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 아리랑 -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김성동 지음 / 녹색평론사 / 2010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우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이 중음신(中陰身)이 되어  
이 땅 위를 떠돌고 계신 어르신들 이야기이다.

 

  독립유공자 인정, '하늘의 별 따기' 

8.15 즈음을 맞이하게 되면 언론에서 심심찮게 나오는 기사들을 보게 되면 독립유공자 선정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해방을 맞은지 66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후손들은 잃어버린 선조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고군분투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최근에는 국가보훈처가 죽산 조봉암(1898~1959) 선생의 독림유공자 선정 결정을 또다시 보류하여 적잖은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조봉암 선생은 이승만 정부 시절에 진보당 사건으로 인해 국가보안법 위반이라는 죄목을 뒤집어씌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올해 초에 재심을 통해서 52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게 되어 오랫동안 꼬리표가 자리잡은 왜곡된 누명을 떼어낼 수 있었다.  

그동안 공산주의자라는 오해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선정받지 못했기에 이번 국가보훈처의 결정은 조 선생의 유족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올해 초 조 선생의 실추된 명예를 되찾을 수 있게 된 재심 결과와 배치되는 상반된 결정이다.   조봉암 선생은 이번에도 무슨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일까?  

보훈처 측에서는 조 선생의 과거 공산주의적 행적이 서훈 심사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으며 다만 일제 말기 때 부적절한 행위가 확인되어서 독립유공자로 선정할 수 없었다면서 보류 결정의 이유를 밝혔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의 퇴색이 짙었던 1941년에 조봉암 선생의 이름으로 국방헌금 150원을 기부한 사실을 그 당시 매일신보 기사에서 확인되었으며 매일신보 단 한 건의 기사 때문에 무기한 보류를 결정한 것이다.   

이번 보훈처의 심사 과정과 결정은 애매모호하다.  5공 비자금 조성에 관여한 혐의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은 안현태 전 청와대 경호실장에 대해서는 복권됐다는 이유만으로 국립묘지 안장을 승인해 준 최근의 결정과 비교하면 조 선생의 보류 결정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국방헌금 사실이 있다고하더라도 올해 복권되었으니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줘야되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국방헌금 기부한 사실만 가지고 조 선생이 친일행위 그리고 변절자라고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조 선생 경우는 친일 행위가 있다는 사실로 인해 심사가 보류된 사례이지만 지금까지도 조 선생과 같은 수많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여전히 독립유공자로서 인정을 못받고 있다.  그 중에는 몽양 여운형 선생도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사회주의 노선을 걸었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심사의 기준이 불공평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보훈처 측에서는 김영삼 정부 이후부터는 이들에 대해 해방 이후 북한과 관련이 없다는 전제하에 독립유공자로 서훈하고 있다고 반박하였다. 즉, 독립운동가들의 사회주의 노선 역시 그 당시 독립운동 방식의 일환이며 해방 이전의 사회주의 행적에 대해서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의 유족들이 내세우는 자료라는게 전문성이 부족해서 입증하는데 어려운 것도 있지만 보훈처가 내세우는 심사 자료에도 한계가 있는 건 마찬가지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작성된 재판 기록이 포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방 이전의 사회주의 행적에만 심사 결정에 문제가 없다고 보는 보훈처의 입장에도 문제가 있다.  해방 이후의 사회주의 행적이 단지 국가 정체성에 반한다는 이유만으로 심사 결정에 불리한 근거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근거의 이면에는 이승만 정부 시절이 만들어낸 반공 헤게모니의 망령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지나친 과장에 불과한 것일까?   

 

  

   이념의 갈등에 희생된 두 민중 해방자, 조봉암과 김원봉   

<만다라>의 소설가 김성동은 <현대사 아리랑>이라는 책 한 권에 그동안 민중의 역사 속에서 떠돌거나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질뻔한 독립운동가 및 예술가들의 이야기들을 모았다.  이들의 행적은 학교에서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인생을 바쳤지만 우리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이념 갈등의 역사 앞에 희생되어야만 했던 '어르신들' 이야기이다.  

그래서 <현대사 아리랑>에 소개된 독립운동가 및 예술가들은 근현대사를 배웠다던 학생들 그리고 독자들에게는 생소하다.   또 절반의 인물들 중에는 해방 이후 스스로 북한으로 향한 사회주의자들도 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의 패망으로 갑작스레 독립을 맞이한 이후 급격한 사회적 혼란을 경험하고 있었던 조국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나라 내부의 안정화 및 통일할 수 있는 방편으로 사회주의 노선을 걷는 이들도 있었다.  또 어떤 이는 조봉암 선생처럼 민중을 위한 실질적인 행동을 위해서 관념적인 이데올로기에 치중한 사회주의 노선을 포기하기도 했다. 

그 중에 조봉암과 김원봉의 삶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뚜렷한 독립 운동의 공적이 있음에도 불과하고 남한과 북한, 이념으로 인해 갈라 돌아서버린 두 나라로부터 명예를 인정받기는커녕 버림 받아야했던 비극적인 인물이다.  

조봉암과 김원봉. 두 사람의 이름 속 '봉' 은 '받들 봉(奉)' 자를 쓰고 있다.  이들의 호에도 공통적으로 '뫼 산(山)' 자가 들어가 있다.  출생년도도 두 사람 다 1898년이며 남조선과 북조선에서 장관에 부임하면서 해방 이후에도 조선의 안정화를 위해 이바지하였다,  (조봉암은 농림부 장관, 김원봉은 남조건의 국방장관과 동등한 국가검열상)   그러나 두 사람은 이념의 갈등에 눈이 먼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조봉암은 남조선에서 사회주의자라는 이유로 사형당했으며 김원봉은 북조선에서 불었던 김일성을 비판한 연안파 제거의 피바람에 휘말리면서 숙청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두 사람의 인생에는 공통적인 악연의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장택상(1893~1969)이다. 해방 이후 수도경찰청장 시절에 김원봉을 체포하기도 했으며 이승만 정권이 수립하면서 초대 외무부장관과 국무총리를 역임하여 반공투쟁에 앞장섰다.  그리고 국민장을 치러 국립묘지에 안치되어 있다. 

 

 

  조선의 '봉황새' 가 되지 못한 비운의 정치가, 조봉암

 

 

죽산(竹山) 조봉암 (1898~1959)   

 

죽산 조봉암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드라마틱하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조봉암은 원래 이름의 '봉' 을 '봉황새 봉(鳳)' 자를 쓸뻔했다.  사연은 이렇다.  조봉암의 어머니는 봉황새가 나오는 태몽을 꾸었는데 처음에는 봉황새 봉 자를 쓸려고 하다가 평생 가난한 삶을 살았던 부모는 둘째 아들의 이름이 너무 엄청난 것 같아 그냥 '받들 봉' 자로 썼다.    

봉황새는 동양에서는 상서로운 동물의 상징으로 여긴다. 예젼부터 높은 벼슬의 명칭이나 평화로운 세상을 비유하는 표현 속에는 이 봉황새를 상징하는 봉(鳳) 자가 포함되었다.  만약에 어머니가 둘째 아들의 이름에 봉황새 봉 자를 썼다면 대한민국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자신의 정치적 활동을 펴보지 못한 채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린 그의 불우했던 삶을 생각하면 이름 작명부터 이미 예고되었던 것이다.   

절은 시절, 3.1 운동 때 참여하기도 했으며 사회주의야말로 조선이 독립할 수 있는 원동력 그 이상으로 모든 조선 민족들이 잘 살 수 있는 완전한 진리라고 생각하여 항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해방 이후에는 당시 남조선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지휘하던 박헌영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통해서 지도노선을 비판함으로써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노선과의 거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조봉암은 '반노반자(反勞反資)' 라는 정치이념으로 전향하였다.    

이승만 정부 시절 농림부 장관에 역임할 정도로 사회주의 노선과 결별한 조봉암의 정치적 선회에 대해서 역사가들은 그가 우익 진영으로 돌아섰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지만 이 내용 역시 조봉암에 대한 왜곡된 역사적 인식 중 하나이다.

소련의 지배 하에 통제당하는 사회주의가 아니면서도 자본계급의 독재로 이루어진 정책도 거부하는 순전히 조선의 민중을 위한 민족주의적 정치적 행보였다.  조봉암은 박헌영의 노선처럼 지하활동에만 국한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뿐이다.  좀 더 민중을 위한 현실적인 개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공과 단독 정부를 고집하는 이승만 정권의 막강한 권력의 존재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리고 한민당으로 대표되는 이승만 정부는 조봉암으로 대표되는 반한민당 세력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서 조봉암을 자신들의 정치적 터전에 끌어들인 것이다.  그야말로 조봉암은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호랑이 굴 속에 제 발로 들어가게 된 셈이다.  

민족을 위한 정치적 행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북조선은 그를 '배신자' 라 규정하였으며 남조선에서는 공산주의자로 몰아붙였다.   팽팽한 이념의 갈등 사이에서 그 어느 누구도 환영받지 못한 입장이었다.   이승만 정부의 '눈엣가시' 인 조봉암은 노동자와 농민을 위해서 정부가 내세운 농민정책에 반대할 정도로 자신의 입지를 넓혀나갔다.   1950년에는 제2대 국회의원, 1952년과 1953년에 두 차례나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정도로 승승장구하였다.  비록 대통령 선거에서 번번히 낙선했지만 지지율에서만큼은 이승만보다는 앞섰으며 온갖 부정으로 점칠된 당시 선거 과정을 생각하면 조봉암의 존재는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을만큼 민중으로부터 인정받던 정치가였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모습 (1958년)

  

조봉암은 낙선의 굴복 속에서도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내건 진보당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여기서도 반노반자 이념이 그래도 진보당 창당에도 적용되었다.  공산독재와 친미수구적인 북진통일이 아닌 민주화의 개혁을 통한 평화통일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점점 세력을 확장되어가는 조봉암의 진보당 활동을 가만히 있을 이승만 정부가 아니었다.   국가보안법 위반으로는 죄역을 만들어 그를 체포하는 동시에 진보당은 오래가지 못한 채 해산되었다.  조선을 통치할 수 있었던 정치가에서 한순간에 간첩이 되어버렸다.  정치적 모략이 만들어낸 재판으로 인해 조봉암은 조국과 민족을 위한 원대한 꿈의 날개를 펼쳐보지 못한 채 사형이라는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였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 김원봉  

 

 

 약산(若山) 김원봉 (1898~1958?) 

