흡혈귀 : 잠들지 않는 전설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35
장 마리니 지음 / 시공사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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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Vampire)는 책이나 영화, 만화에 나오는 상상의 존재이다. 뱀파이어는 밤에 활동하면서 살아있는 자의 피를 빨아먹는다. 중세에 들어서면서 뱀파이어가 무덤에서 나와 돌아다닌다는 얘기가 떠돌았고(이때 ‘뱀파이어’라는 단어는 나오기 전의 시대였고, 무덤에서 나오는 흡혈귀를 ‘피 빨아먹는 시체’라고 불렀다), 그런 미신은 특히 산으로 둘러싸인 오지에다 문맹률이 높았던 동유럽 지역에 유행했다.

 

미신은 괴물이 나오는 전설을 만들었다. 그 전설의 주인공은 현재 루마니아의 영토가 된 왈라키아(Wallachia) 왕국의 왕자 블라드 테페스(Vlad Țepeș, ‘체페슈’라고 쓰기도 한다)다. 그는 브람 스토커(Bram Stoker)의 소설 《드라큘라(Dracula)에 나오는 드라큘라 백작의 모델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오스만 제국의 침입에 맞서 싸운 루마니아인의 영웅이었다. 하지만 훌륭한 공적이 있었음에도 그는 폭군으로 묘사되어 왔다. 테페스는 별명인데, ‘말뚝을 박는 자’라는 뜻이다. 블라드의 또 다른 별명은 가장 유명한 ‘드라큘레아(Drăculea)다. 우리가 잘 아는 ‘드라큘라’의 어원이다. 드라큘레아는 ‘용의 아들’이라는 뜻인데, 서양에서 용은 불길한 짐승이다. 블라드 왕자는 오스만 제국의 포로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민들을 잔인한 방식으로 고문을 하거나 학살했다. 블라드 왕자가 가장 좋아한 고문 방식은 ‘말뚝 박기’였다.

 

뱀파이어 전설이 무수히 만들어지고 유행하게 된 것은 유럽 문명이 발전하면서 여러 번 생긴 그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첫 번째로 유럽에 드리워진 그늘은 전염병의 유행이다. 중세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에 대한 대중의 공포와 무지는 흡혈귀의 존재를 확신하게 했다. 사람들은 병균에 감염되지 않으려고 전염병에 걸려 죽은 자를 매장했고, 때로는 약간의 증상이 나타난 환자를 산 채로 매장하기도 했다. 무덤에서 시체가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는 소문이 알려지자 사람들은 시체가 흡혈귀가 되었다고 믿었다. 두 번째 그늘은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는 기독교의 권위다.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위상이 흔들리던 교회는 이단 교파들을 처벌하기 위해 그들이 한 모든 일을 악마의 소행이라고 규정한다. 교황은 ‘살아있는 시체’의 존재를 인정했으며 종교개혁을 이끈 프로테스탄트도 흡혈귀의 존재를 인정했다. 기독교는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적대적인 세력을 배척하기 위해 악마의 존재를 인정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여러 지역에 악마와 관련된 미신과 전설이 나도는 계기가 되었다. 뱀파이어는 수많은 미신과 전설의 확산에 힘입어 유럽 전역을 마음껏 활보할 수 있었고, 미신에 집착하는 대중을 비판하는 계몽주의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18세기에도 뱀파이어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흡혈귀: 잠들지 않는 전설》은 뱀파이어가 탄생하게 된 기원을 추적하고, 뱀파이어가 시대별로 어떤 모습으로 묘사되었지 보여준다. 뱀파이어는 순종이 아니라 ‘잡종’이다. 뱀파이어는 폭군으로 알려진 인물들의 (과장된) 모습과 살아있는 시체, 그리고 늑대 인간까지 각각의 속성을 ‘인간의 상상력’이라는 아교로 붙여 만들어진 존재이다. 지금은 좀비(Zombie)가 대세라서 뱀파이어의 인기가 주춤하고 있지만, 뱀파이어는 언제든지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날 수 있는 녀석이다. 사실 좀비와 뱀파이어는 조상(?)이 같다. 좀비도 무덤에 있다가 밤이 되면 기어 나오는 ‘살아있는 시체(undead)다. 뱀파이어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주]

 

 

 

 

 

※ Trivia

 

내가 읽은 책은 2011년에 발행된 25쇄이다.

