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조지 오웰(George Orwell)‘《동물농장》과 《1984》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두 편의 소설이 워낙 유명해서 그런지 오웰이 에세이를 썼다는 사실을 잘 모르거나 또는 간과하는 독자들이 있다. 필자는 한때 후자에 속했다. 오웰이 ‘위대한 에세이 작가’인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가 쓴 에세이를 읽어야 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 [우주지감 6월 도서] 조지 오웰 《동물농장.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문학동네, 2010)

 

*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

 

 

 

지난달 독서 모임 참석을 위해 《동물농장》을 읽을 겸 오랜만에 오웰의 에세이 선집인 《나는 왜 쓰는가》 한겨레출판, 2010)도 읽었다. 오웰의 에세이는 그의 본명인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와 필명인 ‘조지 오웰’의 삶과 정신이 뚜렷하게 반영된 글이다. 그런데 나는 왜 ‘블레어’의 삶과 ‘오웰’의 삶을 구분하면서 언급하고 있을까? 이유는 오웰의 에세이를 읽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독자가 ‘블레어’와 ‘오웰’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 채 에세이를 읽으면 그가 에세이를 쓰게 된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은 에세이 읽기에 큰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극명하게 대비되는 ‘블레어’와 ‘오웰’의 삶을 파악한 다음에 에세이를 읽으면 작가의 진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오웰의 에세이도 소설 못지않게 제법 훌륭한 글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스테판 말테르 《조지 오웰, 작가로 산다는 것》 (제3의공간, 2017)

 

 

 

 

‘블레어’와 ‘오웰’의 일대기를 알기 위해 필자가 참고한 책은 《조지 오웰, 작가로 산다는 것》(제3의공간, 2017)이다. 이 책은 내가 ‘블레어’의 삶과 ‘오웰’의 삶을 구분하면서 에세이에 접근하는 방식을 생각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다. 이 책의 저자는 오웰의 소설과 에세이들에 있는 주요 문장을 인용하면서 그 속에 투영된 오웰의 삶과 생각들을 끄집어낸다.

 

 

 

 

 

 

 

 

 

 

 

 

 

 

 

 

 

 

 

 

* 조지 오웰 《버마 시절》 (열린책들, 2011)

* [품절] 조지 오웰 《제국은 없다》 (서지원, 2002)

 

 

 

 

 

 

 

 

 

 

 

 

 

 

 

 

 

* 조지 오웰 《코끼리를 쏘다》 (반니, 2019)

* 조지 오웰 《영국식 살인의 쇠퇴》 (은행나무, 2014)

* [품절] 조지 오웰 《코끼리를 쏘다》 (실천문학사, 2003)

 

 

 

 

먼저 ‘블레어’가 어떻게 살았는지 살펴보자. 1922년에 블레어는 ‘인도 제국 경찰’이라는 직함으로 버마(미얀마)에 발령을 받아 근무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는 그곳에서 정의와 윤리에 어긋난 영국 제국주의의 실상과 제국주의에 무력하게 굴복하는 식민지 사람들의 모습을 목격하면서 자신의 일에 회의감을 느낀다. 버마에서 경험하고 느낀 것들을 소재로 쓴 소설이 《버마 시절》(열린책들, 2011)이다. 《제국은 없다》 (서지원, 2002)라는 제목이 붙여진 번역본도 있다. ‘제국은 없다’라는 제목이 원작의 제목(‘Burmese Days’)과 판이하게 다르지만 오웰이 제국주의의 허상을 고발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의역에 가까운 제목(‘제국은 없다’)도 오웰의 의도를 잘 전달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버마 시절》과 같이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두 편 정도 고르자면 『코끼리를 쏘다』『국가는 어떻게 착취되는가: 버마에서의 영국제국』이 있다. 전자의 에세이는 가장 유명한 글이므로 줄거리 소개는 생략하겠다. 직접 읽어보시길 바란다. 『코끼리를 쏘다』는 ‘제국은 없다’라는 말을 떠오르게 하는 명문이다. 이 글은 5월에 나온 오웰의 에세이 선집 《코끼리를 쏘다》(반니, 2019)와 《나는 왜 쓰는가》에 수록되어 있다. 『국가는 어떻게 착취되는가: 버마에서의 영국제국』은 1929년에 발표된 글인데, 블레어가 ‘오웰’이라는 필명을 본격적으로 쓰기 전에 쓴 글이다. 그는 이 글에서 식민지 사회에 깊숙이 침투한 제국주의의 은밀한 음모를 고발하면서 대영 제국과 식민지국의 관계를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비유하면서 설명한다. 이 에세이를 읽으면 《버마 시절》에 등장하는 버마인 우 포 킨(U Po Kyin)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우 포 킨은 영국 제국에 호의적이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제국주의 체제에 순순히 따르는 인물이다. 오웰은 버마에 우 포 킨과 같은 원주민과 관리, 지식인들이 많아지면 서방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 여론을 형성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인도 제국 경찰을 그만둔 블레어는 글을 쓰기 위해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블레어는 파리의 빈민가를 전전하면서 생활했고, 영국의 런던으로 건너가서도 궁핍하게 살았다. 이 시기에 블레어는 빈곤에 허덕이는 하층계급의 삶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파리와 런던에서 밑바닥 생활 체험을 소재로 쓴 첫 번째 작품이 바로 1933년에 발표된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문학동네, 2010)이다. 이때부터 블레어는 그 유명한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쓰는가》에 수록된 『스파이크(The spike)』는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을 위해 쓰인 단편적인 소고(小考)이다. ‘스파이크’는 영국의 빈민 수용소를 뜻하는 속어다. 오웰은 스파이크의 허술한 관리 실태를 고발하면서 빈민을 위한 복지 문제에 소극적이고 무관심한 사회를 비판한다.

