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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 - 도정일 산문집 도정일 문학선 1
도정일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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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rologue : 쓰잘데없이 고귀한 그들의 선물

 

가난한 부부에게도 크리스마스 이브는 축복하고 싶은 날이다. 그러나 고작 1달러 87센트를 가진 델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편 짐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백금 시곗줄을 사주고 싶은데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어떻게든 시곗줄을 마련할 수 있는 돈을 구하기 위해서 길고 탐스런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른다. 대신 짐에게 머리를 잘랐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어렵사리 백금 시곗줄을 구입했지만 델러는 짧아진 자신의 머리 때문에 짐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게 될까봐 애를 태운다.

 

드디어 짐이 돌아오고 그는 델러의 짧아진 머리를 보면서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럴 수가! 짐은 델러가 무척 갖고 싶었던 머리빗 세트를 선물로 사온 것이다. 자신이 받는 주급으로도 살 수 없는 값비싼 머리빗이다. 그러나 머리빗을 꽂을 수 있는 머리카락이 없다니. 애써 미소를 짓는 델러는 머리는 금방 자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마련한 선물을 짐에게 보여줬다. 짐은 자신의 머리카락을 팔고 시곗줄을 산 델러의 마음에 감동받았다.

 

"델. 우리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한동안 어디에다 간직하도록 해요. 지금 당장 쓰기에는 너무 훌륭한 것 같소. 나는 당신의 빗을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시계를 팔아버렸다오."

 

아마도 두 사람은 그날 밤 세상에 어떤 부부보다 행복했을 것이다. 서로에게 선물하기 위해 가장 소중한 것을 판 것을 알고는 깊은 사랑을 확인했으니까, 선물은 상대방을 향한 고마움의 징표이다. 받는 이에 대한 배려가 핵심이다. 따라서 가격보다는 물건에 담기는 의미가 중요하다. 짐과 델러가 서로에게 받은 선물은 당장 쓸 수가 없다. 그렇지만 부부 간의 진한 사랑과 희생과 희망을 확인할 수 있는 시곗줄과 머리빗은 쓰잘데없어 보이지만 고귀한 선물이다.

 

 


 무엇과도 비견될 수 있는 고귀한 것들

 

지금까지 살면서 쓰잘데없어 보이지만 고귀한 것을 하나라도 가진 적이 있던가? 지금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아주 어린 시절 우리는 소중하게 여긴 보물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친구와 구슬치기에서 얻은 알록달록 색깔 구슬들 아니면 산타 할아버지가 새벽에 몰래 집에 들어와 양말에 선물을 놓고 간 것. 비록 그 선물이 산타 할아버지가 준 것은 아니었지만 순수했던 시절 산타 할아버지가 준 진짜 선물이라고 생각해 애지중지 여긴 적이 있었다. 어릴 적 나에겐 보물 상자가 있었다. 아끼던 상자를 가지고 이사를 할 때면, 작은 상자 안에 소중한 물건들을 더 많이 넣으려고 물건들을 넣었다 뺐다 하던 기억이 난다.

 

우리 마음속 상자 안에 재물과 욕심과 사랑이 함께 들어 있다면, 그 상자 안에 재물과 욕심을 채워갈수록 사랑이 들어갈 자리는 좁아질 것이고, 상자 안에서 재물과 욕심을 덜어내면 덜어낼수록 우리 마음속 상자는 따뜻한 사랑만으로 충만해져갈 것이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소중한 것 중의 하나이다.

 

오늘 나의 보물상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나? 욕심과 사랑 중에 무엇으로 충만한 사람이 행복할까? 그리고 무엇으로 충만한 사람이 오늘 하루 외로움과 절망 속에서 살아갈까?

 

너무나 여유 없이 앞만 보며 메마른 길을 달려온 삶 속에서 이제는 행복을 찾아야 할 시간이다. 그래서 내 마음속 보물 상자에서 욕심과 재물은 조금 덜어내고 사랑과 행복을 좀 더 채워야 한다. 보물 상자에 채울 수 있는 사랑과 행복은 세상이 쓰잘데없다고 여기는 것일 수도 있고, 그 속에 숨어 있을 수 있다. 어린 시절 소풍에 가면 즐거웠던 보물찾기 게임을 떠올려 보라. 그러면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소중한 보물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찾기 힘들다면 도정일 교수의 산문집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을 읽어보면 좋다. 제목만 봐도 책 속에 우리가 찾아야 할 고귀한 것들이 목록처럼 나열되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책의 저자는 이 책 속에 목록 같은 것이 없다고 말한다. 남의 목록에 의존해서 찾는 것보다는 독자와 자신이 앞으로 계속 찾고 만드는 것이 더 좋다. 그것은 자발적인 삶을 위한 임무이다. 우리가 살면서 잊고 있던 삶의 소중함을 느껴보고, 스스로 찾아보고, 자신만의 목록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기억해야 한다. 한 번 뿐인 삶이 마감할 때까지 절대로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결국 소중한 것의 목록을 만든다는 것은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놀이 방식이다. 이 책에서 발견한 나름 고귀한 것을 두 개만 소개해본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 #1 : ‘너는 누구인가’, 자기 인식의 질문

