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 - 뾰족하게 독해하기 위하여
우치다 다쓰루 지음, 박동섭 옮김 / 유유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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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점    ★★☆    B-

 

 

 

 

이 글을 보려는 분들에게 한 가지 여쭤보고 싶다. 지금까지 살면서 만화책을 봤어만화책을 읽었어중에 가장 많이 들어본 말 또는 해본 말은 무엇이었는가?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대뜸 질문해서 죄송하다.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솔직하게 말하면 나도 이런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다.

 

책을 읽는 것책을 보는 것은 동일한 행위다. 우리는 두 눈()으로 시각적 텍스트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데, 이러한 과정은 책을 읽는 행위책을 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분명 어떤 사람은 만화책을 읽다라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만화책을 읽다라는 표현을 쓴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그런 사람이 있을 텐데 내가 못 봤거나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만화책을 보다라는 표현을 더 많이 들어본 것 같다.

 

만화의 정의는 다양하다. 그러므로 만화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순하게 만화를 정의하자면 한 편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연속적인 그림과 글의 조합이라 할 수 있다(권경민, 만화학개론참조). 우리는 그림을 눈으로 본다.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들, 즉 회화 속에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림을 읽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그런 말을 잘 쓰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림에 문자 한 개도 없는데 어째서 그것을 읽을 수 있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다. 물론, 따지는 걸 좋아하는 나로선 그림을 읽는행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입장을 반박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설치미술가 바바라 크루거(Barbara Kruger)는 사진과 문자 텍스트를 결합한 작품을 선보이는데, 그녀의 작품 속에 문구가 항상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바바라 크루거의 미술 작품을 보고 있다고 표현해야 하나, 아니면 읽었다고 표현해야 하나? 그림 속에 있는 문자는 관람객들이 그림을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열쇠가 된다. 그러므로 그림을 읽다라는 표현이 잘못됐다고 볼 수 없다. 각설하고 만화책에 그림이 글보다 제일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화책을 읽다라는 말이 잘 쓰지 않는 것 같다.

 

뭐든지 읽으면 재미있다는 우치다 다쓰루(內田樹)라면 만화책을 읽다라는 표현을 어색하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우치다 선생은 책뿐만 아니라 만화책도 읽는다. 그는 만화책의 대사, 전시회의 그림, 광고에 적힌 문구 등을 읽는 것도 독서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치다 선생이 주장하는 독서의 의미를 단순히 눈으로 훑어보는 행위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우치다 선생이 말한 독서의 정의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이렇다. 책이든 만화책이든 분야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뭐든지 온몸으로 읽으면서 강렬한 신체적 쾌감을 느꼈다면 제대로 읽었다고 할 수 있다. ‘강렬한 신체적 쾌감은 독서를 통해 지식을 습득하면서 얻는 정신적 만족감 또는 우월감이 아니다. 책을 읽으면서 재미있다’, ‘책에 있는 내용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라고 반응하는 감정들이 생겼다면 신체적 쾌감을 느낀 것이다.

 

우치다 선생이 읽는 법은 뭐라고 분류하기 어려운 책이다. 우치다 선생은 오랫동안 책, 독서 행위, 무예(武藝), 일본의 현실 등 다양한 주제의 잡문을 자신의 블로그에 공개했다. 책 제목만 보고 다독가의 책 읽는 방법론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 것. 이 책은 제목만 교양 에세이집인 블로그 글 모음집이다. 그래도 잡문이라고 해서 가볍게 봐선 안 된다. 이 책에 수록된 두 편의 글, <현실 각성><배우는 힘>은 지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자만에 빠지거나 배움을 게을리 하는 독자들을 일깨우는 뾰족한 바늘과 같은 글이다. 나머지 글은 일본 저자의 책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아마도 국내 독자들에게는 낯설고 생소할 것이다. 책을 보다가 흥미 없는 글이 나오면 과감히 건너뛰시라.

 

귀찮더라도 어떤 책을 읽을 땐 뾰족하게 독해(본 책의 부제)해야 한다. 저자도 완벽할 수 없는 사람이다. 저자가 책을 쓰다 보면 상식에 벗어난 주장을 할 수 있고, 잘못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전달할 수도 있다. 본 책에 수록된 <토크빌 선생과 잡담>뾰족하게 독해’해야 할 내용이 있어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글이다.

 

일단 먼저 <토크빌 선생과 잡담>에 대한 칭찬부터 하자면, 글의 전개 방식이 신선하고 재미있다. 우치다 선생은 이 글에서 자신이 미국을 분석한 책(제목은 저잣거리의 미국론’)을 쓰게 된 목적을 밝힌다. 그는 비전문가가 이해할 수 있는 미국론을 쓰기 위해 알렉시스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미국의 민주주의를 참고했다. 우치다 선생은 토크빌이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다는 가정을 해서 그를 독자로 상정한 미국론을 썼다고 한다. 글 중반부에 우치다 선생과 토크빌의 가상 대화(우치다는 토크빌과의 잡담을 망상이라고 표현했다)가 나온다. 두 사람은 국익을 위해 지배 야욕을 드러낸 미국의 추악한 역사에 대해 대화를 나눈다. 다음에 나올 문장은 두 사람의 가상 대화의 일부다.

