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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 개정판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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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안의 쓰나미에 휩쓸리는 현대인

 

하루 자고 나면 세상 모든 것들이 변하게 되는 이 세상에서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변화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며 그 변화의 방향은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경제가 어려울 때면 지위가 높아지는 사람보다 낮아지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만큼 사회적인 불안도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처럼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그것에 발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은 종종 인생의 낙오자나 실패자로 간주된다. 그래서 현대인은 자신이 혹시 세상의 왕따가 되지 않을까 또는 실패자로 규정되지 않을까 하는 만성적인 불안감에 시달린다. 더군다나 경제 불황, 실업률 증가, 구조 조정 등의 어두운 사회현실은 더욱 더 우리를 불안으로 내몰고 있다. 마치 불안은 삶의 전면에서 우리를 마구 뒤흔들어놓는 거대한 쓰나미와도 같다. 그리고 이처럼 불안이 휩쓸고 간 후에 남는 것이라고는 자괴감과 상실감 밖에 없다.

 

 

 

 '불안'이라는 성가신 불청객 달래기


알랭 드 보통은 더 많은 부와 더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갈망하기 때문에 불안이 야기된다고 분석한다. 사회에서 제시한 성공의 이상에 부응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존엄을 잃고 존중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현재 사회의 사다리보다 낮은 단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걱정 등으로 인해 불안한 것이다. 경제적 부와 사회적인 명성을 얻고자 하는 욕망은 평범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더욱 커진다. 평범한 삶이 모욕적이고, 천박하고, 초라하고, 추하다고 생각할수록 그 삶으로부터 멀어지고자 하는 욕망도 강해진다. 불안은 어쩌면 부와 권력에 안달하는 사람들이 걸리는 '욕망의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비단 드 보통만이 인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현대인이 겪고 있는 불안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들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책들의 대부분은 서점의 '처세술' 코너에 쌓여 있다. 그 책들이 우리에게 일러주는 것은 '삶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는 전략'이다.

 

드 보통은 다르다. 그는 우선 불안을 바라보는 관점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태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삶이라는 전쟁터는 과연 어떠한 곳인가?', '삶은 과연 전쟁이기만 한 것인가?'  드 보통은 우리의 삶에서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불안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를 통해서 이 성가신 불청객을 어떻게 달래주면서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서 조언해준다.

 

 

 

 불안에 대처하는 그들의 자세

 

사회로부터 도태되거나 소외되지 않기 위한 애처로운 불안의 절규와 몸부림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알랭 드 보통은 점점 더 소심해지고 작아지는 우리에게 자신의 불안을 감싸하고 다독일 줄 알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은 남의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예외적인 인물들이며, 사회 밖으로 스스로 걸어 나갈 줄 아는 즐거운 산책자이다.

일찍이 철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모욕이나 비난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이성은 타인의 말과 시선이 실제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타인의 말보다 자신의 이성을 더 신뢰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남의 생각이나 판단을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보헤미안들은 경제적 능력으로 사람의 가치가 매겨지는 현실에 대항함으로써, 세상의 가치를 전복시키고자 한 삶의 혁명가들이었다. 이들은 세상이 외면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몸소 자신의 생활에서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결국 불안에 당당했던 그들은 단순히 경제력이나 물질적 성공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삶의 가치를 스스로 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는 우리가 알고 있던 가치들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와 '불안'을 가둬버린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나보다 성공한 사람에 대한 불쾌감을 잘 표현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남보다 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고,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쓴다. 그리고 이처럼 남들보다 잘 보이려고, 좀 더 우월하게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늘날 현대인을 점점 더 병들게 만든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다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어차피 나는 남과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한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불안감과 마주쳐야 한다. 그런데 알랭 드 보통에 의하면, 인간이 느끼는 불안감의 정도는 자신이 생각하는 준거집단, 바꿔 말하면 세상의 울타리에 한정된다고 한다. 세상에 나름의 울타리를 치고서는 적어도 이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우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 스스로 '불안'이라는 불청객을 불러들이면서도 나가지도 못하게 만드는 폐쇄적인 울타리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불안' 불청객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폐쇄적인 울타리를 만들어 자신의 마음을 가두려고 해서는 안 되거나 그 울타리 밖으로 탈출하는 방법 밖에 없다.  이제까지 우리를 옭아맸던 세상 사람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만들고, 거기에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해야 한다. 비로소 우리는 불안을 삶의 침입자가 아니라 나와 더불어 삶을 꾸려나갈 숙명적인 동반자로서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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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2-02-01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었구나. 이번에 평가단 위시목록에 넣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
나이들면 쓸데없이 걱정이 많아지더라구.
그런데 작가는 걱정과 불안을 같은 의미로 다룬 것도 같네.
그냥 걱정은 생각 안하고 불안만 다룬 것도 같고.
암튼 한번쯤 읽어야할 책인 것 같긴해.

cyrus 2012-02-01 21:01   좋아요 0 | URL
오래 전에 구판으로 읽은 적이 있었는데요,
읽은지 하도 오래되어서 표지만 달라졌을뿐 내용은 똑같은거 같았어요.
가끔씩 잊혀질 때 한 번씩 읽어두면 좋을거 같아요 ^^
 
D에게 보낸 편지 - 어느 사랑의 역사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 옮김 / 학고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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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의 '예술'을 사랑하게 되면 어떤 봉사도 서슴지 않는다'    

- O. 헨리 -

 

 

 

 백년해로 그리고 죽음마저 같이 한 어느 노부부의 이야기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읊은 이백의 <장한가>에는 양귀비가 사랑을 맹세하는 구절이 나온다.     