 

 

* 26쪽

19세기 프랑스의 소설가 조리 카를 위스망이 자신의 소설 《라바》(1891)에서…‥

 

 

‘라바(Lá-bas) ‘저 아래로’, ‘지옥에서’라는 뜻의 프랑스어다. 악마주의를 소재로 한 위스망스(Huysmans)의 소설은 작년에 ‘저 아래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 71쪽

어느 날 저녁, 낭만파 시인 바이런과 그와 함께 여행을 하던 동료들(동료 작가 퍼시 바이셰와 메리 월스톤크래프트 셸리, 그리고 바이런의 개인 비서 겸 의사 존 폴리도리 박사)은 유령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자신들이 직접 서스펜스 넘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로 결정했다.

 

 

→ 인용한 문장은 메리 셸리(Mary Shelley)《프랑켄슈타인》조지 바이런(George Byron) 또는 존 폴리도리(John Polidori)《뱀파이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을 설명한 내용의 일부다. ‘퍼시 바이셰’는 영국의 시인 퍼시 바이셰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오식이다.

 

 

[주] 미국의 군인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퇴임식에서 한 말로 알려진,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Old soldiers never die, they just fade away)”를 패러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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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16 15: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8-17 08:22   좋아요 0 | URL
맞아요. 이 책의 저자도 흡혈 행위가 금기가 된 기원을 기독교 교리에서 찾고 있습니다. ^^
 
임윤지당 평전 - 규방의 삶을 벗어던진 조선 최고의 여성 성리학자 한겨레역사인물평전
김경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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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학을 공부하다 보면 누구나 조선 시대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는 중화권에서 유교 문화를 경험하며 보수적인 가부장제를 유지하면서 사회 발전을 이뤘다. 16세기 이전까지 조선 사회는 부계뿐만 아니라 모계 또한 중시하는 친족 관계, 아들딸 차별 없이 재산을 상속하는 관습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부터 조선 왕조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국가 정책을 내세우기 시작했고, 왕-아버지-장남을 중시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사회 저변까지 침투하게 된다. 부계 중심의 가족제도가 성립되면서 남성이 경제권을 쥐고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어 혈통 계승의 역할을 담당한다. 남성들은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여성이 남편 이외의 남성과 성관계를 가질 수 없도록 제한했다. 그 때문에 여성은 결혼 전에는 순결해야 하고 결혼 후에는 정조를 지켜야만 했다. 유교 가부장제에 종속된 여성은 ‘현모양처’, ‘열녀(烈女)’가 되려고 했으며 그렇지 못한 여성은 악녀 또는 음란한 여성으로 알려졌다.

 

가부장제의 한계는 비단 형식만 남은 우리나라 유교 문화에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권위적인 가부장은 세계 어디에나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누군가는 권위적인 가부장제를 의식에 내면화하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가부장제 문화에 일체화된 채 살아가는 여성은 가모장이 된다. 여성학을 공부하면서 조선 시대 여성들의 일상사를 접하게 되면 유교와 성리학이 ‘여성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으로 느껴진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유교와 성리학의 영향으로 조선 시대 여성들이 활동에 제약을 받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일부 양반 여성들은 유교 경전을 읽으면서 공부했다. 비록 소수에 불과하고 제한적이지만 사대부들은 성리학을 공부하면서 글 쓰는 양반 여성들의 능력을 인정했고 오히려 장려하기도 했다. 유교와 성리학은 여성과 무관한 학문이 아니다. 유교와 성리학을 페미니즘과 완전히 상반된 적대적인 학문으로 본다면 우리는 유교 가부장제 속에서 주체적으로 살아간 여성들의 삶과 업적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임윤지당 평전》우리가 알지 못했던 위대한 여성의 일대기를 들려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을 깰 조선 시대 양반 여성들의 생활 모습까지 보여준다. 임윤지당(任允摯堂) 조선 시대 중기에 활동한 성리학자다. 그녀는 유교 경전에 나오는 성인들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선비들처럼 학문과 수행에 몰두했다. 윤지당의 둘째 오빠 임성주는 윤지당에게 큰 영향을 준 지적 스파링 파트너였다. 그는 누이의 성품과 지적 열정을 높이 사 그녀에게 ‘윤지당’이라는 호를 만들어 주었다. 윤지당은 유교 경전을 재해석하거나 경전에 나오는 구절을 따져가면서 읽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는 지금까지 임윤지당의 존재 사실조차 모르고 살았던 것일까?

