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는 유학을 국가통치의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당시 유학의 주류를 이뤘던 성리학은 인간 심성에서부터 우주 운행에 이르기까지 태극, 음양, 이기(理氣) 등의 이치로 사물의 현상과 원리를 해명하는 학문이다. 성리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인격 수양과 인간관계의 의리는 물론, 사회와 국가의 운영에까지 도덕에 기초한 이상을 구현하려 했다.

 

천자문을 익힌 아이들은 서당에 가서 소학(小學)을 읽고 배운다. 유교 사회에서는 본래 바른 생활습관과 품성을 배양하기 위한 인격 수양을 중시했다. 소학은 충효 · 예절 · 윤리 등을 알려주는 인격 수양의 지침서이다. 조선 시대의 사대부 여성들은 결혼하기 전에 소학과 같은 기초적인 유교 경전을 읽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사대부 남성들과 함께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소학에 있는 유교윤리를 그대로 실천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바로 성인이요 군자인 것이다. 유교 경전을 읽으면서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여성도 군자가 될 수 있다.

 

 

 

 

 

 

 

 

 

 

 

 

 

 

 

 

 

* 정옥자 사임당전(민음사, 2016)

 

 

 

5만 원 지폐에 등장하는 신사임당을 얘기하면 우선 현모양처가 떠오르고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것은 16세기 노론(老論: 조선 시대 붕당의 한 정파)의 수장이었던 송시열이 주도한 노론의 대모(大母) 만들기프로젝트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다. 이이의 제자들은 노론에 속했고, 사임당은 스승을 낳은 위대한 어머니로 알려지게 됐다. 사임당은 탁월한 그림 실력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몇몇 사대부들은 신사임당의 그림 실력을 칭송하면서도 자녀 교육과 정숙한 행실에 더 초점을 맞추어 평가했다. 사임당전(민음사)의 저자인 정옥자 교수는 사임당에 대한 노론의 평가가 그녀의 예술가적 면모를 의도적으로 은폐했다고 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론은 사임당의 행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교적 가치를 예술가적 면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쨌든 화가 사임당은 잊히고 훌륭한 어머니 사임당만 남게 되어 지금까지 알려졌다.

 

이이는 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선비행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선비는 세상을 떠난 사임당을, 행장(行狀)은 고인의 행실을 적은 글이다. 이 글에서 이이는 어머니의 그림 실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녀의 학식과 인격을 언급했다. 그렇다면 이이가 고인이 된 사임당을 가리켜 선비라는 호칭을 사용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이다.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들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에 이어져 온 유학자들은 유교 이념을 실현하는 인격을 선비로 확립하였다. 이이는 유교 이념을 철저히 수련하고 실천한 사임당의 행실에 주목하여 선비라는 호칭을 썼다. 따라서 <선비행장>화가 사임당선비 사임당이라는 뛰어난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글이다.

 

사임당과 이이의 명성에 완전히 가려지는 바람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임당의 맏딸이자 이이의 손위 누이인 이매창작은 사임당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학식과 예술 실력을 두루 갖춘 여성이다. 사임당의 막내아들 이우의 8대손인 이서는 <집안에 내려오는 서화첩 발문>에 이매창을 부녀자 중의 군자라고 언급했다.

 

 

 

 

 

 

 

 

 

 

 

 

 

 

 

* 김경희 임윤지당 평전(한겨레출판, 2019)

 

 

 

임윤지당군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성리학자이다. 사대부 여성이 학문에 정진할 수 없는 불리한 시대 속에 윤지당은 공부와 연구에 매진한다. 성리학을 공부한 그녀는 성인과 범인(凡人)이 본래 같은 성품을 타고났다고 보며 이를 전제로 하여 남성과 여성의 본성에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러면서 윤지당은 여성도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일평생 유교 경전과 성리학을 연구하여 군자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노력했다.