 

이 책의 부제는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이다.  민족 해방을 위한 공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명예의 '꽃다발' 이라는 인정도 받지 못한 채 무덤도 없이 떠돌아야하는 불행한 망령들이다.    특히 약산 김원봉은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늘날에도 공적이 인정받지 못한 독립운동가 중의 한 사람이다.   

내가 학창 시절에 배웠던 근현대사 교과서에는 의열단을 조직한 무정부주의적 투쟁 노선을 취한 독립운동가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 행적만 가지고 그의 행적을 높이 평가하기에는 부족하다.   아니, 의열단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단장임에도 불구하고 단지 교과서에 단 몇 줄로 거론되기에는 남한에서의 그의 평가는 너무 인색하기만 하다.  그와 함께 의열단원으로 활동하여 일본의 관공서나 고급 관리, 심지어 천황에게까지 폭탄을 던지던 김상옥, 김익상, 박재혁, 김지섭 열사는 공적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아마도 김원봉이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해방 이후에 펼쳤던 그의 사회주의적 노선 때문이리라.  

 

 

이육사 (1904~1944)

의열단원에는 저항시인 이육사도 활동하기도 했었는데 이육사의 일생을 그린 8.15 특집 드라마  

<절정>에 의열단의 단장인 김원봉이 잠깐 등장하기도 했다 

 

의열단은 조국독립을 위해 과감하고 과격한 적극 투쟁을 통해 조선총독부나 동양척식주식회사와 같은 일제 권력의 중요 근거지와 조선총독과 친일파 등 반민족적인 인물들을 암살대상으로 삼아 활동한 무력 독립운동 단체로 이름을 떨쳤다.  의열단원 중에는 저항시인 이육사도 포함되어 있다.  

그의 과격하면서도 혁명적인 독립 운동은 광복군 부사령관에 취임할 정도로 일본 섬멸에 선봉으로 나섰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에도 소속되어 활동하지만 임정 보수파들과의 갈등으로 임정과 결별하였다.   김원봉은 조선 민족 순수의 힘으로 독립을 원했다.  그래서 그는 총과 폭탄을 든 무력 항일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그의 뜻을 저버렸다.  제2차 세계대전 연합군의 승리로 조선은 해방되었고 그 전부터 준비되어온 무장혁명군을 제대로 조직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였다.    

그 이후로 김원봉은 사회주의 노선으로 걷기 시작하였고 본인 스스로 월북하였으며 북조선에서 국가검열상을 역임하였으나 1958년에 그의 이름은 공식 석상에서 사라져버린다.   그 당시 김일성을 비판했던 연안파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는 설과 명예로운 은퇴를 했다는 설 등 지금도 김원봉의 사망연도에 대해서 입증할만한 사료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김원봉은 김일성 세력에 의해서 권력의 각축장에서 밀려나간 것은 사실이라는 점이다.  북한의 혁명열사들이 안치된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그의 이름이 새긴 묘비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이름 없는 혁명가가 된 것이다.

 

    

  이들의 영혼을 어떻게 달래주랴 

조봉암과 김원봉 이외에도 그동안 역사의 그늘 속에 가려졌던 독립운동가들이 최근에 역사가들에 의해서 빛을 보고 있다고 하지만 반공 이데올로기가 남아 있는 어두운 그늘을 이 한반도에 완전히 걷히지 않는 이상 수많은 무명의 독립운동가들 그리고 유족들은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기 위한 험난한 노력은 이어지고 있다.  반대로 자신의 위대한 업적은 부각시키고 이면에는 어떻게든 친일 행위를 덮어버리려는 친일파 또는 후손들은 허세를 부리고 있다.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조국을 위해 몸바친 선조의 명예, 친일파의 후손은 선조의 옛 땅을 찾기 위해서 법정을 드나들고 있다.  그러나 두 집안의 후손의 표정의 명암이 엇갈린다.  사회주의적 또는 친일 행위 때문에 진정한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반면에 친일파의 후손은 법정 공방 끝에 어마어마한 옛 땅을 되찾고야 만다.  이것이 해방된지 66년이 지난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나에게는 죄가 있다면 많은 사람이 고루 잘 살 수 있는 정치운동을 한 것 밖에는 없는 것이오. 그러데 나는 이 박사(= 이승만)와 싸우다가 졌으니 승자로부터 패자가 이렇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오.  다만 내 죽음이 이 나라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그 희생물로는 내가 마지막이 되기를 바랄 뿐이오. 


- 사형당하기 전 조봉암의 마지막 말, <현대사 아리랑> 김성동, pp 299 - 

  

조봉암은 사형당하기 전에 자신의 죽음이 이념의 역사에 억울하게 밀려난 마지막 희생물이 되기를 바랬지만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혐오했던 친일파들에게 밀릴 정도로 영혼이 되어서도 또 다시 희생되어야 했다.   

역사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은 우리 스스로 국격과 정통성을 깎아 낮추는 꼴이다.  <현대사 아리랑>을 통해서 수많은 혁명가들의 업적을 알아주기에는 그리고 무덤 없이 떠도는 망령들을 달래기에는 부족하다.   지금도 역사가들이 잊혀져가는 혁명가들의 삶을 찾아내고는 있지만 대중들에게는 이들의 이야기는 그저 어르신들이 하는 옛날 이야기로 뜰릴 뿐이다.

역사의 세월 속에서 비굴한 이들의 허세는 날로 커져만가는데 정작 양심적인 영혼들은 공로를 인정받지 못한 채 더욱 더 잊혀져가고 있다.   인간의 운명이라는 것이 참으로 얄궂게 느껴진다.  

 

   

 

***님, 좋은 책 잘 읽었습니다. ^^

 

 

 

* 내용 관련기사 

[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번번히 유공자 탈락…유족들 불만 팽배]  노컷뉴스 2011년 8월 14일 

[‘5공 비리’ 안현태 유해, 국립묘지에 기습 안장]  경향신문 2011년 8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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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1-08-16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탁환의 소설 제목인 줄 알았어요. 저 좀...큭!>.<;;

cyrus 2011-08-16 22:04   좋아요 0 | URL
네, 소설 제목을 차용했어요. 제가 본의 아니게 낚시질을 했군요 ^^;;

마녀고양이 2011-08-16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루스님의 페이퍼를 읽을 때마다
이런 글을 쓰려면 얼마나 노력과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할까 궁금해져요.
그리고, 이런 글을 쓰시는 시루스님은 어떤 직업을 가지시려나도 마찬가지로 궁금하구요.

음... 시사인이나 한겨레21의 기자가 되셨으면 좋겠어요, 제 개인적 바람이예요!! 아하하!

cyrus 2011-08-16 22:08   좋아요 0 | URL
어제는 광복절이라서 집에 있었어요. 혹시 마고님도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이육사 시인의 일생을 그린 특집극 <절정> 이외에는
TV는 볼 것도 없었고요,, 그렇다고 국가적으로 의미 있는 날(?)을
그저 노는 날도 보기에는 좀 그렇고,, ^^;;
그래서 서재 이웃분님이 주신 책을 읽었어요, 그게 바로
현대사 관련된 <현대사 아리랑>이었어요.

조만간 이웃분님들에게 받은 책들을 읽으려고 해요.
미루다간 못 읽을거 같아요. 책 선물에 대한 고마움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어요.. ^^

2011-08-25 15: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5 19: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 진시황과 이사 - 고독한 권력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김태권 글.그림 / 비아북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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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왕족의 말 못한 고민  

 

   
 

매사가 나를 고발하며 내 무딘 복수심을 채찍질하는구나!  허구한 날 하는 일이 먹고 자는 것뿐이라면, 사람이란 대체 뭐지?     (중략)   난 왜 ' 이 일을 해야 한다 ' 고 뇌까리고만 있는 거지?   그럴 만한 명분, 의지, 힘, 수단을 다 갖췄으면서도 말이야.  막중한 사례들이 나를 훈계하는구나.   

- 윌리엄 셰익스피어 <햄릿> 제4막 5장 중 햄릿의 대사, pp 236, 펭귄클래식코리아 -

 
   

 

'햄릿' 이라고 하면 아마도 우유부단한 인간형의 대표적 인물로 알고 있을 것이다.  맞다. 그는 매우 우유부단하고 나이 30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래서 결국엔 비극적 최후를 맞게 되는 덴마크의 왕자이다.  

하지만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처음 읽는다거나 혹은 두 세 번 읽게 되면 이 젊은 덴마크의 왕자가 한 나라를 통치할 수 있을 만큼 덕망이 있었으며, 무엇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선친의 혼령을 본 이후로 폭풍처럼 몰아치는 분노에 사로잡혀 미치광이 노릇을 할 뿐이지 그는 분명 사색적인 성향의 왕자임에는 틀립없다.  햄릿은 분명 정상적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갈수록 우유부단한 면이 많이 부각되다보니 독자들 사이에서 극명한 평가로 엇갈려져 있다.  

 

햄릿뿐만 아니라 훌륭한 업적을 남긴 역사적인 황제와 왕족들 중에는 후대의 역사가로부터 엇갈린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이 많다. 

진시황. 그 이름은 최초로 중국을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한 영웅이면서 폭군이라는 상반된 평가에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출생부터 평범하지 않다.  공교롭게도 진시황 역시 햄릿처럼 기형적인 친자 관계를 안은채 세상에 등장했고 증명할 수 없는 역사적 자료는 찾을 수 없지만 자신의 기형적인 출생 비밀로 인해서 적잖이 고뇌를 겪어야했다.     햄릿은 선왕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을 낳은 어머니가 삼촌과 결혼함으로써 조카라고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친자라고 할 수 없는 어중간한 위치가 된 반면에 진시황은 사생아로 태어나 두 명의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진나라를 다스려야했다.   진시황의 출생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여불위라는 사람의 존재로 거슬러 올러가게 된다.  

