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젠의 로마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몸젠의 로마사 1 -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몸젠의 로마사 1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역사책, 몸젠의 로마사

 

로마제국의 역사를 다룬 책은 수도 없이 많다. 그래서 로마 시대를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로마의 탄생과 멸망을 시오노 나나미식의 대작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핵심적인 내용만 추린 한 권으로도 끝낼 수 있다. 또 아무데나 손 가는 대로 펼쳐 로마 시대의 미시사를 가볍게 읽는 책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진정한 로마사 고전을 읽지 않은 채 로마 역사에 능통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권 참고 문헌 목록을 본 적이 있는가.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할 때 사용한 2차 사료 중 하나가 테오도르 몸젠(1817~1903)의

 

 

 

 로마는 영웅 전설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책은 로마 역사를 '신화'로 바라보던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고대 로마인의 삶과 로마의 흥망성쇠를 실증적으로 연구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서 저자는 로마의 역사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역사를 다룬다고 말한다. 이탈리아 반도에 살던 전체 민족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는 과정뿐만 아니라 민족과 언어의 원류를 세밀하게 소개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권은 로마 건국의 신화 로물루스와 레무스 이야기로 독자를 로마의 세계로 초대한다. 하지만 몸젠의 책은 다르다. 이탈리아 초기 민족이 반도에 정착되는 사실부터 시작한다.

 

 

로마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2천 700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역사가 한 곳에 압축돼 있다. 로마를 본다는 것은 그 안에 응축된 역사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건국 설화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을 중심지로 정하고 암소와 황소에 쟁기를 달고 사각형의 경계선을 그어 로마가 탄생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몸젠이 수집한 연구 성과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기원전 753년 이전에도 고대 이탈리아 민족은 조직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민족은 크게 라티움 지방 종족과 움브리아 종족으로 나뉘는데 초기에는 유목 생활을 하다가 이탈루스 왕에 의해서 농경 생활로 전환하게 된다. 이탈루스 왕은 이탈리아 초기 법 제정에도 깊이 관여할 정도로 이탈리아 역사의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몸젠의 실증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진정한 로마 건국의 시초는 이탈루스인 것이다.

 

 

 

 2천 년 묵은 민족적 통일의 씨앗

 

이탈리아의 역사는 로마 제국 분열 이후 동, 서로마로 분열되다가 중세에 들어서 밀라노, 베네치아, 나폴리 같은 도시국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도시국가의 전성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이탈리아는 작은 왕국들을 통틀어 부르는 하나의 집합체 이름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민족주의 부흥에 힘입어 가리발디가 이탈리아 통일을 달성하게 된다. 간추린 이탈리아의 역사를 살펴보게 되면 이탈리아인들이 ‘민족’으로서의 동질성 인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굵직굵직한 역사의 근간만으로 역사 속 민족의 특징을 규정하면 곤란하다. 이탈리아가 분열과 갈등을 거듭하는 '콩가루' 나라가 아니다.  

 

 

민족적 동질성을 정치 영역보다는 놀이와 예술에서만 드러내는 희랍인과 다르게 이탈리아 인은 이미 자기통제에 기초한 민족의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라티움 평야에 있는 작은 부락들은 독립된 주권을 가질 정도로 통치자가 다스리는 공동체로 발전했다. 그러면서도 ‘연맹체’라는 공동체 의식은 남아 있었다. 몸젠은 씨족 부락의 라티움 연맹 공동체의 등장에 대해 지역 분리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으며 민족적 유대감을 고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민족적 통일의 꽃은 가리발디가 활동하던 19세기에 늦게 피었을 뿐 종자는 이미 고대에 형성되었고 발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2천 년 묵은 연꽃 종자가 조그만 새싹을 틔우듯이 그렇게 ‘로마 민족’은 탄생했다.

 

 

 

 

 실증주의 역사의 대부(代父)

 

몸젠의 역사 서술 방식은 역사적 증거물을 제시해서 실증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그의 역사에는 ‘가정(假定)’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나긴 세월의 풍파에 파묻혀 역사가의 기억 속에 사라질 뻔한 역사적 문헌을 분석하는데도 몸젠은 주관적인 해석을 지양한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쿠르베는 “나는 보이지 않는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을 실제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사실주의적 회회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이다. 몸젠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며 증명 불가능한 신화를 역사로 서술하지 않았다. 그는 신화를 ‘스스로 역사이기를 희망하지만 훌륭할 것 없는 단순한 설명’이라고 정의한다. 자신 즉, 역사가가 사료를 충분히 검토해서 설명될 수 있는 내용을 진짜 ‘역사’라고 인식했다. 몸젠의 로마사는 실증주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시대에 쓴 책이다. 간혹 전체적인 틀을 보는 거시사적 관점을 옹호하고 개인의 행위, 사유, 문학 등을 역사의 대상으로 제외해야 한다는 역사관을 드러나는 내용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역사관은 사망할 때까지 인생의 절반을 로마사 개정에 몸 바친 탐구 정신을 생각해서 애교로 봐주자.(몸젠이 최종적으로 개정 증보한 로마사는 그가 죽은 후 1904년에 출판되었으나 끝내 미완성으로 남겨지고 말았다) 소설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세우는 일본인이 쓴 로마사와 비교하면 몸젠의 로마사는 인문학적 가치가 훨씬 높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명의 배꼽, 그리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평점 :
품절


 

 ‘신화’의 히마티온을 벗은 그리스의 속살 보기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외국영화를 보게 되면 남녀 모두 하얀 천을 온몸에 두르는 형태로 옷을 입는 것을 볼 수 있다. 복장의 이름은 히마티온(himation). 고대 그리스 남녀 모두 착용한 전통 의상 중의 하나이다. 고대 로마인들의 복장과 비슷해서 똑같이 히마티온을 입을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식과 형태에서 히마티온과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명칭도 다르다. 고대 로마인의 전통 의상은 토가(toga)라고 부른다.