 

윤지당은 앞서 언급한 사임당과 비교되기도 한다. 사임당이 시와 그림을 중심으로 한 교양과 예술에 몰두했다면, 윤지당은 사상과 역사, 문장, 교양을 두루 겸비한 학자였다. 현재까지 윤지당이 쓴 것으로 알려진 시는 단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다. 사임당이 이이라는 대학자를 아들로 두어 유복했다면, 윤지당은 남편과 아들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 박복했다는 점이 대비된다. 두 사람이 각각 예술과 학문에 탐닉할 수 있었던 공통적인 배경에는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가 있었다. 두 사람의 어머니는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딸에게도 인격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절판] 이영춘 강정일당(가람기획, 2002)

 

 

 

윤지당의 영향을 받은 여성 성리학자는 강정일당이다. 그녀는 사임당과 윤지당보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남편의 집안도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진 명문가 출신이었다. 정일당은 길쌈과 바느질로 생계를 책임졌다. 시댁의 가계를 책임지던 정일당은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도 바느질하면서 틈틈이 경전을 읽고 공부한 것이 전부다. 정일당의 공부는 확고한 생각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천성을 기준으로 한 남녀의 차별이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은 정일당보다 조금 먼저 태어나서 활동한 윤지당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성인이 되고자 하는 삼당군자(신사임당, 임윤지당, 강정일당)의 노력은 오랫동안 계속해 왔지만, 학문적으로 이론화되고 또 그 생각이 공유된 적은 별로 없다. ‘성품에 남녀의 차이가 없다는 말은 남녀가 역할은 달라도 인간 자체로는 같다는 뜻이다. 우리가 아는 보통 조선 시대의 여성의 삶은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이 놓친 반쪽짜리 삶이다. 역사의 기록 밖으로 밀려나 있던 조선 시대 여성들의 모습이 학계를 넘어서 일반 대중에게도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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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05 11:54   좋아요 0 | URL
‘유관순이냐, 사임당이냐’는 식으로 화폐 인물 선정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면 오히려 잃을 게 많아지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어요. 저는 두 분 모두 훌륭하며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임당의 예술가적 면모를 잘 모르거나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업적이냐고 말합니다. 그림 그리는 일을 사임당의 개인적인 활동으로 보는 것이죠. 그런 논리라면 위대한 화가뿐만 아니라 소설가도 화폐 인물 후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다른 나라의 화폐에는 소설가, 화가, 음악가의 얼굴이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훌륭한 예술가들이 있으며 당연히 화폐의 얼굴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2019-09-05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9-09-04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신사임당을 우리는 조선시대 현모양처의 대명사처럼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뭐랄까 현대 여성처럼 자기주장과 개성이 강한 여장부였다고 하더군요^^

cyrus 2019-09-05 11:57   좋아요 0 | URL
‘현모양처’ 이미지나 그녀의 예술적 능력 때문에 사임당을 지폐 인물로 선정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예술적 능력도 화폐 인물의 자격 조건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발 하라리의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 - 전쟁, 역사 그리고 나, 1450~1600
유발 하라리 지음, 김승욱 옮김, 박용진 감수 / 김영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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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가 개인의 발견과 함께 발전했다는 건 상식이다. 르네상스부터 시작해서 종교개혁, 시민혁명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적 개인의 등장 과정은 반드시 외워야 하는 역사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토대로 쓰인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에서 밝힌 유발 하라리(Yuval Harari)의 주장은 흥미롭다.

 

 

 르네상스 시대 군인회고록의 저자들을 문헌 속의 개인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135)

 

 

이게 무슨 소리인가? 서구에서 개인이 형성된 시기는 15세기로 알려져 있다. 개인은 중세의 성벽을 뚫고 르네상스 시대에 발견되었다는 스위스의 역사학자 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의 견해가 정설로 받아들여진 결과다. 그렇다면 르네상스 시대에 나온 전쟁회고록은 개인정체성을 인식한 사람의 기록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하라리는 부르크하르트의 견해를 뒤집는다. 그렇다면 부르크하르트가 주목한 ‘개인’은 누구란 말인가? 전쟁회고록또는 군인회고록(military memoirs)은 말 그대로 전쟁에 참전한 군인 출신 귀족이 쓴 글이다. 하라리는 1450년에서 1660년 사이에 발표된 군인회고록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지 살핀 다음, 20세기의 군인회고록과 비교 분석한다.

