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두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불안을 피하려고 ‘회피 전략’을 쓴다. 만일 공포에 당당히 맞서려 한다면 우선 당면한 상황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맞설 대상도 파악이 되지 않고, 이 무서운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예측할 수 없게 되면, 공포의 긴장은 한없이 고조된다. 이 때 나타나는 회피 전략이 ‘희생양’을 만드는 방법이다. 공포를 분노로 바꿔 희생양을 향해 분출시킴으로써 공포의 긴장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내부에서 일어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희생양은 우선 밖에서 찾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내부에서라도 만들어 낸다. 13∼17세기에 유럽을 휩쓸었던 마녀사냥은 바로 집단적 회피 전략의 대표적 예였다.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2018, 리커버 특별판)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2009)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열린책들, 2009)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인간 삶의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다. 이때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사고의 중심을 신에서 인간으로 바꾸는 획기적인 전환을 성취했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열린책들)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어느 역사책보다 흥미진진하게 재현했다. 에코가 소설에서 재현한 시대는 ‘암흑의 중세’가 아니다. 신성함과 세속이 섞여 있는, 그야말로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회색의 중세’이다. ‘회색의 중세’는 이성과 과학의 빛이 조금씩 세상에 스며들기 시작한 지성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마녀재판을 하는 광기의 시대였다.

 

흉작이나 천재지변, 전염병 등 갑작스런 재앙의 원인에 대해 당시 학문의 수준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국가는 흉흉해진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방책이 필요했다. 더불어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교황권이 약해지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단들의 거센 도전에 부딪치면서 고전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52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Ⅳ)는 마녀 재판을 이단 심문의 관할 하에 두도록 교서를 내림으로써 이단 심문관에게 마녀사냥을 허용하고 연이어 마녀사냥 강화령을 발표하게 된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베르나르도 귀(Bernardo Gui)는 실존 인물이며 이단 심문관으로 활동했다. 그의 이단 심문이 얼마나 악명이 높았으면 ‘피에 굶주린 호랑이’라는 별명이 생겨날 정도였다. 마녀라는 소문이 나거나 밀고가 들어오면 고문을 병행한 심문이 시작된다. 고문 방식은 다양하다. 옷을 벗긴 뒤 온몸의 털을 깎고 침으로 찌른다. 꽁꽁 묶고 채찍질한다. 매달았다가 떨어뜨리고 뼈가 으스러지게 밧줄로 죈다. 마녀사냥은 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 등 전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했다. 처음에 마을 외진 곳에 혼자 살면서 민간 처방이나 전통 주술을 행하던 노파 정도로 인식되던 마녀가 점차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그 대상이 확대됐다. 전염병이나 기근, 전쟁 등 재난이 닥쳐오면 마녀의 저주 때문이라 하여 무고한 여성과 남성 들이 마녀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어갔다.

 

 

 

 

 

 

 

 

 

 

 

 

 

 

 

 

 

 

 

 

 

 

 

 

 

 

 

 

 

 

 

 

 

*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갈무리, 2011)

* [절판] 기류 미사오 《무시무시한 처형대 세계사》 (자음과모음, 2007)

* 제프리 버튼 러셀 《마녀의 문화사》 (르네상스, 2004)

* [절판] 브라이언 이니스 《고문의 역사》 (들녘코기토, 2004)

* [절판] 브라이언 P. 르박 《유럽의 마녀사냥》 (소나무, 2003)

 

 

 

 

마녀사냥의 전성기는 중세가 아니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이 악화한 시기(1560~1660년)였다. 후에 영국의 왕 제임스 1세(James I)가 되는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는 마녀의 존재를 믿었다. 그는 <악마론>이라는 책을 널리 유포하여 마녀사냥과 고문을 허용했다. 제임스 1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 I)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찰스 1세 시대에도 마녀사냥은 계속되었는데, 1645년에서 1646년 사이에 매튜 홉킨스(Matthew Hopkins)는 사회의 불안을 잠재운다는 명목으로 잔인한 마녀사냥을 집행했다. 자신의 (영국 의회가 인정하지 않은 비공식) 임무에 자부심이 넘쳤던 홉킨스는 자신을 ‘마녀 색출 장군(Witchfinder General)이라고 불렀다.