 

   
 

“하늘에 있을 때는 비익조가 되길 원하오며, 땅에 있을 때는 연리지가 되기를 원하네”  

(在天願作比翼鳥,  在地願爲連理枝)

 
   

 

비익조는 날개가 하나 뿐인 새이다. 두 마리가 합쳐야 비로소 날 수 있기 때문에 역시 연리지처럼 부부의 깊은 애정을 뜻하는 말이다.  두 나무가 각기 자라다가, 나뭇가지가 서로 이어져 한 나무가 된 것을 '연리지'라 한다.   '연리'(連理)라는 말은 처음에는 효성의 뜻으로 쓰였지만, 후대에는 부부간의 깊은 사랑을 표시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요즘 우리의 생활상을 들여다보면 참으로 씁쓸하기만 하다.  


현대인의 사랑에는 깊은 울림이 없다. 목적을 갖고 연애하고 작업으로 사랑을 얻으려는 것이 이제는 현대인의 사랑의 정석인 듯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켤 수 있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는 장정일의 시처럼 쉽게 만나고 가볍게 헤어진다.  그리고 한 번 결실 맺은 사랑은 오래 가지 못한다.  검은머리 파뿌리 될 때 까지 변치 않은 사랑을 다짐 했건만 단지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기는커녕 틀리다고 단언하고 과감하게 돌아서는 성격차이의 이혼율이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기도하다.   '백년해로(百年偕老)'라는 말의 의미와 부합되는 연인 또는 부부를 만나기란 보기 드물어졌다.

부부의 인연을 맺어 한평생을 같이 즐겁게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죽음마저도 한날 한시에 맞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사랑이 만들어낸 숭고함 힘이라면 그 어떤 현실의 장애를 뛰어넘을 수 있는 행동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신좌파의 이론가로서 사회개조와 생태주의의 이념을 추구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사상가 앙드레 고르는 불치병으로 인해 죽음을 앞둔 자신의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을 함으로써 2007년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58년 간의 사랑에 스스로 종지부를 찍었다. 그 때 고르의 나이는 84세, 아내 도린의 나이는 83세였다.  


'유럽에서 가장 날카로운 지성'이라고 사르트르가 평가했을 정도로, '유럽 최고의 지성' 이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그가 왜 길고 긴 사랑의 역사를 동반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마무리 지으려고 했던 것일까? 

 

 

  '지식'보다는 '사랑'을 추구하다  

아무리 앙드레 고르가 사랑하는 부인 도린을 위해서, 그것도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을 받는 지성인이 '자살' 이라는 극단적인 죽음의 방식을 선택한 것에 대해서 우리에게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차이의 입장을 좀 더 깊게 이해해본다면 고르가 부인과의 동반자살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다.    

 

 

젋은 시절의 앙드레 고르와 그의 아내 도린  

 

고르 자신에게는 '앙드레 고르'라는 이름을 유럽에 널리 알려지게 해 준 자신의 저작물이나 그로 인해 얻게 되는 명성 그리고 '사상가'라는 지적인 명함이 단지 자신의 삶을 형성하고 유지하게 만드는 본질 그 이상이 아니었다.   그에게서 본질적인 것, 즉 자신의 삶에서 최고의 가치는 바로 자신의 곁을 지키고 있었던 아내 도린이었다.  인생의 본질적인 가치인 아내를 위해서라면 세상의 모든 지식이나 사상가로서의 명성을 얻기 위한 소원은 잠시 미뤄 둘 수도 있거나 기꺼이 포기할 수도 있는 비본질적인 가치에 불과했다.    

 

 

귀스타브 모로  <에우뤼디케의 무덤을 지키는 오르페우스>  1891년


밤이 되면 가끔 텅 빈 길에서, 황량한 풍경 속에서, 관을 따라 걷고 있는 한 남자의 실루엣을 봅니다. 내가 그 남자입니다. 관 속에 누워 떠나는 것은 당신입니다. 당신을 화장하는 곳에 나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재가 든 납골함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pp 88~89)

  

편지의 마지막 내용은 죽음마저 초월하려는 도린을 향한 고르의 사랑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애써 아내의 부재를 믿으려는 하지 않는 남편의 심정이 무척 가슴 절절하다.  인생의 일부분이나 다름없는, 가장 중요한 본질적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사랑하는 도린을 먼저 보내는 두려움에 고르는 '함께 죽음'이라는 것을 선택했다.     

우리는 둘 다, 한 사람이 죽고 나서 혼자 남아 살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이런 말을 했지요. 혹시라도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도 둘이 함께하자고.  

(pp 89)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은 날,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부부가 죽음을 맞는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죽어서도 끝까지 도린과 함께 하고 싶은 고르의 사랑 앞에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방해요소가 될 수가 없었다.  오직 사랑을 위해서 고르는 주체적인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자신의 곁을 먼저 떠난 연인 에우뤼디케를 만나기 위해서 혼자서 금단의 영역인 저승의 세계로 넘어 온 이승의 오르페우스처럼 말이다.    

  

 

  '사랑'이라는 예술을 위해서 봉사하다 

미국의 소설가 O. 헨리'누구나 자기의 '예술'을 사랑하게 되면 어떤 봉사도 서슴지 않는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의 의미와 부합되는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을 꼽으라면 앙드레 고르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애틋하면서도 그 누구보다 더 뜨거웠던 노부부의 사랑이 만들어 낸 죽음에 대해서는 여전히 수긍하지 못하는 독자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고르가 선택한 방식이 단지 사랑을 추구하기 위한 선택으로서 올바른 정답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고르의 '사랑을 위한 함께 죽음'은 현해탄 한가운데서 투신한 김우진 & 윤심덕이 겪어야했던 상황과는 다르다.   동 서양 두 커플은 사랑의 감정이 계속 이어질 수 없는 극한의 한계에 마주치게 되자 극단적인 방식을 선택했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  그러나 김우진 & 윤심덕은 이루어지지 못하는 사랑에 대한 비관적인 입장에서 '함께 죽음'을 택한 것이라면 고르 & 도린의 '함께 죽음'은 죽어서도 자신들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 오고 인연의 끈을 돈독하게 유지지할 수 있는 오직 자신들을 위한, 긍정적인 입장이다.  

