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조선에는 신식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 등장했다. 나혜석, 허영숙(한국 여성 최초의 개업의, 춘원 이광수의 부인), 황애시덕(애국부인회를 조직한 독립운동가) 등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귀국해 여자유학생친목회를 결성하고, 여성 독자를 위한 교양지 <여자계(女子界)>를 창간한 것은 한국 여성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손꼽힌다. 조선의 문학계와 미술계를 대표하는 유명한 신여성이 나혜석이라면, 음악계에는 윤심덕이 있다. 예술가로서의 길을 걸었던 두 사람의 여성해방론과 신념은 시대를 앞서 있었다. 1920년대 조선에는 여전히 구시대적 사고방식이 남아 있었다. 여성이 결혼하지 않고 사회생활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고, 신여성이 지향하는 자유 연애론에 눈살을 찌푸리면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여권 신장에 앞장선 두 사람으로서는 그 시절을 살아가기가 결코 녹록치 않았다.

 

 

 

 

 

 

 

 

 

 

 

 

 

 

 

 

 

 

* [우주지감 9월의 책] 나혜석, 장영은 엮음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민음사, 2018)

* [품절] 나혜석 경희 ()(종합출판 범우, 2006)

* [품절] 이상경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한길사, 2009)

 

 

 

 

 

 

 

 

 

 

 

 

 

 

 

 

 

 

 

* 헨리크 입센 인형의 집 (예술의전당 에디션)(민음사, 2018)

* 헨리크 입센 인형의 집(민음사, 2010)

* 헨리크 입센 인형의 집(열린책들, 2010)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로 많이 알려졌지만, 소설과 시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1918<여자계>에 발표한 자전적 소설 경희는 구시대적 통념에 저항하는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한 여성주의 텍스트이다. 일본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조선에 돌아온 경희는 여성도 남성과 똑같이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주체이자 결혼의 주체라고 한다. 나혜석은 경희라는 인물을 통해 조선의 여성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또 여성 스스로가 결혼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내 · 외부적 갈등도 소설 속에 생생하게 담아내고 있다. 결국 경희는 입센(H. Ibsen)의 희곡 인형의 집에 나오는 노라(Nora)처럼 가부장제가 작동하는 가정을 등지기로 결심한다.

 

 

 

 

 

 

 

 

 

 

 

 

 

 

 

 

* 김경일 신여성, 개념과 역사(푸른역사, 2016)

 

 

 

인형의 집은 나혜석을 포함한 신여성들에게 영향을 준 희곡이다. 19211월부터 <매일신보>인형의 집인형의 가()라는 제목으로 번역 연재되었다. 나혜석은 신문에 연재되는 희곡을 위해 직접 삽화를 그렸다. 제일 마지막 회에 나혜석이 쓴 동명의 노랫말이 실렸다. 나혜석의 인형의 가경희()(종합출판 범우)에 수록되어 있다. 윤심덕은 도쿄음악학교 졸업발표회를 위한 인형의 집공연에 노라 역을 맡았다. 나혜석과 윤심덕은 남성에 종속된 여성으로 사는 삶을 거부하고, 한 인간으로서 독립하려는 노라를 찬미하고 동경하고 있다.

 

신여성, 개념과 역사(푸른역사)의 저자 김경일은 나혜석과 윤심덕을 2세대 근대 여성으로 분류한다. 2세대 근대 여성은 봉건적 가족제도와 결혼제도에 대한 비판과 도전을 통해 사회전반에 걸친 개조와 개혁을 달성하려고 했다. 그녀들의 꿈은 여성의 개성과 평등에 기반을 둔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지라는 조선의 특수한 시대적 환경은 그녀들의 신념을 마음껏 펼치지 못하게 만드는 유리 장벽이었다. 나혜석과 윤심덕은 봉건적 가족제도와 결혼제도를 비판하면서 여성의 개성과 평등을 강조했고, 자유연애를 서슴없이 말했다. 특히 나혜석은 1934년에 이혼 고백장-청구(靑邱) 씨에게라는 글을 써서 조선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이 글을 통해 나혜석은 자신이 이혼에 이르게 된 경위와 그 과정에서 전 남편 김우영이 보인 편협함, 그리고 남성 이기주의 등을 상세하게 언급했다. 이혼 고백장는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공개적인 도발이었다. 그러나 이글이 발표되자 대중은 격렬하게 그녀를 비난했다. 전근대적인 남성 중심 사회에 벗어나지 못한 남녀 모두가 그녀를 향해 돌을 던졌다. 나혜석은 글쓰기를 통해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고 했다. 그녀는 잠시 붓을 내려놓고 펜이라는 날카로운 무기를 들어 여성을 억압하는 시대에 맞서 싸웠다.

