내고 있을 뿐인데, 그 잔잔함이 요즘같이 과장되고 억지수를 써야만 겨우 존재를 인정받는 세태에서 오히려 적잖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일천 글자 분량의 수필은 소중한 일상을 엮은 마음의 동화 같은 글이다. 마음속 동화이기 때문에 흘러가 버린 시간에 대한 향수를 불러온다. 너무 바쁜 일상 때문에 잊고 살아온 너와의 관계에 대하여 소중했던 가치를 일깨워준다. 『엄마의 재봉틀』은 스치듯 사라진 일상 속 미세한 풍경을 되살린 글이다. 쉼 없이 돌아가는 재봉틀 소리는 어린 시절 엄마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소재가 된다.

 

 

 엄마가 남긴 베갯잇, 방석, 이불보 등 다양한 소품들을 보면서 재봉틀을 돌리고 돌리던, 굳은살 밴 엄마 뒤꿈치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바늘 자국이 지나간 엄마 오른손 검지의 상처를 떠올리며 당신 노동의 숭고함을 되뇌는 것도 잊지 않겠지. (엄마의 재봉틀23)

 

 

많은 이들이 자신을 미워하거나 타인을 미워하면서 산다. 어린 시절 글쓴이는 재봉틀 소리를 싫어했고, 그것을 쉼 없이 돌리는 엄마의 삶을 ‘동조 없는 연민’[*]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어른이 된 글쓴이는 치유로서의 글쓰기를 통해 부끄러운 기억을 억압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자신의 눈앞에 그대로 펼쳐놓고 실체를 확인한다. 『엄마의 재봉틀』은 글쓴이의 마음뿐만 아니라 소중한 추억이 깃든 엄마의 물건을 보듬고 쓰다듬는 치유력을 지닌다.

 

김살로메는 경륜을 찬미하는 목소리가 드센 이 시대에 새삼 ‘진정한 어른 되기’를 고민하는 작가이다. 『꼰대라는 말』, 『시청과 견문』은 ‘어른 되기의 어려움’에 대한 수필이다. 글쓴이의 표현에 따르면 ‘시청(視聽)은 흘깃 보는 것이고, ‘견문(見聞)은 제대로 보고 듣는 것이다. 꼰대는 제대로 보고 들은 것이 없으면서도 ‘견문’했다고 큰소리친다. 그리고 ‘내가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젊은 세대를 가르치려고 한다. 꼰대는 “요즘 애들은”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어른은 시간이 지난다고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가다듬는 과정의 결과로 얻어지는 칭호이다. 수필집에는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한 작가의 내적 성찰이 돋보이는 글이 수록되어 있다. 큰 것, 강한 것, 힘센 것, 자극적인 것이 세상의 중심에서 위압하는 이 시대에 김살로메는 작은 것, 소박한 것이 우리 삶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이야기한다. 독자는 그녀의 수필집에서 마치 진흙 속의 연꽃처럼 성찰과 마음의 다스림을 실천하는 한 사람의 성숙한 어른을 만난다.

 

독자는 교리적인 글에서보다는 정서에 호소하는 글에 감동한다. 문학에서의 감동이란 내면을 두드리는 언어의 힘에서 나온다. 일천 글자로 채워진 소박한 수필에 인간적 애정을 가지고 독자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힘이 있다. 《미스 마플이 울던 새벽》은 소박한 경수필만 모은 책이 아니다. 그 속에 세상을 밝고 긍정적으로 보면서 그 가운데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글쓴이의 지혜가 있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완전히 새로운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생각했던 것을 얼마나 더 절실하고 강도 높게 살펴보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삶과 존재를 어떻게 바꾸는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요즘은 반성과 성찰이라는 감정 상태가 아예 없어서 사유를 거부하는 꼰대들도 글을 쓴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엉망진창이라고 해도 이 땅에는 순수한 영혼을 향한 지향을 일상에 잊지 않고 글을 쓰는 김살로메가 있기에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

 

 

 

