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4월 29일 수요일, 배심원들은 과속으로 운전하다가 도주한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집단 구타한 네 명의 백인 경찰관에게 무죄 선고를 내렸다. 평결을 내린 총 열두 명의 배심원은 모두 백인이었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 결과는 흑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격분한 흑인들의 폭력과 방화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그 와중에 미국 언론은 로드니 킹 구타 사건보다 ‘두순자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두순자 사건은 로드니 킹이 구타당한 날과 비슷한 시기인 1991년 3월에 일어났다. 흑인 밀집 지역에서 한인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두순자는 자신의 가게에 있는 주스를 사려던 흑인 소녀를 절도범으로 오해했다. 두순자는 흑인 소녀와 실랑이를 벌인 끝에 권총으로 살해했다. 이 사건이 미국 주류 언론에 의해 부각되면서 흑인들의 분노어린 시선은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한인들에게로 향했다. 4월 29일부터 5월 4일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흑인들의 폭동으로 한인업소 2천여 개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LA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인종 간의 극단적인 폭력으로 치달았다. ‘한흑(韓黑)갈등’으로 불거진 LA 폭동은 당시 재미 한인사회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인명과 물적 피해뿐 아니라 그동안 어렵사리 미국 사회에 정착해가던 한인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 장태한 《미국의 흑인, 그들은 누구인가》 (고려대학교출판부, 2012)
27년이나 지난 지금, 폭동이 일어난 도심 현장을 가까이선 본 재미 한인과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폭동의 살벌한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느낀 한국 국민은 LA 폭동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흑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LA 폭동을 흑인의 비도덕성과 폭력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집단적 일탈 행위’로 인식한다. 그들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폭동에 동참한 흑인을 비판하면서 흑인사회 전체를 범죄자 집단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LA 폭동은 ‘가해자(폭동을 일으킨 흑인)’와 ‘피해자(재미 한인)’로 구분하게 만드는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은 아니다.
《미국의 흑인, 그들은 누구인가》는 LA 폭동이 일어나게 된 거시적인 원인을 되짚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장태한 교수는 LA 폭동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했으며 한흑 갈등과 재미 한인 역사 등을 연구했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LA 폭동은 흑백의 빈부 격차, 흑인 사회의 실업률, 경찰의 과잉진압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려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런데 미국 언론은 ‘두순자 사건’과 한인업소를 습격하는 흑인들의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로 인해 LA 폭동은 ‘지역 상권을 둘러싼 흑인과 재미 한인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인종 대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흑인을 ‘재미 한인을 공격하는 가해자’로 보게 만드는 언론의 프레임(frame)은 흑인을 공정하게 대우하지 않았던 백인과 재미 한인들의 인종 차별 문제를 은폐한다. 1970~1980년대에 미국에 이민을 온 한인들은 단일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자라왔다. 그들은 ‘순수 혈통’을 중요시했으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민족적이고 공동체적인 사회를 지향했다. 다른 인종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걸 몰랐다. 재미 한인은 미국 사회의 주류인 백인에게 매우 저자세를 취하면서도 흑인과 소수 인종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흑인들의 불만을 커지게 했고, 1992년 로드니 킹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내려지면서 오랫동안 참아왔던 흑인들이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LA 폭동을 경험한 재미 한인들은 그 사건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LA 폭동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장태한 교수는 LA 폭동의 원인을 ‘인종에 대한 무지와 차별’이라고 지적한다. LA 폭동 이후로 재미 한인은 미국의 다인종 다민족 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반성했으며 흑인을 포함한 여러 인종과 교류하는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열린책들, 2015)
* 하퍼 리 《파수꾼》 (열린책들, 2015)
* [e-Book] 하퍼 리 외 《하퍼 리 버즈북》 (열린책들, 2015)
