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악마와 마녀의 이미지는 대부분 중세에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가 지옥을 연상하면 바로 떠오르는 악마만 해도 악마가 어떻게 생겼는지 당장 상상이 된다. 그 이미지는 익명의 중세 예술가들의 상상력과 편견 덕분에 형상화된 것이다. 악마와 마녀의 형상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존재했다. 악마와 마녀는 가끔 잘 생기거나 아름다운 모습으로 묘사된 적도 있지만 대부분은 못생긴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 클로딘느 시게르 못생긴 여자의 역사(호밀밭, 2018)

*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갈무리, 2011)

    

 

 

중세 서양의 정신적인 기둥은 기독교였다. 중세 서양의 기독교에서는 여성에 대한 가치관이 크게 왜곡되어 있었다. 하와(Hawwāh)의 원죄를 근거로 당시 교회와 남성들은 유혹을 일삼는 여성을 악한 존재로 여겨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했다. 마녀는 바로 이런 사고방식에서 생겨난 희생양이다. 종교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생겨난 마녀사냥은 십자군 전쟁의 실패와 극심한 기아 등으로 더욱 확대된다. 전쟁의 실패로 인해 불만 세력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권력을 가진 특권층은 사회적인 혼란을 마녀 탓으로 돌렸다. 특히 노파나 혼자 사는 과부 등 힘없는 여성이 주로 희생양이 되었다.

    

 

 

 

 

 

 

 

 

 

 

 

 

 

 

* 페르난도 데 로하스 라 셀레스티나(을유문화사, 2010)

*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열린책들, 2009)

 

    

 

마녀로 그려지는 늙고 추한 노파의 모습에는 노년과 죽음에 대한 중세 사람들의 두려움과 혐오감이 반영되어 있다. 늙고 추한 여자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보다 상대적으로 기피 대상이자 혐오의 대상이었다. 나이든 여성은 성애의 대상과는 동떨어진 것으로 취급했다. 중세에 나이든 여성은 미와 순결의 상징인 젊은 여성의 찬사와 대비되는 측면에서 육체적 쇠락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중세의 작가와 화가들 사이에 유행하던 소재 중 하나가 뚜쟁이였다. 남녀의 은밀한 관계를 이어주는 뚜쟁이는 주로 나이가 많은 노파로 묘사됐다. 특히 라 셀레스티나(La Celestina)는 탐욕스럽고 고약한 늙은 뚜쟁이의 대명사가 됐다. 소설 속 전당포는 대부분 사악한 인물로 그려진다. 전당포를 경영하는 사람은 서민을 상대로 고리를 챙기는 악덕업자로 묘사된다. 도스토옙스키(Dostoevskii)죄와 벌에서도 살해된 전당포 주인인 노파는 악을 상징한 인물이었다.

    

 

 

 

 

 

 

 

 

 

 

 

 

 

 

 

* [품절] 피지올로구스 피지올로구스(미술문화, 1999)

* [품절] 피지올로구스 기독교 동물 상징 사전(지와사랑, 1999)

    

 

 

중세 사람들은 밤에 인적이 드문 숲을 지나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숲에 악마와 마녀의 집회 장소인 사바트(sabbath)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숲에 사는 동물은 악마나 마녀 못지않게 위협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중세 사람들은 모든 동물에게 상징적 의미를 붙였다. 피지올로구스(Physiologus)는 동물의 속성과 성경 구절에 나오는 은유의 표현을 분석해 놓은 기독교 동물 상징 사전이다. 피지올로구스는 자연에 대한 박식한 자라는 뜻을 가진 저자의 이름이지만, 책의 제목으로도 알려지게 됐다. 기독교 윤리의 영향을 받은 문화에서 동물은 악의 화신이라는 부정적인 존재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 로버트 단턴 고양이 대학살(문학과지성사, 1996)

 

 