[*] 엄마의 재봉틀22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18-06-16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글쓴이의 지혜,라는 의견에 동의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cyrus 2018-06-18 16:43   좋아요 0 | URL
스쳐 지나갈 법한 평범한 일상을 주제로 삼아 간결하게 글을 쓴 살로메님의 필력에 감탄했습니다. 프레이야님처럼 살로메님도 리뷰집이나 영화 리뷰집 한 권 내시면 좋겠어요. ^^

페크pek0501 2018-06-16 1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요를 열 번 누르고 싶은 리뷰입니다. 잘 쓰셨다고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cyrus 2018-06-18 16:46   좋아요 0 | URL
수필집에 보면 ‘문장 털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이 있어요. 이 글에서 살로메님이 깃털로 치장하듯이 화려한 수사가 장식된 글보다는 알짜배기 문장만 남은 글이 더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런 무색, 무취의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실패했습니다.. ^^;;

sprenown 2018-06-16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각없이 끄적거린다고 해서 모두 ‘글‘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리뷰 네요^^. 반성합니다!

cyrus 2018-06-18 16:51   좋아요 0 | URL
매일 틈만 나면 배설되는 문장들과 과시용 사진을 보고 싶지 않아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계정을 멀리 했어요. 짧은 글도 좋은 건 아니에요. 글이 길든 짧든 상대방에게 전달하고 싶은 진짜 ‘알맹이’가 있어야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2018-06-16 15: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8 16:54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1000자 이내의 리뷰를 쓰고 싶었는데, 쉽지 않았어요. 글을 쓰면서 수필집의 매력을 한 가지만 소개하는 것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서니데이 2018-06-16 16: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좋았어요. 간결하게 오래 공들여 쓴 느낌이 들었어요.
cyrus님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오늘은 더운 토요일입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8-06-18 16:59   좋아요 1 | URL
뛰어난 소설, 수필을 두루 쓸 줄 아는 작가는 흔치 않아요. 평범한 사람들보다 더 많이 글을 쓴 작가도 소설의 분량보다 적은 경수필을 쓰기 어려워 할 것입니다. 독자에게 전달하고픈 메시지가 명확히 담겨 있는 경수필을 쓰는 것도 꾸준한 노력 아니면 쓰기 힘든 일입니다. ^^

2018-06-17 06: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6-18 17:02   좋아요 1 | URL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취향과 유행을 이해하려면 독서모임에 참석해야 합니다. 20대들과 대화를 나눠 보면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젊은) 문화를 알 수 있습니다.. ㅎㅎㅎ 20대들이 공유하는 문화를 모르면 꼰대가 되기 쉬워요. 꼰대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든요.

프레이야 2018-06-17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곁들인 사진도 엄마의 재봉틀이 가장 좋았어요^^ 저는.

cyrus 2018-06-18 17:05   좋아요 0 | URL
이 책에 적재적소에 배치된 사진들이 글의 가치를 높여주었습니다. 수필집에 사진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
 
헝거 : 몸과 허기에 관한 고백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 사이행성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에리직톤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를 욕보인 죄로 아무리 먹어도 허기를 시달리는 저주를 받았다. 그가 워낙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다 보니 나중엔 음식 구할 돈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자 자신의 딸을 팔아 식탐을 채웠다. 그러고서도 배고픔을 억제하지 못해 자신의 몸을 뜯어먹었다.

 

에리직톤만큼은 아니지만 지금도 식욕을 억제하지 못해 고민에 빠진 사람이 많다. 그들은 땀이 비 오듯 내릴 정도로 뛰기도 하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굶기도 한다. 그래도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기란 쉽지 않다.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나 자신과의 전쟁. 아마도 여성들이 다이어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아름답고 멋지게 보이고 싶다는 원초적인 욕망에는 남녀노소가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아름다움의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아야 하는 보통사람들이 동시대가 규정하는 아름다움의 조건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다. 특히 TV 브라운관에서 뿜어내는 강력한 영상에 나만의 빛깔로 대항하기란 역부족이다. 개성에 주목하는 사회가 돼 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외모는 우리 사회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데 중요한 요소인 것이 변함없는 사실이다.