 

 

 

 

 

 

 

 

 

 

 

 

 

 

 

* 조지 오웰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 (한빛비즈, 2018)

* 조지 오웰 《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이론과실천, 2013)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블레어는 전업 작가인 ‘조지 오웰’로 살아가게 된다. 오웰은 사회주의자로서 스페인 내전(1936~1939)에 참전했지만, 그곳에서 스탈린(Joseph Stalin)의 독재 체제에 순응한 소련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을 옹호하는 좌파의 태도에 크게 실망한다. 이때부터 오웰은 전체주의로 변질한 소련식 사회주의와 전혀 민주적이지 않은 영국 좌파들의 행보를 비판하는 에세이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원한 사회주의는 노동자가 중심이 되어 계급을 철폐시키는 민주적 사회주의였다. 그는 사회의 밑바닥에 있는 빈곤 노동자들을 잔혹하게 탄압하는 스탈린의 이주 정책에 분노했고, 스탈린의 이주 정책에 의해 쫓겨난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인들을 지지했다.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 (한빛비즈, 2018)《모든 예술은 프로파간다다》 (이론과실천, 2013)는 오웰의 정치적인 입장이 분명하게 드러낸 글들이 수록된 에세이(글의 장르를 좀 더 명확히 말하면 ‘평론’이다) 선집이다.

 

 

 

 

※ 오웰이 직접 쓴 서문 두 편 모두 수록된 번역본

 

 

 

 

 

 

 

 

 

 

 

 

 

 

 

 

* 조지 오웰, 안경환 옮김 《동물농장》 (홍익출판사, 2013)

* 조지 오웰, 권진아 옮김 《동물농장》 (시공사, 2012)

* [품절] 조지 오웰, 최희섭 옮김 《동물농장》 (펭귄클래식코리아, 2008)

 

 

 

 

 

※ 『언론의 자유』만 수록된 번역본

 

 

 

 

 

 

 

 

 

 

 

 

 

 

 

* 조지 오웰, 김재희 옮김 《동물농장 외》 (서연비람, 2019)

 

 

 

 

 

※ 우크라이나 판 서문만 수록된 번역본

 

 

 

 

 

 

 

 

 

 

 

 

 

 

 

 

 

* 조지 오웰, 임종기 옮김 《동물농장》 (아로파, 2015)

* 조지 오웰, 박경서 옮김 《동물농장》 (열린책들, 2009)

 

 

 

 

《동물농장》은 소련 소비에트 체제의 전체주의 실태를 우화 형식으로 풍자한 소설이다. 원래 오웰은 이 소설을 위한 서문을 직접 썼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영국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추축국에 맞서기 위해 소련과 연합을 맺었고, 그 이후로 영국 사회 내에서 스탈린에 대한 비판을 삼가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영국 좌파들도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오웰은 《동물농장》을 출판해줄 출판사를 찾지 못해 난항을 겪어야 했다. 어려움 속에 《동물농장》은 출판되었지만, 이 소설을 쓰게 된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낸 서문은 끝내 출판하지 못했다. 《동물농장》 서문 원고는 오웰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발견되었고, 이 서문은 『언론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다. 오웰은 스탈린의 이주 정책에 저항하는 우크라이나 인들을 위해 ‘우크라이나 판 《동물농장》 서문’도 썼다. 비록 친필 원고는 분실되었으나 다행히 우크라이나어로 된 《동물농장》 서문은 남아 있었고, 이 글을 다시 영어로 번역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두 편의 서문은 에세이로 보기 어려우나, 오웰이 에세이에서 보여준, 치밀하면서도 간결한 ‘정치적 글쓰기’가 얼마나 뛰어난지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편의 서문을 읽어보면 오웰이 진심으로 추구했던 사회주의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대부분 사람은 《동물농장》만 보고, 오웰을 ‘반공주의자’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가 쓴 에세이를 먼저 읽었더라면 오웰에게 실례가 될 수 있는 그런 잘못된 평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웰이 직접 쓴 두 편의 서문이 수록된 《동물농장》 번역본이 많이 나와야 한다. 생각보다 오웰의 서문이 들어있는 《동물농장》 번역본이 많지 않다. 서문 한 편만 수록된 번역본들도 있다. 《동물농장》을 번역한 역자들의 해설이 오웰의 정치적 글쓰기가 무엇인지 잘 설명하고 있지만, 해설만 가지고는 ‘에세이 작가로서의 오웰’이 낯설게 느껴지는 독자들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한다. 대부분 독자는 《동물농장》 해설을 접하면서 ‘아, 오웰이 에세이도 썼구나’하고 생각만 할 것이고, 또 어떤 독자는 ‘정치색이 너무나도 강한 나머지 작가의 편견이 남아있는 에세이’라고 오해하면서 오웰의 에세이를 간과할 수 있다. 게다가 그가 ‘좌파’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에세이를 꺼리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독자들이 늘어난다면 조지 오웰과 소설과 에세이가 잘못 읽혀질 수 있는 위험성이 높아진다. 오웰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그의 글을 읽으면 그의 글쓰기 의도와 전혀 다른 엉뚱한 해석을 낳을 수 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4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삭매냐 2019-07-01 1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두까기 신공의 레전드 조지 오웰의
글을 아주 마음에 들어합니다.