 

 

 

 

 

 

 

 

그가 즐겨 썼던 고문 방식은 마녀 혐의자를 묶은 채 물속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홉킨스의 논리에 따르면 마녀 혐의자가 물 위에 떠오르면 마녀로 판정되는 것이고, 가라앉으면 마녀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마녀 혐의자는 익사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홉킨스의 반인륜적 고문이 얼마나 심했으면 영국 의회까지 나서서 중재할 정도였다. 하지만 홉킨스는 마녀사냥을 멈추지 않고, 다른 고문 방식을 생각했다. 마녀 혐의자가 자백할 때까지 잠도 못 자게 하면서 계속 걸어 다니게 하거나 송곳으로 악마의 표식으로 여기는 신체 부위를 찔렸다. 홉킨스는 고문을 이용해서 수많은 마녀를 찾아냈다고 확신했으며 자기 일에 협력할 마녀 사냥꾼을 모집, 임명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고문 방식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다. 결국, 2년 만에 홉킨스의 마녀사냥은 중단되었고, 그 이듬해에 홉킨스는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

 

마녀로 인식된 타자를 처벌함으로써 얻는 마음의 위안은 집단 전체의 동의를 이끌어냈고, 비정상적인 사회 분위기를 조성했다. 근대 인권이 중시되며 마녀사냥에 대한 반성이 촉구됐지만,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고문이나 처형식이 있는 날이면 군중은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했다. 이 ‘끔찍한 볼거리’를 최대한 이용한 것이 당시 군주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 구경꾼들도 언젠가는 처형장의 눈요깃감이 될 수도 있었다. 권력은 늘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마녀 재판과 관련된 고문과 처형의 기록은 약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탄압과 인간의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한 사람을 희생하게 만드는 집단적 광기는 논리적 근거를 상실했고, 처형에서 비난으로 변질해 현대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 잔인함은 여전히 유지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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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와 정복 - 아스테카 신화, 콜럼버스와 베스푸치의 보고서, 필리핀 정복 문헌 라틴아메리카 고전 1
박병규.김선욱 지음 / 동명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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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은 아메리카 대륙을 놓고 희비가 엇갈리는 역사적인 해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를 보내 이 대륙을 발견한 스페인에게는 국운이 도약하는 감격의 해로 여겼다. 하지만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던 원주민들에게는 비극과 고통을 예고하는 불행한 해였다. 유럽의 신대륙 발견 이후 원주민들의 삶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의 한 부분이라 착각하여 ‘서인도’라고 명명했으며 원주민을 인도 사람들, 즉 ‘인디언(indian)이라고 부르게 됐다. 그는 죽을 때까지 신대륙을 인도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했고 그 나름의 지도를 그리면서 나름의 공간에서 살다 갔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는 달랐다. 그는 콜럼버스가 착각한 그 땅이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이라고 확신했다. 베스푸치가 여행에서 돌아와 친구에게 보낸 편지들은 1503년 『신세계』란 제목의 소책자로 출간돼 유럽 전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베스푸치가 남긴 기록에는 그가 네 차례나 신대륙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네 번이나 신대륙에 도착했는지 지금 확인할 길은 없다. 신대륙에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은 베스푸치가 아니라 1507년 세계지도를 만든 독일의 지리학자 마르틴 발트제뮐러(Martin Waldseemüller)였다.

 

