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풍속사 1 - 조선 사람들, 단원의 그림이 되다 푸른역사 조선 풍속사 1
강명관 지음 / 푸른역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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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으로 치닫는 교권의 현실   

2개월 전, 어느 학교의 교사가 거짓말을 했다고 의심이 되는 학생을 발로 가격을 하는 장면이 담은 폭행 수준의 체벌 동영상이 공개되어 사회적으로 물의를 빚었다. 학생에게 폭행을 가한 교사는 '손바닥으로 한번 맞으면 쓰러진다'는 의미로 학생들 사이에서는 ‘오장풍’이란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체벌을 잘 하는 교사로 알려져 있었다. 이 동영상 한 편으로 인해서 학생 체벌의 필요성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논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 이번에 새로 선출된 곽노현 교육감은 서울 내 모든 학교에 체벌을 전면 금지하는 방안을 추진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일회성 체벌로 인해서 해임 처분이 없었던 전례를 뒤엎고 교육청 징계위원은 오장풍 교사를 해임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일회성의 체벌을 이유로 교단을 떠나야 한다는 높은 수준의 징계를 내린 점은 가혹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교사가 피해 학생에게 가한 체벌 수준은 교사로서의 도가 지나친 것이었기에 해임 처리는 당연한 것이었다.  

오장풍 교사 문제는 이렇게 일단락되었지만 교사들의 심각한 체벌 문제는 여기저기서 시한폭탄처럼 한 개씩 폭발하고 있다. 어느 학교의 교장이 학생들의 복장 불량을 검사하는 교사의 행동에 책임을 물어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그 교사에게 엉덩이를 체벌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 전에도 발생했던 일이지만 부모가 교사를 폭행하는 사건도 간혹 뉴스에서 접하기도 한다. 이렇듯 교사들 입장에서는 곽 교육감의 체벌 전면 금지 정책을 반기지 않는다. 안 그래도 교권이 추락한 마당에 도리어 교권이 더 약해질까 봐 걱정한다. 심지어 몇 몇 일부의 학생들은 교육감의 정책을 빌미 삼아 교사들의 체벌에 대해 눈 까딱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생들을 체벌하려는 교사들을 이상하게 여긴다. 제자들이 잘 되기 바라는 스승의 마음이 담긴 ‘사랑의 매’는 이제 옛 말이 되어버렸다. 

 

 

 

서당 내 분위기 = 오늘날의 교실 분위기 
 


 

 

 

 

 

 

 

 

 

  

 

 

 

 

이 그림은 누구나 다 아는 김홍도의 [서당]이라는 작품이다. 옛날의 교육기관인 서당에서의 한 장면을 재미있게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을 보게 되면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점은 그림 속 중앙에 배치된 울고 있는 아이의 중심으로 하는 인물들에 대한 뛰어난 묘사이다. 훈장님 앞에서 공부한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는지 종아리를 맞고 난 뒤, 눈물을 훔치고 있고 주위의 학생들은 그 모습을 보고 킥킥거리며 웃고 있다. 그리고 훈장님은 울고 있는 제자를 한심하게 쳐다보고 있다. 학창 시절 때에 되돌아보면 만날 선생님께 자주 꾸중과 체벌을 감수하는 말 안 드는 친구가 교실에 한 명은 꼭 있다. 선생님에게 자주 혼나다보니 주위 친구들은 이제 그 친구가 선생님한테 혼나는 장면만 보게 되면 재미있어 하게 된다. 해를 당하지 않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여유라고 해야 되나?  어쨌든 그림 속 서당 안의 모습은 지금의 교실 안의 모습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재미있게도 스승에게 체벌을 맞는 학생들의 생각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선생님에게 거하게 꾸중을 듣고 난 뒤에 자신을 혼낸 선생님에 대한 미움을 친구들 앞에서 뒷담화를 통해 표출하게 된다. 이런 일은 학창 시절에 다 있어봄직한 일들이지만 어떤 학생은 선생님에 대한 비난의 화살은 부모님에게 까지 고하기에 이른다. 대부분 정상적인 부모님들은 이런 자식을 호되게 꾸짖기 마련이다. 그러나 고슴도치가 제 새끼를 이뻐한다는 말이 있듯이 일명 ‘고슴도치 형 부모’들은 이 일을 가만히 넘어가지 않는다. 자식을 혼냈던 선생님에게 따지기 위해서 학교에까지 찾아와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다. 금지옥엽(金枝玉葉) 같은 제 자식이 학교 내에서 불리한 처사를 받았다는 이유로 교사에게 손찌검을 하는 부모들 대부분이 고슴도치 형 부모들이다. 어리석은 고슴도치 부모에 그 고슴도치 새끼이다. 조선 시대에도 그런 학생들이 있었던가 보다. 이덕무는 이런 고슴도치 부모와 아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계를 하고 있다.     

 

   스승이 엄하면 모자란 아이놈은 반드시 싫어하고 괴로워하여 자기 부형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 선생님은 잘 못 가르칩니다.”  

  그리고는 스승을 배반하고 물렁하고 속된 사람을 선생으로 삼아 따르니, 부형이 된  

  사람은 반드시 그 간사한 거짓말을 속속들이 살펴 호되게 꾸짖는 것이 옳다.

  - 이덕무 <사소절>중에서, 『조선풍속사 1』강명관, p 273~274 -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 서당  


요즘 학교 수업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모르겠지만 필자가 학생이었을 때에는 대부분 선생님들의 강의는 일명 주입식 교육이었다. 분필가루들이 심하게 흩날릴 정도로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내용들을 칠판 한 가득 안에 써놓고 쭉 설명을 한다거나 어떤 선생님은 수업 시간 50분 동안 내내 스탠딩 코미디언 뺨치는 입담으로 학생들에게 설명하기도 한다. 이렇다보니 평소에 학습이 저조한 학생들은 그 날 배운 내용들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30여 명의 학생들을 위해서 목 쉬어가면서 하루 종일 서서 가르치는 선생님들의 열정과 수고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당에서 학습 분위기도 주입식 교육 방식과 유사하다. 훈장님이 <천자문>과 같은 한문 책 속의 구절을 학생들 앞에서 암송하면 학생들은 그 구절을 따라 읽고 외우게 된다. 시험 치는 방식도 비슷하다. 교과서 속 중요한 내용을 잘 암기하여 주관식 문제를 풀듯이 조선 시대의 시험 방식도 훈장님 앞에서 배웠던 구절들을 암송해야 하고, 답안지에 풀이를 작성해야 했다.   

