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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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시는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고, 또다시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예루살렘은 죽은 연인을 끌어안고 놓지 않는 늙은 성중독자처럼, 관계하는 동안 자신의 짝을 삼켜버리는 흑거미처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 아모스 오즈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중에서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예루살렘 전기』p 35 재인용) -

 

 

 

 

 

 

 해답 없는 국제적 난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국제 사회엔 난제가 수두룩하지만 그 중에서도 해결이 가장 어려운 것을 꼽는다면 단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다. ㅣ지난해, 9.11 테러의 주모자인 오사마 빈 라덴의 제거로 자신감을 얻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양측의 국경선 획정을 '1967년 이전으로 돌릴 것'을 주창하고 나섰다. 여기서 '1967년 이전'이란 1967년에 발생했던 이스라엘 대 아랍권 국가들(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간의 제3차 중동전쟁 이전을 말하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개전 초 아랍 국가들의 공군기지를 무력화시켜 제공권을 장악한 뒤 지상전에서도 승전을 거듭하기에 이른다. 개전 4일 만에 시나이 반도, 요르단 강 서안지구, 가자 지구 등을 점령했다. 아랍 국가들은 결국 전쟁 시작 엿새 만에 요충지를 점령당하고 UN이 제안한 정전협정안을 받아들인다. 이후 2만 7000㎢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의 영토는 단 6일 만에 6만 8000㎢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오바마의 언급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문제 중에서 금기 사항이나 다름 없다. 특히 전쟁을 통해서 이득을 봤던 이스라엘의 반발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자 오바마는 며칠도 못 가 자신이 거론한 문제에 대해서 한 발 물러섰다. 공식 석상에서 그는 자신의 '1967년 전 국경선 회귀' 발언은 국경선을 근거로 협상해야 한다는 뜻에서 말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반세기 이상이나 지속되면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중동 평화를 위한 협정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나 일부 아랍권 국가들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의 심한 반발로 해결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사실 문제가 풀기 어려운 것은 양측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단 3문장으로 이루어진 한 장의 선언문이 가져온 중동의 혼란
 
그 동안 유태인들은 2천년 동안 고국을 떠나 전 세계를 방황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핍박의 슬픈 역사를 안은 채 떠돌던 유대인들은 민족주의 '시오니즘'의 기치 아래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아랍 민족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몰려들어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모두 4차례의 중동 전쟁을 치렀고, 이스라엘은 힘겹게 나라를 지켜왔다. 특히 1967년 3차 중동전쟁 승리 후 영토가 비약적으로 확대됐다. 이 때문에 '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위해 67년 경계 이전으로 국경선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게 이스라엘의 입장이며 오마바의 발언에 크게 민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벨푸어 선언이 명시된 서류 원본

 

 

하지만 원래 살던 땅에 살게 해 달라는 팔레스타인들의 주장도 절박하고 정당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아주 오래된 기원전 시대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말 오스만제국 붕괴로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영국은 아랍인들의 염원을 진전시키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1917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겠다는 벨푸어 선언을 하게 되고 1947년 유엔 총회에서 유대국과 아랍국 영토 분할 승인을 주도하게 되는 영향을 주게 된다. 시들어가는 시오니즘 운동에 고민하던 유대인들은 환호했지만 이 선언문 한 장으로 인해 테러가 테러를 낳는 중동의 불행은 커지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수천년 간 터를 잡고 살아온 아랍 민족은 뒤늦게 벨푸어 선언을 전해 듣고 배신감에 떨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모두가 탐낸 '성전' 예루살렘

 

역사가들은 중동 분쟁의 신호탄을 벨푸어 선언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지만 사실 중동은 그 전부터 오랫동안 수많은 내전으로 인해 몸살을 앓았으며 무고한 중동의 사람들은 시퍼런 칼과 무시무시한 총탄 앞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다. 특히 중동 내전의 중심에는 바로 '예루살렘'이 있었다.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담당하는 종교적 상징성을 지닌 동시에 거듭된 파괴와 재생의 순간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고대 로마인들에게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기독교인들에게 모든 길은 '예루살렘'으로 통한다. 구약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다윗 왕 이후 이 성은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지였고,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곳이 바로 이 예루살렘이었다. 예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복음을 처음 전파한 곳도 예루살렘이었다. 하지만 '성전' 예루살렘의 역사는 기독교인들만의 역사가 아니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이슬람 근본주의에게도 '위대한 성지'였고, 문명이 충돌하는 전략적인 전장이자 무신론과 신앙이 부딪치는 최전선의 지역이었다. 그랬기에 이 도시는 많은 세월동안 뺏고 뺏기는 전쟁터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군침을 흘렸으며,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묘사한 옛 문헌 기록이나 오늘날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왜 그토록 수천년동안 예루살렘 하나를 둘러싸고 피 튀기는 혈투를 벌였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성스러운 도시', '성지', '성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예루살렘를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살기 좋은 땅 위에 세워진 훌륭한 도시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예루살렘은 경제학적이나 입지조건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리 매력적이진 않다. 지중해 해변의 무역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물도 부족하고 여름에는 태양이 작열하며 겨울에는 바람이 살을 에일 정도로 춥다. 게다가 그 곳에 위치하고 있는 돌산들은 험하기로 악명 높아 생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완벽한 도시의 조건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왜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이렇게 피를 흘려야하는 전쟁을 치뤄면서까지 별 볼 일 없는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했을까?

 

 

 

 

 

일리야 레핀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우는 선지자 예레미야」 1870년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에게는 예루살렘은 '성전', 즉 성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인들은 이 성스러운 예루살렘을 통해 자신들만의 신성(神聖)을 부여하고 싶었고 점점 예루살렘을 신성화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예루살렘이 '성스러운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신성이 무수히 만들어 낸 신화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예루살렘이 '거룩함의 원형'이 된 것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다윗 왕이 지은 성전과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이 세운 지성소 때문이다. 하지면 역설적이게도 고대 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파괴가 예루살렘의 신성화에 영향을 준 역사적 사건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이 점령한 예루살렘에 유다 왕국의 왕 시드기야를 왕좌에 앉혔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을 방문하고 난 후,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반역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당시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의 예언을 한 예레미야에게 붙잡히고 마는 신세가 된다. 공포와 망상으로 가득한 채 무방비 상태의 예루살렘은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만다. 바빌로니아 인들에게 파괴된 예루사렘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예루살렘은 멸망한 도시들이 겪는 지옥 같은 약탈을 경험했다. 죽임당한 사람들이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운이 좋았다.  "굶주림 끝에 신열로 저희 살갗을 불가마처럼 달아올랐습니다. 시온(예루살렘 내에 위치한 작은 언덕, 유대인들의 삶의 터전)에서 여인들이 겁탈을 당했습니다. 저들의 손에 고관들이 매달려 죽었습니다."    (p 101)

 

 

 

성전이 파괴되는 대재앙을 겪고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강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이를 '바빌론 유수'라고 한다) 자신들의 화려했던 영화만큼은 잊지 않기 위해서 '시온의 영광'을 기록하고 호소했는데, 유대인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이를 '전설'로 만들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영화만큼이나 예루살렘 또한 '성전'으로서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수많은 군주와 영웅들마저 영토 확장의 목표물로서 탐내는 곳이 되었고 성경에 나오는 평화와 환희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에서부터 수많은 십자군, 이슬람의 살라딘과 심지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까지 예루살렘에 눈독을 들였다.

 

 

 

 

 학살과 약탈이 멈추지 않았던 '저주받은' 예루살렘

 

유대인 출신의 역사가 사이먼 시벡 몬티피오리의 『예루살렘 전기』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탄생에서부터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있게 한 1967년 6일 중동 전쟁까지 예루살렘과 관련된 모든 인류의 방대한 역사를 책 한 권에 담고 있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독자들이 예루살렘과 관련된 수많은 당사자들의 각각의 입장에서 볼 수 있도록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잡힌 역사적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방대한 예루살렘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지만 학살과 약탈이 만연된 끔찍하기 짝이 없는 파괴의 역사를 일부 독자들에게는 거북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 책의 서막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의 예루살렘 공격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일단 첫 내용부터 '전쟁' 이야기다. 예루살렘을 침략한 로마 군뿐만 아니라 혼란의 '멘붕 상태'에 이르게 된 예루살렘 내부에서 유대인 군벌들이 자행했던 학살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은 인간의 폭력성이 실로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성벽 주변에는 생지옥 같은 끔찍한 장면들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 구의 시체들이 햇빛 아래 썩고 있었다. 악취는 견디기 힘든 정도였다. 개와 자칼 떼가 인육으로 만찬을 벌였다. 지난 몇 달간 티투스는 모든 죄수나 탈주자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500명의 유대인이 매일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도시 주변의 올리브 산과 바위산은 십자가로 빼곡히 들어차 더 이상 십자가를 꽂을 공간 공간도 없었고, 만들 나무도 없었다. 티투스의 군인들은 희생자들의 사지를 기괴한 자세로 벌린 채 묶어져 못질하는 것을 스스로 오락으로 삼았다.   (p 36)

 

네로 이후 세 명의 로마 황제가 잇따라 등장하면서 혼란스러운 권력승계가 나타났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하고 있을 당시, 이 도시는 세 개의 군벌에 의해 분열되어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유대인 군벌들은 가장 먼저 성전 마당을 피로 물들이는 전투를 벌였고 도시를 약탈했다. 그들의 전사들은 부유한 이웃과 협력하면서 가정집을 약탈하고, 남성을 죽이고, 여성을 희롱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단지 오락거리였다."   (중략)   "용납할 수 없는 더러움"에 넘어간 예루살렘은 매음굴이자 고문실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성지였다.  (p 37)

 

 

 

로마의 티누스 침략 이후부터 예루살렘은 '성전'이라는 이유만으로 내전의 고통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 영역이 되기도 했다. 카이사르와 함께 한 삼두정치로 인해 분할된 권력을 만족하지 못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자신들의 탐욕을 예루살렘에 뻗치기도 했다. 폼페이우스는 솔로몬 왕의 신성한 업적이 남아있는 지성소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마음대로 그 곳을 드나들었고 크라수스는 예루살렘 습격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성스러운 보물들을 약탈해갔다. 약탈한 보물들은 전쟁자금으로 확보하는 데 쓰였다.