차별하려는 의도가 있든 없든 보통 자신과 다른 인종과 민족을 생각하면 이런저런 고정관념과 편견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미국 흑인 못지않게 미국 남부인도 부정적인 편견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 하퍼 리(Harper Lee)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미국 남부 노예제도의 인종 차별을 다룬 작품이다. 작가는 억울한 누명이 씌워진 흑인을 변호하는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를 내세워 편견이 가져오는 인종 차별 및 갈등 문제를 개인의 정의와 양심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소설과 동명의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애티커스 핀치는 ‘정의로운 백인 남성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앵무새 죽이기》로 제목과 내용을 완전히 고치기 전에 쓰인 《파수꾼(Go Set a Watchman)》에서 애티커스 핀치는 전작과 완전히 180도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와 다른 피부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라고 강조하던 변호사가 인종차별주의자로 변신한 것이다. 대부분 독자는 《앵무새 죽이기》와 《파수꾼》의 애티커스 핀치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나이가 들면서 변절했다고 평가한다. 애티커스 핀치에 대한 독자들의 판단과 해석은 자유다. 나는 《앵무새 죽이기》와 《파수꾼》의 애티커스 핀치를 ‘노예제에 반대한 남부인의 모습’과 ‘노예제를 옹호한 남부인의 모습’을 각각 대변하는 인물로 보고 싶다. 즉 두 작품에 나오는 애티커스 핀치의 모습은 단일한 이미지로 규정할 수 없는 남부인의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품절] 이영효 《미국사 낯설게 보기》 (전남대학교출판부, 2014)
* 손영호 《마이너리티 역사: 혹은 자유의 여신상》 (살림, 2003)
* 김형인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 (살림, 2003)
《앵무새 죽이기》는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품이긴 하지만, 남북전쟁 시기에 만들어진 남부인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한계가 있다. 《앵무새 죽이기》에 묘사된 메이콤은 ‘백인 쓰레기(white trash)’라는 좋지 않은 별명이 붙여진 가난한 백인들이 모여 사는 시골이다. 메이콤 주민들은 혈연으로 얽힌 폐쇄적인 관계를 지향한다. 하퍼 리는 남부에 위치한 이 마을을 외부인의 유입을 받아들이지 않는 단절된 지역으로 묘사한다.
가난하고, 노예제 유지를 고집하는 보수적인 남부인 이미지는 노예제를 둘러싼 남부인과 북부인 간의 노선 갈등이 고조되던 1820년대에 만들어졌다. 북부의 반노예제 운동가들은 노예제를 옹호하는 남부인들의 도덕성을 문제 삼았고, 성서 구절을 인용해 노예제의 허위를 증명하려고 했다. 북부인들의 공격에 의식한 남부인은 ‘남부 연합’을 구축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갔고, 남부의 기독교 복음주의자들도 성서를 인용하여 노예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남부인은 노예를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가부장적 온정주의’를 내세워 노예제의 결점을 지우려고 했다. 이로써 미국은 남과 북이라는 두 진영으로 갈라지게 되고, 미국인들은 자신들만의 하나님(노예제를 반대하는 하나님, 노예제를 옹호하는 하나님)을 내세워 남북전쟁을 일으킨다. 북군이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남북전쟁 이후 미국 역사는 북부인 중심의 역사, 즉 ‘승리자 중심의 역사’로 기록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역사가는 자유과 노예 해방을 외친 북부인을 찬양했고, 반대로 남부인을 고리타분한 패배자로 평가했다.
지금도 여전히 남부는 자유와 도덕과 담쌓은 사람들이 사는 폐쇄적이고 단절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일관된 남부 이미지는 남부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부정적인 남부 이미지에 대한 반론의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남부에 다수의 흑인 노예를 소유한 농장주보다 ‘노예를 한 명도 소유하지 않은 자영농’이 더 많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자료가 있다. 그리고 북부인들도 남부인들과 다름없는 인종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편견이 어느 정도 반영된 남부의 부정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북부의 역사를 지나치게 찬양하는 것은 미국의 반쪽짜리 역사만 보는 것과 같다.
《미국사 낯설게 보기》(8, 9, 10장)와 살림지식총서에 포함된 《마이너리티 역사: 혹은 자유의 여신상》과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는 주류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미국 흑인과 미국 남부인의 삶을 확인할 수 있는 책들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진리와 허위, 또는 정의와 불의로만 보는 사람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얽매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검은색과 흰색만 볼 뿐, 그사이의 수많은 다른 색의 스펙트럼은 보지 못하게 된다. 인종, 민족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나와 다른 인종과 민족, 심지어 지역 주민을 고정관념만 가지고 정의 내리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고정관념을 갖는다. 다시 말해 인간은 누구나 비슷한 사람, 같은 언어와 비슷한 억양을 가진 사람을 즉각적으로 좋아하는 성향은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인간다운 약점을 피하려면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 핀치가 자신의 딸 스카웃(Scout)에게 했던 말을 상기시켜야 한다. 너무나도 쉬운 일인데도, 이렇게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다.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
(김욱동 옮김, 《앵무새 죽이기》 5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