 

조선 시대 서당의 주입식 교육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당시에는 지위 상승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한문 텍스트의 독해 및 작문 능력이 필수적이었다. 유교의 경전들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면 눈 앞에 벼슬길이 훤하였다. 그래서 서당은 과거에 응시하기를 원하는 지방 사람들에게는 입신양명할 수 있는 유일한 교육 공간이었다.  박세채가 쓴 <남계서당학규>라는 문헌에서는 서당 내에서 유교를 기본으로 하는 성리학 이외의 학문을 공부해서는 안된다고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성리학 이외의 학문은 도가 사상이나 불교를 포함하고 있다. 오직 과거에서 벼슬을 하기 위해서는 성리학만 잘 이해하고 있으면 되었다.    

 

수험생들이 보다 유리한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수능 시험에서 수리와 외국어 영역의 비중을 늘게 하고 탐구 영역을 축소화시키는 최근의 교육 정책과 비교하면 지금과 같은 특정 과목에 편향하는 그릇된 교육 시스템이 옛날부터 이어져오고 있었던 셈이다. 자신의 제자들이 좋은 대학을 보내고 싶은게 선생님의 마음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공부해야할 내용들을 충실히 가르치기 위해서 노력한다. 선생님들 중에서 그럴 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제자들에게 단지 대학을 가기 위해서 편향된 학습을 유도하는 것은 도리어 제자들의 정신적 성장을 막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공부의 즐거움을 깨닫게 해주고 올바른 학습 성취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선생님의 역할이다.  

 


호랑이 선생님, 누룽지 선생님 그리고 훈장님

28년 전에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드라마가 방영했었다.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허봉수라는 교사와 초등학교 5학년 5반 학생들 간의 학교생활을 그린 우리나라 최초 학교를 주재로 한 어린이들을 위한 드라마이다. 필자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방영했던 터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당시로서는 신선한 드라마였고 5년 동안 방영할 정도로 꽤 인기가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허봉수는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별명답게 제자들 앞에서는 엄격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속마음은 자식처럼 제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씨 따뜻한 교사로 등장한다.

<호랑이 선생님>이 방영된 지 16년 뒤에는 역시 학교의 교사와 제자 간의 이야기를 포맷으로 한 <누룽지 선생과 감자 일곱 개>라는 드라마가 방영되었다. 이 드라마를 본 지 세월이 꽤 지나서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7명밖에 없는 어느 시골 마을의 분교에 서울에서 온 선생님(유동근 분)이 새로 부임하여 그 곳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푸근한 인상의 노총각 교사로 분한 유동근 씨의 연기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마음씨 착한 선생님과 선생님의 말을 고분고분히 따르면서 성장하는 학생들. 비록 드라마 속 이야기이지만 지금의 막장 교실 분위기와 비교하면 옛날에는 제자가 선생님에게 대든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 때 그 시절의 교실은 선생님과 제자들 간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의 부제는 ‘조선 사람들, 단원의 그림이 되다.’이다. 조선 시대의 생활상들은 이제 단원이 남긴 그림으로만 확인할 수 있다. 단원의 <서당> 속 학습 능력이 부진하고 마음이 여린 제자를 보면서 찡그리고 있는 훈장님의 표정 뒤에는 어떻게 하면 올바른 아이로 만들 것인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제자가 학습 부진아라고 해서 그를 미워해서 꾸중하는 것이 아니다. 다 잘 되라고 훈계하는 것이다. 단원의 그림을 보면서 그림 속 훈장님, 그리고 엄격한 호랑이에다가 마음씨가 착한 누룽지 같은 선생님이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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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가고 장가가고 송기호 교수의 우리 역사 읽기 2
송기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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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 죽는 조선의 신부들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었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 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당기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40년인가 50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방 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보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 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 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 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 서정주 [신부] 원문,『미당 시전집 1』민음사 - 
 

이 시는 신랑이 옷자락이 돌쩌귀에 걸린 것을 신부가 음탕해서 잡아당기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달아나버리는데, 40~50년이 경과한 뒤, 신부가 고스란히 제 모습대로 앉아 ‘매운 재’가 되어 버렸다는 민중 설화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신부의 죽음은 일부종사(一夫從事)하는 열녀(烈女)로서의 매서운 신념을 암시하면서, 유교적 이념의 정신세계를 나타낸다. 그리고 ‘초록 재’, '다홍 재‘는 그 현세적 가치를 뛰어넘어 영원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되고 있다.

시가 설화적인 내용이다 보니 신부의 죽음이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신부가 재가 되기 전까지 평생 기다리는 일련의 과정은 조선 시대의 여성의 모습이라서 낯설지가 않다. 조선 시대의 여성들에게 결혼은 단지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한 필수적인 예식이다. 결혼을 거부할 수 있는 선택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신랑이 누군지도 모른 채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만 했다. 결혼식이 끝난 뒤, 얼굴을 모르는 신랑이 올 때까지 사랑방에 기다린다. 간혹 사극을 보면 신랑이 신부의 얼굴이 못 생긴 것을 알고, 합방을 거부하고 줄행랑 치고 마는 에피소드가 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은 없지만, 신부가 마음에 안 든다거나, 대를 이을 아들을 낳지 못하면 신랑은 씨받이라는 명목으로 첩을 두는 것을 인정하는 사회이니 만큼 남성 중심주의의 조선 사회에서는 도망가는 신랑이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처한 신부로서는 어쩔 수 없이 평생 시집살이의 서러움 속에서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미당은 자신의 시에서 신부의 비극적 죽음을 정절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고 있고, 평생 자신을 기다리다가 죽은 신부에 대한 신랑의 미안함도 드러나 있지 않다. 여성들에게 정절을 강조했던 남성 중심적이며 폐쇄적인 유교 사상의 뉘앙스가 풍기고 있다. 자신들에게 부당했을 유교 사회를 원망하면서 죽었을 조선 여인들에게, 미당은 이들의 죽음을 유교 사회에 걸맞은 숭고한 죽음으로 포장함으로써 조선의 신부들을 두 번 죽이고 말았다.        