여기서 확실하게 부언을 하자면, 절대로 '사랑을 위한 자살'을 미화하는 입장을 밝히고자 한 것은 아니다.   (내용면에 그런 문제점이 될 여지가 있다면 문제되는 부분을 수정하거나 또는 삭제를 하겠다)     

지금까지 쓴 내용과 앞뒤가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아무리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부재한다고 해서 고통의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 채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은 분명 잘못된 선택의 결과과 될 수 있으며, 개인적으로 '사랑'을 위한 봉사 방식으로 자살을 선택하는 점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이 책을 읽을 때는 사랑을 위한 '동반자살'이라는 현상의 결과보다는 오랫동안 서로의 곁을 지켜주며 희노애락을 함께 한 노부부의 사랑의 감정을 느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 

고르의 편지는 젋은 시절 때의 첫 만남부터 노부부가 되기까지 사랑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편지 내용이 시작되는 처음 부분에는 두 사람이 함께 사랑의 밤을 뜨겁게 보내는 장면을 묘사한 내용이 있다. 은근히 에로틱한 뉘앙스가 묻어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장 레옹 제롬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  1890년경


우리는 서두르지 않았어요.  나는 조심스럽게 당신의 옷을 벗겼습니다. 그러자 현실과 상상이 기적처럼 맞아 떨어져, 난 살아있는 밀로의 비너스 상을 마주하게 됐습니다.  (pp 12) 

 

사랑을 나누었던 일을 회상한 이 장면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아의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실물 크기의 여인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갈라테이아'라는 이름까지 붙여줄 정도로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 결국 비너스의 도움으로 대리석 조각상에 생명이 불어넣게 됨으로써 자신의 소원대로 갈라테이아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다.  

피그말리온의 간절한 소원 끝에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게 되었듯이 고르 역시 몇 번의 데이트 끝에 사랑하는 여자를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 두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의 삶을 빛나게 해준 '예술'은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 수 있는 조형 기술도 아니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지식도 아니었다.   

이들에게 진정한 '예술' 은 곧 '사랑'이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예술을 위해서라면 무식하게 목숨까지 바칠 필요는 없다. 자신의 곁을 언제나 지켜주고 있는 인생의 동반자에게 변함없이 사랑의 감정을 표현해주는 것,  그것이야말로사랑이 유지되기 위한 언제든지 할 수 있는 봉사이며 결국에는 그 어떤 명화(名畵)보다도 아름다운 '백년해로'라는 자신의 인생을 빛나게 하는 위대한 걸작이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걸작' 정도는 아니더라도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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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11-09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작년에 후배가 읽고 인상 깊은 리뷰를 남겨서 살려구 하다가 다른 책 때문에 밀려서 못 산건데, 이 책에 대한 리뷰를 사이러스님 서재에서 볼 줄은 몰랐네요~ㅎ 이 책이 괜찮긴 괜찮나봐요~~^^

아, 후배 구슬려서 내 책 하나하고 바꿔야 겠당~~ㅎㅎ

cyrus 2011-11-10 13:38   좋아요 0 | URL
네, 저는 이 책 좋았어요. 예전에 다른 서재 이웃분들이 쓴 리뷰를 보면서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랑의 감정을 읊조리는 듯한 편지 속 몇 몇 구절이
너무나 좋았어요 ^^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 - 장영희가 남긴 문학의 향기
장영희 지음, 장지원 그림 / 샘터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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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말 분위기 나는 연말

올해 2010년도 이제 얼마 안 남았다. 12월 1일이 된 후부터 슬슬 주위 사람들의 입에서는 ' 연말 잘 보네세요. ' 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다.  부모님이 주로 다니시는 은행에서는 벌써 부모님 폰으로 연말 인사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부모님과 동생 이름으로 가입된 보험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 XXX님, 건강하고 즐거운 연말 보내시고 2010년 마무리 잘 하세요. '  

아직 내 휴대폰에는 연말 인사 문자 메시지가 오지 않았다. 친구 녀석들은 평소에 자주 만나고 연락을 해서 그런지 아직 연말 인사 문자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 12월 31일이 되면 나에게 연말 인사 문자 보내겠지 하고 생각하지만, 정작 나에게 오는 친구들의 연말 인사 문자는 많아야 5개다. 몇년 전에 한 번은, 대학교 과 선후배, 동기들에게 거하게, 아니 무식하게(?) 단체 연말 인사 문자를 보낸 적이 있었다. 보낸 사람들의 수만 해도 무려 20명 넘었는데 고작 답변 인사해준 사람의 수는 8명이다.  사실, 단체 문자 보내기전에는 20명 넘는 사람들이 답변 문자해주길 바라지는 않았다.  평소의 예의 바른 이미지(?)를 고수하기 위해서 보낸거 뿐이다.  오히려 모든 이들이 한꺼번에 답변 문자 오게 된다면 완전 문자 폭탄 수준이 될 것이다.  연말 인사 혹은 연말 인사 문자 답변을 안 해주는 이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은 새벽중에 보내는 연말 인사 문자이다. 인간의 약점을 간파할줄 아는, 잔머리 잘 굴리고 약삭 빠른 성격의 친구들이 간혹 보내기도 한다.  문자 메시지 도착 소리에 잠을 깬 적이 한 두번이 아니어서, 12월 31일날에 잠을 자게 되면 항상 휴대폰을 꺼둔다.  그리고 새벽에 보내는 친구들의 연말 인사 문자와 비슷하면서 역시 짜증나게 하는 것은 생전 모르는 번호가 문자 보낼 때이다.  친구면 당장 전화 걸어서 쌍욕 날려도 무방하겠지만, 낯선 번호가 문자 오면 당황할 수 밖에 없다. 잠결에 문자로 잘못 보냈다라고 폰을 만지작거릴수도 없고, 그렇다고 친구처럼 낯선 사람한테 욕을 할 수도 없을테니 말이다.  결국에는 연말에만 잠시 폰을 끄고 잠을 자는데 특효약인거 같다. 