<따라지 인생>은 정말 제목을 잘 뽑
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런저런 책들을 컬렉션해 두긴 했는데
정작 읽지 않고 버티는 건 무슨 심뽀일
까요.

얼마 전 책정리하다가 눈에 띈 <버마시
절>은 올해 안에 읽어 보는 것으로 :>

cyrus 2019-07-02 09:53   좋아요 0 | URL
오웰은 돌직구를 날리듯이 글을 쓰지요.. ㅎㅎㅎ 그 점이 매우 마음에 듭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9-07-01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오웰 에세이는 정말 한국의 김수영 에세이와 비교할 만하죠. 걸작 오브 걸작입니다...

cyrus 2019-07-02 09:54   좋아요 1 | URL
맞아요. 두 분 모두 정론직필이 무엇인지 명확히 잘 보여주고 있어요. ^^

뿔대가리 2019-07-06 18: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지오웰의 작품은 딱 2권 보았는데 다들 아는 동물농장과 1984 이다 에세이를 볼까 말까 하고 망서리던중 cyrus님의 서재를 보고 읽어보기로 했다 책 소개도 아주 자세하게 안내해주고 있다 고마움을 표한다

cyrus 2019-07-08 17:54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가의 어머니
데일 살왁 지음, 정미현 옮김 / 빅북 / 2019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첫 아이 출산을 앞둔 여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진통’이다. 출산 중 진통은 고통스러운 과정임이 틀림없다. 오죽하면 작가들도 자신들이 겪는 창작의 고통을 아이 낳는 고통에 견주겠는가. 산모마다 개인차가 있지만, 나를 낳고 기른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면 진통은 하늘이 노래질 정도로 아프다. 하지만 아기가 질 밖으로 쑥 빠져나오면 그 길었던 통증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대단한 성취감과 감동을 안겨준다. 산고 끝에 아기를 안은 어머니들은 대개가 기쁨의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작가들은 산고를 거쳐 탄생한 작품에 애착을 느낀다.

 

소크라테스(Socrates)는 생각을 자극하는 질문을 제자들에게 계속 던짐으로써 제자들 스스로 진리를 깨우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산파’라고 불렀다. 그가 진리의 탄생을 도왔기 때문이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답을 직접 주는 것이 아니라, 답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이것이 산파술의 핵심이다. 작가가 창작의 산고를 치르는 ‘산모’라면, 작가의 어머니는 산모의 출산(작품의 탄생)을 돕는 ‘산파’라 할 수 있다.

 

작가와 작가 어머니의 관계를 산파술에 비유한다면, 두 사람의 관계와 창작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작가의 어머니》는 작가의 어린 시절에 어머니는 어떤 존재였는지, 어머니의 존재감은 작품에 어떻게 투영됐는지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의 1부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에서 로버트 로웰(Robert Lowell)까지 여덟 명의 영미 소설가 및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전기(biography)이다.

 

셰익스피어의 어머니 메리 아든(Mary Arden)은 남편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았고, 기질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활기찬 사람이었다. 셰익스피어는 여덟 살 연상의 여성과 결혼했는데, 이 사실은 그가 부부 관계에서 여성의 우위를 받아들였음을 시사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극의 전개를 쥐락펴락하는 가모장(家母長)으로 그려진다. ‘애바(Abba)라는 애칭으로 알려진 루이자 메이 올컷(Louisa May Alcott)의 어머니는 여성의 권리 신장과 노예제 폐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인 사람이었다. 애바는 루이자에게 일기를 써보라고 권유했다. 애바는 루이자가 글을 쓸 때마다 행복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루이자는 자신이 쓴 글을 애바에게 보여주었고, 애바는 루이자의 글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루이자는 크리스마스에 자신의 첫 번째 작품을 편지 한 통과 함께 어머니에게 보냈다.