 

  

  나의 진짜 아버지는 도대체 누구인가요?   

 

   
 

 친척보다는 가깝고 혈육만큼은 못 되지!  

- <햄릿> 제1막 2장 중 햄릿의 대사, 같은 책 pp 102 -

 
   

 

전국시대 여불위라는 장사꾼은 진(秦)나라 왕손인 자초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진나라의 소양왕은 연로했고, 그의 아들 안국군에게는 20여명의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비(正妃)인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여불위는 자초의 가치를 알아보고,엄청난 자금력으로 자초가 화양부인의 양자가 되도록 힘쓴다.  나중에 자초는 태자가 되어 왕위에 오르고 여불위는 재상이 된다.  멀리까지 내다볼 줄 아는 여불위의 시야를 확인할 수 있는 일화이다.  

그러나 뛰어난 재능과 미래를 보는 시야를 가진 그 역시 한순간의 선택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비극적인 운명으로  종결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여불위는 자신의 운명, 아니 진나라의 운명에 판도를 뒤바뀌게 되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애첩인 조희를 자초에게 선사한 것이다.  자초와 결호한 조희는 왕후가 되었고 그녀가 낳은 여불위의 아들은 자초의 왕위를 승계했다. 그 아들이 바로 진시황이다.  

사마천은 <사기> ‘진시황본기’ 에선 진시황이 진나라 장양왕의 아들이라고 해놓고 같은 책 ‘여불위열전’ 에선 장양왕을 왕으로 만든 여불위의 아들인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여불위가 이미 뱃속에 자신의 아이를 갖고 있던 애첩 조희를 장양왕에게 보내 그 아이가 대국을 있게 한 음모의 결과로 태어난 것이 진시황이라는 것이다.    

    

 

  진시황과 여불위, 복잡미묘한 관계

하지만 20대의 진시황에게는 복잡미묘한 출생 관계보다 더 심각한 갈등을 마주하게 되는데 바로 자신의 어머니인 태후와 환관과의 은밀한 내연 관계였다.   

마침 자신에게 날아온 익명의 투서 한 장이 진시황의 의혹을 증폭시켜주고 말았다.  투서에는 환관 노애는 진시황의 어머니 태후를 유혹하기 위하여 환관 행세를 하면서 접근한 것이며 노애와 태후의 내연의 관계를 맺어주게 한 사람이 바로 여불위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사마천은 <사기>에서 태후의 음란한 행동을 그치기 위해서 여불위가 노애를 태후의 시종을 들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가 본의 아니게 태후와 노애는 서로 정을 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반면에 <전국책>이라는 또 다른 사료에는 여불위와 노애는 서로 권력을 다투는 대립 관계라고 기록되어 있다.  엇갈린 기록으로 인해 노애와 태후와의 내연 관계에 여불위가 실제로 연루되었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 수 없다.    

하지만 재미있는 사실은 여불위 역시 태후와 사사로이 정을 통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이라는 점이다.  태후와 자신의 은밀한 관계가 진시황에게 발각되면 그동안 누리고 있던 부귀영화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린다.  자신의 치명적인 비밀을 막기 위해서 노애를 불러들였건만 도리어 태후의 음란한 행동을 부채질하고 만 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노애는 자신을 둘러싼 태후와의 내연 관계가 진시황의 귀에 알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지만 이는 여불위의 몰락을 재촉하는 화근이 되었다.   다행히 그동안 공로 덕분에 여불위는 무거운 처벌 대신에 관직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진시황의 마음에는 여불위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만큼 여불위는 황제 다음으로 막강한 세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시황은 여불위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는데 편지를 읽고난 뒤 여불위는 독주를 마시고 자살을 하고 만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로가 있기에 진나라가 그대를 하남에 봉하고 10만 호의 식읍을 내렸소?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족 관계가 있기에 중부라고 불리오?   그대는 가족과 함께 촉 땅으로 옮겨 살도록 하시오.  

 - 사마천 <사기열전> '여불위열전' 중에서, 김원중 역, 민음사, pp 620~621 -     

 

사마천은 여불위가 진시황이 자신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게 생명의 위협을 당할까봐 자살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역사가들은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라는 사마천의 기록이 근거 없는 추측에 불과하다고 기록의 진위성을 의심하고 있다.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라고 똑부러지게 정의할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서서히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려던 진시황에게는 여불위의 존재가 몹시 불편했을 것이다.  

자신의 어머니와 환관과의 추찹한 내연관계에 중부라고 칭할 정도로 존경해온 여불위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젋은 진시황에게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궁정에서의 모의가 두렵고 불안했을 것이다.  반란으로 거대한 정권을 무너지기도 하며 십년도 채우지 못하고 왕의 얼굴이 바뀔 정도로 치열한 권력 타툼의 장소나 다름 없는 궁정의 현실을 생각하면 진시황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첩의 자식' 이라는 콤플렉스

그런데 김태권의 <한나라 이야기 1> 1장 '여불위의 숙청' 편에 들어있는 각주에 의하면 여불위가 진시황의 생부설이라는 기록은 진시황을 '친부를 죽인 사생아' 로 몰아가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사마천이 정말로 진시황을 친부를 죽인 인정 없는 잔인한 황제로 묘사하기 위한 의도로 기록했을까?

진시황의 일생을 기록한 <사기본기>의 '진시황본기' 에는 정양왕이 여불위의 첩에 반해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진시황을 낳았다고 간단히 언급되어 있다.  저자는 '여불위의 숙청' 편 각주에 " 사마천은 <사기> '여불위열전' 에서 이 설을 받아들였지만, '진시황본기' 에는 적지 않았다. " (pp 55)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 내용만 가지고 사마천이 여불위 생부설을 부정하고 있다기에는 근거로 삼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진시황은 애초에 태어날 때부터 왕족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라 첩의 자식이라는 점이다.  여불위가 생부인지 아닌지를 떠나서 진시황에게는 자신이 첩에서 태어났다는 출생의 비밀이 권력자로서의 콤플렉스였을 것이다.  만약에 이 사실이 궁정에 알려진다면 왕족으로서의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수 있으며 훗날 권력을 확장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강력했지만 고독했던 권력가

현존하고 있는 사료를 통해서 진시황이 자신의 출생 비밀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부족함 없이 완벽할 것만 같았던 어린 진시황에게는 이런 사실은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단순한 고민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만약에 그런 상황 속에서 두터운 신임과 존경을 보낸 '중부' 여불위가 은밀한 음모 관계에 연관되었다는 사실은  알아버린 진시황은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거나 다름없다.    

진시황은 중국의 황제이기 전에 번뇌와 불안에 시달려야하는 불완전한 '인간' 이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매일 밤마다 환관이랑 놀아다니고 무한한 신뢰를 주었던 중부 여불위는 불미스러운 사건 때문에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였다.  두 가지 사건이 진시황에게는 강력한 군주로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었던 커다란 인생의 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진시황은 쉴 틈 없이 하룻동안 업무에 매진할 정도로 진나라 국정의 기틀을 잡기 위해서 노력을 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진시황이라고 하면 먼저 떠오른 것이 '분서갱유' ,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세우게 한 장본인' , ' 불로초를 찾으려고 했던 왕 ' 으로만 알려져 있다.  학자들의 정치적 비판을 막기 위해서 유학서를 불태우고 유학자들을 생매장시켰으며 만리장성과 아방궁을 세우기 위해서 수많은 백성들을 동원였고 아방궁은 향락의 장소로 알려져 있다. 지금 진시황에게 남아있는 것은 난폭하고 절대권력을 추구한 군주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진시황이 절대권력의 군주로 변하게 만들 수 있었던 원인에는 황제가 되기 전 태자 시절 때 겪은 사건들도 무시할 수 없다.   여불위의 계획에서 비롯된 환관 노애와 어머니인 태후와의 내연 관계는 황제가 되려는 진시황에게는 절대로 잊혀질 수 없는 정신적인 상처였을 것이다.  오랫동안 자신의 존재를 둘러싼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에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절대권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토록 방술사의 말에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로초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진시황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권력이 무너질지 모르다는 극도의 불안감은 궁정에 비밀통로로 만들 정도로 철저한 비밀주의적 생활을 하였고 자신에게 충언하는 아들 부소를 의심하고 스스로 자결하도록 명할 정도로 냉소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신하들의 간언만 듣고 여불위 다음으로 자신의 곁에 둔 이사를 처형시켰다.  무엇보다도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하루 국정 업무에 열심히 했던 진시황은 주위 신하들로부터 ' 권력욕에 지니치다 ' 라고 할 정도로 거꾸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갈면 갈수록 진시황에게는 주위에 자신을 호의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없고 고독한 권력은 이어져만 갔다.   

 

   
 

나는 최초의 황제다. 나는 이 땅에 전쟁을 끝내고 평화를 가져 왔다.  나는 법을 세워 힘센 자들의 횡포를 없앴다.  나는 몸을 아끼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내가 이 백성을 위해 이렇게나 많은 일을 했는데 왜 나를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는가?  내가 아니라 어디에 이 백성은 마음을 준단 말인가?  