 

일단 내가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지 스스로 자문해야 한다. 질문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해서 알아보는 것도 괜찮다. 그런데 우리는 나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질문하는 방법을 잊었다. 그냥 간단하게 말 한 마디만 하면 되는 것을 우리는 왜 질문하기를 주저하는 것일까. 상대방이 갑작스럽게 ‘너는 누구냐?’라고 질문을 하면 적절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너는 누구인가? 그러나 네가 누구인가는 마침내는 중요하지 않다. 너는 너보다 더 큰 것, 너를 연결할 더 큰 어떤 것을 찾았는가?” (‘누구시더라’ 중에서, 14쪽)

 

내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질문함으로써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떤 존재인지 인식할 수 있다. 일찍이 아테네의 델포이 신전 대리석 벽에는 ‘네 자신을 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이 말을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려지게 만든 철학의 명제로 삼았다. 지금도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 배려하고 관심을 갖고 골몰하는 일에 대해, 폐쇄성의 혐의를 둔다. 혹은 관계에 무관심하다고 여기거나, 공동체로부터 도피하는 수단 정도로 이해할 때도 많았다. 그러나 본래 ‘자기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란 우선은 사회적인 원리이면서 동시에 개인적인 원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떠올릴 필요가 있다. 자기 안의 격률을 갖고 진정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이들은, 자기 안의 격률로 인해 타인과 그의 흔적들에 역시 골몰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너는 누구인가’라는 이 단순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또는 쓰잘데없는 질문 속에는 ‘자각(自覺)’하기 위한 기본적이면서도 고귀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나’를 알아야 ‘나’를 둘러싼 세상도 알 수 있다.

 

내가 누구인지, 좀 더 확대해서 말하자면 인간이란 무엇인지 묻는 이 질문은 기본적인 인문학적 질문이다. 인문학이라고 해서 굳이 대학교나 철학책에서만 찾을 필요가 없다. 인간으로서 한 번쯤은 생각해보는 이 질문도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다. 도정일 교수는 평생을 바쳐 인문학적 질문을 위해 집요하게 몰두한 사례로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극적으로 살아남아 비참한 참상을 기록한 이탈리아 출신 작가 프리모 레비를 들고 있다. (‘프리모 레비의 기억 투쟁’) 레비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대학 시절 때 탐독했던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구절을 암송했다고 한다. “나는 짐승으로 살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레비는 이런 구절을 통해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 #2 : 문학

 

백범 김구 선생의 건국이상이 ‘문화국가’였다. 식민지에서 벗어나 아직 궁핍하던 시절, 백범은 ‘부강한 나라’를 가로질러‘문화국가’를 역설했다. 몇 단계 건너뛴 화술이 놀라운 것이 아니라, 항일투쟁과 대조되는 평화주의자의 안목이 경탄스럽다.

 

백범 선생이 말하는 ‘문화’에는 여러 가지 분야를 포괄적으로 가리키는 것이다. 그 속에는 당연히 ‘문학’이 빠질 수 없다. 평소에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문학의 가치를 알고 있지만, 책을 멀리하고 학창시절에 문학을 외우는 과목이라는 기억이 강하게 남은 사람은 문학이라는 말을 어렵게 느낄 것이다.

 

도정일 교수는 단순히 문학(소설, 시)을 읽고 즐기는 행위에만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의 사회적 효용에 대해서 생각해볼 것을 제안한다. (‘시 배달부의 인기’) 특히 문학 읽기는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이며 동시에 시민적인 힘의 원천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시는 사람과 사람들을 잇게 만드는 최선의 선린 외교정책이다.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문학적 연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문학은 정신의 성장이 시작되는 아이들에게 필요하다. 문학을 수능시험을 위해서 가르친다면 절대로 문학의 즐거움뿐만 아니라 사회적 효용을 알 수 없다. 수능에 나올 문제를 기막히게 맞힌 족집게 강사도 문학 독서를 통한 ‘위대한 감각’을 가르치지 못한다. ‘위대한 감각’이란 인간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가치를 깨닫는 능력이다. 소설이나 시를 읽는 독서가 쓰잘데없은 시간 낭비라고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이성과 감성을 겸비하는 윤리적 인간이 되려면 문학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Epilogue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의 목록』을 읽고 나면 꼭 자신만의 고귀한 목록을 찾아보라. 쓰잘데없는 것도 좋다. 나는 ‘자기 인식의 질문’, ‘문학’ 이외에도 소중한 것을 발견했다.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관용, 도서관 등등. 최소 5개 정도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고, 목록으로 만들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주어진 소중한 것들을 누리지 못한다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오늘에 감춰진 의미를 능동적으로 찾아내줄 아는 자는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에 쏟는다면 기분 좋아지는 나 자신을 덤으로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문학, 사랑, 관용, 선물, 희망. 아무나 좋다. 이 세상에 쓰잘데없이 고귀한 것들이 많았으면 좋겠다. 보물을 발견했을 때 그 느낌을 느끼고 싶으면 꼭꼭 숨겨져 있어도 좋지만, 그래도 찾기 쉽도록 눈에 띄면 좋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소중함과 고귀함의 의미를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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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 - 장영희의 열두 달 영미시 선물
장영희 지음, 김점선 그림 / 샘터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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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봄은 훨씬 전에 지나갔다. 그러나 봄은 다시 왔다. 마음의 봄. 이해인 수녀는 마음의 봄을 이렇게 노래했다.