 

 

 결국 일본열도를 원자폭탄(이라는 굉장한 병기를 미국인이 발명했지요) 두 방으로 초토화하고 그 후에 한반도를 불바다로 만들고 인도차이나반도를 불바다로‥…. (249)

 

 

인용문의 발언자는 우치다 선생이다. 토크빌은 20세기에 미국이 한 일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치다 선생은 19458월에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두 번이나 투하한 일과 미국이 참전한 6·25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설명해준다.

 

그런데 미국인이 원자폭탄을 발명했다는 우치다의 말은 사실과 다르다. 우치다 선생이 현대 문명을 잘 모르는 토크빌을 위해서 쉽게 설명했다고 해도, 이렇게 단순하게 설명하면 곤란하다. 어차피 토크빌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서 우치다 선생의 설명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망상이나 다름없는 가상 대화를 지켜보고 있을 독자들을 생각하면, 우치다 선생의 발언은 문제가 있다.

 

원자폭탄이 미국에서 개발되었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국 정부는 비밀리에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을 진행하여 핵무기를 개발했다.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연구 시설 중에는 영국, 캐나나 대학들이 포함되었으며 전 세계 과학자들이 미국이 주도한 극비 무기 개발 계획에 합류했다. 맨해튼 계획에 합류한 학자 중에 덴마크 출신의 닐스 보어(Niels Bohr)가 있었다. 역시 맨해튼 계획에 합류한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 이탈리아 출신)존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헝가리 출신)은 미국으로 귀화한 학자들이다.

 

우치다는 본 책 서문(13)복잡한 문제를 복잡한 채로 다루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역사를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역사적인 사건을 입체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편파적인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원자폭탄의 개발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미국인이 원자폭탄을 만들었다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원자폭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정치적 및 외교적 이해관계와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의 속사정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원자폭탄 만들기2(마이클 로즈, 사이언스북스, 2003)을 참조하시라.

 

 

그 다음 문장(251)은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우치다: 그러고 보면 맥아더 원수도 필리핀에서 철수할 때에 “I Shall return”이라고 했으니까요.

 

토크빌: “잠깐만 그 사람은 누구야?”

 

우치다: 전쟁 전에는 필리핀의 임금 같은 존재였고 일본이 전쟁에서 진 후에 최고사령관으로 온 사람입니다.

 

토크빌: ‥… 식민지 총독 같은 사람이구먼.”

 

우치다: 그렇지요.

 

 

1940년대 일본은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워 동아시아 국가들의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했다. 토크빌의 고국 프랑스는 영국과 함께 제국주의 열강으로 부상하면서 아프리카 대륙과 인도차이나반도의 동부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다. 토크빌은 제국주의를 옹호한 인물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생각하면 맥아더(Douglas MacArthur)를 식민지 총독과 같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두 사람의 말에 맞장구치고 싶지 않다. 19세기 미국의 식민 정책과 대외적으로 패권적인 지배를 행사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실상은 비판받아야 한다. 하지만 누가 누굴 보고 미국을 욕하고 있는가.

 

우치다가 의도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맥아더를 식민지 총독과 같은 사람으로 보는 그의 입장은 일본의 과거사를 은근슬쩍 회피하고 부정하는 뉘앙스를 드러낸다(물론 내가 지적한 문제의 내용만 가지고 그를 극우라고 판단할 수 없다). 일본의 극우는 미국의 침략 행위를 비판하는 동시에 일본을 식민지와 동일한 선상에 있는 전쟁 피해국의 위치에 놓으면서 과거사를 왜곡한다. 그렇게 되면 전범국가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며 이에 대한 국제적 지탄을 면피할 수 있다.

 

우치다 선생은 <독자와 책 구입자>라는 글에서 (자신을 향한) 비판이 옳다면 나는 반론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라고 밝혔다(377쪽 참조). 우치다 선생은 자신의 글을 뾰족하게 독해한 내 의견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일본어를 쓸 줄 모르며, 우치다 선생은 한국어를 모른다.

 

 

    

 

 

 

Mini 미주알 고주알

 

 

* <비인정한 세 남자> 124

 

  아무리 시적이라 해도 땅 위를 뛰어다니고 돈 계산을 잊어버릴 틈이 없다. 셸리가 종달새 소리를 듣고 탄식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 나스메 소세키(夏目漱石)풀베개머리말에 있는 문장이다. 셸리(Percy Bysshe Shelley)는 영국의 시인이며 종달새에게 또는 종달새에 부쳐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시 To a Skylark를 썼다.

