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
주명철 지음 / 소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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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 혁명, 제대로 알고 있을까?

 

<레 미제라블>은 우리말로 ‘불쌍한 사람들’이란 뜻이다. 집필 당시 제목은 ‘레 미제레(Les Miseres, 비참함)’였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역사 수레바퀴에 깔린 인간 군상들을 세세히 그려낸 대서사시다. 노도와 같은 역사 속에 개인의 삶은 휩쓸려갔지만 ‘인간애만이 유일한 희망’이라는 사상이 작품을 관통한다. 대선의 열기가 남아 있는 불씨가 사라지지 않을 무렵에 동명 원작의 뮤지컬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 영화가 2012년 대선에서 야권 후보에게 표를 준 시민들에게 일종의 ‘힐링 무비’로 소비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점들이 있다. 이러한 주장의 바탕에는 이 영화가 2012년의 대선에서 야권을 지지했던 48%의 유권자들이 느낀 상실과 좌절감에 위안이 되기에 적절하다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에는 수많은 고통과 좌절이 점철되어 있다. 사회의 진보에는 수많은 퇴행과 반동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지금 이 현실에서의 실패와 좌절의 상처는 충분히 딛고 일어설 수 있을 것이라는 위안. 특히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함께 부르는 노래 '민중의 노랫소리가 들리는가(Do you hear the people sing)'는 “오늘 우리가 죽으면 다른 이들이 일어서리. 이 땅에 자유가 찾아올 때까지”라는 가사와 합창의 장엄한 감동으로의 어우러진다. 이러한 시각이 나름의 근거를 연상케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힐링'이란 말 그대로 몸이나 마음의 상처를 회복 또는 치유한다는 말이다. 즉 '힐링'은 이미 상처와 아픔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그런데 상처와 아픔의 원인과 정도, 위치 그리고 그것의 진행과 현실적 구성은 온데간데없고 치유된 상태, 회복된 상태, 건강한 정상만을 이야기한다면 그것에 가장 근접한 용어는 '힐링'이 아니라 '환상'이다. 환상은 보이는 현실에 눈을 감아 버리고 가상의 실재에 주체를 옮겨버리는 일이다. 그래서 환상은 끊임없이 새로운 환상을 만들어 내야만 작동한다. 이러한 환상의 연쇄 고리를 끊어내는 것은 철저한 자기인식과 반성이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힐링'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우리는 프랑스 혁명을 제대로 안다고 볼 수 없다. 역사적 사건 속에 피어난 로맨스에 치우친 뮤지컬 영화만으로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진의와 교훈을 되짚어 보기에는 부족하다. 사실 <레 미제라블>은 1830년 7월 혁명과 1848년 2월 혁명 이전 격랑의 시기를 주요 무대로 한다. 프랑스 혁명의 유산이 남아 있긴 하지만 장기간의 격변으로 이루어진 사건의 스케일을 생각한다면 영화에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그려진 그 ‘프랑스 혁명’을 기억하고 있다면 이것 또한 당찮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역사적 담론을 우리 사회나 개인의 사회적 삶에 대한 차분한 분석이나 이론적 검토를 통해서 형성되어온 적은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언어들은 방송과 상업적 광고를 통해서 제시되고 유통이 되며 이것이 마치 시대의 정신이나 사회문화적 담론이나 되는 양 재생산될 뿐이다.

 

혁명에 의한 반동과 좌절을 상징하는 장면이 연출된다고 하더라도 결국 영화의 결말, 즉 이미 알고 있는 혁명의 결과만 우리는 기억하게 된다. 학창 시절 프랑스 혁명을 공부하게 되면 세부적인 과정보다는 혁명의 결과 및 의미만 달달 외워서 기억하듯이.

 

 

 

 ♣ 사회가 곯고 있는 사이에 피어난 혁명의 작은 불씨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전부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까지 무엇이었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시에예스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28쪽)

 

 

 

'태양왕' 루이 14세의 무리한 대외 전쟁으로 프랑스의 경제는 상승세가 꺾였다. 루이 15세는 영국과 전쟁을 하다 북미와 인도 식민지를 전부 상실하는 참담한 패배를 당하면서 경제 문제는 회복 불능으로 치달았다. 사실 이 때부터 프랑스 혁명이 일으킬 조짐이 일어났다고 보면 된다. 경제 불능 속에서도 소수의 귀족은 재산을 불렸고, 상당수 가난한 평민들은 굶주림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미 조금씩 불만의 불씨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거기에 기름을 부었던 결정적 시기가 바로 루이 16세 시절이다. 루이 16세 때 미국독립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는 영국에 북미 식민지를 모두 빼앗겼던 복수를 하기 위해 미국을 전심전력으로 원조했다. 재무대신 네케르는 이대로 가면 프랑스는 파산한다고 경고하였으나 그는 되레 해임되었다.