 

르네상스 군인회고록을 쓴 저자들은 자신을 개인으로 묘사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전쟁터에서 살아가면서 느낄 법한 어떠한 감정도 표현하지 않았다. 하라리는 르네상스 군인회고록을 ()개인주의적 문헌으로 규정한다. 르네상스 군인회고록은 실증적인 문헌으로 보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역사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따라 서술된다. 그러나 르네상스 전쟁회고록은 인과관계 중심의 서술과 거리가 멀다. 르네상스 전쟁회고록 저자들은 자신이 목격한 사건들을 쭉 나열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실하게 쓰려는 의도는 없었다. 전쟁회고록 저자들은 자신들이 꼭 쓰고 싶은 것들,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것들(choses digne de memoire)을 선별하여 기록했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억할 만한 것전사 귀족(warrior noblemen)으로 살아가면서 얻는 명예이다. 적들을 제압해서 전쟁에 승리하는 데 기여한 전사 귀족은 자신의 명예로운 업적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전쟁회고록은 전사 귀족으로서의 개인사와 역사가 하나로 일치된 기록물이다.

 

르네상스 전쟁회고록이 전사 귀족의 명예를 위대한 역사로 기념하기 위한 기록이라면, 20세기 전쟁회고록은 전쟁을 경험해보지 않은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20세기 전쟁회고록의 저자들은 전쟁터 한가운데에 있는 군인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전쟁의 잔인하고 처절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20세기의 회고록에는 저자의 감정과 생각 등이 많이 나온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국가나 사회공동체보다 우선시하는 사상이다. 우리는 개인주의를 당연하고 생득적인 것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개별적인 자아로 인식하기까지 오랜 역사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개인의 욕망과 양심에 따른 행동은 집단을 유지하려는 권력의 지속적 감시 대상일 수밖에 없었고, 감시와 억압을 벗어나 새로운 정신의 영토로 나아가려는 개인들은 소수자로 낙인찍혀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르네상스의 전사 귀족들에게 명예는 자신의 체면뿐만 아니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가치였다. 그들의 권위는 위계적인 귀족 남성 중심 사회를 지탱해주는 힘이었다. 그 힘에 억눌린 개인들이 얼마나 많을지 안 봐도 비디오. 우리는 그동안 르네상스 시대에 본격적으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개인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르네상스에 발견되었다는 이 개인은 또 다른 인격체의 삶과 자유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인간적인 존재로 보기 어렵다. 비인간적인 전사 귀족들은 자신의 명예를 얻기 위해 폭력과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개인과 개인주의의 기원에 대한 오해를 풀어줄 뿐만 아니라 역사학계의 주류가 규정한 개인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 사람들은 역사로 기록되지 못한 무명의 개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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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9-03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의 근대화 시기 서구 책을 번역할 때 가장 옮기기 어려운 단어가 ‘individual’이었다고 하던데요. 그렇게 본다면 우리에게는 개인주의가 정말 얼마 안 된 개념인 것 같습니다.

cyrus 2019-09-04 11:52   좋아요 0 | URL
개인주의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지만, 북다이제스터님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우리가 아는 개인주의는 서양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이 번역한 서양’의 개인주의에 가까울 것 같아요. 개인주의를 받아들이는 역사가 짧다보니 개인주의에 대한 진지한 연구라든가 토론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2019-09-04 0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04 11:59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좋은 말을 들으면 ‘글을 잘 써야겠다’라기보다는 ‘정확한 내용을 가지고 글을 써야겠다’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저도 아는 게 많지 않아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통해서 지식의 범위를 넓혀갑니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글로 썼다고 해서 모조리 기억하는 건 아니에요. 예전에 본 내용들이 잊고 있다고 느껴지면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해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용을 습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독서와 글쓰기에 몰두하게 됐어요. 독학도 한계가 있어요. 독서모임에 참석하면 그동안 독학을 하면서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과 저의 단점도 알게 돼요. 제 글도 한계가 있으니 읽다가 이상하다 싶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의견을 주시거나 질문하셔도 좋습니다. ^^
 
