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장애인사 - 장애인 소외와 배제의 기원을 찾아서
정창권 지음 / 사우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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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남긴 시인 호메로스(Homeros)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우화를 쓴 이솝(Aesop)은 등이 굽은 장애인이었다. 악성(樂聖)이라 불리는 음악가 베토벤(Beethoven)은 청각장애인이었고, 《돈키호테》의 작가 세르반테스(Cervantes)는 한쪽 팔을 쓰지 못했다. 사회운동가 헬렌 켈러(Helen Keller)는 시각 · 청각 · 언어장애인이었다. 대부분 알만한 세계적 위인들이고, 장애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우리 역사 속 유명한 장애인이 누구 있는지 생각해보면 언뜻 떠오르는 인물이 없다. 장애를 가진 위인이 없었던 게 아니다. 그만큼 가려지고 소외돼 왔다.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세종대왕이 시각장애인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종대왕은 안질에 걸려 시력이 점점 약해져 일상생활에 불편을 느낄 정도였다. 훈민정음 창제를 처음으로 알린 1443년에 당뇨 합병증으로 시력을 거의 잃어 지팡이 없이는 걷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대왕은 장애를 숨기지 않았다. 조선 초기에 ‘명통시(明通寺)라는 시각장애인 단체가 만들어졌다. 장애를 가졌다고 해서 관직에 등용되는 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애인 차별이나 편견 등의 문제가 불거질 때면 대부분 사람(특히 비장애인)은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봤을 것이다. ‘지금도 이런데 옛날에 장애인들은 얼마나 힘들게 살았을까?’ 하지만 《근대 장애인사》를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과거에 살았던 장애인들을 불쌍하게 여기는 생각이 편견일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든다. 조선 시대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어울려 생활했으며 자신의 능력에 맞는 일을 했다. 양반 출신 장애인은 과거를 보아 관직에 나가는 데 큰 어려움을 겪지 않았으며, 악기를 연주하는 직업을 가진 장애인도 많았다. 중증 장애인으로 자립하기 어려운 사람은 국가가 나서서 복지정책을 폈다. 직접 식량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조세와 부역을 면제시켜줬다.

 

근대에 접어들면서 장애인들은 서서히 배척되기 시작한다. 조선 시대 장애인들이 생계 수단으로 삼던 점복(占卜: 점치는 일)과 독경(讀經: 경을 읽어 가정의 복을 빌거나 재앙을 물리치는 일)이 혹세무민한다는 이유로 개화기 지식인들의 비판을 받는다. 생계수단을 잃은 장애인들은 극심한 생활고를 겪게 되고, 근대 이후에 직업을 갖지 못한 장애인들은 ‘자립 능력이 없는 인간’으로 치부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천대받는 신세가 된다.

 

《근대 장애인사》는 방대한 옛 자료들을 꼼꼼히 살펴 근대 장애인들의 생활상 전반을 복원한다. 이 책은 특히나 장애 문제를 사회복지학적 측면만이 아니라 미시사적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의미 또한 아주 크다. 그동안 근대의 장애 문제에 대한 미시사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 해 획기적인 저작으로 평가할 만하다. 평소 역사 속에서 주목받지 않았던 여성들이나 장애인들에 관해 관심이 컸던 정창권 교수는 《근대 장애인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확신을 하게 됐다. 근현대 이전 장애인들은 지금보다 더 인간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각종 자료를 통하여 조선시대부터 시작해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의 장애인들의 삶을 살펴본 다음, 조선 시대 장애인들은 단지 몸이 불편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진단한다. 또한 장애인을 지칭하는 각종 혐오 표현이 장애인의 사회적 지위가 급격히 하락한 일제 강점기 이후에 나오게 된 과정을 살핀다.

 

일제 강점기에 장애인이라는 용어가 없었다. ‘불구자(不具者)가 그나마 널리 쓰인 말이었다. 불구자는 ‘신체의 어느 부분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 ‘후구샤(ふぐしゃ)에 유래되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이 일본어는 신체적 · 정신적 결함을 가진 존재를 표현하는 말이 되었다. 이후 노동력, 상품성을 최고로 여기는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되면서 장애인은 ‘무능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했다. 여기에 1910년대 이후부터 조선에 우생학이 유행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정당화하는 인식은 더욱 강해졌다. 일제의 장애인 복지정책은 ‘생색용’에 불과했다. 조선이 근대화되면서 장애인의 수는 늘어났지만, 장애인 복지정책은 갈수록 후퇴했다.