 

남녀의 위계질서를 중시한 조선 시대에 여성이 남성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던 성리학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었다. 양반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경전을 공부하면서 토론하는 기회를 누리지 못했다. 그러나 임윤지당은 여성에게 학문과 수양을 권장하는 가문에서 자랐으며 특히 그녀의 어머니 파평 윤씨 부인은 딸이 공부하는 것을 지지했다. 조선시대 하면 으레 떠오르기 마련인 ‘남존여비’라는 일반적 인식을 확 뒤엎는 역사적인 사례이다. 많지 않지만, 조선 시대에 임윤지당처럼 공부하는 양반 여성들이 있었다. 그러나 남성 사대부들이 공부하는 여성들을 어떻게 대하고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여성들의 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거나 혹은 은폐된다. 남성 사대부들은 공부하는 여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녀들의 능력에 한계를 그으려고 했다. 지적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기회가 없었던 양반 여성들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글을 쓰는 것이었다. 그녀들이 쓴 글이 문집으로 만들어지지 못하거나 아예 사라지게 되면 후대에 알려지지 못한다. 문집 만드는 일은 남자만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들이 없는 양반 여성이 쓴 글이 남성 친척들의 관심조차 받지 못한다면 잊힐 가능성이 높다. 임윤지당의 글과 생애는 그녀의 문집을 편찬한 동생 임정주 덕분에 알려질 수 있었다.

 

임윤지당은 도전적인 자세로 임하면서 공부했다. 그녀는 성리학의 핵심인 이기심성과 사단칠정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사대부들이 높이 평가한 인물들을 비판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윤지당은 공자(孔子)가 칭찬한 제자로 성인으로 평가받은 안회(顔回)를 롤 모델로 삼으면서 공부했다. 그녀는 사대부들이 관심을 가진 주제 중 하나인 성인과 범인(凡人)의 차이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했고, 범인과 성인의 본성에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리하여 윤지당은 ‘범인’이자 ‘여성’인 자신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동안 남성 유학자들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강조하면서 배움의 길을 강조했는데, 윤지당은 여성도 극기복례를 실천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그녀의 파격적인 결론은 유교 이념에 충실한 주체나 학문적 경지에 이른 성인을 ‘남성’으로 한정해서 바라본 기존의 입장을 넘어선 것이다. 윤지당은 유교 윤리에 충실한 주체적 여성상을 제시했다.

 

일반적으로 한국 여성의 주체성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을 근대 이후로 잡고 있다. 신문물과 페미니즘의 세례를 받은 신여성은 한국 여성사에서 어떤 여성들보다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 이전, 더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 시대의 양반 여성들은 유교 사회가 그어놓은 한계 속에서도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뚜렷한 내면을 가지고 있었고, 그것을 글로 표현했다. 그런데 우리는 양반 여성들의 주체성을 자세히 보지 못한 채 그녀들을 ‘집 안의 현모양처’로만 생각했다. 이제 우리는 그녀들의 서사를 가리고 있는 유교 이데올로기의 장옷[주]을 벗겨내야 한다. 많이 늦었지만, 자기실현의 한 주체로 우뚝 서고자 했던 또 다른 임윤지당을 만날 차례가 왔다.

 

 

 

[주] 조선 시대에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쓴 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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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8-09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놈의 사대부 타령!

아직도 성리학적 질서로부터 완전
히 탈피했다고 볼 수 없지 않나 싶
습니다만.