 

 

위기의 조선의 주부들   

조선 사회에는 여성들에게 삼종칠거(三從七去)를 강조하였다. 시집 가기 전에는 아버지에게, 시집 가서는 남편에게, 남편이 죽으면 아들에게 복종한다고 했다(삼종). 그리고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 아들을 못 낳는 것, 음란한 것, 질투하는 것, 나쁜 병이 있는 것, 말이 많은 것, 남의 물건을 훔치게 되면 버림받는다고 했다(칠거). 삼종칠거 중에서 여성들이 갖춰야 할 유교적 소양은 남편에 대한 복종이다. 결국에는 남성의 지위를 정립해주고 있는, 남성들을 위한 사상인 셈이다. 여성들은 남편이 죽으면 개가를 할 수 없었으며 한 남편을 향한 수절을 죽을 때까지 지켜야 했다. 나라에 전란이 일어나면 남편이 죽으면 조선의 부인도 따라 죽었다. 심지어 남편과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부인이 먼저 목숨을 바치기도 했다. 지금으로서는 여성들의 이런 행동이 극단적으로 보이지만, 당시 사회로서는 당연한 일이었으며 전란에 억울하게 희생당한 여성들은 열녀로 추앙받았다. 

지금은 남편이 죽고 홀로 남은 여자를 미망인(未亡人)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서 부르는 미망인은 지금의 뜻과 차이가 있다. 원래는 남편 따라 죽지 못한 여자, 혹은 남편이 죽었는데도 죽지 않은 부인들을 가리킬 때 불렀다. 병자호란 때 어쩔 수 없이 공녀(貢女)로 청나라에 가야만 했던 여성들은 전란이 끝난 뒤, 고국으로 살아 돌아왔다. 그러나 나라는 그들을 매정하게 돌아서버렸다. 
 

  잡혀갔던 여인은 비록 그들의 본심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변란을 만나 죽지 못했 

 으니 절개를 잃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미 절개를 잃었으면 남편 집과는 의리가 

 이미 끊어진 것이니, 억지로 다시 합치게 해서 사대부의 가풍을 더럽힐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 인조실록 16년(1638) 3월 11일, 송기호『시집가고 장가가고』 

  「처와 첩」에 재인용, p 121 - 
 

‘화냥년’이라는 주위에 멸시의 시선을 받아서 서러운 마당에 조정에서는 유교적 의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만으로 쌀쌀하게 대하고 있으니 공녀들에게는 하루하루를 사는데 고역이었을 것이다. 이들은 살아있으나 이미 죽은 자나 다름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아내가 적에게 잡혀 오면 남편은 무정하게 쫒아내 버렸으며, 새로이 처를 맞아들였다. 앞에서 언급했던 칠거에는 적에게 포로로 잡힌 아내를 쫓아내라는 사항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남편들은 유교와 권위를 앞세워 횡포를 부렸다. 
  

    

남편을 위해서 먼저 죽는 ‘레이디퍼스트’ 

 

나라에서는 열녀의 행적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열녀가 살았던 마을에 열녀문을 세웠다. 그러나 열녀문을 세운 의도 뒤에는 조선의 여성들에게 정절을 강조하려는 암묵적인 강조가 숨어 있다. 그리고 강조의 근원에는 남성이 우월하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런 열녀문이 열녀를 기리기 위해서 세웠다기보다는 조선의 유교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남성들의 권위를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여성을 위한 남성의 정중한 매너와 태도를 ‘레이디퍼스트(Lady-first)'라고 부른다. 여성들은 이런 매너를 갖추지 않은 남성들을 보면 우습게 여긴다. 그러나 조선 사회에서는 반대로 여성들이 남성들을 위해서 예의와 도리를 지켜야했으며 그런 태도를 보이지 못한 여성들은 비웃음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만약 조선 사회에서 ’레이디퍼스트’라는 단어가 통용되었다면 남편보다 먼저 죽는 열녀를 지칭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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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질병 한길그레이트북스 97
헨리 지거리스트 지음, 황상익 옮김 / 한길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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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더 센 놈이 온다. 슈퍼박테리아

작년에 전 세계를 강타했던 신종 플루가 남기고 간 공포가 사람들의 기억에 사라지고 있어가고 있는 즈음에 이번에는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슈퍼박테리아의 등장으로 열도가 공포로 떨고 있다. 특히, 발병의 근원지가 병원이라는 점과 이를 은폐하고 있었던 병원 관계자의 대처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다. 지난 2월에 문제의 병원 환자 8명이 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되어 그 중 4명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시간이 가면 갈수록 감염자와 사망자 수도 늘어나서 현재는 집계된 감염자 수가 46명이며 사망자는 27명이다. 여론에서 언급되고 있는 슈퍼박테리아의 정식 병명은 '아시네토박터 바우마니'이다. 증상은 패혈증, 폐렴 증세가 나타나며 시중에 유통되고 있는 항생제에 강한 내성을 보이고 있다. 면역력이 강한 사람들에게는 슈퍼박테리아에 감염될 우려는 낮지만 면역력이 낮은 중병 환자들에게는 치명적이다. 현재로서는 슈퍼박테리아에 대항할만한 항생제가 없다. 슈퍼박테리아의 등장 때문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감염 확산을 막을 수 있는 대책만이 그나마 슈퍼박테리아로부터 시민을 보호할 수 있는 최우선적이며 현실적인 방법일 뿐이다. 
      

인류 질병 잔혹사 

역사를 되돌아보면 강력한 질병들이 등장하여 전 세계를 휩쓸고 지나갔다. 헨리 지거리스트의『문명과 질병』에는 역사 속에서 맹위를 떨쳤던 악명 높은 질병들을 소개하고 있다.