 

 

봄이 일어서니
내 마음도 기쁘게 일어서야지
나도 어서 희망이 되어야지
누군가에게 다가가 봄이 되려면
내가 먼저 봄이 되어야지

 

(이해인, ‘봄 일기’ 중에서)

 

 

봄은 우리에게 누군가에게 다가가 기쁨이 되고 희망이 되라고 재촉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좀 더 부드럽고 따뜻하고 친절한 사람이 되라고 일러준다. 하루의 길 위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찡그리지 않고 미소를 띠는 것만으로도 기쁨과 희망을 건네주는 일이 될 수 있다.

 

 

3월님이시군요. 어서 들어오세요!
오셔서 얼마나 기쁜지요!
일전에 한참 찾았거든요.
모자는 내려놓으시지요-
아마 걸어오셨나 보군요-
그렇게 숨이 차신 걸 보니
그래서 3월님. 잘 지내셨나요?
다른 분들은요?
‘자연’은 잘 두고 오셨어요?
아, 3월님. 바로 저랑 이층으로 가요.
말씀드릴 게 얼마나 많은지요.

 

(에밀리 디킨슨, ‘3월’ 중에서, 장영희  『다시, 봄』 인용, 41쪽)

 

 

때로는 이 시인처럼 혼자만의 방에 봄을 데리고 들어가 고요히 내면의 이야기를 나누며 명상에 잠기는 것도 좋다. 오래 머물지 못하는 귀한 손님이라서 봄이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아니면 ‘봄과 같은 사람’ 어디 없나? ‘봄과 같은 사람’, 이해인 수녀는 늘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가진 사람이야말로 봄과 같다고 했다. 생명의 기운 가득한 봄에 먼 길을 떠난 장영희 교수, 김점선 화백은 ‘봄과 같은 사람’이었다.

 

 

 

 

‘봄과 같은 사람’은 얼어붙음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휴식 같은 친구이기도 하다. 몸은 천근만근, 머릿속은 뒤죽박죽. 달콤한 휴식이 그리울 때가 있다. 엉뚱한 공상이라도 좋다. 과거의 행복했던 추억도 좋다. 일상을 벗어나 나만의 감정과 상념에 빠져 그렇게 몸과 마음을 위로하고 싶다. 딸기 쇼트케이크처럼 작지만 달콤한 휴식에는 복잡한 글이나 설명은 필요치 않다. 그저 한 줄의 시만이, 한 줄의 휴식에 유일한 친구가 된다. 그럴 때 김점선 화백의 그림이 곁들인 장영희 교수의 글을 다시 본다.

 

장영희 교수의 글을 읽으면 가슴이 짠하게 느껴진다. 순간이나마 착한 생각을 하게 되고, 가끔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솔직하게 내면을 드러내 원초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글이 갖는 힘이다. 불편한 몸이지만 스스로 그 사실을 잊어버릴 만큼 유쾌하게 살아 온 그의 태도가 주는 힘이기도 하다.

 

 

 

 

 

 

내 마음은 이 모든 것들보다 행복합니다.
이제야 내 삶이 시작되었으니까요.
내게 사랑이 찾아왔으니까요.

 

(크리스티나 로제티, ‘생일’ 중에서, 장영희  『다시, 봄』 인용, 99쪽)

 

 

장영희 교수는 로제티의 시에 대해 진정한 생일은 사랑을 통해 다시 태어난 날이라고 했다. 이런 사랑을 만난 환희와 기쁨이 잘 표현된 시로 누구라도 이런 사랑에의 동경과 소망을 품어 보게 된다. 그녀는 7월에 다시 한 번 태어나고 싶은 소망을 가졌다. 비록 한여름의 태양과 바다를 사랑할 수 있는 달은 아니지만, 치열한 계절의 순환이 시작되는 4월에 다시 태어났다. 그리고 4월처럼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에 왔다. 한 권의 시화집으로.   

 

그녀가 눈을 감은 5월 9일은 암으로 세상을 떠난 김점선 화백의 49재 날이었다. 자유로운 생각과 유쾌한 성품을 녹여낸 독특한 작품 세계를 선보였던 김점선 화백은 장영희 교수와 꼭 닮은 친구였다. 섬세하고 눈물 많은 교수와 호탕하고 거침없는 화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겉모습이 여린 장 교수는 수많은 고통으로 담금질된 단단함이 있었고, 겉모습이 단단한 김 화백은 누구보다 여린 속내를 가진 사람이었다.