 

그러나 네케르의 예언은 적중했다. 그의 말대로 국고가 비어버리고 만 것이다. 궁지에 몰린 루이 16세는 재정문제 해결을 위해 삼부회를 소집한다. 여기서 ‘삼부회’는 일본 말을 그대로 빌려 쓴 말이라 우리나라 말로 순화한다면 ‘전국 신분회’로 쓰는 것이 낫다. 전국 신분회는 제1신분(성직자), 제2신분(귀족), 제3신분(평민)으로 구성되어 있다.

 

민중들은 왕이 전국 신분회를 통해 자신들의 고초를 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를 건다. 하지만 국왕은 대놓고 제3신분을 차별했다. 복장은 물론이고 개별적으로 국왕을 알현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전국 신분회는 민중들의 고초를 다독이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제1신분, 제2신분, 제3신분이 모두 같은 수인데 제1신분과 제2신분은 이해관계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평민 출신 재무 장관 네케르는 제3신분 의원 수를 두 배로 늘릴 것을 요청한다. 왕은 제3신분에게 세금을 부담시키기 위해 그 요청을 들어준다. 그러나 부회별 투표 방식을 머릿수 투표 방식으로 바꾸는 것은 허용하지 않고 전국 신분회가 심의하는 것으로 넘긴다.

 

 

 

 

 

자크 루이 다비드  『죄드폼의 맹세』1791년

 

 

결국 제3신분은 ‘국민의회’를 선언한다. 놀란 귀족들이 회의장을 폐쇄하자 죄드폼(Jeu de Paume)에 모여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결코 해산하지 않겠다’고 서약한다. 이게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다. 죄드폼이란 테니스의 일종으로 그 놀이를 할 수 있는 실내 체육관이다.

 

1789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몰려나와 테니스 코트에 집결한 격앙된 표정의 사람들. 프랑스 대혁명의 불씨를 댕긴 죄드폼에서의 서약은 당대 화가 자크 루이 다비드의 붓을 타고 1791년 화폭으로 옮겨왔다. 혁명, 그때 그 순간의 열기를 생생하게 포착해낸 작품이다.

 

루이 16세는 독일과 스위스 용병을 파리에 배치하면서 국민의회를 압박한다. 이런 상황에서 파리 민중들은 분노한다. 독일 용병과의 충돌을 계기로 시민들은 무기의 필요성을 느끼고 바스티유로 향한다.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낸 전투 끝에 바스티유는 함락된다. 봉건제가 폐지되고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관한 선언’이 발표된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여전히 ‘프랑스 혁명’을 인정하지 않았다. 베르사유 궁에서 플랑드르 연대가 혁명의 상징인 삼색모장을 짓밟자 파리의 부녀자들이 베르사유로 행진한다. 국왕이 파리 부녀자들의 포로가 되면서 프랑스 혁명은 1막을 내린다.

 

 

 

 ♣ 왕의 광장에서 혁명 광장으로

 

 

 

 

 

 

'화합의 광장'이라 이름붙인 콩코드르 광장. 1753년에서 1763년에 걸쳐 건축된 이 광장은 당시 ‘루이 15세 광장’이라 이름이 붙여졌지만 국왕 루이 16세의 폭압에 시달리던 프랑스 전 민중이 들고 일어났던 프랑스혁명 당시에는 '혁명광장'이라고 불려졌다. 루이 15세의 동상을 무너뜨리고 목을 자르는 단두대가 그 자리에 설치됐다.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의 목을 프랑스 민중들은 잘라버렸다. 몸뚱어리와 '모가지'를 이등분으로 분리 즉사시킨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는 삼색기를 쳐든 프랑스 민중들은 '프랑스 만세'를 불렀다. 프랑스 민중 개개인의 존엄성과 동등한 인간의 권리를 선언했다는 점에서 루이 16세의 목을 자른 민중들의 역사행위는 신분제의 철폐와 프랑스 국가공화정치의 시작이다. 그리고 그 몇 해 전인 1789년 7월 14일 정치범이 수용되었던 바스티유 감옥을 파괴한 그 날은 혁명 기념일이 되었고 이 날이 바로 프랑스 국경일이다.