휴대폰으로 연말 인사 문자 메시지를 주구창창 받는 것도 괴롭지만, 그래도 연말이 되면 사람의 감정이 즐거워지게 되고, 내년에 대한 설레임 때문에 기분이 들뜬 것은 부정할 수는 없다. 연말에는 각종 망년회를 통해 한 해동안 마음 속에 쌓아두었던 스트레스들을 어느 정도 날릴 수 있다는 점에서 좋고(물론 너무 과하게 술을 마시면 신체뿐만 아니라 마음도 피곤해진다. 이러니 연말이 되면 망년회라는 소리만 들어도 기피하는 사람들 있기 마련이다)  12월에는 크리스마스라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기념일도 있다. (혼자 사는 솔로들에게는 크리스마스 역시 그닥 반갑지 않은 날일 것이다)  이렇듯, 한 해의 기억들을 마무리하고 내년에 대한 기대감에 가득 차야지 정말 연말 분위기가 난다.   

하지만, 이번 해는 그렇게 즐겁고 훈훈한 연말 분위기가 나지 않을 것이다. 며칠 전에 발생한 연평도 습격 사건으로 인해서 국민들의 마음 속에는 북한 제2의 도발 그리고 전면전에 대한 불안감으로 가득하기만 하다. 연평도에서 살았던 주민들은 그 때의 공포와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으로 지금도 좁디 좁은 찜찔방에서 지내고 있다. 

2010년이 끝나는 시점에만 사람들의 감정이 어두웠던 것이 아니다.  올해 초에는 용산 참사 사건으로 인해서 권력 앞에서 굴복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모습을 우리는 TV로 목도했으며 해결되지 않은 4대강 사업 문제 때문에 올해 내내 대한민국은 소란스러웠다. 2010년에는 남아공 월드컵 그리고 최근에 성황리에 마친 광저우 아시안게임으로 온 국민이 즐겁고 웃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TV와 신문에 비춰진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잔혹한 범죄들, 폭력으로 가득한 학교 교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절규는 잠깐 사그러졌던 대한민국 특유의 우울을 또 다시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 요즘 연말 분위기가 아니라 종말 분위기가 나는 듯해요. '  

내가 주로 들리는 인터넷 카페의 어느 회원분이 남긴 댓글 한 마디가 올해 연말 분위기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맞는 말이기는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만 하다.

  

 

  기분이 잡치다거나 우울할 때 읽게 되는 글

요즘 같은 기분이 잡치다거나 우울할 때는 나는 항상 책을 읽는다.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그나마 좋은 위안처이면서도 간혹 웃음을 유발하게 만드는 개그맨 행세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이유보다 독서를 더 좋아하게 만드는 것은 책 속 저자의 목소리가 나의 우울하고 상처받은 감정들을 토닥거릴수 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저자의 글로부터 위안을 받게 되면 잠시나마 흐트려져 있던 감정들을 추스릴 수 있게 된다. 특히 나의 감정을 쉽게 다스리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 그리고 그 사람의 글이 바로 故 장영희 교수의 글이다.   

지금까지 살면서 교수가 번역한 영미문학 작품들을 제외하고는 생전에 썼던 칼럼을 모은 에세이집과 단상을 곁들인 영문학 시집들을 다 읽어봤다.  하루하루가 고단하기만 했던 군대 일병 시절에 장영희 교수의 첫 에세이집 <내 생애 단 한번>을 접하면서 그녀의 글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첫만남부터 나의 코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때부터 긍정적인 마음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부터 그녀의 글이 무척 좋았다. 

작년에 그녀가 세상을 떠나게 됨으로써 유작이 된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읽었을 때는 이제 맑디 맑은 그녀의 글을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워었는데, 최근에 나온 공식적으로 마지막 작품인 에세이집 <이 아침 축복처럼 꽃비가>라는 책을 읽게 되어 반가우면서도 또 한 번 '마지막' 이라는 감정이 앞선 나머지 시무룩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책 제목처럼 그녀의 글은 나에게 ' 축복과 같은 꽃비' 가 되어 왔다. 마침 어두운 분위기의 연말에 때마침 그녀의 글을 읽게 되나디 정말 축복이다.  

다행히, 이번 글은 전작의 에세이들처럼 불편한 몸을 이끌고 살아가야하는 삶에 대한 자조적인 감정들이 보이지 않아서 좋았다. 간간히 몇 몇 문장 속에서 은근히 그녀의 어두운 면이 보이기도 했지만  '희망' , '사랑' ,  '웃음' 과 같은 그녀의 글에서 항상 등장하는, 긍정적인 단어들이 많은 것은 여전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소개한 영미 시들 역시 읽는 이의 감성을 자극해주고 있었다. 

    

 

  우리 스스로 숨겨놓았던 눈물 

이번 에세이집에 수록된 모든 글과 시는 다 좋았지만, 그 중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에세이 한 편은 ' 숨겨놓은 눈물을 찾으세요 ' 라는 이름의 글이었다.  장 교수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숨겨놓았던 눈물을 찾는 것이 척박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의 요지는 다른 에세이의 내용과 비교하면 밀리는 감이 있고 읽는 사람마다 글에 대한 감정이 제각각이듯이 어떤 이들에게는 글이 크게 와닿지 않을 수 있겠다. 

하지만 나는 이 짦막한 글을 읽으면서 2010년을 살아가면서 그동안 눈물을 숨겨두었던 감정의 자세가 슬그머니 떠올려졌다.  감정이 뒤흔들 정도로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들과 책들을 보면서 눈물을 한 번 흘린 적이 있었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머릿속에는 눈으로 입력된 장면과 내용들이 오롯이 기억이 났었지만 정작 그 순간에 내가 눈물을 흘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니, 눈물을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것이다.   