그나저나 대척점에 서 있는, 온라인
한겨레에서 읽은 현대판 걸그룹에
해당하는 여성가극단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cyrus 2019-08-09 18:15   좋아요 0 | URL
역사를 공부하면 아쉬운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인물들이나 결정적인 장면들을 많이 보곤 해요. 이럴 때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 잊힌 역사들을 살펴보고 싶어요.. ㅎㅎㅎ
 
글이 만든 세계 - 세계사적 텍스트들의 위대한 이야기
마틴 푸크너 지음, 최파일 옮김 / 까치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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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가 변하면서 ‘유튜브(Youtube)라는 매체를 통해 영상으로 다양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이들이 증가하고 있다. 유튜브가 대세 미디어라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집에 TV가 없다”, “유튜브로 뉴스를 본다”는 말은 더는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다. TV에서 보여주는 방송 프로그램을 시청했던 과거 세대와 달리 지금의 세대는 능동적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영상을 제작한다. 또 젊은 세대는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텍스트를 통해 얻기보다 유튜브 검색을 통해 얻는다. 내가 관심 있는 영상들을 찾아서 보다 보면 한두 시간 정도는 금방 지나가곤 한다. 내 휴식 시간은 책이 아닌 영상으로 채워지고 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영상의 시대는 결국 텍스트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텍스트와 영상, 둘 중의 하나만 고르기 어렵다. 텍스트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반면, 영상은 구체적으로 보여줘서 그 느낌을 빠르고 정확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전히 글은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특히 한 개인의 정체성이 댓글 수와 조회 수로 나타나는 요즘, 글로써 자기 생각과 느낌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자아표현 욕구가 좌절되는 것은 물론이고 타자와의 소통이 부재한다. 이로 인한 치명적인 고독감은 피할 수 없다. 자신을 표현해야 타자에게 인식된다. 이때 주된 표현 방식은 바로 글이다. 이 같은 특성 때문에 새로운 미디어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지고 있지만 글의 위력은 줄어들지 않는다.

 

우리는 글쓰기가 인터넷과 유튜브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술 형태라는 사실을 쉽사리 잊는다. 인간은 문자 없이 수천 년간 지구상에 존재해 왔고, 다시 수천 년 이상 세월이 흐른 뒤에 비로소 문자를 만들었다. 사실 고대인들은 문자가 없어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이야기꾼’이었다. 일하다가도 짬이 나면 모여 앉아 서로 이야기를 들려줬다. 《스토리텔링 애니멀(The Storytelling Animal)의 저자 조너선 갓셜(Jonathan Gottschall)에 따르면 누구나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재미있는 이야기가 지속해서 알려지길 원한다. ‘발 없는 말이 천 리 간다’라는 속담처럼 이야기의 전파력이 아무리 빠르다고 해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은 영원히 보존되지 못한다. 따라서 이야기가 대대손손 전해지려면 입이 아니라 손이 필요하다. 전달받은 이야기가 잊히지 않으려면 손을 써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한 가지 대책을 세우는데 그게 바로 이야기를 문자로 표현하는 기술, 즉 글쓰기다.

 

문학은 ‘말(言)로서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술’인 스토리텔링과 ‘문자로 이야기를 표현하는’ 글쓰기와 교차하면서 탄생했다. 《스토리텔링 애니멀》이 ‘왜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할까’라는 의문점에서 출발해 이를 다양한 시각에서 풀어낸 책이라면 《글이 만든 세계(The Written World)‘글이 어떻게 인간과 세계를 만드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역사를 바꾼 텍스트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전자의 책은 이야기의 힘을, 후자의 책은 글의 힘에 초점을 맞춘다.

 

《글이 만든 세계》의 저자는 16편의 유명한 텍스트가 만들어지고 보급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텍스트들이 어떻게 세계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그리스에 속한 소국의 왕자였던 알렉산드로스(Alexandros)가 대제국을 거느리는 ‘대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텍스트는 호메로스(Homeros)《일리아스(Ilias)였다. 왕자는 전장에 나갈 때도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세계를 제패하는 영웅이 되는 꿈을 키웠다. ‘세계 4대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부처, 공자(孔子), 소크라테스(Socrates), 예수는 자신들의 사상을 제자들에게 들려줬을 뿐, 직접 글을 남기지 않았다. 부처와 공자의 제자들은 ‘교사(teacher)가 되어 스승의 생각들을 학문(불교, 유가 사상)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다른 제자들에게 전파했다. 교사가 된 제자들이 손을 쓴 덕분에(글을 쓴 덕분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이 성인들의 깨우침을 존중하면서 이어받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글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독약을 마시고 세상을 떠난 뒤에 그의 제자 플라톤(Plato)은 대화체로 스승의 말을 기록했다. 이렇듯 말하기와 쓰기가 하나가 되면 텍스트가 되고, 나아가 텍스트를 읽으면서 이를 기록하는 작업은 세상을 읽고, 그것을 바꾸는 행위가 된다.