아마도 고양이는 마녀사냥의 광풍 속에서 여성 다음으로 가장 많이 희생된 존재일 것이다. 중세에 들어서면서 고양이는 이교도의 상징이자 악마의 앞잡이가 되었다. 역사학자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에 따르면 중세에 기록된 마녀사냥 관련 문헌들은 마녀들이 고양이로 변신한다고 증언한다. 물론, 이 허구적인 증언을 그대로 믿을 필요가 없다. 마녀사냥 문헌은 마녀로 억울하게 누명을 씌운 피해자의 진술보다는 마녀 신고자의 (허언에 가까운)목격담과 마녀재판을 담당한 법조인들의 증언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중세 사람들은 이단적 존재가 된 고양이를 마녀들이 숭배한다는 죄를 뒤집어씌워 무참히 살해했다. 17세기 후반 프랑스에서는 모의재판으로 고양이를 잡아 죽이는 사육제가 열렸다고 한다. 이 사육제는 부르주아 계급에 향한 분노를 표출하는 놀이 문화였다. 고양이 대학살을 처음으로 감행한 사람들은 파리의 가내 수공업자들이었다. 당시 파리의 가내 수공업은 부르주아에 속하는 장인과 프롤레타리아에 속하는 직인과 수습공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직인과 수습공들은 장인의 부인이 키우는 고양이만도 못한 생활고에 시달렸다. 고양이가 먹지 않은 사료를 한 끼 식량으로 먹은 수습공들은 고양이보다 못한 자신들의 삶에 분노하여 길 고양이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 사건은 프롤레타리아 민중들의 저항 의식이 표출되는 축제 형태로 확산됐다.

    

 

 

 

 

 

 

 

 

 

 

 

 

 

 

 

 

 

 

 

 

 

 

 

 

 

* 제프리 버튼 러셀 마녀의 문화사(르네상스, 2004)

* [품절] 브라이언 이니스 고문의 역사(들녘, 2004)

* [품절] 구사노 다쿠미 환상동물사전(들녘, 2001)

* 진 쿠퍼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까치, 1994)

    

 

 

고양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 대부분은 과거에 악마와 마녀와 계약을 맺은 동물로 낙인찍혔다. 중세의 악마 연구자와 마녀 사냥꾼들은 악마와 마녀의 존재를 식별하는 (말도 안 되는) 기준을 만들었고, 자신들의 논리를 판화나 팸플릿 형태로 유포했다. 영국의 마녀 사냥꾼 매튜 홉킨스(Matthew Hopkins)[1]<마녀의 발견>이라는 책을 써서 마녀를 식별하는 방법과 고문 방식 등을 상세히 정리했다. 그 책의 속표지에 동물의 모습으로 묘사된 악마들을 묘사한 그림이 있다. 이 그림은 마녀의 문화사(르네상스)고문의 역사(동녘)의 도판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그림에 등장한 동물들은 마녀가 부리는 잡귀들이다. 이들을 퍼밀리어(familiar)라고 부르는데, 고양이와 같은 마녀의 시중을 드는 일을 하는 동물들도 퍼밀리어에 속한다[2]. 악마 연구자들은 동물을 악마로 분류하여 이름을 붙였다.

 

 

 

 

 

 

 

 

 

 

 

 

 

 

 

<마녀의 발견> 속표지에 고양이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동물들이 나온다. 그레이하운드, 코커스패니얼, 토끼, 족제비(정확히 말하면 긴털족제비의 일종인 웨일스족제비) 등이다. 개도 고양이와 함께 악마의 동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고양이는 비를, 개는 바람을 불러온다고 하여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다(raining cats and dogs)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3]. 토끼는 번식력이 좋아 다산을 상징하는 동물로 알려졌지만, 악마 연구자들은 토끼의 번식력을 문란한 성행위와 연관 지어 해석하면서 토끼마저도 악마의 동물 범주에 포함시켰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불만이 있는 개인은 자신의 분노를 약자에게 표출한다. 그러므로 요즘 우리 사회에 빈번해지는 여성, 노인, 동물에게 가해지는 폭력은 낯설지 않다. 증오와 혐오를 동반한 폭력의 기원은 마녀사냥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폭력은 그 규모의 크고 작음을 떠나 우리의 일상사에 언제나 간여해왔고 영향을 미쳐왔다. 우리는 여러 집단이나 조직에서, 정치의 광장에서, 그리고 인터넷 바다에서 크고 작은 마녀사냥이 연일 벌어지고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둔감할 따름이다. 아주 오래된 잔혹극은 그칠 줄 모른다.

   

      

 

 

 

[1] 매튜 홉킨스의 악행을 소개한 필자의 글. 영국의 마녀사냥꾼(2018111일 작성, http://blog.aladin.co.kr/haesung/10437641)

 

[2] 구사노 다쿠미, 환상동물사전, 들녘, 2001, 307.