14세기 중세부터 17세기 절대왕정 시기까지 페스트가 전 유럽에 창궐하였으며, 그 당시 취약했던 위생 환경과 미숙한 의학 기술 덕분에 페스트 이외에도 콜레라, 결핵 등과 같은 전염병도 유행하여 많은 유럽 시민들의 사망자수를 늘리는 데 일조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피바람이 전 세계에 불고 난 뒤인 1918년에는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였다. 2년 동안 2500만~50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중세 시기 때 유행했던 페스트 사망자보다 훨씬 많은 수이다. 이 책이 1943년에 발표한 것이라서 질병의 역사는 여기까지 소개되어 있지만, 세계적 질병의 유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산업화의 발전과 동시에 보다 높은 의학기술이 보유하게 된 선진국은 과거에 치료할 수 없었던 병들과 종말을 고했지만 개발도상국이나 빈곤 국가에서는 아직도 말라리아, 콜레라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의학기술이 발달할수록 세균들은 항생제의 내성에 강하도록 스스로 계통번식을 하였다. 이후로 에볼라 바이러스, 에이즈가 등장하였으며 2003년에는 사스(SARS,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 2009년에는 신종 플루의 등장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판데믹포비아 

역사 속에서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한 불치병들은 의학기술로 인해 지구상에서 떠났지만, 인간들이 느끼는 질병에 대한 공포는 아직 지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이전 병들보다 더 강력한 질병이 지구를 찾아오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에서는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상태를 총 6단계로 지정하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최고 위험 등급을 판데믹(Pandemic)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어로 ‘pan’은 ‘모두’, ‘demic’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전염병의 대유행을 의미하고 있다. 지금까지 판데믹 경보를 내린 사례는 1918년 스페인 독감과 최근 신종 플루를 포함해서 단, 4번뿐이다. 사람들 사이의 전염이 급속히 퍼지기 시작하여 세계적인 유행병이 발생할 수 있는 초기 상태를 4단계로 두고 있으며 5단계는 병의 유행이 임박했다는 상태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병의 유행이 심각하면 6단계 판데믹으로 등급이 상승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론에서 언급되는 전염병 경보 단계 가지고 지나치게 질병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호들갑을 떤다. 그리고 공포의 감정이 너무 지나치면 판데믹포비아(Pandemicphobia)까지 이르게 되어 사회생활에 지장을 주게 된다. 자신의 몸에서 조금이라도 이상 현상이 일어난다거나 발견된다면 곧 죽을 병 걸린 것 마냥 착각하기 쉽다. 신종 플루가 한창 유행했을 때 마스크와 손 소독제의 매출이 증가했으며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공공기관에서는 손 소독기를 설치하여야만 했다. 이전에 설치되었던 손 소독기에 눈길을 주지 않았던 사람들은 혹시나 자신도 병에 걸릴 우려 때문에 손 소독기를 사용에 의존하게 된다. 이번에 발생한 슈퍼박테리아의 경우에도 면역력이 강한 사람에게는 무해함에도 불구하고, 시민들 사이에 병에 대한 불필요한 공포감이 확산된다고 대한의사협회가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판데믹포비아는 과거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지금과 같은 의학기술이 본격적으로 갖춰진 시기는 20세기부터이다. 유럽 중세부터 산업혁명이 일어났던 18세기까지는 의학 기술이 제대로 발달되지 않아 전염병과 각종 질병의 유행 앞에 많은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희생당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당시 유럽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기독교가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유일한 타개책이었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들은 자신이 살면서 큰 죄악을 저질렀기 때문에 신이 큰 벌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페스트 환자들은 신 앞에서 면죄와 동시에 자신의 병을 낫기 위해서 자해를 가하였다. 지금으로 보면 비현실적인 방법이지만 사람들은 어떻게든 질병의 고통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하였다. 정신병 환자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시선과 반응은 황당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정신병 환자들을 신을 반하는 악마나 마녀로 규정하였다. 무고한 특정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대중의 행동을 뜻하는 ‘마녀사냥’ 도 신이 내린 벌이었던 질병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두려움 속에서 탄생되었다.  

그리고 성서에는 병을 낫게 하는 예수의 존재가 언급되다보니 사람들은 기독교에서 숭배되는 성인(聖人)이 그려져 있는 이콘화(Icon)라든가 소유하고 있었던 소지품을 가지고 있으면 병을 낫는다고 믿었다. 심지어 성인이 죽은 뒤에라도 손가락, 귀, 코와 같은 신체 일부를 절단하는 일도 발생하기도 했다. 기독교 성인에 대한 사람들의 치유 의식은 왕의 안수(按手) 의식으로 발전하게 된다. 막강한 종교의 힘 덕분에 나라를 지배하는 왕도 신적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왕이 직접 병든 시민들을 치료하게 해주는 안수 의식이 생겨났다. 중세 때부터 시작되었던 안수 의식은 18세기에 이르러 샤를 10세까지도 이어졌다. 하지만 안수 의식은 치료술이라기보다는 종교적 성격이 강한 치료를 위한 의식일 뿐이었다. 단순히 왕이 직접 병자의 몸에 살짝 손으로 접촉하고 마는 것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다스리는 왕의 안수 능력을 믿었다. 영국의 찰스 1세가 처형당하였을 때, 처형식에 있었던 영국 시민들이 처형대로 몰려와 왕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수건에 묻히려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처형당한 찰스 1세는 한낱 권력에서 밀려나 죽은 사람이 되었지만 이전에 왕이라는 신성한 존재였기에 시민들은 찰스 1세의 피가 치유 능력이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질병의 힘을 극복하지 못한 문명의 진보