 

 

“김점선은 이제껏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다. 겉모습은 터프하지만, 속은 말랑말랑하고 여리다. 겉은 씩씩하고 대범하지만, 속은 섬세하고 여리다. 겉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속은 한없이 순하고 착하다.” (장영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중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이 없다면 세상은 싸움터로만 기억될지도 모른다. 장 교수에게 그 연민은 문학적 힘을 통해 표현된다. 특히 시는 삶의 용기와 희망을 전달해주는 가장 간결하면서도 강력한 메시지다. 고달픈 삶의 연민에서만 그치지 않고 힘겨운 삶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시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장 교수의 글을 통해 말하고 있다. 삶에 대해 무작정 동경이라든가 허상을 꿈꾸기보다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려고 한다. 시와 삶이 동떨어진 게 아닌 현실감 있게 주변 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시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머리로 읽는 시도 있지만 그것은 감성이 아니라 이성의 뇌로 읽는 것이다. 고등학생 때 시험성적을 위해서 한 편의 시를 동물을 해부하듯이 시구 하나하나 해석해서 읽는다면 감동을 느낄 수가 없다. 이 책 속에 담긴 영시의 위로는 삶의 고통으로 지친 우리의 심신을 부드럽게 감싸 안아 준다. 누구나 삶의 아픔을 한 번 이상은 경험한다. 그렇기 때문에 삶의 위안과 휴식은 보편적이면서 특별하게 다가온다. 읽는 이에게 생의 활력과 심적 에너지를 불어 넣는다. 영시와 장 교수의 글 그리고 김 화백의 그림이 ‘휴식’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봄이 빗속에 노란 데이지꽃 들어 올리듯
나도 내 마음 들어 건배합니다.
고통만을 담고 있어도
내 마음은 예쁜 잔이 될 겁니다.

 

빗물을 방울방울 물들이는
꽃과 잎에서 나는 배울 테니까요.
생기 없는 슬픔의 술을 찬란한 금빛으로
바꾸는 법을.

 

(새러 티즈데일, ‘연금술’, 장영희  『다시, 봄』 인용, 71쪽)

 

 

영시의 편편이 가슴에 스며드는 내용인 데다가 장 교수의 깊고 따사롭고 예리한 글과 김 화백의 살아 있는 색채가 펼쳐진 이 책은 감동 그 자체다. 너무 머리를 쓰고, 마음을 쓰는 시간이 부족한 우리에게 잠깐 숨을 돌리게 한다. 365일 하루도 같지 않은 날들. 사실 매일매일이 선물 같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장 교수는 어느 계절도 아름답지 않은 계절이 없고, 매일매일이 소중한 하루라고 말한다. 봄부터 겨울까지의 자연 변화,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자신의 깊은 내면 등 세상의 모든 것이 영시와 절묘하게 어울리면서 한 편의 ‘희망과 위로의 러브레터’가 된다. 그래서 6월의 봄은 사랑이 필요하고, 슬픔의 술을 찬란한 금빛으로 바꾸는 연금술이 요청되는 마음의 봄이다. 

 

장영희와 김점선의 존재는 희망이자 자유 그리고 사랑이었다. 짧았지만 사랑 가득한 삶을 살고 간 그들은 최고로 멋진 삶을 살았다. 늘 웃을 줄 아는 두 사람. 우리 모두가 장영희, 김점선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느새 봄과 같은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떠나면서 남기고 간 글과 그림으로 사랑할 힘을 얻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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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 문예 세계 시 선집
칼릴 지브란 지음, 강은교 옮김 / 문예출판사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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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4월 10일 시인이자 화가인 칼릴 지브란이 뉴욕의 한 병원에서 사망했다. 48세였다. 사인은 간경화와 결핵 초기 증세, 독신으로 살았던 그가 술로 외로움과 육체의 고통을 달래려 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그는 레바논 태생이다. 『예언자』에는 그 영향이 짙다. 12살 때 가족과 미국 보스턴으로 이민 갔던 지브란은 이후 귀국과 미국행을 반복하며 아랍과 서구, 이슬람과 기독교, 조국의 고대 예언자의 세계와 현대 물질문명의 이질성을 넘나드는 체험을 한다. 25살 때는 파리로 가 2년 동안 미술 공부를 하며 로댕을 만났다. 그의 유해가 레바논으로 돌아갔을 때, 베이루트 항에는 개항 이래 최대의 인파가 그들의 나라가 낳은 천재를 조문하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한다.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미묘한 갈등 속에서 공존하는 땅 레바논에서 자란 난 지브란은 ‘아름다운 영혼의 순례자’로 불리고 있다. 세상을 떠난 지가 반세기를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메시지는 아직도 독자들의 가슴을 찡하게 울린다.

 

니체를 투사하는 분신은 차라투스트라이고, 알무스타파는 지브란의 분신이다. 파리의 그림 유학생 지브란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니체에게 흠뻑 빠져 들었다. 그의 열정에 넘친 해박한 논리는 니체를 정신적 스승으로 만들었다.

 

『예언자』는 배가 출범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배는 잔잔한 포구와 항을 거치면서 사랑, 결혼, 아이들과 같은 가족을 대명제로 삼으며 쓰린 가슴을 치유하며 바다로 항해한다. 알무스타파와 알미트라라는 두 명의 남녀 예언자가 질문하고 대답하는 가운데 사랑, 결혼, 슬픔, 기쁨 등 삶의 진리를 들려준다.