 

[3] 진 쿠퍼, 그림으로 보는 세계문화상징사전, 까치, 1994,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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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8-11-14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정독했습니다.

cyrus 2018-11-14 17:50   좋아요 0 | URL
TMI스러운 글이라서 개인적으로 만족스럽지 못했는데,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

캐모마일 2018-11-14 18:10   좋아요 0 | URL
포털사이트 기획글 읽는 거 같았어요. ˝숨겨진 악마의 문화사˝?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철학자들은 여자의 지적 능력을 남성보다 취약한 것으로 간주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자신의 책을 통해 선천적인 남성의 우월함과 여성의 열등함을 주장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여성은 영혼의 원리가 없는 불완전한 남성이었다. 여성에 대한 종교의 입장도 철학자들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옐토 드렌스 마이 버자이너(동아시아, 2017)

* 움베르토 에코 추의 역사(열린책들, 2008)

 

 

 

추의 역사(열린책들)을 쓴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는 악마와 마녀를 추하게 묘사된 도상에 인간의 어두운 본능을 억압하여 인간을 종교적으로 일깨우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다고 분석했다. 중세에는 성기가 수치심을 유발하는 대상으로 간주했는데, 이런 사회에선 출산과 무관한 성행위를 하는 여성은 마녀로 의심받았다. 중세 시대 사람들은 클리토리스를 마녀의 증표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악마에게 젖을 물린다는 마녀의 유두가 여성의 은밀한 부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 [품절] 기 베슈텔 신의 네 여자(여성신문사, 2004)

 

 

 

신의 네 여자(여성신문사)는 서구를 지배한 가톨릭이 어떻게 여성의 정체성을 조작하고 왜곡해 왔는지를 보여준다. 성경에서 여성 차별적 요소를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성경 곳곳에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묘사돼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가톨릭에서 여자는 마녀, 매춘부, 성녀, 바보 등 네 범주로 분류된다. 가톨릭이 생각하는 마녀는 악마와 결탁하여 사악한 주술을 부리는 존재이다. 지배자의 종교가 된 가톨릭은 마녀사냥을 통해 다른 종교적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았고, 교황청은 문서까지 만들어 마녀사냥을 허용했다. 매춘부는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는 음란한 여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여성의 음란함은 사악함을 상징하는 마녀로 연결된다. 가톨릭에서 여성은 마녀와 성녀로 구분되는 대립적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 뿌리는 인류 타락의 기원인 하와(Hawwāh)와 인류 구원의 어머니 마리아(Maria)에 있다. 문제는 마녀와 성녀를 구분하는 교회의 기준이 자의적이었다. 이렇다 보니 성녀로 추앙받던 사람이 마녀로 몰리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바보는 가톨릭이 선호하는 부류의 여성이다. 태어날 때부터 짊어진 하와의 원죄에서 벗어나기 위해 늘 희생할 준비가 돼 있고, 똑똑하지 않으며, 집안일에 충실한 정숙한 여성이다. 여자에게 구원은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믿음과 사랑과 순결로써 단정한 생활을 하는 것이라는 게 교회의 가르침이었다.

 

 

 

 

 

 

 

 

 

 

 

 

 

 

 

 

 

 

* 슐람미스 샤하르 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나남출판, 2010)

 

 

 

슐람미스 샤하르(Shulamith Shahar)는 중세 전성기인 12세기부터 마녀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5세기 중후반에 이르는 기간의 여성을 조사함으로써, 중세 여성에게 적용된 위계적 질서와 그 기준이 무엇인지 살핀다. 샤하르는 남성 중심 사회가 만들어낸 위계적 질서와 기준에 따른 차별과 억압이 중세 여성에게 동일하게 작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중세 여성 내부에서도 계층 및 신분에 의해 다른 경험을 하므로 각각의 여성들이 겪는 억압과 차별의 정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수녀가 될 수 있는 여성은 귀족 출신의 여성이었으며 수도원장이 되면 수녀원에 속한 땅을 소유하는 특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중세 여성은 자신이 속한 위치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면서 살아왔음에도 중세 남성과 동등한 존재로 대접받지 못했다. 여전히 중세 여성의 삶을 제약하는 걸림돌은 많이 남아 있었고, 상층 계급의 여성들도 제한된 권리를 누렸다. 그래서 샤하르는 중세의 모든 여성을 성직자, 전사, 농민다음 아래에 놓인 4신분으로 본다. 그녀의 책 4신분, 중세 여성의 역사(나남출판)여성신분/계층으로 이중 차별받는 중세 여성의 삶을 재구성한다.