 - 김태권 <한나라 이야기 1> pp 210~211 -

 
   

  

그의 고독한 읊조림을 파헤쳐 보면, 진시황은 꽤나 복잡한 관계에 얽혀 있고 그것을 감당할 수 없어 미칠 듯 고통스러워했을 것이다.  인간 자체로서 할 수밖에 없는 고뇌가 아니라 ‘ 한 나라의 황제이기에 찾아올 수밖에 없는 고뇌’, 그 중심에 강력한 군주인줄만 알았던 진시황은 누구 하나 믿고 의지할 사람 없이 피바람이 부는 권력 다툼의 장에서 너무나 외롭게 한가운데에 서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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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7-30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반가와요 ㅇㅅㅇ
앞으로 알라딘 블로그에서 자주 뵈요 ㅋㅋ

cyrus 2011-08-01 22:23   좋아요 0 | URL
ㅎㅎ 카페에서도 자주 뵈요 ^^

아이리시스 2011-07-30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멋진 시루스님, 이 많은 리뷰 페이퍼를 언제 다 읽으라고... 더워 죽겠어요. 그리고 토요일이예요. 멋진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1-08-01 22:26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알라딘에 글을 쓰려고 컴퓨터 앞에 앉을 때 제일 더워요.
그래서 항상 제 앞에는 시원한 것이 있어야해요. 지금도 시원한
막걸리 한 잔과 함께 답글을 달고 있어요 ^^

노이에자이트 2011-07-30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조도 자기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었음을 평생 열등감으로 생각했다지 않습니까...김두한의 어머니도 김좌진의 스쳐지나가는 여인이었을 뿐...여하튼 여러 여자에게서 자식을 보면 그 후손들이 골치아파집니다.

cyrus 2011-08-01 22:26   좋아요 0 | URL
맞아요, 복잡한 출신 관계 때문에 인생 역시 복잡하게 꼬아버리는거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1-07-31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불쌍하죠, 진시황제.
두고두고 최고의 폭군이라는 소실에, 생전에도 그다지 행복하지 못 했으니 말이예요.
과연 제가 진시황의 입장에 서서, 역사에 끌려 어쩔 수 없는 위치로 간다면
더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에....... 그저 저런 위치에는 가지 않도록 빌 뿐이예요.

요즘 문재인 이사장은 보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가야하는 심정... 이라는 생각이 자꾸 든답니다.

cyrus 2011-08-01 22:28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지도자라면 고독이라는 권력의 특성을 견디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님도 그렇고,,
역시 지도자의 길은 정말 쉽지도 않고 어려운 일인거 같아요,,
 
벽광나치오 - 한 가지 일에 미쳐 최고가 된 사람들
안대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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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벽광나치오

조선의 18세기는 참으로 묘한 시대였다. 동양과 서양, 중세와 근대, 재래와 신문물이 도입되고 뒤섞이고 대립했다. 어떤 것이 옳고 어떤 것이 그른지, 정체성과 가치관이 흔들리던 시기였다. 수백 년간 정체됐던 문화는 젊은이의 혈관처럼 팔팔한 활기가 돌았다.  오늘날에도 18세기를 ' 조선의 르네상스 ' 라고 평가할 정도로 14~15세기에 서양에 수많은 천재를 배출했듯이 조선에도 셀 수 없는 인재들이 나왔다.   

조선 르네상스의 인재들의 업적은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들과 견줄만한 독보적인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알려지지 않고 뜬소문처럼 사라져버린 이름 모를 인재들도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책에 소개한 11인의 벽광나치오들이 바로 역사의 기록에 사라져 ' 이름 모를 인재 ' 가 될뻔한 인물들이다.  벽광나치오(癖狂懶痴傲)란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고질적인 버릇을 못 고치며 어딘가에 미쳐 있고, 게으르고 바보 같고, 오만한 사람을 뜻한다.  조선 시대에 벽광나치오들이란  여행가, 프로 기사, 춤꾼, 만능 조각가, 책장수, 원예가, 천민 시인, 기술자 등 한 가지 일에 능통한 '전문가' 들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들은 '전문가' 로 인정받았기 보다는 한마디로 ‘괴짜’ 라고 할 수 있다. 한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해 그 외의 모든 것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대 사람들은 그들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했고 범상치 않고 기행을 일삼는 괴팍하게 여겼다.


 

  벽(癖) : 몰입의 대가들    

벽광나치오들은 사람들이 '미쳤다' 라고 할 정도로 자기 전공과 재능에 몰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경상도의 유서 깊은 사대부 집안 출신인 정란(1725~1791)은 전문 여행가였다. 그는 세속적인 부귀영화의 명예를 이어가는 것보다 한라산에서 백두산까지 조선의 모든 명산을 등반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당대 사대부들은 정란의 여행길을  ‘ 현실 도피’ 라고 손가락질하였으나 그는 “허황된 것을 가지고 이리저리 궁리하느니 실제 존재하는 것을 만나는 것이 낫다” 면서 아랑곳하지 않았다.   

바둑기사 정운창(생몰년 미상, 18세기 후반에 활동)은 10년 동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은 채 바둑만 공부한 끝에 조선 팔도 바둑 '명인' 으로 우뚝 솟을 수 있었으며 천민으로 시인이 되고자 했던 이단전(1755~1790)은 10년 동안 독학으로 주경야독했다. 독학 끝에 쓴 시 한 편으로 문단을 휘어잡고 있었던 대문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광(狂) : ' 조선의 반 고흐 ' 최 북     

 

 

 


애꾸눈 화가, 최북

 

최북(생몰년 미상, 18세기에 활동)은 출신 성분이 낮은 직업 화가였다. 그림 한 점 그려서 팔아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돈이 생기면 술과 기행으로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말년의 생활은 곤궁했고 비참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비참한 일생 속에서도 호를 호생관(豪生館: 붓에 의지해 살아가는 자)으로 짓고 오로지 자기만의 예술에 도취되어 살았다.

그는 각박한 현실에 대한 저항적 기질을 기행과 취벽 등 다양한 일화로 남겼다. 최북과 함께 동시대에 살았던 시인 신광하가 묘사한 최북의 모습은 그의 사나운 기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  

 

최북은 사람됨이 몹시도 다부지고 사나운데 

자칭 화사(畵辭) 호생관이라 했지. 

체구는 단소한데 한쪽 눈은 멀었고 

술 석 잔을 기울이면 꺼리는 게 없네.   

 

- 신광하 <진택문집> 중에서,  안대회 <벽광나치오> pp 68 -

  

부자가 돈 보따리를 싸들고 와도 거드름 피우는 태도가 왠지 거슬리면 그는 그림을 팔지 않았으며 자신을 낮춰 부르는 양반 서열의 사람들 앞에서도 절대로 굽히지 않았다.   

객기로 자신의 눈을 찔러 외눈이 된 최북 주변에는 그 어느 누구도 지긋이 붙어 있을 사람이 없었고, 세상을 뜨는 최후까지도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충동적인 성격 때문에 절친한 사람들과의 교류가 뜸했으며 그나마 절친한 동료 화가였던 폴 고갱과 심하게 다투고 난 뒤 홧김에 자신의 귀를 자른 반 고흐처럼.   최북의 최후 역시 정신병원에서 홀로 쓸쓸히 입원 생활을 보내다가 결국에는 권총 자살을 선택함으로써 운을 달리한 고흐의 비극적 최후와 유사하다.   열흘을 굶다가 그림을 한 점 팔아 빈 속에 흥건하게 대취한 그는 집으로 가는 길에 성 귀퉁이에서 쓰러져 얼어 죽고 말았다.

    

 

  치(痴) : 벼루에 미친 바보, 정철조  

정철조(1730~1781)의 호는 석치()다. 석치란 ‘돌에 미친 바보’ 란 뜻이다. 여기서 돌은 먹을 가는데 사용하는 벼루를 말한다. 그러니 벼루를 깎는 데 미친 바보다. 정철조는 벼루 깎는 것을 취미와 예술로 삼았다. 그의 별명에는 벼루 깎는 취미를 폄하하는 의미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생전에는 말할 나위가 없고, 죽은 지 수십 년이 지난 뒤에도 벼루를 잘 깎는 명사로서 그의 호는 인구에 회자되었다.  

벼루는 글을 쓰는데 절대로 빠질 수 없는 문방사우(文房四友) 중 하나이다.  18세기에는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멋진 벼루를 수집하는 풍조가 유행하였는데 그 유행의 선두주자는 단언 정철조였다. 수많은 문인과 선비들은 그가 만든 벼루를 소장하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그의 솜씨는 예술적으로 인정받았다.   

정철조는 벼루를 먹을 가는데 사용하는 도구라는 일반적인 용도의 인식을 넘어서 멋진 장식과 문양이 있는 예술작품으로 탄생시켰다.  그는 벼루를 만드는데 돌의 재질을 따지지 않고 칼과 끌을 잡는 순간부터 순식간에 벼루로 완성시키는 재능을 가질 정도로 동시대의 문인들과 절친한 교우들은 그의 벼루 만드는 능력을 손꼽았다.  

하지만 정철조는 단순히 벼루 잘 깎는 선비로 불리기에는 그가 생전에 펼쳤던 활동들은 다재다능했다.   기계, 지도 제작에 조예가 있었고, 천문지리에도 관심을 가져 해시계도 제작할 정도로 만능 지식인이었다.  

  

 

  오(傲) :  나는 나다!   

벽광나치오에서 '오(傲)' 에는 '거만하다' 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천성이 사나웠고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대부가 그림에 대해서 무지하면 거리낌없이 독설을 날렸던 최북의 오만한 기질은 그렇다치더라도 이 책에 소개된 나머지 벽광나치오는 동시대인들로부터 특별히 당대 사람들 눈에 거슬릴 정도의 오만함을 떨지 않고도 재능을 널리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들이 일반 사람들과 다른 독특한 재능과 기술을 가졌음에도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꾸준히 갈고 닦은 노력 역시 그들이 활동하게끔 만드는 원동력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벽광나치오들이 남들과 다른 독특한 재능과 기술을 당당히 보여줄 수 있었고 인정받을 수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은 아무래도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최북은 호생관이라는 호를 스스로 붙임으로써 붓 하나만으로 온 세상을 화폭에 담아내려는 자신만의 예술적인 긍지를 표현하였으며  시작(詩作) 활동으로 당대로부터 널리 이름을 떨치게 했던 사대부 집안의 노비(종) 출신의 시인 이단전은 자신의 신분을 호와 이름에 사용하였다.   그의 이름 단전(亶佃)은 ‘진실로 밭가는 놈'종놈, 소작농을 뜻한다.   자신의 호를 ' 필재(疋齋) ' 라고 삼았는데 필(疋)을 파자하면 하인(下人)이 된다. 그는 스스로 진짜 종놈이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신분사회에 대한 조롱을 퍼 부은 것이다.   그리고 정철조는 다재다능한 능력을 가진 몇 안 되는 사대부임에도 불구하고 평생동안 자신의 학문적 소양을 집대성한 저서를 단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  

당대 사람들은 이들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자신의 신분적 위치도 모른 채 불손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는 건방진 태도로 비춰질 뿐이었다.