《항해와 정복》‘동명사’ 출판사가 펴낸 ‘라틴 아메리카 고전’ 시리즈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은 신대륙 원주민들의 세계관과 신대륙 항해의 경위를 알 수 있는 당대의 기록들을 모은 것이다. 책의 1부는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원류라 할 수 있는 고대 아스테카(azteca, 아즈텍) 문명의 태양 신화를 소개한다. 뜨고 지는 태양은 매일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태양을 ‘시간’, ‘날’, ‘세계’, ‘역사’로 인식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섯 개의 태양(세계)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중 네 개가 이미 멸망해 마지막 다섯 번째 태양(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태양들은 오실롯(Ocelot, 고양잇과 동물, 아스테카 신화를 번역한 유럽인들은 ‘호랑이’ 또는 ‘재규어’라고 썼다), 바람, 물, 불에 의해 차례로 멸망했고, 다섯 번째 태양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공양이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2부는 콜럼버스의 항해 목적과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들로 구성되어 있다.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인도에 갈 결심을 한 후,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2세 부부(Isabel I, Fernando II, 가톨릭 양왕)를 찾아갔다. 항해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해 후원자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스페인은 인도로 가는 신항로 개척을 두고 포르투갈과 경쟁하고 있었기에 가톨릭 양왕은 콜럼버스의 후원자로 나선다. 콜럼버스는 항해를 떠날 때 가톨릭 양왕의 이름이 있는 친서를 소지하고 있었고, 이 친서는 동양의 군주를 만날 때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어렸을 적 위인전에 나온 콜럼버스만 보면, 이 사람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은, 용기 있는 모험가였다. 그런데 과연 콜럼버스가 훌륭하기만 한 사람일까? 아니,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서 그가 정말 훌륭한 사람일까? 오늘날 신대륙 발견의 일등공신으로 추앙받는 그이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그는 도전 정신이 강한 모험가라기보다는 사기꾼이며 구시대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했다. 《항해와 정복》의 2부는 우리 머릿속에서 과대평가 된 콜럼버스의 진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신대륙 도착을 알리는 콜럼버스의 편지』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가톨릭 양왕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된 편지다. 이 편지에서 교활한 책략가의 면모를 지닌 콜럼버스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왕과 여왕의 후원을 많이 받기 위해 신대륙의 이점을 과장하여 보고했다. 흔히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확신한 항해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구가 둥글 테니까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면 언젠가는 세계를 한 바퀴 돌아서 인도와 중국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3차 항해에서 가톨릭 양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콜럼버스는 지구가 서양 배 모양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강에 지상낙원이 있다고 믿었다.

 

3부는 이미 언급한 『신세계』를 포함한 베스푸치의 기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4부에 수록된 문헌들에는 동양 진출에 대한 스페인의 야심이 드러내 있다. 펠리페 2세(Philip Ⅱ)가 통치했던 시절(1556~1598년) 스페인은 필리핀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고, 이곳을 거점으로 해서 중국과의 교역을 시도하려고 했다. 정복욕이 넘칠 대로 넘친 스페인 군인들은 왕에게 중국 점령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1565년 필리핀은 스페인에 의해 정복된 후 초대 총독 레가스피(Legaspi)의 지배를 받는다. 그가 펠리페 2세에게 보낸 서한에는 필리핀의 지리적 환경, 원주민에 대한 기록이 내용의 주종을 이루지만, 필리핀 원주민과 그들의 토속 문화를 ‘야만’의 범주에 집어넣으면서 관찰한다. 이처럼 유럽은 신대륙에서 강제 수탈과 학살을 자행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문명화와 진보라는 용어로 호도하였다. 16세기 스페인의 아메리카 및 동양 정복 이후 그들이 내세운 보편적 가치는 기독교였다. 그들이 보기에 원주민들은 야만 상태에 빠져 우상숭배와 인신 공양의 관습에 젖어 있었다. 따라서 잔인한 지배자로부터 양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기독교 전파는 야만과 작별하기 위한 필연적인 작업이었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 군인과 선교사들은 무고한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그리고 스페인 제국의 동양 정복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재검토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고, 이는 신대륙을 위한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즉 미개한 원주민밖에 없던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의 문명을 전해주고 원주민의 삶을 향상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가장 발전한 문명의 중심지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의 신대륙 도착은 지금 라틴 아메리카라고 부르는 대륙을 피로 물들게 했다.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 성공 소식과 베스푸치의 『신세계』 출간은 라틴 아메리카를 약탈과 살육의 무대로 만든 서막이었다.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보존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피식민지인이 되면서 엄청난 희생이 강요되었다. 서양 근대문명은 이러한 희생으로 발전했다. 유럽의 신대륙 발견은 원주민에게 구원이 아니라 침략과 희생의 역사인 것이다. 《항해와 정복》은 배와 정복을 정당화했던, 오래된 서구 중심주의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 Trivia

 

* 105쪽

확실한 사실은, 1500년부터 1501년까지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의 오자] 이주하여 포르투갈 왕실의 명의로 신대륙으로 항해했고,

 

* 163쪽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비교적 수월하게 필리핀[‘을’의 오자] 점령했다.