『문명과 질병』을 번역한 황상익 서울대 교수는 서론에서 문명의 진보가 어느 정도 질병을 극복해왔는지 의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문명의 진보가 질병을 극복하려고 했다기보다는 무시무시한 질병의 파급 효과를 어떻게 대처했으며 적용했다고 생각된다. ‘극복’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악조건이나 적을 이겨 내 굴복시킨다는 사전적 의미가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앞에서 언급했던 질병 유행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문명의 진보가 질병을 극복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무리 발달된 의학기술로 통해 악명 높았던 질병을 지구상에 퇴치했다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의학기술로도 소용없는 강력한 질병들이 등장하였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슈퍼박테리아 때문에 떨고 있는만큼 우리나라도 슈퍼박테리아의 손아귀를 피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헨리 지거리스트는 질병 역사의 순환성을 이해하고 앞으로 발생할 강력한 질병 퇴치를 위해서 국제적인 문제로 바라볼 것을 주장한다. 그는 보건정책의 권위자로서 보건의료 서비스 구축론자이다. 전 세계적으로 판데믹이 유행하게 되면 다국적 제약회사들의 신약 개발에 시동을 건다. 그러나 일부 음모론자들 사이에서는 개발도상국들은 거대 제약회사의 독점에 휘둘려서 그들의 배만 부르게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신약 개발이 질병에 맞서야하는 인류 생존에 걸린 일이니 만큼 제약회사의 신약 개발 투자를 제한하는 것은 억측이다. 오히려 질병에 대한 안일한 대처가 후에 더 많은 질병의 희생자가 늘어지고, 보건 대책에 대한 경제적 비용을 더 부담할 우려가 있다. 헨리 지거리스트의 주장처럼 세계 문제를 주관하는 국제 사회단체와 다국적 제약회사가 서로 손을 맞잡아 질병 퇴치에 앞장서야 한다. 질병 역사의 순환성 속의 질병 vs 문명의 대결 결과는 장군 멍군이다. 항상 질병이 발생하면 그 질병을 이길 수 있는 의학기술이 등장하곤 하였다. 비록 점점 발달되어가는 문명의 진보가 질병의 힘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하더라도 인류는 스스로 질병에 맞서 살아남으려는 강한 생존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이미 검증된 의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이상, 앞으로의 세계적인 환난을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희망을 가져본다.

  


* 인용 관련 기사 출처 및 링크

[일본 ‘슈퍼박테리아’ 파문 확산] YTN, 2010년 9월 8일 입력
http://www.ytn.co.kr/_ln/0104_201009080653364349  

[의협, 슈퍼박테리아 "불필요한 공포감 확산"] 머니투데이, 2010년 9월 10일 입력
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10091011125658272&outlink=1

[슈퍼 박테리아, "더이상 치료제가 없다!"] 뉴스한국, 2010년 9월 11일 입력
http://www.newshankuk.com/tv/nhtv_view.asp?articleno=s2010091100301819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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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태어나서 - 한국인의 삶과 죽음 송기호 교수의 우리 역사 읽기 1
송기호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노인을 위한 강좌는 없다

노인들이 뿔났다. 화난 이유는 국립중앙박물관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사 관련 시민강좌의 수강자격 

을 63세 미만으로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노인들은 박물관회의 제한 규정은 ‘노인차 

별’이라고 반발하였고 국가인권위원회에까지 이 문제를 거론하였다. 박물관회 측은 노인 수강자 

 격 제한은 노인들의 건강상 문제를 고려해서 30년 전부터 있었으며 노인을 대상으로 한 강좌가  

마련되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내년부터 60대 이상, 이하로 나누어 운영한다거나 70대 미만으로
제한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관련기사를 쭉 읽고나니 박물관회 측의 설명이  

앞뒤가 맞지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노인을 위한 강좌가 마련되었다면 63세 이상  

노인들은 노인 대상으로 한 강좌에 수강하면 되었을 것이고 굳이 노인차별을 언급하면서까지  

화를  낼 이유도 없을 것이다. 박물관회의 말이 정말 사실인지 한 번 국립중앙박물관회 홈페이지 

를 확인하였다. 노인들이 이의를 제기한 그 문제의 강좌는 ‘특설강좌’이다. 특설강좌 모집대상에 

 ‘전통문화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고만 기재되어 있을 뿐 63세 미만 제한이라는 말은 없었다.  

홈페이지에 게시된 강좌 모집 안내에 분명히 노인 제한이라는 말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국립중앙 

박물관에 찾아가서 현장 접수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접수를 담당하는 직원이 나이  

제한을 언급하면서 강의 신청을 받아주지 않으면 63세 이상 노인들의 입장에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특설강좌 이외에 다른 강좌들의 모집 요강에도 나이 제한이라는 말은 없었다.  

다만 박물관회 측에 서 있다고 말한 순수 노인들을 위한 강좌는 단 한 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수강신청을 원하는 노인들이 홈페이지 속 모집 안내를 믿고 신청했다간 뒤통수를 얻어맞을 수  

있는 오해의 소지가 있다. 늙는 것도 서러운 마당에 노인 차별에다가 강좌 모집 안내를 제대로  

홍보하지 않은 박물관회의 처사에 노인들이 뿔난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몰랐던 조선 사회의 노인에 대한 인식 

옛날에는 유교 사상의 영향에 의해서 노인을 공경하는 사회였다. 어른과 어린아이 사이에는 사회 

적인 순서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덕목이 있는데 이를 실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노인 공경이었다. 지금까지도 유교적 사상이 짙은 노인 공경에 대한 전통이 이어져 오 

고 있다. 항상 식사할 때는 나이가 높은 윗사람이 먼저 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밥상머리 교육과  

신체적으로 약한 노인을 위해서 자리를 양보할 수 있도록 만든 버스의 경로석이 있다. 이렇듯,  

리 생활 곳곳에 노인 공경과 관련된 사회적 문화가 남아 있다.

그러나 예법과 예의를 중요시한 조선 시대에서도 노인 차별이 있었던 듯하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노인을 무시하는 사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옛날 양대녕이 약관일 때 주한과 주앙 두 사람과 함께 한림원에 있었는데 이 두 사람은 

  이미 머리가 하얗게 새었다. 매사를 논할 때마다 양대녕은 그들을 업신여겨서 “두
  노인
은 어떻게 생각합니까.”하면 주한은 매우 불쾌하여 “그대는 늙은이를 그리 깔보지 

  마소. 필경은 이 백발을 남겨서 그대에게 선사할 것이네.”했다. 이에 주앙은 “백발을
  남겨서 그에게 주지 마오. 다른 사람이 또 그를 깔보는 것을 못하게 해야죠”했다. 그  

  뒤 양대녕은 과연 나이 오십도 못 살았다. 