 

하지만 자유주의 계열의 신여성에 속한 나혜석과 윤심덕을 제외한 일부 신여성들은 여성 해방보다는 민족 해방을 먼저 생각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등장으로 인해 여성의 자유를 강조하는 여성해방론이 설 자리는 축소되었다. 남성 지배의 사회 분위기를 질타한 나혜석은 주류 남성 지식인들의 비방과 냉소에 시달렸지만, 사회주의 계열 신여성은 남성 지식인들의 비방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사회주의 계열의 신여성들의 목표는 민족 해방이었고, 그녀들은 새로운 공산주의 국가를 만드는 대의에 헌신하는 존재로 인정받았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의 남성 지식인들의 눈에는 나혜석과 같은 자유주의 계열의 신여성을 안 좋게 보였을 것이고, 그녀들은 이기적이고 속물 같은 부르주아 여성으로 인식되었다.

 

나혜석은 이혼 고백장에서 이혼 후 자신을 향한 비난과 냉대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처절한 심정을 토로한다.

 

 

 

 세상의 모든 신용을 잃고 모든 공분 비난을 받으며, 부모 친척의 버림을 받고 옛 친구를 잃은 나는 물론 불행하려니와 이것을 단행한 씨[김우영]에게도 비탄, 절망이 적지 아니 할 것입니다. 오직 나는 황야를 헤매고 암야에 공막(空漠, 텅 비고 쓸쓸함)을 바라고 자실(自失, 자기 존재를 잊을 정도로 얼이 빠져)하여 할 뿐입니다.

 떨리는 두 손에 화필과 팔레트를 들고 암흑을 향하여 가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광망(光芒)의 순간을 구함인가. 너무 크고 너무 중한 상처의 충격을 받는 내게는 각각으로 절박한 쓸쓸한 생명의 부르짖음을 듣고 울고 쓰러지는 충동으로 가슴이 터지는 것 같사외다.

 

(나혜석 이혼 고백장중에서,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157)

 

 

 

 

황야를 헤매고 암야에 공막을 바라고 자실한 상태에 이른 나혜석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가슴 속을 파고드는 암울함과 처절함이 우러나오는 윤심덕의 노래 사의 찬미가 떠오른다. 윤심덕은 이 노래를 취입한 레코드가 나오기 전에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졌다. 이혼 고백장에 있는 자실이라는 단어가 자살로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그러나 나혜석은 절망을 딛고 다시 한 번 갱생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조소와 질책을 감수하면서 행진을 계속할 것이라고 결심한다.

 

 

 

(1)

황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2)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위에 춤추는 자로다

 

(3)

허영에 빠져 날뛰는 인생아

너 속였음을 네가 아느냐

세상의 것은 너에게 허무니

너 죽은 후엔 모두 다 없도다

 

(후렴)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윤심덕의 불꽃 같은 삶은 짧고도 강렬했다. 세상은 그녀의 용감한 신념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세상은 오로지 그녀가 자살한 이유를 알고 싶어 했고, 그녀와 김우진과의 관계에 관음증적인 호기심을 느꼈다. 주류 사회를 불편하게 만든 언행으로 인해 나혜석은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채 살다가 행려병자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나혜석과 윤심덕은 세상에 안주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원대한 꿈을 펼치지 못하게 하는 세상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삶을 선택했다. 그녀들은 자신에게 다가올 비극을 알면서도 각자가 원하는 삶을 찾으려고 열중한 칼 위에 춤춘 자들이었다.