 

* 241쪽

중국 명나라[‘의’를 빼야 함]를 방문한 첫 번째 기독교 사제 중의 한 명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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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0-30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야말로 서구식
사고의 글로벌리즘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모든 것을 서구식 사고의 틀에 맞춰서
생각하는. 아메리카의 원래 살던 사람들
을 인디안이라고 부르는 것부터 시작해
서 종교 문화 관습을 모두 야만으로 규
정하고 싹 뜯어 고쳤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컬럼버스 데이에 대한 반
성을 하자는 의견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cyrus 2018-11-01 12:27   좋아요 0 | URL
저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핍박받고 차별당한 역사를 생각하면 ‘인디언’이라고 부르면 안 되니까요.

2018-10-31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01 12:32   좋아요 1 | URL
당연하죠. 돈벌이, 맞습니다. 콜럼버스라면 분명히 자신과 함께 항해할 사람들을 꼬셨을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신대륙이 ‘부자가 될 수 있는 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

경제적 이익을 누리는 싶은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마음이지만, 사람을 죽일 정도로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경제적 이익을 누리는 것은 올바른 방법은 아니죠.

카스피 2018-10-3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메리카가 신대륙은 아니었죠.그곳에 수 많은 원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신대륙발견이라나 정말 서구중심적인 사고죠.

cyrus 2018-11-01 12:34   좋아요 0 | URL
‘신대륙’이라는 말에 서구 중심적 시각이 반영되어 있어서 이를 대안하는 용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
 
고문실의 쾌락 - 세계고문형벌의 발자취
존 스웨인 지음, 조석현 옮김, 조재국 감수 / 자작나무(송학)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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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국내에 고문과 형벌을 다룬 책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책이 있다고 해도 절판된 상태라서 구하기 힘들다. 《고문실의 쾌락》(도서출판 자작)‘세계 고문형벌의 발자취’라는 부제가 달린 절판된 책이다.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등지에서 행해진 것으로 알려진 고문 행위를 소개하고 있다. 원제는 ‘Pleasures of the Torture Chamber London’이다. ‘torture’는 고문을 뜻하는 단어이며 ‘몸을 비틀다’라는 뜻의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고문실의 쾌락》은 영국인 존 스웨인(John Swain)이라는 사람이 1931년에 발표한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우리말로 번역한 역자는 저자를 ‘영국의 사학자’라고만 소개한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존 스웨인은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는 인물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존 스웨인은 한 사람 또는 두 사람 이상의 저자가 만든 필명일 수도 있다.

 

출판사와 감수자는 이 책을 ‘역사서’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그러나 고증의 정확성이라는 역사서의 기본 원칙에서 놓고 볼 때, ‘하더라’ 식의 야사(野史)도 다루는 《고문실의 쾌락》은 역사서라고 보기 어렵다. 《고문실의 쾌락》의 감수자는 이 책이 ‘실제로’ 행해졌던 고문에 대한 보고서라고 소개하면서, 저자가 인용한 각종 기록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감수자는 신학을 전공한 사람(…)이다. 역사 비전공자가 역사서에 손을 대면 객관성과 고증의 정확성을 보장하기 어렵다.

 

잔인한 고문 행위를 묘사하고 증언한 사료 대부분은 글쓴이의 상상력이 덧칠되어 있을 수 있다. 이 책이 언급한 고대 및 중세의 고문 방식은 ‘기담(奇談)’ 형태로 전승되었고, ‘(후세에 만들어진) 전설’로 알려지는 경우도 있다.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은 사람 모양의 틀 안에 못이 박힌 중세의 고문 기구로 알려져 있다. 아이언 메이든을 우리말로 옮기면 ‘철의 여인’인데 《고문실의 쾌락》에서는 ‘무쇠 소녀’로 번역되었다(189쪽). 그런데 이 고문 기구의 용도를 언급한 기록은 많으나 고문 기구가 실제로 사용된 사례를 언급한 사료는 없다. 역사가들은 아이언 메이든이 대중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가상의 도구로 보고 있다.

