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골목 - 진해 걸어본다 11
김탁환 지음 / 난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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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일에 작성한 글이 마음에 안 들어서 수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MSG’를 많이 넣어봤습니다. 문체에 변화를 줬습니다. 높임체로 글을 쓰는 일이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는 뻥이고, 이 글은 ‘IBK 기업은행 아름다운 은퇴’(가을호)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고향, 말만 들어도 가슴이 설렙니다. 어린 날의 기억들이 새근새근 살아 숨 쉬는 곳. 숨기고 싶은 속내까지 깡그리 드러내고 있는 곳. 지금도 고향에는 추억의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까요?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습니다. 일상에 파묻혀 살다가 어느 순간 스치는 바람결에 과거의 기억으로 빨려 들어갈 때 있습니다. 추억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면 고향의 골목길 구석구석, 친구들 얼굴이 눈에 선합니다. 누군가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했지만, 꼭 그렇지만 않습니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경험으로 괴로운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겁니다. ‘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감쪽같이 잊어버릴 수 없을까? 상처로 남을 기억을 잊고 살기보다, 상처받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여기 추억을 떠올릴 때마다 아픈 가슴을 쓸어내리는 분이 있습니다. 김탁환 작가의 엄마입니다. 그녀는 올해 일흔다섯입니다. 그녀가 다섯 살이었을 때 일본에서 경남 진해로 건너왔고, 지금까지 줄곧 그 지역에서 살아왔습니다. 엄마는 인생의 절반 동안 가난과 정신적인 핍박을 온몸으로 부둥켜안았고, 삶의 현장에서 의연하게 버티며 자식을 보살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뒤 30년을 혼자서 지냈습니다. “엄마는 강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엄마의 위대한 사랑과 희생을 표현한 말이죠. 그렇지만 작가의 엄마는 추억 앞에만 서면 한없이 약해졌습니다. 엄마에게 추억은 즐거웠던 시간을 떠올리게 하는 포근한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엄마는 추억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사진들을 없애기 시작합니다.

 

 

  마흔네 살에 홀로되신 엄마는 아이들 손이 닿지 않은 책장 제일 구석에 앨범을 올려놓고, 사별한 남편이 그리울 때마다 꺼내 보곤 하였다. 믿기 힘든 대답이 돌아왔다.

  “그것들부터 제일 먼저 없앴지.” (14)

 

 

작가는 엄마와 함께 진해 동네 곳곳을 함께 걷습니다. 그런데 모자는 같으면서 다른 길을 바라보면서 걷고 있었습니다. 작가는 엄마와 함께 걷는 골목에 있고, 엄마는 엄마 본인 마음의 골목에 있었던 거죠. 그래서 작가는 이 두 골목을 하나로 이으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엄마만의 동네에서만 볼 수 있는 엄마의 골목입니다. 엄마의 골목은 작가가 엄마의 추억 부스러기들을 씨줄로 엮어 만든 책입니다. ‘엄마의 이야기를 알고 싶은 아들의 진심 어린 마음이 통했을까요. 엄마는 가슴속에 숨겨둔 추억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아들에게 들려줍니다. ‘추억이라는 매개로 모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작가는 엄마와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을 기록한 책의 제목을 엄마의 골목으로 정합니다. 엄마의 골목에는 어리고 느리고 어설프게 걸어온 지난날의 엄마 발자국과 그 곁에 나란히 찍힌 자식의 발자국이 겹쳐 있습니다. 모자가 진해 곳곳에 남겨둔 발자국들은 소중한 것을 찾아가는 아름다운 회귀의 흔적입니다.

 

 

 “‘엄마의 골목이 좋아요? ‘어머니의 골목이 좋아요?”

 “엄마의 골목!”

 “왜죠?”