 

글을 쓰는 것은 인간만 가능한 지적 작업이다. 고대인들은 문자로 소통을 하고 역사를 남겼다. 글쓰기가 없었다면 역사는 단절됐을 것이다. 글쓰기는 ‘역사’라는 정보를 자자손손 전달하는 매우 중요한 기술 형태이다. 글쓰기가 없었다면 고전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수천 년 전의 사상가들이 고민했던 학문의 진화는 이뤄지지 않았을 게 자명하다. 역사를 바꿀 정도로 세계를 변화시키는 글은 힘이 세다! 《글이 만든 세계》는 영상의 힘에 압도당해 점점 잊히고 있는 글의 힘을 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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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6-07 20: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상매체가 발달한 요즘 종이책을 읽는 것이 시대에 뒤쳐진 것 같지만, 시대 변화가 너무도 빨라 따라가기에는 벅차다는 생각을 하는 요즘입니다^^:)

cyrus 2019-06-10 16:33   좋아요 2 | URL
자고 일어나면 신간도서가 계속 나와요. 신간도서 위주로 읽는 것도 힘들어요. 애서가 입장에서는 쉴 틈이 없어요. ^^;;

레삭매냐 2019-06-07 21: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의 경우에는
영상미디어가 인쇄미디어를 압도할
것 같습니다.

국민성 자체가 무얼 지긋하게 하고
그러는 걸 참지 못하는 느낌이랄까요.

새로운 트렌드를 추구하는 건 좋지만
그만큼 올디한 것들도 지켜내야 하는
데, 밸런스 맞추기가 힘든 것 같습니다.

글쓰기 훈련도 중요하지만 읽는 훈련
도 그만큼 중요한데, 도통 읽지를 않
으니...

cyrus 2019-06-10 16:42   좋아요 1 | URL
길지 않은 글을 읽는 것도 지겨워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댓글도, 카톡도 최대한 짧게 써야 해요. 글이 길어지면 할 말 많은 나이든 사람 같아 보여요... ^^;;

카스피 2019-06-07 23: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뭐 요즘은 영상의 시대가 맞는거 같더군요.아무래도 유트브의 영향이 가장 큰것이 아닌가 싶어요.그래선지 사람들도 긴글을 읽어야 하는 블로그보다는 쉽게 볼수 있는 브이로그를 더 선호하는것 같더군요^^;;;

cyrus 2019-06-10 16:44   좋아요 1 | URL
언제 될지 모르겠지만, 미래에 동영상으로 책 리뷰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글을 쓰는 사람은 많아도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거예요. ^^;;

수이 2019-06-08 0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다보니 도통 왜 이렇게 글 읽기가 요즘 힘이 들까 자문하고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이미지(덩달아 유투브 구독하는 게 날이 갈수록 늘어만가고...)에 크게 좌우되고있는듯한 그런 느낌. 그래서 자꾸 글자가 깊이 들어오지 못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반성하고 읽어야겠습니다. 진득하게. (레삭매냐님이 말씀하신 무엇 지긋하게 하고 그러는 걸 참지 못하는 느낌_에서 엄청 찔리고 반성;;;;)

cyrus 2019-06-10 16:49   좋아요 1 | URL
몸과 마음이 피곤하면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더라고요. 주말에 밭일하고 나니깐 온 몸이 쑤시고 오른쪽 손목이 부었어요. 저는 시골에 살면서 농사짓고 책 읽는 삶이 엄청 좋을 줄 알았는데, 막상 시골에 지내보니 그게 아니었어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것에 신경 쓰지 않으면(걱정 X, 불안 X) 책에 집중할 수 있어요.. ㅎㅎㅎ

2019-06-08 08: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10 16:52   좋아요 0 | URL
북튜버 활동을 하기 시작한 지인 덕분에 유튜버의 수익 구조를 알았어요. 역시 유튜버도 돈을 쉽게 버는 직업은 아닌 것 같아요. 꾸준한 노력과 인내심이 없으면 수익을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아 보여요.
 