 

번역본에 고문 장면을 묘사한 도판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지만, 몇 몇 도판에 대한 설명은 눈 뜨고 못 봐줄 정도로 엉망이다. 루벤스(Rubens)가 그린 메두사(Medusa)의 얼굴 그림을 ‘뱀 고문’이라고 설명했고(166쪽), 사드 후작(Sade)을 ‘상트’라고 썼다(172쪽).

 

이 책을 읽으면서 불쾌한 점은 ‘처녀(virgin)’, ‘여인’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고문 기구의 이름이다. 그 이름에는 여성을 ‘위협적인 존재’로 보는 여성 혐오가 반영되어 있다. 남성 중심 지배 체제에 저항하는 여성이나 사회의 주류에 벗어난 무고한 사람들은 ‘마녀’라는 낙인이 찍힌 채 고문을 받으면서 죽어갔다. 고문의 역사를 살필 땐, 잔혹한 고문 방식이 아니라 대중이나 특정한 사회 집단을 통제하려는 권력의 무자비한 통치술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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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0-23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진속의 아이언 메이든은 실제로는 어디 있을까요.
흑백사진으로 보는데도 못이 무시무시합니다.
사진을 보면서 앗, 무서운 언니네, 하려다 마지막 문단을 보고,
그러고보니, 예전엔 진짜 더 무서운 게 많았지, 했습니다.
cyrus님, 따뜻한 저녁시간 보내세요.^^

cyrus 2018-10-23 20:56   좋아요 1 | URL
고문 기구는 독일의 뉘른베르크라는 지역에서 만들어졌어요. 사진 속 고문 도구는 박물관에 전시된 모조품이었는데 세계 대전 때 분실된 적이 있었대요. 아이언 메이든이 워낙 유명해서 전시용 모조품이 많이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모조품을 중세 때 만들어진 실제 고문 도구라고 착각해요.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밤 보내세요. ^^
 
번안 사회 - 제국과 식민지의 번안이 만든 근대의 제도, 일상, 문화
백욱인 지음 / 휴머니스트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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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한 사람은 과거와 현재, 미래의 흐름 속에서 ‘현재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그래서 역사에 기록될 자신의 행적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기 마련이다. 반면에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행적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이익에 현혹되고, 진실을 조작하고, 과거를 미화한다. 진실을 외면하면서도 역사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기록될 거로 생각한다.

 

과거사 청산 운동은 결코 과거에 얽매인 퇴행적 사고에서 추진되는 운동이 아니다. 우리 민족사의 재정립을 위해서 역사의 치부에 대한 객관적 반성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 일각에는 아직도 식민지 근대화론을 들먹이며 과거사 규명을 부정적으로 보는 세력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 친일파와 그 추종자들은 학연으로 맺어진 굳건한 인맥으로 정치계, 문화예술계 등 각계에서 주류로서 기득권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나라 역사는 만주군 장교 출신의 대통령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대통령의 군사내란을 고스란히 모방한 독재정권이 등장했다. 그렇게 역사의 비극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국민교육헌장은 어떤 이유로 만들어졌나. 우리나라 최고 국립대학은 왜 성균관이 아니라 서울대학교가 됐나. 건빵은 어떻게 국군의 전투식량이 되었나. 이러한 질문에 대해 의문을 품어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혹자는 ‘그걸 알아서 뭐하게?’라고 말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것이다. 《번안 사회》를 쓴 사회학자 백욱인은 책 속에서 그 이유에 대해 집요하게 분석한다. 저자는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한국 근대를 관통한 ‘번안 문화’의 흔적이라고 주장한다.