 “더 가까운 느낌이 들어. 어머니는 안방에서 앞마당 정도 거리라면, 엄마는 안방을 벗어나지 않고 한 이불 속에 있는, 그런 기분!” (182)

 

 

옹알이를 시작한 아기가 처음으로 입 밖으로 꺼낸 단어는 무엇일까요? 저는 엄마라고 생각합니다. ‘엄마는 아기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단어입니다. 아기는 엄마의 품속에서 먹고 자랍니다. 엄마들은 아기가 기억하지 못한 것들을 추억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자신의 품속에 간직합니다. 아기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소중한 추억을 들려주기 위해서죠. 다 자란 자식은 자신과 엄마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엄마 품에 바짝 귀를 갖다 댑니다. 엄마의 품속 깊이 저장된 추억을 듣는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자세히 듣고 싶으면 엄마를 꼭 안아주세요. 엄마를 편안하게 만들어 드리고 대화를 시작해보세요. 그러면 엄마는 품속에 있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입을 엽니다.

 

숨이 차고 힘들게 세상살이를 하다가 잠깐 멈춰 서게 될 때, 우리는 뒤를 돌아보고 자신을 돌이켜보게 됩니다. 소중한 추억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속 먼지와 때를 한 겹 닦아내는 기분이 듭니다. 세상살이가 각박해질수록 그리운 추억 찾기에 대한 집착은 더욱더 강해지고 끈끈해집니다. 엄마의 골목이 여러분의 가슴에 따뜻하게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을 아련하게 덮어주는 안방의 이불 같은 책이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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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7-08-16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 그럼 너 혹시 은행 다니니...? 아무튼 좋은 일이다. 축하한다!^^

cyrus 2017-08-16 15:27   좋아요 0 | URL
원고 청탁을 받아서 기업은행 온라인 웹진에 글을 싣게 되었어요. 제가 은행에서 일했으면 책 읽고 글 쓰는 시간이 없었을 걸요. ^^

곰곰생각하는발 2017-08-16 14: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본격적으로 글쟁이 되시는 겁니까 ?

cyrus 2017-08-16 15:30   좋아요 0 | URL
부업입니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알라디너 덕분에 은행 온라인웹진에 글을 싣게 되었어요. 계속 쓸 수 있을지 미지수입니다. ^^

양철나무꾼 2017-08-16 1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참 좋게 읽어서, 님의 리뷰가 더 남다른가 봅니다.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근데, 더운 대구에서, 휴가는 다녀오셨습니까?^^

cyrus 2017-08-17 12:37   좋아요 0 | URL
휴가는 다음 주에 있습니다. ^^

2017-08-16 21: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17 12:42   좋아요 0 | URL
제가 뭘 쓰고 있는지 관심 없는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저의 책 사랑을 알아주는 몇몇 분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페크pek0501 2017-08-17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은행 온라인웹진에 글을 싣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그렇게 열심히 쓰시더니... 그런 좋은 결과가 생기는군요.

cyrus 2017-08-17 12:43   좋아요 0 | URL
사람 만나는 일에도 운이 따라야하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운이 좋았습니다. 알라딘 서재에 저보다 글을 잘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엄마의 골목 - 진해 걸어본다 11
김탁환 지음 / 난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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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고향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골목길 구석구석, 친구들 얼굴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너무도 빠른 변화의 세월에 기억력은 조금씩 마모된다. 엔간한 토박이가 아니고는 그 고향 어딘가에 남겨둔 ‘추억’이라는 보물을 현실에서 찾기란 불가능하다. 누군가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라고 했지만, 꼭 그렇지만 않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경험으로 고통받았던, 혹은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이 고통스러운 기억을 감쪽같이 잊어버릴 수 없을까.” 상처로 남을 기억을 잊고 살기보다, 상처받기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김탁환 작가의 어머니는 약한 분이다. 그녀는 가난과 정신적인 핍박을 온몸으로 부둥켜안으면서도 삶의 현장에서 의연하게 버티며 자식들을 가르쳤다. 이 정도면 ‘억척스럽고 강한 어머니’의 전형적인 모습이지만, 작가는 어머니를 약한 존재라고 말한다. 여기서 작가가 말하는 ‘약하다’는 것은 어머니에게 향한 ‘안쓰러운 마음’을 드러낸 감정 표현이 아니다. 작가의 어머니에게 ‘추억’은 즐거웠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포근한 단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떠올릴 때마다 가슴 저리게 하는 따가운 단어였다. 그녀는 추억의 ‘추’자만 들어도 한없이 약해지는 분이었다.

 

 

 마흔네 살에 홀로되신 엄마는 아이들 손이 닿지 않은 책장 제일 구석에 앨범을 올려놓고, 사별한 남편이 그리울 때마다 꺼내 보곤 하였다. 믿기 힘든 대답이 돌아왔다.