흡혈귀 : 잠들지 않는 전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35
장 마리니 지음 / 시공사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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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뱀파이어(Vampire)는 책이나 영화, 만화에 나오는 상상의 존재이다. 뱀파이어는 밤에 활동하면서 살아있는 자의 피를 빨아먹는다. 중세에 들어서면서 뱀파이어가 무덤에서 나와 돌아다닌다는 얘기가 떠돌았고(이때 ‘뱀파이어’라는 단어는 나오기 전의 시대였고, 무덤에서 나오는 흡혈귀를 ‘피 빨아먹는 시체’라고 불렀다), 그런 미신은 특히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에다 문맹률이 높았던 동유럽 지역에 유행했다.

 

미신은 괴물이 나오는 전설을 만들었다. 그 전설의 주인공은 현재 루마니아의 영토가 된 왈라키아(Wallachia) 왕국의 왕자 블라드 테페스(Vlad Țepeș, ‘체페슈’라고 쓰기도 한다)다. 그는 브람 스토커(Bram Stoker)의 소설 《드라큘라(Dracula)에 나오는 드라큘라 백작의 모델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오스만 제국의 침입에 맞서 싸운 루마니아인의 영웅이었다. 하지만 훌륭한 공적이 있었음에도 그는 폭군으로 묘사되어 왔다. 테페스는 별명인데, ‘말뚝을 박는 자’라는 뜻이다. 블라드의 또 다른 별명은 가장 유명한 ‘드라큘레아(Drăculea)다. 우리가 잘 아는 ‘드라큘라’의 어원이다. 드라큘레아는 ‘용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서양에서 용은 불길한 짐승이다. 블라드 왕자는 오스만 제국의 포로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민들을 잔인한 방식으로 고문을 하거나 학살했다. 블라드 왕자가 가장 좋아한 고문 방식은 ‘말뚝 박기’였다.

 

뱀파이어 전설이 무수히 만들어지고 유행하게 된 것은 유럽 문명이 발전하면서 여러 번 생긴 그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첫 번째로 유럽에 드리워진 그늘은 전염병의 유행이다.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에 대한 대중의 공포와 무지는 흡혈귀의 존재를 확신하게 했다. 사람들은 병균에 감염되지 않으려고 전염병에 걸려 죽은 자를 매장했고, 때로는 약간의 증상이 나타난 환자를 산 채로 매장하기도 했다. 무덤에서 시체가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시체가 흡혈귀가 되었다고 믿었다. 두 번째 그늘은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독교의 권위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위상이 흔들리던 교회는 이단 교파들을 처벌하기 위해 그들이 한 모든 일을 악마의 소행이라고 규정한다. 교황은 ‘살아있는 시체’의 존재를 인정했으며 종교개혁을 이끈 프로테스탄트도 흡혈귀의 존재를 인정했다. 기독교는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적대적인 세력을 배척하기 위해 악마의 존재를 인정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지역에 악마와 관련된 미신과 전설이 나도는 계기가 되었다. 뱀파이어는 수많은 미신과 전설의 확산에 힘입어 유럽 전역을 마음껏 활보할 수 있었고, 미신에 집착하는 대중을 비판하는 계몽주의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18세기에도 뱀파이어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흡혈귀: 잠들지 않는 전설》은 뱀파이어가 탄생하게 된 기원을 추적하고, 뱀파이어가 시대별로 어떤 모습으로 묘사되었지 보여준다. 뱀파이어는 순종이 아니라 ‘잡종’이다. 뱀파이어는 폭군으로 알려진 인물들의 (과장된) 모습과 살아있는 시체, 그리고 늑대 인간까지 각각의 속성을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아교로 붙여 만들어진 존재이다. 지금은 좀비(Zombie)가 대세라서 뱀파이어의 인기가 주춤하고 있지만, 뱀파이어는 언제든지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수 있는 녀석이다. 사실 좀비와 뱀파이어는 조상(?)이 같다. 좀비도 무덤에 있다가 밤이 되면 기어 나오는 ‘살아있는 시체(undead)다. 뱀파이어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주]

 

 

 

 

 

※ Trivia

 

내가 읽은 책은 2011년에 발행된 25쇄이다.