 

 

  눈물 흘릴 줄 아는 방법을 모르는 채 살고 있는 현대인들

올해 정말 기억에 남을 감동의 장면은 여름에 온 국민을 하모니의 감동으로 느끼게 해준 '남자의 자격 - 하모니 편' 이었다.  각기 다른 성격과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면서 급조적으로 탄생된 오합지졸 합창단이 처음으로 합창 경연장에서 내는 목소리는 모든 국민들과 관중, 그리고 이들을 지도하는 박칼린 씨마저 눈물을 흘리게 할 정도로 감동의 결정체였다.  

남자의 자격 합창단 다음으로 눈물이 나올만한 장면은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비인기 종목이나 다름 없었던 인라인스케이트 선수 우효숙 씨의 금메달 시상식 장면이었다. 낯선 경기장이 있는 중국에 있는 동안 고국에 있는 몸이 불편한 친할머니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이 앞섰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할머니를 위해서 꼭 금메달을 따야겠다는 마음도 굳게 먹었다.  결국, 그토록 바라던 금메달을 따게 되었지만, 기쁨은 잠시였다. 경기가 끝나고 난 뒤에 감독이 조심스럽게 우 선수에게 비보를 전해주었다. 한국에 계시던 할머니가 며칠 전에 세상을 떠나셨다고.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후 메달 시상대에 오른 우 선수의 얼굴에는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단순히 비인기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는 기쁨의 눈물이 아닌,  사랑하는 할머니에게 금메달을 걸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애통의 눈물이었다.   

이런 장면들은 우리들의 눈가를 촉촉히 할 정도로 가슴 뭉클한 사연이 있기 마련인데 이들의 감정에 동화되면서 나는 그들처럼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아니, 흘리지 못했다.  왜 눈물을 흘리지 못했던 것일까?   

아마도 남자는 세 번 울어야한다는, 깊게 박혀있는 사회적인 시선 탓도 있지만 요즘 감정이 메마른 현대인들의 마음에는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방법이 잊혀지고 있었다.   

우리 주변 세상이 너무 어둡고 우울하다보니 작은 일에도 쉽게 감동과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사이버 공간 안에서 타인과의 만남 역시 우리들의 감정을 메마르게 하고 있는 요인이다.  우리는 사이버 공간에서 감정의 표현을 나타내는 이모티콘을 자주 사용한다. 

  " 이 사진 속 장면이 슬퍼요. ㅜㅜ ' , ' 멀쩡하던 그 분이 갑자기 돌아가시다니,, ㅠ_ㅠ "  

'슬픔' 이라는 감정을 우리는 눈물 흘리는 장면의 이모티콘으로 표현한다. 서로 얼굴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나기 위한 방법으로 이모티콘이 유일하다.  하지만, 아무리 댓글에서 'ㅠㅠ' 를 남발한다고 해도 타인은 내가 진심으로 슬픈 감정을 갖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결국에는 자신의 감정을 겉으로나마 드러내는 언어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보다 간결하면서도 쓰기 편한 이모티콘의 유혹에 벗어나지 못한 채 언어 껍데기들을 사용하고 있다. (물론 나 역시 이모티콘사용이 편하다는 이점 때문에 이모티콘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사이버 공간에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나지 못한다면 ' 감정이 눈꼽만큼도 없는 ' 인간으로 보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아바타' 과 자신의 실명이 아닌 '닉네임' 을 사용하면서도 우리는 사이버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든 감정을 표출하려는 '인간' 으로 보이려고 한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자

  '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부(富)이다. '

눈물에 관한 에세이의 마무리를 프랑스의 소설가 생 텍쥐페리의 명언으로 마무리하고 있다. 눈물은 꼭 감정적으로 나약한 사람들만 흘리는 것이 아니다. 또 무조건 슬플 때나 화가 날 때 나오는 액체도 아니다.  나보다 못하고 약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영화 속 장면이나 책 속 문장을 보면서 생기는 감동적인 마음을 통해 눈물이 나오기도 한다.  아직도 눈물 흘리는 모습을 남들에게도 보이기 싫다면 혼자서라도 눈물을 흘려보자.  눈물은 사람의 우울한 감정을 치유할 수 있는 약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영화를 본다거나 책을 읽을 때 눈물샘을 건드리는 순간이 온다면 눈물샘이 하는대로 내버려두자. 그러면 두 눈에 눈물이 자연스럽게 흐르게 될 것이다.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을 가짐으로써 지금과 같은 암울하고 어두운 세상 속에서 감정이 메마르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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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0-12-04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이러스님. 따뜻한 글이예요. 너무 감사드려요.
사이버 공간도 결국 사람 사는 공간이라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페르조나(가면)이 훨씬 강화된 공간이기도 하구요. 그게 매력이기도 하죠.
조금 더 자신감을 가지고, 포장된 나로서 살아갈 기회의 제공이라는거.

연말. 사랑의 열매의 단란주점 사건으로 인해
뚝 떨어진 기부 문화 기온을 보면서, 정말 안타까왔습니다.
올 연말은 이래저래....... 조금은 서글픕니다. 그래도
우리 멋진 겨울 시작을 맞이하기 위해 힘을 내볼까요, 화이팅!

cyrus 2010-12-04 20:04   좋아요 0 | URL
많이 바쁘실텐데 제 서재에 들려주시네요.
마고님도 얼마 남지 않은 연말에는 서글픔을 훌훌 털어버리고
웃음으로 마무리되시길 바라요.

stella.K 2010-12-05 0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딴 얘기일지는 모르겠는데, 안평도 사건을 보면서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그런데, 연평도 주민들 전부는 아니지만 어떤 사람은 독기가 서려있더군요.
그게 더 마음을 쓸어내렸습니다. 어렵기는 다 같이 어려운데
사람들 저마다 어쩌면 이렇게 반응이 다를까 싶더군요.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은데, 한다면 나라겠죠.
근데 나라는 너무 거창하고 손에 잡히는 것도 아니고...등등.
사는 게 점점 팍팍해서 큰 일이어요.