 

 

 

Trivia

 

신여성, 개념과 역사85(초판 1)오자가 있다. 2세대 근대 여과 급진주의라고 적혀 있다. ‘2세대 근대 여성과 급진주의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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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5 22: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28 15:29   좋아요 0 | URL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 대단해요. 저는 그렇게 하라고 하면 절대로 못 하겠어요.. ^^;;

stella.K 2019-09-26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희> 범우사에서 나왔네.
애석하게도 절판이야. 다른 책도 봤는데 읽고 싶은 게 많더군.
기획을 잘 했던 것 같은데 잘 안 알려진 것 같아.
나도 이제 처음 알았다.
옛날에 범우사 알아 줬는데. 처음 책을 읽는 사람들은
범우사 아니면 삼중당이었는데 지금은 그 명성이 완전 묻혔지?
난 옛날에 냈던 책으로만 먹고 살려나 했더니
그래도 최근 간간이 책을 내긴 했더군.
나혜석은 희곡이 있어 함 읽어보려고 해.

cyrus 2019-09-28 15:33   좋아요 0 | URL
범우사의 행보가 너무 조용해서 지금도 새 책을 내놓고 있는지 알아봤어요. 지금도 범우문고가 나오네요.. ㅎㄷㄷ 그런데 예전에 나온 책들의 일부는 절판됐어요. 나혜석의 희곡을 따로 실은 책이 있을 거예요. ^^
 



자주 가는 도서관에서 익숙한 책을 만났어요! :)

- 2019.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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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18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18 19:28   좋아요 1 | URL
제목을 안 적었네요.. ㅎㅎㅎ
<네 멋대로 읽어라>입니다. 알라디너 stella.k님이 쓴 책이에요. :)

2019-09-18 2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19 11:52   좋아요 0 | URL
책이 진열대 중앙에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잘 띌 거예요. ^^

2019-09-18 22: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19 11:54   좋아요 1 | URL
네, 책을 보자마자 기쁜 마음이 들었어요. ‘내가 아는 책’인데 이상하게도 ‘내가 쓴 책’인 것처럼 느껴졌어요. ^^

얄라알라 2019-09-20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stella.K님의 책이라니, 모르고 휘릭 봤을 때랑...마음이 달라집니다. 다시 찾아 읽어야겟어요

cyrus 2019-09-21 11:32   좋아요 0 | URL
예전에 읽은 책이라서 그런지 보자마자 알아봤어요. 안 읽은 책이라면 대충 보고 지나쳤을 거예요.. ^^;;
 

 

 

살롱(salon)은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단어다. 첫 번째 의미는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이다. 두 번째 의미는 그곳에서 열리는 사교 모임이다. 세 번째 의미는 활동 중인 화가들의 그림들을 모아서 정기적으로 개최하는 전시회다.

 

 

 

 

 

 

 

 

 

 

 

 

 

 

 

 

 

 

* 강준만 룸살롱 공화국(인물과사상사, 2011)

 

 

 

우리나라에 알려진 살롱의 의미는 앞에 언급한 것들과 다르다. 여종업원이 술 시중을 들어주는 유흥주점을 룸살롱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칸막이가 있는 방들이 있다. 우리 사회의 오래된 폐부인 접대 문화를 분석한 강준만은 한국을 룸살롱 공화국’, ‘칸막이 공화국이라고 지적했다. 은밀한 접대는 칸막이를 해야 하고, 칸막이를 우아하게 만들어놓은 곳이 바로 룸살롱이다. 룸살롱의 전신은 요정(料亭)이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를 통치한 미군정에 빌붙으려는 세력들은 요정에서 미군정의 주요 인사들을 접대했다. 요정은 권력을 차지하고 싶은 자들이 늘 드나들었고, 밀실 접대를 통해 권력의 한 축이 된 사람들은 룸살롱의 고객이 되었다.