 

예전에 ‘그리스’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뜨거운 태양 햇살을 듬뿍 받은 채 자라는 올리브 나무, 히마티온을 입은 고대 그리스인들 그리고 옛날 그들이 숭배했던 올림포스의 신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그리스 로마 신화가 독서의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천상에 떠돌던 신들의 이야기를 故 이윤기 선생은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되어 상상력이 메마른 우리나라의 땅에 안착시켰다. 이때부터 우리에게 그리스는 변방의 유럽 국가가 아닌 ‘신화의 나라’로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가 ‘신화의 나라’라고 해서 그곳 사람들이 고대인들처럼 히마티온을 입고 보이지 않는 신들에게 경배할까? 그렇지가 않다. 지금의 그리스를 보라. 젖과 꿀이 흐르는 풍족하면서도 영원불멸한 신들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예전의 ‘그리스’가 아니다. ‘경제 파탄 국가’, ‘경기침체의 화약고’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만 거론된다. 지금의 그리스는 최악의 경기침체 속에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때 최고의 관광국가로 손꼽을 정도로 살기 편한 나라였는데 이제는 치안마저도 위태로울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골의사 박경철은 생뚱맞게 그리스를 여행한다. 그리고 그리스 땅에서 남겨진 자신의 발자국 흔적들을 한 권의 책으로 다시 되살려냈다. 시골의사의 그리스 여행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여행 안내자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다.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를 인도해준다는 신계의 헤르메스가 아닌 진짜 그리스 인 카잔차키스와 동행을 선택했다. 시골의사의 여행 안내자 선택은 탁월하다. 만약에 헤르메스였다면 자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의 흔적만 쫓는 고리타분한 여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카잔차키스와 함께하는 시골의사가 바라보는 그리스의 모습은 ‘히마티온’을 벗은 나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신화’라는 이름의 히마티온에 의해서 드러나지 않았던 그리스의 속살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크 안티시쥐지’, 이중적인 자아를 가진 그리스인

 

시골의사는 현재 그리스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생각했던 그리스가 맞는지 의문이 든다. ‘신화의 나라’라는 신비스러운 이미지가 확 깨는 순간이다.

 

 

그리스에는 지중해의 태양 같은 뜨거운 격정과 말라비틀어진 마른풀 같은 무기력이 공존하고, 처음 만난 여행자를 집 안에 들여 재워주는 인류애적인 친절과 백주대낮에 불법체류자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는 야만이 공존한다. (p 35)

 

 

그리스인은 ‘안티시쥐지’(antisyzygy), 이중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다. 시골의사는 그리스를 여행하는 이방인이라면 이 정도의 당혹감은 충분히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스를 동경하는 이방인이라면 그리스의 속살에 크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특성을 제대로 모른다면 그리스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같은 현자들만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불장난이 잦을 정도로 바람기 많은 제우스처럼 쾌락에 탐닉했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코린토스에는 아프로디테 신전 여사제들의 축제가 열렸는데 지중해를 드나드는 남정네 마음에 유혹의 손짓을 보낼 정도로 향락의 축제였다.

 

기원전 7세기에 코린토스를 다스렸던 페리안드로스의 이야기는 ‘그리크 안티시쥐지’(Greeks

antisyzygy)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페리안드로스는 경제학이 등장하기 오래전에 이미 노예제의 폐해를 지적했으며 훌륭한 통치술을 펼쳐 7대 현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공(功)보다 과(過)가 더 많이 부각되는 편이다. 잔인한 독재자로서의 악명 높았다. 임신한 아내를 발로 차 살해하는 것도 모자라 코린토스의 모든 여자들의 옷을 벗겨 불로 태울 정도로 비정상적인 기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로마의 네로, 칼리굴라 뺨칠 정도다. 후대의 평가 중에는 의도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악의가 포함된 것도 있지만, 우리는 페리안드로스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파멸의 길로 스스로 몰아세우는 이중적 자아의 위험성을 볼 수 있다. 놀랍게도 경제 침체 이후 자아 분열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는 지금의 그리스를 보는 듯하다.

 

 

 

 낭만적 정열과 고요한 명상을 동시에 품다

 

그러나 그리스에는 ‘인류애’와 ‘야만’이 충돌하는 안티시쥐지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그리스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침략자의 불의에 맞서 투항했던 시인 조지 바이런의 낭만적 정열이 남아 있으며 세속을 피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 고요한 명상을 하는 수도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리스다.

 

 

 

 

그리스 테르베나키아에 위치한 콜로코트로니스의 동상

 

 

오랜 굴종의 끈을 단칼에 자르려 했던 그는 근대의 헤라클레스라 불려 마땅한 사람이었다. (p 147)

 

 

한국에 이순신이 있다면 그리스에는 혁명 영웅 콜로코트로니스가 있다. 그리스는 15세기 말부터 오스만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다. 1822년에 그리스의 독립이 선언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불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때 영국의 시인 조지 바이런이 그리스의 독립 전쟁에 참전했다. 콜로코트로니스는 게릴라 독립군 8000명을 이끌어 이보다 다섯 배 많은 3만 6000여 명의 오스만투르크 군을 격파한 공적을 세운 그리스의 진짜 영웅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인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리스의 도시 중심부에 벗어나 한적한 시골에 가면 고요한 정교회의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다. 지리산 청학동처럼 속세의 발길이 드물고 정진과 수행에 집중하는 수도사들을 볼 수 있다. 수도원은 절벽이 깎아 내지르는 산 중턱에 위치한다. 적의 침략을 피할 수 있으며 세속과 단절하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수도원들이 신앙만 추구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한때 세속의 한가운데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 때 수도원들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전쟁에 참전했다. 성스러운 심장 속에 국가를 위해 몸 바칠 줄 아는 정열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세속과 홍진의 때를 억지로 떼어내지 말자

 

아기가 태어나면 탯줄은 필요하지 않아 퇴화하게 되는데, 그 탯줄이 떨어지고 남은 자리에 생기는 것이 배꼽이다. 배꼽은 태어나기 전, 생존을 위해서 필요했던 탯줄의 흔적이다. 태어나고 나서는 인체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다. 배꼽에는 피부의 다른 부위와 같이 피부 분비물, 각질의 죽은 세포 등이 뭉쳐서 때가 생기고, 주름이 많은 구조이기 때문에 때가 쌓이기 쉽다. 또한, 주름에 의해서 습한 환경이 조성되어서 세균이 번식하기도 좋은 조건이다.