 

 

 

 

에밀 시뇰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의 예루살렘 탈환」 1847년

 

 

1096년부터 시작해서 12세기 말까지 이어져 온 십자군 전쟁은 예루살렘에게 파괴로 인한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었다. 봉건영주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 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폐쇄적인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이는 탐욕의 절정이 만들어 낸 잔인하면서도 오랫동안 이어져 온 피 비린내나는 전쟁이었다. 원정단들은 자신들을 예수로부터 보호받는 '순례자들'이라고 스스로 칭하면서 예수의 이름 아래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안과 밖을 막론하고 성벽 주위에선 사라센(중세의 유럽인들의 이슬람교도를 부르던 호칭)들의 썩어가는 시체에서 어찌나 악취가 나던지, 시체들은 학살당한 곳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p 363)

 

 

 

 

 

 인류의 죄악이 만들어 낸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흑거미'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란 본래 뜻과는 다르게 단 한 순간도 지속적으로 평화를 누린 적이 없으며 파괴와 재건을 수없이 반복해왔다. 그마나 고대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바빌로니아를 정복함으로써 추방된 유대인들을 해방시킨 역사를 제외하고는 신의 축복보다는 잊고 싶은 저주가 많이 기억되는 곳이다. 예루살렘은 이제 중동의 화약고이며, 서구 세속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상황은 달랐지만 과거 티투스, 네부카드네자르, 십자군 전쟁 시기와 같이 여전히 복잡하고 미묘하며 긴장의 연속 상태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성서 속에서만 성스럽게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가 되고 말았다. 과연 예루살렘에 평화라는 것이 도래할 것인지, 몇십 년 후에도 예루살렘이 존재할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오로지 핏빛의 미래만 보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소설가 아모스 오즈는 현재의 예루살렘을 파괴를 자초하는 마력을 지닌 흑거미라고 표현했다. 그의 표현 속에는 예루살렘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압축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일어났으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중동의 분쟁을 예루살렘에게만 죄를 가중하는 건 못마땅하다. 평범한 흑거미를 '신성한 아름다움'이라는 착각에 눈이 멀어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다툼을 마다하지 않은 우리 인류 또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공범자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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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08-08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벨푸어 선언 바빌론 유수 로마제국 십자군 육일전쟁...격동의 역사죠.

옥의 티...아모스 오즈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cyrus 2012-08-12 21:40   좋아요 0 | URL
두꺼운 분량이라서 처음에는 읽기 시작하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중동 갈등의 역사에 대해서
깊이 알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오타 지적하신 점, 감사합니다. 5일동안 여름휴가 보내느라
방금 수정했습니다. ^^

2012-09-01 0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궁녀 - 궁궐에 핀 비밀의 꽃, 개정증보판
신명호 지음 / 시공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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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으면 입 다물라', 궁녀(宮女), 삶의 존재 이유

 

 

     

 

궁중 속 애욕과 광기의 정사를 그린 《후궁: 제왕의 첩》(2012)

궁녀의 치정 살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궁녀들 간의 암투를 묘사한 《궁녀》(2007)

 

 

 

요즘 극장가에서 흥행 선두를 달리고 있는 영화 중에 최고의 핫(Hot)한 영화가 바로 《후궁: 제왕의 첩》이다. 여배우의 전라노출과 농도 짙은 배드씬 장면이 꽤 있는 19금 영화라는 장르의 제약 속에서도 전국 관객 200만 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이 영화는 한순간 어긋난 사랑으로 인해서 후궁에 들어가게 된 '화연'(조여정 役)과 단지 그녀를 소유하려다 못해 욕망과 광기에 눈이 멀게 된 권력자 '성원대군'(김동욱 役) 간의 애욕의 정사를 다루고 있다. 이 영화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후궁을 여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저 '비밀'의 역사로만 알려진 궁중의 내막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후궁》이 개봉되기 5년 전에는《궁녀》라는 이름의 영화가 개봉되기도 했다. 이 영화 역시 19세 미만 관람불가 판정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궁녀의 에로티시즘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자살로 위장된 궁녀의 치정 살인사건 해결을 중심으로 드러나는 궁녀들 간의 은밀한 암투를 중심으로 그려낸 미스터리 장르의 영화다. 《후궁》보다는 《궁녀》야말로 영화로 재현된 궁녀들의 생활을 볼 수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다.  (《궁녀》를 촬영하기 위해 메가폰을 잡았던 김미정 감독은 《후궁》에서는 각본을 맡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두 편의 영화만 가지고 '궁녀'라는 존재에 대해서 확실히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자면 과연 우리에게 '궁녀'는 어떠한 존재일까?

 

 

 

 

충남 부여에 위치하고 있는 낙화암에는 지금까지도 바다로 몸을 던진 백제 최후의 왕 의자왕의 삼천궁녀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사적 일화는 역사학계에서는 '허구'에 가깝다고 보고 있다. 백제의 삼천궁녀에 대해서도 어떠한 실질적인 역사적 문헌도 단 한 개도 없다. 백제의 사비 성 인구가 5만 명 정도 추산한다면 이 '삼 천'이라는 숫자는 과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후세의 호사가들이 역사적 장면을 극적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그나마 가장 큰 숫자를 붙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단 '궁녀'라고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낙화암에서 뛰어 내렸다던 백제의 삼천궁녀다. 이 역사적 일화 덕분에 지금까지도 의자왕(?~660)은 나라를 망친 방탕한 군주이면서도 동시에 다른 사내들 부럽지 않을 정도로 무려 삼천 명이나 되는 궁녀를 거느린 진정한(?) 군주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의자왕의 이미지 덕분에 궁녀는 단순히 왕 한 사람을 위한 성 노리개 정도로만 치부하고 있다. 이번에 개봉되어 상영중인《후궁》까지 더해진다면 궁녀는 권력자의 파멸을 이르게 하는 무시무시한 한국형 '팜므 파탈'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과장되면서도 편협된 역사적 증언과 영화에 대한 관객의 몰입을 위해 극적인 요소가 가미된 영화 속 궁녀의 이미지를 따로 놓고 본다면 궁녀의 삶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전혀 다르다.《궁녀》 포스터를 살펴보면 '살고 싶으면 입 다물라' 라는 문구가 눈에 띌 것이다.

 

그렇다. 정말로 궁녀는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 궁녀는 '궁(宮)의 여자', 한편으로는 궁의 주인이나 다름없는 '왕'의 여자이기도 했다. 궁녀들은 궁중 안에서 한평생 왕이나 왕후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좌해야 했다.  백성들에게는 '위대한 군신(君神)'과 다름없는 왕족의 사생활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기에 제한적인 삶을 살아야했다. 그래서 결혼 적령기가 되어서도 결혼을 할 수 없으며 궁녀로서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 궁궐 밖으로 나가서도 궁녀들에게 결혼은 '금지'에 가까운 금기였다. 궁녀가 궁궐 외부의 사내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면 왕의 사생활뿐만 아니라 궁정 생활에 대한 모든 것을 발설하게 되는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궁녀는 궁 안으로 들어오게 된 이상 왕족의 눈 밖으로 나지 않기 위해서는 말과 행동을 삼가해야만 했다. 궁중 생활에 대해서 함부로 말했다가는 역적으로 몰려 죽음을 당할 수도 있으며 진정한 '왕의 여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발로 걷어차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비록 현존하고 있는 역사적 문헌을 통해서 본다면 낮은 신분의 궁녀가 '왕후'가 된다는 것은 단 1%에 불과할 정도로 희박했지만 말이다.