 

음식과 여성은 떼려야 뗄 수 없다. 여성들은 먹는 것 앞에서 환호하고 먹는 것 앞에서 절망한다. 음식과 여성은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다. 먹어도 먹어도 또 먹고 싶다. 처음에는 배가 고파 허기진 듯이 먹었고, 그다음에는 많이 먹고 기운을 차려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먹었으나 이제는 먹고 싶어서 먹는다. 먹고 또 먹다가 보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만이 되었고, 비만이 되다가 보니까 끝없이 음식이 당겨 먹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끔 됐다. 한때 끊임없는 자기혐오로 스스로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낸 록산 게이가 그러했다. 그녀는 과거 몸무게가 261kg까지 나간 적이 있다. 《헝거》(사이행성, 2018)는 사람들의 쏟아지는 시선에 고군분투하는 자신의 몸에 확대경을 들이댄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몸을 저주받은 몸뚱이로 훑지 않는다. 그녀는 몸과 허기진 욕망을 덤덤하면서도 진지하게 고백하면서도 궁극적으로 자신을 ‘당당한 여성’으로 보듬는다.

 

 

이 책을 쓰는 건 고백을 한다는 것이다. 나의 가장 추하고, 가장 연약하고, 가장 헐벗은 부분을 드러내겠다는 말이다. 나에겐 이런 진실이 있다고 털어놓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것이 (내) 몸에 대한 고백이라고 말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대체로 내 몸과 같은 몸의 이야기들은 무시되거나 묵살되거나 조롱받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내 몸과 같은 몸을 보고 쉽게 단정해버린다. 왜 저 사람이 저런 몸이 되었는지 안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들은 모른다. 나의 이야기는 승리의 이야기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말해야만 하고 더 들어야만 하는 이야기다. [1]

 

 

그녀는 왜 뚱뚱해졌는가? 따지고 보면, 비만은 그녀의 잘못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열두 살에 성폭행을 당했다. 그녀는 그 끔찍한 기억이 할퀴고 간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한다.

 

 

내 인생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별로 깔끔하지 않지만 반으로 나누어져 있다. ‘비포’가 있고 ‘애프터’가 있다. 몸무게가 늘기 전. 몸무게가 늘어난 후. 강간을 당하기 이전. 강간을 당한 이후. [2]

 

 

‘애프터(after)’가 된 삶은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어린 게이는 홀로 상처를 감당해야 했다. 학교에서 거의 매일 놀림을 당했다. 결국, 친구보다 ‘적’이 더 많아졌고, 늘 혼자였다. 그녀는 그 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어른이 돼서도 치유의 시작도 못 한 영혼은 여전히 열두 살에 머물렀다. 그때마다 찾아오는 절망과 공허감에 외로웠다. 그 허기를 자연스레 먹는 것으로 채웠다. 그녀는 스트레스를 식탐과 폭식으로 메웠다.

 

식탐은 마음의 허기가 원인이다. 일부에선 살찐 사람을 단순히 절제력이 없다며 힐난한다. 그러나 세상살이의 억울함, 분노를 외부로 발산하지 못한 채 먹는 것으로 푸는 경우도 많다. 게이는 자신의 몸을 ‘감옥’ 또는 ‘성벽’으로 비유한다. 몸이 비대해지면 다른 사람들의 공격적인 시선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살을 찌우기 시작하면서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특히 누군가를 좋아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으며 인정받을 수 있는 진심 어린 애정을 포기한 적도 있다.

 

《헝거》는 비만을 혐오하거나 동정하는 시선들을 고스란히 보여주면서 저자가 고통을 무릅쓰고 다이어트를 결심하게 되는 경위를 독자에게 털어놓는다. 뚱뚱한 사람은 게으르며 덜 지적으로 여겨지는 반면 몸매 좋은 사람을 그 반대로 본다는 건 타인의 몸을 바라볼 때마다 빠지지 않는 고정관념이다. 그러고 보면 뚱뚱한 사람을 힘겹게 만드는 것은 무거운 체중만이 아니다. 사회적 편견과 냉대는 더 무서운 칼이 된다. 여성은 무수히 쏟아지는 음식 광고, ‘먹방’ 등 식탐을 조장하는 환경 속에 살면서 미디어로부터 날씬하기를 요구받는다. 끊임없이 자기 몸을 검열하며 다이어트에 몰두하고, 호시탐탐 몸을 찢고 보형물을 삽입할 궁리를 해야 하는 여성은 괴롭다. 록산 게이는 이런 모순된 환경 속에서 여성들은 삶의 무게를 가중하는 우울증에 짓눌리고, 자기혐오에 빠지게 된다고 지적한다.