 

 

 

 

* <에크리튀르> 467

 

  미셸 푸코는 2천 명의 독자를 상정해서 언어와 사물[]을 썼음을 확실히 밝혔다.

 

 

[] 언어와 사물의 국내 번역본 제목은 말과 사물(민음사, 2012)이다. 본 책 484쪽에 미셸 푸코는 말과 사물을 출판할 때 책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는 독자를 프랑스 국내에서 최대 2천 명으로 보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언어와 사물말과 사물은 같은 책이다. 말과 사물의 원서명은 ‘Les mots et les choses’이다. ‘mot’는 말, 단어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언어를 뜻하는 프랑스어는 ‘langue(랑그). 랑그는 파롤(Parole)과 함께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의 언어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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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0-12-04 0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치다란 사람이 맥아더 장군을 식민지 총독으로 말한것은 과거사를 회피하기 위한 발언일수도 있지만-물론 이것이 맞겠지요-제가 알기로는 실제 맥아더 장군의 부친이 과거 필리핀 임 미국 식민지 시절에 주둔한 사령관인지 총독인지로 있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것 같습니다.

cyrus 2020-12-04 10:58   좋아요 0 | URL
우치다가 맥아더를 “전쟁 전에는 필리핀의 임금 같은 존재”였다고 언급했는데 이 문장만 보고 몇몇 독자는 맥아더가 필리핀 육군 원수였다는 사실을 한눈에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밀리터리 덕후가 아닌 독자들은 맥아더가 한 일을 모르고 지나쳤을 거예요. 제가 가상 대화의 전개에 초점을 맞춰서 읽다보니 맥아더에 대해서 알아보지 못했어요. 맥아더의 아버지가 필리핀의 군정 총독이었다는 사실을 이번에 처음 알았어요. ^^

페크pek0501 2020-12-04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뵙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도 이 저자의 책을 두 권 가지고 있어요. 생각난 김에 찾아봐야겠네요.

앞으로 cyrus 님의 왕성한 서재 활동을 기대합니다.
 

 

 

이틀 전에 대구 시장은 시민 담화문을 통해 ‘328운동을 제안했다. 그는 코로나19의 조기 종식을 위해 모든 대구 시민에게 328일까지 사회적 거리 두기에 동참하자고 호소했다. 과연 자가 생활에 지칠 대로 지친 사람들이 사회적 거리 두기에 동참할. 대구의 코로나19 확진 환자 수가 점점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자 집에만 있던 사람들이 슬슬 밖으로 나와 식당이나 카페에 간다. 식당과 카페도 밀폐된 공간, 사람이 밀집하기 쉬운 공간이라서 그곳도 안전지대라고 장담할 수 없다.

 

 

 

 

 

 

 

 

 

 

 

 

 

 

 

 

 

 

*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내 방 여행하는 법(유유, 2016)

*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 한밤중, 내 방 여행하는 법(유유, 2016)

* 알랭 드 보통 여행의 기술(청미래, 2011)

 

 

 

혼자 사는 사람들은 2주를 어떻게 버틸까. 그들은 나름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지루해진다. 그렇다고 다시 재미있는 것을 찾아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일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집도 여행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무슨 소리 하냐고 비웃을 게 뻔하다. 그런데 300년 전에 집, 그것도 자기 방에서 여행을 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바로 작가 그자비에 드 메스트르(Xavier de Maistre).

 

메스트르는 결투를 벌이다가 체포되어 가택 감금형을 받았다. 그에게 주어진 가택 감금 기간은 총 42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메스트르는 집에서 한걸음도 나갈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하는 대신 자신의 방에서 값싸고 알찬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내 방 여행하는 법(유유)이라는 여행기를 썼다. 이 젊은 여행자는 가택 감금형을 받기 전에 이미 내 방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면서 여유를 보인다. 그러면서 방 여행이 돈 한 푼 들지 않아서 좋다고 말한다. 여행을 위해 따로 옷을 준비할 필요가 없다. 집에서 입는 파자마면 충분하다. 그는 방 여행을 소심한 사람에게 추천한다. 방 여행을 하면 강도를 만날 일도 없으며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는 사고도 만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메스트르가 추천한 여행 코스는 방 안에서 마음대로 누비고 다니는 것이 전부다. 처음에 탁자가 있는 곳에서 출발하여 방 구석구석 돌아다닌다. 그러면서 방에 있는 모든 사물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한정된 공간 속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니면 평범한 사물들이 특별하게 느껴질 것이다. 계속 걸으면 지친다. 이럴 때 잠시 의자에 앉아 사색한다. 이것은 휴식이 아니다. 메스트르에게는 사색도 내 방 여행의 일부다.