 

 

 엄마의 크리스마스 양말에 나의 ‘첫 아이’를 넣어두었어요. 아무리 결점 투성이라도 엄마가 받아주실 걸 알아요. (할머니는 늘 자상한 법이니까요.)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진지하게 해낸 일로 봐 주실 것도요. …‥ 이 책이 엄마를 기쁘게 해준다면 글을 쓰는 것에 만족할 거예요.

 

(「야심만만한 딸: 루이자 메이 올컷와 어머니」 중에서, 55쪽)

 

 

애바는 루이자에게 글쓰기를 독려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모녀의 친밀한 유대관계는 루이자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데 긍정적인 효과를 주었다. 물론 모든 작가의 어머니가 글 쓰는 자녀를 늘 자상하게 대하는 것은 아니다. 자식에게 지나치게 간섭하는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자녀의 글쓰기를 매정하게 바라보는 어머니도 있다.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어머니는 아들이 극작가가 아닌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길 원했다.

 

2부는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열한 명의 작가들이 자서전 형식으로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쓴 글로 구성되어 있다. 현존하는 최고의 영국 작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이언 매큐언(Ian McEwan)도 이 책의 필진으로 참여했다. 매큐언의 「어머니의 말: 회고록」은 작가의 개인사뿐만 아니라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작가의 창작 과정을 알 수 있는 글이므로 그의 소설을 읽어본 독자라면 이 글에 관심을 가질 만하다.

 

뮤즈(Muse)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예술의 여신으로,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영감과 재능을 불어넣은 여성을 의미한다. 이 뮤즈를 거론할 때 대부분은 ‘남성’ 작가의 아내이거나 애인일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여성은 늘 남성 작가를 보조하는 뮤즈로 호명되곤 했다. 《작가의 어머니》는 예술사와 문학사 속에서 구축되어온 정형화된 뮤즈 이미지의 한계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든다. ‘이성애 관계로 맺어진 남성 작가와 여성 뮤즈’ 이미지는 어린 시절 작가의 문학적 재능을 눈여겨보고, 자녀들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보살펴준 어머니의 존재감을 가린다.

 

탈무드(Talmud)에 의하면 ‘신이 항상 같이 있을 수 없어서 자기 대신에 어머니를 같이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 한 편의 글은 작가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탄생하지 않는다. 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그녀의 말과 일정 수준의 문학적 능력을 물려받으면서 자란 작가들도 있다. 위대한 작가의 곁에는 문학을 좋아한 신과 같은 어머니가 있었다. 어머니는 창작에 몰두하는 자녀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촉진자’ 역할에 충실한 산파가 될 수 있다. 어머니가 촉진자 역할에 충실하려면 ‘갑’의 위치에 서지 않아야 한다. 구석구석 참견해서는 안 된다. 너무 지나친 애정도, 너무 애정을 주지 않는 것도 문제다. 인간사가 다 그렇듯이 어머니와 자녀의 관계에서도 극단은 양자 모두에게 해롭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6-18 13: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8 16: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8 16: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6-18 16: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글쓰기의 태도 - 꾸준히 잘 쓰기 위해 다져야 할 몸과 마음의 기본기
에릭 메이젤 지음, 노지양 옮김 / 심플라이프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방법은 없는지 조언을 찾아다닌다. 그러나 결론은 아주 간단하다. 글을 쓰면 된다. 시간을 탓하는 사람도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글쓰기 습관을 들인다면 시간은 되레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애써 시간을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부정적인 감정이다. 홀로 책상에 앉아서 글을 쓰다 보면 글쓰기에 대한 자신의 능력에 회의감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감정은 어느덧 좌절의 감정으로 옮겨가고 글쓰기가 문득 두렵고 무서워지기까지 한다. 이 공포를 극복하려는 이들에게 에릭 메이젤(Eric Maisel)글쓰기의 태도는 좋은 길라잡이다.

 

이 책은 글을 잘 쓰기 위한 사람을 위한 책이 절대로 아니다. 가끔 글을 쓰는 사람 또는 직접 글을 써보려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 책은 문장 표현력을 높이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는다. 글을 쓸 때 갖춰야 할 태도를 알려준다. 작가는 글 쓰는 일에 집중한 만큼 작품으로 드러나기 마련이다. 특히 글 쓰는 태도를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서 글쓰기 활동의 질과 양이 달라진다. 성공한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Stephen Covey)는 성공하는 습관 제1 법칙으로 자기 주도성을 꼽았다. 주도적 인간은 오랫동안 깊이 생각한 가치를 토대로 선택하고 행동한다. 주변 여건이나 분위기 탓을 하지 않는다. 이 원리는 글쓰기 행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글을 쓰기 위해서도 능동적인 태도는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습관은 단기간에 기르기 어렵다. 평소에 꾸준히 자신의 생활 습관과 글 쓰는 태도를 점검하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한다. 그러면 규칙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일단 글을 쓰려면 제일 먼저 창작에 적합한 내면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내면의 공간이란 자아, 즉 나 자신을 말한다. 일상인의 자아를 훌훌 털어버리고 창작자의 자아를 찾아야 한다. ‘일상인의 자아는 글을 쓸 겨를 없이 일과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일에 집중한다. 그리고 온갖 핑계를 대며 글쓰기를 거부한다. 창작자의 자아를 갖춰야 한다고 해서 무조건 작가가 되라는 것은 아니다. 글쓰기를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목적의식을 가지라는 뜻이다. ‘창작자가 되기로 한다면 본격적으로 글을 쓰면 된다.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이 있으면 글쓰기에 몰입할 수 있다. 글이 잘 써지는 공간이 많을수록 좋다. 집은 혼자 사는 창작자에게 꼭 맞는 글쓰기 공간이다. 그러나 가족과 같이 사는 창작자에게 개인 공간은 그림의 떡이다. 개인 공간이 없으면 밖으로 나가 찾아야 하거나 아니면 만들어야 한다. 글쓰기 공간은 외부인이 들어와서는 안 될 창작자의 자아의 은신처다.