 

이 책에서, 저자가 가장 공을 들인 내용은 ‘근대사에 족적을 남긴 장애 인물들’을 간략하게 소개한 3부에 있다. ‘장애 인물들’에 여성 차별과 장애인 차별이라는 이중고 속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긴 여성 독립운동가와 교육자, 작가들도 포함되어 있다. 장애란 비단 오늘날의 문제인 것만은 아니다. 어느 시대에서나 장애인은 존재했으며, 과거의 역사 속에서도 우리는 많은 장애인과 그들의 삶의 만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장애인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저자의 노력은 높이 평가되어 마땅하다. 앞으로 더욱 많은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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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9-06-02 0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장애인에도 관심이 없는 시대에 장애인 역사에 대해 쓴 책이 나오다니 반갑네요!!

cyrus 2019-06-02 11:20   좋아요 0 | URL
정창권 교수는 십 년 전에 이미 조선시대 장애인사를 연구하여 이를 주제로 한 책을 몇 권 냈어요. 방귀희 교수도 장애인 연구를 하는 분입니다. ^^
 

 

 

콜레트(Colette)의 소설 《파리의 클로딘》(민음사) 번역본 뒤표지에 보면 <뉴욕 타임스>의 추천 평이 있다. 그 추천 평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파리의 클로딘》 (민음사, 2019)

 

 

 사랑은 여성의 자유를 앗아가기도 하고, 또 여성을 아름답게 만들고 성장하게도 한다. 가장 프랑스적인 작가 콜레트가 그 사랑을 직조한다.

 

 

 

나는 이 문장을 보자마자 ‘가장 프랑스적인 작가’라는 표현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리고 이내 그 뜻을 찾는 것을 포기했고, 나만의 결론을 내렸다. 콜레트는 ‘가장 프랑스적인 작가’가 아니다.

 

프랑스는 ‘자유, 평등, 박애(Liberte, Egalite, Fraternite)를 상징하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 프랑스의 국기인 삼색기를 구성하는 청색, 백색, 적색은 각각 자유, 평등, 박애를 뜻한다. 일단 여기까지는 우리가 알고 있는 삼색기의 의미다.

 

 

 

 

 

 

 

 

 

 

 

 

 

 

 

 

 

 

* 김응종 《서양의 역사에는 초야권이 없다》 (푸른역사, 2010)

 

 

 

‘자유, 평등, 박애’는 프랑스 혁명과 직집적인 연관이 없다. 프랑스 혁명 시대에 나온 구호가 아니라 1848년 제2공화국 헌법에 있는 문구였다. 삼색기가 프랑스 혁명 시대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맞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지 사흘 뒤인 1789년 7월 17일에 삼색기가 등장했다. 하지만 세 가지 색의 의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르다.

 

파리를 상징하는 깃발은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파리 시민들은 이 깃발을 들고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감옥을 점령한 이후에 혁명을 주도한 라파예트(Lafayette) 장군은 파리국민군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라파예트 장군은 파리를 상징하는 깃발에 왕실을 상징하는 흰색을 추가한 삼색기를 국기로 제안했다. 이것이 바로 삼색기의 시초이다.

 

삼색기의 의미가 ‘자유, 평등, 박애’로 와전된 것도 문제지만, ‘fraternite’를 오역한 점도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fraternite’는 ‘형제애’, ‘연대감’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이 단어는 ‘박애’의 의미와 거리가 멀다. 혁명에 동참하는 자를 ‘형제(동지)’로, 그렇지 않으면 ‘적’으로 간주한다는 의미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 제랄드 게를레 그림 《여성 권리 선언》 (문학동네, 2019)

* 올랭프 드 구주 《여성의 권리 선언》 (동글디자인, 2019)

* 브누아트 그루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마음산책, 2014)

 

 

 

 

 

 

 

 

 

 

 

 

 

 

 

 

 

 

 

 

 

 

 

 

 

 

 

 

 

 

 

 

 

 

 

 

 

 

 

 

* 케르스틴 뤼커, 우테 댄셸 《처음 읽는 여성 세계사》 (어크로스, 2018)

* 피에르 부르디외 외 《페미니즘과 섹시즘》 (르몽드코리아, 2018)

* 조앤 월라치 스콧 《페미니즘 위대한 역사》 (앨피, 2017)

* 안체 슈룹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 (숨취는책공장, 2016)

* 주명철 《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 (소나무, 2013)

* 이세희 《프랑스대혁명과 여성. 여성운동》 (탑북스, 2012)

* [품절] 최재인 외 《서양 여성들, 근대를 달리다》 (푸른역사, 2011)

 

 

 

 