장영희 교수의 책들은 정말 좋죠.
저는 몇 년 전 모 신문에 칼럼 쓰신 거 보면서 정말 미문이구나 했어요.
그걸 책으로 묶은 <문학의 숲을 거닐다> 아직도 제 책상 책꽂이에 꽂혀있습니다.
다른 책도 읽어봐야 할텐데 말이죠.^^

cyrus 2010-12-05 13:48   좋아요 0 | URL
저도 갑작스런 안평도 사건으로 인해 마을에 사는 민간인과
군인이 희생되었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하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니
안타까웠습니다, 거기에다가 재벌 2세의 폭력 사태 등
자꾸 눈쌀을 찌푸리게하는 사건들이 연달이 터지니 나라 분위기가
어수선하네요. 내년에는 사회 분위기가 좋게 반전되기를 바랄뿐이네요^^


2010-12-05 15: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 오스카 - 어느 평범한 고양이의 아주 특별한 능력
데이비드 도사 지음, 이지혜 옮김 / 이레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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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희망을 노래하다 
 

군인들이 주말을 살아가는데 유일한 낙이라면 생활관에서 동기나 선임병, 후임병들이  

함께 TV보는 것뿐이다. 가끔 연병장에 나가서 전투 축구를 하기는 하지만,  

너무 덥다거나 추우면 생활관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TV만 보는 것이다.  

주말에 군인들의 눈을 사로잡는 방송 프로그램이라면 드라마 재방송, 음악 프로그램,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많이 본다. 특히 음악 프로그램이라면 군인들은 사족을 못 쓴다.  

부대 특성상 여자를 보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이다. 그래서 오직 여자를 볼 수 있는 것이  

TV뿐이다. 입대 전에는 아이돌 가수에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군인이 되고나면 TV 속의  

아름다운 미모의 아이돌 여가수에 집중하게 된다. 지금으로부터 6개월 전, 병장 시절  

때였다. 황금 같은 마지막 주말인 일요일위 4시가 되면 생활관에 분대원들은 TV에  

집중한다. 음악 프로그램을 보기 위해서였다. 무대 위에서 가수들은 화려한 의상을  

입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면서 춤과 노래를 불렀다. 방송 오프닝부터 흥겨운 무대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음악 프로그램 MC가 무려 5년 만에 컴백한 가수가 등장한다고  

소개하였다. 나는 과연 누구 나올지 마음속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컴백 가수가 틴틴파이브였다. 나와 분대원들은 한순간 맥이 빠졌다.  

내 동기는 잠깐 다른 채널로 돌리자면서 말하기도 하였다. 결국 틴틴파이브의 컴백  

무대는 보지 못했다. 틴틴파이브에 대해서 좋거나 싫은 감정은 없었지만 원래 한 번  

보는 채널은 다른 데로 돌리지 않는 습관이 있어서 다른 채널로 돌리기는 싫었다.  

하지만 생활관 내 분위기 상 독단적으로 계속 보자고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무대 등장 장면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모두 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채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이제 젊음의 잔치를 마무리하고 있는 다섯 명의 멤버들을.....

시간이 흘러 5월 초에 전역을 하였고, 그 달 중순쯤에 ‘휴먼다큐, 사랑’이라는  

TV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잘 안 보지는 않았지만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다. 휴먼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불치병 환자들이거나 우리보다 어려운 상황을 겪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도 우리 가까이에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내가 보게 된 프로그램에는 틴틴파이브의 멤버인  

이동우 씨가 나온 것이었다. 아니, 4개월 전에 음악 프로그램에 출연했던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나온 것일까? 그런데 막상 프로그램을 보게 되니  

이동우 씨의 사연은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웠다.
희귀병으로 인해서 두 눈의 시력이 상실되어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더욱 더 안타까웠던 것은 이동우 씨의 증세는 신혼 때부터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시력은 잃어가고, 그 사이에 태어난 5살 난 유일한  

딸의 얼굴은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동우 씨는 절망하지 않았다.  

절망 속에 희망을 찾게 해준 것은 가족과 틴틴파이브 동료들이었다. 부인은 정상 생활이  

불가능한 남편을 포기하지 않았다. 부인에게는 장애인 남편이 아닌 그냥 사랑하는  

남편이었다. 그리고 틴틴파이브 동료들은 10여 년 간의 우정을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병이 치유될 수 있게 직접 나서서 도와주고, 치료 차 미국까지 그와 동행을  

하였다. 그리고 이동우 씨와 같은 환자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고자 틴틴파이브는  

5년 만에 컴백을 하였다.  

 

더 감동적인 장면은 이들의 컴백 무대에 오르기 전에 있었던  일이었다.  

오랜만에 무대를 선 이동우 씨는 떨린 마음에 자신의 선글라스가 유독  튀지 않느냐고  

동료들에게 농담조로 던졌다. 그의 농담 속에는 오랜만에 서는 무대에 대한 긴장감과 

자신이 멋진 무대의 티가 될 것 같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홍록기 씨가  

나머지 멤버들도 선글라스를 끼고 무대에 오르자고  제안하였다.  

다섯 멤버들 모두 선글라스를 끼면 한껏 젊은 모습으로 젊은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점도 있다면서 무대 오르기 전에 컨셉을 급수정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5년 만의 우정 어린 무대는 성공적으로 마치게 되었다. 4개월 전 내가  

봤던  그들의 무대 뒤에는 동료들에게 희망을 주는 끈끈한 우정이 있었던 것이었다.  

 

 

 호스피스 고양이 오스카 
 

<고양이 오스카>를 읽으면서 불현듯이 이동우 씨의 가족과 틴틴파이브 멤버들이  

떠올렸다. 오스카라는 고양이도 혼자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으면서 삶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노인 환자들의 곁에 지키는 특이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특히 고독과 절망의  

삶에 빠져 있는 치매 노인 환자들에게는 오스카 덕분에 조금이나마 삶의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고양이가 사람 곁에 있는 것이 뭐가 대수냐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오스카는 특별하였다. 자신이 지키고 있는 노인 주위에 낯선 사람이나 주치의가  

접근하면 자신의 침범 구역을 넘어오는 적들에게 공격 의사를 보이는 것처럼  

으르렁거린다. 그리고 자신이 지키던 환자가 죽어서 영안실에 옮길 때까지 절대로  

병실을 떠나지 않는다.