 

식민 통치라는 왜곡된 형태를 통해서이긴 하지만, 1930년대 조선은 서구화와 근대화의 물결을 타기 시작했다. 1930년대 조선은 근대와 전근대의 모습이 혼재된 시대였다. 암울했던 식민지 시기였지만 댄스, 중절모와 양장 스커트, 자유연애 등 새로 유입된 서양식 문화에 대한 설렘도 공존했다. 이 시기에 일제가 번안한 서양문물은 철썩이는 파도처럼 식민지 조선을 침습했고, 식민지는 일본식 서양문물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서양문화를 받아들였다.

 

조선은 일본식 서양문물을 다시 번안했다. 다시 말해 일본이 번안한 서양을 조선이 다시 번안한 셈이다. 이러한 이중 번안을 통해 만들어진 문화는 과거의 전통을 때리면서 부수어버렸다. 그런데도 조선은 일본식 번안 문화를 서구의 참모습으로 착각했다.

 

최고 국립대학인 서울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조선 통치를 목적으로 만든 경성제국대학이 모태다. 이미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독자적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서양 정보를 수집하고 양서를 번역하는 기관인 요가쿠쇼(洋學所)를 설치했다. 세계열강에 되기 위해 근대화를 서두르던 일본은 차례차례 서양식 교육체계를 도입했고, 양학소를 관료 중심의 제국대학으로 재편성했다. 이 과정에서 도쿄제국대학이 세워졌다. 일본은 자신들의 역사와 사회제도, 그리고 식민으로서의 식민의식을 양성하기 위해 조선에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근대적 대학 시스템은 일본이 식민지 조선에 이식한 일본식 번안 교육제도의 영향을 받으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반쪽짜리 근대’의 모습은 해방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다. 해방 후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갈라졌고,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면서 미국식 서양 문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풍 서양문화의 강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본식 서양문화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방 후 조선에는 ‘두 개의 서양’이 공존하고 있었다. 일본식 서양과 미국식 서양. 박정희 정권은 ‘반공’과 ‘민족중흥’이라는 이념을 강조하면서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했다. 반공주의와 민족주의는 쌍두마차로 1960년대 근대화 시대를 이끌었다. 국민교육헌장의 등장은 국민이 국가에 종속됨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국민교육헌장은 천황의 절대 권력을 정당화하고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던 일제강점기의 ‘교육칙어’를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시대만 달라졌을 뿐 국가는 권력 그 자체였다. 유신헌법 공포로 이어지면서 국민교육헌장은 대한민국 교육의 이념이 됐고,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은 학교 교무실은 물론이고 각급 학년 교실에까지 게시됐다.

 

건빵은 6·25전쟁 이후에 등장한 전투식량이다. 건빵은 일본 제국주의 군대의 전투식량을 국군이 물려받은 것이다. 6·25전쟁 당시 한국군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백선엽 장군은 건빵을 생산하여 전 부대에 보급하도록 지시했다. 장군은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만주군 ‘간도 특설대’ 소속 중위 출신이다.

 

《번안 사회》를 읽으면 우리가 생각했던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식 근대화의 축소판이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저자는 일상생활 속에 파고든 일본식 번안 문화들의 기원을 추적하고, 이를 통해 1930년대와 1960년대 근대화의 풍경이 어떠했는지, 더 나아가 우리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준다. 독자들은 우리 고유의 것으로 생각했던 일본식 번안 문화가 지금도 우리 일상 속에서 재생산되는 과정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일본식 번안 문화의 뿌리는 너무나 깊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식민지 흔적이 남아 있고, 완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과거사 청산을 진즉에 해야 했으나 시대적 불운과 급격한 시대의 흐름에 번번이 부딪히는 바람에 실행되지 못했다.

 

 

 구호와 생각으로는 일본을 부정하지만 생활 속에는 일본을 따르는 이런 모순은 해방 이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반일 구호에 파묻힌 사람들이 생활 속에 침투한 식민주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들은 근대와 직접 마주하지 못한 채 이미 일본이 번안한 근대를 쉽게 따라 하면서 그 속에 숨은 식민주의를 알아채지 못했다. “일제의 급격한 몰락과 해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새로 짜진 세계 질서”, 한국전쟁과 급속한 산업화도 생활 속 식민주의 청산을 지연하는 원인이었다. (154~155쪽)

 

 