하지만 당대로부터 벽광나치오라고 불리던 인물들은 자신의 재능을 겸손히 여길 줄 아는 사회적 분위기와는 다르게 스스로 자부심을 가졌으며 부끄럽고 천하게 여기기는커녕 떳떳하게 자신의 재능을 어필 할 줄 알았던 전문가들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능력을 펼치기에는 신분이 미천했던 벽광나치오들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 자기PR ' 과 유사한 자신만의 홍보 방식인 것이다. 

   

 

  벽광나치오가 아니라, 벽광 '근'(勤) 치오!   

사람들은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는 조선의 '폐인' 들은 공통적으로 세속과 부귀영화에 관심이 없는 편이다.  신분사회임을 감안하면 벽광나치오들은 한 가지 우물에만 파려고 하는 어리석고 게으른 사람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누군가가 자신의 취미와 재능을 알아주는 것에 대해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묵묵히 열심히 노력하였으며 오랜 노력 끝에 신의 경지까지 오를 수 있었다. 앞에서 언급했던 바둑의 명인 정운창과 시인 이단전 그리고 벼루 깎는 것이 좋아서 그저 오랜 세월동안 벼루를 깎다보니 예술작품에 비견될만한 벼루를 제작할 줄 아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정철조까지, 벽광나치오들은 남들 모르게 부단히 노력하였다.  

사납고 술주정뱅이 최북 역시 가만히 집 안에 앉아서 그림만 그리지 않았다.  최북의 화풍 스타일은 초기 남종화풍에서 후기 조선의 고유색인 진경산수화로 변하게 되는데 그 변화의 시점이 금강산, 가야산, 단양 등은 물론 일본과 중국까지 다니게 되면서 비롯된다.  최북은 당시 조선 화풍을 지배하고 있었던 중국 산수의 형세를 그린 그림만을 숭상하는 경향을 비판하고 조선의 산천을 찾아 직접 화폭에 담는 진경산수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벽광나치오, 그들이 찾으려고 했던 것


이 책에 소개된 11인의 벽광나치오들 중에 최북과 이단전과 같은 재주 있는 자를 세상은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주류에 편입되지 못했던 경계인의 생은 끝내 불행했다. 이들은 시대와의 불화를 비켜가기 어려웠다. 진정한 프로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던진 이들의 열정이 인정받기에는 당시의 사회 관념이 너무 경직되어 있었던 것이다.  

바둑기사 정운창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평양의 또 다른 바둑의 명인 김종귀와의 대국을 위해서 직접 평양까지 찾아가 청을 하였지만 상대로부터 묵살을 당하게 된다. 그러자 그가 내뱉은 탄식은 재능이 있음에도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을 만나지 못한 벽광나치오들의 불운을 잘 나타내고 있다.  

 

   
  " 재능을 지닌 선비가 재능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불운이, 그래 이런 정도란 말인가?  내 차마 걸음을 되돌릴 수 없구나!  내가 떠나온 고향 땅에서 평양까지의 거리가 얼추 수천 리다. 고갯길의 험준함과 나그네의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어렵사리 여기까지 이른 이유는 무엇인가? 한 가지 바둑이라는 기예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자웅을 겨뤄서 잠깐 사이의 기분을 맛보자는 것뿐이다. 허나 끝끝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갈 모양이니 어찌 기구하지 않은가? ” (같은 책, pp 269)  
   

  

정운창의 탄식에는 단순히 바둑 대결을 이루지 못한 아쉬움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책에 소개된 11명의 인물들뿐만 아니라 역사의 시간 속에서 사라져야만 했던 수많은 이름 모를 벽광나치오들의 고뇌도 느껴진다.  

결국 그들이 그들이 미친 사람 소리 들어가면서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은 전문가로서의 인정이 아닌 좋아하는 일에서 얻을 수 있는 몰입의 즐거움이었다. 그들에게 ‘즐거움’ 이란 최고수만이 보여줄 수 있는 전문가다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동시에 사회와의 불화를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위안거리였다.  용기와 집념을 지닌 조선시대의 전문가들은 자신이 선택한 한 가지 일에 즐기면서 몰두함으로써 최고의 능력과 기술을 발휘할 수 있었다.   

승자독식의 사회, 거짓과 부패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 운명처럼 정해진 틀을 박차고 나갔던 그들의 열정과 중심 세력에 기죽지 않고 당당하게 섰던 벽광나치오의 패기와 열정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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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1-07-26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이 책 소개를 보니까 생각나는 책이 있는데요,
허경진교수가 쓴 <악인열전樂人列傳>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악기, 노래, 가무에서 두각을 나타낸 예술인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삼국시대부터 조선까지 기이한 예술인들의 이야기들을 잘 정리해 놓았어요. 같이 읽어보셔도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cyrus 2011-07-26 16:39   좋아요 0 | URL
허경진 교수라면 예전에 <홍길동전> 읽을 때 그 분이 쓰신
<허균 평전>을 조금 읽어본 적이 있어요, 그 분이 그런 책을 쓰셨군요.
작년에 나온 <조선을 사로잡은 꾼들>이라고 안대회 교수가 쓰신 책이
<벽광나치오>랑 비슷해요, 역시 역사의 기록 속에 사라진 예술인들을
소개하고 있어요. 굿바이님이 추천하신 책 읽어봐야겠습니다. ^^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
백승종 지음 / 푸른역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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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이천, 그는 누구인가?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정조를 개혁 정책과 탕평책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하고자 한 개혁군주로써 평가받고 있으며 24년 재위 기간을 일명 ' 정조 르네상스 ' 라고 일컫으면서 세종 시대와 함께 조선의 태평성대로 알려져 있다. 

정조 시대와 관련해서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다산 정약용연암 박지원이다. 정약용은 자신이 개발한 거중기를 통해 화성 건설에 참여, 주도하였으며 개혁과 개방을 통해 부국강병을 주장한 실학자로써 정로의 총아였으나 정조 사후에 불거진 천주교 탄압에 의해서 유배 생활을 해야했다.  박지원은 청나라 여행을 통해 보고 듣은 견문들을 <열하일기>에 기록하였으며 청나라의 문물을 배워야한다는 이른바 북학파의 영수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렇듯 정조 시대는 정약용과 박지원이라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인재의 등장 그리고 화성 축성을 통해서 문예부흥을 이끌고자 하였으며 중국으로부터 고증학, 천주교 등 다양한 학문들이 성리학으로 견고히 다져진 조선으로 유입되는 등 오늘날에도 수많은 역사가들 사이에서 흥미로운 연구대상이 되는 동시에 양면의 역사적 평가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TV 속 사극이나 영화를 통해서 정조 시대의 미시사가 재해석되고 있다. 

올해에도 정조 시대와 관련한 흥미로운 역사책이 발간되었는데 <정감록>으로 대표되는 조선의 예언서에 대한 역사적 탐구로 유명한 백승종 씨의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이다.  그런데 이 책이 유독 독자들의 눈길을 끌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제목에 있는 ' 불량선비 강이천 ' 이다.  하필 그냥 선비도 아닌 ' 불량 ' 선비다. 그리고 강이천이라는 이름 역시 낯설게 느껴진다. 강이천이라는 자가 정조 시대 때 어떠했길래 불량선비라고 불리고 있는 것일까?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백과사전에 ' 강이천 ' 을 검색해봤는데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768~1801, 조선 후기의 천주교인. 본관은 진주. 자는 성륜(聖倫), 호는 중암(重菴). 아버지는 흔(俒)이다.

1779년(정조 3) 12세 되던 해부터 임금의 총애를 받고 궁궐에 출입하면서 응제시(應製詩)를 지어 올렸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기설(理氣說)을 토대로 하는 당시의 보편적 학문성향을 탈피하여 고증학적(考證學的)인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사실들을 구명(究明)하는 데 전념하여 전도가 촉망되었다.

그러나 1797년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김정국(金鼎國)에 의하여, 주문모(周文謨)와 접촉하면서 천주교교리를 배우며, 요언(妖言)으로 민심을 혼란시킨다고 보고되어 형조의 탄핵을 받아 그해 11월에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이어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때 옥사하여 주문모와 함께 효수(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매달아 놓음)되었다.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에는 간략하게 강이천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포털 사이트가 운영하고 있는 검색 사전에서는 이보다 더 간략하게, 그것도 단 네 줄로 설명하고 있었다.    

 

강이천 ( ? ~ 1801 ) 

조선 후기의 천주교인. 본관 진주, 호 중암(). 진사()로서 문명이 높았으나, 1797년(정조 21) 천주교인이라 하여 사학죄인()으로 몰려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중국인 신부 주문모()와 함께 효수되었다. 문집에 《중암고(稿)》가 있다.   

-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강이천의 출생연도를 불분명으로 표시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거슬렸지만 강이천이라는 사람이 조선 후기 때 활동했던 천주교인이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사전 속 내용을 통해서 강이천이 왜 불량선비라고 불리우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사교(邪敎)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박해받았던 역사적 사건의 희생자라는 것을 감안하면 조선 사대부들 입장에서는 성리학과 위배되는 사교에 가입한 강이천을 불량 선비마냥 바라봤을 것이다.  

 

  

 

  강이천 - 조선의 이상적 공상주의자 

백승종 씨의 책에서는 수많은 문헌들을 통해 밝혀진 강이천이라는 천주교인의 생애가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사전 속에 있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게 강이천의 삶은 그리 평범하지가 않다.   