 

42일간의 방 여행을 한 지 8년이 지나서 메스트르는 정든 방을 떠나 러시아로 가게 된다. 그는 러시아로 가기 전날 밤, 그것도 단 네 시간 동안 방 여행을 한다. 역시 괴짜답게 그는 창틀을 여행의 동반자 말이라고 생각하면서 여행한다. 고요한 밤은 사색 여행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다. 그는 밤의 어둠과 고요가 흘러가고 있는 시간의 음성을 언어로 옮겨주는 통역사라고 한다. 그래서 속편 한밤중, 내 방 여행하는 법(유유)은 여행기라기보다는 명상록에 가깝다. 이 글은 메스트르가 네 시간 동안 방에 있으면서 생각한 것들에 대한 잡다한 기록이다.

 

작가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여행의 기술(청미래)에 메스트르의 방 여행을 언급했다. 우리는 따분한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로 향하는 여행을 갈망한다.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은 메스트르의 방 여행이 야외 여행에 대한 편견을 깨뜨렸다고 말한다. 우리에게 방은 가깝고도 먼 여행 장소. 우리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방을 여행 장소로 생각하지 않는다. 여행하고 싶은 우리의 마음은 늘 야외로 향해 있다. 야외 여행만 생각하는 우리는 너무나도 가까운 방이 멀게만 느껴진다. 누군가는 방을 여행할 수 있다는 발상이 우스꽝스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방 여행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익숙한 것들에 대한 특별함과 소중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특별한 일이다. 몇 시간이든 며칠이든 내 방을 관찰하면 새롭게 느껴지는 사물을 발견할 수 있다. 또 살면서 잊고 있었던 추억의 보물을 방에서 찾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방에서 발견한 보물이 예전에 숨겨둔 돈이라면 방 여행은 성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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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17 20: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0-03-17 23:48   좋아요 0 | URL
요즘 산에 사람들이 많이 오지 않아요? 밀폐된 장소는 아니지만, 산길에 사람들이 많이 지나가니까 아무래도 접촉 감염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

moonnight 2020-03-18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직장동료들이 요즘 저를 부러워하네요. 원래 틀어박혀서 책읽는 것만 좋아했으니 답답하지 않겠다며^^;

cyrus 2020-03-18 22:35   좋아요 0 | URL
출근해야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재택 근무하는 사람이나 집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거예요. ^^;;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 정여울의 심리테라피
정여울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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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물어보자. 나는 어떤 사람이냐고. 나는 심리적으로 부정적인 반응에 빠져드는 경향이 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도 그렇다. 나는 시작하기도 전에 내 문제점을 생각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그것을 고치려는 노력부터 먼저 한다. 마치 옷에 묻은 얼룩을 지우기 위해 물을 묻힌 손수건으로 벅벅 문지르듯이 나는 내 문제점을 얼른 찾아내서 고치려고 애쓴다. 손수건으로 세게 문지를수록 얼룩은 점점 더 번진다. 안 그래도 보기 싫은데 점점 뚜렷해지는 문제점을 보면 더 싫어진다. 여기서부터 내 일은 꼬이기 시작한다. 생각이 너무 많아지니까 일에 진척이 없다.

 

내 속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비판하는 제2의 자아가 살고 있다. “넌 왜 이렇게 못해?”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결과가 왜 이러냐?” “좀 더 잘할 수 없었니?” 주변에서 괜찮아”, “잘했어라고 말해줘도 나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 내가 검열관으로 임명한 제2의 자아의 지적을 피하려고 애쓴다. 아무래도 나는 자아비판이 지나쳐서 내 장점보다는 문제점을 더 보려는 습관이 몸에 뱄다. 그래서 피곤하고 지친다. 무엇보다 자존감이 떨어져 있다.

 

나를 돌보지 않는 나에게. 책 제목이 마치 나를 부르는 것 같아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오랜만에 에세이를 읽었다. 작가는 심리학과 정신분석 이론을 공부하면서 왜 그렇게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면서 살아왔는지 살핀다. 그러면서 독학과 글쓰기를 토대로 자기혐오의 원인과 과정을 찾아내어 더는 자신을 비난하지 않고 나를 돌보는 방식을 발견한다. 작가는 심리학을 내 문제를 비춰보는 유용한 프리즘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심리학자의 분석에 의존한다. 그러나 심리학은 내면의 문제를 명쾌하게 해결해주는 학문이 아니다. 작가는 심리학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힌트를 얻어야 한다고 말한다.

