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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리는 박물관 - 모든 시간이 머무는 곳
매기 퍼거슨 엮음, 김한영 옮김 / 예경 / 2017년 6월
평점 :
소중히 아꼈던 책 한 권이 있다. 오래돼서 낡고 해어졌지만, 정든 거였다. 어렸을 때 읽은 책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보물 상자처럼 남아 그 지나간 시절을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그 시절을 잊고 싶지 않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추억이 깃든 물건은 함부로 버릴 수 없다. 그것은 흔한 물건이 아니라 추억이 스며든 특별한 ‘무엇’이기 때문이다. 어떤 물건은 연락이 뜸한 친구나 옛 연인의 안부가 새삼 궁금하도록 하는가 하면, 어떤 물건은 나만의 사연을 간직한 것도 있다. 그렇지만 나중엔 버리자니 아깝고 당장 쓰일 것 같지는 않은 물건을 죽을 때까지 보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져 온다. 결국, 조금 아깝다 싶어도 과감히 버리게 된다.
자다가 일어날 때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물건들을 원하게 되면 과거에 소중히 여겼던 물건들의 자리가 위태해진다. 그들이 놓일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놓일 자리가 없어진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추억이 망각의 한 형태라고 말했다.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망각에 이른다. 그렇지만 망각으로부터 추억을 끄집어내는 일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세태가 변화하면서 사라진 많은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박물관(museum)’이라는 거대한 공간에 진열함으로써 적어도 기록과 흔적을 남기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끌리는 박물관》(예경, 2017)이라는 책을 읽으니까 박물관이 있어야 할 이유를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끌리는 박물관》은 박물관에 얽힌 추억과 상념을 진솔하게 표현한 스물네 명의 작가의 글들을 모은 책이다. 이 글은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의 자매지 <인텔리전트 라이프(Intelligent Life)>에 연재되었다. 스물네 편의 글은 <인텔리전트 라이프>의 문학 담당 편집장인 매기 퍼거슨(Maggie Ferguson)이 선별했다.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도 기획물 연재에 참여했다.
박물관에 잠들어 있는 물건들은 아날로그 이전부터 존재해온 화석 같은 존재다. 그렇지만 이 책에 소개된 박물관의 소장품들은 특별하다. 과거의 물건이 미래의 괜찮은 물건으로 간주한다.
미국 뉴욕에 있는 로어 이스트사이드 주택 박물관(Lower East Side Tenement Museum)은 ‘화려함’이라곤 한 치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그곳에 가면 20세기 초 뉴욕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의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을 세 번째로 방문한 로디 도일(Roddy Doyle)은 박물관에 ‘사람을 매혹시키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종종 낡고 방치된 집들을 둘러보고 다니며 그곳을 내 집으로 삼아 여기저기 수리해서 산다고 상상해본다. 하지만 이곳에는 방치에 딱 들어맞는 이유, 심지어 사람을 매혹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이건 결코 방치가 아니다. 존경이다. 여기 사람이 살았다. 여기 사람의 삶이 있다. (26쪽)
대부분 사람은 값비싸고, 모양새가 화려하고,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물건이야말로 박물관에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파리의 미술관 중에서 가장 미술사적인 작품을 많이 소장한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에서 유독 관람객들이 몰리는 곳이 있다. 루브르의 심장부에 고고한 자세로 서서 미소 짓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의『모나리자』다. 가장 많은 관람객이 가장 오래 머물다 가는 작품이 바로 『모나리자』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연평균 500만 명이 몰린다고 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을 끌어당긴다. 그러나 인산인해를 이루는 장소에서 그녀를 가까이서 보기가 쉽지 않다. 이렇다 보니 모나리자라는 신비스러운 여인의 삶을 상상해볼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그녀는 가깝지만, 너무나 먼 ‘사람’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사람들이 쓰던 물건들은 아스라한 역사만큼이나 신비하고 손때가 묻은 만큼이나 정겹다. 박물관에 보관된 물건 하나하나를 보면서 그때 그 사람은 이렇게 살았을 거야, 저렇게 살았을 거야, 상상해보는 재미가 쏠쏠하고 여유롭다. 현대의 사람과 과거 사람의 물건이 만났을 때 박물관은 살아있다.
박물관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곳이지만 자신에게는 특별한 장소가 될 수 있다. 앨리슨 피어슨(Allison Pearson)은 자신이 사랑하는 장소인 로댕 미술관에 가기 위해서라면 하이힐을 신고 달릴 수 있는 여자다.[1] 그녀는 로댕 미술관이 모두에게 공개된 장소라는 사실에 아쉬움을 드러낸다.
시인 돈 패터슨(Don Paterson)은 카미유 코로(Camille Corot)의 그림 한 점을 보기 위해 프릭 컬렉션(The Frick Collection)을 찾는다. 그는 힘들 때마다 코로의 그림 속 호수로 피신한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코로의 그림이 진정제 같다고 말한다. 이처럼 박물관은 상한 마음을 치유해주는 안락한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런 장소를 만나면 계속 머물고 싶고, 기분이 좋아지는 특별한 곳을 아무에게나 알려주고 싶지 않다. 그곳에 머무르는 현재의 시간은 앞으로 영영 잊히지 않는 과거의 추억이 된다.
요즘 몇 년 새 우리 주변엔 ‘추억의 물건’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옛날이 좋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마치 빛바랜 앨범 사진을 꺼내 들고 지나간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싶어서일까. 세상의 속도가 한없이 빨라지면서 조금은 뒤를 돌아보고 천천히 가고 싶은 생각이 더욱 절실해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냥 가볍게 지나치는 것들도 저마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어 그 앞에 종일이라도 머물고 싶어진다. (앤 패칫, 133쪽)
추억의 물건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자신만의 보물을 찾으려고 한다. 박물관에 가면 추억의 물건, 나만 알고 싶은 특별한 보물 모두 만날 수 있다. 박물관은 살아있다. 그곳은 매순간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늘 변함없이 기다리고 있다.
[1] 앨리슨 피어슨이 쓴 베스트셀러 제목이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사람in, 2012)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