 

이 책은 작가라면 한 번쯤 겪게 되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해주고 있다. 이 책을 읽게 되면 빛과 그림자로 이루어진 작가의 삶을 알 수 있고, 무엇보다 창작자로서의 고민이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묘한 공통점과 함께 자기 자신에게 위안을 줄 수 있다. 글을 많이 써본 작가들도 자신감에서 좌절의 단계를 끊임없이 반복 순환하는 과정을 가진다. 어느 날은 창작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찼다가 또 그 다음 날은 아무것도 쓰지 못했다면서 자괴감을 느낀다. 좌절감이 오래가면 슬럼프를 겪게 되는데 그럴 때 글쓰기의 태도를 읽으면 된다.

 

잡념과 게으름 등 다양한 이유 때문에 글쓰기를 미루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다. 축 처진 창작자의 자아가 다시 힘을 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글쓰기는 잠시 멈추고 자신의 감정을 먼저 관찰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글을 쓰는 데 방해하는 불필요한 감정들을 버린다. 마음을 싹 비우고 나면 어떤 글을 써야할지 스스로 질문해보자. 글쓰기를 방해하는 여러 가지 이유를 알면, 그것들에 잘 대처하면서 글을 쓸 수 있다.

 

보통 사람이 글을 쓸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문장력보다 추진력이다. 글쓰기에 몰입하게 되면 쾌락과 고통 사이의 경계도 없어지게 된다. 마라톤 선수들이 느끼는 러닝 하이(running high)의 순간을 맞이한 것과 비슷한 감정이다. 거리를 조금씩 늘려 가며 훈련하면 누구나 1km는 거뜬히 달릴 수 있듯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려면 일단 글을 꾸준히 써봐야 한다. 누구나 처음에는 글을 쓴다는 사실 자체를 어렵게 느낀다. 하지만 원하는 만큼 글을 쓰는 습관으로 극복될 수 있다. 글쓰기의 태도는 슬럼프 단계에서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책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무언가 쓰려고 했다면 정말 하고자 하는 글을 써야 한다고 강조하는데,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남들의 시선에 신경 쓸 시간에 차라리 내가 쓰고 싶은 대로 글을 쓰는 게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 남들이 어떻게 보든, 남들이 뭐라 하건 상관없다. 내가 보고 느낀 것을 글로 표현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19-05-15 15: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닝 하이라. 음...
글을 쓰기 시작하면 꼭 그런 지점이 있긴 하지.
처음 얼마간은 정말 잘 써져. 그러다 어느 정도가면
조금 느슨해지지. 그러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대부분 그 지점에서 포기하는 것 같아.
그걸 돌파하면 또 완만하게 써질 텐데 말이야.
나도 그래서 엎은 글도 많지.

글쓰기 방법을 찾아 가는 건 중요한 것 같은데
알라딘에 글을 쓰는 것도 좋은 방법 같아.
잘 쓰면 보상을 받기도 하잖아.
하지만 긴 글은 쓸 수 없다는 것. 책에 관한 글만
쓴다는 건 단점이긴 하지.
어쨌든 글 쓰기의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 가는 건
중요하다고 봐.

cyrus 2019-05-15 18:16   좋아요 0 | URL
글을 꾸준히 쓰는 사람이라면 슬럼프는 반드시 찾아오는 것 같아요. 저도 크고 작은 슬럼프가 찾아와요. 책만 읽고 싶어지거나 정신적으로 피곤할 때 글 쓰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아요.

알라딘이 망하거나 제가 글쓰기를 완전히 포기할 때까지(아마도 제가 죽어야 글쓰기 행위가 중단될 것 같습니다) 책에 관한 글만 쓰려고 해요. 여기 알라딘에 맨 처음 글 쓸 때도 그렇게 생각했거든요. 단점을 장점으로 바꿀 생각은 없어요. 그냥 제 글쓰기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해요. ‘꾸준함의 대명사’인 야구 선수 박한이처럼 글을 쓰고 싶어요. 꾸준하게 책에 관한 글을 쓰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

stella.K 2019-05-15 19:15   좋아요 0 | URL
ㅎㅎ 좋은 생각인데 난 왠지 니가 그러느라 장가는 안 가겠다는
말처럼 들린다. 설마 그런 건 아니겠지?
좋은 사람 있으면 열심히 연애도 하고 그래라.
책은 평생 읽을 수 있지만 연애는 안 그럴 수도 있어.ㅋㅋ

그런데 박한이란 야구 선수가 있었냐?
첨 들어보네. 하긴 내가 그쪽으론 문외한이라...
 