 

 

영국사를 통틀어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는 여성의 순결과 금욕을 강조한 성적으로 가장 엄숙했던 시기다. 하지만 성에 대한 호기심이 수많은 포르노그래피 서적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낸 시대이기도 하다. 그 시대에 발행된―소아성애(pedophilia)를 연상케 하는―어린아이들의 알몸 사진이 있는 엽서는 성에 대해 보수적이었다는 빅토리아 시대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진보와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보수적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개인에게는 가정에 대한 의무와 함께 절제, 금욕, 순결과 같은 도덕적 규범이 엄격히 요구됐다. 그 표면적인 고상함의 이면에는 허영과 위선이 있었다. 《아름다운 명화에는 비밀이 있다》는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이 어떻게 양면적인 사회상과 만났는지 짚어보면서 그림 속에 반영된 영국인의 은밀한 속내를 보여준다.

 

 

 

 

 

 

 

 

 

 

 

 

 

 

 

 

 

 

* 이주은 《아름다운 명화에는 비밀이 있다》 (이봄, 2016)

 

 

 

억압과 규제가 더욱 강해질수록 인간의 욕망이 멈추지 않듯이, 빅토리아 시대 영국에서는 매춘과 성병이 유독 기승을 부렸다. 국가는 매춘을 필요악으로 규정했고, 매춘을 ‘관리’하는 것으로 정책을 내세웠다. 국가가 통제하지 않으면, 매독을 각종 성병이 온 유럽을 집어삼킬 것이란 두려움이 널리 퍼졌다. 금욕을 강조했던 시대에 매춘부들은 멸시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자살하거나 평생 숨어 지내는 일도 많았다. 물에 떠 오른 익사한 여성의 시신이 많이 그려진 것도 그 때문이다.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16)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민음사, 2006)

* 버지니아 울프 《자기만의 방》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당시에는 거리의 여자가 강물에 빠져 죽는 장면이 그림이나 대중잡지 삽화에 자주 등장했다. 이 시대의 여자는 늘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 지내면서 남편을 기다리고, 만일 버림받으면 갈 곳 없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집 안의 천사(The angel in the house)는 집안일을 관장하며 남편과 자식을 보살피는 빅토리아 시대의 전형적 여성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자기만의 방》에서 모든 여성에게 ‘집 안의 천사’라고 불리는 내면의 유령이 있다고 단언한다. 내면의 유령에 사로잡힌 여성은 남편과 자식을 위해 헌신하지 못하면 죄책감을 느낀다. 울프는 ‘집 안의 천사’를 죽여야 한다고 말했지만, ‘집 안의 천사’가 되지 못한 여성들은 죄책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이라는 처벌을 스스로 선택했다.

 

 

 

 

 

 

 

 

 

 

 

 

 

 

 

 

 

 

* [절판] 노르마 브루드 외 《미술과 페미니즘》 (동문선, 1994)

 

 

 

미국의 미술사가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는 자신의 논문 『실종과 발견: 19세기 영국의 타락한 여성상』에서 가정적인 행복이 상실되고, 빈곤의 밑바닥까지 몰린 여성들의 비참한 결말을 묘사한 빅토리아 시대의 미술 작품에 주목한다. 이 논문은 《미술과 페미니즘》에 수록되어 있다. 노클린은 이 그림들에 안타까운 죽음에 이른 ‘타락한 여성’에 대한 동정심과 연민을 부각하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좀 이상하지 않은가.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거나 매춘부가 된 여성들을 ‘타락한 여성’이라고 비난했던 냉담한 사회적 분위기와 대조된다. 그러나 ‘타락한 여성’을 바라보는 이 기묘하고도 양면적인 시선은 정조와 금욕을 강조하던 빅토리아 시대가 가진 이면이었다.