 

작가가 본인의 내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견한 힌트는 (Carl Gustav Jung)의 그림자 이론이다. 모든 인간의 내면에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는 자아, 즉 인간의 어두운 면이다. 이 그림자는 자신의 일부이면서도 스스로 거부해온 콤플렉스와 정신적 외상(trauma)이다. 나를 돌보려면 내면의 그림자를 외면하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 인정하면서 만나야 한다.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그림자를 대면했다. 처음에 쓴 글의 주제는 내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썼고, 다음 주제는 그래도 나를 사랑하고 아껴야 하는 이유였다. 작가는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면서 그림자를 돌보면서 어루만져준다. 이것이 작가가 강조하는 마음 챙김이다. 그러면 그림자도 자신을 가치 있는 존재라고 여기며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 내 안에 있는 검열관 이 녀석의 정체는 그림자다. 나는 그림자를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이 책의 1장 제목은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나는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 그림자를 사랑하지 않았다.[1] 그림자를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앞서 언급했듯이 심리학은 우리의 내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그림자를 따뜻하게 안아줘도 언젠가는 다시 내 포옹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면서 또다시 나를 괴롭힐 것이다. 작가는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내 안의 그림자와 상처 둘 다 없이 산다면 정말 행복한 삶일까. 그리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의 내면은 건강할 것일까. 나는 그림자와 내면의 상처 없이 산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본다. 내면의 상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생기기 때문이다. 정말로 내면의 상처를 받지 않으면서 살려면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세상과 타인을 내면을 위협하는 적으로 간주하면서 극단적인 고독을 선택하는 삶은 고통스럽다.[2] 오히려 그런 삶이 내면을 병들게 한다. 결국 인간은 죽을 때까지 그림자를 안으면서 내면에 상처를 달고 살아야 한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그림자의 괴롭힘에 무기력한 피해자가 아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는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내면에 상처 입은 사람도 다른 사람의 내면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 상처 입은 치유자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면서 차츰차츰 각자의 아픔을 치유해간다.

 

나로 살아간다는 건 결국 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살아야 할 시간이 아직 남았는데 벌써 남에게 인정받지 못해, 남에게 사랑받지 못해, 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고 자책만 할 수 없다. 그냥 그럭저럭 그런 삶이어도 괜찮다. 나를 사랑하자. 젊은 나를 위하여.[주3]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나를 인정해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리라. ‘마음 챙김은 내 삶의 밝음을 확장하는 즐거운 놀이다. 이 즐거움으로부터 긍정적인 기운을 받는다면 내 안의 그림자까지 챙길 수 있다.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신문기자>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은 배우 심은경은 인터뷰에서 앞으로 연기 활동에 대해 소박하면서도 당찬 포부를 밝혔다.

 

 

 그저 지금처럼 즐겁게, 저 자신이 더 높은 곳을 바라보려 하지 않았으면 싶다. 묵묵히 내 길을 가고 싶다.”

 

 

나도 그녀의 말처럼 어떤 신경도 쓰지 말고, 즐거운 마음으로 나 자신을 사랑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1] 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마지막에 있는 시구를 차용했다.

 

[2] 라르스 스벤젠 외로움의 철학, 청미, 2019.

 

[주3] 잼(ZAM)의 노래 <우리 모두 사랑하자>에 나오는 노랫말(우리 모두 사랑하자. 우리의 젊은 날을 위하여)을 변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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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2020-03-15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은 완벽주의자시네요~

cyrus 2020-03-15 18:19   좋아요 0 | URL
칭찬인가요, 비판인가요? ㅎㅎㅎㅎ 네, 맞아요. 제가 사소한 결졈을 그냥 지나치지 못해요. ^^;;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 김영민 논어 에세이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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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

 

중국 선불교의 큰 스승인 임제(臨濟) 선사의 말이다. 듣기에 따라 살벌하게 느껴지는 말이지만, 해탈이 어떤 의미인지 조금이라도 말이다. 불교는 해탈을 목표로 한다. 해탈이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속박이나 번뇌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이 집착에서 생긴다고 한다. 욕망에 대한 집착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괴로워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집착을 벗어버리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곧 극락이다. 해탈에 벗어나서 깨달은 사람은 자유를 얻은 자인 것이다. 깨달음과 자유를 위한 살생은 말 그대로 죽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극복하라는 뜻이다. 경전에 있는 기존의 지식의 틀에 의존하게 되면 새로운 생각을 하는 데 방해를 받는다. 그래서 임제는 부처, 스승, 경전을 최고의 가치로 삼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다. 임제가 보기에 공경의 대상이 되는 부처, 스승, 경전은 모두 사람을 결박하는 것이다.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수행과 고전 공부가 비슷한 과정일 리는 없다. 그러나 기존의 지식에 벗어나 새로움을 얻으라는 건 오늘날 고전에 접근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도 유효한 얘기일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과 자유의 경지인 해탈을 추구하는 수행자가 경전을 공부하면서 경전에 있는 지식은 옳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을 진정한 자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없다. 수행자가 제일 경계해야 할 것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일이고, 고정된 지식의 틀에서 갇혀 있을 때이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고전의 가치에 매료되어 그것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독서 모임에 참석하면 고전을 많이 읽었을 정도로 똑똑하나 고전의 틀에 갇힌 사람을 종종 만날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이미 알려진 고전에 대한 학자들의 해석을 미리 공부해오거나 그 내용을 A4 용지에 가득 채워서 정리해온다. 분명 부탁한 적이 없는데도 고전을 해설한 내용(일반인이 읽기 힘든 학술논문의 내용을 인용한 경우도 있다)으로 채워진 인쇄물을 나눠주기도 한다. 독서 토론을 하다가 인쇄물에 없는 고전에 대한 독창적 해석이라든가 고전을 비판하는 입장이 나오면 고전을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이 태클을 건다. “당신의 주장은 금시초문인데요.” “제가 아는 내용과는 완전 다르군요.” 그 사람은 에둘러서 다르다고 말하지만, 고전에 대한 파격적이고 독창적인 해석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며 그것을 ‘틀렸’라고 생각한다. 또 자신과 다른 방식으로 고전을 읽고 해석한 사람들의 생각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나오는 아마추어적인 발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속으로 상대방을 깔보는 사람은 양반이다. 고전을 너무 많이 공부해서 고전과 한 몸이 되어버린 사람은 독창적인 해석을 받아들이지 못해 그걸 가루가 될 때까지 지적하고 비난한다. 대놓고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다고 면박을 준다. 저기요, 당신이 고전을 직접 쓴 작가예요? 흥분한 당신의 모습을 보면 작가에 빙의한 줄 알겠어요.