“그것들부터 제일 먼저 없앴지.”

 

(14쪽)

 

 

작가와 어머니는 함께 진해 곳곳을 걷지만, 서로 정반대의 길을 간다. 작가는 ‘엄마와 함께 걷는 골목’에 있고, 어머니는 ‘어머니 본인 마음의 골목’을 걷는다. 그래서 작가는 이 두 가지 골목을 합치려고 어머니와 진해를 걷는 시간을 늘려나간다. 아들의 진심 어린 마음이 통했을까. 어머니는 진해 곳곳에 남겨둔 자신만의 추억을 하나씩 떠올리며 아들에게 들려준다. ‘추억’이라는 매개로 모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두 사람은 어디를 가도 안방에 깔린 이불에 들어가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작가는 책 제목을 ‘어머니의 골목’이 아닌 ‘엄마의 골목’으로 정했다.

 

 

“‘엄마의 골목’이 좋아요? ‘어머니의 골목’이 좋아요?”

“엄마의 골목!”

“왜죠?”

“더 가까운 느낌이 들어. 어머니는 안방에서 앞마당 정도 거리라면, 엄마는 안방을 벗어나지 않고 한 이불 속에 있는, 그런 기분!”

 

(182쪽)

 

 

이 글에서는 작가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기 위해 ‘어머니’라는 호칭을 쓴다. 그렇지만 ‘어머니’보다 ‘엄마’라는 호칭이 더 친근감을 준다. 나는 다 컸는데도 여전히 나를 낳으신 분을 ‘엄마’라고 부른다. 가끔은 경상도 출신답게 경상도 사투리로 ‘어무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그 단어에 우러나오는 투박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 ‘엄마’가 낫다. 죽을 때까지도 ‘엄마’라고 부르기로 했다. 예전에는 다 커서도 ‘엄마’라고 부르는 어른은 마마보이(mamma’s boy) 기질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그리고 《엄마의 골목》을 읽으면서 ‘엄마’가 ‘듣기 싫은 말’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사실 말을 트기 시작하는 아기가 꺼낸 첫 번째 단어는 ‘엄마’다. ‘엄마’는 아이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단어다. 그렇게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엄마’의 품속에서 먹고 자란다. 엄마들은 우리가 아기였을 때 기억하지 못한 것들을 ‘추억’이라는 이름표를 붙여 자신의 품속에 간직한다. ‘추억’의 중요성을 깨달은 자식은 엄마의 품속에 쌓인 그것들을 귀담아 듣는다.

 

 

“어떻게 그 많은 이야기를 품고만 살았어요?”

“하고픈 이야길 다 하고 살아, 그럼?”

“그건 아니지만…‥”

“나이를 먹는다는 게 뭔지 아니? 일흔 살을 넘기며 늙어간다는 게 뭔지 아느냐고.”

“…‥”

“이야기가 많아진다는 거야. 차곡차곡 이 가슴에 쌓이지. 그렇다고 그걸 전부 누군가에게 말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들어. 다만 이야기할 기회가 가끔 찾아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야. 네가 와서 이렇게 함께 걸으니, 네게 이런저런 이야길 하는 것이고.”

 

(156쪽)

 

 

어머니에게 할 수 있는 효도는 다양하다. 큰돈 들이지 않고, 당장에 효도하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아주 간단하다. 그것이 뭐냐면…‥ 《엄마의 골목》 제일 마지막 장을 직접 확인하시라. 눈치 빠른 분이라면 벌써 이 글을 읽는 순간 알았을 것이다. 효도는 더 늦기 전에 빨리해야 한다. 일단 나부터 정신 단디 차리고, 효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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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7-08-07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마 생각이 많이 나는 글이네요. cyrus님의 글들 중 보기 드물게 감성이 많이 묻어나는. .^^ 제게 엄마는 제일 존경하는 분이면서 제 글속에서 자주 숨쉬는 분이시죠. 좀 있다 전화부터 드려야겠습니다.ㅎㅎ

cyrus 2017-08-08 12:04   좋아요 0 | URL
가끔 글을 잘 쓰고 싶을 때가 있어요. 리뷰 대회에 응모하기 위해 글을 쓰면 평소보다 더 잘 쓰려고 노력합니다. 이때 제가 ‘리뷰 MSG‘를 칩니다. 책을 보기 좋도록 소개하기 위해 감성적인 수사를 많이 쓰는 것이죠. 이런 글에 익숙해지면 몸에 해로울 수 있으니 조심해야 됩니다. ^^