 

록산 게이의 꿈은 소박하다. 다른 사람들처럼 마음대로 먹고, 옷을 입고, 글을 쓰면서 활동하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 그녀에게는 꼭 하고 싶은 꿈이다. 그러려면 자신의 몸을 자기만의 감옥이나 성벽에 가둘 필요가 없다. 나만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선 그것들을 무너뜨려야 한다. 남의 눈에 평생이 좌우되는 삶보다는 내 몸과 내 운명에 만족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배워야 한다. 그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움으로써 열두 살 이후로 잊어버린 ‘목소리’를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인간의 실체를 외모지상주의와 성적 대상으로서의 가치만 바라보는 세상 속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무너지지 않는 나’를 찾는 일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내 몸에 눈뜨는 일, 그리고 더 나아가선 나의 세계를 건강하게 짓는 일이다. 그 세계를 보게 만드는 거울이 바로 이 책, 《헝거》이다.

 

 

 

 

 

[1] 23쪽

[2] 33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8-04-17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17 18:49   좋아요 0 | URL
허기를 지울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는지 고민해야겠습니다.. 저는 책을 읽으면서 허기를 잊으려고 하는데요, 이 방법만으로는 안 되겠어요.. ㅎㅎㅎ
 
책 읽다가 이혼할 뻔
엔조 도.다나베 세이아 지음, 박제이.구수영 옮김 / 정은문고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결혼은 각각 다른 공간에서 살던 남녀를 하나의 공간으로 합쳐 놓는다. 사람만 결합하는 게 아니다. 남자가 수집한 피겨(figure)는 공동의 공간으로 오고, 여자와 함께 살던 반려동물이 이사 온다. 취미가 같은 사람들의 경우엔 어떨까. 둘 다 작가인 남편 엔조 도와 아내 다나베 세이아는 독서를 좋아하는 부부이다. 결혼하면서 각각 소장하고 있던 책을 모두 공동의 공간으로 가져왔다. 그러나 책은 부부의 갈등을 유발하기도 한다. 서로 완전히 다른 독서 취향이 문제가 된 것이다.

 

 

독서 취향이 전혀 맞지 않는다. 타니스 리의 은빛 연인이란 소설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작품인데 남편에게 읽으라고 추천해봤지만 표지 일러스트만 보는 등 마는 등하더니 얼렁뚱땅 넘겨버렸다. 용서 못 해! (다나베 세이아, 14쪽 각주)

 

 

아내는 괴담, 도시 전설, 환상 괴기 소설 등을 선호한다. 반면 남편은 순수문학, 과학, 역사, 인문학 등 제목만 봐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분야의 책들을 읽는다. 남편은 괴담, 도시 전설을 잘 믿지 않는다. 아내가 괴담과 도시 전설 등을 모을 때마다 싸늘한 눈빛을 보낸다. 부부는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목적으로 부부 교환 독서를 시작한다. 부부는 번갈아 가며 상대에게 권하고 싶은 책 한 권을 정한다. 상대가 권한 책을 읽고 서평을 쓴다. 책 읽다가 이혼할 뻔(정은문고, 2018)은 책 읽는 부부가 서평을 주고받으면서 부부 싸움 하는 과정을 엮은 책이다. 서평으로 부부 싸움을 하다니. 이 말이 선뜻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부부는 책을 읽고, 서평을 쓰면서 부부 싸움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제사(題詞)는 부부 교환 독서가 지향하는 바를 명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글은 부부가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서로에게 책을 추천해온 격투의 궤적이다.

 

 

책 읽다가 이혼할 뻔은 부부가 공동으로 집필한 서평집이 아니다. 극과 극으로 나뉘는 독서 취향을 둘러싼 전쟁의 경과를 기록한 책이다. 남편은 무서운 그림을 싫어한다. 남편의 말에 따르면 무서운 표지의 책이 눈에 띄지 않게 딴 곳에 숨기거나 책을 뒤집어 놓는다고 한다. 남편이 스스로 폭로(요샛말로 자폭이라고 한다)한 약점을 파악한 아내는 서평 말미에 남편에게 가벼운 선전포고를 날린다.