 

서양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를 ‘문명의 배꼽’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그리스는 과거의 영화를 누렸던 ‘문명의 배꼽’이 아니다. 서양 문명의 발전에 기여했던 역사의 흔적만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잦은 외적의 침략과 내부 분열을 거듭한 문명의 배꼽은 우리가 생각해왔던 ‘우라니아(Urania, 천상)’의 그리스가 아니다. ‘판데모스(Pandemos, 세속)’의 그리스가 있다. 문명의 배꼽 안에는 세속과 홍진의 때가 쌓여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세속의 그리스를 외면해야 되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시골의사의 여행안내자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를 동경하는 우리들에게 말한다. “그리스의 얼굴은 열두번씩이나 글씨를 써넣었다 지워버린 팰림프세스트이다.”(니코스 카잔차키스 <모레아 기행> p 7) 과거에 썼던 글자를 지우고 또다시 새로운 글씨를 쓰는 양피지처럼 지금의 그리스 또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무수히 많은 변화의 역사를 겪었다. 그러한 역사의 지층 속에 ‘우라니아(Urania, 천상)’의 그리스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문명의 배꼽에 남아 있는 세속과 홍진의 때를 억지로 떼어내지 말자. ‘우라니아’의 그리스로 만들기 위해 ‘판데모스’의 그리스를 외면한다는 것은 히마티온에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그리스의 속살을 보지 않는 것만 못 하다. 예민한 문명의 배꼽에 편견의 자극만 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 짜게 본 역사, 간을 친 문화
유승훈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 옛날이여", 화려했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소금

 

이틀 전에 방영된 KBS 2TV '비타민'에서 '나트륨 중독'에 대해서 소개했다. 나트륨, 즉 소금 섭취 과잉은 근래 한국인의 나쁜 생활습관으로 가장 중요하게 지적되고 있는 것 중 하나다. WHO의 하루 소금 권장 섭취량은 2,000mg(5g) 이하다. 반면 2012년 현재 한국인의 1인당 1일 평균 소금 섭취량은 WTO 권장량의 2배를 훨씬 넘는 5000㎎(12.5g) 선인 걸로 나타났다. 짜게 먹는 한국인의 식습관이 주요 질병의 증가 원인이 되고 있다. 소금 섭취량이 늘면 고혈압, 심장병 등 주요 만성질환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소금 섭취를 줄이는 방법 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금에 대한 인식은 딱 두 가지다. 음식에 간을 맞추기 위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조미료. 그리고 반대로 설탕과 마찬가지로 너무 많이 섭취하면 건강에 해로운 조미료. 좋든 나쁘든 간에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소금의 존재는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조미료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소금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지금과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조금은 놀라울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소금은 생존상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금을 얻기 위한 노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다. 본격적으로 정착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신석기 시대의 주거 지역의 특징은 강이나 바다가 근접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이 곳에 정착하게 된 배경을 어획 방법의 발달로 보고 있지만 놀랍게도 이 때부터 고대 사람들은 바다를 통해서 소금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소금이 산출되는 해안, 염호가 있는 장소는 교역의 중심이 되고, 산간에 사는 수렵민이나 내륙의 농경민은 그들이 잡은 짐승이나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기 위하여 소금 산지에 모이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이나 아시아에서도 소금을 얻기 위한 교역로가 발달되었다. 또, 고대 그리스 사람은 소금을 주고 노예를 샀으며 고대 로마의 병사들은 월급으로 소금을 받았다. 그래서 '급여, 월급'을 뜻하는 영어 Salary가 소금의 Salt에서 비롯되었다. 간략하게 이 정도의 역사적 상식만 본다면 과거의 소금은 그저 음식을 위한 조미료가 아니라 경제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또는 재화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소금이 없다면 나라가 발전 못해요, 아~ 미운 소금~~♬"

 

세계사에 영향을 줄 정도로 화려했던 역사라고 해서 우리가 흔하게 보는 소금을 그저 짠 맛의 조미료로만 보지 말지어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렇지 한국사에서도 소금의 존재와 그 영향력은 무시 못한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소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전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염전에서 얻게 되는 소금량에 따라 국가의 발전에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을 주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에도 소금은 그에 동등한 가치를 지닌 생산물과 거래, 교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내륙 지방의 사람들은 소금 맛 보기가 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해안 지방에 위치한 염전업자들 간에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는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렇다보니 염전업자는 최대의 이윤을 얻을 정도로 최고의 직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소금을 부엌에서 볼 수 있는 단순 조미료라기 보다는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경제적 재화 정도로 인식했다. 고려의 시조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위한 재정이 손쉽게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소금의 최대 생산지였던 전남 지역을 점령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고려 말의 충선왕은 '각염법'이라는 소금 전매법을 시행하였다. 국가가 직접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백성들이 소금을 얻기 위해서는 세금의 일종인 '소금세'를 지불한다거나 또는 일종의 생산량을 교환해야만 했다. 소금 생산 및 판매로 벌여들인 소금세와 교환 거래를 통해 국가 재정을 좀 더 수월하게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국가 또는 관리가 염전사업에 관여하다보니 정작 소금이 필요한 백성들이 피해를 얻는 문제점이 속출하게 되었다. '국가 재정'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급하게 찾다보니 소금을 요리에 필요한 조미료라는 아주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용도를 잊고 말았다. 국가가 시행하는 소금 전매법에 관여하는 왕족 또는 권문세족들에게 소금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본의 용도로 보고 있었다. 소금이 권세가들만을 위한 귀한 최상급의 조미료가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고려 정부도 소금을 자신들과 가까운 왕족, 고급관리들에게 분배할 정도였다. 그래서 백성들이 일정 기간 소금세와 생산량을 바쳐도 백성들이 양손 한 가득 소금 담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 원나라의 간섭에 의한 조공을 피하기 위해서 만든 각염법이 아이러니하게도 지배층들의 폐단을 더욱 낳게 만들었으며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어주었다. 고려 말의 소금 전매법의 폐단은 조선 건국 초기까지 이어질 정도로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해나가야 할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었다. 조선 건국의 공신 중의 한 사람인 삼봉 정도전이 태조에게 염법의 문제점을 지적할 정도로 국가 발전에 있어서 소금 개혁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염법 개혁에도 불구하고 '국가 및 왕권 강화를 재정 확보'와 '백성들의 민심 얻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누가 소금을 외면하게 만드는가