 

알무스타파는 인생의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다. 어느 날 그는 자신이 사는 도시 올펄레즈를 떠나리라 결심한다. 마을사람들은 현자(賢者)를 잃지 않으려 막아서지만, 여자 예언가 알미트라의 생각은 다르다. ‘머무름은 굳어버려서 틀 속에 갇히는 것’임을 아는 까닭이다. 그에게 매달리는 대신, 알미트라는 가르침을 청한다. 알무스타파가 깨달은 ‘태어남과 죽음 사이의 모든 것’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다음, 일상에서의 선행, 인간의 일차적 욕구, 소통과 단절, 책무에 대한 탐사를 계속한다. 희로애락과 거주 공간을 얘기하다 보면 소시민들의 생존철학이 등장하고 일탈로 인한 죄와 벌, 선과 악, 이성과 열정은 가치를 다루는 근간이 된다.

 

지브란이 고통을 수반한 법을 사유하다 보면 자유와 자각, 교육은 필수품이 되고, 어느 순간 소통의 단절에서 오는 대화의 중요성, 잊기 쉬운 우정의 소중함, 시간의 순간성과 영속성, 미추(美醜)의 이분법 등을 관념이 아닌 평상심으로 바라보게 된다.

 

작은 것에 일상의 소중함과 가까운 가족과 친지와 같은 인물에서부터 먼 곳의 친구까지의 속정 깊은 마음까지를 두루 관통한 지브란의 항해는 기도, 종교, 죽음이란 커다란 획을 그으면서 마무리된다.

 

‘알무스타파, 선택받은 자이며 가장 사랑받는 자’로 시작된 글은 ‘잠깐, 바람 위에 일순의 휴식이 오면, 그러면 또 다른 여인이 나를 낳으리라.’로 끝나지만 지브란은 인간에 대한 끝없는 믿음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용수철처럼 반동하는 인간이 아닌 따스한 정이 모래밭에 쌓이는 낭만적 판타지를 꿈꿔왔던 그는 물에 비친 바람의 섭리를 다 깨우친 것 같다. 영원의 전사 지브란이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명왕성을 기호로 하여 말하는 악기 인간을 다루는 『예언자』는 예술품이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이 책은 종교적 메시지와 예언자적 외침을 들을 수 있다. 또 삶의 안내자와의 깊은 소통을 가능하게 해 준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그것에 대한 통찰의 답을 제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많은 종교들이 한 곳에서 만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때로는 도교적으로, 때로는 불교적으로, 때로는 기독교적인 가치관을 만나게 된다. ‘베풂’에 대해 쓴 글에 이런 표현이 있다.

 

“모자랄까 두려워함이란 무엇인가? 두려워함, 그것이 이미 모자람일 뿐. (중략) 그런데 지금 그대들 움켜쥐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대들 가진 것이란 모두 언젠가는 주어야 하는 것을. 그러므로 지금 주라, 베풂의 때가 그대들 뒷사람의 것이 아니라 그대들의 것이 되게 하라.” (27~29쪽)

 

예언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산을 오르고 먼 곳을 헤매고 다녔단다. 그렇게 일상에서 멀리, 높게 떨어져 있지 않으면 진리는 찾아내기 어렵다. 팍팍한 일상에 휘둘리다 보면 정말 무엇이 소중한지 알기 어렵다. 『예언자』는 우리를 생활에서 떼어내 멀리, 높게 떨어진 위치로 이끈다. 『예언자』는 100쪽을 조금 넘을 정도로 작은 분량이다. 그러나 산문시로 된 이 책은 급한 마음으로는 좀처럼 읽기 힘들다. 진리는 여유와 침착함을 갖춘 이에게만 다가간다. 『예언자』의 가치를 느끼고 싶다면 그런 담담함을 먼저 익혀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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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그림책
헤르타 뮐러.밀란 쿤데라 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장희창 옮김 / 민음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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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3월 마지막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 영화는 반값 할인으로, 전시회는 무료로 볼 수 있다. 집에서 버스를 타면 1시간 이상 걸리는 대구미술관에서 그림을 구경했다. 생각보다 미술관에 관람객이 많이 오지 않아서 여유롭게, 천천히 그림을 볼 수 있었다. 어쩌면 살다보면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근사한 미술관에 가서 전시된 그림들을 볼 때, 한 그림에서 다음 그림으로 넘어가기가 무척 힘들고 아쉽다는 느낌에 젖는 그런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한 그림 앞에 오래도록 그 그림이 주는 감동과 충격을 음미하고 싶은데 시간은 그걸 허락하지 않고 보아야 될 그림은 연이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 때.

 

어쩌면 ‘책그림책’이란 책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감흥도 이와 유사하지 않을까. 책을 주제로 그린 일련의 그림들에 현재 세계 문단을 주름잡는 작가들이 쓴, 때로는 시 같은 때로는 콩트 같은 짤막한 감상문을 덧붙인 책. 하지만 이런 산문적인 설명으로는 이 책의 진가를 전혀 전달하지 못 하는 게 아닐까. 오히려 이 책은 읽는다거나 페이지를 넘긴다기보다 그림 하나하나 혹은 글 한편 한편마다 오래도록 하염없이 들여다보아야 한다.