 

 

 

 

 

 

 

 

 

 

 

 

 

 

 

 

 

 

* [품절] 거다 러너 왜 여성사인가(푸른역사, 2006)

 

 

 

거다 러너(Gerda Lerner)는 미국으로 망명한 독일계 유대인 출신 역사학자이다. 역사적으로 유대인은 늘 타자였고 '주변인'이었다. 그녀는 유대인과 여성이라는 이중의 억압을 받으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포함한 여성을 주변인으로 지칭하면서, 여성사를 젠더, 인종, 계급 등 모두가 얽혀 유기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여성이 겪는 차별은 다중적이고 다양하게 얽혀 있다. 여성사의 재구성에서 역사가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거대 서사의 정교한 재구성이다. 여성 사이의 차이, 그래서 생겨날 수 있는 서로 다른 정체성과 억압 문제 등 결국 여성사는 이런 복잡한 차이들을 어떻게 역사로 기록해야 할 것이냐는 중대한 과제에 직면해야 한다. 나는 여성사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사는 젠더는 물론 인종, 계층, 섹슈얼리티, 장애 등 다양한 기준에 의해 억압받은 주변부의 여성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학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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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 - 16세기 중남미 정복과 관련한 유럽인의 양심선언, 북스페인 라틴총서
바르똘로메 데 라스 까사스 지음, 최권준 옮김 / 시타델퍼블리싱(CITADEL PUBLISHING)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아이티는 1492년 인도 항로를 찾아 항해에 나선 콜럼버스(Columbus)가 카리브해의 서인도 제도에서 발견한 땅 중 하나이다. 이 섬에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지만, 콜럼버스 일행은 에스파냐(스페인)의 영토라는 의미가 담긴 ‘에스파뇰라(Española)로 이름 붙였다. 이 섬에 당도한 에스파냐의 정복자(conquistador)들은 수백 명의 군대와 개를 동원하여 원주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콜럼버스와 에스파냐의 목표는 오직 금이었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이 옮긴 전염병 때문에 거의 멸종됐고, 정복자들은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강제로 끌고 와 금 채굴에 나섰다.

 

정복자를 ‘항해가’ 또는 ‘모험가’로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그들은 남다른 모험 정신을 가진 자, 용기 있게 떠나는 자, 광대한 꿈을 가진 자였다. 그러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야심만만한 꿈은 잔인한 정복욕이 되었다. 정복자들은 무자비하게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금을 약탈했으며 토착 문명을 파괴한 자리에 자신들의 문명을 주입했다. 한 세계가 다른 세계를 발견(또는 관찰)하는 대항해 시대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발견과 정복은 결국 타인의 땅을 침입하여 빼앗는 모험이며, 대항해 시대의 모험은 본질적으로 침입과 약탈의 습성을 닮았다.

 

대항해 시대 이후 불붙은 유럽의 식민지 정복은 신의 이름으로 야만을 단죄했다. 도시 문명이 발달한 유럽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원주민을 바라보는 시선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이고 일방적이었다. 과연 그들의 주장처럼 ‘야만’은 발견된 것일까. 약탈 행위와 원주민 학살이 진정 그들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문명화를 위한 사명’ 때문이었을까. 콜럼버스와 동시대에 살았던 라스 카사스 신부(Bartolomé de Las Casas)는 일찍이 문명이 남긴 땅의 상처를 보듬으며 정복자들이 저지른 반인륜적 행위를 규탄했다. 그가 쓴 《인디아스 파괴에 대한 간략한 보고서》에는 에스파냐 정복자와 군인들의 잔인한 만행이 적나라하게 기술되어 있다. 콜럼버스는 카리브해에 흩어져 있는 여러 섬을 인도의 일부, 즉 인디아스(Indias)라고 믿었다. 그래서 유럽인들은 카리브해 쪽 지역을 서인도, 진짜 인도를 동인도라고 불렀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항로 덕분에 서인도 제도는 유럽인의 활동 무대가 되었다. 반면에 원주민들에게는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는 비극의 무대였다.

 

라스 카사스의 책은 단적으로 말하면 에스파냐의 카리브해 정복사가 아니라 카리브해 원주민들의 피착취사다. 에스파냐의 정복자들은 원주민에게 복음 전파를 위해서는 살육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원주민은 천성적으로 미개하여 이성으로는 설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과 사리 분별력이 있는 기독교인들은 ‘야만인들’에게 우월한 문화를 강제로 부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원주민의 권리와 정체성을 둘러싼 에스파냐 정복자들의 식민주의적 관점은 에스파냐의 식민지 정복 사업과 식민지 통치 정책을 놓고 벌어졌던 ‘라스 카사스-세풀베다 논쟁(바야돌리드 논쟁)에서 이미 모습을 드러냈다. 에스파냐의 인문주의자 세풀베다(Juan Ginés de Sepúlveda)는 유럽인의 원주민 정복을 지지했다. 라스 카사스는 원주민도 ‘하느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이므로 그들이 태생적으로 노예가 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라스 카사스는 직접 서인도 제도의 섬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는 에스파냐 기독교인들의 만행을 가까이서 지켜봤다.