이동우 씨의 가족과 틴틴파이브 동료들이 이동우 씨의 곁에 항상 있는 것은
그들을 이어주고 있던 사랑과 우정의 교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오스카는 환자들이 숨을 멎을 때까지 그들의 곁을 지켜주는 것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될까? 어쩌면 오스카의 행동을 과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무의미하기도  

하다. 그리고 오스카가 단지 똑똑한 지능을 가진 고양이라서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도  

아니다. 아마도 오스카와 환자들 사이의 특별한 교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마지막 생의 한 순간을 오스카와 함께 했던 환자들은 생전에 그 때가 제일 편안하고  

행복했다고 말하곤 하였다. 비록 오스카는 말 못하는 동물이지만 절망에 빠진 환자들의
고통을 읽고 있었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도 환자들에게 고통을 잊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일종의 ‘호스피스’ 역할을 자처한 것이다. 
 

 

 만약에 내가 불치병에 걸린다면

이 책을 덮고 난 뒤, 스스로 가정을 해보았다.
만약 내가 불치병에 걸렸다거나, 혹은 병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게 된다면  

내 곁에 끝까지 머물러 줄 사람이 과연 몇 명일까? 심지어 한 순간의 불행으로  

장애인이 된다면 나와 가족들의 삶은 어떻게 변하게 될까? 그리고 만약 내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이 불행한 상황에 처해진다면 나는 끝까지 지켜줄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런 질문을 받게 된다면 당연히 내가 아프면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어줄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부모님이 치매에 걸린다면 끝까지 병 수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천만에 말씀. 말이야 쉬울 뿐이다. 우리는 그런 비극적 상황 속에서 끝까지 병든 가족을
지켜주는 드라마 속의 착한 주인공이 아니다. 드라마에도 그런 착한 사람만 나오는 것이  

아니듯이 가끔 병든 가족을 버리고 떠나는 무심한 사람들도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가끔 뉴스에서는 불치병에 걸렸거나 불편한 몸으로 홀로 지낸 사람들의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온다. 외로움과 가난 속에 살다가 쓸쓸히 혼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들 곁에는 가족이나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 당사자가
불치병이나 장애인 판정이 내려진 후에 가족과 친구들이 하나씩 떠나간다.

그들의 행동은 불행한 상황 앞에서 쉽게 변하는 인간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비록 그들의 행동은 비난받아야 마땅하지만 그들이 떠난 이유도 생각해봐야 한다.
자신의 가족 중 한 사람이 불치병이나 장애인이 된다면 나머지 가족들의 심정은
억장이 무너진다. 그리고 그 이후로부터 제대로 된 가정생활은 불가능해진다.
<고양이 오스카>의 저자는 책의 에필로그에서 자신의 장모님이 치매에 걸린 사실을
고백했다. 저자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운명은 예측 불가능하다.  
남의 불행한 이야기가 곧 우리 이야기가 될 수 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

이 책이 환자 부양과 관련된 사회적인 실태를 자세하게 그려져 있어서
특별한 고양이의 감동적인 에피소드를 예상했던 독자들은 당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환자들의 곁을 지키는 고양이 오스카의 특별한 사건들만  

이야기하여 독자들에게 고양이에 대한 호기심을 자아내려는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살아가는 치매 부양가족들의 삶과 호스피스 제도의  

현 실태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도 언급되고 있다.
그래서 책 분량은 가볍지만 읽기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눈에서 본
병원 안에서의 현실들은 외면해서는 안 된다. 저자처럼 언젠가는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 중에 한 사람이라도 치매에 걸리게 되면 부양해야 하는  

부담감으로 인해서 수양 가족들도 무력감과 우울증이 발생하므로 결국에는 치매에  

걸린 가족을 외면하게 된다. 책의 에필로그에는 치매 가족을 위한 대처 방안들이  

소개되고 있다. 힘들지만 사랑의 감정을 가지고 치매 가족 곁을 지켜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는 말한다. 일단 치매에 걸리게 되면 생활 속에서 기본적으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므로, 가족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치매 가족이  

조금이라도 기억력이 호전되더라도 칭찬을 하되, 치매는 완전히 치유되지 않음을  

인지하고 꾸준히 부양을 해야 한다.

책 중간에 호스피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반적으로 호스피스라고 하면
죽음을 앞둔 환자의 곁을 지키는 봉사자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치매 환자를 위한  

호스피스는 아직은 미흡한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 인구가 고령화되고 있는 만큼  

치매 환자들도 늘 것이다. 암과 같은 불치병 환자 전문 호스피스를 양성하는 것도  

좋다지만, 치매 환자 전문 호스피스의 양성도 시급하다.  단순히 치매 환자만 

돌보는 것이 아니라 치매 환자 부양가족들의 정신적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조언 및 상담가 역할을 하게 된다면 부양가족들의 부담감이 줄어들 수 잇을 것이다.

  

 

 진심으로 사랑하라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네 몫으로 주어진 사물들에 적응하고, 운명이 정해준  

사람들을 사랑하되 진심으로 사랑하라.’고 말했다. 만약에 나 자신이나 가족 중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지나간 삶에 대한 후회가 생길 것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치매 노인 환자들을 말한다. 삶이 힘들더라도 그것은 단지 일부분 일뿐이며  

항상 삶을 즐기고 주위 가족들을 사랑하라고. 아우렐리우스나 책 속의 치매 노인  

환자들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이 마음속으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우리의 인생은 생각보다 길면서도 막상 세월이 흐르게 되다보면 짧다.  