 

 

이전 연재에서 남편은 표지가 무서운 책이 싫다고 폭로한 바 있다. 그렇다면 내가 아는 한 가장 무서운 표지의 책을 골라야지. 참고로 현재 남편은 아파서 이불 안에서 끙끙거리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읽는 쿠조(스티븐 킹의 소설-cyrus )는 또 다른 맛이 있지 않을까. (다나베 세이아, 43)

 

 

부부는 상대의 독서 취향에 볼멘소리하는 전쟁 같은 글쓰기로 서평을 연재하기 시작한다. 특히 서평 본문 밑에 부부가 각주를 달면서 아웅다웅하는 모습이 이 책의 백미. 그러나 어차피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 부부 교환 독서의 목적은 상대를 이해하기. 부부에게 책은 자신의 분신이다. 부부는 애지중지하게 여기면서 읽은 분신과 같은 책을 서로 바꿔 읽는다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거로 믿는다. 릴레이 서평이 거듭될수록 부부는 함께 살면서 알지 못했던 상대의 새로운 면을 조금씩 확인한다. 아내는 친분이 있는 편집장으로부터 처음으로 남편이 닭똥집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남편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스러워한다. 그녀는 복잡한 감정을 서평에 솔직하게 드러낸다.

 

 

남편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자신이 없어졌다. 그런 관계라고 생각한 건 나뿐인가. 결혼식 피로연 때 한 편집자의 엔조 씨 하면 닭똥집을 좋아하는 분으로…‥라는 말을 듣고서야 남편이 닭똥집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으니, 어쩌면 남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지도. 이 연재로 부부 사이가 나빠졌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때때로 남편은 아무 말 없이 기분이 나빠져 있는데, 그것도 분명 원인이 있겠지. 아무튼 되도록 빠른 시일 내 사과해야겠다. 미안해. (다나베 세이아, 87)

 

 

각자 오랜 취향에 익숙했던 두 사람에게 이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공통의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결합은 마이너스보다는 플러스가 많은 법이다. 부부는 상대의 취향을 이해하기보다는 인정한다. 직업이 같고, 취미도 같은 부부도 여느 부부와 다를 것 없이 크고 작은 갈등이 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결혼으로 맺어진 부부는 안 통하는 것이 정상이다. 공통의 취미만으로 서로를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없다는 건 결혼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부분이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부부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결합임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는 존재이다. 부부가 인생을 함께 걸어가려면 서로 다름을 받아들여야 한다. 결혼이 가슴에 와 닿지는 않는 비혼주의자에게 부부 생활은 남의 나라 일처럼 느껴진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편하게 이 책을 읽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책이 독서라는 공통분모로 하나가 되고 싶은 애서가 부부에게 유용한 책이 될 거로 생각한다. 이 책에 부부가 언급하는 일본 서적 대부분이 국내 독자 입장에선 상당히 낯설다. 부부가 읽는 책 내용을 아는 게 중요한가? 책 읽다가 이혼할 뻔》은 서평집이 아니다. 이 책을 '서평집'이라고 생각하면서 펼치치 마시라. 부부가 책과 서평을 매개로 어떻게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이해하는지 살펴보시라. 이 책 제목을 처음부터 책 읽다가 더 사랑할 뻔이라고 정했으면 어땠을까?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깨비 2018-04-01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리보기가 없어서 내용이 많이 궁금했었는데 사이러스님 덕분에 궁금증이 풀렸습니다. 재밌을 것 같아요. 일단 보관함으로 모셨습니다. ㅎㅎ

cyrus 2018-04-01 19:26   좋아요 1 | URL
이 책에 대한 독자들의 평가가 좋지 않아요. 부부가 언급한 책 중에 번역된 것이 많지 않아서 우리나라 독자 입장에서 보면 서평에 공감하기 어려워요. 사서 읽는 것보다는 도서관에 빌려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