다가오는 말들 - 나와 당신을 연결하는 이해와 공감의 말들
은유 지음 / 어크로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무엇을 쓸 것인지 생각하기, 쓰기, 고치기. 누구나 알고 있는 글쓰기의 세 단계다. 글을 쓰는 것은 생각을 깊게 한 후에 쓸 수 있고, 여러 번 지웠다가 다시 쓸 수도 있다. 말을 할 때도 이 세 단계를 지켜야 한다. 생각하기, 말하기, 고치기. 이 말하기 단계에서 가장 쉬운 것이 말하기고, 가장 어려운 것이 고치기다. 고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말은 엎어진 물과 같다. 말 한번 잘못하면 끝이다. 잘못 나온 말은 수십 마디의 변명으로도 고치기 어렵다. 그러므로 말을 할 땐 정말 신중해야 한다.

 

책을 많이 읽고, 글을 잘 쓰는 사람은 말도 잘할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이동진, 김영하, 김겨울 등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책 읽기를 엄청나게 좋아하고, 독서와 글쓰기에 관한 책을 냈다. 팟캐스트와 유튜브 방송을 진행하면서 꽤 많은 청취자/시청자/독자들과 소통한다. 게다가 그들의 입심 또한 범상치 않아 재미있게, 유쾌하게 책을 소개한다.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지만 책 많이 읽고, 글 잘 쓰는 똑똑한 사람도 무지에 근거한 발언이나 오해가 생길 수 있는 경솔한 발언을 할 때가 있다.

 

나는 책을 많이 읽지만,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다. 무언가 생각나는 것을 말로 표현하고 싶은데, 흐르는 물이 어딘가에 막힌 것처럼 술술 나오지 못할 때가 많다. 생각나는 대로 더듬더듬 힘겹게 말하고 나면, 얼굴이 화근거리고 심장이 두근거린다. 발음도 좋지 않다. 대화를 나누다가 상대방이 내 발음을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때가 있는데,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은 갑자기 흔들린다. 그야말로 ‘마음 지진’이다. 그럴 때 급히 대화를 매듭지어버린다. 상대방의 마음을 사로잡는 수려한 언변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쓸데없이 긴장하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싶다. 그래서 대화 분위기에 익숙해지고 싶어서 작년부터 독서 모임에 나가게 됐다. 1년 동안 두 개의 독서 모임에 나가면서 확실히 알았다. 내가 너무 책에 파묻혀 살았구나. 이러니 말주변이 없었어.

 

말을 잘 하지 못하더라도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면 내 인생의 반은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나한테 ‘다가오는 말들’을 경청하는 사람이 되는 것. 독서 모임에 나가기 전에 ‘경청하는 태도’를 잊지 않도록 마음속으로 자가 최면을 걸듯이 여러 번 다짐을 했다. 마침 은유 작가의 《다가오는 말들》을 읽게 되었고, 경청의 세 단계를 새롭게 설정할 수 있었다. 듣기, 생각하기, 고치기.

 

 

 타인의 말은 나를 찌르고 흔든다. 사고를 원점으로 돌려놓는다. 그렇게 몸에 자리 잡고 나가지 않는 말들이 쌓이고 숙성되고 연결되면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이 과정을 꾸준히 반복하면서 남의 말을 듣는 훈련이 조금은 된 것 같다. 무엇보다 큰 수확은 내가 편견이 많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그렇게 책을 읽어도 이 모양인가 싶어 자주 부끄러웠다. 하지만 편견, 무지, 둔감함은 지식이 부족해서 생기는 건 아니었다. 결핍보다 과잉이 늘 문제다. 타인의 말은 내 판단을 내려놓아야 온전히 들리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 7~8쪽)

 

 

말을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면 생각이 많아진다. 상대방에게 말하기 전에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하고, 그것을 어떻게 능숙하게 표현해야 할지 미리 생각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두뇌를 완전 가동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짧은 시간 안에 두뇌를 너무 빨리 작동하면 정확하지 않은 지식의 파편, 또는 편견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한다. 잡다한 생각으로 꽉 채운 말 한마디는 겉으론 화려하게 보일지 몰라도, 청자의 마음을 울리는 힘은 부족하다. 오히려 ‘청자를 울리는’ 해로운 말이 될 수 있다. 나나 상대방 모두에게 득이 되지 않는 말 한마디를 꺼내려고 복잡하게 생각하기보다는 차라리 ‘나’를 내려놓고 상대방의 말을 잘 듣는 게 낫다. 내게 다가오는 상대방의 말 또한 나를 아프게 하는 해로운 무기가 될 수 있지만, 내 머릿속에 남아 있는 ‘독소’ 같은 편견들을 제거해주는 따끔한 해독 주사가 되기도 한다. 해독 주사 같은 말이 내 두뇌를 찌르고 나면, 몇 번의 진통을 거치면서 생각한다. 그게 바로 은유 작가가 말한 ‘사고를 원점으로 돌리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편견을 발견하게 되고, 성숙한 ‘나’로 단단히 준비할 수 있도록 편견에 저항한다. 이것이 내가 생각한 경청의 마지막 단계 ‘고치기’다.