 

프랑스 민중들의 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난 루이 16세가 가족들과 함께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다가 국경 근처에서 발각되어 시민군들에 의해 파리로 이송된다. 프랑스인들은 자국민들을 외면하고 적국의 나라로 피신하려던 사람을 자기들의 입헌군주든 절대군주로든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당연히 루이 16세의 모가지는 단두대에 베어져 땅바닥에 떨어졌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은 '앙시앵 레짐(구체제, Ancien Regime)'을 지키려는 특권계층의 기득권에 대한 '향수병' 때문이었다. 구체제 특권층의 기득권에 대한 강한 집착으로 인한 조세개혁의 실패는 국가 재정난을 해결할 수 없는 지경까지 내몰았다. 결과적으로 혁명의 불길을 당기는 결정적 씨앗을 제공했다. 특권층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봉건적 신분제와 영주제 폐지, 귀족과 평민의 공평한 과세 등을 담은 '인권선언'을 채택하며 안간힘을 썼지만 혁명의 불길을 잡기에는 이미 늦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스트리아로 도망치려던 국왕 루이 16세와 구체제의 사수를 위해 기를 썼던 대부분의 특권층은 결국 단두대 올라 목이 잘렸다. 공포정치의 시대가 지나고 나폴레옹 정권이 수립되면서 혁명은 끝났다.

 

어느 시대나 '개혁'을 두려워하는 계층은 있기 마련이다. 보수층이라고 일컬어지는 반 개혁론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구체제나 다름없는 기득권을 고수하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역사는 말한다. 기득권에 대한 지나친 집착의 말로는 '몰락'의 다른 이름이라고. 그래서 역사가는 역사의 결과만 보려고 하지 않는다. 구체제의 모든 면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체에 큰 변혁을 일으킨 전체 모든 과정을 본다. ‘프랑스 혁명이 낳은 구체제가 아니라, 프랑스 혁명을 낳은 구체제를 이해해야 한다.’(36쪽)

 

 

 

 ♣ 너란 '혁명'을 알고 싶어 Hello~

 

18세기 프랑스 대혁명 시대, 찰스 디킨스는 이 시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최고의 시대이자 최악의 시대였다. 지혜의 시대였으며 어리석음의 시대이기도 했다. 믿음과 불신이 교차했으며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시대였다. 희망의 봄인 동시에 절망의 겨울이었다.”

 

한쪽으로만 치닫는 극단은 혁명기나 혼란기에도 통용됐다. 몽테유파가 공포정치를 통해 반대 세력을 단두대로 보낸 것도 그만큼 사회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구체제 특권계층을 벌벌 떨게 하던 혁명의 '공포'는 프랑스 내부와 외부의 '적들'을 제압하는 데 무시무시한 위력으로 변질된다.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는 뜨거운 열정으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공포 정치와 독재, 살육이라는 광기에 휩싸였다. 흑백으로만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혁명의 진원지에서도 존재했다. 하나의 색으로만 상대방의 죽음으로 몰아가려는 시대착오적 발상 말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혁명의 로맨스 뒤에는 기억하기 싫은 어둠의 이면이 가려져 있다. 그렇다고 프랑스 혁명의 역사적 가치를 폄하할 정도로 먼 나라 이야기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극단과 광기의 이면에 의한 역사의 결과를 제대로 볼 수 있어야 어리석음의 시대, 최악의 시대를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제대로 된 역사를 보고 싶다면 낭만적인 혁명의 로맨스와 결별해야 된다. 영화와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정의의 승리나, 역사의 발전과 같은 판에 박은 당위가 아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인간 하나 하나의 삶과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정의나 혁명의 승리의 수준을 뛰어넘는 인간의 평생을 다하는 자기반성과 성찰을 통해서 얻어지는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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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젠의 로마사 1 - 로마 왕정의 철폐까지 몸젠의 로마사 1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김동훈.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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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벨 문학상을 받은 역사책, 몸젠의 로마사