북프리쿠키 2018-04-01 18:2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고유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고 더욱더 존중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러한 실천들이 무관심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면요.흔히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취향‘조차 닮아야 된다는 건 넌센스고 욕심아닐까요^^

cyrus 2018-04-01 19:27   좋아요 1 | URL
네, 맞습니다. 배우자의 취향을 무시하는 것도 이혼 사유가 될 수 있어요.. ㅎㅎㅎ

AgalmA 2018-04-01 19: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앤 패디먼 <서재결혼시키기>랑 또 다른 책이네요^^
이곳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책을 그냥 물성으로 보지 않는 터라 같은 책이어도 다른 사람 책은 다른 사람 책이죠! 분명 읽은 책이어도 남의 책으로 보면 정말 낯설어요;;

cyrus 2018-04-01 19:33   좋아요 1 | URL
저도 앤 패디먼의 책이 생각났어요. 가까이 지내는 부부도 서로 추천한 책들을 읽지 않는다고 해요. 예전부터 그래왔지만 저는 상대가 책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제가 읽은 책은 추천하지 않아요. 저도 상대가 추천한 책을 잘 안 읽어요. 결국, 애서가는 본인 알아서 책을 읽는 사람들입니다. ^^

stella.K 2018-04-02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장)읽게될 것 같지는 않지만 재밌을 것 같네.ㅋ

cyrus 2018-04-02 16:15   좋아요 0 | URL
부부가 소개한 책들이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것이라서 서평 내용에 공감하기 어려울 거예요. ^^;;


페크pek0501 2018-04-02 14: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편과 저도 책 취향이 달라서 각자 사 보는 편입니다. 가끔 둘 다 읽는 책이 낄 때가 있으면 반갑지요. 책 취향이 같다면 책 값 절약이 될 터인데, 하고 생각한 적 있지만
어찌 보면 서로 다른 게 좋은 것 같아요. 각자 고유의 영역이 있는 게 좋기도 하고
나만의 책, 이란 게 좋기도 하거든요.

cyrus 2018-04-02 16:20   좋아요 1 | URL
독서 취향이 같은 사람끼리 계속 만나면 지루해요. 그리고 책을 고르는 선택의 폭이 좁아져요. 알라딘 서재/북플 활동에 익숙하면 낯선 사람과의 친밀도를 유지하기가 수월해요. ‘좋아요‘와 ‘댓글‘을 서로 주고 받는 사람끼리 친해지기 쉽죠. 그런데 이런 분위기가 늘 좋은 것만 아니에요. 요즘 독서모임을 하면서 독서 편력에 부정적 영향을 주는 온라인 관계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장 그르니에《섬》(민음사, 1997)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리뷰를 읽는 것보다 마음에 드는 글을 골라서 여러 번 곱씹어 읽는 것이 좋다. 이 책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불평 섞인 리뷰를 읽은 적 있다. 물론, 《섬》이 술술 읽히는 책은 아니다. 김화영 교수의 번역은 불친절하다. 이 책에 언급된 프랑스 작가들이 누군지 알려주는 주석이 없고, 간혹 독자가 이해하기 힘든 표현 몇 개 보인다. (특히 알베르 카뮈가 쓴 서문에 ‘지드적인 감동’(5쪽)‘멜빌이 「화요일」 속에서 보여준 순례’(8쪽)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단어가 들어간 문장을 이해한 독자는 과연 몇 명일까?) 그러나 책에 명확한 주제가 드러나 있지 않다고 말하는 건 읽는 이의 노력의 문제일 수 있다. 《섬》을 반복해서 읽으면 처음에 읽었을 때 스쳐 지나간 문장들이 눈동자 속으로 들어온다. 그 경험의 과정에서 독자 자신에게 어울릴만한 ‘특별한 주제’를 발견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한 여행(『행운의 섬들』), 비밀스러운 삶을 갖는 즐거움(『케르겔렌 군도』) 등을 강조한 내용이 이 책의 핵심 주제라고 믿는 독자가 있겠지만, 적어도 그르니에가 특별히 강조하려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의 주제는 글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의 마음가짐 속에 있다. 그르니에는 원래의 인식을 뛰어넘어 새롭게 인식하게 만드는 사유 방식을 통해서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익숙한 대상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것. 이 경험은 새롭게 현실을 지각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특별한 경험은 결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새롭게 현실을 지각하는 법을 아는 독자들은 그르니에의 《섬》에 쉽게 도달할 수 있다.