 

 

 

 

 

 

 

 

 

 

 

 

 

 

 

 

* [절판] 하이덴-린쉬 유럽의 살롱들(민음사, 1999)

* 서정복 살롱 문화(살림, 2003)

* 메릴린 옐롬, 테리사 도너번 브라운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책과함께, 2016)

 

 

 

이제부터 진짜로 살롱에 대해서 살펴보자. 17~18세기 유럽의 귀족과 지식인들은 응접실에 모여 찻잔을 기울이며 과학과 문학, 예술과 정치 등을 논했다. 허영에 찬 상류층의 모임이라는 비판이 있지만, 살롱에서 이뤄진 방대한 정보와 지식의 교류는 프랑스 대혁명과 계몽주의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살롱은 여성해방의 공간이기도 했다.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살롱의 여주인들은 재기와 언변을 바탕으로 유명 인사들을 끌어들이려 각축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녀들의 삶과 전설은 유럽의 살롱들(민음사)이라는 책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지금은 몰락한 여성 문화의 황금기. 유럽의 살롱들은 프랑스, 독일, 영국의 살롱 문화의 특징과 각국의 살롱 문화를 대표하는 여성들의 주요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20세기까지 이어진 살롱은 정숙한 여성의 역할을 강요해온 가부장적 사회 규범을 타파하는 여성 해방의 자유로운 무대였다. 유럽의 살롱들은 절판되었는데, 이 책의 빈자리를 살롱 문화(살림)가 대신하고 있다.

 

남성 중심의 문화와 역사 기록에 가려진 여성의 다양한 우정과 연대 방식을 주목한 여성의 우정에 관하여(책과함께)도 여성의 살롱 문화를 비중 있게 언급한 책이다. 살롱 문화를 이끌어간 영국 여성들은 블루스타킹(bluestocking)이라는 별명이 붙여졌다. 1750년대는 영국의 살롱 문화가 활발히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받은 살롱의 여주인은 엘리자베스 몬터규(Elizabeth Montagu). 그녀의 모임에 자주 참석한 식물학자 벤저민 스틸링플릿(Benjamin Stillingfleet)는 블루스타킹을 착용했다. 그가 모임에 불참하게 되자 몬터규는 벤저민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그 후로 몬터규의 살롱 회원들은 블루스타킹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블루스타킹을 신은 사람은 모임에 열심히 활동하는 똑똑한 사람을 상징하게 됐고, 자연스럽게 지적인 살롱 회원을 의미하는 별명으로 남게 됐다. 그러나 여성이 남성 중심 사회에 개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사람들은 살롱에 참석하는 여성들을 가리켜 블루스타킹이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블루스타킹은 유식한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 됐고, 19세기 초에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뛰어든 여성을 조롱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 한일근대여성문학회 옮김 세이토(어문학사, 2007)

* 정애영 히라쓰카 라이초(살림, 2019)

 

 

 

미국과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에 영향을 받은 일본의 여성주의자들은 19119월에 <세이토(靑鞜, 청탑)>라는 여성문예 잡지를 창간했다. 세이토는 블루스타킹을 한자어로 바꾼 단어이다. 이 잡지 창간 및 편집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히라쓰카 라이초(平塚雷鳥)천재적인 여성의 등장을 역설한 글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세이토> 창간호에 게재했다.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는 처음에 이렇게 시작한다.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 진정한 인간이었다.

 지금, 여성은 달이다. 타인에 의해 살아가고 타인의 빛에 의해 빛나는 병자와 같은 창백한 얼굴의 달이다.

 지금 세이토는 태어났다.

 현재 일본 여성의 두뇌와 손에 의해 세이토는 처음 태어났다.

 

 

(히라쓰카 라이초, 원래 여성은 태양이었다중에서, 세이토39)

 

 

 

 

여성은 태양이었다가부장제 사회 한가운데에 근대 일본 여성주의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이다. 라이초는 이 글에서 대지를 비추는 태양처럼 빛나는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 [우주지감 9월의 책] 나혜석, 장영은 엮음 나혜석, 글 쓰는 여자의 탄생(민음사, 2018)

* [절판] 이상경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한길사, 2009)

 

 

 