 

 

* 26쪽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조리 카를 위스망이 자신의 소설 《라바》(1891)에서…‥

 

 

‘라바(Lá-bas) ‘저 아래로’, ‘지옥에서’라는 뜻의 프랑스어다. 악마주의를 소재로 한 위스망스(Huysmans)의 소설은 작년에 ‘저 아래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 71쪽

어느 날 저녁, 낭만파 시인 바이런과 그와 함께 여행을 하던 동료들(동료 작가 퍼시 바이셰와 메리 월스톤크래프트 셸리, 그리고 바이런의 개인 비서 겸 의사 존 폴리도리 박사)은 유령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자신들이 직접 서스펜스 넘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로 결정했다.

 

 

→ 인용한 문장은 메리 셸리(Mary Shelley)《프랑켄슈타인》조지 바이런(George Byron) 또는 존 폴리도리(John Polidori)《뱀파이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 내용의 일부다. ‘퍼시 바이셰’는 영국의 시인 퍼시 바이셰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오식이다.

 

 

[주] 미국의 군인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퇴임식에서 한 말로 알려진,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를 패러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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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6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17 08: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 책의 저자도 흡혈 행위가 금기가 된 기원을 기독교 교리에서 찾고 있습니다. ^^
 
임윤지당 평전 - 규방의 삶을 벗어던진 조선 최고의 여성 성리학자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경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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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을 공부하다 보면 누구나 조선 시대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는 중화권에서 유교 문화를 경험하며 보수적인 가부장제를 유지하면서 사회 발전을 이뤘다. 16세기 이전까지 조선 사회는 부계뿐만 아니라 모계 또한 중시하는 친족 관계, 아들딸 차별 없이 재산을 상속하는 관습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부터 조선 왕조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국가 정책을 내세우기 시작했고, 왕-아버지-장남을 중시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사회 저변까지 침투하게 된다. 부계 중심의 가족제도가 성립되면서 남성이 경제권을 쥐고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어 혈통 계승의 역할을 담당한다. 남성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여성이 남편 이외의 남성과 성관계를 가질 수 없도록 제한했다. 그 때문에 여성은 결혼 전에는 순결해야 하고 결혼 후에는 정조를 지켜야만 했다. 유교 가부장제에 종속된 여성은 ‘현모양처’, ‘열녀(烈女)’가 되려고 했으며 그렇지 못한 여성은 악녀 또는 음란한 여성으로 알려졌다.

 

가부장제의 한계는 비단 형식만 남은 우리나라 유교 문화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권위적인 가부장은 세계 어디에나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누군가는 권위적인 가부장제를 의식에 내면화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가부장제 문화에 일체화된 채 살아가는 여성은 가모장이 된다.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조선 시대 여성들의 일상사를 접하게 되면 유교와 성리학이 ‘여성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으로 느껴진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유교와 성리학의 영향으로 조선 시대 여성들이 활동에 제약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일부 양반 여성들은 유교 경전을 읽으면서 공부했다. 비록 소수에 불과하고 제한적이지만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글 쓰는 양반 여성들의 능력을 인정했고 오히려 장려하기도 했다. 유교와 성리학은 여성과 무관한 학문이 아니다. 유교와 성리학을 페미니즘과 완전히 상반된 적대적인 학문으로 본다면 우리는 유교 가부장제 속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간 여성들의 삶과 업적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임윤지당 평전》우리가 알지 못했던 위대한 여성의 일대기를 들려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깰 조선 시대 양반 여성들의 생활 모습까지 보여준다. 임윤지당(任允摯堂) 조선 시대 중기에 활동한 성리학자다. 그녀는 유교 경전에 나오는 성인들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선비들처럼 학문과 수행에 몰두했다. 윤지당의 둘째 오빠 임성주는 윤지당에게 큰 영향을 준 지적 스파링 파트너였다. 그는 누이의 성품과 지적 열정을 높이 사 그녀에게 ‘윤지당’이라는 호를 만들어 주었다. 윤지당은 유교 경전을 재해석하거나 경전에 나오는 구절을 따져가면서 읽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지금까지 임윤지당의 존재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던 것일까?