단원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의 후손이라는 강이천이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태어날 때부터 병으로 인해 애꾸눈이 되었으며 심한 종기 때문에 한쪽 다리를 쓸 수 없는 장애인이었다.  하지만 강이천은 죽을 때까지 평생 안고 가야 할 신체적 불편함을 이겨내고 어린 나이에 정조로부터 재능을 촉망받았으며 박지원도 그의 능력을 눈여겨 볼 정도였다.  이 정도 능력이라면 강이천은 신체적 역경을 이겨낸 조선 최고의 학자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강이천이 향하는 곳은 양반 집안 자제라면 거쳐야 할 사대부가 되는 길이 아니었다.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성리학적 이념과 정반대인 천주교였다.  당시 천주교 전파에 나섰던 주문모 신부와의 교류를 통해서 천주교에 대해서 관여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정조와 박지원으로부터 사대부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강이천은 왜 그 당시로서는 사학으로 규정되었던 천주교로 전회했던 것일까?  

정조 시대는 근대화의 물결이 한반도로 밀려 들어왔던 과도기적 시대이기도 하다. 서양인들은 선박을 타고 시시때때로 바다에 출현하였으며 이 때부터 천주교가 들어오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태평성대의 시대 속에서도 혼란의 시류가 있기 마련이다.  조선 중기 이후에 떠돌기 시작한 <정감록>은 민중들 사이에서는 조선의 말세예언에 대해서 운운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이다.   이런 불안정한 시국은 강이천의 사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강이천은 성리학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사회로는 조선이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고 전망하였다. 개혁적인 정책 도입한 정조마저도 나날이 불안정과 혼란으로 거듭되는 민생을 안정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강이천은 조선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여 새로운 조선의 모습에 대해 꿈꾸기 시작하였다. 그는 성리학적 이념에서 벗어나 단지 가난한 평민들이 잘 살 수 있는 건전한 사회의 조선을 만들고자 하였다.    

비록 그가 꿈꾸는 세상은 민속 신앙과 <정감록>의 예언적인 내용이 가미된 이상적인 유토피아였지만 번영을 위해서 민중들의 평등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하다.  특히 강이천의 유토피아는 빈민 구제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데 백승종 씨는 강이천을 ' 이상적 공상주의자  ' 라고 규정하고 있다.   

놀랍게도 강이천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유럽의 공상적 사회주의에서 볼 수 있는 유토피아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구제에 중점을 둔 유토피아를 건설하는데 의의를 두고 있다. 강이천의 사상을 이들의 사회주의 사상과 비슷하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계급상으로 힘이 없는 서민들을 구제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강이천은 조선 사회에 걸맞는 이상사회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조 - 개혁군주냐 보수군주냐    

 

   

이덕일 <조선 왕을 말하다 2> & <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 (전 2권) 

 

이런 강이천의 비전(Vision)을 지켜본 정조가 이를 그대로 방관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전국 방방곳곳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정감록>이라는 책이 떠돌기 시작하면서 민심이 불안정하고 있는 마당에 강이천의 비전 역시 정조의 눈으로 봤을 때는 민심의 불안정에 더욱 부채질하는 위험한 사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하필이면 중국으로부터 들어온 고증학의 등장까지 더해지면서 조선 사회는 성리학 이외에 여러가지 사상들이 존립하고 있는 방향으로 겉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정조는 내심 이런 사상들의 등장 때문에 조선 왕조 성립의 기틀로서 대대로 내려온 성리학적 이념이 붕괴될 것이며 성리학의 붕괴는 곧 조선의 멸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조선 사대부 권력을 공고히 확립, 유지하기 위해서 문체반정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정조는 문체반정의 일환으로 사대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패관소설과 소품문을 금지하였으며 아예 문체와 문장 작성마저도 전통적인 한문체를 고수할 것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성리학에 반하는 천주교를 ' 서학 ' 이라고 몰아 붙이면서 배척하기 시작하였다.  정조가 아꼈던 인재들, 정약용과 박지원도 정조의 문체반정을 피할 수가 없었다. 정약용은 자신의 셋째 형 정약종이 천주교인이라는 이유,  박지원은 <열하일기>가 잡문이라고 규정받게 됨으로써 두 사람은 문체반정 때문에 잠시나마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이렇듯 정조는 <정감록>, 천주교, 바다에 자주 등장했던 서양인들 그리고 패관소품을 성리학을 배반하는 하나의 반체제적인 요소로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반체적인 사상에 심취하고 있는 강이천이 정조에게는 불량스러운 선비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백승종 씨는 정조를 성리학 이념을 유지하려는 보수군주였으며 반면에 강이천을 기존의 사회 체제를 유지하려는 상황에 맞선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서로 다른 문화의 충돌을 저자는 조선의 ' 문화투쟁 '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조에 대한 백승종 씨의 평가는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었던 개혁군주라는 이미지를 뒤엎는 새로운 주장이기도 하다.  특히나 문체반정에 대한 평가는 이전에 <정조와 철인시대의 정치>와 작년에 출간되어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던 <조선 왕을 말하다> 2권의 저자인 이덕일 씨의 평가와 사뭇 다르기도 하다.  이덕일 씨는 당시 지배층이었던 노론 세력을 막기 위한 명목으로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던 것이고 성리학이 아닌 중국에서 들어온 고증학과 같은 학문에 너무 치중하고 있는 사대부들의 태도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정조를 둘러싼 두 역사가들의 서로 다른 평가에 대해서 누가 옳다고 판가름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하나의 역사적 사건을 어떤 시점으로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서로 다른 해석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정약용 & 박지원 - 지식인의 두 얼굴       

 

 

 

문화의 격동기에 들어선 18세기 조선 후기의 사회 모습을 단순히 정조와 강이천뿐만 아니라 그 시대 속에서 활동했던 정약용과 박지원의 모습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이 책에서 크게 비중을 두고 있지 않지만 읽으면서 정약용과 박지원에 대한 언급을 지나칠 수가 없었다. 특히 정조의 문체반정이라는 비난의 화살로부터 겨냥을 받았던 이 두 인물의 모습이 흥미진진했다.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처럼 정조와 강이천 간의 문화투쟁으로 인해 정약용과 박지원에게도 충돌의 불똥이 튀어졌다.  정약용은 정조에게 보내는 반성문에서 자신이 천주교와 관계한 점에 대해서  ' 아이들의 장난 ' 과 같은 일이었으며 자신의 입신이 무너지지 않게 해달라고 정조로부터 동정심을 유발하는듯한 내용을 쓰기도 하였다.  정조는 박지원으로 하여금 천주교 탄압에 앞장 설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박지원은 자신이 군수로 부임하고 있는 지역의 천주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이 두 지식인들은 정조의 문화투쟁의 부메랑이 자신들에게 날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문헌에 기록된 내용만을 가지고 정약용과 박지원이 벼슬을 통한 정계 진출의 영달을 위해서 정조의 정책에 동조했다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오늘날 실학 사상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알려진 정약용과 박지원 역시 성리학의 이념 프레임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은 알 수 있다.   

 

 

  조선의 이카로스, 강이천  

18세기 조선 한반도에서 발생한 문화투쟁으로 인해 강이천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비록 그가 실현하고자 했던 이상사회는 제대로 시도해보지 못한 채 그렇게 역사의 먼지로 남게 되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보면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이야기가 있다. 아들인 이카로스와 함께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을 탈출하기 위해서 발명가인 다이달로스는 밀랍으로 새의 깃털들을 모아 붙여 날개를 만들어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카로스는 뜨거운 태양 가까이 너무 높게 날지 말라는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한 채 너무 높게 난 나머지 날개의 밀랍이 녹아버려 바다에 빠져 익사하고 말았다.    이카로스는 자신이 겪고 있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도전에 대한 기쁨에 너무 도취한 나머지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그렇게 어이없는 죽음을 맞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이카로스를 자신의 역량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상징하고 있지만 불확실성의 세계에 과감히 한발짝 더 나아가려는 그의 도전 정신은 훗날 하늘을 날고 싶어하는 인간들에게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태양과 구름으로 이루어진 하늘이라는 광활한 미지의 세계에 뛰어든 이카로스처럼 강이천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거대한 사회를 뛰어넘을 수 있는 무모한 도전에 자신의 운명을 기꺼이 내던졌다. 그것도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혼돈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는 조선의 시국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그리고 서민들을 위한 그의 이상사회에 대한 염원은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사회의 문제적 현실을 직시하고 앞으로 더 좋은 방향으로 개선하기 위해서 신체적, 사회적 역경 속에서도 희망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강이천의 ' 이카로스 드림 ' 이 단순히 문헌 속으로 남아 있기에는 너무 아쉽기만 하다.  강이천은 불량선비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들보다 더 먼저 앞서간 생각을 했으며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버릴 정도로 대담했던 진정한 선비였다. 그의 시대적 도전 정신은 눈여겨 볼만하며 앞으로도 강이천에 대한 꾸준한 역사적인 연구가 필요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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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2-21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가 연결되면, 머리 속이 복잡하면서 판단을 내리기 힘들단 말이예요. ㅠㅠ
천주교 전파가 순수한 의도만 있는 거라면 상관없는데,
제게는 서양의 시커먼 속을 지나칠 수가 없다는거죠. 그러니
천주교에 헌신했던 분들에 대해서도 평가가 복잡해지고, 그로 인해
<공상적 이상주의자>에 대해 무조건 수용이 어렵다는거죠.
물론 제 기질 상으로, 이상주의자나 몽상가가 아닌 것도 한 몫 합니다만.

cyrus 2011-02-21 19:21   좋아요 0 | URL
제가 리뷰에서 설명 못한 부분이 있었는데 강이천과 교류가 있었던
천주교인들도 자신들이 남긴 문헌에 강이천의 사상에 대해서
그렇게 호의적으로 보지 않더군요. 아마도 천주교인들도 강이천만의
생각에 대해서 수용하기 어려웠을겁니다. ^^

sslmo 2011-02-21 0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지원 관련 부분, 제 생각은 틀려요.
박지원이 강이천의 능력을 눈여겨 봤을지는 모르지만, 강이천의 성품이나 인간성은 폄훼하죠.
이 정도 능력이라면 강이천은 신체적 역경을 이겨낸 조선 최고의 학자로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었을까요?
그러기엔 강이천의 꿈이 너무 크지는 않았을까요?