 

 

 기독교인들은 말을 타고서 그들의 칼과 창으로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괴상한 잔혹함을 저지르기 시작했습니다. 에스빠냐인들은 마을로 들어가서 마치 우리에 갇힌 어린 양들을 공격하는 것처럼 어린이, 노인, 임산부, 아직 배를 가르지 않은 산모도 내버려두지 않고 공격하였습니다. 에스빠냐인들은 누가 단칼에 사람을 두 동강 내는지 혹은 말뚝으로 머리를 자를 수 있는지 창자를 들어내는지 내기를 하곤 하였습니다. 젖을 먹고 있는 젖먹이를 두 발을 잡고서 어머니의 젖가슴에서 떼어내어 바위에 머리를 내동댕이쳤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갓난아이를 뒤로 강에 던지고서는 웃고 조롱하면서 어서 발부둥치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 앞에 있는 모든 갓난아이들을 그 어머니와 함께 칼로 찔렀습니다. 구세주와 12사도를 기념하여 거의 땅에 발이 닿도록 13개씩 교수대를 설치해놓고 장작에 불을 지펴 산 채로 태워 죽였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몸을 마른 짚과 함께 묶고는 불을 질러 태웠습니다.

 

(『에스빠뇰라 섬에 대해』 중에서, 23쪽) 

 

 

에스파냐인들의 ‘원주민 씨 말리기’는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이었다. 정복자들은 원주민들에게 믿음을 강요했고, 저항은 처절하게 응징했다. 이후 수백 년 동안 복음과 총칼로 무장한 서구 문명의 탐욕 앞에 공존은 없었다. 사실 ‘신대륙 발견’이라는 표현에는 서구 중심적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유럽인에겐 새로운 대륙이지만, 그 땅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원주민들이 전통과 문화를 가꾸며 살아왔다. 유럽인들은 십자가와 총포를 들고 땅에 ‘상륙’했지,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라스 카사스의 책은 유럽 중심의 잘못된 세계관과 편견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했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대항해 시대의 어두운 이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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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2 16: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13 08:15   좋아요 0 | URL
그렇죠. 라스 카사스 신부가 유럽의 식민지 약탈 문제를 공론화해도 정복자들은 침략과 약탈을 멈추지 않았어요.
 

 

 

사람들은 두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불안을 피하려고 ‘회피 전략’을 쓴다. 만일 공포에 당당히 맞서려 한다면 우선 당면한 상황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맞설 대상도 파악이 되지 않고, 이 무서운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예측할 수 없게 되면, 공포의 긴장은 한없이 고조된다. 이 때 나타나는 회피 전략이 ‘희생양’을 만드는 방법이다. 공포를 분노로 바꿔 희생양을 향해 분출시킴으로써 공포의 긴장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내부에서 일어난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희생양은 우선 밖에서 찾지만, 여의치 않을 경우 내부에서라도 만들어 낸다. 13∼17세기에 유럽을 휩쓸었던 마녀사냥은 바로 집단적 회피 전략의 대표적 예였다.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2018, 리커버 특별판)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열린책들, 2009)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 (열린책들, 2009)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은 인간 삶의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던 시기다. 이때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사고의 중심을 신에서 인간으로 바꾸는 획기적인 전환을 성취했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열린책들)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어느 역사책보다 흥미진진하게 재현했다. 에코가 소설에서 재현한 시대는 ‘암흑의 중세’가 아니다. 신성함과 세속이 섞여 있는, 그야말로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진 ‘회색의 중세’이다. ‘회색의 중세’는 이성과 과학의 빛이 조금씩 세상에 스며들기 시작한 지성의 시대일 뿐만 아니라 마녀재판을 하는 광기의 시대였다.

 