 

어떻게 보면 소금은 지금이나 과거나 중요하면서도 백성들에게 불편을 준 양면적인 존재다. 오늘날에는 건강상 해로운 조미료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과거에는 권세가들의 배만 불리게 만드는, 백성의 생활을 괴롭게 만드는 조미료였다. 그러나 역사를 볼 땐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해야 하는 법. 국가 재정 확보에 있어서 농산물과 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소금의 존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조선의 성군 세종은 오랜 기근 생활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들의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한 복지정책의 재원으로 소금을 사용했으며 임진왜란 시기 속에서도 백성들의 식량과 군사들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한 해결 방법을 류성룡은 염전에서 발견했다.

 

자염은 질박한 토기에 바닷물을 담은 뒤에 끓여서 소금을 채취하는 방식이다. 천일염은 갯벌에 바닷물을 가둔 뒤에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을 말려 소금을 얻는 방식이다. 자염이 사라진 이유는 일제 강점기 시절, 산업과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국책 사업에 밀리는 바람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바람과 햇볕에 의해 말리는 천일염의 등장으로 인해 오랜동안 누려온 화려한 역사를 뒤로 한 채 사라졌다. 그러나 천일염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염전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 식생활에서 음식의 간을 조절하는 것은 소금, 간장, 된장 등 소금기가 있는 조미료였다. 우리 여성들은 짠맛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화려했던 '짠맛의 시대'는 가고 '단맛'과 '매운맛'의 시대가 왔다. 짠 음식과 소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널리 퍼지고 있다. 역설적으로 소금을 불필요하게 짜게 만들어 건강을 해치게 한 장본인은 인간이었다. 부엌에 있어야 할 소금을 그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황금'으로만 봤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방대한 역사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들려오는 소금의 화려했던 블루스가 너무나도 짜게만 느껴진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aint236 2012-09-0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곳곳에 소금에 관한 우여곡절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삼국지에도 보면 관우가 하던 일이 소금 밀매업자와 연결되어 있다, 혹은 그의 뒤를 봐주던 사람이다, 혹은 소금 밀매업에 종사하던 사람이다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cyrus 2012-09-03 11:17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알라딘 검색창에 소금이라고 검색하면 꽤 소금의 역사에 관한 책이 많았어요. ^^

아이리시스 2012-09-03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금으로 역사책이 나오는 게 신기하네요. 미시사도 좋아하지만 소금책도 읽는 시루스님이 더 좋아요.
제목 좋네요, 소금 블루스.
예전엔 오롯이 국가사업이었고, 부의 사업이었고, 권력과도 연관이 되어있었던 것 같아요.

cyrus 2012-09-03 15:07   좋아요 0 | URL
예전에 나온 책 제목 중에 슈가 블루스라고 있어요. 설탕이 건강에 유해하다는 사실을 반박하는
일종의 설탕 예찬론에 관한 책이었는데 거기서 따왔어요. 사실 지금 소금도 설탕과 마찬가지로
건강에 유해한 조미료라는 인식이 강하잖아요, 하지만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면 소금의 존재가
얼마나 유용했는지 소개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책 제목에서 따온거에요 ^^
 
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일제 강점기 역사의 트라우마가 만들어 낸 '반일' 감정  

 

 

 

 

 

 

KBS 드라마 '각시탈'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일본을 응징하는 한국판 슈퍼히어로의 대활약을 그려낸 이야기다. 시청자들은 2대 각시탈 이강토(주원 분)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의 악랄한 만행을 제대로 다뤄주길 원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각시탈' 연출 관계자들은 드라마를 애청하는 시청자들 때문에 종종 곤혹을 치뤄야 할 때가 있다. 지난 7월에 모 포털 사이트에서는 ''각시탈' 속 기미가요 장면 논란'을 주제로 네티즌 투표가 실시된 적이 있었다. 7천명이 넘는 네티즌이 참여한 가운데 '연출을 위해 필요한 장면'이라는 대답이 70.6%로 나타났다. 반면 '한국 드라마에서 기미가요는 부적절한 장면'이라는 대답은 29.4%로 집계됐다. 이에 대해 '각시탈' 측 연출 관계자는 "기미가요는 극의 흐름상 꼭 필요했던 장면의 일부였을 뿐 중점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강토는 각시탈로 변신, 일본 형사들을 모조리 제압한다. 통쾌한 복수극에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모두 환호하고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각시탈' 항일정신이 부각되는 시점이면 온라인 반응은 뜨겁기만 하다. 하지만 일본인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될 때는 여지 없이 혹평이 쏟아진다.

 

어제 SNS를 중심으로 경기 고양시 지하철 3호선 화정역 광장의 모양이 일본의 '욱일승천기' 문양을 그대로 닯았다는 논란이 확산되었다. 욱일승천기는 일본 국기인 일장기의 붉은 태양 문양 주변에 붉은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형상화해 만든 것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상징으로 인식돼 있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간 외교 관계가 불화의 국면 상태로 접어들고 있는지라 국민들의 반일(反日)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고 있는 해프닝이다.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지 6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마음 속에는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 드라마 속 기미가요 장면에 대한 시청자들의 예민한 반응 또한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기피감으로부터 비롯된 반일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 찬탈의 원인을 고종과 노론에서 찾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쇠락의 기운이 완연했던 대한제국의 모습 그리고 일제의 식민 통치로 얼룩진 한국의 근대사. 그 당시 우리 민족에게 행했던 일제의 만행만큼이나 한국 근대사 역시 우리가 똑바로 바라보기를 꺼리는 역사이기도 하다. 현재와 가장 가까운 시기지만 고대와 중세보다도 더 멀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제 강점기 역사를 기피하고 자세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친일' 문제만큼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면모를 전혀 보이지 않는 일본정부의 몰염치를 끊임없이 비판, 감시하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역사적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관심이 선결조건이 되어야 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자신이 펴낸『근대를 말하다』에서 친일파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집권했던 일제 강점기 역사를 제대로 성찰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과거와 같은 똑같은 역사적 실수와 비극을 되풀이할 것이라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역사를 성찰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덕일 소장은 조선 망국의 뿌리를 1623년 인조반정 체제로까지 끌어올린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과 그 후예인 노론은 조선을 시대착오적인 사회로 끌고 갔다. 사지선다형이어야 할 외교는 숭명(崇明)이란 이념으로 통일되어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여러 사상 중 하나에 불과한 주자학을 유일사상으로 만들고, 해체되어야 할 신분제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런 상황 속에서 '500년 조선'은 단 30분 만에 이루어진 협상에 의해 멸망되었다.