2017-08-08 0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08 12:08   좋아요 1 | URL
저희 어머니도 매달 한번씩 양로원에 계시는 외할머니를 뵈러 갑니다. 저도 그곳에 한 번 간 적이 있었습니다. 외할머니가 저를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제가 누군지 기억 못 하셨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 가슴 아팠습니다.

나비종 2017-08-08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뷰 MSG ㅎㅎ 몸에 좋지는 않지만, 가~~끔은 아이스크림처럼 달콤한 글로 위로를 받을 때도 있죠.^^

cyrus 2017-08-08 12:45   좋아요 0 | URL
네. 적당한 것이 좋습니다. ^^

stella.K 2017-08-08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연극 같이하던 남자 후배놈이
지 아버지한테 아빠, 아빠하는데 어찌나 어색하던지.
낼모레면 장가갈 놈이 그러더라구.ㅎㅎ
난 엄마한테는 엄마라고 하지만 아버지한텐 아버지라고 했거든.
딸인데도 아빠가 닭살스럽더라고.
그러니 습관이 무서운 거지.
그 후배 지금은 애가 둘인데 애들 앞에서도 아빠, 아빠할지 가끔은 궁금해.ㅋ

cyrus 2017-08-08 14:20   좋아요 0 | URL
저는 다른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 부모님을 언급하면 호칭을 ‘아버지’, ‘어머니’로 써요. 그리고 아버지한테 ‘아빠’라고 못해요. 저는 ‘아빠’, ‘엄마’ 호칭을 쓰면서 높임말을 해요. ^^
 
숨결이 바람 될 때 - 서른여섯 젊은 의사의 마지막 순간
폴 칼라니티 지음, 이종인 옮김 / 흐름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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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 강아지를 보면 정말 좋아한다. 가족처럼 지내고 싶다. 하지만 살아 있는 것들을 잘 보살피지 못한다. 강아지건, 병아리건 생명 있는 것들은 나에게만 오면 시름시름 앓다 내 곁을 떠나버렸다. 그때부터 나는 죽음에 대해 생각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 역시 동물의 죽음은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깊은 상처였다. 살아 있는 내가 살아 있는 것들을 보듬어주지 못하다니. 얼마만큼 사랑을 주고 얼마만큼 참아야 하는지 내게 그것은 절대 알아낼 수 없는 절망적인 경험이었다.

 

폴 칼라니티의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죽음을 특정 관점에서 정의 내리려 노력하지 않는다. 죽음에 대한 철학적 분석도 없다. 이 책은 가끔 불현듯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맞닥뜨리는 나에게 진언처럼 다가온다. 일상에 바쁜 현대인들에게 죽음을 생각한다는 것은 어쩌면 삶에 대한 허무나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비탄을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통해 죽음은 무섭거나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것, 아침에 일어나 옷을 갈아입듯 살고 죽는 게 그런 것, 죽음은 또 다른 삶이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폐암 말기 판정을 받은 의사 폴 칼라니티의 슬픔은 단정하다. 그는 시한부 판정을 받고 난 이후부터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가족의 사랑, 미래의 꿈들과 기약 없는 이별을 맞이해야 하는 현실에 괴로워한다. 그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사람이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느끼는 복잡한 감정을 읽을 수 있다. 부정과 우울, 그리고 죽음을 늦추고 싶은 마음. 그의 글은 시종 질서정연한 채 한번 풀어 헤쳐지지도, 터뜨려지지도 않는다. 폴의 육체가 계속 쇠락하긴 하지만 분명 살아있다. 폴은 죽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스스로 질문한다. ‘계속 살아갈 만큼 인생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폴은 노화만큼이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일찌감치 파악한다. 그래서 그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죽기 전까지 내가 원하는 것을 하면서 잘 사는 일’이라고 담담하게 표현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죽음과 씨름하면서 산다는 것은 결코 받아들이기 쉬운 일이 아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강한 믿음 없이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죽음이 노화만큼 두려운 일이 되어가는 것은, 죽음은 ‘엄청난 사회의 병이고, 필요악’이라 여기는 사회문화적 환경과 나 자신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온다.