흉작이나 천재지변, 전염병 등 갑작스런 재앙의 원인에 대해 당시 학문의 수준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국가는 흉흉해진 민심을 다스리기 위한 방책이 필요했다. 더불어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교황권이 약해지고, 로마 가톨릭 교회는 이단들의 거센 도전에 부딪치면서 고전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52년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Innocentius Ⅳ)는 마녀 재판을 이단 심문의 관할 하에 두도록 교서를 내림으로써 이단 심문관에게 마녀사냥을 허용하고 연이어 마녀사냥 강화령을 발표하게 된다.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베르나르도 귀(Bernardo Gui)는 실존 인물이며 이단 심문관으로 활동했다. 그의 이단 심문이 얼마나 악명이 높았으면 ‘피에 굶주린 호랑이’라는 별명이 생겨날 정도였다. 마녀라는 소문이 나거나 밀고가 들어오면 고문을 병행한 심문이 시작된다. 고문 방식은 다양하다. 옷을 벗긴 뒤 온몸의 털을 깎고 침으로 찌른다. 꽁꽁 묶고 채찍질한다. 매달았다가 떨어뜨리고 뼈가 으스러지게 밧줄로 죈다. 마녀사냥은 프랑스, 영국, 독일, 스페인 등 전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을 정도로 그 폐해가 심각했다. 처음에 마을 외진 곳에 혼자 살면서 민간 처방이나 전통 주술을 행하던 노파 정도로 인식되던 마녀가 점차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그 대상이 확대됐다. 전염병이나 기근, 전쟁 등 재난이 닥쳐오면 마녀의 저주 때문이라 하여 무고한 여성과 남성 들이 마녀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어갔다.

 

 

 

 

 

 

 

 

 

 

 

 

 

 

 

 

 

 

 

 

 

 

 

 

 

 

 

 

 

 

 

 

 

* 실비아 페데리치 《캘리번과 마녀》 (갈무리, 2011)

* [절판] 기류 미사오 《무시무시한 처형대 세계사》 (자음과모음, 2007)

* 제프리 버튼 러셀 《마녀의 문화사》 (르네상스, 2004)

* [절판] 브라이언 이니스 《고문의 역사》 (들녘코기토, 2004)

* [절판] 브라이언 P. 르박 《유럽의 마녀사냥》 (소나무, 2003)

 

 

 

 

마녀사냥의 전성기는 중세가 아니라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갈등이 악화한 시기(1560~1660년)였다. 후에 영국의 왕 제임스 1세(James I)가 되는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6세는 마녀의 존재를 믿었다. 그는 <악마론>이라는 책을 널리 유포하여 마녀사냥과 고문을 허용했다. 제임스 1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아들 찰스 1세(Charles I)가 왕위를 물려받았다. 찰스 1세 시대에도 마녀사냥은 계속되었는데, 1645년에서 1646년 사이에 매튜 홉킨스(Matthew Hopkins)는 사회의 불안을 잠재운다는 명목으로 잔인한 마녀사냥을 집행했다. 자신의 (영국 의회가 인정하지 않은 비공식) 임무에 자부심이 넘쳤던 홉킨스는 자신을 ‘마녀 색출 장군(Witchfinder General)이라고 불렀다.

 

 

 

 

 

 

 

 

그가 즐겨 썼던 고문 방식은 마녀 혐의자를 묶은 채 물속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홉킨스의 논리에 따르면 마녀 혐의자가 물 위에 떠오르면 마녀로 판정되는 것이고, 가라앉으면 마녀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마녀 혐의자는 익사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홉킨스의 반인륜적 고문이 얼마나 심했으면 영국 의회까지 나서서 중재할 정도였다. 하지만 홉킨스는 마녀사냥을 멈추지 않고, 다른 고문 방식을 생각했다. 마녀 혐의자가 자백할 때까지 잠도 못 자게 하면서 계속 걸어 다니게 하거나 송곳으로 악마의 표식으로 여기는 신체 부위를 찔렸다. 홉킨스는 고문을 이용해서 수많은 마녀를 찾아냈다고 확신했으며 자기 일에 협력할 마녀 사냥꾼을 모집, 임명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친 고문 방식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났다. 결국, 2년 만에 홉킨스의 마녀사냥은 중단되었고, 그 이듬해에 홉킨스는 결핵에 걸려 사망했다.

 