‘fraternite’는 동지와 적을 구분하는 단어일 뿐만 아니라 혁명에 참여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고, 차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다. 여성들도 혁명에 참여한 ‘시민’이었고 ‘동지’였으나 혁명이 성공한 이후 ‘fraternite’ 정신에 투철한 남성들은 여성 동지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나 인권 선언에 있는 내용과는 달리 여성들은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여전히 학교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민주주의를 이끈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가르치고 있지만, 프랑스 혁명의 인권 선언문은 ‘남성 인권을 강화한 남성 역사적인(historical) 선언문’이었다. 이를 날카롭게 지적한 사람이 프랑스 혁명에 뛰어든 올랭프 드 구주(Olympe de Gouges, 1748~1793)였다. 그녀는 혁명이 진행되던 시기에 여성에게 참정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에 참여하거나 열렬히 지지한 남성 지식인 및 정치인들은 그녀의 주장을 반기지 않았고, 평등의 권리가 여성까지 확대되지 않는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구주는 1791년에 ‘여성 권리 선언문(Declaration of the Rights of Woman and of the Female Citizen)을 썼다. ‘여성 권리 선언문’은 프랑스 혁명 인권 선언문에 반기를 든 글이다. 여성의 이혼 권리를 옹호하고, 결혼을 거부한 구주는 1793년에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의 공포 정치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다. 단두대에 오르기 전 그녀는 “여성이 사형대에 오를 권리가 있다면 의정 연단 위에 오를 권리도 가져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구주는 한동안 잊힌 인물이었으나 여성사 연구가 활발히 전개되면서 그녀를 재평가하는 연구가 나오기 시작했고, 이제는 ‘여성 권리 선언문’을 누구나 읽을 수 있게 됐다. 《여성 권리 선언》 (문학동네)《여성의 권리 선언》 (동글디자인)은 ‘여성 권리 선언문’ 전문을 실은 책이다. 《올랭프 드 구주가 있었다》 (마음산책)는 ‘여성 권리 선언문’을 포함한 그녀의 정치적인 글들을 선별하여 수록한 책이다.

 

《페미니즘과 섹시즘》 (르몽드코리아) 2부에 구주의 삶과 업적을 정리한 글 두 편이 수록되어 있다. 다섯 명의 프랑스 여성 참정권론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페미니즘 위대한 역사》 (앨피)는 구주에 대한 이야기로 포문을 연다. 《프랑스대혁명과 여성. 여성운동》 (탑북스)은 구체제(ancien régime)부터 프랑스 혁명 시대까지의 여성관과 여성운동의 궤적을 상세하게 정리한 책이다. 프랑스 혁명 시대에 구주 이외에도 ‘남성 구체제’에 맞선 여성이 있으니 ‘자유의 아마존(Amazone de la Liberté)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테르외뉴 드 메리쿠르(Théroigné de Méricour, 1762~1817)이다. 그녀는 혁명 투사로 이름을 날렸으나 구주와 마찬가지로 남성들로부터 철저히 외면을 받았다. 《서양 여성들, 근대를 달리다》 (푸른역사)는 메리쿠르의 삶을 유일하게 소개한 책이다.

 

글을 쓰다 보니 콜레트를 잊고 있었다. 지금까지 콜레트를 ‘프랑스적인 작가’로 보지 않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분들이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어쨌든 참을성이 있는 그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뉴욕 타임스>의 추천 평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를 요약하면 이렇다. 남성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은 콜레트의 자유로운 삶은 남성들만 누릴 수 있는 자유, 공허한 구호에 불과한 평등, ‘박애’로 잘못 알려진 형제애로 시작된 프랑스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콜레트에게 잘 어울리는 찬사는 뭐가 있을까? 나는 콜레트가 ‘파리 그 자체’였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파리와 가장 잘 어울리는 예술가였다. 무슨 말인지 감이 오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글에 밝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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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5-16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은 1인입니다. ㅋ
여성을 배제한 박애는 정말 모순이네요.
여성을 제외하고 남성들이 쓴 역사가 대부분이기에 왜곡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누구의 관점에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지요.

cyrus 2019-05-20 11:42   좋아요 0 | URL
“우리”라는 말이 누가 쓰느냐에 따라서 “우리”에 배제되거나 포함되지 못한 존재가 나옵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모두를 위한”이라고 시작되는 말을 신뢰하지 않아요. 그 말 속에 있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느껴지지 않거든요.
 

 

 

 

1992429일 수요일, 배심원들은 과속으로 운전하다가 도주한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집단 구타한 네 명의 백인 경찰관에게 무죄 선고를 내렸다. 평결을 내린 총 열두 명의 배심원은 모두 백인이었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 결과는 흑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격분한 흑인들의 폭력과 방화는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그 와중에 미국 언론은 로드니 킹 구타 사건보다 두순자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두순자 사건은 로드니 킹이 구타당한 날과 비슷한 시기인 19913월에 일어났다. 흑인 밀집 지역에서 한인 슈퍼마켓을 운영하던 두순자는 자신의 가게에 있는 주스를 사려던 흑인 소녀를 절도범으로 오해했다. 두순자는 흑인 소녀와 실랑이를 벌인 끝에 권총으로 살해했다. 이 사건이 미국 주류 언론에 의해 부각되면서 흑인들의 분노어린 시선은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한인들에게로 향했다. 429일부터 54일까지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흑인들의 폭동으로 한인업소 2천여 개가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LA 폭동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인종 간의 극단적인 폭력으로 치달았다. 한흑(韓黑)갈등으로 불거진 LA 폭동은 당시 재미 한인사회에 크나큰 상처를 남겼다. 인명과 물적 피해뿐 아니라 그동안 어렵사리 미국 사회에 정착해가던 한인들에게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 장태한 미국의 흑인, 그들은 누구인가(고려대학교출판부, 2012)