 

죽음을 일종의 패배로 여겨지는 이 세상에서 나 자신을 제대로 지키며 살아갈 수 있을까. 이러면 죽음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때 폴은 내게 말했다. “죽음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러나 죽음 없는 삶이라는 건 없다.” 그리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하면 더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도 했다. 지금 당장 죽을 준비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 또 누구에게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면서 지금 살아가고 있는 내 삶의 방식을 진지하게 성찰해 보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자아 반성이다. 이와 같은 반성은 삶에 대해 더욱 겸허하고 진실한 자세를 갖게 한다. 죽음을 안다는 것은 곧 자신의 삶을 아는 것이다. 죽음이 바로 삶이 존재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죽음이 있어서 삶은 삶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언젠가 내 마지막 숨결이 삶의 종착역에 닿게 될 때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죽음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거부하는 것. 그 선택은 내 삶의 본질을 찾아낼 수 있느냐에 따라 다르다. 내가 소중한 존재이며 내 안에 있는 의지력을 믿는다면, 폴의 말처럼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은 죽음보다 강하다고 확신한다. 그렇게 되면 죽음이 두렵지 않다.

 

《숨결이 바람 될 때》는 삶을 아름다운 소풍에 비유한 천상병의 시 『귀천(歸天)』을 떠올리게 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죽음 이후의 삶을 T.S. 엘리엇의 시구(詩句) ‘잔잔한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손에 응하는 일’이라고 인용한 적이 있는 폴을 보면 그의 뇌리에 관류한 죽음의 의미는 차라리 평온한 축복처럼 살갑게 다가온다. 결국, 모든 순간의 삶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죽음을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며, 미래에 올 죽음을 깨닫는 것이 현재의 삶을 즐겁게 사는 데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 매우 즐겁고 행복한 일이다. 평화로운 죽음이란 떠나는 사람과 그 곁을 끝까지 지켜주는 사람 모두가 최선을 다할 때 맞이할 수 있다. 때론 지나친 집착과 절망도 떠나보내는 사람을 힘들게 하는 법. 이 교훈은 내 뺨에 마지막 숨결을 남기고 떠난 동물들이 나에게 알려준 것이다. 죽음에도 조화가 필요하다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천천히 작별의 말을 나누고 세상을 떠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죽음이 허락되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세상 소풍 끝내는 자의 마지막 자존심을 이해하고, 지켜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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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8-01 12: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8-01 17:53   좋아요 1 | URL
<알쓸신잡> 전주 편 방송에서 본건데, 남부시장에 가면 ‘적당히 벌고 아주 잘 살자’라는 무구가 적힌 것이 있어요. 그 말이 참 좋았어요. 누구나 이런 삶을 살고 싶을 겁니다. 여유를 누릴 수 있을 정도로 벌면서 일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잦은 야근에 시달리고, 주말에 일 나가야하는 현실을 생각하면 적당히 버는 것이 시원찮고, 잘 사는 것도 아니에요. 일에 치여 살다 보면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부족할거고, 갑작스럽게 병마에 시달리기 시작한다면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일 겁니다.

2017-08-01 18: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17-08-01 14: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도 읽어보지 못했는데 나도 이 책 보면 천상병 시가 생각나.
무엇보다 죽기 전에 주변 정리를 잘 해 놓고 죽어야 할 것 같은데
문제는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거지.
적어도 오늘은 아니겠구나 하며 자꾸 미룬다는 건데
나 죽기 전에 가장 시급하게 할 일은 책을 정리해 두는 건데
할 수 있을랑가 모르겠다.ㅋ

cyrus 2017-08-01 17:54   좋아요 1 | URL
죽는 날은 정확히 알 수만 있다면 저는 제가 모은 책들을 기부하고 싶어요. 그런데 제 책을 받아줄 장소가 없다고 생각하니까 더 슬퍼집니다. ^^;;

겨울호랑이 2017-08-01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물을 잘 키우는 사람이 있고,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이 있다고 하네요. cyrus님은 후자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cyrus 2017-08-01 17:56   좋아요 1 | URL
아닙니다. 지금 생각해보니까 저는 둘 다 키울 자격이 없습니다... ㅎㅎㅎ
성격이 게으른데다가 책 읽는 데 정신이 팔려서 동물, 식물 관리를 소홀히 합니다.
 