 

노론 세력의 기득권 유지 속에서도 대한제국이 망국의 길을 걷을 수 있도록 더욱 재촉하게 만든 것은 고종의 리더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고종의 리더십을 둘러싸고 대한제국의 멸망을 이르게 한 무능한 군주인지 아니면 근대화를 앞장서 이끈 개혁을 시도한 군주인지 대해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2010년에 펴낸 『조선 왕을 말하다 2』에서도 이덕일 소장은 고종의 '개혁군주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그의 리더십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듯이 이 책에서도 망국의 결과를 초래한 고종의 오판에 대해 질타한다.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사진 왼쪽에서부터 두번째 인물, 1896년 아관파천)

 

 

 

고종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혜안이 없었다. 그리고 친일파만 득실거릴 뿐, 국제 정세에 해박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 주변에 없었다. 그게 대한제국으로서는 가장 뼈아픈 점이었다. 고종은 개화를 추진하다가도 입헌정치체제가 전제왕권을 조금이라도 저해하면 하루아침에 돌변해 관련 인물들을 제거했다. 갑신정변으로 급진 개화파를 척살했고, 아관파천(약 1년 동안 고종과 왕세자가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서 거처한 사건)으로 온건 개화파를 몰아냈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자는 일본이었다. 외형적으로는 러시아가 강했지만, 국민적인 단결이 이뤄진 일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됐을 때까지도 고종은 러시아의 승리를 믿고 있었다.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되돌려주는 것을 보고 러시아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이 승리한 후, 조선은 일본의 지배권에 놓이게 된다. 이때부터 고종의 이중적인 처신은 극에 달한다. 이미 세계가 대한제국을 일본의 몫으로 인정했음에도 고종은 줄타기 외교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러시아의 영향력은 완전히 소멸됐고, 급기야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조약 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 박제순을 의정대신으로 승진시키고, 학부대신 이완용을 임시 외부대신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고종은 뒤로는 의병들에게 밀서를 내려 나라를 되찾자고 독려했다. 이 같은 이중적인 정치 행보는 조선이 망국의 길을 내달리는 동안 계속됐다.

 

 

 

 

 개나 고양이보다 못했던 조선인들의 삶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총독정치'가 시작되었다. 조선총독은 일왕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조선인에게는 일방적으로 복종만을 강요하는 명령권자였다. 조선에서는 그의 말이 곧 법이었다. 무단통치는 헌병경찰제도에 기반을 두었다. 헌병경찰제도는 군사경찰인 헌병이 보통경찰의 직무를 겸직할 수 있게 한 제도였다. 이것은 헌병으로 하여금 경찰권을 장악하게 한 것이다. 헌병경찰은 곧 총독의 수족이었다. 조선인을 완전무장해제시킨 다음 조선인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탄압하고 규제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에게 일정한 사법관의 특권을 부여하고 태형 제도를 제정, '범죄즉결례'를 공포했다.

 

이 때 무단통치의 시기의 조선인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인간답게 살지 못했다. 불경한 언어와 거동, 일본인들에 대한 욕설 등을 이유로 조선인들은 일본 순사에게 강제로 연행되어 태형을 맞곤 했다. 태형 장면을 목격한 한 독립운동가의 증언을 보게 된다면 일본의 비인륜적 통치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다.

 

 

일본인들이 벌려놓은 형틀과 그 형편(刑鞭, 채찍)은 조선 왕조가 자국민을 징치(懲治)하기 위하여 시행했던 고대의 태형과는 그 성격과 내용이 달랐다. 형판(刑板)에 사람이 엎드리면 음부가 닿는 곳에 구멍을 뚫었으며 두 팔을 십자판에 벌려놓고 두 다리와 허리를 묶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음경(牛陰莖, 소 음경으로 만든 매)은 끝에 납을 달아서 노출된 둔부를 치면 그 납이 살에 파고들어가 피가 흐르고 살이 찢긴다. 매는 1차 80대가 보통이며 중도에 기절하면 회생시켰다가 3일 후에 다시 때린다.

 

 

 

일본은 조선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서 조선의 산업자본을 키우고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제국의회에서 회사설치법안을 통과시키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토지매수에 힘을 기울였다. 비옥한 토지를 강제로 사들여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고 토지에서 생산되어 나온 곡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해나갔다. 일본의 토지 착취 이후로 조선의 자작농들은 가난한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본은 농업 경제만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 경제의 발전을 저해하기도 했다. '회사령'을 공포하여 조선인만 회사를 설립, 운영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기형적인 법령을 제정하기도 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한 민족자본 형성을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의도 하에서 제정되었다. 조선인들에게만 부당하게 대우하는 일제 강점기의 법령들은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일본의 속셈이 뻔히 드러나 있다. 그러면서도 당시 일본 관리들은 조선 회사령의 목적을 '조선 경제계의 발달에 기여하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식민 통치를 한국의 근대화 발전에 기여했다는 근거를 들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오늘날 일본 극우파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다.

 

 

 

 

 항일 정신이 살아 숨쉬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

 

올해 3.1절을 맞아 전국 교교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정신대문제'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의하면 고등학생들의 86%가 '잘 모른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수의 학생들이 정신대문제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응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학생의 67.8%이 정신대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일본 정부에 대한 태도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일본정부의 고의적인 무관심에 대해서도 98%가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한ㆍ일 과거사에 대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역사를 배우고 있는 청소년들이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민족 수난의 아픈 상처들만 기억되는 암울한 시기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으로도 바라볼 수도 있다.