  - 박지원『열하일기』구태이문 편, 송기호『이 땅에 태어나서』‘태어나서 살고지고 1’  

     p 135 재인용 -

노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태어났고 오래 살았기에 젊은 사람과 차원이 다른 삶의 진리 

가 축적, 형성되어 있다. 하지만 정신은 성숙되더라도 육체는 점점 약해지고 이전과 다른 신체적 

변화를 갖게 된다. 젊었을 때 혈기왕성했던 힘은 노인이 되면서 무거운 것조차 들 수 없게 되어버 

리고, 탱탱했던 피부에는 주름이 생겨온다. 시력도 급격히 떨어지게 되어 돋보기안경 없이는
살 수 없게 된다. 조선 사회는 농경 사회이다 보니 기본적으로 농사일에 투입할 수 있는 노동력이  

중요하다. 아무리 노인들이 삶의 스승으로서 대우받는다 하더라도 사회적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 

는 약자였다. 일정한 연령에 달하면 직장에서 자동적으로 퇴직하는 정년제처럼 조선 시대 관리  

사회에서도 이와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 문종 시대에는 70세가 되면 스스로 벼슬자리에 물러나 

야 하는 치사(致仕)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벼슬자리에 물러나게 되면 해당 고을에서 매달 술과  

고기를 보내왔다고 한다. 퇴직 이후에 받게 되는 오늘날의 퇴직연금과 비슷하다. 우리 사회는 일 

을 계속 하고 싶어도 정년제에 따라 스스로 퇴직하는 것이 상례인 반면에 조선의 치사제도는 지금 

 정년제와 비교하면 효력이 미미했을지도 모른다. 70세가 넘어서도 국가의 필요에 의해 퇴관  

하지 못한 자에게는 궤장(几杖)이라는 지팡이를 하사하는 일이 있었다. 70세의 사대부의 입장에 

 은퇴는 활동력이 상실된 노인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최후의 선택이며 오랜 세월 어렵게 키 

워 온 권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고령이지만 건강에만 이상이 없다면 사대부들에 

게는 지금까지 올라온 높은 벼슬자리를 스스로 물러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노인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 
 

노인을 공경해야한다는 유교적 이념이 내세운 사회를 지향하는 조선 사회에서도 은근히 노인을  

무시하고 차별하는 모습이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인’이 되고 싶어 했다. 즉, 늙더라도 오래 

살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조선 시대의 평균 인구 수명은 지금과는 많이 다르다. 옛날에는 의학  

기술이 많이 발달하지 못해서 지금은 간단히 치료만으로 치유할 수 있는 병에도 사람들은 제대로 

된 치료도 받지 못한 채 죽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국에 전염병이 휩쓸었다하면 엄청난 인명 피 

해를 입었다. 그리고 사회적 형편이 좋지 않은 서민들은 먹는 것도 부실하다보니 굶어 죽는 사람 

도 많았다. 다양한 문제로 인해서『열하일기』속 양대녕처럼 50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다반사였으며 심지어 20세를 넘기지 못하고 죽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이런 상황에 오죽했으면  

태종도 50대에 이른 자신이 노인이라고 생각했으며 10년 뒤에 죽게 될 것이라고 말했겠는가. 

(태종은 자신의 예언대로 하지 못했다. 60세를 넘기지도 못한 채 55세의 나이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50세가 되어도 특별한 잔치는 하지 않는다. 60세가 되어서야 환갑잔치를  

하게 될 뿐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50세가 되면 잔치를 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영조는 오순 어연례를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평균 인구 수명이 50세임을 감안하면 50세가 된  

영조는 어느 정도 오래 살았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오순잔치는 영조가 단순히 50세가 된 것을 
축하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앞으로 영조가 장수하여 나라를 다스리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도  

겨져 있다. 그런 화려한 잔치를 열어서인지 영조는 82세의 나이로 역대 조선 왕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유령 노인 

여러 가지 역사적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장수하는 사람들은 국가적인 경사였다. 조정에서는 

대대적으로 조선 인구의 수명을 조사하여 장수한 사람이 있으면 포상으로 많은 곡식을 내리기도 

했다. 그리고 해마다 8월에는 전국의 노인들을 궁궐로 초대하여 양로연(養老宴)이 치러지기도  

했다. 그래서 일부는 포상과 국가적인 연회에 눈이 멀어 나이를 속여 보고하는 일도 있었다.

최근에 이웃나라 일본이 장수 인구 통계 결과가 허위라는 것이 밝혀져서 장수 국가 이미지에 큰  
손상을 입었다. 일본 최고령자로 알려진 111세의 노인이 실제로 30여 년 전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 

졌으며 100세 이상 고령자 노인 가운데 25명은 소재 불명자라고 한다. 이런 오류가 발생한  

이유는 고령 인구에 대한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일본의 행정시스템에도 문제가 있지만  

‘장수’에 대한 열망이 낳은 인간의 욕심도 배제할 수 없다. 사망한 111세 노인의 가족은 생전에  

노인이 받았던 연금을 받기 위해서 30여 년 동안 사망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며 인구 조사가 

정기적으로 실시하게 되면 노인이 살아있다고 허위 신고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본에는 호적상 

에서는 존재를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이미 죽은 사람이 된 노인들을 이른바 ‘유령 노인’이라고  

한다. 조선과 일본의 이런 모습은 불행하게도 오래 살고 싶어하는 장수를 향한 열망과 돈에 집착 

하는 물질 만능주의와 절묘하게 결합되어 나타난 특수적 사회 문제이다.  

 

 

 장수국가가 된다고 해서 좋기만 할까?

 

T.S. 엘리엇의 시 <황무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한번은 쿠마에서 나도 그 무녀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았지요. 

  애들이 <무녀야, 넌 뭘 원하니?> 하고 물었을 때 그녀는 대답했지요. 