 

 

 

 

 

 

 

 

 

 

 

 

 

 

 

 

 

* 정진영 엮음 《세계 호러 단편 100선》 (책세상, 2005)

 

 

 

빅토리아 시대의 남성 화가들은 자살을 선택하는 여성들의 비참한 운명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그녀들을 아름답게 묘사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림에는 흔히 고상하고 우아한 아름다움과 함께 타락, 절망, 허무, 죽음과 같은 퇴폐미가 공존한다. 빅토리아 시대에 활동했던 작가 메리 엘리자베스 브래든(Mary Elizabeth Braddon)이 1860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차가운 포옹(The Cold Embrace)은 물에 빠져 자살하는 여성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공포적인 분위기로 연출한 작품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여인은 약혼한 남자로부터 버림받아 다리 밑의 강물에 몸을 던진다. 약혼을 파기한 남자의 직업은 화가다. 남자는 산책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여인의 시체 한 구가 놓인 관이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관을 운반하고 있던 인부를 멈춰 세운 뒤에 죽은 여인의 모습을 그림을 그리고 싶다고 부탁한다. 인부는 죽은 여인이 아주 예쁘게 생겼다고 말하고, 화가는 인부의 말에 동조하면서 자살한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말한다. 화가는 죽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확인하고 싶어서 그녀의 얼굴을 덮고 있는 천을 걷어내는데, 죽은 여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도망친다. 죽은 여인의 정체는 약혼녀였기 때문이다.

 

천사 같은 아내, 가족에게 헌신적인 어머니와 며느리, 현모양처라는 ‘집 안의 천사’는 남편, 아버지, 곧 남자들을 편하게 하기 위한 관념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이 관념은 여성의 주체적인 활동을 가로막는 유령이다. ‘집 안의 천사’가 되지 못하거나 이를 거부하는 여성은 ‘낙원(가정)’에서 추방된 ‘타락한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붙인 채 살아간다. 한 번 낙원에서 추방되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다. 아늑한 낙원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추방당한 ‘타락한 여성’이 낙원의 평화를 위협하는 ‘악마’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그녀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낙원의 사람들은 그녀들이 죽고 나서야 연민의 손길을 내밀었다. 존재감을 상실한 여성들이 보기에 세상은 ‘집 안의 천사’가 너무나 많은 지옥이었다. 그들을 죽일 수 없으면 내가 죽어야하는, 기묘한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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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03 1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3 16:36   좋아요 1 | URL
잘 사는 사람들이 술집이나 룸살롱에 가서 돈을 펑펑 쓰는 모습을 보면 그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젊었을 때 실컷 노는 것도 좋지만, 유흥에 너무 맛들이면 나이 들어서 허전함이 더욱 많이 밀려올 것 같아요. 그렇게 되면 정신이 피폐해질 거예요.

2019-06-05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6-04 12:42   좋아요 1 | URL
노라를 주제로 연구하신다니, 어떤 내용인지 궁금하네요. 혹시 연구 결과가 논문으로 나온다면 꼭 읽어보고 싶습니다. ^^

제가 글을 일기처럼 쓰는 편인데다가 제 관심사에 지나치게 몰두하는 성격이라서 블로그에 등록되는 글 대다수는 재미없어요... ㅎㅎㅎㅎ 글이 별로라고 생각하면 친구 관계를 해제하셔도 좋습니다. 실제로 그런 분들이 계시거든요.

여름이 2019-06-10 1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방문했어요. 페미니즘 문학작품 토론에 참여하려고 하는데, 블로그에 써 주신 여러 서평들이 저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블로그 글에 대한 고마움에 답글 남깁니다. 자주 오게 되다 못해 한동안 상주...하게 될른지도 모르겠네요. 글들 감사합니다~

cyrus 2019-06-10 16:58   좋아요 1 | URL
별말씀을요. 어설픈 글을 좋게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다시 처음부터 공부하는 심정으로 페미니즘 독서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고 있어요. 저도 배우는 입장이랍니다.

편하실 대로 제 글을 보시면 됩니다. 제가 매일 규칙적으로 글을 써서 공개하는 성격이라서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정기 구독하듯이 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혹시 제 글을 보시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나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댓글로 알려주셔도 좋습니다. ^^

여름이 2019-06-10 17: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매일 규칙적으로 글 쓰신다니....고맙습니다.~~~!!!^^

cyrus 2019-06-10 17:13   좋아요 1 | URL
알라딘 서재에 저 말도고 매일 글 한 두 편 정도 쓰는 분들이 더 있어요. ^^;;
 