 

지금 일제 강점기 과거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명확하면서도 한정적이다. 친일 청산 문제, 위안부, 독도.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결정적으로 국권을 온전히 일본에게 속절없이 넘겨져야만 했던 무기력한 국력 상태로 유지되어 온 일제 강점기 때부터 불거진 민감한 사안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아픈 과거사인데도 역사를 배우고 있는 청소년들 심지어 학창 시절 역사를 배웠던 한국의 성인들마저도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역사를 잘 모르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인으로서 기억하기 싫은 우울한 역사라고 해서 그것을 외면하는 인식이다.

   

과거사를 교과서 공부하듯이, 오직 '친일 청산, 위안부, 독도' 프레임으로만 보는 단순하고 획일적인 역사적 시각과 인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항일무장투쟁은 을사늑약, 한일합방 이전 근대에서 발생했던 의병 활동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1920년대 초반이 절정기였다. 나라를 팔아먹은 왕족과 지배층은 일제에서 주는 합방공로작과 은사금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반면에 일가족을 이끌고 북풍이 휘몰아치는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나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회영과 이시형은 전 재산을 정리해 마련한 광복 자금을 갖고 6형제 일가족 60여명을 이끌고 망명길에 나섰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은 국권을 상실한 이미 죽은 나라나 다름 없었지만 여전히 항일 정신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이렇듯 나라의 패망 시기에 엇갈린 판단으로 자신의 길을 찾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삶과 활동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매해 광복절 즈음에는 일본 군경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한 생존 유공자들이 쓸쓸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이들은 정부에서 주는 적은 생계비에 의지해서 고령과 병마와 싸우며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운 항일·독립유공자들이 국가로부터 정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자 시대의 아이러니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항일'(抗日)의 사전적 의미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움'이라는 뜻이다. '반일'(反日)은 '일본에 반대함 또는 일본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실 '항일'과 '반일'의 사전적 의미만 본다고해서 양자의 의미가 서로 명확하게 구분되어지는 건 아니다. 어찌 보면 '항일'과 '반일'의 개념은 서로 비슷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과거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을 반대하는 인식 및 정서를 과연 '항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반일'의 의미에 가깝다. 우리가 드라마 속에 흘러나오는 기미가요나 욱일승천기와 비슷한 이미지의 대상만 가지고 분노하는 것은 그저 역사 인식이 결여되고 과거사에 대한 불편한 기억 속에서 비롯된 '반일' 감정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정말 과거사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의해서 망국의 길을 걷게 된 역사적 원인 및 배경을 알고 있어야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망국의 책임을 고종과 노론에게만 씌울 수는 없다. 조선이 망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당시 국제적 정세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이다.

 

과거사, 즉 일제 강점기의 근대사는 단지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말끔히 지워낼 수 있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우리의 역사는 함께 지키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또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세울 수 있도록 정부뿐만 아니라 대중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8-23 18: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3 2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3 2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3 22: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8-24 1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예루살렘 전기 - 축복과 저주가 동시에 존재하는 그 땅의 역사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지음, 유달승 옮김 / 시공사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도시는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고, 또다시 파괴되었다가 재건되었다. 예루살렘은 죽은 연인을 끌어안고 놓지 않는 늙은 성중독자처럼, 관계하는 동안 자신의 짝을 삼켜버리는 흑거미처럼 손에서 놓을 수 없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 아모스 오즈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중에서 (사이먼 시백 몬티피오리 『예루살렘 전기』p 35 재인용) -

 

 

 

 

 

 

 해답 없는 국제적 난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

 

국제 사회엔 난제가 수두룩하지만 그 중에서도 해결이 가장 어려운 것을 꼽는다면 단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다. ㅣ지난해, 9.11 테러의 주모자인 오사마 빈 라덴의 제거로 자신감을 얻은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양측의 국경선 획정을 '1967년 이전으로 돌릴 것'을 주창하고 나섰다. 여기서 '1967년 이전'이란 1967년에 발생했던 이스라엘 대 아랍권 국가들(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간의 제3차 중동전쟁 이전을 말하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은 개전 초 아랍 국가들의 공군기지를 무력화시켜 제공권을 장악한 뒤 지상전에서도 승전을 거듭하기에 이른다. 개전 4일 만에 시나이 반도, 요르단 강 서안지구, 가자 지구 등을 점령했다. 아랍 국가들은 결국 전쟁 시작 엿새 만에 요충지를 점령당하고 UN이 제안한 정전협정안을 받아들인다. 이후 2만 7000㎢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의 영토는 단 6일 만에 6만 8000㎢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오바마의 언급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문제 중에서 금기 사항이나 다름 없다. 특히 전쟁을 통해서 이득을 봤던 이스라엘의 반발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러자 오바마는 며칠도 못 가 자신이 거론한 문제에 대해서 한 발 물러섰다. 공식 석상에서 그는 자신의 '1967년 전 국경선 회귀' 발언은 국경선을 근거로 협상해야 한다는 뜻에서 말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은 반세기 이상이나 지속되면서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중동 평화를 위한 협정 문제는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으나 일부 아랍권 국가들과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PLO)의 심한 반발로 해결되지 못한 채 겉돌고 있다. 사실 문제가 풀기 어려운 것은 양측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기 때문이다. 