 

 

 

    

 

 

 

그 사람은 독서 모임이 자신이 생각한 것과 아주 다르다면서 다음 모임에 불참할 거라고 선언한다. 그래, 잘 가라. 멀리 안 나간다. 고전을 읽는 데 걸림돌이 되는 사람이 다시는 모임에 나온다고 하지 않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서론이 너무 길어졌다. 아무튼 딱딱하게 굳은 머리를 내리치는 죽비와 같은 임제의 말은 고전에 대한 과거의 해석이 아닌 현재의 해석을 강조하는 말로 이해해도 어색하지 않다. 어제 누군가가 고전을 읽으면서 했던 생각을 모방하거나 흉내 내지 말고, ‘지금우리가 고전을 읽으면서 떠오른 생각을 중요하게 여기라는 뜻이다. 논어 에세이라는 부제가 달린 김영민 교수의 신작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생각의 시체에 불과한 고전에 너무 사랑에 빠지면 지적 네크로필리아(necrophilia)가 될 수밖에 없음을 일깨워준다. 이 책에서 김 교수는 텍스트(text)생각의 무덤이라고 비유한다. 논어는 죽어서 글이 된 공자(孔子)의 생각들이 안치된 무덤이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은 죽은 공자를 기리는 공자의 제자들이 아닌데도 논어텍스트를 곧이곧대로 이해하고, 그것을 실생활에 적용하려고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중국 명대의 학자 왕양명(王陽明)이 말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을 따르는 건 아니다. 그들이 논어를 읽으면서 주로 하는 일은 제자 앞에서 가르치려는 공자처럼 행세하는 것이다. 그들은 논어에 있는 구절 몇 개를 인용하면서 그 구절을 약처럼 곱씹으면 사회의 모든 병폐를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고전을 읽으면 모든 사회 문제(특히, 민주주의의 병폐)가 해결될 것이며 고전이 사람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길을 터줄 것이라고. 김 교수는 논어를 포함한 고전을 만병통치약처럼 여기는 세태를 경계한다. 고전을 만병통치약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독자는 고전에 갇혀버려 옴짝달싹도 못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런 독자는 고전의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해석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못하게 된다.

 

 

 

 

 

 

 

 

이미 알려진 논어독법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김 교수의 매니페스토(manifesto)는 앞서 언급한 임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공자를 만나면 공자를 죽여라. 공자의 제자들을 만나면 그들도 죽여라.” 여기서 말하는 공자논어를, 공자의 제자들논어를 신줏단지 모시듯이 읽는 독자들을 뜻한다. 공자와 논어는 복잡다단한 문제에 마주친 우리에게 희망적인 해법을 명확하게 제시해주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다. 그렇다면 고전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독자들이 공자를 죽일 방법은 있을까. 걱정하시 마시라. 방법이 있다. 김 교수는 논어에 드러나지 않는 공자의 속 깊은 생각들과 공자의 사상에 영향을 준 역사적 조건과 각종 담론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가 고전을 제대로 읽으려면 텍스트가 아닌 콘텍스트(context)를 잘 봐야 한다. 콘텍스트의 의미는 무척 다양한데, 나는 콘텍스트를 텍스트 뒤에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김 교수는 콘텍스트를 텍스트의 무덤이라고 말한다). 즉 고전을 읽을 때 우리 눈에 보이는 문자 그대로 따라 읽지 말고, 문자 속에 숨어 있는 맥락을 봐야 한다. 텍스트를 꼼꼼하게 읽되, 콘텍스트가 무엇인지 생각하면서읽어야 한다.