 

 

 

 

책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고 책을 주제로 쓴 글들이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눈 덮인 광활한 들판을 가로질러 머나먼 지평선을 향해 가는 한 남자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책이 보이는가 하면, 지붕 위 하늘을 마치 마법의 양탄자라도 되는 양 책을 타고 비행하는 사람도 보인다. 때로 책은 길가의 천막이 되어 지나가는 사람에게 잠시 쉬어가고픈 욕망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높이 쌓아올려져 바깥세상을 볼 수 있게 하는 받침대 구실을 하기도 한다.

 

 

 

 

환상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크빈트 부흐홀츠의 그림은 르네 마그리트를 연상케 한다. 서로 상관없는 낯선 오브제와 풍경이 기이하게 만나면서 동시에 현실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그림들은 모두 책―일부는 타자기나 종이―이 소재다. 달빛 아래 들판에 커다란 책을 이불처럼 덮은 소년, 푸른 평원 위에 중절모 신사가 잔뜩 쌓인 책 위에 걸터앉은 풍경, 사다리를 밟고 책 밖으로 튀어나온 책 속의 사내. 환상과 꿈이 뒤범벅된 그림들은 이렇게 묻는 듯하다. ‘당신에게 책이란, 삶이란 무엇인가.’

 

아까운 술을 조금씩 마시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기며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든다. 예컨대 배에 책을 가득 싣고 수평선을 향해 노 저어 가는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 이르고자 하는 것일까. 그리고 강변에 놓인 책상에서 열심히 뭔가를 집필하고 있는 사람 주위에 모여든 이들은 훼방꾼일까, 아니면 조력자일까. 단순한 듯하면서도 그림은 너무나 많은 것을 말하고 상기시키고 또 상상하게끔 만든다. 책과 세상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이어져 사람들은 현실에서 책으로 책에서 현실로 자유롭게 미끄러져 들어가고 나온다.

 

누구는 시나 소설을, 누구는 찰나의 단상과 송곳처럼 벼린 우화를 보내왔다. 이해하려 들면 점점 미로에 빠진다. 갸우뚱, 애매하고 애매하다. 근데 곱씹다 보면 뭔가 우러난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느새 온몸의 털이 솟구치는. 그 속엔 책과 인생 위에 펼쳐진, 세상과 우주가 있다.

 

‘텍스트 바깥은 없다’라는 한 철학자의 말을 원용하자면 책의 안과 바깥의 구분은 사실 무의미하다. 자율적이라 믿는 당신의 모든 행동이 실은 책에 쓰인 한 단어 한 문장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사람의 일생이라는 게 기껏 높이 쌓아올려진 한 무더기의 책일 수도 있다. 책 속의 그림 속의 여인을 보는 당신을, 지금 누군가, 당신이라는 그림이 그려진 책 바깥에서 지켜보고 있지 않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 것인가. 당신은 책을 통해 세상을 보지만, 혹은 보고 있다고 믿지만 그 세상이 곧 하나의 거대한 책이라면 그 책을 펼쳐들고 읽고 있는 이는 과연 누구일까.

 

어린 시절 한 권의 책이 손에 들어오면 당신은 그걸 마음 놓고 읽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어디론가 숨곤 했다. 이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나는 알게 되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런 나만의 장소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책을 읽듯 그런 우리 또한 어느덧 읽혀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그들에 따르면 책은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니다. 책 속에서 열리고, 책 속에서 갇힌다. 각성과 혼돈의 공존. 그렇기에 책은 고맙고도 무섭다. 빌딩만큼 쌓아올려진 책 위에 홀로 선 남자 그림을 받은 체코 출신 작가 이반 클리마도 그 양면성을 훑는다.

 

 

 

 

“이는 책이라든지 다른 모든 사물들의 경우에 있어서도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감당할 수 있는 숫자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다면 말이다. 그건 거리의 자동차든, 신발장의 신발이든 아니면 하늘의 별이든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우리가 사랑스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친구에서 우리를 자기들 사이에 파묻어 버리는 적으로 변하는 것이다.”

 

인생의 답은 책에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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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서 마음으로 - 생각하지 말고 느끼기, 알려하지 말고 깨닫기
이외수 지음, 하창수 엮음 / 김영사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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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상처 하나 없는 사람보다는

상처 속에 살아온 그대가

아름답습니다

 

(중략)

 

그래서

손 내밀어 당신의 상처 난 속에

담긴 아름다운 꿈길을

걸어보고 싶습니다

 

그 손 덥석 잡아보고 싶습니다

 

- 김 산  ‘상처 있는 나무는 다 아름답다’ 중에서 -

 

 

 

 ♣ 벌거벗은 나무의 겨울나기  

 

 

 

 

 

Egon Schiele  Bare Tree behind a Fence」  1912

 

 

변신이란 저런 걸 두고 한 말일까. 몇 달 전만해도 녹음이 만연했던, 그 고운 옷을 벗어버리고 나목이 되었다. 전신을 드러낸 것이다. 사람들은 나무의 겨울나기가 안쓰러운가 보다. 공원의 나무에서도 가로수에서도 쉽게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볏짚의 끝을 가지런히 모아 엮어서 밑동에 씌워 놓았다. 요사이는 마대를 따 씌운 모습도 더러 보인다. 내 생각 같아서는 그보다 길이가 몇 곱 되는 쇠코잠방이라도 씌워준다면 겨울나기가 훨씬 넉넉할 것 같다.