암튼 확실한 건...리뷰가 엄청 멋지다는 것과,
강이천에게 있어 정감록과 천주교는 종교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이었을거라는 생각~

cyrus 2011-02-21 19:25   좋아요 0 | URL
나무꾼님 댓글을 보고나니 당쟁으로 치열한 진흙탕의 정계라는
커다란 사회적 장벽 때문에 강이천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꿈을
실현시킬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나무꾼님
말씀대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에는 힘든 현실일 수도 있었구요. ^^

아이리시스 2011-02-21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강이천이 누군지 모르겠어요, ㅠㅠ

어느 시대든 세상을 바꾸려는 소수세력은 있기 마련인데, 자신의 세력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려놓고 무언가를 시도했던 인물들에게는 안쓰러움 같은 것들이 깃들어요. 공개적으로 이름 붙여진 천주교 박해 네 번 있을 동안 정말 엄청난 사람들이 어이없는 이유로 죽어나갔는데 리뷰 읽으면서 교과서적인 것들의 뒤에 숨어있는 의미들을 이해하게 되네요. 팩트 말고 왜 그랬지? 하는 학자정신이 나온다고나 할까.

cyrus 2011-02-21 19:27   좋아요 0 | URL
저도 강이천이라는 인물을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어요.
기존에 알려져 있는 역사나 우리가 배우고 있는 역사교과서 뒤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비주류 역사나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을겁니다. ^^

반딧불이 2011-02-21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철나무꾼님과 나란히 리뷰를 올려주셨네요.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강이천의 글이 있는건가요?

cyrus 2011-02-21 19:31   좋아요 0 | URL
이 책의 참고문헌들을 보게 되면 문체반정에 대한 언급이 있는
글과 책들은 많이 있는데 강이천이 쓴 글은 없는 거 같습니다.
강이천과 관련된 문헌들도 대부분 강이천 사건 당시 기록된
옛 문헌들이기도 하구요,, 아마도 강이천이라는 인물을 대중적으로
알리게 된 책이 백승종 씨의 책이 유일하다고 생각됩니다.

노이에자이트 2011-02-21 1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체반정에서 정약용은 정조의 편에 섰고 박지원은 제대로 벼락을 맞아버렸죠. cyrus 님의 글이 정약용과 박지원은 문학을 보는 시각에서 정반대 진영의 인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백승종 씨도 정조는 물론 정약용에 대한 세간의 무비판적인 숭배열에도 거리를 두고 있으니까요.

cyrus 2011-02-21 19:3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몰랐던 사실인데 새로운 내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나니 18세기 조선사에 대해서 급 관심이 생겼습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부터 시작해서 정민 교수가 쓴 18세기 조선사에
관한 책까지,, 읽을거리거 더 생겼네요. ^^

잘잘라 2011-02-21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앞에는 서너번 읽어봐도 잘 모르겠더니, '조선의 이카로스, 강이천' 이라는 설명에는 뭔가 안다는듯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결국 제 기억엔 '조선의 이카로스, 강이천'만 남겠죠.^^ 자세히는 모르지만 아무튼 엄청 적절한 비유인듯..

cyrus 2011-02-21 21:37   좋아요 0 | URL
제가 건성으로 책 소개와 관련 없이 썼다보니 읽는데 애먹으셨군요. ^^;; 그래도 책 내용은 읽어보면 좋답니다. ^^

2011-02-23 0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1-02-22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몰랐던 인물을 알게 되었네요.
관심도서로 찜해놓고 갑니다.
 
-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
데이비드 몽고메리 지음, 이수영 옮김 / 삼천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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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저분한 이야기  

나는 집에서 목욕을 하게 되면, 꼭 때를 밀어야 한다. 온 몸에 미지근한 물을 시원하게 뒤집어 씌우고나서 파란 때밀이 수건으로 살짝 문질러주면, 피부에는 누리끼리한(?) 색깔의 때가 엿가락처럼 늘어져 나온다.    

한 주에 한 번씩 꼭 정기적으로 샤워를 하게 되는데, 만날 씻고나서 때를 밀게 되면  내 몸에는 더럽고도 요상한 정체의 성분 덩어리가 나오게 된다.  지금은 그렇게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예전에는 때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한 편이었다. 목욕할 때를 밀지 않고 달랑 샤워만 해도 제대로 씻지 않은 느낌을 받곤 하였다. 

화장실에서 X 싸고 나서, 화장지를 닦지 않은 느낌과 비슷하다고 해야될까 , , ,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는 항상 나를 씻겨줄 때 때를 밀곤 했었는데, 때 미는 수준이 장난 아니었다.  과장된 표현이지만, 때를 민다기보다는 까칠까칠한 사포로 피부를 문지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피부가 붉어질 정도로 때를 미는 것은 기본이며  한 번 목욕하는데 때를 두 번, 심하면 세 번까지 민 적도 있었다.  그렇게 씻다보면 목욕하는데 1시간 정도 걸린다. 그래서, 항상 때 미는 순간이 오면 제일 싫었다.   

아무리, 자신의 몸이 아닐지라도 사랑스러운 아들의 피부를 따가울 정도로 그렇게 빡빡 밀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유전이라는 건 정말 무서운 현상이다. 나도 모르게 목욕을 하게 되면 때를 제대로 밀어야 직성이 풀린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피부가 붉어질 정도로 때를 밀게 되면 오히려 피부에 무리한 손상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물 절약도 할 겸 피부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리하지 않게 때를 밀고 나온다. 그러다보니, 씻는 시간도 단축되었다.   

그런데, 목욕을 다 마치고 욕실에서 나오는 나를 보면서 어머니 曰 , , ,  

  " 목욕하러 드간지 30분도 안 지났는데, 벌써 씻고 나온기가? "   

  

  

  #2 심각한 이야기   

요즘 구제역 때문에 전국은 난리법석이다.  

때늦은 정부의 철저한 검역과 백신 접종 조치로는 이미 전국적으로 확산된 구제역을 잡을 수가 없었다. 구제역으로 인해서 감염되거나 죽어가는 가축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감염된 가축들을 처분을 할 수 있는 안락사에 필요한 약물까지도 동이 나고 말았다. 

이렇다보니, 가축들을 살처분하기 위해서 전국 곳곳에는 생매장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다.  고대 중국의 진시황제가 분서갱유(焚書坑儒)의 일환으로 유학자들을 생매장하는 것처럼 살아있는 돼지와 소들도 구덩이에 묻혀버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전국적으로 생매장당한 가축(소, 돼지 등 기타)의 수가 무려 47만 마리 정도에 이른다고 한다.  하루에 4만 5천 마리 정도의 가축들이 구덩이 속으로 파묻히는 꼴이다.  

아무리 병든 가축이라지만 살아있는 생명체를 강제적으로 생매장시켜서 죽이는 것은 동물 학대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 구제역 ' 생매장으로 인해서 발생될 환경오염 문제이다.  

수많은 가축들을 생매장시키기 위해서 전국 곳곳의 포크레인들은 온갖 땅을 마구 파헤치게 될 것이다.  설령, 그 땅이 사람이 인접하는 주거환경과 떨어져 있다고 해도 땅에 묻어버린 가축들 때문에 땅이 가지고 있는 식물이 자랄 수 있는 영양성분이 저하될 것이다. 그리고 살아있는 가축이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비닐이 찢겨 침출수가 새어나와 지하수와 토양을 오염시킬 가능성이 있다.   

문제의 땅에서 흘러나온 지하수가 인근 지역의 도랑으로 흘러가게 되면 또 다른 환경 문제를 낳을 수 있다.  그리고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 구제역 ' 생매장 후유증 때문에 일상 생활하는데 많은 지장을 겪고 있다.  생매장한 땅에서는 불쾌한 냄새들이 코를 찌르고 있고, 땅에서 흘러나오는 시뻘건 침출수가 눈에 아른거려 집에서 사용하는 수돗물마저 기피하고 있다. 

  

  

  #3  흙 이야기   

데이비드 몽고메리가 쓴 책의 제목대로 흙은 ' 지구의 살갗 ' 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흙은 암석이나 동식물의 유해가 오랜 기간동안 침식과 풍화를 거쳐 생성되는 퇴적되는 물질이다.  지구의 살갗 안에는 셀 수 없을만큼 다양한 미생물과 동식물이 살고 있으며 인간은 살갗 위에서 문명을 건설함으로써 농업를 통해서 먹고 살 수 있는 식량을 얻을 수 있는 풍요로운 생활을 누려왔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인구의 수는 급증하였고 인간은 탐욕스러워졌다.  지금보다 더 풍요로운 생활을 위해서 인간은 자연을 마구 파괴하기에 이른다. 발전과 풍요를 위한 인간의 생산활동은 지구뿐만 아니라 문명을 스스로 파괴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하였다.   

데이비드 몽고메리<흙 :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에는 문명에 의해 잔인하게 짓밝고 파헤친 땅의 잔혹사가 축약되어 있다.  역사 속에서 강대국으로서 위엄을 떨쳤던 고대 그리스, 로마, 중국 그리고 한순간에 역사 속의 먼지가 되어버린 마야 문명과 이스터 섬까지 ' 흙으로 흥하고, 흙으로 망한 '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인간의 피부에는 여러 겹의 조직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각질이 되어 자연스럽게 떨어져나가고, 그 떨어져나간 자리에는 새 피부 조직이 만들어진다.  이렇듯, 지구의 흙도 인간의 피부와 같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걷고 있는 지표면 아래에는 겉흙, 그 밑에는 밑흙, 또 그 밑에는 바위가 풍화되어 생긴 기반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 흙 ' 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부위가 겉흙과 밑흙이다. 경작을 하기 위해서는 겉흙을 파내야하는데 이 기본적인 농업 방식은 동, 서양 문명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었으며 오랫동안 유지되었다. 인류는 농작물이 잘 자랄 수 있는 조건의 좋은 토양을 찾기 위해서 숲을 마구 베었으며 땅을 파헤쳤다.  결국, 이런 방식은 땅의 침식을 더욱 가속화시켰으며 침식되어서 비탈진 경사가 된 땅에는 홍수와 산사태가 쉽게 발생하기도 하였다.  