 

 

 

 궁녀, 신분 상승을 꿈꾸다  

 

우리가 '궁녀'라는 존재를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의 여성들이 '궁녀'가 된 이유를 먼저 알고 있어야 한다. 궁녀는 왕족들의 생활에 가장 밀접한 계급이기 때문에 궁녀 선발 과정은 좀 복잡하다. 간답하게 설명하자면 기본적으로 궁녀의 선발 조건은 각사(중앙 정부의 관청)에 소속된 여자 종(공노비)들이다. 양인의 여성들도 궁녀가 될 수 있었지만 이는 부득이한 상황에서 의해서 선발되었을 뿐 궁녀 선발 규정에서는 양인 여성들은 궁녀로 뽑지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궁중 내에서 발생한 역모사건의 진상을 기록한『추안급국안』(推案及鞫案)에서 양인 출신 여성들이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서 궁녀가 되는 사례를 볼 수 있다.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정으로 인해서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적으로 입궁하여 궁녀가 되었던 것이다. 천이라는 이름의 나인(內人)은 한양에서 과부로 살다가 생계를 위해서 자발적으로 궁녀가 되었으며 명순이라는 궁녀는 열세 살 때 궁중 행사를 보기 위해서 가족들과 함게 구경하러 갔다가 아예 그곳에서 광해군 세자의 나인이 되었다. 명순이 화려한 궁중 행사에 넋 빠져 넓은 궁중 안에서 길을 잃어버린 바람에 궁녀가 되었다기보다는 그녀의 부모가 당시 생계가 어려워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딸을 궁궐로 입궁시켰다고 볼 수 있다. 명순이 궁녀가 된 이유에는 그 당시 조선 백성들의 궁핍한 실상과 동시에 조선의 여성으로서의 겪어야 하는 사회적 진출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양반이 아닌 이상 생계를 제대로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양인의 딸로 태어난 조선의 여성들은 양인 남편의 아내로서 일생을 살아가야했다. 어찌 보면 조선의 여성이 궁궐로 입궁하여 궁녀가 된다는 것은 조선의 여성들에게는 그나마 제한적인 자신의 지위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진출을 위한 기회였다. '궁녀'라는 것도 궁중 내에 있는 모든 잡일을 도맡아야하는 노동을 하면서 월급을 받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소개된 궁녀가 된 양인 여성들의 사연 이외에도 신명호 교수가 발굴한 궁녀에 대한 잡다한 정보가 기록된 사료들을 추려 본다면 궁녀는 다른 조선의 여성들에 비해 자신이 처한 사회적 진출의 한계를 어떻게든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지니고 있었으며 유난히도 신분 상승에 대한 욕구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궁녀에 대한 대중의 인식과는 다르게 상궁 박씨는 궁녀라는 지위의 한계 속에서도 부동산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궁에서 주는 월급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는지 상궁 박씨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산 증식에 노력했다.

 

 

13년이 흐른 후 상궁 박씨는 또다시 부동산을 매입한다.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매입하지 않고 자신의 남자 종 대복(大福)을 시켜 매입하도록 했다. 그 사이 노비도 샀다.

 

 - 신명호 『궁녀: 궁궐에 핀 비밀의 꽃』시공사, p 223 -

 

 

 

 

 

 

 

2005년에 개봉된 이준익 감독의 《왕의 남자》속 장면.

연산군(右, 정진영 役)과 장녹수(左, 강성연 役)

 

 

공전에 최대 흥행관객 수를 기록했던 이준익 감독의《왕의 남자》와 1995년에 방영된 동명의 사극 드라마 덕분에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장녹수(?~1506) 같은 경우에는 노비의 신분에서 왕의 후궁까지 오르게 된 신분 상승에 성공한 궁녀의 대표적인 케이스다. 가난한 노비의 딸로 태어난 장녹수는 어려서부터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녀에 대한 역사적 문헌에 의하면 그렇게 눈에 띌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는 아니었지만 가무에 출증한 재능 덕분에 자신보다 연하인 연산군(1476~1506)의 눈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이와 신분을 초월할 정도로 장녹수와 연산군은 예술적 교감이 가능했고 친모 폐비 윤씨(1445~1482)에 대한 결핍이 강하게 자리잡았던 연산군은 연상의 장녹수를 통해서 자신의 결핍한 모성애를 채우고자 했다. 이러한 왕의 총애를 받을 정도로 친밀한 관계 덕분에 장녹수는 후궁에 맞먹을 정도의 권력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장녹수의 일생은 상궁 난이(?~1623)에 비하면 새 발의 피다. 궁녀는 죽을 때까지 자신과 한 번 맺게 된 주인을 섬겨야 했으며 그 주인이 살아 있다하더라도 다른 주인을 섬기게 된다면 그것은 '배신'에 가까운 행위였다. 하지만 선조의 두 번째 왕비인 인목대비 김씨(1584~1632)의 궁녀였던 난이는 자신의 신분 상승을 꾀하기 위해서 주인을 배신했던 궁녀의 사례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난이는 번번이 상궁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번 놓치게 되자 광해군(1575~1641)과 인목대비 김씨 사이의 갈등을 기회로 삼아 광해군 쪽의 궁녀로 돌아서게 된 것이다. 난이는 인목대비 김씨를 핍박하기 위해서 인목대비 김씨 밑에서 일하는 궁녀들을 포섭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광해군을 위해서 앞장 섰다. 하지만 1623년 인조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이 폐위되자 승승장구했던 난이의 운도 여기까지였다. 그녀는 역적의 몸이 되어 그 해에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사랑 그리고 성적 욕구마저도 억압했던 궁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궁녀는 입궁하게 된 순간부터 '여성'으로서의 지위를 거의 반 정도 스스로 포기해야만 했다. 일단 궁궐 내에서도 사내와의 연정을 품어서는 안 되었고 당연히 결혼도 할 수 없었다. 그나마 결혼을 한다고 해도 궁녀들은 신랑 없이 혼례를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의적으로 한편으로는 강제적으로 성적 욕구를 억제해야만 했다. 하지만 궁녀들도 당연히 '여성'이기에 어떻게든 성적 욕구를 표출하고자 했다. 궁녀들은 네 다섯 명 정도 한 방에 생활했다. 이러한 폐쇄적인 공간 속에서 궁녀들 사이에서 동성애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특히 사춘기에 가까운 어린 나이에 입궁한 젋은 궁녀 그리고 네 살이라는 너무 어린 나이에 입궁하여 외간 남자를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채 살아야했고 결혼 적령기에 들어선 궁녀들에게는 사랑과 성이 금지된 궁궐 내 생활이 무척 답답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궁궐 내의 궁녀들 간의 동성애를 '대식'이라고 하는데 궁궐 내 대표적인 동성애 스캔들이 바로 세종(1397~1450)의 큰며느리 세자빈 봉 씨와 궁녀 소쌍과의 관계다. 남편인 문종(1414~1452)이 워낙에 공부를 좋아하고 여색을 멀리한 모범적인 성격이다보니 봉 씨는 남편의 사랑을 그리워한 채 독수공방으로 지내야만 했다. 결국 목 말라하던 사랑에 대한 갈증을 자신의 밑에 있던 궁녀 소쌍와의 동성애를 통해서 해갈했다. 사랑의 결핍에 괴로워했던 봉 씨에게 소쌍은 단순히 육체적 동성애 상대가 아닌 정신적 사랑의 상대로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 둘 간의 은밀한 관계가 궁중 내에서 소문이 나게 되었고 세종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세종은 격노하여 세자빈 봉 씨를 폐위시켜 궁궐로 쫓아내버리고 말았다.

 

 

  

 

 완전한 '여자'가 되지 못한 '궁의 여자'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험 매슬로우(Abraham H. Maslow)는 인간에게는 다섯 가지의 목표 또는 기본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다는 '욕구계층론(욕구단계설)'을 주장했다. 매슬로우가 규정하고 있는 '다섯 가지의 욕구'는 다음과 같다. 생리적 욕구(physiolosgical need), 안전에 대한 욕구(safety need), 사랑 또는 소속에 대한 욕구(belongingness or love need), 존경에 대한 욕구(esteem need) 그리고 자아실현(need for self actualization)이라는 최종적인 욕구가 그것이다.

매슬로우의 욕구계층론에 따르면, 개인은 하위 단계의 욕구가 충족되면 다음 단계의 욕구를 추구한다고 보고 있다. 이 이론은 인간은 경제적인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인 존재임을 밝혔다는 데서 그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만약에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이 다섯 가지의 욕구 중 단 한 개도 발현되지 않는다는거나 혹은 충족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자신이 진정 추구하고자하는 삶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리라. 그래서 욕구는 삶의 목표를 위한 행동의 동기 유발 요인이 되는 동시에 인간의 복잡한 성격을 보다 입체적으로 설명해줄 수 있는 일종의 스펙트럼(spectrum)이기도 하다.

 

신명호 교수의『궁녀: 궁궐에 핀 비밀의 꽃』을 통해서 소개한 궁녀들의 삶을 매슬로우의 이론에 도입해본다면 궁녀는 우리보다 더 욕구에 대한 본능이 강했고, 그것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먹고 살아갈 수 있는 기본적인 생리적 환경을 보장받는다거나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인 삶을 위해서 자진해서 궁녀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궁녀 경력이 쌓이게 되면 궁궐 내에서 돌아가는 권력의 흐름을 파악하게 된다. 자신이 섬기고 있는 권력 있는 왕족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어하며 그것을 잘 이용해 후궁이라는 최상의 궁극적 지위를 꿈꾸게 된다.

 

하지만 궁녀들에게 단 한 가지 욕구가 없었다. 아니, 궁녀가 된 이상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될 욕구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또한 '여성'의 삶의 일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지극히 여성이라면 가지게 되는 본능적인 욕구이기도 하다. 그것이 바로 '사랑에 대한 욕구'이다. 궁녀들 또한 천상 여자이기에 이성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궁녀의 삶을 살아가게 된 이상 '사랑'과 '결혼'은 금지 행위다. 그리고 성적 욕구를 누릴 수 있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마저 스스로 포기해야만 했다. 이러한 수준이라면 궁녀들은 여성으로서의 지위를 거의 상실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자, 이제 궁녀를 왕을 위한 성 노리개라고 말할 수 있는가?  궁녀는 '궁녀'이기 전에 연약한 여자였다. 비록 평생을 눈 감고, 귀 막고, 입 다물고 살아야 하는 게 궁녀들의 삶이었지만 그들에게도 우리처럼 다양한 욕망을 품었으며 그것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인생도 있었다. 마찬가지 그들도 인간이었고 여자였던 것이다. 어쩌면 남성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았고 불행한 여성은 바로 궁녀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녀들의 삶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비밀에 가려져 있기에 역사적 고증이 불가능할뿐더러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마저 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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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 우리가 알고 있던 만들어진 아프리카를 넘어서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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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리카, 나의 아프리카!