 

나무는 스스로 치유 능력이 있다. 누군가가 무심코 가지를 꺾을 경우에도 원망이 따르지 않는다. 스스로 아픔의 눈물인지 송진을 내 외부의 침략을 금세 차단하고 만다. 다시 보호 가지를 여러 개 만들어 간다. 사람들은 이런 나무의 지혜를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너는 나의 하수인이고 먹이사슬의 한 속에 지나지 않는다고만 생각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가축의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고 보면 나무에게만 주저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어찌 보면 눈이 시리게 맑아야 할 우리의 마음에도 주저리가 있어야 한다. 인간의 마음에 분진이 몇 겹으로 쌓여 있기 때문이다. 전선에서 후송된 병사의 팔다리에 칭칭 감긴 붕대와 같이 상처 난 양심에도 여러 겹의 주저리를 감아주어야 한다. 언젠가 상처 부위에 새살이 내밀 것이다. 마치 연약한 순이 세상에 고개를 내밀 듯이.

 

 

 

 

 ♣ 고군분투했던 꿈꾸는 식물

 

 

 

 

 

 

Egon Schiele  Plum Tree (Autumn Tree with Fuchsias)」  1912

 

 

소설가 이외수는 강원도 화천 감성마을에 있는 벌거벗은 나무와 같다. 그는 글과 트위터를 통해 오늘도 컴퓨터 앞에 앉아 수많은 대중들과 소통하고 있다. 그에게 주저리는 소통하는 대중이다. 허나, 나무에도 해충들이 다가오듯이 그를 음해하려고 쓸데없이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나쁜 주저리들도 있지만. 

 

기인, 괴짜 등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는 그에 대한 소문은 그를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고통 받고, 절망하고, 방황하는 주인공과 동일시하며 한편으로 위안을 받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보편적인 기준의 반대편에 서서 그 견고함과 싸우며 버티고 살았던 무모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렇겠다.

 

그러나 마음속 가장 깊숙한 곳을 독자들 앞에서 솔직담백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치는 그의 모습을 본다면, 아직도 자신을 끌어안지 못하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는다. 세상을 통째로 끌어안을 수 있는 사랑의 힘을 키우며 희망을 위한 구원을 모색하고 있었다.

 

자기 삶을 철저히 사랑하고, 그렇기에 그만큼 학대했던 소설가 이외수는 건강한 육체와 나태한 정신이 부끄러워질 만큼 하얀 종잇장 같이 얇고 가녀린 모습이었다. 순수! 그를 보자마자 떠올린 단어다. 인도나 티벳에 가는 초보 여행자들이 애당초 자기가 갖고 간 환상만을 보고 오듯이 이외수의 ‘기인 이미지’도 준비된 거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이외수’라는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외수지, 예수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이외수(李外秀)’도 아니다. 그의 어두웠던 삶을 반추해본다면 ‘이외수(李外樹)’라고 해야 어울린다. 그는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자두나무(李) 군집을 거부하는 듯 멀리 떨어져 외롭게(外) 서 있는 가냘픈 나무(樹) 한 그루처럼 살았다.

 

젊은 시절 이외수와 함께 한 것들은 비듬, 이(泥), 얼룩, 배고픔, 창녀의 빈 방 따위였다. 몸이 성할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가난을 경험한 그는 별 시답잖은 동포들한테까지도 동포취급을 받지 못하고 살아왔었다. 그의 20대부터 40대까지는 열등과의 싸움이었다. 세상이 원하는 보편적 기준인 가문, 학벌, 외모, 경제력 등 그는 어느 조건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무수한 열등감과 싸웠다. 가장 힘들었던 열등감은 가난이었다. 그래도 꿈은 있었다. 바로 영혼의 울림을 느껴질 수 있는 위대한 글 한 편을 쓰는 것.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았지만 제대로 된 생활을 하지 못했던 그는 위대한 글 한 편을 쓰기 위해서 강원도 정선 산골로 들어간다.

 

그에게 문학은 치열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그는 데뷔작 『꿈꾸는 식물』을 발표했지만 그는 여전히 셋방살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밖에 나가면 남편의 술 외상값 때문에 바깥출입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아내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고, 아이들은 주인집 아이들에게 기를 못 피고 살았다. 그는 가족조차 구원하지 못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집을 사기 위해 글을 썼다는 작가의 자의식은 그를 8년 동안 절필하게 만들었다. 스스로에게 혹독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그는 스스로 감옥 속으로 들어갔다, 교도소의 철문을 직접 주문 제작해 그의 집필실에 설치하고 감옥 속에서 글을 썼다.