꿈꾸는 카메라 - 세상을 향한 아름다운 소통
고현주 지음 / 흔들의자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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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민이 영혼을 잠식한다. 번민이 야금야금 갉아 먹어 상처 난 영혼들은 보듬어 여며야 하는데, 이들은 서로를 돌볼 여유가 없다. 위로받고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사람들이 사적이면서도 개방된 표현 행위사진 찍기에서 행복을 찾으려는 몸짓은 자연스럽다. 한 장의 사진은 사진작가의 숨겨둔 감정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바로 세상에 있었음을 확인하고 증언한다. 이렇게 무언가에 대해 기록한다는 점으로 인해 사진은 늘 우리의 삶과 함께 해왔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인류의 희로애락을 지켜온 것이다. 여기에 사진이 갖는 힘은 특별하다. 한 장의 사진은 여러 마디의 말보다 더 큰 명징함으로 우리 마음을 살며시 울린다.

 

이런 사진의 힘을 집약적이고도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꿈꾸는 카메라(흔들의자, 2017). 이 책을 쓴 고현주 씨는 소년원의 아이들에게 사진으로 소통하는 법을 알려줬다. 그녀는 아이들이 직접 찍은 한 컷의 사진, 그리고 사진에 얽힌 짤막한 이야기를 신중하게 골라 한 권의 책으로 묶었다. 이 책에 실린 아이들의 사진은 프로 사진작가의 전문적인 솜씨에 비춰보자면 지극히 아마추어적이다. 하지만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일에 대한 저자 나름의 독특한 시각과 애정이 작은 부분 하나에까지 가득하다.

 

사진은 찍는 법을 가르치는 예술이 아니다. 먼저 사물을 천천히 바라보는 법’, 사물에 다가가 말을 거는 법’, 마음을 드러내는 법을 익힌 다음 서서히 자신과, 타인과, 사물과, 자연과 소통하는 길을 찾고, 그 길을 따라 세상에 한 발짝 성큼, 다가가는 일이다. (30)

 

카메라를 통해 대상을 천천히 바라보는 것은 사진작가가 상대에게 말 거는 소통의 한 수단이다. 아이들은 애정 어린 대상 또는 사소한 대상에 카메라를 가까이 닿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다.

 

 

 

 

 

사진에 찍힌 대상은 아이들의 감정 상태, 기억 그리고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꿈의 모습을 하는 조각품이 된다. 그러니까 그것은 아이들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분명 아이들의 진짜 모습이며 자연스럽게 아이들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진과 글(, 에세이)은 결코 따로 떼어낼 수 없으며 늘 함께 어울리는 관계다. 그렇게 조화를 이루면서 더 큰 감동의 파장과 힘을 지닌다.

 

시는 가장 함축된 언어이다.

사진은 가장 함축된 빛이다.

함축된 빛과 언어가 만나 또 다른 빛그림이 그려진다.

 

(108~109)

 

글은 소박하지만, 사진이 더해짐으로써 메마른 감정을 북돋운다. 사진은 평범하지만, 글과 함께 어우러져 한층 따뜻하고 친밀하게 느껴진다. 과장되지도, 화려하지도 않으며, 마냥 친근하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미덕은 아주 쉬운 공감의 언어와 가슴 깊이 와 닿을 반짝반짝 빛나는 사진이다. 독자는 사진을 준비 없이 보아도 그저 보는 것으로 알 수 있고, 자연스럽게 공감의 의미와 넉넉한 사랑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책을 보면서 두 가지 생각을 해 보았다. 한 가지는 현실에 뿌리박은 사진의 힘이 참으로 놀랍다는 것, 또 아이들에게 사진은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 ‘이라는 사실이다. 수많은 말과 글로도 서로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고 오히려 단절과 대립 속에 사는 이 시대에 사진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서로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사진을 찍고, 바라보고, 마음을 드러내는 이 모든 과정은 아이들을 세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준다. 아이들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건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다.