  대대로 물려받은 대초원에서 당당하던 무사들의 아프리카,

  나의 할머니가 머나먼 강둑에 앉아 노래한 아프리카.

  나는 그대를 결코 알지 못하지만

  내 얼굴은 그대의 피로 가득하다.

  들판을 적시는 그대의 아름다운 검은 피,

  그대가 흘린 땀의 피,

  노동의 땀,

  노예 생활의 노동,

  그대 아이들의 노예 생활

 

  (중략)

 

 

  - 디오프「아프리카」중에서 -

 

 

 

 

 

 

 

 아프리카의 참상을 보여주는 한 장의 사진

 

 

 

 

 

 

케빈 카터 「독수리와 소녀」1994년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고 있던 아프리카 수단. 카메라를 목에 건 당신 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진다. 비쩍 마른 여자아이가 보급품을 받기 위해 급식센터를 향해 네발 짐승처럼 기어가고 있고, 그 뒤로 독수리 한 마리가 서 있다. 독수리의 눈초리는 노골적이다. 얼른 소녀가 기력을 잃고 쓰러지길 바라는 포식자의 시선이다. 게걸스러운 독수리는 소녀와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줄곧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뒤를 밟고 있다.

 

아프리카 기아 상황을 촬영하기 위해 수단 남부로 들어간 남아공 출신의 케빈 카터는 우연히 기운을 잃고 엎드려 있는 어린 소녀를 발견했다. 그런데 그 어린 소녀 뒤에는 살찐 독수리가 소녀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는 순간적으로 셔터를 눌렀다. 그런 다음 그는 독수리를 쫓아내고 이 소녀를 아요드 식량센터로 데려갔다.

 

카터가 찍은 사진은 전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반향은 대단했다. 소녀의 안위를 걱정하는 수많은 독자들의 편지가 신문사로 폭주했다. 이듬해 카터가 권위 있는 사진작가들에게 수여하는 퓰리처상을 받으며 문제적 사진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사진가에 대한 비난의 여론 또한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굶주린 소녀를 도와주지 않은 채 사진 촬영을 단행한 작가의 선택에 비윤리적이라고 비판하였으며 이 작품이야말로 과연 퓰리처상의 수상 취지에 부합되는 사진인지에 대해서 논란을 제기하기도 했다. 심지어 카터를 독수리 맞은편에서 비슷한 눈높이를 한 채 쪼그리고 있었을 카터 또한 독수리와 다를 바 없는 모리배라는 인신공격성 비난이 나올 정도로 그에 대한 비난의 강도가 높아져만 갔다. 그칠 줄 모르는 대중의 냉담한 비난으로 인해 심한 정신적 압박감에 시달리던 카터는 결국 퓰리처상을 받은 지 두달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만다.

 

 

 

 

 

 Black & Blue, '아프리카'에 대한 이중적 시선

 

지금 이 순간에도 그런 끔찍한 광경이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어나고 있다. 수많은 질병들이 아프리카 어린이들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으며 정치적 내전으로 인한 잡읍은 아프리카의 상처를 더욱 악화시켜주고 있다. 이러한 아프리카의 모습들은 케빈 카터의 사진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대륙의 비참한 현실을 담은 사진들 또는 그러한 장면을 TV를 통해서 보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비슷한 장면들을 계속해서 보아왔기 때문에 감각이 둔해지고 무덤덤해 져서 그 때만큼 충격을 받지 않는다. 비슷한 장면을 계속 봄으로써 신선함과 충격이 사라지게 되는 현상을 '이미지 중독' 이라고 부른다.

 

지금까지도 아프리카를 바라보는 우리 대중의 시선은 '이미지 중독'에 빠져 있다. 아프리카의 기아 문제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그것을 자신과 관련된 일처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당신의 지갑 안이나 옷 주머니 구속 어딘가에 있을 단돈 천원짜리 지폐 한 장은 아프리카 기아 어린이 20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다면 지금까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 성금한 총 금액이 훨씬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모 건설기업 CF '아프리카' 편 장면 중에서

 

 

 

 

'이미지 중독'에 의한 아프리카의 시선 및 인식은 단순히 아프리카의 비극을 알면서도 눈 감고 있는 것만이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어떠한 대상을 바라볼 때는 항상 좋은 점만 보려고 하는 성향이 있다.

 

아프리카는 자원의 보고를 넘어 신흥시장으로, 현지 생산거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암흑대륙'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5~7%대의 성장세를 이루며 '지구의 마지막 성장엔진'으로 주목받고 있는 중이다. 중국 일본 미국 등은 제2의 중동으로 떠오르는 아프리카 공략을 위해 원조 및 경제 협력 카드를 제시하며 발벗고 나서고 있으며 이제 우리나라도 아프리카 진출 경쟁에 뛰어들었다.

 

작년에 모 건설기업에서는 아프리카 시장 진출 사례를 토대로 한 광고가 제작되었다. 모 건설기업의 '아프리카' 편 TV 광고는 자사기업을 상징하는 캐릭터를 통해 남들과 다른 생각과 도전정신으로 아프리카 시장을 개척해 나가는 기업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광고 배경음악으로 아프리카 유명 어린이 합창단 '지라니 합창단'의 잠보(JAMBO)라는 곡을 삽입했고 광고음악 사용료는 지라니 합창단 어린이들을 위해 전액 후원했다는 점에 있어서 타 기업 광고와 차별화된 방식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 TV 광고 한 편 덕분에 기업은 자신들이 이룩한 성공적인 아프리카 시장 진출을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었겠지만 여기서 아프리카는 기업의 이익 창출을 위한 자원이 많은 시장환경에 지나지 않는다. 또 국내 기업이 참여한 개척 사업이 아프리카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으며 광고 카피처럼 아프리카의 미래가 밝아지리라는 보장도 할 수 없다. 모 건설기업 이전에도 수많은 세계의 기업들은 이미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사업을 확장하고 있었으며 아프리카의 땅을 '수많은 자원의 보고'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그 곳에서 사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경제적 형편을 개선해주거나 향상시켜줄 수 있는 국제개발적 사업의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심지어 굴지의 글로벌 은행들마저도 자본창출을 위한 '블루오션'으로 아프리카를 눈여겨 보고 있다. 세계 경기 이중침체 우려 및 유로존 재정위기의 악영향을 받고 있는 글로벌 은행이 아프리카 사업 진출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JP모건, 스탠다드차타트(SC) 등과 같은 글로벌 은행들이 유럽 재정위기로 인한 손실을 피하고 발전 가능성이 높은 아프리카 금융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발벗고 나서고 있는 중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들을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우리는 아프리카를 '가난, 굶주린 어린아이들이 많은 기아의 나라, 끊임없는 발생하는 내전이 일어나는 암흑(Black)의 대륙'이면서도 '풍부한 자원이 있는 블루(Blue)오션'이라는 서로 상반되면서도 이중적인 이미지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왜곡된 '블랙 아프리카'를 만들어 낸 서구인들의 편협된 인식

 

요즘 인터넷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신조어 중에 '웃프다'라는 말이 있다. '웃기다'와 '슬프다'라는 형용사를 조합한 단어다. 즉 어떠한 상황이나 장면에 대해서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슬프다라는 뜻이다. 우리를 포함한 서구인들이 바라보는 아프리카의 시선은 한 마디로 말하자면 '웃프다'.

 

정작 아프리카를 새로운 사업을 개척할 수 있는 자원이 넘치는 무한한 대륙으로 보면서도 여전히 문화적으로 낙후되면서도 미개한 지역으로 바라보는 왜곡된 인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공식 석상에서 아프리카를 '믿을 수 없는 병으로 신음하는 국가'라고 말했으며 프랑스의 사르코지 대통령은 이프리카라는 대륙에는 애초부터 역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구시대적인 발상의 망언을 하기도 했다. 결국 이 정치인들의 말 한 마디 속에는 아프리카를 제대로 알지 못한 무지에서 비롯된 비하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아프리카를 무시하는듯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 정치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사업 진출을 위한 새로운 시장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제국주의를 내세운 19세기 정치인들의 사고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

 

사실 지금까지도 거론될 정도로 하나의 상징처럼 되어버린 '블랙 아프리카'(Black Africa)라는 단어는 오랫동안 형성되어 온 아프리카에 대한 왜곡되고 편협된 인식들이 만들어 낸 함축적인 암흑의 결정체다.

 

아프리카인을 검은 피부색을 가진 인종이라고 본격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한 시기는 17세기부터라고 이 책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검은 피부색을 지닌 아프키라인이 최초로 거론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변신 이야기』중 태양신의 아들인 파에톤이 혼자서 태양마차를 모는 장면에서 '아이티오피아(에티오피아)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이 검은 피부색을 가진 이유를 파에톤의 서투른 태양마차 운전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아이티오피아 사람들 피부가 새까맣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열기 때문에 피가 살갗으로 몰려서 그렇다는 것이다.

 

 - 오비디우스『변신 이야기』이윤기 역, 민음사, pp 73 -

 

 

그리고 17세기부터는 검은 피부색이 생기게 된 이유를 나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했지만 문화적 진보를 기준으로 인종을 구분하는 입증의 시도 역시 등장했다. 검은 피부색을 지닌 아프리카인들을 퇴화된 인종으로 보기 시작한 것도 이 때쯤이다. 검은 피부가 인종적 퇴화의 증거라는 인식은 제국주의 시대까지 이어져오게 되면서 열등한 아프리카인들을 지배하기 위한 합리적인 근거로 변화되었다.