    

 

 

27년이나 지난 지금, 폭동이 일어난 도심 현장을 가까이선 본 재미 한인과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폭동의 살벌한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느낀 한국 국민은 LA 폭동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흑인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LA 폭동을 흑인의 비도덕성과 폭력성이 만천하에 드러난 집단적 일탈 행위로 인식한다. 그들은 폭동을 일으키거나 폭동에 동참한 흑인을 비판하면서 흑인사회 전체를 범죄자 집단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LA 폭동은 가해자(폭동을 일으킨 흑인)피해자(재미 한인)로 구분하게 만드는 이분법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은 아니다.

 

미국의 흑인, 그들은 누구인가LA 폭동이 일어나게 된 거시적인 원인을 되짚은 책이다. 이 책의 저자인 장태한 교수는 LA 폭동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했으며 한흑 갈등과 재미 한인 역사 등을 연구했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LA 폭동은 흑백의 빈부 격차, 흑인 사회의 실업률, 경찰의 과잉진압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려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런데 미국 언론은 두순자 사건과 한인업소를 습격하는 흑인들의 모습을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이로 인해 LA 폭동은 지역 상권을 둘러싼 흑인과 재미 한인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인종 대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흑인을 재미 한인을 공격하는 가해자로 보게 만드는 언론의 프레임(frame)은 흑인을 공정하게 대우하지 않았던 백인과 재미 한인들의 인종 차별 문제를 은폐한다. 1970~1980년대에 미국에 이민을 온 한인들은 단일민족의 우수성에 대한 교육을 받고 자라왔다. 그들은 순수 혈통을 중요시했으며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민족적이고 공동체적인 사회를 지향했다. 다른 인종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걸 몰랐다. 재미 한인은 미국 사회의 주류인 백인에게 매우 저자세를 취하면서도 흑인과 소수 인종을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흑인들의 불만을 커지게 했고, 1992년 로드니 킹 사건에 대한 무죄 판결이 내려지면서 오랫동안 참아왔던 흑인들이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LA 폭동을 경험한 재미 한인들은 그 사건을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LA 폭동과 같은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사건으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장태한 교수는 LA 폭동의 원인을 인종에 대한 무지와 차별이라고 지적한다. LA 폭동 이후로 재미 한인은 미국의 다인종 다민족 사회에 대한 무관심을 반성했으며 흑인을 포함한 여러 인종과 교류하는 소통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열린책들, 2015)

* 하퍼 리 파수꾼(열린책들, 2015)

* [e-Book] 하퍼 리 외 하퍼 리 버즈북(열린책들, 2015)

 

    

 

차별하려는 의도가 있든 없든 보통 자신과 다른 인종과 민족을 생각하면 이런저런 고정관념과 편견들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미국 흑인 못지않게 미국 남부인도 부정적인 편견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 하퍼 리(Harper Lee)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는 미국 남부 노예제도의 인종 차별을 다룬 작품이다. 작가는 억울한 누명이 씌워진 흑인을 변호하는 변호사 애티커스 핀치(Atticus Finch)를 내세워 편견이 가져오는 인종 차별 및 갈등 문제를 개인의 정의와 양심으로 극복해가는 과정을 그렸다. 소설과 동명의 영화가 큰 성공을 거두면서 애티커스 핀치는 정의로운 백인 남성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앵무새 죽이기로 제목과 내용을 완전히 고치기 전에 쓰인 파수꾼(Go Set a Watchman)에서 애티커스 핀치는 전작과 완전히 180도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와 다른 피부를 가진 사람을 이해하라고 강조하던 변호사가 인종차별주의자로 변신한 것이다. 대부분 독자는 앵무새 죽이기파수꾼의 애티커스 핀치를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그리고 그가 나이가 들면서 변절했다고 평가한다. 애티커스 핀치에 대한 독자들의 판단과 해석은 자유다. 나는 앵무새 죽이기파수꾼의 애티커스 핀치를 노예제에 반대한 남부인의 모습노예제를 옹호한 남부인의 모습을 각각 대변하는 인물로 보고 싶다. 두 작품에 나오는 애티커스 핀치의 모습은 단일한 이미지로 규정할 수 없는 남부인의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 [품절] 이영효 미국사 낯설게 보기(전남대학교출판부, 2014)

* 손영호 마이너리티 역사: 혹은 자유의 여신상(살림, 2003)

* 김형인 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살림, 2003)

 

    

 

앵무새 죽이기는 미국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작품이긴 하지만, 남북전쟁 시기에 만들어진 남부인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재생산하는 한계가 있다. 앵무새 죽이기에 묘사된 메이콤은 백인 쓰레기(white trash)라는 좋지 않은 별명이 붙여진 가난한 백인들이 모여 사는 시골이다. 메이콤 주민들은 혈연으로 얽힌 폐쇄적인 관계를 지향한다. 하퍼 리는 남부에 위치한 이 마을을 외부인의 유입을 받아들이지 않는 단절된 지역으로 묘사한다.