 

 

 

 

 단 3문장으로 이루어진 한 장의 선언문이 가져온 중동의 혼란
 
그 동안 유태인들은 2천년 동안 고국을 떠나 전 세계를 방황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핍박의 슬픈 역사를 안은 채 떠돌던 유대인들은 민족주의 '시오니즘'의 기치 아래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아랍 민족들이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몰려들어 이스라엘을 건국했다.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과 모두 4차례의 중동 전쟁을 치렀고, 이스라엘은 힘겹게 나라를 지켜왔다. 특히 1967년 3차 중동전쟁 승리 후 영토가 비약적으로 확대됐다. 이 때문에 '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위해 67년 경계 이전으로 국경선을 되돌릴 수 없다'는 게 이스라엘의 입장이며 오마바의 발언에 크게 민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벨푸어 선언이 명시된 서류 원본

 

 

하지만 원래 살던 땅에 살게 해 달라는 팔레스타인들의 주장도 절박하고 정당하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아주 오래된 기원전 시대부터 이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말 오스만제국 붕괴로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영국은 아랍인들의 염원을 진전시키겠다는 약속을 했었다. 그러나 1917년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국가를 세우겠다는 벨푸어 선언을 하게 되고 1947년 유엔 총회에서 유대국과 아랍국 영토 분할 승인을 주도하게 되는 영향을 주게 된다. 시들어가는 시오니즘 운동에 고민하던 유대인들은 환호했지만 이 선언문 한 장으로 인해 테러가 테러를 낳는 중동의 불행은 커지게 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 수천년 간 터를 잡고 살아온 아랍 민족은 뒤늦게 벨푸어 선언을 전해 듣고 배신감에 떨 수 밖에 없었다.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모두가 탐낸 '성전' 예루살렘

 

역사가들은 중동 분쟁의 신호탄을 벨푸어 선언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지만 사실 중동은 그 전부터 오랫동안 수많은 내전으로 인해 몸살을 앓았으며 무고한 중동의 사람들은 시퍼런 칼과 무시무시한 총탄 앞에서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다. 특히 중동 내전의 중심에는 바로 '예루살렘'이 있었다. 예루살렘은 역사적으로 담당하는 종교적 상징성을 지닌 동시에 거듭된 파괴와 재생의 순간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고대 로마인들에게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다면, 기독교인들에게 모든 길은 '예루살렘'으로 통한다. 구약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다윗 왕 이후 이 성은 이스라엘 민족의 중심지였고,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곳이 바로 이 예루살렘이었다. 예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고 복음을 처음 전파한 곳도 예루살렘이었다. 하지만 '성전' 예루살렘의 역사는 기독교인들만의 역사가 아니었다. 예루살렘은 유대교와 이슬람 근본주의에게도 '위대한 성지'였고, 문명이 충돌하는 전략적인 전장이자 무신론과 신앙이 부딪치는 최전선의 지역이었다. 그랬기에 이 도시는 많은 세월동안 뺏고 뺏기는 전쟁터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군침을 흘렸으며, 더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런데 예루살렘을 묘사한 옛 문헌 기록이나 오늘날 예루살렘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왜 그토록 수천년동안 예루살렘 하나를 둘러싸고 피 튀기는 혈투를 벌였는지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성스러운 도시', '성지', '성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예루살렘를 생각한다면 사람들이 살기 좋은 땅 위에 세워진 훌륭한 도시라고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예루살렘은 경제학적이나 입지조건적인 관점에서 볼 때 그리 매력적이진 않다. 지중해 해변의 무역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물도 부족하고 여름에는 태양이 작열하며 겨울에는 바람이 살을 에일 정도로 춥다. 게다가 그 곳에 위치하고 있는 돌산들은 험하기로 악명 높아 생활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완벽한 도시의 조건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데 왜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는 이렇게 피를 흘려야하는 전쟁을 치뤄면서까지 별 볼 일 없는 예루살렘을 차지하려고 했을까?

 

 

 

 

 

일리야 레핀 「폐허가 된 예루살렘에서 우는 선지자 예레미야」 1870년

 

 

 

이유는 간단하다. 이들에게는 예루살렘은 '성전', 즉 성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인들은 이 성스러운 예루살렘을 통해 자신들만의 신성(神聖)을 부여하고 싶었고 점점 예루살렘을 신성화시키기에 이르게 된다. 예루살렘이 '성스러운 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의 신성이 무수히 만들어 낸 신화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예루살렘이 '거룩함의 원형'이 된 것이 기독교인들에게는 다윗 왕이 지은 성전과 그의 아들 솔로몬 왕이 세운 지성소 때문이다. 하지면 역설적이게도 고대 바빌로니아의 왕 네부카드네자르(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파괴가 예루살렘의 신성화에 영향을 준 역사적 사건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이 점령한 예루살렘에 유다 왕국의 왕 시드기야를 왕좌에 앉혔다. 하지만 시드기야는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을 방문하고 난 후,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반역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당시 바빌로니아가 예루살렘을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의 예언을 한 예레미야에게 붙잡히고 마는 신세가 된다. 공포와 망상으로 가득한 채 무방비 상태의 예루살렘은 결국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네부카드네자르에 의해 무참히 파괴되고 만다. 바빌로니아 인들에게 파괴된 예루사렘은 그야말로 생지옥이나 다름 없었다.

 

 

예루살렘은 멸망한 도시들이 겪는 지옥 같은 약탈을 경험했다. 죽임당한 사람들이 살아남은 사람들보다 운이 좋았다.  "굶주림 끝에 신열로 저희 살갗을 불가마처럼 달아올랐습니다. 시온(예루살렘 내에 위치한 작은 언덕, 유대인들의 삶의 터전)에서 여인들이 겁탈을 당했습니다. 저들의 손에 고관들이 매달려 죽었습니다."    (p 101)

 

 

 

성전이 파괴되는 대재앙을 겪고 포로가 되어 바빌론으로 강제로 끌려간 유대인들이(이를 '바빌론 유수'라고 한다) 자신들의 화려했던 영화만큼은 잊지 않기 위해서 '시온의 영광'을 기록하고 호소했는데, 유대인들은 끝까지 살아남아 이를 '전설'로 만들게 되었다. 유대인들의 영화만큼이나 예루살렘 또한 '성전'으로서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은 수많은 군주와 영웅들마저 영토 확장의 목표물로서 탐내는 곳이 되었고 성경에 나오는 평화와 환희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알렉산더 대왕에서부터 수많은 십자군, 이슬람의 살라딘과 심지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까지 예루살렘에 눈독을 들였다.