 

남녀의 위계질서를 중시한 조선 시대에 여성이 남성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던 성리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양반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경전을 공부하면서 토론하는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임윤지당은 여성에게 학문과 수양을 권장하는 가문에서 자랐으며 특히 그녀의 어머니 파평 윤씨 부인은 딸이 공부하는 것을 지지했다. 조선시대 하면 으레 떠오르기 마련인 ‘남존여비’라는 일반적 인식을 확 뒤엎는 역사적인 사례이다. 많지 않지만, 조선 시대에 임윤지당처럼 공부하는 양반 여성들이 있었다. 그러나 남성 사대부들이 공부하는 여성들을 어떻게 대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여성들의 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거나 혹은 은폐된다. 남성 사대부들은 공부하는 여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녀들의 능력에 한계를 그으려고 했다. 지적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가 없었던 양반 여성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녀들이 쓴 글이 문집으로 만들어지지 못하거나 아예 사라지게 되면 후대에 알려지지 못한다. 문집 만드는 일은 남자만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들이 없는 양반 여성이 쓴 글이 남성 친척들의 관심조차 받지 못한다면 잊힐 가능성이 높다. 임윤지당의 글과 생애는 그녀의 문집을 편찬한 동생 임정주 덕분에 알려질 수 있었다.

 

임윤지당은 도전적인 자세로 임하면서 공부했다. 그녀는 성리학의 핵심인 이기심성과 사단칠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사대부들이 높이 평가한 인물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윤지당은 공자(孔子)가 칭찬한 제자로 성인으로 평가받은 안회(顔回)를 롤 모델로 삼으면서 공부했다. 그녀는 사대부들이 관심을 가진 주제 중 하나인 성인과 범인(凡人)의 차이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했고, 범인과 성인의 본성에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리하여 윤지당은 ‘범인’이자 ‘여성’인 자신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동안 남성 유학자들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강조하면서 배움의 길을 강조했는데, 윤지당은 여성도 극기복례를 실천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그녀의 파격적인 결론은 유교 이념에 충실한 주체나 학문적 경지에 이른 성인을 ‘남성’으로 한정해서 바라본 기존의 입장을 넘어선 것이다. 윤지당은 유교 윤리에 충실한 주체적 여성상을 제시했다.

 

일반적으로 한국 여성의 주체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을 근대 이후로 잡고 있다. 신문물과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은 신여성은 한국 여성사에서 어떤 여성들보다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이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 시대의 양반 여성들은 유교 사회가 그어놓은 한계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뚜렷한 내면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글로 표현했다. 그런데 우리는 양반 여성들의 주체성을 자세히 보지 못한 채 그녀들을 ‘집 안의 현모양처’로만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그녀들의 서사를 가리고 있는 유교 이데올로기의 장옷[주]을 벗겨내야 한다. 많이 늦었지만, 자기실현의 한 주체로 우뚝 서고자 했던 또 다른 임윤지당을 만날 차례가 왔다.

 

 

 

[주] 조선 시대에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쓴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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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0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놈의 사대부 타령!

아직도 성리학적 질서로부터 완전
히 탈피했다고 볼 수 없지 않나 싶
습니다만.