라이초와 <세이토>는 각각 일본의 신여성 운동을 대표하는 인물과 매체로 되었고, 일본에 유학한 조선의 여성주의자들은 이 잡지를 통해 주체적인 인간으로서의 여성의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조선보다 한 발 앞선 일본의 여성해방 운동에 영향을 받은 여자 유학생들은 여자유학생친목회라는 이름의 단체를 만들어 19176[]<여자계(女子界)>를 발간했다. 여자유학생친목회 회원 중에 그 유명한 나혜석도 포함되어 있다. <여자계>우리나라 최초의 여성잡지 혹은 학술지로 평가받는다. 나혜석은 이 잡지를 통해 여성을 순종적으로 만드는 현실(결혼)과 여성해방의 이상 사이에 고뇌하는 신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 경희를 발표한다. 나혜석은 자신의 글 이상적 부인에 라이초를 간접적으로 언급할 정도로 그녀를 신여성 운동의 본보기로 삼았다.

 

 

 

 

 

 

 

 

 

 

 

 

 

 

 

 

* [절판] 박노자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한겨레출판, 2007)

 

 

 

그러나 라이초는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들어온 우생학을 옹호했으며 일본의 파시즘에 협조하는 행보를 보였다. 그녀는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서 국가에 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모습은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일본의 조선 지배를 옹호한 조선의 신여성들의 모습과 비슷하다. 신여성의 태양라이초는 1930년대부터 신여성의 욱일(旭日)이 되기 시작했다. 종전 이후에 라이초는 반전 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녀가 반전 운동을 했다고 해서 신여성 운동의 한계가 잊히는 건 아니다.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한겨레출판)에 수록된 신여성의 명암, 히라쓰카 라이초는 단순히 일본 신여성 운동의 한계를 지적하는 글이 아니라 그녀들에게 영향을 받은 조선 신여성 운동의 한계까지 되돌아보게 만드는 글이다.

 

몇 년 전부터 나혜석을 필두로 해서 신여성을 조명한 책들이 많이 나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책은 신여성의 ()만 소개하는 데 그친다. 시대를 앞서간 선배라고 해서 너무 띄워주면 곤란하다. 태양 빛을 너무 많이 쬐면 암(癌)이 생긴다. 훌륭한 선배가 있다면 그와 정반대로 살아가는 불량한 선배도 있기 마련이다. 불량한 선배들의 과거 행적은 여성 운동의 오점이자 흑역사로 남게 되지만, 이와 같은 일이 재현되지 않으려면 그것을 밟고넘어야 한다. ‘신여성의 암(暗)은 그냥 건너뛸 수 없는 페미니즘의 문제이다.

 

 

 

 

[] 안타깝게도 <여자계>의 창간호는 현재 남아 있지 않다. 현재 남아있는 <여자계> 원본은 2호와 6호 뿐이다. 그래서 <여자계> 창간호 발행연도가 정확하게 언제인지 분명하지 않다. 나혜석의 일대기를 정리한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한길사)의 저자 이상경<여자계>의 창간호 발행연도를 ‘19177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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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는 유학을 국가통치의 기본 이념으로 삼았다. 당시 유학의 주류를 이뤘던 성리학은 인간 심성에서부터 우주 운행에 이르기까지 태극, 음양, 이기(理氣) 등의 이치로 사물의 현상과 원리를 해명하는 학문이다. 성리학자들은 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인격 수양과 인간관계의 의리는 물론, 사회와 국가의 운영에까지 도덕에 기초한 이상을 구현하려 했다.

 

천자문을 익힌 아이들은 서당에 가서 소학(小學)을 읽고 배운다. 유교 사회에서는 본래 바른 생활습관과 품성을 배양하기 위한 인격 수양을 중시했다. 소학은 충효 · 예절 · 윤리 등을 알려주는 인격 수양의 지침서이다. 조선 시대의 사대부 여성들은 결혼하기 전에 소학과 같은 기초적인 유교 경전을 읽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사대부 남성들과 함께 공부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소학에 있는 유교윤리를 그대로 실천하고 산다면 그 사람은 바로 성인이요 군자인 것이다. 유교 경전을 읽으면서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여성도 군자가 될 수 있다.