마녀로 인식된 타자를 처벌함으로써 얻는 마음의 위안은 집단 전체의 동의를 이끌어냈고, 비정상적인 사회 분위기를 조성했다. 근대 인권이 중시되며 마녀사냥에 대한 반성이 촉구됐지만,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다. 고문이나 처형식이 있는 날이면 군중은 우르르 몰려들어 구경했다. 이 ‘끔찍한 볼거리’를 최대한 이용한 것이 당시 군주들이었다. 아이러니하게 구경꾼들도 언젠가는 처형장의 눈요깃감이 될 수도 있었다. 권력은 늘 희생양을 만들어낸다. 마녀 재판과 관련된 고문과 처형의 기록은 약자에 대한 비인간적인 탄압과 인간의 야만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한 사람을 희생하게 만드는 집단적 광기는 논리적 근거를 상실했고, 처형에서 비난으로 변질해 현대까지 이어오고 있다. 그 잔인함은 여전히 유지한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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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와 정복 - 아스테카 신화, 콜럼버스와 베스푸치의 보고서, 필리핀 정복 문헌 라틴아메리카 고전 1
박병규.김선욱 지음 / 동명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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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은 아메리카 대륙을 놓고 희비가 엇갈리는 역사적인 해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를 보내 이 대륙을 발견한 스페인에게는 국운이 도약하는 감격의 해로 여겼다. 하지만 그곳에서 삶을 영위하던 원주민들에게는 비극과 고통을 예고하는 불행한 해였다. 유럽의 신대륙 발견 이후 원주민들의 삶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콜럼버스는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의 한 부분이라 착각하여 ‘서인도’라고 명명했으며 원주민을 인도 사람들, 즉 ‘인디언(indian)이라고 부르게 됐다. 그는 죽을 때까지 신대륙을 인도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했고 그 나름의 지도를 그리면서 나름의 공간에서 살다 갔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항해사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는 달랐다. 그는 콜럼버스가 착각한 그 땅이 인도가 아니라 신대륙이라고 확신했다. 베스푸치가 여행에서 돌아와 친구에게 보낸 편지들은 1503년 『신세계』란 제목의 소책자로 출간돼 유럽 전역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베스푸치가 남긴 기록에는 그가 네 차례나 신대륙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네 번이나 신대륙에 도착했는지 지금 확인할 길은 없다. 신대륙에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처음 붙인 사람은 베스푸치가 아니라 1507년 세계지도를 만든 독일의 지리학자 마르틴 발트제뮐러(Martin Waldseemüller)였다.

 

《항해와 정복》‘동명사’ 출판사가 펴낸 ‘라틴 아메리카 고전’ 시리즈 첫 번째 책이다. 이 책은 신대륙 원주민들의 세계관과 신대륙 항해의 경위를 알 수 있는 당대의 기록들을 모은 것이다. 책의 1부는 라틴 아메리카 문화의 원류라 할 수 있는 고대 아스테카(azteca, 아즈텍) 문명의 태양 신화를 소개한다. 뜨고 지는 태양은 매일 삶과 죽음을 반복한다. 아스테카 사람들은 태양을 ‘시간’, ‘날’, ‘세계’, ‘역사’로 인식했다. 그래서 그들은 다섯 개의 태양(세계)이 있다고 믿었는데, 그중 네 개가 이미 멸망해 마지막 다섯 번째 태양(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전의 태양들은 오실롯(Ocelot, 고양잇과 동물, 아스테카 신화를 번역한 유럽인들은 ‘호랑이’ 또는 ‘재규어’라고 썼다), 바람, 물, 불에 의해 차례로 멸망했고, 다섯 번째 태양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공양이 불가피하다고 믿었다.

 

2부는 콜럼버스의 항해 목적과 세계관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들로 구성되어 있다.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 인도에 갈 결심을 한 후,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2세 부부(Isabel I, Fernando II, 가톨릭 양왕)를 찾아갔다. 항해에는 막대한 비용이 필요해 후원자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스페인은 인도로 가는 신항로 개척을 두고 포르투갈과 경쟁하고 있었기에 가톨릭 양왕은 콜럼버스의 후원자로 나선다. 콜럼버스는 항해를 떠날 때 가톨릭 양왕의 이름이 있는 친서를 소지하고 있었고, 이 친서는 동양의 군주를 만날 때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어렸을 적 위인전에 나온 콜럼버스만 보면, 이 사람은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은, 용기 있는 모험가였다. 그런데 과연 콜럼버스가 훌륭하기만 한 사람일까? 아니,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해서 그가 정말 훌륭한 사람일까? 오늘날 신대륙 발견의 일등공신으로 추앙받는 그이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그는 도전 정신이 강한 모험가라기보다는 사기꾼이며 구시대적 세계관을 극복하지 못했다. 《항해와 정복》의 2부는 우리 머릿속에서 과대평가 된 콜럼버스의 진짜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신대륙 도착을 알리는 콜럼버스의 편지』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했을 때 가톨릭 양왕에게 보내기 위해 작성된 편지다. 이 편지에서 교활한 책략가의 면모를 지닌 콜럼버스의 성품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왕과 여왕의 후원을 많이 받기 위해 신대륙의 이점을 과장하여 보고했다. 흔히 콜럼버스는 지구가 둥글다고 확신한 항해사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구가 둥글 테니까 서쪽으로 계속 항해를 하면 언젠가는 세계를 한 바퀴 돌아서 인도와 중국에 닿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콜럼버스가 3차 항해에서 가톨릭 양왕에게 보낸 편지』에서 콜럼버스는 지구가 서양 배 모양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베네수엘라의 오리노코강에 지상낙원이 있다고 믿었다.