 

 

 

사진은 도서출판 흔들의자공식 블로그(http://blog.naver.com/rcpbooks)‘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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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12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7-13 14:36   좋아요 1 | URL
책에 나온 사진들은 꾸밈이 없어서 좋았습니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사진이 잘 나올까?’, ‘보정을 어떻게 해야 할까?’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런 생각이 많아지면 좋은 사진 한 장 건지기 어렵습니다.

transient-guest 2017-07-13 15: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술 이전에 마음으로 대상을 볼 수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사실 사진 찍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윽한 울림을 받는 사진이 가끔 있기는 합니다. 단순한 자연의 카피에서 표현이 되려면 카메라기술만으로는 안될 것 같아요

cyrus 2017-07-13 15:49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마음으로 대상을 본다는 것. 말로만 들어서는 쉬운 일 같지만, 지속적인 관심과 관찰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끌리는 박물관 - 모든 시간이 머무는 곳
매기 퍼거슨 엮음, 김한영 옮김 / 예경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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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히 아꼈던 책 한 권이 있다. 오래돼서 낡고 해어졌지만, 정든 거였다. 어렸을 때 읽은 책은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보물 상자처럼 남아 그 지나간 시절을 간직하고 있다. 어쩌면 그 시절을 잊고 싶지 않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추억이 깃든 물건은 함부로 버릴 수 없다. 그것은 흔한 물건이 아니라 추억이 스며든 특별한 무엇이기 때문이다. 어떤 물건은 연락이 뜸한 친구나 옛 연인의 안부가 새삼 궁금하도록 하는가 하면, 어떤 물건은 나만의 사연을 간직한 것도 있다. 그렇지만 나중엔 버리자니 아깝고 당장 쓰일 것 같지는 않은 물건을 죽을 때까지 보관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져 온다. 결국, 조금 아깝다 싶어도 과감히 버리게 된다.

 

자다가 일어날 때마다 등장하는 새로운 물건들을 원하게 되면 과거에 소중히 여겼던 물건들의 자리가 위태해진다. 그들이 놓일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놓일 자리가 없어진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추억이 망각의 한 형태라고 말했다.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들은 필연적으로 망각에 이른다. 그렇지만 망각으로부터 추억을 끄집어내는 일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세태가 변화하면서 사라진 많은 것들이 있다. 그런 것들을 박물관(museum)’이라는 거대한 공간에 진열함으로써 적어도 기록과 흔적을 남기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끌리는 박물관(예경, 2017)이라는 책을 읽으니까 박물관이 있어야 할 이유를 이제 이해할 수 있었다.

 

끌리는 박물관은 박물관에 얽힌 추억과 상념을 진솔하게 표현한 스물네 명의 작가의 글들을 모은 책이다. 이 글은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의 자매지 <인텔리전트 라이프(Intelligent Life)>에 연재되었다. 스물네 편의 글은 <인텔리전트 라이프>의 문학 담당 편집장인 매기 퍼거슨(Maggie Ferguson)이 선별했다. 줄리언 반스(Julian Barnes)도 기획물 연재에 참여했다.

 

박물관에 잠들어 있는 물건들은 아날로그 이전부터 존재해온 화석 같은 존재다. 그렇지만 이 책에 소개된 박물관의 소장품들은 특별하다. 과거의 물건이 미래의 괜찮은 물건으로 간주한다.

 

미국 뉴욕에 있는 로어 이스트사이드 주택 박물관(Lower East Side Tenement Museum)화려함이라곤 한 치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다. 그곳에 가면 20세기 초 뉴욕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의 생활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곳을 세 번째로 방문한 로디 도일(Roddy Doyle)은 박물관에 사람을 매혹시키는 무언가가 있다고 말했다.

 

나는 종종 낡고 방치된 집들을 둘러보고 다니며 그곳을 내 집으로 삼아 여기저기 수리해서 산다고 상상해본다. 하지만 이곳에는 방치에 딱 들어맞는 이유, 심지어 사람을 매혹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이건 결코 방치가 아니다. 존경이다. 여기 사람이 살았다. 여기 사람의 삶이 있다. (26)

 

대부분 사람은 값비싸고, 모양새가 화려하고, 좀처럼 구경하기 힘든 물건이야말로 박물관에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파리의 미술관 중에서 가장 미술사적인 작품을 많이 소장한 루브르 박물관(Louvre Museum)에서 유독 관람객들이 몰리는 곳이 있다. 루브르의 심장부에 고고한 자세로 서서 미소 짓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모나리자. 가장 많은 관람객이 가장 오래 머물다 가는 작품이 바로 모나리자.