  <죽고 싶어> 

 

  - T.S. 엘리엇 <황무지> 황동규 역, 민음사, p 44 -  

 

시의 구절에 등장하는 무녀는 태양의 신 아폴로에게 손안에 든 먼지만큼의 많은 햇수의 수명을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그래서 그는 아폴로로부터 어마어마한 수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무녀는 늙어만가고 거의 죽은 시체와 다름없는 메마른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그 이유는 어마어마한 수명만큼의 젊음도 달라는 말을 안 했기 때문이다. 결국, 무녀는 죽음보다 

도 못한 죽은 자가 되어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다.  

 

우리 인간도 무녀와 같이 장수의 꿈이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초래하는지 모르는 채 무작정  

바라기만 한다. 우리나라 전국에 노년층이 많아질수록 사회 내 계층 분포의 격차가 심해질  

뿐이고 사회적 자본도 노년층 복지에 편향될 우려도 있다. 그렇게 되면 과도한 집중 투자로  

인해서 경제 발전에 악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도 그렇게 좋은  

현상이라고는 볼 수가 없다.  불과 몇 년 전에는, 장수하는 사람들은 건강한 사람의 표상(表象) 

으로 결부시켰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의학 기술도 발달된 만큼 인간의  수명도  

연장된다. 이제는 노년층도 많아지고 있는 추세인만큼 오래 사는 것도 당연하게 여겨진다.   

어쩌면 일본과 같은 경우처럼 자식이 부모를 부양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부모가  자신이 받은  

연금으로 자식을 부양하고 먹여살리게 될지도 모른다. 일본의 소식이 남 일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먼 훗날, 초고령 사회가 되어버린 우리나라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일본의 사례를 교훈삼아 

우리나라도 초고령 사회의 진입를 막을 수 있는 다양한 정책들이 마련되어야 할 시점이다.  

 

  

 

 

* 기사 출처 및 링크, 관련 홈페이지   

  

[박물관 시민강좌, 노인은 오지 말라?] 한국일보 8월 10일자
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1008/h2010081002304721950.htm  

 

국립중앙박물관회 
http://www.mum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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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의 유토피아 - 우리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꿈꾼 세계 키워드 한국문화 5
서신혜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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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엘도라도, 샹그릴라 
 

 『○○투어, 유토피아를 찾아 떠나는 국내 섬 여행』데일리안 2010년 5월 25일 입력 
 

 『윤증현 “공짜점심은 없다..... 유토피아적 주장』노컷뉴스 2010년 3월 23일 입력

우리나라 대중 매스컴에서는 ‘이상향(理想鄕)’이라는 단어보다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을 자주 쓴다. 그리고 대중들도 매스컴에 주는 전달의 영향에 의해서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 즉, 유토피아라고 부른다. 요즘은 유토피아의 뜻이 확대되어  

다음과 같은 기사 제목과 같이 차용되고 있다. 인간의 손이 거치지 않은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갖춘 섬을 유토피아라고 말하며,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사상이나  

제도에도 ‘유토피아적(Utopian)'이라는 단어로 비유된다. ‘유토피아’는 영국의 정치가인  

토머스 모어가 쓴 공상 소설의 제목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 어로는 ‘아무데도 없는 나라’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제목 그대로 ‘유토피아’라는 이상 사회를 이루고 있는 국가의  

생활상을 묘사하였는데 작품 의도는 당시 영국의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유토피아’ 말고도 

이상 세계를 뜻하는 단어들이 있다. 아마존 강에 있다는 전설의 황금 도시  

‘엘도라도(El Dorado)’, 제임스 힐튼의 동명 제목 소설로 인해 알려지게 된 평화와  

행복의 도시 ‘샹그릴라(Shangri-La)’. 재미있게도 이 세 가지  이상향들은 각각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고 유토피아처럼 말  그대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1997년에 중국 정부는 소설 속의 ‘샹그릴라’가  

티베트에 위치하고 있는 ‘중뎬’이라는 지역임을 공식 발표를 하였고 4년 뒤에는 지명을  

아예 ‘샹그릴라’로 개명하였다. 티베트는 지리적으로 고원이 많고 천연의 자연 상태를  

간직하고 있어서 이상 세계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중국과  

티베트와의 관계가 냉랭한 분위기임을 감안하면 어떻게든 친(親) 티베트적인 모습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하는 중국의 ‘샹그릴라’ 공식 발표는 미덥지가 않게 느껴진다.  

‘샹그릴라’는 소설 속에서만 그려지는 이상 세계로 기억되는 것이 오히려 나을 거 같다. 
 

 

 우리나라에도 유토피아가 있었을까?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TV나 신문 속에서 등장하는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많이 보고  

들어봤음에도 불구하고 용어의 유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유토피아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유토피아’와 같은 이상 세계를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매스컴의 영향으로 인해서 이상 세계=유토피아’ 라는 서구적인 인식에 사로잡혀  

정작 우리나라의 이상 세계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나날이 갈수록 홍수 흐르듯  

유입되고 있는 서구 문화의 영향과 제대로 된 우리나라의 유토피아 문화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다.

하지만 오랜 가뭄 끝에는 단비가 한 번이라도 내리는 법. 우리나라의 유토피아 문화에  

관한 도서가 출간되었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저자는 역사 속에 사라져 가고  

있던 우리나라 고유의 유토피아를 복원하였으며 유토피아와 관련된 선인들의  

문헌 자료와 일화, 그리고 그림까지 배치하여 독자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한국적인 유토피아의 세 가지 키워드

책에서는 이상 세계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을 엿볼 수 있다. 안평대군의 꿈을 화폭에 담은
안견의 <몽유도원도>에서부터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 속의 허생이 세운 이상 국가까지.
이름만 들어도 알고는 있었으나 그것이 평소 매스컴에서 자주 등장하는 유토피아인 줄  

몰랐던 것이다.  그러나 서양의 이상향과 한국의 이샹향의 특징을 비교하면 차이가 있다. 