 

또 서구의 역사학자들은 아프리카의 역사를 미개한 인종의 역사일뿐 연구 대상으로 삼지 않았으며 심지어 의도적으로 세계사에서 삭제시키려고 했다. 아프리카의 역사는 구전 전승되는 형식이라서 이를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사료가 존재하지 않는다. 서구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이유를 근거로 아프리카의 역사 존립 자체를 무시하였다. 다시 15세기 대항해시대를 다루는 대목에서 잠시 다시 등장하는 아프리카는 마치 유럽 탐험가들이 도전 끝에 얻어낸 전리품처럼 묘사된다. 기존 세계사에서는 15세기 이전의 아프리카 역사는 애써 기술할 필요가 없는 분야로 취급됐다.

 

이는 헤겔이『역사철학강의』에서 아프리카를 유아기의 인류, 고차원적 사고능력이 없는 흑인들의 땅이자 어두운 밤의 장막에 둘러쳐 있는 대륙으로 묘사한 데서 정점에 이른다. 이후 아프리카 인을 성경의 족보에서 지워 유럽의 인종적·종교적 순수성과 우월성을 지키려 했다. 제1차 대전 무렵엔 지능지수 결과가 더해져 흑인들은 저능하고 미개하며 야만적이라는 인식을 확대 재생산했다.

 

 

 

 

 메마른 아프리카에서도 평화의 나무가 자라날 수 있을까?


폭력사태와 그에 따른 난민들, 각종 전염병에 신음하고 마실 수 있는 물을 얻기 위해 몇 시간을 걸어야만 하는 기아의 땅, 그곳이 아프리카인 것이다. 대부분 아프리카를 정확히 보지 못하고 그저 감상적인 동정주의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익과 헤택을 가져다줄 수 있는 '보물섬'이라고 생각한다.

 

저자가 이 책을 쓴 동기는 바로 여기에 있다. 최근 많은 한국 기업들이 아프리카에 진출하고 있지만, 정작 아프리카를 안다고 하기에는 교류의 양이나 지식이 매우 부족하다. 오랫동안 서구 국가들이 제공하는 영화나 드라마 혹은 뉴스를 통해 전해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접하고 있는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는 아프리카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담고 있다는 문제점이 있다.

 

최근 서구를 중심으로 아프리카의 이미지를 '자원의 보고', '미래를 위한 마지막 거대 소비 시장'으로 탈바꿈 시키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하지만 현재 아프리카의 많은 상처들은 고무와 금 그리고 노예를 얻기 위해 아프리카로 진출했던 서구 열강들의 흔적들이다. 어떻게 보면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아프리카 시장 진출 역시 경제적 논리를 앞세운 것으로 과거 서구 열강들의 행태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아프리카는 많은 사람들에게 기회의 땅이 될 수 있겠지만, 그들에 대한 진정한 이해가 없는 경제적 진출은 아프리카의 상처를 더욱 깊게 할 뿐이다.

 

실제로 아프리카 곳곳에서 벌어지는 내전이나 해적활동을 조금 자세히 생각해봐도 서구의 경제적 논리가 얼마나 아프리카에 상처를 주고 있는지 알게 된다. 사실 내전이 장기화 되는 것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내전 국가들은 스스로 무기를 만들 능력조차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군들은 무기를 구하기 위해서 대부분 다이아몬드 같은 자원을 선량한 시민들에게 채취하게 만들고 자신들은 확보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무기로 바꾸고 있는 것이다. 즉 아프리카의 상황을 이용하는 무기 생산국들이 있기 때문에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장기화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반복되는 내전의 악순환은 아프리카 전체를 병들게 할뿐더러 아프리카인들의 피와 눈물을 온 대륙 전체에 적시게 만들고 있다. 사하라 사막 이남의 여러 아프리카 국가 어린이들은 굶주리며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무기를 구입하고 내전이나 종족 간 전쟁 또는 영토 쟁탈전을 위해 쓰는 돈은 넘쳐나고 있다. 일부 아프리카인들은 차라리 식민통치 시대가 오히려 더 살기 좋았던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고 있을 정도이다. 아프리카에서의 경제 발전 및 민주 발전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중요한 이유가 식민통치에서 독립한 이후 정권을 잡은 지도자들의 부(富)에 대한 탐욕 때문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아프리카인들이 많지가 않다. 작년에 리비아에서 불기 시작한 재스민혁명으로 오랫동안 독재정권을 유지해왔던 카다피가 축출당했한 이후부터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민주화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비극은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이 빈곤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는 한 계속 이어질 것이다.

 

명목상 거의 모든 아프리카 국가들은 독립이 되었지만, 아직도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이루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과연 메마른 아프리카 대륙에 평화의 나무가 자라날 수 있을까?  쟈스민혁명 이후 아프리카 국가들이 당면한 현실적 과제는 민주적 제도를 정착시키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것, 식민지적 구태를 벗어버리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 진정한 의미의 독립을 성취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아프리카다. 새싹을 내미는
 끈기 있게 고집스럽게 다시 일어서는

 그리고 그 열매에 자유의 쓰라린 맛이

 서서히 배어드는 이 나무가

 

 

 - 디오프「아프리카」중에서 -

 

 

 

변화의 흐름이 뚜렷하지는 않지만 '자유'라는 것은 단번으로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자유의 맛이 달콤한 만큼 쓰디쓰기도 하는 인고의 지혜를 알고 있어야하며, 초조하지만 꿈이 성취될 수 있다는 확신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프리카인들이 자유롭고 옹감했던 과거의 역사를 잊은 채 현재는 암울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드렝게 가해지는 억압과 착취의 끈을 끊고 끈질기게 일어설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일어서는 가운데 자유의 참의미를 깨달아, 그 열매 속에 자유를 채워 갈 늘푸른 나무가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아프리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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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29 00:2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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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30 1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차없는 자본주의 - 파괴와 혁신의 역사
조이스 애플비 지음, 주경철.안민석 옮김 / 까치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자본주의의 경제적 패러다임

 

신자유주의가 비판받으면서 작년부터 자본주의 4.0 등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 거론된 적이 있었다. 대안의 핵심은 시장 축소, 정부 확대 그리고 사회적 기업을 앞장선 휴머니즘 회복 등이다. 정부가 시장에 적극 개입해 금융자본의 폐해 등을 개선해야 하며 정부와 시장이 이전의 자본주의처럼 적대적이 아니고 협력적인 관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자유시장 즉 신자유주의가 비판을 받지만 강한 시장이 칭송받던 시절이 있었으니 역사는 반복하면서 조금씩 진전하는가 보다. 인간의 역사가 이 처럼 반복되는 것은 아마도 인간은 불완전한 동물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으며 이성보다는 감성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 그 불완전성으로 인해 인간은 진리에 가까워질 뿐이지 결코 진리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에 영원히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계경제를 지배한 논리나 이념은 산업화 이후 시장과 정부의 길항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18세기 산업화 초기에는 정부가 시장을 압도했다. 이른바 중상주의로 국부 축적을 위해 관세와 규제로 수입을 억제하고 식민지 건설을 통해 수출을 촉진했다. 그러나 각국의 소비자를 희생하고 상인과 제조업자만 배불린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애덤 스미스의 자유방임주의가 대두됐다. 시장경제는 수많은 기업과 개인들의 의사결정으로 생산과 소비가 작동되는 경제시스템이며 가격에 의해 조정된다. 애덤 스미스는『국부론』에서 인간은 이기적일 정도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그가 의도하지 않았던 사회 전체의 이익을 창출하게 된다고 봤다. 이런 시장경제체제에서 사람들은 과거와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풍족한 생활수준을 누리게 되었다. 이것은 개인과 공동체 전체의 후생이 조화롭게 작용함으로써 시장경제의 자연스러운 작동이 중앙통제경제의 계획보다 우월함을 뜻한다.

 

 

 

 

 


애덤 스미스가 구축한 시장경제의 영향력은 산업혁명의 등장에까지 이어졌지만 빈곤 확산, 노사 대립, 경제 공황 등의 문제점이 유발하기 시작하자 정부는 제멋대로인 '보이지 않는 손'을 결박하기 위해서 직접 나서야 했다. 그것이 수정자본주의로 시장기능과 정부 통제가 혼합된 경제체제다. 이 이념 또한 소득분배의 불평등, 대량 실업, 자원 이용의 비효율 등으로 결국 미국의 대공황을 초래해 다시 정부가 강해지는 케인즈주의가 등장했다. 독점 금지, 소득 재분배, 정부가 유효수요를 창출하는 뉴딜정책 등이다. 하지만 1970년대 이후 정부의 시장 개입이 더 이상 효과를 보지 못하고 기업 도산, 물가 상승, 실업 증가 등이 나타나자 애덤 스미스 체제로 회귀한 신자유주의가 등장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특징적 용어인 '트리클다운(Trickle down) 효과'는 넘쳐흐르는 물이 바닥을 적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고소득층 등 선도부문의 경제적 성과가 늘어나면 중소기업이나 저소득층 등 낙후부문에도 혜택이 돌아가 총체적으로 경기가 활성화되는 효과를 말한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신자유주의 안에서 경제적으로 양극화는 오히려 심해져서 중간계층은 점점 빈곤층으로 떨어졌고 상류층과 극빈층의 빈부격차는 더욱 커지는 현상이 심화됐다. 세계경제를 주름 잡았던 미국의 거대 은행 및 금융기관들이 도산을 하게 되면서 금융자본에 의한 세계적인 경제 불황이 나타나고 빈부격차, 경제 불평등이 심화되면서 신자유주의 폐기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정부가 다시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는 이념이 대두된 것이다.