  

 

  #4  아스완하이댐과 4대강 사업 이야기   

하지만, 인간은 자연이 주는 따끔한 교훈을 무시하였다. 땅을 개발할 수 있는 연장통과 능력으로 보다 나은 생활 환경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무분별하게 자연을 파괴하였다. 이집트 대통령인 나세르와 소련의 흐루시초프 총리가 나일 강에 건설한 아스완하이댐은 흙으로 흥하려다가 결국 흙으로 망해버린 대표적인 사례이다.     

나세르는 아스완하이댐 건설에 러시아의 기술 원조까지 동원하여 나일 강의 범람을 막고 관개농업을 꾀하여 자신의 정치적 실세까지 확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시절부터 나일 강을 관리한 영국의 수문학자들은 댐 건설에 반대했다. 많은 양의 물이 증발하게 되며 나일 강에 있는 흙이 퇴적될거라는 이유였다.   

아스완하이댐 건설 이후 관개농업의 효과를 가져다주었지만 나일 강 바닥 밑에 영영 가라앉아버린 흙의 공급이 부족하여 나일 강의 삼각주는 줄어들었다.  그리고 물이 증발하는 곳에는 흙 대신에 소금이 축적되기 시작하였다. 소금의 영향으로 인해서 나일 강 주변의 농경지의 수확량은 이전보다 많이 줄어들었다.  나일 강 유역의 토양의 질이 떨어지게 되자 수확량을 늘리기 위해서 화학비료가 사용되었는데 예전과 같은 수확량으로 되돌리기에는 늦었다.  고작 얻은 건, 세계에서 화학비료를 많이 쓰는 국가라는 그리 좋지 않은 이미지뿐이었다.   

이집트의 아스완하이댐의 이야기는 우리나라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4대강 개발사업과 유사하다. 정부는 홍수 피해와 물 부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국가적 개발사업의 이면에는 국가위상 제고와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다. 

포크레인에 의해서 4대강 유역 주변의 강과 땅을 파헤치는 것은 오히려 홍수와 침식, 수질 악화, 생태계 변화, 생물다양성 감소라는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결국, 혹을 떼려다 또 하나의 혹을 갖다 붙이는 셈이다.  4대강 개발 사업이 줄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볼 수 있는 곳은 바로 낙동강이다.  개발이 진행되는 동안, 강 주변 밭은 침수 피해를 입기도 하였으며 마구 파헤쳐서 그대로 놔둔 준설토로 인해서 수질 오염을 악화시키게 되고 심지어 황사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지금도 4대강 개발사업에 대한 찬반논란은 이어지고 있지만, 분명한 사실은 무분별한 토양 파괴는 곧 자연 환경 파괴라는 문명사의 진리는 유효하다는 점이다.   

 

 

  #5  지구의 살갗을 벗겨내고 있는 대한민국 이야기  

4대강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땅은 마구 파헤치고 있는 마당에 구제역의 영향으로 인해서 대한민국은 또 다시 땅을 파헤치고 있다.  이번에는 살아있는 가축들을 묻어야한다. 구제역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는 생매장 뿐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흙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흙구덩이에 묻은 수많은 가축들은 죽어서 유해를 남기게 된다. 동물의 유해가 썩어서 질 좋은 흙이 될 수 있는 영양분을 만들어준다.   하지만, 이런 과정은 금방 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세월을 통해서 생기는 자연적 순환 과정이다.   

그리고, 농작물이 자라는데 좋은 영양분이 들어있는 겉흙과 밑흙이 생성되는 것도 수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겉흙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가축의 분으로 만들어진 거름과 흙을 먹고 자라면서 더 좋은 성분의 흙을 만들어내는 지렁이의 존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개발이라는 이름 아래 흙을 파헤치고 있는 지금, 지렁이들의 개체수도 예전보다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거기에다가 곧 있을 농사 적정기에 대비하여 거름이 되는 가축들의 분이 필요해야할 시점에서 지금 가축들은 구제역으로 죽어나가고 있고 심지어 살아있는 것들은 생매장당하고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모습은 좀 더 깨끗하기 위해서 지나치게 때를 밀게 되는 것처럼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지나치게 땅을 파헤치고 있다.  무리하게 때를 밀게 되면 피부의 살갗이 손상되듯이 지금 대한민국은 온전한 지구의 살갗을 아무 생각없이 벗겨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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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11-01-11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좋은 글입니다! 추천 꾸욱!

cyrus 2011-01-11 17: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글 읽으시면서 속 시원하셨나요? ^^

sslmo 2011-01-11 0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목욕탕,찜질방 왕 사랑하고요.
때 미는데도 엄청 짐착해요.
남이 밀어주는 건 미덥지도 않을 뿐더러, 탐탁지도 않아요.
어떤 때는 1시간 동안 팔 한쪽 밀고 올 때도 있는걸요~^^

저도 이 책 설렁거리며 읽고 있는데,
와~이런 리뷰라면 말이죠,전 리뷰쓰기를 포기할랍니다~^^

cyrus 2011-01-11 17:05   좋아요 0 | URL
팔 한쪽 미는데 1시간이나,,!!
밀고나면 피부가 따깝지 않던가요? ^^;;
이 책이 역사적 사례가 많다보니 저도 그냥 대충 읽고
대충 쓴건데요. 리뷰라기보다는 페이퍼에 가깝네요^^;;

반딧불이 2011-01-11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태리타월 무척 좋아해요.~

땅을 파헤치는 것도 문제지만 시멘트나 콘크리트 등으로 덮어버리는 것도 문제 아닐까요? 몽고메리의 책에는 덮는 문제는 안나오나요?

cyrus 2011-01-11 17:07   좋아요 0 | URL
제 기억으로는 책 속에 소개되는 사례들은 대부분 땅을 무분별하게
파헤쳐서 생겼더라구요. 저도 이 책에 구제역 생매장 같은
유사한 사례가 나올줄 알았는데, 나오지 않더라구요. ^^;;
거의 농업이나 공사와 관련된 사례가 많습니다.

stella.K 2011-01-11 1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꽤 괜찮은 책인가 봐요. 읽을 걸..ㅠ
시루시님도 때밀이의 과거가 있으시구나.
님의 세대 정도면 그런 거 없을 줄 알았는데...ㅎㅎ
30분도 너무 길지 않나요? 우린 엄마가 난리나요.
대충 씼고 나올 일이지 뭐 그리 오래하냐고.

근데 #1은 진짜 지저분하다.ㅋㅋ

cyrus 2011-01-11 17:09   좋아요 0 | URL
그냥 재미있게 쓰다보니,, 정말 몇 몇분들에게 정신적 피해(?)를
주게 되었네요..^^;; 로마 문명의 멸망에 대해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
것도 흥미로웠고, 첫 장에 다윈의 지렁이 이야기도 재미있었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1-11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이 총각,, 아무리 그래두 그렇게 리얼하게 자기 때 얘기를 해여?
으아....... 누리끼리한~에서 넘어올 여자도 안 넘어오게따, 결혼 안 할거예요? 크크.

리뷰는 정말 멋지지만 말이죠. 큭.
하지만 솔직히 흙 이야기에서 웃기가 어렵네요. 그져?
인간은 참 못할 짓 많이 하고 사는 동물인데,
거기에 악덕 인간까지 더해지니 정말 큰일입니다.

cyrus 2011-01-11 17:13   좋아요 0 | URL
죄,, 죄송해요. 다음부턴 이렇게 쓰면 안 되겠군요,,^^;;
제가 언급한 아스완 댐 사례 같은 경우에는 4대강 사업이랑
억지로 끼워 맞춘 감 있지만,, 이거보다 더 안 좋은 사례들도 있답니다.
신항로 개척 이후로 유럽 식민지국가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
신대륙의 원시적인 자연을 마구 파괴하고 원주민을 노예로 삼아
농사를 짓게 만든 역사는 씁쓸했습니다. 정말 인간은 못할 짓
많이 했더라구요.

무해한모리군 2011-01-12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많은 사례들이 있는데 배우지 않고 깨닫지 못하니 참 두려운듯 합니다.
이 책 솔깃해지는데요 ^^

cyrus 2011-01-12 16:1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휘모리님^^ 생각보다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책이지만 요즘과 같은 시대에 한 번 꼭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생각됩니다.

꽃도둑 2011-01-14 1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센티의 흙이 만들어지기까지 약100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글을 어딘가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정확한지는 자신없지만)지구의 살갗을 벗겨내는 MB정부의 단세포적인 발상에서 오는 무식함의 극치는 언젠가는 돌려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사이러스님 글 읽으면서 흙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1-01-14 20:13   좋아요 0 | URL
이 책에도 꽃도둑님이 말씀하신 내용이 소개되고 있어요.
겉흙과 밑흙을 마구 파헤치면 이 흙들이 생기는데 오랜 세월이
걸린다고 합니다.

맥거핀 2011-01-16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주 <시사인>을 보니, 백신 접종이라는 방법을 놔두고 가축을 도살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구제역 청정국이라는 위치를 고수하여, 수출에 유리한 고지를 확보하려는 것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더불어, 공장형 축산의 문제도 지적하구요.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죄없는 동물들만 계속 죽어나가는군요. 참 아득한 일입니다. 이번 정부는 툭하면 '잃어버린 10년'을 말하는데, 이번 정부 덕분에 '향후 100년'을 잃게 생겼어요. 참..이를 어쩌나..

cyrus 2011-01-16 23:1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단지 백신이 모자라서 생매장 방식을 선택했던 것이
아니었군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