 

공자를 죽여야 한다고 해서 공자와 논어고리타분한 사상으로 알려진 유교와 연결 지어 비판하자는 게 아니다. 김 교수는 유교가 폐쇄적인 학문’, ‘전통을 답습하는 공자의 사상’, ‘동아시아 특유의 보수적인 종교로 너무 쉽게 오해받는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논어가 우리나라의 발전을 막은 폐단의 근원으로 간주하면서 읽는 것도 경계한다. 논어를 지나치게 숭배하는 것도 문제고, 너무 기피하는 것도 문제다. 논어를 대하는 두 가지 태도가 달라도 너무 다르지만, 이러한 태도를 낳게 한 원인은 피차일반이다. 둘 다 논어를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이 높다.

 

김 교수는 공자가 정확하게 미워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미워하는 일이란 말 그대로 누군가를 미워하고 비판하는 일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정확하게 미워하고 비판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고전을 정확하게 비판하면서 읽는 일 또한 쉽지 않다. 따라서 고전을 제대로 좋아하고, 정확하게 비판하려면 고전 텍스트를 공들여 읽고 스스로 생각하는 독자가 되어야 한다.

 

이 논어 에세이는 김 교수가 구상하고 있는 논어 프로젝트의 시작을 독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초대장이다. 그의 프로젝트에 흥미 있는 독자라면 이 초대장을 잊지 말고 잘 간수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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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06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0-01-07 19:31   좋아요 0 | URL
나쁜 의도로 책의 지식이나 문학 작품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누구나 텍스트를 자유롭게 해석할 자유가 있어요. 기존에 알려진 텍스트 해석을 따르기만 하면 텍스트 읽는 재미가 반감돼요.

추풍오장원 2020-01-06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모임에 그런 사람들이 출몰하는군요. 전 독서모임엔 참여해본적이 없어서 그런 사람이 있을줄 상상도 못했는데... 그런식의 읽기가 제일 게으르고 불성실한 읽기라고 생각합니다.

cyrus 2020-01-07 19:35   좋아요 0 | URL
여러 독서 모임을 참석하면서 별 희한한 사람들을 만나봤어요. 독서 모임을 스터디 모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요. 물론 독서 모임도 약간의 공부도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일반인들의 독서 모임은 스터디보다는 책에 대한 생각과 느낌을 자유롭게 말하는 분위기로 진행해요. 그래서 텍스트의 해설에 의존할 필요가 없어요. 하지만 독서 모임에 참석하면 해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분들이 종종 있어요.

서니데이 2020-01-06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서모임에서는 서로 다양한 견해가 나올 수 있다는 건 좋아보이는데, 그러려면 미리 준비를 많이 해야겠네요. 저도 독서모임에 참여해본 적이 없어서 궁금했는데, 잘 읽었습니다.
cyrus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cyrus 2020-01-07 19:37   좋아요 1 | URL
독서 모임에 참석하기 전에 많이 준비할 필요는 없어요. 책 다 못 읽어도 뭐라고 잔소리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독서 모임 때 말하고 싶은 내용을 열심히 준비해도 그거 다 얘기 못해요.. ㅎㅎㅎㅎ 그냥 마음 편하게 책에 대한 느낌이라든가 인상 깊은 책의 구절 등을 말하면 돼요. ^^

페넬로페 2020-01-06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전을 읽으며 그것이 고전이니까 저도 미리 존경과 무비판의 태도로 접할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도 고전이니깐
여지껏 살아남았잖아^^
이런 생각과 더불어 뭘 비판해야 할지 모르는 저의 식견도 아쉽구요~~
그래도 고전이 나쁘지는 않더라구요^^

cyrus 2020-01-07 19:40   좋아요 1 | URL
고전을 쓴 사람들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니니까 우리가 자유롭게 해석하는 것에 태클 걸지 못해요.. ㅎㅎㅎㅎ 그래서 고전을 비판적으로 읽기에 딱 좋은 텍스트에요. 읽기 어려워서 그렇지 한 번 읽고 나면 자유롭게 해석하고 비판할 수 있는 만만한 텍스트가 고전이에요. ^^

페크pek0501 2020-01-12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제가 ‘확신을 경계하라‘라는 칼럼을 쓴 적이 있어요. 확신의 위험성에 대해 쓴 글이에요. 버트런드 러셀에 따르면 지식인이란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한 타당한 논거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교조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독서 모임을 갖는 이유 중 하나는 어떤 틀에 갇히지 말고 (남의 생각을 들어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시간을 갖자, 인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군요. 고전이란 시대에 따라 또 독자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있음을 간과한 분인 것 같아요. 안타깝군요.

cyrus 2020-01-20 08:21   좋아요 0 | URL
독서모임에는 정말 다양한 성격의 사람들이 모이듯이 다양한 방식으로 책에 접근하고 읽는 사람들이 모여요. 그래서 독서모임이 있는 날은 늘 기대가 돼요. ^^

Angela 2020-01-17 01: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감합니다. text 보다는 context 입니다.
 