 

제대로 경청하는 사람이 되려면 ‘확신에 찬 사람(19쪽)’이 되지 않아야 한다. 편견이 쌓이고 자기 확신 단계에 들면 오만이 생긴다. 오만은 ‘다가오는 말’을 원천 봉쇄하는 방어막이 되거나 때론 상대방을 제압하는 위력이 되기도 한다. ‘네가 생각한 건 틀렸어’ ‘어딜 감히 내 말에 태클을 걸어?’ 이런 식으로 강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모든 답이 자기에게서 나온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은유 작가는 40대 후반이면 그렇게 되지 않도록 두려워해야 할 나이라고 말하는데, ‘젊은 꼰대’가 늘어나는 요즘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하면 아집이 생기기 시작하는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책을 많이 읽고, SNS나 블로그에서 글을 쓰는 일은 분명 좋은 일이다. 물론, 앞서 언급했던 글쓰기의 세 단계를 이행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혼자서 ‘생각하고, 쓰고, 고치는 일’이 가능하냐는 점이다. 혼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은유 작가의 글을 읽고 난 이후로 생각이 달라졌다. 글쓴이가 자신의 글에 ‘다가오는 말들’을 경청하지 않은 채 글을 쓰고 고친다면, 과연 그 글이 제대로 쓰인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평소에 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은 글 쓸 때도 남의 의견을 잘 듣는다. 이 사람은 무지와 편견으로 살아온 ‘나’를 재발견하고, 삶과 사회를 새롭게 정의하면서 글을 쓴다. 그리고 상대방(독자)이 불편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글을 쓴다. 내 글을 읽게 될 독자에게 상처 주지 않도록 최대한 배려하면서 글을 쓸 수 있으려면 일단 ‘다가오는 말’을 잘 듣고 마음으로 흡수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야 한다. 그러면 ‘나를 위한 글쓰기’는 ‘남을 위한 글쓰기’로 승화한다.

 

혼자서 책 읽고, 글을 쓰는 일은 긴장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게 ‘다가오는 말들’이 없기 때문이다. 틀에 박힌 글쓰기가 반복되는 일상은 온전히 ‘나’를 위한 공부가 될 수 없다. 안중근 의사는 ‘하루만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말했다. 좋은 말이긴 하나, 책에 파묻혀 사면서 글쓰기에 몰두하는 외로운 일상도 좋다고 볼 수 없다. 낯선 존재와 마주하면서 낯선 말을 접해보지 않으면 머리에 가시가 돋는다. 그 가시는 내 정신을 빈곤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남을 위협하는 언어라는 무기가 되곤 한다. 머릿속에 가시가 생기지 않으려면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공부는 ‘낯선 존재의 말을 거리낌 없이 받아들이고 부딪칠 수 있는 공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공간 안에서 ‘무지로 인한 긴장과 혼돈의 시간을 치르면서(278쪽)’ 공부를 해야 한다. 그래서 요즘 들어 혼자서 책 읽는 것보다 같은 책을 여러 사람과 함께 읽는 독서 모임이 좋게 느껴진다. 모임 분위기가 즐거운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 삶, 성격, 정체성, 신념)(과, 이)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공부하면서 느끼는 ‘긴장감’이 좋다. 지금도 나는 그렇게 공부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쭉 그렇게 공부하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9-04-14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 모임, 좋은 공부 방법인 것 같습니다. 함께 읽은 텍스트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요. 편견 깨기... 확실히 독학에는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cyrus 2019-04-17 13:38   좋아요 0 | URL
내 글을 보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없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에요.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글만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의견을 말하는 것 자체에 부담을 느끼죠. 솔직히 말해서 요즘 들어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에 회의감을 느낍니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라도 그들과 직접 만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더 좋게 느껴집니다.
 
서재를 떠나보내며 - 상자에 갇힌 책들에게 바치는 비가
알베르토 망겔 지음, 이종인 옮김 / 더난출판사 / 2018년 7월
평점 :
품절


 

 

애서가들은 서재 얘기든 책에 대한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쓴다. 그들이 좋아하는 책에 특별한 특징이 있다. 애서가가 쓴 책은 또 다른 어떤 책에 대한 입맛을 돋운다. 《서재를 떠나보내며》는 이 두 가지 모두를 만족시킨다. 고구마 줄기처럼 꼬리를 물고 나오는 ‘책 속의 책들’은 《신곡》, 《돈키호테》 같은 서양 문학의 알토란들이다.