서양의 이샹항은 대부분 사회 현실 속의 문제를 비판하거나 해결하는데 목적이 두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이상향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자연친화적이다. 문헌 자료에 등장하는 이상향은 항상 사람의 인적이 드문  

산 속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실 세계에서 보기 드문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진 곳으로  

묘사된다. 특히 이상향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자연물은 바로 ‘복숭아’다. 옛날부터  

복숭아를 먹으면 천수를 누린다고 하였다. 그래서 오래 사는 산신들이 사는 세계에는  

꼭 복숭아나무가 있다고 믿어왔다. 안평대군은 자신이 무릉도원에 가게 되는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본 장면들이 너무나 아쉬워서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화가 안견에게  

그림으로 그려줄 것을 부탁하였다.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에는 사람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자연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특히 그림의 오른쪽을 꿈 속 이상향으로  

표현했듯이 이상향을 상징하는 복숭아나무 밭이 펼쳐져 있다. 이 밖에도 이상향을 그린  

다른 그림들도 인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는 평온한 분위기가 감도는 자연의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두 번째 특징은 장수(長壽)를 하고 싶은 소망을 담았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상들이 꿈꿔왔던 이상 세계는 속세를 떠나 자연에 칩거하는 신선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점이다. 조상들의 문헌에 살펴보면 현실 세계에서 살았던 사람이 우연히 이상 세계에  

들어가게 되어 몇 일간 그 곳에서 지내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다시 현실 세계에  

돌아보면 자신이 살았던 현실은 이미 수십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이상 세계의 하루는 현실 세계의 10년과 맞먹는다. 장수를 누릴 수 있는 이상 세계는  

모든 이들이 한 번쯤은 꿈꾸어보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  

하지만 조상들은 장수를 하고 싶다는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도 이런 이상 세계를 통해서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나타내고자 하였다.

세 번째 특징은 유교적인 이상 세계를 구현했다는 점이다. 토머스 모어는 당시  

영국 사회의 부조리를 극복하기 위해서 유토피아라는 현실에서 선보이지 못한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 우리나라의 학자들도 토머스 모어처럼 당시 조선 시대의 사회를  

개선하기 위한 이상 세계를 꿈꿔왔다. 그리고 그들의 사회에는 왕은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들이 계급 없이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고 있다. 하지만 조선을 지배하고 있던  

유교 사상은 버리지 않았다. 공동체적인 삶을 지향하는 만큼 이웃끼리 서로 도우면  

살아야 했으며 웃어른을 공경하는 기본예절은 유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학문을  

공부하여 정신적 수양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조선 사회에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유교이념을 탈피하지 못한 점도 있지만 좀 더 사회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보다  

현실 세계와 같은 이상 세계를 구상했다는 점은 눈 여겨 봐야할 부분이다. 
 

 

 판미동 사람들, 이상적인 사회 공동체를 세우다 
  

영국의 로버트 오언이나  프랑스의 샤를 푸리에는 당시 산업혁명으로 근대화된  

유럽 사회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이상 사회를 건설하려고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당시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의 부족으로 그들의 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들 이외에도 새로운 이상적 공동 사회를 만들려는 시도는 계속 되었으며 

시도 끝에 이상적 사회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나 장기적으로 지속되지 못했다. 

유토피아 실현의 역사를 살펴보면 성공보다는 실패의 결과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실제로 이상적인 사회 공동체가 있었으며 그것도 무려 100년  

가까이 유지되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저자는 관련 문헌 자료들을 통해 서

경기도 가평군의 판미동이 우리나라에서 세운 이상적 사회 공동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석이라는  명망 높았던 가문이 이곳에 정착하여 사회 공동체를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유교 이념을 유지하면서도 공동체 일원 모두 평등함을 갖춘 그들만의 사회  

제도를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점은 판미동 사람들은 개방적이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상향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고  있는 역설적인 공간이다.

그만큼 이상 세계가 있다고 해도 현실 세계 사람들이 그곳을 찾기란 힘들다.
이상향에서 사는 사람들은 현실 세계의 사람이 자신들의 구역에 들어오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으며, 그 사람이 현실 세계로 돌아가게 되면 자신들의 세계에 대해서 비밀을 

유지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하지만 판미동 사람들은 다른 지방에서 온 낯선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고 한다. 인사성 밝은 사람들을 보면 그 사람이 판미동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판미동은 유명해지고 전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지 판미동 사회 공동체도 100년 이상은 넘기지 못했다. 전국에 알려진
소문에 의해서 공동체 관리가 어려운 것도 있었으며 신석 집안의 후손이 벼슬에 올라
서울로 이주하게 되면서 판미동은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하지만 서양에서도
이루지 못했던 이상 사회 건설을 우리나라 조상들은 실현시켰으며 심지어 100년 동안
유지되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이다. 

 

 상상하라, 그러면 이루어지게 되리라

우리나라 사람들은 외국 문화를 접하게 되면 문화적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상상력이  

집약된 영화나 만화들을 보게 되면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하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작품성이 뛰어나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나 제임스 캐머런의  

영화가 나오지 않는 것에 대해서 문화적 자괴감에 빠지게 된다. 심지어 문화적 현실의  

문제점의 근원은 유교 사상에서 기인한 조선 사회의 고정적이며 폐쇄된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근거는 어불성설이다. 조너던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라퓨타 섬의 학자들처럼 조선의 지식인들이 상상력을  

학문에서 무시한다거나 단순히 가부좌 틀어서 사서삼경을 읊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이상 세계를 꿈꾸었다. 다양한 상상의 나래를  

펼친 결과물들은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한층 더 개방적인 사고를 가졌던 지식인들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시도하였다. 그래서 이상 사회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이래도 우리나라 문화는 상상력이 결여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이 살아가는데  

완벽한 세상을 만든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며 그것에 대해  

상상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공상주의자들이 하는 생각이라고 치부하기 쉽다.  

하지만 고정된 사고의 틀과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발전은  

불가능하다.  그런 공상주의자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세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전부 실제하는 것이다’ 라고 말한 파블로 피카소의  

말처럼 우리가 헛된 망상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언젠가는 현실로 다가올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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