 

 

 

 

 

 

 

 

 

 

 

 

 

 

 

 

 

* 정옥자 사임당전(민음사, 2016)

 

 

 

5만 원 지폐에 등장하는 신사임당을 얘기하면 우선 현모양처가 떠오르고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기억된다. 하지만 이것은 16세기 노론(老論: 조선 시대 붕당의 한 정파)의 수장이었던 송시열이 주도한 노론의 대모(大母) 만들기프로젝트에 의해 형성된 이미지다. 이이의 제자들은 노론에 속했고, 사임당은 스승을 낳은 위대한 어머니로 알려지게 됐다. 사임당은 탁월한 그림 실력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몇몇 사대부들은 신사임당의 그림 실력을 칭송하면서도 자녀 교육과 정숙한 행실에 더 초점을 맞추어 평가했다. 사임당전(민음사)의 저자인 정옥자 교수는 사임당에 대한 노론의 평가가 그녀의 예술가적 면모를 의도적으로 은폐했다고 보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노론은 사임당의 행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교적 가치를 예술가적 면모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어쨌든 화가 사임당은 잊히고 훌륭한 어머니 사임당만 남게 되어 지금까지 알려졌다.

 

이이는 사임당의 셋째 아들이다. 그는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선비행장>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선비는 세상을 떠난 사임당을, 행장(行狀)은 고인의 행실을 적은 글이다. 이 글에서 이이는 어머니의 그림 실력을 높이 평가했으며 그녀의 학식과 인격을 언급했다. 그렇다면 이이가 고인이 된 사임당을 가리켜 선비라는 호칭을 사용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선비는 학식과 인품을 갖춘 사람에 대한 호칭이다. 공자(孔子)와 그의 제자들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에 이어져 온 유학자들은 유교 이념을 실현하는 인격을 선비로 확립하였다. 이이는 유교 이념을 철저히 수련하고 실천한 사임당의 행실에 주목하여 선비라는 호칭을 썼다. 따라서 <선비행장>화가 사임당선비 사임당이라는 뛰어난 면모를 동시에 보여주는 중요한 글이다.

 

사임당과 이이의 명성에 완전히 가려지는 바람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임당의 맏딸이자 이이의 손위 누이인 이매창작은 사임당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학식과 예술 실력을 두루 갖춘 여성이다. 사임당의 막내아들 이우의 8대손인 이서는 <집안에 내려오는 서화첩 발문>에 이매창을 부녀자 중의 군자라고 언급했다.

 

 

 

 

 

 

 

 

 

 

 

 

 

 

 

* 김경희 임윤지당 평전(한겨레출판, 2019)

 

 

 

임윤지당군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성리학자이다. 사대부 여성이 학문에 정진할 수 없는 불리한 시대 속에 윤지당은 공부와 연구에 매진한다. 성리학을 공부한 그녀는 성인과 범인(凡人)이 본래 같은 성품을 타고났다고 보며 이를 전제로 하여 남성과 여성의 본성에 하등의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그러면서 윤지당은 여성도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녀는 일평생 유교 경전과 성리학을 연구하여 군자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노력했다.

 

윤지당은 앞서 언급한 사임당과 비교되기도 한다. 사임당이 시와 그림을 중심으로 한 교양과 예술에 몰두했다면, 윤지당은 사상과 역사, 문장, 교양을 두루 겸비한 학자였다. 현재까지 윤지당이 쓴 것으로 알려진 시는 단 한 편도 남아 있지 않다. 사임당이 이이라는 대학자를 아들로 두어 유복했다면, 윤지당은 남편과 아들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 박복했다는 점이 대비된다. 두 사람이 각각 예술과 학문에 탐닉할 수 있었던 공통적인 배경에는 개방적인 집안 분위기가 있었다. 두 사람의 어머니는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았고, 딸에게도 인격 수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절판] 이영춘 강정일당(가람기획, 2002)

 

 

 

윤지당의 영향을 받은 여성 성리학자는 강정일당이다. 그녀는 사임당과 윤지당보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고, 남편의 집안도 가세가 완전히 기울어진 명문가 출신이었다. 정일당은 길쌈과 바느질로 생계를 책임졌다. 시댁의 가계를 책임지던 정일당은 나이 서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학문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도 바느질하면서 틈틈이 경전을 읽고 공부한 것이 전부다. 정일당의 공부는 확고한 생각과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녀는 천성을 기준으로 한 남녀의 차별이 없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은 정일당보다 조금 먼저 태어나서 활동한 윤지당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다.