특히나 죽음의 신이 갑자기 우리를 찾아올 수가 있다. 그러면 죽는 사람 입장에서는 
무척 허무할 것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곁에 있는 가족이나 우정을 같이 했던  

친구들에게 사랑의 감정을 전달해보자. 사랑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는 게 어려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죽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유언이 고작 ‘사랑한다’고 말하면  

지금까지 산 것이 아깝지 않은가. 사랑한다는 말은 못해도 사랑의 감정을 담은 조그만  

선물이나 편지글을 써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 눈앞에 펼쳐진 삶이  

즐거워진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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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지음 / 샘터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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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오늘 장영희 교수님의 1주기 추모행사가 생전 강단에 서던 서강대에서 개최하였다.
교수님의 유족이 주관하고 지인들의 참석하여 추모글을 낭독하였다.
이번 행사를 주최함으로써 어떤 삶을 살더라도 희망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고인의 메시지를 되새길 수 있는 시간이었다.

오늘 아침 뉴스에서 장 교수님의 추모행사 소식을 접하면서
잡을래야 잡을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이 주는 경외감의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갑자기 예전의 시간이 떠올렸다.

작년 4월, 우스갯소리로 죽도록 일만 해야 한다는 일병 시절에  

장 교수님의 책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생활관에는 3칸짜리 조그만 책장이 있었는데 비록 많은 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책장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은 군사 교본과 병사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는
잡지와 음악 CD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입대 후 제대로 된 책을 읽어보지 못한 나는  물 만난 고기처럼

책장에 눈에 띈 이 책을 집어 들어 읽게 되었다.
그 때는 ‘장영희’ 이름 석 자의 지은이에 대해 잘 몰랐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가 중학교 때 배운 영어 교과서의 집필에 참여한  

유명한 분이었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독자들의 눈물을 훔쳤다는 사실을 몰랐다.   

   

  

마음에 영양분을 주는 글

 

교수님의 에세이들은 접했을 때 여성 특유의 섬세한 문장이 쉽게 읽혀졌고
자신의 투병 생활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은 점에서  

왜 이 책이 많은 독자들이 읽게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글을 통해 교수님의 인간적인 면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고 공감을 느꼈다.
교수님의 글 중에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을 후회하고 반성하는 내용이 있다.
어느 날, 교수님에게 편지 한 통이 왔는데 30년 전 초등학생 시절에  

술집 주인의 딸이라고 해서 친하기를 꺼려했던
친구의 이름이 편지 주소에 적혀 있는 것이다.
교수님은 그 편지의 이름을 보자마자 마음 한 구석에 지워져 있을 줄 알았던
친구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이 30년 후에 다시 찾아온 것이다.
비록 그 친구와의 재회 내용은 없었지만 (이 글을 집필 이후에 만났을 수도 있겠다)
글로나마 친구에게 미안함을 나타냈다. 
 

이 글뿐만 아니라 책에 수록되어 있는 교수님의 에세이들을 읽으면
군 생활로 지친 내 마음에 영양분을 얻은 거 같았다.
영양분을 얻은 힘으로 앞으로 남은 군 생활을 보다 긍정적으로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1달 후, 교수님의 사망 소식이 뉴스에 전파되었다.  

   

 

웃음으로 가려진 눈물 

 

사람이 부정적인 감정, 후회를 많이 느끼게 되면 마음의 정신적 스트레스가  

자신도 모르게 신체가 쇠약해지고 병이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교수님의 글이 항상 밝고 순수한 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교수님의 몇 몇 에세이들을 보게 되면 신체 불구자로서의 삶과 투병 생활에 대해
잠시 자괴심과 절망감에 시달린 적도 있고, 우울감에 빠졌다는 내용도 있다.
고골의 글은 ‘눈물로 가려진 웃음’이라는데
교수님의 글은 ‘웃음으로 가려진 눈물’이었다.
교수님은 글을 통해 의학적으로 치유 불가능한 자신의 부정적인 마음들을
자기 자신 스스로 치유하기 위해서 마음 속에서도 투병 중이었던 것이다.
힘든 투병의 휴유증이 교수님의 수명을 단축하게 만들었을까?
조금씩 병들어 있는 마음을 치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님은 ‘불꽃같이’ 떠나버렸다.

교수님 부고 이후 다시 이 책을 읽었다. 
책에 ‘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한 마디’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내용은 교수님이 자신이 죽었다는 가상 설정 하에  

무슨 유언을 남기고 갈 것인지 고민하는 것이다.
처음 읽었을 때 몰랐었는데 이 글에 교수님이 멋진 유언을 남기셨을 거라는  

기대감에 읽어나갔다.
하지만 교수님은 얄밉게(?) 유언 같지 유언으로 이 글을 마무리지었다.
교수님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말 하지 말고 살아있을 때 하고 싶은 말을 하란다.
하긴 이 글을 쓰고 있을 때까지만 해도 죽음이 자신 코 앞에 있었다는 것을  

느껴지지 못했을 것이다.
마지막 그 구절을 읽으면서 교수님의 유머에 웃음을 머금었지만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책에 남긴 가상 유언이  

실제로 되어버린 것만 같아 슬펐다.
두 번째로 교수님의 글을 읽게 되어 ‘웃음으로 가려진 눈물’을 또 한 번 느꼈다.
    

 

때론 아프게, 때론 불꽃같이 

 

교수님의 삶은 이 책의 부제처럼 ‘때론 아프게, 때론 불꽃같이’ 살다 갔다.
교수님이 처음 쓰고 출판한 처녀작이 유언처럼 보이는 것은 나뿐일까? 
책 앞표지에 있는 불나방이 꼭 교수님을 상징하는 거 같다.  

(누구든지 이 책 표지 디자인을 보면 나비라고 생각하지만)

하늘을 훨훨 날기 위해 온갖 성장통을 감수하면서
자라나지만 결국 불꽃을 향해 뛰어들어 타버리는 것처럼.....
먼저 떠난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힘찬 날갯짓을 하면서  

저 멀리 하늘로 날아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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