 

가난하고, 노예제 유지를 고집하는 보수적인 남부인 이미지는 노예제를 둘러싼 남부인과 북부인 간의 노선 갈등이 고조되던 1820년대에 만들어졌다. 북부의 반노예제 운동가들은 노예제를 옹호하는 남부인들의 도덕성을 문제 삼았고, 성서 구절을 인용해 노예제의 허위를 증명하려고 했다. 북부인들의 공격에 의식한 남부인은 남부 연합을 구축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갔고, 남부의 기독교 복음주의자들도 성서를 인용하여 노예제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남부인은 노예를 가족의 일원으로 생각하는 가부장적 온정주의를 내세워 노예제의 결점을 지우려고 했다. 이로써 미국은 남과 북이라는 두 진영으로 갈라지게 되고, 미국인들은 자신들만의 하나님(노예제를 반대하는 하나님, 노예제를 옹호하는 하나님)을 내세워 남북전쟁을 일으킨다. 북군이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남북전쟁 이후 미국 역사는 북부인 중심의 역사, 승리자 중심의 역사로 기록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역사가는 자유과 노예 해방을 외친 북부인을 찬양했고, 반대로 남부인을 고리타분한 패배자로 평가했다.

 

지금도 여전히 남부는 자유와 도덕과 담쌓은 사람들이 사는 폐쇄적이고 단절된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부정적으로 일관된 남부 이미지는 남부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부정적인 남부 이미지에 대한 반론의 주장들이 나오고 있다. 남부에 다수의 흑인 노예를 소유한 농장주보다 노예를 한 명도 소유하지 않은 자영농이 더 많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자료가 있다. 그리고 북부인들도 남부인들과 다름없는 인종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편견이 어느 정도 반영된 남부의 부정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북부의 역사를 지나치게 찬양하는 것은 미국의 반쪽짜리 역사만 보는 것과 같다.

 

미국사 낯설게 보기(8, 9, 10)살림지식총서에 포함된 마이너리티 역사: 혹은 자유의 여신상두 얼굴을 가진 하나님: 성서로 보는 미국 노예제는 주류에 의해 주변으로 밀려난 미국 흑인과 미국 남부인의 삶을 확인할 수 있는 책들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진리와 허위, 또는 정의와 불의로만 보는 사람은 선과 악의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얽매이게 된다. 그렇게 되면 검은색과 흰색만 볼 뿐, 그사이의 수많은 다른 색의 스펙트럼은 보지 못하게 된다. 인종, 민족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종종 나와 다른 인종과 민족, 심지어 지역 주민을 고정관념만 가지고 정의 내리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고정관념을 갖는다. 다시 말해 인간은 누구나 비슷한 사람, 같은 언어와 비슷한 억양을 가진 사람을 즉각적으로 좋아하는 성향은 갖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인간다운 약점을 피하려면 앵무새 죽이기의 애티커스 핀치가 자신의 딸 스카웃(Scout)에게 했던 말을 상기시켜야 한다. 너무나도 쉬운 일인데도, 이렇게 생각하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다.

 

 

결국 우리가 잘만 보면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멋지단다.”

 

(김욱동 옮김, 앵무새 죽이기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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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스를 잡다
아르놀트 판 더 라르 지음, 제효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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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 본 사람만이 건강의 소중함을 알 수 있다. 인간은 가진 것을 잃고 나서야 그 소중한 가치를 실감하게 된다. 병을 앓는 사람을 뜻하는 환자(患者)의 ‘환(근심)’은 마음(心)에 꼬챙이(串)가 찔려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질병의 고통은 외부적 요인(꼬챙이)과 내부적 요인(마음)이 동반해서 생기는 것이란 암시로 보인다. 환자는 몸만 아픈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마음마저 약해지면서 병마와 힘겨운 싸움을 벌인다. 종교의 영역에서 고통은 성스러움을 상징하기도 한다. 기독교가 보는 몸은 위험한 욕망으로 가득한 덩어리로, 자기 정화를 통해 성스러워져야 하는 대상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까지 사랑을 실천한 예수의 고통을 바라보는, 타락한 인간은 자신의 몸을 정화해 영적 치유를 얻는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고 과학이 발전하면서 이러한 질병의 중세적 관점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신이나 초월적 의미로 신비화했던 몸이 과학적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이다. 몸속 장기와 조직, 세균의 실체를 탐색하기 시작한 근대 의학은 질병의 고통을 줄이거나 아예 없애는 방법을 찾았다. 이로써 외과 의사들은 완치율이 높은 수술을 할 수 있게 됐다.