 

그르니에는 공(空), 고양이, 비밀스러운 삶, 여행, 인도(India) 등의 소재에 대해 차분한 어조로 풀어낸다. 그가 바라보는 것들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김질하게 해준다. 삶에 대해 의문을 품는 태도는 ‘삶 읽기’의 근원이다. 그렇게 그르니에의 사유는 시작된다.

 

 

나는 사물들이 지니고 있는 현실성이란 실로 보잘것없다는 사실에 대하여 생각을 되씹어보기 시작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은 내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것이 차례차례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나를 확신하고 있는 터이니까 말이다. 나는 그냥 살아간다기보다는 왜 사는가에 의문을 품도록 마련된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공의 매혹』 28쪽)

 

 

이 알쏭달쏭한 삶 속에서 생각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는 작가는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찾으려고 한다. 『고양이 물루』는 작가가 물루라는 이름의 고양이 한 마리를 만나면서 실존의 의미를 찾아내는 과정을 보여주는 글이다. 우리는 고통을 피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고통은 우리 곁에 찾아온다. 즐거움이 끝난 다음 찾아오는 고통이 있는가 하면, 엎친 데 덮친 것처럼 찾아오는 고통도 있다. 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데 불쑥 찾아오는 고통도 있다. 그르니에는 특이하게도 밤에 대한 끝없는 공포에 전율한다.

 

 

황혼녘, 대낮의 그 마지막 힘이 다해 가는 저 고통의 시각이면 나는 내 불안감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고양이를 내 곁으로 부르곤 했다. 그 불안감을 뉘에게 털어놓을 수 있으랴?나를 진정시켜 다오」하고 나는 그에게 말하는 것이다.나는 하루에 세 번 무섭다. 해가 저물 때, 내가 잠들려 할 때, 그리고 잠에서 깰 때. 확실하다고 굳게 믿었던 것이 나를 저버리는 세 번…‥. 허공을 향하여 문이 열리는 저 순간들이 나는 무섭다」 (『고양이 물루』 41~42쪽)

 

 

그르니에는 어떻게 고통을 견뎌내고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고양이에게 말을 거는 그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르니에는 고양이 앞에서 고통을 진솔하게 고백한다. 고통을 받아 절망과 포기에 무너지는 존재는 왜소하게 보인다. 그러나 고통을 직시하는 용기는 인간만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이다. 그르니에가 고양이에게 말 거는 모습이 우스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의 고백은 진솔하다.

 

이 책 전체를 어느 고독한 남자의 긴 독백이라고 보고 싶다. 그르니에의 글을 읽으면서 고통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태도’가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평범한 것들로부터 삶의 진실을 발견하는 그르니에의 사색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의문’이 있기에 가능했다. 왜 사는지 되씹어보면서 살아간다는 건 넓디넓은 세상 속에서 우리의 편협한 시선을 뒤집어 자기 자신을 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꼬마요정 2018-02-21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야겠네요. 저도 이 책이 문구들이 참 좋은데 뭔가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물론 깜냥이 안 되는 것도 있지만, 저의 자세 또한 불량했던 것 같아요~ 명절 잘 보내셨어요?

cyrus 2018-02-21 21:12   좋아요 0 | URL
저는 잘 지냈어요. 꼬마요정님도 연휴 잘 보내셨는지요? ^^

내일 독서모임이 있는데 선정도서가 바로 이 책입니다.. ㅎㅎㅎ

분량이 얇아서 금방 읽을 줄 알았어요. 생각보다 쉬운 글이 아니었어요.
 
문주반생기
양주동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12월
평점 :
품절


 

 

 

육당 최남선, 춘원 이광수, 벽초 홍명희는 식민지 시대 조선의 ‘3대 천재라 일컬었다. 그들이 천재로 군림하던 시대에 이 세 사람을 능가하는 새로운 천재가 등장했다. 무애 양주동. 어려서부터 익힌 한학에 능통했던 그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을 해석했다. 선생은 생전에 스스로 천재이자 국보임을 내세웠다. 그의 언행을 요샛말로 하면 자뻑(자화자찬을 의미하는 은어)’에 가까운 셈이다. 그렇지만 선생은 자칭 국보라고 불릴 만큼 공부의 깊이나 재능이 비상한 사람이었다.