 

 

 

 

 학살과 약탈이 멈추지 않았던 '저주받은' 예루살렘

 

유대인 출신의 역사가 사이먼 시벡 몬티피오리의 『예루살렘 전기』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탄생에서부터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을 있게 한 1967년 6일 중동 전쟁까지 예루살렘과 관련된 모든 인류의 방대한 역사를 책 한 권에 담고 있다. 예루살렘의 역사를 독자들이 예루살렘과 관련된 수많은 당사자들의 각각의 입장에서 볼 수 있도록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잡힌 역사적 관점으로 서술하고 있다.

 

방대한 예루살렘의 역사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의 매력이지만 학살과 약탈이 만연된 끔찍하기 짝이 없는 파괴의 역사를 일부 독자들에게는 거북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 책의 서막은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의 아들 티투스의 예루살렘 공격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일단 첫 내용부터 '전쟁' 이야기다. 예루살렘을 침략한 로마 군뿐만 아니라 혼란의 '멘붕 상태'에 이르게 된 예루살렘 내부에서 유대인 군벌들이 자행했던 학살의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은 인간의 폭력성이 실로 무시무시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성벽 주변에는 생지옥 같은 끔찍한 장면들이 펼쳐져 있었다. 수천 구의 시체들이 햇빛 아래 썩고 있었다. 악취는 견디기 힘든 정도였다. 개와 자칼 떼가 인육으로 만찬을 벌였다. 지난 몇 달간 티투스는 모든 죄수나 탈주자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명령했다. 500명의 유대인이 매일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도시 주변의 올리브 산과 바위산은 십자가로 빼곡히 들어차 더 이상 십자가를 꽂을 공간 공간도 없었고, 만들 나무도 없었다. 티투스의 군인들은 희생자들의 사지를 기괴한 자세로 벌린 채 묶어져 못질하는 것을 스스로 오락으로 삼았다.   (p 36)

 

네로 이후 세 명의 로마 황제가 잇따라 등장하면서 혼란스러운 권력승계가 나타났다.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라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향해 행진하고 있을 당시, 이 도시는 세 개의 군벌에 의해 분열되어 전쟁을 벌이는 중이었다. 유대인 군벌들은 가장 먼저 성전 마당을 피로 물들이는 전투를 벌였고 도시를 약탈했다. 그들의 전사들은 부유한 이웃과 협력하면서 가정집을 약탈하고, 남성을 죽이고, 여성을 희롱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단지 오락거리였다."   (중략)   "용납할 수 없는 더러움"에 넘어간 예루살렘은 매음굴이자 고문실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여전히 성지였다.  (p 37)

 

 

 

로마의 티누스 침략 이후부터 예루살렘은 '성전'이라는 이유만으로 내전의 고통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 영역이 되기도 했다. 카이사르와 함께 한 삼두정치로 인해 분할된 권력을 만족하지 못했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자신들의 탐욕을 예루살렘에 뻗치기도 했다. 폼페이우스는 솔로몬 왕의 신성한 업적이 남아있는 지성소 안을 들여다보기 위해서 마음대로 그 곳을 드나들었고 크라수스는 예루살렘 습격을 통해 유대인들에게 성스러운 보물들을 약탈해갔다. 약탈한 보물들은 전쟁자금으로 확보하는 데 쓰였다.

 

 

 

 

에밀 시뇰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의 예루살렘 탈환」 1847년

 

 

1096년부터 시작해서 12세기 말까지 이어져 온 십자군 전쟁은 예루살렘에게 파괴로 인한 상처와 고통을 안겨주었다. 봉건영주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 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폐쇄적인 억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게 되었는데 이는 탐욕의 절정이 만들어 낸 잔인하면서도 오랫동안 이어져 온 피 비린내나는 전쟁이었다. 원정단들은 자신들을 예수로부터 보호받는 '순례자들'이라고 스스로 칭하면서 예수의 이름 아래 유대인들과 무슬림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안과 밖을 막론하고 성벽 주위에선 사라센(중세의 유럽인들의 이슬람교도를 부르던 호칭)들의 썩어가는 시체에서 어찌나 악취가 나던지, 시체들은 학살당한 곳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p 363)

 

 

 

 

 

 인류의 죄악이 만들어 낸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흑거미'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란 본래 뜻과는 다르게 단 한 순간도 지속적으로 평화를 누린 적이 없으며 파괴와 재건을 수없이 반복해왔다. 그마나 고대 페르시아의 키루스 2세가 바빌로니아를 정복함으로써 추방된 유대인들을 해방시킨 역사를 제외하고는 신의 축복보다는 잊고 싶은 저주가 많이 기억되는 곳이다. 예루살렘은 이제 중동의 화약고이며, 서구 세속주의와 이슬람 근본주의 사이의 전쟁터가 되었다. 상황은 달랐지만 과거 티투스, 네부카드네자르, 십자군 전쟁 시기와 같이 여전히 복잡하고 미묘하며 긴장의 연속 상태가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성서 속에서만 성스럽게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가 되고 말았다. 과연 예루살렘에 평화라는 것이 도래할 것인지, 몇십 년 후에도 예루살렘이 존재할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오로지 핏빛의 미래만 보일 뿐이다.

 

이스라엘의 소설가 아모스 오즈는 현재의 예루살렘을 파괴를 자초하는 마력을 지닌 흑거미라고 표현했다. 그의 표현 속에는 예루살렘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압축하고 있다. 그러나 과거에 일어났으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중동의 분쟁을 예루살렘에게만 죄를 가중하는 건 못마땅하다. 평범한 흑거미를 '신성한 아름다움'이라는 착각에 눈이 멀어 그것을 가지기 위해서 다툼을 마다하지 않은 우리 인류 또한 피비린내 나는 역사의 공범자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기억해야 한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노이에자이트 2012-08-08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벨푸어 선언 바빌론 유수 로마제국 십자군 육일전쟁...격동의 역사죠.

옥의 티...아모스 오즈는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cyrus 2012-08-12 21:40   좋아요 0 | URL
두꺼운 분량이라서 처음에는 읽기 시작하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중동 갈등의 역사에 대해서
깊이 알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오타 지적하신 점, 감사합니다. 5일동안 여름휴가 보내느라
방금 수정했습니다. ^^

2012-09-01 0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