과거사 청산이 지연된 원인을 시대 탓으로만 돌릴 수 없다. 또 이런 입장에 대한 동의 여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동안 우리는 ‘숨은 식민주의’를 알아채지 못한 점과 그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우리 사회에 부족한 점이다. 역사를 알아야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를 보는 눈이 떠진다. 그런 점에서 사회 전반에 드러나 있는 일제의 잔재를 벗어날 뿐만 아니라, 그 뿌리까지 도려내려고 계속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일반 독자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반쪽짜리 근대’로 남게 된 어두운 역사를 알고, 그로 인해 생겨난 현재의 문제들에 직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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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16 23: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17 12:45   좋아요 1 | URL
저는 건빵이 일본의 전투식량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습니다. 우리가 서양(미국식) 문화라고 생각했던 것 대부분이 일본에서 나온 것이에요.
 

 

 

서양 중세의 어두운 면을 논할 때 많이 언급되는 사례로 초야권(初夜權)이 있다. ‘농노의 결혼 첫날밤에 신부를 차지하는 영주의 권리’라는 뜻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영주가 농노의 결혼을 허락한 조건으로 농노의 신부와 첫날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영국의 폭정에 대항하는 중세 스코틀랜드인들의 투쟁을 그린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서 영국 왕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 영주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초야권을 부활시킨다.

 

 

 

 

 

 

 

 

 

 

 

 

 

 

 

 

 

 

 

* 필리프 브르노 《만화로 보는 성의 역사》 (다른, 2017)

* 김응종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 (푸른역사, 2010)

* 김응종 《서양사 개념어 사전》 (살림, 2008)

 

 

 

초야권은 오랫동안 역사적 사실로 인정받아 왔다. 나 역시 중세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는 초야권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역사학계는 ‘초야권이 있다’는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초야권이 실제로 있는지도 확실치 않다고 주장하는 연구들이 나오고 있다. 초야권의 실재 여부를 둘러싼 논쟁은 19세기 중반부터 시작되었다.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며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다.

 

김응종 교수는 중세의 영주가 농노의 성을 착취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하면서도, 초야권은 ‘날조된 신화’라고 주장한다. 초야권(droit de cuissage)이라는 단어는 프랑스 계몽주의자들의 책에 언급된다. 계몽주의자들은 중세를 ‘암흑기’로 몰아세우고, 구제도(ancien régime)의 정점에 위치한 봉건 영주와 그들에게 예속된 가톨릭(구교도)을 비판했다. 계몽주의자들은 중세의 몽매함을 비판하기 위해 초야권을 언급하기 시작했고, 중세는 ‘전근대’를 상징하는 시대로 자리 잡게 되었다.

 

 

 

 

 

 

 

 

 

 

 

 

 

 

 

 

 

* 보마르셰 《피가로의 결혼》 (문예출판사, 2009)

 

 

 

보마르셰(Beaumarchais)의 희곡 《피가로의 결혼》은 18세기 귀족 사회의 위선을 풍자한 작품이다. 수잔느와의 결혼을 앞둔 백작의 하인 피가로가 초야권을 부활시키려는 바람둥이인 알마비바 백작의 흉계를 미리 알아채고, 백작의 부인을 끌어들여 백작을 골탕 먹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을 본 루이 16세는 귀족에 대한 풍자를 못마땅하게 여겨 공연을 금지했다. 보마르셰는 이 작품을 무대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 3년 동안 수정 작업을 했다. 기득권에 위치한 귀족층은 이 작품에서 솔솔 풍기는 혁명의 냄새를 참지 못했을 것이다. 귀족을 ‘야만적인 중세의 악습’을 행사하는 구시대적 인물로 묘사된 설정은 중세의 전근대적 면모를 비판하는 계몽주의자들의 인식과 맥을 같이한다.

 

초야권을 언급한 사료가 있긴 하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 연구가는 사료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초야권의 실재를 부정하는 입장을 보이는 책은 김응종의 《서양사 개념어 사전》 (살림, 2008),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 (푸른역사, 2010), 필리브 브르노의 《만화로 보는 성의 역사》 (다른, 2017)가 있다.