 

데카르트(Descartes)는 천재란 후천적 노력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천재를 이미 태어날 때부터 선험적으로 알고 있던 지식을 통해 능력이 발휘되는 존재로 보았다. 그러나 양주동 선생처럼 후천적 노력으로 천재가 된 사람들도 있다. 선생의 수필집 문주반생기(최측의농간, 2017)를 선생을 위해서 제목을 다시 짓는다면, 나는 어떻게 천재가 되었는가라고 붙여주고 싶다. 천재성의 바탕에는 포기를 모르는 학구열이 있었다. 소년 시절 선생은 영어를 독학했는데 ‘3인칭이 이해되지 않아 겨울날 아침 20(7km)를 걸어 일본인 교사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교사의 설명을 듣고 집으로 돌아온 선생은 ‘3인칭의 뜻을 잊지 않기 위해 메모를 하고, 반복해서 읽었다.

 

문주반생기를 읽어야지 한평생 문학의 숲에서 자유롭게 노닌 문학인의 진득한 진지함에 공감할 수 있다. 이 책의 주인공은 단언 양주동이지만, 그의 삶에 거쳐 간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선생은 이 책에서 2, 30년대 문인과 문단의 다채로운 풍경을 생생하게 되살려놓는다. 대구에서 항일 운동을 펼친 시인 백기만, 선생의 술 동무 횡보 염상섭, 잊힌 요절 시인 이장희, 선생이 사랑했던 문학소녀로 알려진 강경애 등 그와 함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나눈 문인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동안 문주반생기는 문고본 형태의 발췌본으로 남아 있어서 술을 중심으로 한 문인들의 일화를 담은 회고록 정도로 알려졌다. 사실 문주반생기범인(凡人)’으로서의 독자들이 읽기 힘든 책이다. 한시, 동양고전, 서양문학 등을 인용 · 언급한 문장은 선생의 박람강기한 재능을 보여주고 있으나 독서 몰입을 방해하는 단점이 있다. 요즘 잘 쓰이지 않는 우리말과 한문은 상세한 설명 없이는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다. 그리하여 최측의농간 출판사는 초판본 문체를 그대로 유지하되 문장 이해를 돕는 1,996개의 각주를 달았다.

 

지금은 조금 가라앉혔지만, 작년 출판계에 초판본 복간 열풍이 불었다. 저렴한 비용으로 원본의 진본성에 다가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나 눈으로 보는 책의 근본적 한계도 여실히 드러났다. 초판 복각본은 독자가 소유하고 싶은 책일 뿐이다. 독자의 초판본 소유욕이 읽는 욕구로 자연스럽게 이어진다고 보기 어렵다. 최측의농간이 새롭게 편집한 문주반생기초판본 복간작업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세대 불문하고 '읽는 독자를 위한 초판본이다. 문주반생기편집을 위해 출판사 관계자들은 오랜 세월 걸쳐 옛 판본을 읽었다. 수많은 국어사전, 참고문헌을 활용하며 꼼꼼한 교정을 거친 출판사의 노력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 독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읽는 것뿐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7-12-27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었구나. 그런데 좀 어려웠나 보군.
그러니까 나도 좀 주춤해지네.
그냥 너의 리뷰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cyrus 2017-12-27 16:18   좋아요 0 | URL
어렵다기 보다는 읽기가 힘들었어요. 선생이 너무 많이 인용을 하셔서... ㅎㅎㅎ

2017-12-27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12-27 16:21   좋아요 2 | URL
양주동 선생이 아주 어린 나이에 한문을 떼고(조금 과장된 면이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다섯 살 때부터 술의 맛을 알기 시작했을 정도면 조숙한 천재의 기질이 있었을 것입니다. 술을 많이 마시면 기억력이 떨어진다고 하던데, 애주가로 유명한 선생이 문장을 달달 외우는 것을 보면 선천적으로 타고난 천재인 건 확실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