그나저나 대척점에 서 있는, 온라인
한겨레에서 읽은 현대판 걸그룹에
해당하는 여성가극단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cyrus 2019-08-09 18:15   좋아요 0 | URL
역사를 공부하면 아쉬운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인물들이나 결정적인 장면들을 많이 보곤 해요. 이럴 때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 잊힌 역사들을 살펴보고 싶어요.. ㅎㅎㅎ
 
글이 만든 세계 - 세계사적 텍스트들의 위대한 이야기
마틴 푸크너 지음, 최파일 옮김 / 까치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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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하면서 ‘유튜브(Youtube)라는 매체를 통해 영상으로 다양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유튜브가 대세 미디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집에 TV가 없다”, “유튜브로 뉴스를 본다”는 말은 더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TV에서 보여주는 방송 프로그램을 시청했던 과거 세대와 달리 지금의 세대는 능동적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영상을 제작한다. 또 젊은 세대는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텍스트를 통해 얻기보다 유튜브 검색을 통해 얻는다. 내가 관심 있는 영상들을 찾아서 보다 보면 한두 시간 정도는 금방 지나가곤 한다. 내 휴식 시간은 책이 아닌 영상으로 채워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상의 시대는 결국 텍스트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텍스트와 영상, 둘 중의 하나만 고르기 어렵다. 텍스트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반면, 영상은 구체적으로 보여줘서 그 느낌을 빠르고 정확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글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한 개인의 정체성이 댓글 수와 조회 수로 나타나는 요즘, 글로써 자기 생각과 느낌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자아표현 욕구가 좌절되는 것은 물론이고 타자와의 소통이 부재한다. 이로 인한 치명적인 고독감은 피할 수 없다. 자신을 표현해야 타자에게 인식된다. 이때 주된 표현 방식은 바로 글이다. 이 같은 특성 때문에 새로운 미디어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글의 위력은 줄어들지 않는다.

 

우리는 글쓰기가 인터넷과 유튜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술 형태라는 사실을 쉽사리 잊는다. 인간은 문자 없이 수천 년간 지구상에 존재해 왔고, 다시 수천 년 이상 세월이 흐른 뒤에 비로소 문자를 만들었다. 사실 고대인들은 문자가 없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이야기꾼’이었다. 일하다가도 짬이 나면 모여 앉아 서로 이야기를 들려줬다. 《스토리텔링 애니멀(The Storytelling Animal)의 저자 조너선 갓셜(Jonathan Gottschall)에 따르면 누구나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재미있는 이야기가 지속해서 알려지길 원한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라는 속담처럼 이야기의 전파력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은 영원히 보존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야기가 대대손손 전해지려면 입이 아니라 손이 필요하다. 전달받은 이야기가 잊히지 않으려면 손을 써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한 가지 대책을 세우는데 그게 바로 이야기를 문자로 표현하는 기술, 즉 글쓰기다.

 

문학은 ‘말(言)로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술’인 스토리텔링과 ‘문자로 이야기를 표현하는’ 글쓰기와 교차하면서 탄생했다. 《스토리텔링 애니멀》이 ‘왜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할까’라는 의문점에서 출발해 이를 다양한 시각에서 풀어낸 책이라면 《글이 만든 세계(The Written World)‘글이 어떻게 인간과 세계를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역사를 바꾼 텍스트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전자의 책은 이야기의 힘을, 후자의 책은 글의 힘에 초점을 맞춘다.

 

《글이 만든 세계》의 저자는 16편의 유명한 텍스트가 만들어지고 보급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텍스트들이 어떻게 세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그리스에 속한 소국의 왕자였던 알렉산드로스(Alexandros)가 대제국을 거느리는 ‘대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텍스트는 호메로스(Homeros)《일리아스(Ilias)였다. 왕자는 전장에 나갈 때도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세계를 제패하는 영웅이 되는 꿈을 키웠다. ‘세계 4대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부처, 공자(孔子), 소크라테스(Socrates), 예수는 자신들의 사상을 제자들에게 들려줬을 뿐, 직접 글을 남기지 않았다. 부처와 공자의 제자들은 ‘교사(teacher)가 되어 스승의 생각들을 학문(불교, 유가 사상)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다른 제자들에게 전파했다. 교사가 된 제자들이 손을 쓴 덕분에(글을 쓴 덕분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성인들의 깨우침을 존중하면서 이어받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글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제자 플라톤(Plato)은 대화체로 스승의 말을 기록했다. 이렇듯 말하기와 쓰기가 하나가 되면 텍스트가 되고, 나아가 텍스트를 읽으면서 이를 기록하는 작업은 세상을 읽고, 그것을 바꾸는 행위가 된다.