 

성인이 되고자 하는 삼당군자(신사임당, 임윤지당, 강정일당)의 노력은 오랫동안 계속해 왔지만, 학문적으로 이론화되고 또 그 생각이 공유된 적은 별로 없다. ‘성품에 남녀의 차이가 없다는 말은 남녀가 역할은 달라도 인간 자체로는 같다는 뜻이다. 우리가 아는 보통 조선 시대의 여성의 삶은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이 놓친 반쪽짜리 삶이다. 역사의 기록 밖으로 밀려나 있던 조선 시대 여성들의 모습이 학계를 넘어서 일반 대중에게도 많이 알려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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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4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05 11:54   좋아요 0 | URL
‘유관순이냐, 사임당이냐’는 식으로 화폐 인물 선정에 대해서 논의를 한다면 오히려 잃을 게 많아지는 방향으로 흘러갈 수 있어요. 저는 두 분 모두 훌륭하며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루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임당의 예술가적 면모를 잘 모르거나 높이 평가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게 무슨 업적이냐고 말합니다. 그림 그리는 일을 사임당의 개인적인 활동으로 보는 것이죠. 그런 논리라면 위대한 화가뿐만 아니라 소설가도 화폐 인물 후보에 들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다른 나라의 화폐에는 소설가, 화가, 음악가의 얼굴이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훌륭한 예술가들이 있으며 당연히 화폐의 얼굴이 될 자격이 있습니다.

2019-09-05 13: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카스피 2019-09-04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신사임당을 우리는 조선시대 현모양처의 대명사처럼 알고 있는데 실제로는 뭐랄까 현대 여성처럼 자기주장과 개성이 강한 여장부였다고 하더군요^^

cyrus 2019-09-05 11:57   좋아요 0 | URL
‘현모양처’ 이미지나 그녀의 예술적 능력 때문에 사임당을 지폐 인물로 선정하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예술적 능력도 화폐 인물의 자격 조건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유발 하라리의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 - 전쟁, 역사 그리고 나, 1450~1600
유발 하라리 지음, 김승욱 옮김, 박용진 감수 / 김영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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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가 개인의 발견과 함께 발전했다는 건 상식이다. 르네상스부터 시작해서 종교개혁, 시민혁명 등으로 이어지는 근대적 개인의 등장 과정은 반드시 외워야 하는 역사 공식으로 자리 잡았다. 그런 점에서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을 토대로 쓰인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에서 밝힌 유발 하라리(Yuval Harari)의 주장은 흥미롭다.

 

 

 르네상스 시대 군인회고록의 저자들을 문헌 속의 개인으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135)

 

 

이게 무슨 소리인가? 서구에서 개인이 형성된 시기는 15세기로 알려져 있다. 개인은 중세의 성벽을 뚫고 르네상스 시대에 발견되었다는 스위스의 역사학자 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의 견해가 정설로 받아들여진 결과다. 그렇다면 르네상스 시대에 나온 전쟁회고록은 개인정체성을 인식한 사람의 기록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하라리는 부르크하르트의 견해를 뒤집는다. 그렇다면 부르크하르트가 주목한 ‘개인’은 누구란 말인가? 전쟁회고록또는 군인회고록(military memoirs)은 말 그대로 전쟁에 참전한 군인 출신 귀족이 쓴 글이다. 하라리는 1450년에서 1660년 사이에 발표된 군인회고록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인지 살핀 다음, 20세기의 군인회고록과 비교 분석한다.