 

네덜란드 현직 외과 의사가 쓴 《메스를 잡다》는 원시적인 방광결석 제거술에서 긴박감 넘치는 JFK(존 F. 케네디) 미국 전 대통령의 응급실 현장까지 과거 · 현재 · 미래의 외과술을 보여준다. 이 책 속에 있는 의학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의학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발달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18세기만 해도 외과 의사는 ‘뼈를 자르는 사람’으로 불리며 멸시를 받았다. 외과 수술은 이발소에서 이뤄졌는데, 무시무시한 칼질을 하던 외과 의사의 모습은 푸주한과 다르지 않았다. 네덜란드의 대장장이는 칼 하나만 가지고 자신의 방광에 있는 달걀만한 돌덩어리를 직접 빼냈다. 몸속 깊숙이 의사의 메스가 들어가기 위해서는 마취제가 본격적으로 병원에 도입되는 19세기 중엽을 기다려야 했다. 오늘날에 마취 없이 환자의 몸에 메스를 대는 의사는 거의 없다. 결국 의학의 역사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 속에 진행된 크고 작은 수술들이 만들어낸 역사이다.

 

이 책은 수술의 역사를 조명하면서 의학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뿐만 아니라 수술대 위에 누운 유명한 환자들도 소개한다. 의사와 환자,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소리 없이 아파져 오는 통증과 심한 부상을 입은 몸이라는 낯선 신체적 조건에서 시작된 우연한 만남이다. 병원과 수술실에서 만나는 두 사람 사이의 기류는 우리가 생각해도 긍정적일 수만은 없다. 환자는 통증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의사를 찾는다. 의사는 환자가 평소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다. 의사와 환자는 서로 불편한 관계가 아닌 질병과 맞서 싸우는 동반자이다.

 

그러나 의사에 대한 지나친 불신 때문에 최악의 상황을 자초하는 환자들도 있었다. 루이 14세의 궁정 음악가로 활동한 장 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는 지팡이 모양으로 된 지휘봉을 사용했다. 이것은 지금의 지휘봉과는 조금 다른 형태이며 사용 방법도 다르다. 지휘봉을 손에 들고 공중에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바닥을 쿵쿵 내려치며 박자를 맞추는 방법으로 사용했다. 륄리는 왕을 위한 공연 리허설을 진행하던 도중 지휘봉에 발등을 찔리는 상처를 입는다. 륄리는 발등에 생긴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결국 괴저에 걸려 의사로부터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는다. 그러나 의사의 진단을 무시한 륄리는 괴저가 일으킨 합병증에 시달려 끝내 목숨을 잃었다. ‘내 몸은 내가 통제할 수 있다’는 지나친 자신감 또한 몸 상태를 더욱더 나쁘게 만드는 원인이다. ‘전설의 마술사’ 해리 후디니(Harry Houdini)는 튼튼한 체격을 가진 장사였다. 그는 “내 배를 얼마든지 때려도 난 끄떡없다”라고 떠벌렸다. 그를 만난 대학생이 진짜로 그의 배를 세 번 후려쳤고 후디니는 이틀 만에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충수염과 복막염이었다. 복부 통증을 견디면서 무리하게 마술 쇼를 강행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륄리와 후디니는 안일한 판단 때문에 자신의 생사를 결정하는 골든타임을 놓쳐버렸다.

 

저자는 의학이 과거에는 질병을 극복하는 데 치중했다면 미래에는 개인 생활방식의 개선, 신체 기능 증진, 수명 연장 등으로 초점을 옮기면서 의학의 역할도 변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래도 륄리와 후디니가 자신의 몸을 혹사해 파국에 이르렀듯이, 질병의 고통을 일시적으로 몰아내면 영원한 안식을 찾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해선 안 된다. 급성 질병은 적절한 치료를 받으면 없앨 수 있지만, 만성적으로 지속하는 질병에는 여전히 속수무책이다. 몸에 이상을 느끼면 병원을 찾는 대신 인터넷부터 뒤지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자신의 증세에 해당하는 질병을 확인하려는 본능과도 같은 행동이다. 환자 스스로 진단하고 처방까지 내리게 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자신의 증세와 비슷한 사람의 글을 읽고, 병원 진료를 받을지 여부를 결정해버린다. 심지어 효과 없는 치료법을 믿고 아예 병원을 찾지 않은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의사와 환자의 만남은 매우 중요하다. 건강하게 사는 것은 의사와 환자가 관계를 맺는 방식에 달린 일이다. 의사와 환자는 서로에게 신뢰를 하고 질병이라는 적에 맞서 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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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8-12-19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서재의 달인 선정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올해도 좋은 이웃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하고 좋은 연말 보내세요.^^

cyrus 2018-12-20 16:5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축하드립니다. 올해는 이웃들의 글을 제대로 읽은 적이 없어서 ‘좋은 이웃’은 아니랍니다.. ㅎㅎㅎ

글월마야 2018-12-19 2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립니다🤗🤗🤗

cyrus 2018-12-20 16: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2018-12-19 23: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유독 여기저기 아파서 병원에 자주 들락거렸는데 어떤 의사는 신뢰가 가고 또 어떤 의사는 내내 믿음이 안가기도 하더라구요. 질병은 둘째치고 의사와의 교감도 중요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 한 해였어요.