근대 장애인사 - 장애인 소외와 배제의 기원을 찾아서
정창권 지음 / 사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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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남긴 시인 호메로스(Homeros)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우화를 쓴 이솝(Aesop)은 등이 굽은 장애인이었다. 악성(樂聖)이라 불리는 음악가 베토벤(Beethoven)은 청각장애인이었고,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Cervantes)는 한쪽 팔을 쓰지 못했다. 사회운동가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시각 · 청각 · 언어장애인이었다. 대부분 알만한 세계적 위인들이고,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 속 유명한 장애인이 누구 있는지 생각해보면 언뜻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장애를 가진 위인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만큼 가려지고 소외돼 왔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시각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종대왕은 안질에 걸려 시력이 점점 약해져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낄 정도였다. 훈민정음 창제를 처음으로 알린 1443년에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거의 잃어 지팡이 없이는 걷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장애를 숨기지 않았다. 조선 초기에 ‘명통시(明通寺)라는 시각장애인 단체가 만들어졌다.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관직에 등용되는 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애인 차별이나 편견 등의 문제가 불거질 때면 대부분 사람(특히 비장애인)은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지금도 이런데 옛날에 장애인들은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하지만 《근대 장애인사》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과거에 살았던 장애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생각이 편견일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조선 시대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어울려 생활했으며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했다. 양반 출신 장애인은 과거를 보아 관직에 나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며, 악기를 연주하는 직업을 가진 장애인도 많았다. 중증 장애인으로 자립하기 어려운 사람은 국가가 나서서 복지정책을 폈다. 직접 식량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조세와 부역을 면제시켜줬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장애인들은 서서히 배척되기 시작한다. 조선 시대 장애인들이 생계 수단으로 삼던 점복(占卜: 점치는 일)과 독경(讀經: 경을 읽어 가정의 복을 빌거나 재앙을 물리치는 일)이 혹세무민한다는 이유로 개화기 지식인들의 비판을 받는다. 생계수단을 잃은 장애인들은 극심한 생활고를 겪게 되고, 근대 이후에 직업을 갖지 못한 장애인들은 ‘자립 능력이 없는 인간’으로 치부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천대받는 신세가 된다.

 

《근대 장애인사》는 방대한 옛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 근대 장애인들의 생활상 전반을 복원한다. 이 책은 특히나 장애 문제를 사회복지학적 측면만이 아니라 미시사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의미 또한 아주 크다. 그동안 근대의 장애 문제에 대한 미시사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 해 획기적인 저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평소 역사 속에서 주목받지 않았던 여성들이나 장애인들에 관해 관심이 컸던 정창권 교수는 《근대 장애인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확신을 하게 됐다. 근현대 이전 장애인들은 지금보다 더 인간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각종 자료를 통하여 조선시대부터 시작해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의 장애인들의 삶을 살펴본 다음, 조선 시대 장애인들은 단지 몸이 불편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진단한다. 또한 장애인을 지칭하는 각종 혐오 표현이 장애인의 사회적 지위가 급격히 하락한 일제 강점기 이후에 나오게 된 과정을 살핀다.

 

일제 강점기에 장애인이라는 용어가 없었다. ‘불구자(不具者)가 그나마 널리 쓰인 말이었다. 불구자는 ‘신체의 어느 부분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 ‘후구샤(ふぐしゃ)에 유래되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 일본어는 신체적 · 정신적 결함을 가진 존재를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이후 노동력, 상품성을 최고로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면서 장애인은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했다. 여기에 1910년대 이후부터 조선에 우생학이 유행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인식은 더욱 강해졌다. 일제의 장애인 복지정책은 ‘생색용’에 불과했다. 조선이 근대화되면서 장애인의 수는 늘어났지만, 장애인 복지정책은 갈수록 후퇴했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공을 들인 내용은 ‘근대사에 족적을 남긴 장애 인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3부에 있다. ‘장애 인물들’에 여성 차별과 장애인 차별이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여성 독립운동가와 교육자, 작가들도 포함되어 있다. 장애란 비단 오늘날의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장애인은 존재했으며, 과거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많은 장애인과 그들의 삶의 만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자의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 앞으로 더욱 많은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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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9-06-02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장애인에도 관심이 없는 시대에 장애인 역사에 대해 쓴 책이 나오다니 반갑네요!!

cyrus 2019-06-02 11:20   좋아요 0 | URL
정창권 교수는 십 년 전에 이미 조선시대 장애인사를 연구하여 이를 주제로 한 책을 몇 권 냈어요. 방귀희 교수도 장애인 연구를 하는 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