 

 

 

 

 

여기까지의 내용이 우리가 경제 교과서에서 배우는 자본주의의 역사다. 긴 설명을 다시 짧게 축약하자면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케인즈의 수정자본주의, 신자유주의'. 이렇게 세 가지의 경제원리로 분류할 수 있다. '자본주의 4.0'을 제안한 아나톨 칼레츠키는 이 세 가지로 축약된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을 경제 원리가 작동되었던 시대를 구분지을 수 있도록 일종의 경제적 패러다임으로 보고 있다. 시장경제가 등장한 애덤 스미스를 '자본주의 1.0', 경제 대공황 이후 케인스가 제안한 수정자본주의를 '자본주의 2.0', 1970년대 이후 등장한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 3.0'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는 자본주의는 진화하는 시스템으로 인식하고 역사상 네 번째 구조적 전환인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 '자본주의 4.0'을 제시하였다.

 

 '자본주의 4.0'에서는 딱 두 가지를 강조한다.  대기업은 자본주의의 '원칙'을 먼저 지키면서 사회공헌을 경영활동의 하나로 인식하는 '혁신'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기업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정부와 정치권이 만들어내는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 역시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중심인 '시장'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이 대두되고 있는 지금도 자본주의의 영향력이 세계경제에 위세를 떨치고 있다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자본주의'를 바라본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 모두 틀렸다!

 

'애덤 스미스, 케인즈, 하이에크' 순으로 대표되는 자본주의 경제 패러다임의 과정은 경제를 공부할 때 배우게 되는 내용이며 경제학사에서는 오랫동안 하나의 통설로 자리잡게 되었다. 자본주의의 역사를 논하는 모든 서적에서도 '애덤 스미스, 케인즈, 하이에크', 이 세 사람의 이름은 절대로 빠지지 않는 대표적인 단골 인물들이다.

 

이번에 출간된 조이스 애플비『가차없는 자본주의 : 파괴와 혁신의 역사』역시 자본주의가 발달하게 되는 광범위한 역사의 과정을 담고 있는 책 중의 하나다. 신자유주의를 설명하는 내용에서는 하이에크 대신에 시카고학파의 거두인 밀턴 프리드먼을 언급하는 것만 빼면 자본주의의 역사적 흐름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이 자본주의의 역사를 논했던 그 이전의 책들과는 다른 차별성을 갖추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에 작용했던 특정한 요인에 대한 관점이다. 저자는 자본주의를 경제적 측면에서만 바라보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세계를 변동시킨 거대한 경제 체제인 동시에 문화 체제라고 봤으며, 인류의 관행과 사상, 가치와 이념을 뒤흔들어 정치를 변형시켰다고 설명한다. 즉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형성과정을 문화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그는 경제학의 역사를 거론할 때 언급되는 애덤 스미스의 관점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스미스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재화를 통해 거래하고 교환하려는 시장경제체제가 자연스럽게 구축되었다고 봤다. 그리고 그러한 체제 형성에는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애플비는 시장경제의 발전이 자본주의의 발달로 서서히 이어져 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애덤 스미스의 주장과는 반대로 경제발전이 사람들이 시장을 통해 거래하고 교환하는 문화적 특성을 촉진시켰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자본의 축적이야말로 '전통적인 경제활동 방식(중세 유럽의 봉건제와 같은 농촌사회 내에서 이루어진 생산방식)과 단절하는 첫걸음'(pp 25)이라고 강조한 마르크스의 주장도 반박하고 있다. 자본주의의 원리가 등장하기 전에 이미 유럽의 전통적 사회에서는 생산방식을 혁신하는 데 필요한 문화자본의 축적 그리고 노하우가 등장했다는 것이다. 애플비의 반박을 비추어 보자면 마르크스 역시 자본주의의 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문화적인 측면의 요인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애덤 스미스와 마르크스를 비판하고 있는, 애플비의 관점은 막스 베버의 관점과 일맥상통하다. 저자 역시 스스로 막스 베버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문화적인 특성이 자본주의의 발달에 끼친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베버 역시 재화를 통해 거래하려는 성향을 지닌 애덤 스미스의 경제적 인간관을 부정하고 있고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도 전에 이미 시장경제의 방식이 존재했다고 가정한 마르크스를 비판했다.

 

중세 말부터 시작해서 현대의 금융위기까지 방대한 역사를 통해 자본주의의 발달은 애덤 스미스의 생각처럼 '인간의 본성'에 맞는 '자연스러운' 것도 아니고 마르크스처럼 역사 발전의 필연적 도달점도 아니다. 이미 도래할 것으로 예정된 불변의 역사가 아니라 우발적인 사건도 포함된 인류의 문화적 행동이 만든 관행과 제도의 집합일 뿐이다.

 

 

 

 

 '혁신'이라는 새 옷을 입는 것이 두려웠던 자본주의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은 시간에 따라서 변화되는 연쇄적 진보 단계로 파악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경제가 등장하기 전의 과거의 체제와 다를 수 밖에 없는 인정하게 되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과정의 귀결로 본다. 하지만 애초부터 자본주의는 헌 옷을 버리고 상황에 따라서 새 옷을 갈아입을 줄 아는 능동적으로 변신할 줄 아는 혁신적인 체제가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본격적으로 발달하기까지 서양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진보적인 혁신을 추구하지 않았다.

 

 

 

 

 

피터르 브뤼헐 「월력도 연작 중 두번째 그림 : 곡물 수확, 8월」 1565년

 

 

 

16세기 이전 유럽의 전통 사회에서는 농업이 주된 생산방식의 과정이었다. 인구의 절반이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갈 정도로 그 당시 사회 질서 역시 농경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그러나 농경 중심 사회에서만 나타나게 되는 치명적인 약점이 등장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기근에 의한 흉작이다. 특정한 해에 기근 현상이 나타나게 되면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들에게는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입게 될 뿐만 아니라 농업에 의지해서 생산되는 식량이 부족하게 되어 수많은 인구들은 아사(餓死)의 공포를 피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치명적인 문제점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오랜 세월동안 농경사회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농업을 중시하다보니 당연히 상업은 무시되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 당시에는 경제체제를 크게 변화할 수 있는 어떠한 혁신도 꿈꿀 수가 없었으며 농업 중심의 사회 질서를 그대로 순응하기에 이른다. 오랫동안 이어져 온 농경 사회 자체가 한순간에 바뀐다는 점이 기근에 의한 흉년이 찾아오는 것보다 두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한 세기가 지나고 나면서부터 오랫동안 유지될 것만 같았던 농업 중심의 경제체제에 새로운 기운이 꿈들대기 시작했다. 대륙 간 교역이 본격화하면서 '자본'의 실체가 수면 위로 떠올랐고, 그러한 체제 속에서 상공업자의 세력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영국과 네덜란드에서는 자본에 사적 투자라는 개념이 더해져 최초로 '자본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 전환점의 시작을 영국의 산업혁명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저자는 최초로 자본주의에 의한 혁신이 이루어진 시점을 산업혁명이 등장하기 이전을 거슬러 올라 17세기로 정하고 있다. 신. 구교 간의 종교적 갈등 그리고 혁명에 의해 국왕이 바뀔 정도로 정변이 잦았던 내분의 과정 중에도 상인들은 전국시장을 형성할 정도로 경제질서를 변화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에 계몽사상이 등장하게 되면서부터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는 진보적인 경제질서를 강조하기 시작했고 덕분에 영국이 자본주의를 발달하게 만든 최초의 유럽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영국에서 불어닥친 자본주의의 영향력은 비단 유럽 전체뿐만 아니라 아메리카, 아시아 대륙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특히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 전력사업을 발전시킨 에디슨, 강철왕 카네기 등과 같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든 혁신적인 기술가와 사업가들의 등장으로 자본주의는 더욱 더 진보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자본주의라는 유행을 타게 된 국가들은 자신들의 경제 및 사회적 상황에 맞게 딱 어울리는 옷을 입을 줄 알게 되었다. 이제는 구 경제체제의 질서를 순응하는 낡은 옷을 과감하게 버릴 줄 알고 혁신을 강조하는 새 옷을 갈아입는 것이 중요해졌다.

 

 

 

 

 

 자본주의자들의 행동은 반복된다

 

 

 

 

 

아돌프 폰 멘첼  「쇠 압연 공장 (현대판 키클롭스)」 1872~1875년

 

 

 

저자는 이러한 자본주의의 역사를 조지프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로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혁신에 의한 구 질서가 파괴되는 원리로 보고 있는 것이다. 새 옷을 입기 위해서 기존에 입었던 헌 옷을 입지 않는다거나 버리게 된다. 그러나 신상에 대한 허영심은 절제되지 않는 과소비를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자본주의의 창조적 파괴는 지금도 현재진행 중이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등장했던 증기기관, 자동차, 산업 등이 근대로 이행하게 만드는 '창조적 파괴'의 사례라면 21세기에 이르게 된 지금은 우리 눈 앞에서 컴퓨터, 스마트폰과 같은 정보 기술의 등장이 현대판 '창조적 파괴'를 진행하고 있는 과정의 일부이다.  