 

위대한 작품이라는 최고의 열매 하나를 영글기 위해서 이외수는 일부러라도 스스로 상처를 줬다. 풍족하고 좋은 삶의 영양분을 마다하고 자기 자신에게 혹독해야 하는 예술의 길을 선택했다. 그는 ‘나’를 열고, ‘나’를 기꺼이 내주고, 나만을 위한 글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글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 상처 속에 살아온 그대에게 던지는 사랑의 그물

 

 

 

 

 

Egon Schiele  「Autumn sun and trees」  1912

 

 

(예술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행위다. 육안(肉眼)의 범주에만 머무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영안(靈眼)의 범주에까지 닿아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아름다움, 서로를 사랑하고 행복하게 하는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보여주는 일이 예술이다. (19쪽)

 

이외수에게 좋은 예술은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나쁜 예술’은 ‘나뿐인 예술’일 것이다. 혼자만의 구원을 위해 글을 쓰는 ‘나뿐인 예술’을 하고 싶지 않았다. 현실적 부조리에 의해 고통 받으며 극단적인 삶을 살았지만, 오히려 어두컴컴한 과거는 그에게 ‘사랑’에 눈 뜨게 만들었다. 고독한 영혼을 변화시킬 정도로 깊은 울림이 느껴지고 ‘사랑’으로 소통하고, 치유하고, 구원하고 싶은 예술이 그의 꿈이었다. 이외수에게 예술은 자신처럼 상처 속에 살아온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던지는 한 글자 한 글자 모아 튼튼하게 만든 사랑의 그물이다. 절망과 슬픔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문학과 예술이다. 그래서 그는 행복한 사람들은 자신의 글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외수는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만물을 사랑할 수 있는 가슴은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모든 것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보려면 육안(肉眼)을 넘어 영안(靈眼)을 획득하는 경지가 돼야 한다. 영안을 가지고 보면 사랑의 본체를 깨닫고 볼 수 있다. 가슴 안에 아름다움을 심을 수 있는 영안과 심안에 눈을 뜬 사람이 된다면 사랑이 가득한 존재, 행복이 가득한 존재가 되고 이때의 사랑과 행복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 '사랑을 아십니까', 괴짜 사부님

 

 

 

 

 

Egon Schiele  「Four Trees」  1917

 

 

겨울철에 자동차 운전을 하다 보면 차 유리에 성에가 많이 끼어 불편하다. 앞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운전하는 데도 위험하다. 충분히 자동차를 예열해서 성에를 제거한 다음 출발하는 것이 좋다. 이처럼 인간의 행복과 불행도 다 자기로부터 출발한다. 마음의 창문을 활짝 열고 자기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훈련이 되지 않은 사람은 인생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자기를 객관화 할 줄 아는 사람은 자기 내면에 더욱 성실할 수밖에 없다. 바울로 사도는 “내가 자족하는 삶의 비밀을 터득했노라”고 했다. 신앙의 거울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보게 되었다는 말이다. 깊은 각성(覺醒), 깨달음이다.

 

이외수의 글도 그렇다. 자신의 아픔을 독자에게 에누리 없이 보여주고, 가식 없이 진솔한 그의 얘기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의 빗장이 스스로 열린다. 못난 사람이 후진 땅 딛고 일어섰다는 사실만으로도 얼었던 마음이 녹는다. 마음은 감성의 근본이 되고 이 마음을 중시하는 삶과 예술이야말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지름길이라는 기본적인 사실을 독자들에게 일깨워준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각성의 경지에 이른 그는 최근에 달의 지성체와 채널링을 통해 교신한다고 언급했다. 그는 영원히 변치 않는 괴짜임에 틀림없다. 이젠 그를 끌어안지 못하는 세상을 비웃기보다 자신이 통째로 안아 버리려 하는 그는 이미 도(道)를 터득한 ‘사부님’이 되었다. 아마도 그에게 가장 큰 행복은 바로 자신처럼 마음의 눈을 뜬 영안을 가진 자를 만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만약에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을 만난다면 도인처럼 '도를 아십니까'라고 묻기보다는 '사랑을 아십니까'라고 싱글벙글 웃으면서 다가올거 같다. 김산의 시 구절처럼 사랑이 가득한 아름다운 꿈길을 같이 걷자고 덥썩 손을 내밀 것이다. 자신의 마음에 씐 주저리를 소통하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의 주저리를 씌우려고 한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사랑의 주저리.

 

도의 경지에 이르러야 체험할 수 있는 심적 수련의 과정을 무조건 따라하자는 건 아니다. 소양이 많이 부족한 우리는 기본적으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 사물 그리고 자연과 채널링할 줄 알아야 한다. 우선 자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폭넓은 사랑을 하려면 아름다움을 자주 접해야 한다. 하루에 한번이라도 하늘을 바라보던지, 화초 가꾸기를 하면 꽃피고 열매가 맺는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다. 또 끊임없는 대화를 가져야 한다. 자연적인 것들과 대화도 하고, 자문자답을 하는 것을 즐겨야 한다.

 

이외수는 대상과 자신과 합일되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마음’이라고 했다. 생각하지 말고 느끼는 것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의 근원 속에는 사랑의 본성이 숨어 있다. 삶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사랑의 눈을 뜨고 봐야 한다. 일상에 사랑이 합일된다면 행복 찾기는 어렵지 않다. ‘힐링’을 책에서 찾을 필요 없다. 혼자 있는 고요한 날에, 마음의 문을 열고 밖을 보자. 사랑하는 사람들과 채널링하기 딱 좋은 시간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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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17 1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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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2-22 21: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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