 

글을 쓰는 것은 인간만 가능한 지적 작업이다. 고대인들은 문자로 소통을 하고 역사를 남겼다. 글쓰기가 없었다면 역사는 단절됐을 것이다. 글쓰기는 ‘역사’라는 정보를 자자손손 전달하는 매우 중요한 기술 형태이다. 글쓰기가 없었다면 고전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수천 년 전의 사상가들이 고민했던 학문의 진화는 이뤄지지 않았을 게 자명하다. 역사를 바꿀 정도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글은 힘이 세다! 《글이 만든 세계》는 영상의 힘에 압도당해 점점 잊히고 있는 글의 힘을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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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07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상매체가 발달한 요즘 종이책을 읽는 것이 시대에 뒤쳐진 것 같지만, 시대 변화가 너무도 빨라 따라가기에는 벅차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입니다^^:)

cyrus 2019-06-10 16:33   좋아요 2 | URL
자고 일어나면 신간도서가 계속 나와요. 신간도서 위주로 읽는 것도 힘들어요. 애서가 입장에서는 쉴 틈이 없어요. ^^;;

레삭매냐 2019-06-07 2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의 경우에는
영상미디어가 인쇄미디어를 압도할
것 같습니다.

국민성 자체가 무얼 지긋하게 하고
그러는 걸 참지 못하는 느낌이랄까요.

새로운 트렌드를 추구하는 건 좋지만
그만큼 올디한 것들도 지켜내야 하는
데, 밸런스 맞추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글쓰기 훈련도 중요하지만 읽는 훈련
도 그만큼 중요한데, 도통 읽지를 않
으니...

cyrus 2019-06-10 16:42   좋아요 1 | URL
길지 않은 글을 읽는 것도 지겨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댓글도, 카톡도 최대한 짧게 써야 해요. 글이 길어지면 할 말 많은 나이든 사람 같아 보여요... ^^;;

카스피 2019-06-07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 요즘은 영상의 시대가 맞는거 같더군요.아무래도 유트브의 영향이 가장 큰것이 아닌가 싶어요.그래선지 사람들도 긴글을 읽어야 하는 블로그보다는 쉽게 볼수 있는 브이로그를 더 선호하는것 같더군요^^;;;

cyrus 2019-06-10 16:44   좋아요 1 | URL
언제 될지 모르겠지만, 미래에 동영상으로 책 리뷰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글을 쓰는 사람은 많아도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거예요. ^^;;

수이 2019-06-08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다보니 도통 왜 이렇게 글 읽기가 요즘 힘이 들까 자문하고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이미지(덩달아 유투브 구독하는 게 날이 갈수록 늘어만가고...)에 크게 좌우되고있는듯한 그런 느낌. 그래서 자꾸 글자가 깊이 들어오지 못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반성하고 읽어야겠습니다. 진득하게. (레삭매냐님이 말씀하신 무엇 지긋하게 하고 그러는 걸 참지 못하는 느낌_에서 엄청 찔리고 반성;;;;)

cyrus 2019-06-10 16:49   좋아요 1 | URL
몸과 마음이 피곤하면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주말에 밭일하고 나니깐 온 몸이 쑤시고 오른쪽 손목이 부었어요. 저는 시골에 살면서 농사짓고 책 읽는 삶이 엄청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시골에 지내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으면(걱정 X, 불안 X) 책에 집중할 수 있어요.. ㅎㅎㅎ

2019-06-08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10 16:52   좋아요 0 | URL
북튜버 활동을 하기 시작한 지인 덕분에 유튜버의 수익 구조를 알았어요. 역시 유튜버도 돈을 쉽게 버는 직업은 아닌 것 같아요. 꾸준한 노력과 인내심이 없으면 수익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아 보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