cyrus 2018-12-20 16:56   좋아요 0 | URL
요즘 자격 미달 수준의 의사들이 많아서 진료와 치료를 받는 게 부담스럽지만, 계속 진료와 치료를 미루면 몸이 더 나빠져요. 병원에 안 갈 수가 없어요. ^^;;
 

 

 

1492년은 아메리카 대륙을 놓고 희비가 엇갈리는 해였다. 콜럼버스(Columbus)를 보내 이 대륙의 실체를 확인한 스페인에게는 강대국으로 도약하는 역사적인 해로 여겼다. 하지만 그곳에서 잘살고 있었던 원주민(Native Americans)들에게는 고난을 예고하는 불행의 해였다. 이른바 ‘신대륙 발견’ 이후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을 철저히 파괴되었다. 문명이라는 허울 속에 원주민들의 삶과 역사는 모조리 짓밟혔고, 지금은 일부 후손들만 살아남아 보호 구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사계절, 2000)

*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서해문집, 2004)

 

 

 

콜럼버스는 대서양 횡단이 세계 역사를 바꾸는 항해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그는 새로운 땅보다 황금에 더 관심이 많았다. 콜럼버스는 마르코 폴로(Marco Polo)가 언급한 ‘지팡구(Jipangu, Zipangu)를 찾고 싶어 했다.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일본을 ‘황금의 나라’로 소개했다. 그가 ‘일본은 막대한 금을 생산하고, 그곳의 궁전이나 민가는 황금으로 만들어져 있다’라는 식으로 기록한 덕에 지팡구는 한때 유럽인들에게 미지의 세계로 인식된 바 있다. 콜럼버스는 죽기 전까지 자신이 본 아메리카를 인도의 일부(Indias, 인디아스)라고 여겼고, 바하마 제도에 속한 여러 섬과 쿠바를 지팡구나 중국 정도로 생각했다.

 

 

 

 

 

 

 

 

 

 

 

 

 

 

 

 

 

 

 

 

 

 

 

 

 

 

 

 

 

 

 

* 콜럼버스, 라스 카사스 엮음 《콜럼버스 항해록》 (범우사, 2000)

* 콜럼버스, 라스 카사스 엮음 《콜럼버스 항해록》 (서해문집, 2004)

* [절판] 라스 카사스 《인디아스 파괴에 관한 간략한 보고서》 (북스페인, 2007)

* 김선욱, 박병규 엮음 《항해와 정복》 (동명사, 2017)

 

 

 

 

콜럼버스는 지팡구로 가는 거창한 항해 계획을 실현하는 데 10년의 긴 세월을 허비하였다. 재정적 후원자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나서 자란 15세기 이탈리아는 수많은 작은 도시국가로 쪼개져 있었기 때문에 어느 한 나라도 막대한 비용이 드는 그의 항해 사업을 도울만한 국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결국 콜럼버스는 스페인의 후원에 의존하게 됐다. 스페인은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에 의해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었지만,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 여왕(Isabel I)과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2세(Fernando II)의 연합군이 주도한 영토 회복 운동(Reconquista)이 성공하면서 통일을 이룩했다. 콜럼버스는 이 스페인 공동 왕(가톨릭 양왕)에게 자신의 항해 사업을 제안했고, 공동 왕은 그에게 항해를 후원하기로 약속했다. 그리하여 1492년에 콜럼버스는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첫 번째 항해에 나서게 되었다. 《콜럼버스 항해록》은 1492년 8월 3일부터 1493년 3월 15일까지 220여 일의 1차 항해의 경위를 기록한 책이다. 현재 이 책의 원본은 분실되었고,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Bartoleme de las Casas) 신부가 이 원본의 내용을 요약한 필사본만 남아 있다. 그래서 현재 전해지고 있는 콜럼버스의 항해 일지는 라스 카사스 신부가 편집한 것이다. 라스 카사스 신부는 ‘인디언의 보호자’란 별명을 얻을 만큼 원주민의 인권을 위해 애쓴 성직자다.

 

국내에 2종의 《콜럼버스 항해록》 번역본이 있다. 범우사 판은 라스 카사스 신부가 항해 일지에 직접 단 주석들까지도 옮겼다. 서해문집 판도 라스 카사스의 주석이 나오긴 하지만, 주석이 빠진 내용(1493년 1월 15일 자)도 있다. 신부는 3인칭 시점으로 (콜럼버스) 제독은 ~을 했다”는 식으로 항해 일지를 기록했는데, 범우사 판은 이 서술 방식을 그대로 옮겼다. 반면 서해문집 판은 콜럼버스가 화자인 1인칭 시점의 일기체 형식(“나는 ~을 했다”)으로 편집되어 있다. 서해문집 판의 장점은 고대 문명과 신대륙 항해에 관련된 풍부한 도판이다. 그래서 읽으면 지루하지 않다. 콜럼버스가 항해에 나서게 된 역사적 배경과 고대 원주민의 문화에 대해서 충실히 설명돼 있다. 아메리카 대륙의 문화뿐만 아니라 덤으로 아스테카 문명과 마야 문명의 문화도 소개하고 있다. 항해 일지 속에 콜럼버스가 스페인 공동 왕에게 보낸 서한이 삽입되어 있는데, 이 서한 역시 콜럼버스 항해(총 네 차례)의 과정을 가늠할 수 있는 문헌이다. 《항해와 정복》(동명사)에 콜럼버스가 쓴 서한들이 수록되어 있다.