 

책방 점원에서 시작해서 아르헨티나 국립 도서관장 자리까지 오른 알베르토 망겔(Alberto Manguel)은 자신만의 도서관을 만든 애서가이다. 학창 시절부터 망겔의 꿈은 도서관 사서였다. 작가가 되고 책을 모으다 보니 어느 사이에 책장들이 하나둘씩 늘어났고, 결국 프랑스 루아르강 계곡에 3만 5천여 권의 책이 소장된 개인 도서관을 만들었다. 그러나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이 있듯이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다. 망겔도 예외가 아니었다. 미국 맨해튼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하게 되면서 개인 도서관에 있던 책들을 떠나보냈다. 《서재를 떠나보내며》는 해체를 맞이하는 개인 도서관에 보내는 일종의 송별사(送別辭)다.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는 ‘서재 속에 죽은 사람들이 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죽은 사람들’이란 책을 남긴 저자들의 정신이다. 결국 서재는 책들의 공동묘지이고, 서재를 애지중지 관리하는 애서가는 묘지기다. 그러나 프랑스에 있는 서재를 떠나보낸 망겔 입장에서는 사르트르의 비유가 우울하게 느껴질 것이다. 서재의 해체는 곧 ‘서재의 죽음’, ‘기약 없는 이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는 책을 싸는 행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책을 한 권 한 권 서가에서 빼내고, 그 책을 종이 수의 속에 집어넣는 것은 우울하고 사색적인 행위로 마치 오래도록 지속되는 작별 인사 같은 것이다. (60쪽)

 

 

서재에 잠든 ‘죽은 사람들’을 지켜본 묘지기가 공동묘지 하나가 사라져가는(죽어가는) 모습까지 봐야 한다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에게 서재는 온전히 나에 대한 ‘자서전’이며, ‘나’라는 존재의 일부이다. 서재는 오로지 나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자기 맘대로 책을 꽂을 수 있다. 도서관에 있는 책은 공공 소유물이다. 도서관 책에 밑줄을 긋거나 필기를 하면서 읽을 수 없다. 그러나 개인 서재에 꽂힌 책은 개인 소유물이다. 망겔은 책을 빌려주는 행위를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그는 개인 서재를 잃은 것에 대한 아쉬운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나는 책은 나의 소유물이고 또 나라는 사람의 일부라고 느낀다. 나는 책을 빌려주는 것을 귀찮아한다. 나는 책을 빌려준다는 것은 절도를 유혹하는 행위라 믿는다. 나의 서재는 나라는 사람을 에워싸고 또 반영하는 온전히 사적인 공간인 것이다. (17~18쪽)

 

 나는 늘 공공 도서관을 사랑했지만 한 가지 모순은 고백해두어야겠다. 나는 도서관에서 글을 쓰거나 일을 하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 조급한 나는 원하는 책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빌려 온 책의 여백에 필기를 하지 못한다는 것도 너무 싫다. 책에서 어떤 놀랍고 진귀한 것을 발견했는데 그 책을 도서관에 다시 반납해야 하는 것도 싫다. 나는 탐욕스러운 약탈자처럼 내가 다 읽은 책이 나의 것이 되기를 바란다. (28~29쪽)

 

 

서재를 떠나보내고 난 뒤에 망겔은 국립 도서관장이 된다. 그는 자신의 임무를 염두해서 그런지 책의 후반부에 국립 도서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가 운영하고 싶은 국립 도서관은 누구나 마음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보금자리 같은 곳이다. 망겔에게 서재와 도서관은 개인과 사회 전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특별한 장소이다. 글의 영감과 간접경험을 얻는 곳이기도 하고, 때론 번잡한 삶에 지친 영혼을 위로하는 안식의 장소였다. 책 속에 담긴 방대한 인류 정신의 원형을 기억하게 만들고, 활자와 세상을 향해 더 열린 상상력을 갖게 하는 곳이기도 했다. 서재는 삶의 기록이며, 독서편력의 역사이다. 다소곳하게 책이 놓인 서재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따스해진다. 서재는 우리의 마음에 활력을 불어주는 오아시스 같은 천국이다. 책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서재야말로 보르헤스(Borges)가 원했던 ‘천국의 도서관’이 아니었을까.

 

 

 

 

※ Trivia

 

2쇄를 찍을 때 다음과 같은 오자들을 교정해야 한다.

 

28쪽에 안나 슈웰(Anna Sewell)의 사망 연도가 ‘1978년’으로 되어 있다. 그녀는 1878년에 세상을 떠났다. 52쪽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작가 이름을 ‘마르셀 푸르스트’라고 표기되어 있다. 176쪽 옮긴이 주에 ‘프루스트’로 적혀 있는 걸로 봐선 52쪽의 ‘푸르스트’는 인쇄 오류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크pek0501 2018-08-22 2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8~29쪽)의 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cyrus 2018-08-23 16:54   좋아요 1 | URL
망겔의 책을 다 읽고 도서관에 반납했을 때 기분이 이상했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