 

3부는 이미 언급한 『신세계』를 포함한 베스푸치의 기록들이 수록되어 있다. 4부에 수록된 문헌들에는 동양 진출에 대한 스페인의 야심이 드러내 있다. 펠리페 2세(Philip Ⅱ)가 통치했던 시절(1556~1598년) 스페인은 필리핀을 정복하는 데 성공했고, 이곳을 거점으로 해서 중국과의 교역을 시도하려고 했다. 정복욕이 넘칠 대로 넘친 스페인 군인들은 왕에게 중국 점령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1565년 필리핀은 스페인에 의해 정복된 후 초대 총독 레가스피(Legaspi)의 지배를 받는다. 그가 펠리페 2세에게 보낸 서한에는 필리핀의 지리적 환경, 원주민에 대한 기록이 내용의 주종을 이루지만, 필리핀 원주민과 그들의 토속 문화를 ‘야만’의 범주에 집어넣으면서 관찰한다. 이처럼 유럽은 신대륙에서 강제 수탈과 학살을 자행하였다. 그들은 이것을 문명화와 진보라는 용어로 호도하였다. 16세기 스페인의 아메리카 및 동양 정복 이후 그들이 내세운 보편적 가치는 기독교였다. 그들이 보기에 원주민들은 야만 상태에 빠져 우상숭배와 인신 공양의 관습에 젖어 있었다. 따라서 잔인한 지배자로부터 양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기독교 전파는 야만과 작별하기 위한 필연적인 작업이었다. 이 과정에서 스페인 군인과 선교사들은 무고한 원주민들을 잔인하게 죽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그리고 스페인 제국의 동양 정복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재검토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고, 이는 신대륙을 위한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즉 미개한 원주민밖에 없던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의 문명을 전해주고 원주민의 삶을 향상했으며, 이것이 오늘날 가장 발전한 문명의 중심지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럽의 신대륙 도착은 지금 라틴 아메리카라고 부르는 대륙을 피로 물들게 했다. 콜럼버스의 신항로 개척 성공 소식과 베스푸치의 『신세계』 출간은 라틴 아메리카를 약탈과 살육의 무대로 만든 서막이었다. 자신의 고유한 역사를 보존하면서 평화롭게 살아가던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에 의해 철저하게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피식민지인이 되면서 엄청난 희생이 강요되었다. 서양 근대문명은 이러한 희생으로 발전했다. 유럽의 신대륙 발견은 원주민에게 구원이 아니라 침략과 희생의 역사인 것이다. 《항해와 정복》은 배와 정복을 정당화했던, 오래된 서구 중심주의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는 책이다.

 

 

 

 

※ Trivia

 

* 105쪽

확실한 사실은, 1500년부터 1501년까지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의 오자] 이주하여 포르투갈 왕실의 명의로 신대륙으로 항해했고,

 

* 163쪽

로페스 데 레가스피는 비교적 수월하게 필리핀[‘을’의 오자] 점령했다.

 

* 241쪽

중국 명나라[‘의’를 빼야 함]를 방문한 첫 번째 기독교 사제 중의 한 명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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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0-30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이야말로 서구식
사고의 글로벌리즘의 순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모든 것을 서구식 사고의 틀에 맞춰서
생각하는. 아메리카의 원래 살던 사람들
을 인디안이라고 부르는 것부터 시작해
서 종교 문화 관습을 모두 야만으로 규
정하고 싹 뜯어 고쳤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컬럼버스 데이에 대한 반
성을 하자는 의견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cyrus 2018-11-01 12:27   좋아요 0 | URL
저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핍박받고 차별당한 역사를 생각하면 ‘인디언’이라고 부르면 안 되니까요.

2018-10-31 09: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1-01 12:32   좋아요 1 | URL
당연하죠. 돈벌이, 맞습니다. 콜럼버스라면 분명히 자신과 함께 항해할 사람들을 꼬셨을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신대륙이 ‘부자가 될 수 있는 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

경제적 이익을 누리는 싶은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마음이지만, 사람을 죽일 정도로 비도덕적인 방식으로 경제적 이익을 누리는 것은 올바른 방법은 아니죠.

카스피 2018-10-3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아메리카가 신대륙은 아니었죠.그곳에 수 많은 원주민이 살고 있었는데 신대륙발견이라나 정말 서구중심적인 사고죠.

cyrus 2018-11-01 12:34   좋아요 0 | URL
‘신대륙’이라는 말에 서구 중심적 시각이 반영되어 있어서 이를 대안하는 용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