 

 

 

 

 

 

 

 

 

 

 

 

 

 

 

 

 

 

 

 

 

 

 

 

 

 

 

 

 

 

 

 

 

 

* [절판] 앤서니 그래프턴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 (일빛, 2000)

* [절판] 가일스 밀턴 《수수께끼의 기사》 (생각의나무, 2003)

* 존 맨더빌 《맨더빌 여행기》 (오롯, 2014)

* 움베르토 에코 《전설의 땅 이야기》 (열린책들, 2015)

 

 

 

“책 속에 세상이 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책은 여행과 탐험 의지를 불러일으키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옛사람들이 남긴 여행기와 항해 일지는 여행과 모험의 취향을 자극했다. 절판된 《신대륙과 케케묵은 텍스트들》 (일빛)은 고대의 옛 문헌들이 대항해 시대에 끼친 영향을 조명한 책이다. 이 책의 제목에 들어있는 ‘케케묵은 텍스트’란 고대에 만들어진 지도, 지리서, 여행기 등을 뜻한다. 콜럼버스는 ‘탐험가’ 이전에 《동방견문록》과 고대인들의 지리서를 탐독했던 ‘독서가’였다. 콜럼버스 같은 항해가들은 처음에 옛 문헌들을 탐독하면서 미지의 세계를 동경했지만, 그곳을 직접 관찰하고 확인하면서부터 지리에 대한 옛사람들의 생각이 허구임을 깨달았다.

 

《동방견문록》 다음으로 널리 읽힌 《맨더빌 여행기》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서술의 차원을 넘어 세계 일주가 가능하다는 확신을 심어준 책이었다. 존 맨더빌(John Mandeville)은 1322년 예루살렘 성지 순례에 나섰고 무려 34년이 지나서야 영국으로 다시 돌아온 인물(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이다. 그는 성지뿐만 아니라 인도와 중국, 자바와 수마트라까지 다녀온 여정을 기록으로 남겼고, 그가 쓴 여행기는 수백 개의 사본이 나올 정도로 큰 인기를 얻었다. 《수수께끼의 기사》 (생각의나무)는 ‘여행기의 저자’이자 ‘기사’로 알려진 존 맨더빌의 정체를 추적한 책이다.

 

‘케케묵은 텍스트’는 사실과 거짓, 과장이 뒤섞여 있지만, 유럽 너머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는 충분했다. 콜럼버스도 이 책을 읽고 항해를 위한 영감을 얻었다. 탐험가들은 여행을 통해 확실한 지식을 얻고 나서부터 세계를 설명하는 ‘권위 있는 문헌’이었던 과거 지리서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게 된다. 한 사람이 ‘독서가’(또는 ‘몽상가’)에서 ‘탐험가’로 변모하는 과정은 책에만 의존하지 않고,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근대적 지식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콜럼버스를 ‘근대적 지식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전설의 땅 이야기》 (열린책들)에 콜럼버스를 지상 낙원을 찾고 싶었던 ‘중세의 마지막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콜럼버스의 한계를 지적한 그의 주장이 틀린 말은 아니다. 콜럼버스는 스페인 공동 왕에게 3차 항해의 결과를 보고한 서한에 지상 낙원이 있다고 언급했다(《항해와 정복》, 『콜럼버스가 3차 항해에서 가톨릭 양왕에게 보낸 편지』). 하지만 그는 1차 항해 결과를 보고한 편지에서 자신이 참고한 고대 문헌에 나온 내용은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추측’이라고 밝혔다. 그는 분명히 자신에게 영감을 준 고대 문헌들의 부정확함을 비판했다. 콜럼버스는 자신의 업적을 스페인 왕에게 인정받아 아메리카 대륙을 다스리는 총독의 권한을 손에 쥐고 싶었으며 다음 항해를 위한 후원을 받고 싶었다. 그래서 스페인 왕에게 보낸 서한에 아메리카 대륙을 ‘지팡구’인 것처럼 과장되게 묘사했다. 그렇다면 항해 일지와 서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콜럼버스의 모순된 모습은 이익을 챙기려는 사업가다운 면모로 볼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케케묵은 텍스트들’의 환상에 빠져나오지 않은 중세인의 구시대적 면모로 봐야 하나. 콜럼버스도 알고 보면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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