 

르네상스 군인회고록을 쓴 저자들은 자신을 개인으로 묘사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전쟁터에서 살아가면서 느낄 법한 어떠한 감정도 표현하지 않았다. 하라리는 르네상스 군인회고록을 ()개인주의적 문헌으로 규정한다. 르네상스 군인회고록은 실증적인 문헌으로 보기 어렵다. 기본적으로 역사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따라 서술된다. 그러나 르네상스 전쟁회고록은 인과관계 중심의 서술과 거리가 멀다. 르네상스 전쟁회고록 저자들은 자신이 목격한 사건들을 쭉 나열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진실하게 쓰려는 의도는 없었다. 전쟁회고록 저자들은 자신들이 꼭 쓰고 싶은 것들, 기억할 가치가 있는 것들(choses digne de memoire)을 선별하여 기록했다. 그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억할 만한 것전사 귀족(warrior noblemen)으로 살아가면서 얻는 명예이다. 적들을 제압해서 전쟁에 승리하는 데 기여한 전사 귀족은 자신의 명예로운 업적을 기록으로 남긴다. 그러므로 르네상스 전쟁회고록은 전사 귀족으로서의 개인사와 역사가 하나로 일치된 기록물이다.

 

르네상스 전쟁회고록이 전사 귀족의 명예를 위대한 역사로 기념하기 위한 기록이라면, 20세기 전쟁회고록은 전쟁을 경험해보지 않은 독자들을 위한 것이다. 20세기 전쟁회고록의 저자들은 전쟁터 한가운데에 있는 군인들이 느끼는 두려움과 전쟁의 잔인하고 처절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20세기의 회고록에는 저자의 감정과 생각 등이 많이 나온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자유로운 삶을 국가나 사회공동체보다 우선시하는 사상이다. 우리는 개인주의를 당연하고 생득적인 것으로 여기며 살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개별적인 자아로 인식하기까지 오랜 역사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개인의 욕망과 양심에 따른 행동은 집단을 유지하려는 권력의 지속적 감시 대상일 수밖에 없었고, 감시와 억압을 벗어나 새로운 정신의 영토로 나아가려는 개인들은 소수자로 낙인찍혀 기나긴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했으며 지금도 그러하다. 르네상스의 전사 귀족들에게 명예는 자신의 체면뿐만 아니라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가치였다. 그들의 권위는 위계적인 귀족 남성 중심 사회를 지탱해주는 힘이었다. 그 힘에 억눌린 개인들이 얼마나 많을지 안 봐도 비디오. 우리는 그동안 르네상스 시대에 본격적으로 발견된 것으로 알려진 개인의 의미를 비판적으로 검토해보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르네상스에 발견되었다는 이 개인은 또 다른 인격체의 삶과 자유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인간적인 존재로 보기 어렵다. 비인간적인 전사 귀족들은 자신의 명예를 얻기 위해 폭력과 살인도 마다하지 않았다. 르네상스 전쟁 회고록개인과 개인주의의 기원에 대한 오해를 풀어줄 뿐만 아니라 역사학계의 주류가 규정한 개인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만든다. 그 사람들은 역사로 기록되지 못한 무명의 개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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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9-09-03 2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본의 근대화 시기 서구 책을 번역할 때 가장 옮기기 어려운 단어가 ‘individual’이었다고 하던데요. 그렇게 본다면 우리에게는 개인주의가 정말 얼마 안 된 개념인 것 같습니다.

cyrus 2019-09-04 11:52   좋아요 0 | URL
개인주의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지 않았지만, 북다이제스터님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우리가 아는 개인주의는 서양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일본이 번역한 서양’의 개인주의에 가까울 것 같아요. 개인주의를 받아들이는 역사가 짧다보니 개인주의에 대한 진지한 연구라든가 토론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2019-09-04 01: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9-04 11:59   좋아요 0 | URL
부족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좋은 말을 들으면 ‘글을 잘 써야겠다’라기보다는 ‘정확한 내용을 가지고 글을 써야겠다’라는 마음이 생깁니다. 저도 아는 게 많지 않아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통해서 지식의 범위를 넓혀갑니다. 물론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글로 썼다고 해서 모조리 기억하는 건 아니에요. 예전에 본 내용들이 잊고 있다고 느껴지면 다시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해요.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용을 습득하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독서와 글쓰기에 몰두하게 됐어요. 독학도 한계가 있어요. 독서모임에 참석하면 그동안 독학을 하면서 알지 못했던 새로운 지식과 저의 단점도 알게 돼요. 제 글도 한계가 있으니 읽다가 이상하다 싶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의견을 주시거나 질문하셔도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