 

 

 

 

 

 

 

 

 

 

 

 

 

 

 

 

 

 

 

* [절판, No Image] 아우구스트 베벨 《여성론》 (까치, 1990)

* 수전 브라운밀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오월의봄, 2018)

* 후쿠다 가즈히코 《섹슈얼리티 성문화사》 (어문학사, 2011)

 

 

 

그렇지만 여전히 중세에 초야권이 있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초야권이 실제로 있었다고 주장하는 책들이 판매되고 있다. 독자들은 이러한 주장을 접할 때 신중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강간의 역사를 집대성한 수전 브라운밀러(Susan Brownmiller)《우리의 의지에 반하여》 (오월의봄, 2018)는 1975년에 나온 페미니즘 고전이다. 그러나 이 책도 시대적 흐름에 반영하지 못한 오류가 곳곳에 보이는데, 브라운밀러는 중세의 야만적인 강간 문화를 열거하면서 초야권을 언급한다.

 

 

 중세시대에는 야만적인 아내 구타, 궁정 성매매를 비롯해 봉건적 압제와 무법 상태가 어디랄 것 없이 만연했으나, 대륙에서 여성이 처한 상황은 영국보다 훨씬 더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 초야권 혹은 대감의 권리는 장원의 영주 밑에 있는 농노나 봉신 신분인 신랑 신부가 영주에게 일정량의 생산물을 기한 내로 지불하지 않으면 영주가 그 대가로 신부의 처녀성을 취할 권리를 갖는 관습으로 분명 일종의 강간이었다. (45쪽)

 

 

브라운밀러는 초야권을 ‘일종의 강간’으로 규정했다. 그녀는 주석을 통해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여성론》 (까치, 1990)을 참고했음을 밝혔다(미주, 640쪽). 《여성론》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의 고전으로, 1879년에 발표되었다. 베벨은 초야권을 부정하는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초야권이 근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초야권의 존재여부는 종종 부인되어왔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미풍과 신앙의 규범으로 삼고자 하는 바로 그 시기에 이 같은 제도가 시행되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들 것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초야권이 중세시간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근세까지도 남아 있었으며, 중세 봉건법전 속에서 하나의 분명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76, 77~78쪽)

 

 

 

후쿠다 가즈히코 《섹슈얼리티 성문화사》 (어문학사, 2011)는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성에 관한 토막 상식을 백과사전 형태로 정리한 책이다. 이 책에서는 초야권을 ‘결혼세’와 동일한 풍습으로 보고 있는데, 이러한 입장은 결혼세의 목적을 잘못 전달할 수 있다. 중세 농노에 속한 여성은 다른 장원의 남성 농노와 결혼해 이주하려면 영주에게 세금을 내야 한다. 초야권을 결혼세 징수의 명분으로 볼 수 있지만, 결혼세는 농노의 성이 아닌 노동력을 보상받기 위한 목적으로 내는 세금으로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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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05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10 11:40   좋아요 0 | URL
여성을 인격체가 아닌 물건으로 취급하는 남성들이 많아요. 그런 생각이 노골적으로 드러낸 말은 성차별적이고, 여성 혐오 발언입니다. 대부분 남자는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를 너무 자연스럽게 생각해요.

syo 2018-10-05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나저나 우리가 한 번 보긴 해야 할 텐데요.
봅시다 말 나왔다가 엎어진 게 작년 연말이었으니, 얼추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cyrus 2018-10-10 11:46   좋아요 1 | URL
연말에 유레카님과 같이 뵈면 좋을 것 같아요. 아직 일정은 잡혀 있지 않지만, 연말에 레드스타킹은 ‘페미니즘 부흥회’를 열어요. 독서모임 멤버가 아닌 사람들과 함께 노는 날이니 그 날 ‘카페 스몰토크’에 오셔도 되요. ^^

이하라 2018-10-12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초야권이 실재한 줄만 알았었네요. 막연히 상식이 되어 버린 것들로만 바라보면 안되겠군요.

cyrus 2018-10-13 07:38   좋아요 0 | URL
국내에 초야권을 깊이 있게 분석한 문헌이 전무해요. 초야권을 중세에 관한 토막 상식 정도로 언급되다보니 쉽게 와전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