 

이렇듯 '창조적 파괴'의 원리로 작동되던 자본주의도 진보와 성장에 대한 탐욕에 눈이 먼 나머지 숨 가쁘게 진행되었다. 이렇다보니 자본주의의 무시무시한 파괴적인 측면은 금융위기, 경제적 불평등, 빈곤의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그것을 묵인한 채 자본주의는 가차없이 작동되었던 것이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자본주의자들의 행동은 반복된다. 위기가 임박했음에도 그것을 막으려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누구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는 것은 자본주의가 어떤 성질을 강화시키는지 말해준다. 그것은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주의다. 자본주의의 '정신'은 자신감으로 가득 찬 세일즈맨의 정신에 다름 아니다. 아무도 책임을 지려고 하는 않은 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로운 방법 - 가능하다면 쉬운 방법 - 으로 돈을 버는 것에만 몰두하면 위기와 공황, 대폭락은 불가피해진다.

 

 

 - 조이스 애플비 『가차없는 자본주의 : 파괴와 혁신의 역사』중에서, 까치, pp 452 -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지금 작동되고 있는 자본주의의 판을 통째로 뒤엎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위의 위기를 맞을 때마다 비판론을 제기하는 측면이 자본주의의 '혁신적 파괴'의 장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실수에서 배우는 능력이 있다는 점을 들어 시장의 자정 기능은 제대로 작동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냉혹할 정도로 가차없이 작동되는 자본주의의 혁신도 스스로 종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무차별적인 '생각없는 혁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멈출 줄 모르는 가차없는 자본주의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조이스 애플비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도 이를 개선할 수 있는 명확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결론을 내리는 저자의 태도에 대해 문제 삼을 필요는 없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적 경제의 유동성은 그 아무리 똑똑한 전문가라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으며 앞으로 나아가게 되는 미래는 불확실하기만 하다. 그리고 저자의 말대로 과거를 공부한다고 해서 미래를 완벽하게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pp 466)

 

다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도움이 될 수 있을 법한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빈곤층을 위한 무담보 소액대출으로 운영되는 그라민 은행을 설립한 무하마드 유누스, 경제적 불평등과 빈곤 문제를 부의 배분 및 사회적 약자의 보호와 관련된 정치적 문제로 바라봤던 아마르티아 센 등이 언급되고 있다. 이들이 제시한 대안은 공통적으로 삶의 질을 개선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대안들에도 문제점이 있다. 대안의 실마리로서 제시한 무담보 소액대출 제도가 대표적인 예이다. 저자는 이 제도 역시 빈민 중에서 그나마 잘 사는 사람들이 혜택을 볼게 될 뿐,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사람들은 오히려 손해를 볼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책에서는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적인 대안이 될 것만 같았던 유누스의 무담보 소액대출 제도와 그라민 은행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그라민 은행의 금리가 고리대금 수준으로 높아진데다 가혹한 추심으로 대출 받은 이들이 자살하면서 원래 취지는 사라지고 만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라민 은행을 역임하고 있었던 유누스가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1억 달러의 기부금을 빼돌렸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의 명성에 흠집이 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불명예 퇴진이라는 씁쓸한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유누스의 대출제도에 대해 본격적으로 비판과 문제 제기가 점화되기 시작한 것은 2010년 말부터다. 원서가 2010년에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비추어 본다면 애플비는 유누스의 대안에 대해서 문제점을 거론했지만 그렇다고 심각할 정도로 몰락에 처하게 될 줄은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세운 저자의 대안은 아나톨 칼레츠키의 '자본주의 4.0'의 내용과 유사한 면이 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움직이게 만드는 시장 중심의 기능, 즉 혁신에서 비롯된 부의 창출 능력을 유지하되 이에 대한 탐욕을 줄일 수 있는 적절한 정부의 규제와 개입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가차없을 정도로 탐욕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난폭한 성격을 규제하려는 목표와 취지는 인정할 만하나 아나톨 칼레츠키나 애플비 역시 마찬가지로 경제발전을 바라보고 있는 관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현대 경제 발전의 공로를 자본주의적 시각으로만 해석하고 있고 여전히 자본주의적 시각의 범위 하에서 해결책을 내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대안에는 모순적인 측면이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를 '가차 없지만 생각 있는 혁명으로 이어갈 것'이라고 진단한 점은 그가 지적했던 '현실을 부정하는 낙관주의'와 별 다른 차이가 없어 보인다. 자본주의의 발달 과정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는 남다른 관점만 부각되었을 뿐, 그도 역시 자본주의를 비판했던 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본질적 문제에 대해서는 반성하는데만 그쳤다.

 

인간은 경제적 위기를 마주하게 되면 '시장-정부'를 오가는 쳇바퀴를 반복해서 돌려왔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할 수 있는 확실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했다.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지구에서 작동되고 있는 상태다. 끝없이 가동되고 있는 와중에 환경 파괴, 자원 고갈, 다음 세대에 떠안아야 할 막대한 빚 따위의 호소는 들리지도 않는다. 끝없이 새롭고 독창적인 혁신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것을 소비해야만 경제가 돌아가는 자본주의의 원리 하에 인간은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적인 대안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멈출 줄 모르는 자본주의의 '혁신적 파괴'를 방관해서는 안 된다. 혁신적 파괴에 대한 맹목적인 예찬에 사로잡혀 이것을 적절하게 규제하지 못하게 된다면 세상을 파괴해버리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될 수 있다. 시장경제 내에서 불확실성은 누구에게나 적이다. 불확실성이 커질수록 기업이나 개인은 모험을 회피한다. 뿐만 아니라 위기상황에 맞서 극복하려는 의지도 약화시킨다. 이러한 태도는 앞에서도 설명한 농경사회에서의 상업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역사의 선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불확실성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진보와 발전에 있어서 때때로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지속된다면 나중에는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파괴의 효과는 더욱 심각해지게 된다. 가차없는 자본주의의 작동을 완전히 멈출 수는 없지만, 문제가 크게 악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적절하게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 기존에 유지되어 있는 질서의 체계에 약간의 변화가 있더라도 불확실성의 두려움을 넘어서야 지금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책 한권으로 자본주의 경제가 처한 모든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이 책도 예외는 아니다. 또 저자가 제시한 대안이 당위성을 넘어 실제 현실에서 적용될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미완의 과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지적인, 현실적인 고민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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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9 20:3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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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9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3-1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실하고 꼼꼼한 리뷰 잘 읽었습니다. 간만에 들렀더니 배경이 산뜻하게 바뀌었군요~

cyrus 2012-03-20 12:48   좋아요 0 | URL
봄이잖아요 ㅎㅎ 오늘까지 꽃샘추위라는데 생각보다 바람도
괜찮고 햇살도 따사로워서 좋네요. ^^

마녀고양이 2012-03-20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사이러스님의 리뷰는 논문 같아요....
대단하시기도 하고, 그로 인해 좀 딱딱하달까 아니면 개성이 느껴지지 않는 면도...
그저 제 느낌이었어요. 오랫만에 들려서 이런 말이라니, 죄송... 아이고.

하지만 참 좋은 페이퍼입니다.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cyrus 2012-03-20 12:54   좋아요 0 | URL
ㅎㅎ 죄송하긴요, 저도 글 쓰면서 그렇게 느껴왔는데요.
소설 리뷰 같은 건 내용에 대한 느낀점을 쓰면 되니깐 쓸만한데
인문, 사회과학 도서 같은건 정말 쓰기 어려운거 같아요.
나름 책의 핵심 내용을 요약해서 적는다고 쓴거 같은데
쓰다보면 내용이 길어져있고요,, 그렇다고 책의 내용을 적게 적으면
그 책을 읽어보려는 독자들한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까봐
그것이 또 걱정이고요, 글을 쓰면서 고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잘 안 되네요 ㅎㅎ 역시 습관이라는게 무서운거 같습니다. ^^;;

그래서 저는 마고님 같은 분의 이해심이 담긴 지적을 환영합니다.
앞으로도 잘못된 내용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시지 말고
틀린 부분 있으면 지적해주고 고쳐주세요 ^^

꽃도둑 2012-03-20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연세대에서 조한혜정 교수랑 우석훈 교수의 주도로 <경제인류학>이라는 강좌를 개설한 적이 있었어요, 여러 강사들이 초빙되었는데요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혹은 대체할만한 것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었지요.
브레이크가 고장난 채 내리막길로 달리는 자본주의를 세울 수는 없으리라는 암담함 속에서도 이제 가파르지 않은 평지가 가까이 왔다는 희망 속에서 이 강의를 지켜보았는데요. 아나톨 칼레츠키의 4.0은 글쎄요..탐욕만 줄이려는 정부의 규제와 개입이 과연 효력이 있을까? 틀을 바꾸지 않는다면 행동은 반복될텐데요...그죠?...^^

cyrus 2012-03-21 19:28   좋아요 0 | URL
저도 4.0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인정하는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대안이라고 보는 낙관적인 생각에서는 저도 동의하지 않는 편입니다.
이론만 따져 본다면 실제로 일어난다면 정말 좋은 일이죠.
하지만 지금 현 상황으로봐서는 서로 등을 돌렸던 노사가 마주쳐서
화해와 상생의 악수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

요즘 경영학 수업에 <노사관계론>을 배우고 있는데 교수님 말씀으로는
정부나 언론이나 경영학자들이나 노사 관계 문제를 바라보면 공통적으로
노동자들의 편을 들어주는 이가 드물다고 하더군요..