아버지의 유산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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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문이다.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죽음의 문을 통과하게 되는 상황을 준비해나간다고 하지만, 그 거대한 문이 다가설 때까지 아무도 모른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그 문의 존재는 누구나 알고 있다. 다만 잊고 살 뿐이다.

 

일상에서 죽음을 떠올리며 산다는 것은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외면할 수도 없다. 그래서 그 벽이 다가오기 전에 원 없이 세상을 즐겁게 살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정리해야 할 일들을 하나하나 짚어 나갈 필요도 있다. 나의 죽음 이후 내 가족과 자녀 간의 분쟁을 일으킬 수 있는 경제적인 문제, 즉 유산 상속에 관한 문제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부모 중 한 사람이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생기면, 남아있는 사람들은 슬픔과 동시에 유산 상속이라는 해결과제까지 떠안게 된다.

 

많은 이들이 유산 상속이라고 하면 경제적 가치가 있는 재산을 떠올리고, 그것이 분할되어 내게 얼마나 많이 주어질지 관심을 가진다. 아니면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면서 알게 된 생활의 지혜라든가 아버지와 관련된 행복한 추억과 같은 정신적인 유산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필립 로스(Philip Roth)의 자서전적 에세이인 아버지의 유산을 읽으려는 독자라면 먼저 이 책의 제목에 있는 유산의 의미가 무엇인지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다. 별것 아닌 일이지만, 책을 읽기 전에 그런 생각을 꼭 해보시라. 책의 후반부(200쪽 이후부터)유산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통념을 깨뜨리는 반전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 것이다. 어떤 독자는 아버지의 유산서평에 내가 강조한 그 반전을 언급했던데, 서평을 쓴 독자가 의도하지 않은 스포일러가 될 만한 사실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독자 서평을 안 보는 것이 좋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게 이 책이 주는 진실한 교훈을 최대한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유산86세의 아버지가 뇌종양 판정을 받고 2년 뒤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시간을 기록한 책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유대인 이민자 출신이다. 그는 일상의 숱한 반유대주의를 헤쳐 나왔고 정년퇴임을 할 때까지 보험회사 관리 업무에 종사했다. 필립 로스는 아버지의 남은 삶을 함께하면서 아버지와 나눈 일상적인 대화부터 시작해서 아버지가 숨을 거두기 직전의 모습까지 기록으로 남긴다. 아버지의 유산》에는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기존의 책들과 다른 특별함이 있다. 특별함이 바로 내가 앞서 언급한 이 책의 반전이다. 반전이 없었으면 아버지의 유산은 누군가의 아버지에 대한 평범한 기록으로 남았을 것이다. 이 책의 반전은 작가뿐만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지켜보는 독자들까지 불편하게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절대로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이다. 따라서 아버지의 유산은 유산의 물질성을 먼저 떠올리는 모든 아버지의 자식들을 각성하게 만든다.

 

내가 두 번이나 강조한 책의 반전을 막상 읽어보면 누군가는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일 것이고(대부분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 이 책에서 로스가 언급한 유산은 우리가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는 아주 특별한 유산의 의미를 기대했는데, 별거 아니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책의 반전을 보면서 두 가지 유형의 감정(내가 언급한 것 이외의 또 다른 감정을 느낀 독자가 있을 것이다) 중 하나라도 느낀 독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한 인간의 죽음이라는 문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미리 언급했듯이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산을 읽는다면 인생의 마지막 문으로 향하는 여정이 어떤 것인지 조금이라도 생각해볼 수 있다. 아버지의 유산은 종이에 남아 있는 작가의 아버지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책 한 권과 같은 인생을 촤르르 펼치다가 언젠가는 마주하게 될 낯설면서도 익숙한 페이지, 바로 내 아버지에 대한 일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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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gela 2019-11-01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산하면 물질적인것만 떠오르는데, 반전이라니 그게 뭘까 기대가 되네요. 읽어보고 싶어요~

cyrus 2019-11-02 17:44   좋아요 1 | URL
꼭 읽어보셔요. 저를 놀라게 해준 책입니다. 반전이 정말 궁금하시다면 다른 분의 리뷰를 보셔도 돼요. 그렇지만 반전이 주는 놀라움을 제대로 느끼려면 책을 읽는 게 낫습니다. ^^

붕붕툐툐 2019-11-03 0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요, 저요~ 저도 정신 번쩍 들고 싶어요~ㅎㅎ

cyrus 2019-11-04 18:26   좋아요 0 | URL
책을 처음부터 읽으면 제가 느꼈던 감정을 조금 이해할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