 

 

 

 

 

그녀를 만나기 위해 연평균 500만 명이 몰린다고 한다. 모나리자의 미소는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을 끌어당긴다. 그러나 인산인해를 이루는 장소에서 그녀를 가까이서 보기가 쉽지 않다. 이렇다 보니 모나리자라는 신비스러운 여인의 삶을 상상해볼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그녀는 가깝지만, 너무나 먼 사람이다. 역사 속으로 사라져간 사람들이 쓰던 물건들은 아스라한 역사만큼이나 신비하고 손때가 묻은 만큼이나 정겹다. 박물관에 보관된 물건 하나하나를 보면서 그때 그 사람은 이렇게 살았을 거야, 저렇게 살았을 거야, 상상해보는 재미가 쏠쏠하고 여유롭다. 현대의 사람과 과거 사람의 물건이 만났을 때 박물관은 살아있다.

 

박물관이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곳이지만 자신에게는 특별한 장소가 될 수 있다. 앨리슨 피어슨(Allison Pearson)은 자신이 사랑하는 장소인 로댕 미술관에 가기 위해서라면 하이힐을 신고 달릴 수 있는 여자다.[1] 그녀는 로댕 미술관이 모두에게 공개된 장소라는 사실에 아쉬움을 드러낸다.

 

 

 

 

 

시인 돈 패터슨(Don Paterson)은 카미유 코로(Camille Corot)의 그림 한 점을 보기 위해 프릭 컬렉션(The Frick Collection)을 찾는다. 그는 힘들 때마다 코로의 그림 속 호수로 피신한다. 그는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코로의 그림이 진정제 같다고 말한다. 이처럼 박물관은 상한 마음을 치유해주는 안락한 장소가 되기도 한다. 그런 장소를 만나면 계속 머물고 싶고, 기분이 좋아지는 특별한 곳을 아무에게나 알려주고 싶지 않다. 그곳에 머무르는 현재의 시간은 앞으로 영영 잊히지 않는 과거의 추억이 된다.

 

요즘 몇 년 새 우리 주변엔 추억의 물건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옛날이 좋았다는 말을 자주 한다. 마치 빛바랜 앨범 사진을 꺼내 들고 지나간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고 싶어서일까. 세상의 속도가 한없이 빨라지면서 조금은 뒤를 돌아보고 천천히 가고 싶은 생각이 더욱 절실해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냥 가볍게 지나치는 것들도 저마다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어 그 앞에 종일이라도 머물고 싶어진다. (앤 패칫, 133)

 

추억의 물건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마음을 안정시켜주는 자신만의 보물을 찾으려고 한다. 박물관에 가면 추억의 물건, 나만 알고 싶은 특별한 보물 모두 만날 수 있다. 박물관은 살아있다. 그곳은 매순간 마음이 흔들리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늘 변함없이 기다리고 있다.

    

 

 

[1] 앨리슨 피어슨이 쓴 베스트셀러 제목이 하이힐을 신고 달리는 여자(사람in,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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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03 17: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7-04 11:12   좋아요 0 | URL
루브르의 명성을 과시하려고 의도적으로 과장된 통계일 수 있습니다... ^^;;

겨울호랑이 2017-07-03 1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옛날 사진 특히 흑백 사진을 보면 칼라 사진보다 더 아련함을 느끼게 되네요... 그래서 사람들이 ‘찬란한 슬픔‘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cyrus 2017-07-04 11:15   좋아요 1 | URL
정말 좋은 표현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과거가 된 현재가 소중하고, 찬란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AgalmA 2017-07-03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카미유 코로 그림 보면 늘 치유받는 기분이 들어요ㅎㅎ 모나리자 보다 저는 코로 그림이 더 좋음^^

cyrus 2017-07-04 11:16   좋아요 0 | URL
저도요. 모나리자는 너무 흔해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