카스피 2012-03-20 23: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기업은 자본주의의 '원칙'을 먼저 지키면서 사회공헌을 경영활동의 하나로 인식하는 '혁신'을 이뤄내야 한다는 것이다라는 말이 참 가슴에 와 닿는군요.
하지만 현실을 보자면 국내 굴지의 목 기업은 직장인은 열심히 회사 발전에 이바지하다가 스스로 쓸모가 없다고 생각되면 자발적으로 사표를 쓰라는 내용을 빙빙 돌려서 회사 다이어리에 적어놓은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직원들 반감와 외부의 눈때문인지 언젠가 부터 없어졌지만 그 정신이야 어디 사리지겠어요ㅡ.ㅡ

cyrus 2012-03-21 19:30   좋아요 0 | URL
맞아요, 기업 이익에 집중하는 혁신에 매달리게 된다면 회사 내 조직원들은
노동하는 기계로 전락할 수밖에 없죠. 요즘 사회적 기업, 인간적인 면을
내세우는 기업을 강조하고 있는데,, 글쎄요,, 취지느 좋으나 그것이
노사관계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되기에는 현실은 정반대로 가고 있네요 ^^;;

노이에자이트 2012-03-22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3의 길로 유명한 앤서니 기든스는 사회학 경제사에도 정통한 학자인데 그는 마르크스와 베버의 자본주의 발달에 관한 연구가 통념과는 달리 많이 겹치고 상호보완적이라고 했습니다.그가 쓴 <자본주의와 현대사회이론>(한길사)을 참조하세요.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에 관한 논쟁을 다룬 해외거장들의 논문집이 하나 있는데 절판이네요.경제사 공부할 때 정말 좋은 책인데...

cyrus 2012-03-23 20:35   좋아요 0 | URL
한길사에 나온 기든스의 책, 언젠가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에요.
노자님 말씀대로 그 책에 마르크스랑 베버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는데
일단 마르크스와 베버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하고 읽어보려고 해요.

최근에 막스 베버와 관련된 책을 알라딘에 검색해봤는데요, 정말로
절판된 책이 꽤 있더군요. 그래서 중고샵을 통해서 구입하려고 해요. ^^
 
지금 이 순간의 역사 한홍구의 현대사 특강 2
한홍구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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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나라에게 있어서 5월 18일은...? 

요즘 대한민국 사회에 유행처럼 번지는 말이 하나 있다. '북한의 소행이다'라는 말이다. 사회적으로 문제시 되는 일이 생긴다거나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흔히 등장하는 어휘가 되어버렸다. 심지어는 기르던 강아지가 죽어도 ‘북한의 소행’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심지어 자신과 반대되는 의견을 내세울 때에도 이들에게 ‘북한에나 가라’고 비판 같지 않은 비판을 하기도 하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할 때에도 그렇고, 무상복지를 운운할 때에도 모든 의견들을 ‘좌익’의 입장으로 바라본다.

일부 보수단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록물 세계 유네스코 기록유산 등재 반대를 위해 ‘반대 청원서’를 프랑스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일부 보수단체들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의 개입과 관련이 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때마침 정부는 새 역사 교과서 집필 기준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삭제하려고 했다. 광주시는 새 역사 교과서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삭제키로 한 정부여 결정에 광주지역 80여개 기관 및 시민사회단체들은 정부의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 5.18 민주화운동이 삭제된 것을 규탄하고 이를 즉각 철회할 것을 요구했다. 교과부의 의견이 수렴, 반영되었다면 2013년부터 중학교에서 사용될 교과서를 펴낼 때 ‘지침’ 구실을 하게 될 ‘2009 개정 교육과정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에서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중심 5.16 군사정변’, ‘5.18 민주화운동’, ‘전두환 신군부 정권’ 등 독재와 민주화 관련 주요 내용들이 모두 삭제되는 것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시민들이 신군부 세력의 쿠데타에 반발하여 발생한 역사적 사건으로 대한민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이다. 광주 정신은 오늘날에도 계승되어 민주주의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1997년 국가 기념일로 채택되기 이전에는 ‘광주 사태’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광주항쟁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었다. 하지만 반대하던 보수단체들의 희망과는 반대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공식적으로 선정되었다. 민주, 인권, 평화로 상장되는 5월의 광주정신이 온 세계가 인정하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런데 교과부는 한국 민주화 발전 과정에서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될, 한국인이라면 기억해야 될 역사를 삭제하려는 역사적 퇴행을 결정하려는 것인가?  정부가 왜 역사 교과서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는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역사와 자국 문화유산의 중요성과 찬란함을 안다면 절대로 역사 앞에 티끌만한 거짓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것이다. 더욱이 정부가 역사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고 있다면 국민들이 설령 반대한다 해도 먼저 나서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 정부는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올바른 역사를 삭제하자고 나서고 있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학교에서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한다면 현대사에 관한 부분일 것이다. 특히 현대사에 대한 학생들의 인식 수준이 뒤떨어짐을 느낀다. 필자가 고등학생 3학년 때 <한국 근.현대사>를 공부할 때에도 제5공화국이 등장하기 시작하는 1980년대 시절의 내용을 제대로 배웠다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역사 교과서라는게 연대기순으로 서술, 편집되어 있다 보니 정작 교과서에는 ‘현대사’라는 명칭을 붙여놓았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현대사’를 공부할 기회가 없었다. 학교 현장에서 현대사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설령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단조로운 교과서와 주입식 설명들로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하지 못하는 것도 역사교육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1980년 광주가 지금 나와 과연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5.18이 우리나라 역사에 어떠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느냐를 깊이 생각해보는 학생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우스갯소리이지만 몇 몇 학생들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8.15 광복절과 착각하고 있다는 씁쓸한 기사가 지금까지 나오지 않는 것만 천만다행이다. 지금의 청소년들에게 5.18광주 민주화 운동은 생소한 그 무엇에 그치고 만다. 사건 자체에 대해서 잘 모르는 학생들도 많다. 필자는 지금 듣고 있는 대학 강의 중에 ‘한국정부론’이라는 이름의 전공과목이 있다. 이 과목을 통해서 한국정부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할 기회가 생겼는데 때마침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동영상을 시청하게 되었다. 그런데 5.18 관련 영상을 시청하는 데 졸고 있다거나 딴 짓을 하는 학생들이 꽤 있었다.   

  

 

 광주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현대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광주 민주화운동은 1961년 5·16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박정희의 독재정권에서 시작한다. 경제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민주화 운동에 대한 극심한 탄압으로 일관한 박정희는 마침내 한계에 도달해 자신의 심복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탄에 의해 1979년 10월 26일 사망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정권이 무너지자 세상은 민주화에 대한 기대로 들떴다. 비상계엄 상태였지만 정치·사회, 문화 전반은 유신체제 하에서 억눌려 왔던 자유를 만끽하고 있었다. 이후 시민들은 민주화가 될 것으로 기대했지만 독재정권 시절부터 군부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규합해 온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 일당은 오히려 민주화 과정의 과도기를 틈타 자신들의 집권 시나리오를 가동해 12. 12 군사반란으로 권력을 장악, 민주화운동세력과 야당의 정적을 제거할 목적으로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인 전라도 광주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막강한 권력을 움켜쥔 전두환은 실세로 부상했고, 집권을 위해 숨 가쁘게 움직였다. 신군부는 쿠데타로 행정부와 국회 등을 무력화하고 반대세력을 제거하면서 권력 찬탈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신군부의 학살만행에 맞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시민 전체가 일심동체로 저항했던 광주는 결국 피의 진압으로 5.18 민중항쟁의 끝을 본다. 하지만 이를 촬영하고 보도한 외신 기자에 의해 국제적으로 한국의 낙후된 민주주의를 알리게 됐고 이후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돼 결국 전두환은 87년 6월 항쟁으로 인해 직선제로 개헌하기에 이르렀다.


저는 광주를 이해하지 못하면 한국 현대사를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현실을 가장 많이 규정지은 사건이 바로 5.18 광주라고 봅니다. 5.18은 수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게 만든 사건이었을 겁니다.  

(<지금 이 순간의 역사> ‘광주의 자식들, 그리고 노무현’ pp 20)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기록물들은 인권, 민주, 법치 등 인류 보편적 가치를 세계인들의 가슴에 새기고 정의를 지향하는 인권교육의 중요한 지침서가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이라는 척박한 영토에 민주주의적 사회가 자리잡을 수 있었던 촉진제가 바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이었다. 이처럼 6.25 전쟁 이후 한국 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으로, 오늘날 한국 민주화의 초석이 된 5.18의 가치와 그 유산을 세계가 인정해 준 것임에도 극우 보수단체들의 입장과 역사 교과서에서 삭제하려는 정부의 입장은 앞뒤가 전혀 맞지 않다. 5.18 진상규명과 학살책임자 규명, 그 배후세력 규명 등이 여전히 미완인 상태다.   

  

 

 지금 이 순간, 역사를 기억해야 될 시점

‘역사를 인식하는 사람’은 지나온 과거와 오늘, 다가올 미래의 흐름 속에서 ‘오늘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해 고민한다. 따라서 역사에 기록될 자신의 행적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기 마련이다. 이에 반해 ‘역사를 인식하지 않는 사람’은 역사를 인식하지 않기에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오늘의 이익과 눈앞의 권력에 현혹되고, 진실을 조작하고, 미화시키고, 합리화하려고 든다. 진실을 호도하면서 역사가 그들의 뜻대로 기록될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아무리 권력의 최면이 강력하다고 하더라도 '역사의 강'이 흘러가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 '역사의 강'은 진실을 향해서만 흘러가기 때문이고, 진실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쓰여지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지금 거꾸로 가고 있다. 역사의 진실 앞에서 어떤 이들은 왜곡하거나 아예 외면하려고 한다. 과거와 현재의 단절의 역사로 만들려고 하고 있다. 심지어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전 세대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 만든 민주주의 사회의 모습은 점점 퇴색되어져만 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프다. 우리가 정녕 미래를 생각한다면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살아온 역사를 돌이켜봐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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