 

로마제국의 역사를 다룬 책은 수도 없이 많다. 그래서 로마 시대를 읽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로마의 탄생과 멸망을 시오노 나나미식의 대작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핵심적인 내용만 추린 한 권으로도 끝낼 수 있다. 또 아무데나 손 가는 대로 펼쳐 로마 시대의 미시사를 가볍게 읽는 책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진정한 로마사 고전을 읽지 않은 채 로마 역사에 능통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권 참고 문헌 목록을 본 적이 있는가.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할 때 사용한 2차 사료 중 하나가 테오도르 몸젠(1817~1903)의

 

 

 

 로마는 영웅 전설부터 시작하지 않았다

 

 

책은 로마 역사를 '신화'로 바라보던 기존 시각에서 벗어나 고대 로마인의 삶과 로마의 흥망성쇠를 실증적으로 연구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서 저자는 로마의 역사가 아니라 이탈리아의 역사를 다룬다고 말한다. 이탈리아 반도에 살던 전체 민족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되는 과정뿐만 아니라 민족과 언어의 원류를 세밀하게 소개하고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1권은 로마 건국의 신화 로물루스와 레무스 이야기로 독자를 로마의 세계로 초대한다. 하지만 몸젠의 책은 다르다. 이탈리아 초기 민족이 반도에 정착되는 사실부터 시작한다.

 

 

로마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다. 2천 700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역사가 한 곳에 압축돼 있다. 로마를 본다는 것은 그 안에 응축된 역사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건국 설화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가 팔라티노 언덕을 중심지로 정하고 암소와 황소에 쟁기를 달고 사각형의 경계선을 그어 로마가 탄생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몸젠이 수집한 연구 성과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기원전 753년 이전에도 고대 이탈리아 민족은 조직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탈리아 민족은 크게 라티움 지방 종족과 움브리아 종족으로 나뉘는데 초기에는 유목 생활을 하다가 이탈루스 왕에 의해서 농경 생활로 전환하게 된다. 이탈루스 왕은 이탈리아 초기 법 제정에도 깊이 관여할 정도로 이탈리아 역사의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몸젠의 실증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진정한 로마 건국의 시초는 이탈루스인 것이다.

 

 

 

 2천 년 묵은 민족적 통일의 씨앗

 

이탈리아의 역사는 로마 제국 분열 이후 동, 서로마로 분열되다가 중세에 들어서 밀라노, 베네치아, 나폴리 같은 도시국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도시국가의 전성기가 지난 후에도 여전히 이탈리아는 작은 왕국들을 통틀어 부르는 하나의 집합체 이름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이탈리아 민족주의 부흥에 힘입어 가리발디가 이탈리아 통일을 달성하게 된다. 간추린 이탈리아의 역사를 살펴보게 되면 이탈리아인들이 ‘민족’으로서의 동질성 인식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굵직굵직한 역사의 근간만으로 역사 속 민족의 특징을 규정하면 곤란하다. 이탈리아가 분열과 갈등을 거듭하는 '콩가루' 나라가 아니다.  

 

 

민족적 동질성을 정치 영역보다는 놀이와 예술에서만 드러내는 희랍인과 다르게 이탈리아 인은 이미 자기통제에 기초한 민족의식을 형성하고 있었다. 라티움 평야에 있는 작은 부락들은 독립된 주권을 가질 정도로 통치자가 다스리는 공동체로 발전했다. 그러면서도 ‘연맹체’라는 공동체 의식은 남아 있었다. 몸젠은 씨족 부락의 라티움 연맹 공동체의 등장에 대해 지역 분리주의를 극복할 수 있었으며 민족적 유대감을 고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민족적 통일의 꽃은 가리발디가 활동하던 19세기에 늦게 피었을 뿐 종자는 이미 고대에 형성되었고 발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2천 년 묵은 연꽃 종자가 조그만 새싹을 틔우듯이 그렇게 ‘로마 민족’은 탄생했다.

 

 

 

 

 실증주의 역사의 대부(代父)

 

몸젠의 역사 서술 방식은 역사적 증거물을 제시해서 실증적이면서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그의 역사에는 ‘가정(假定)’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나긴 세월의 풍파에 파묻혀 역사가의 기억 속에 사라질 뻔한 역사적 문헌을 분석하는데도 몸젠은 주관적인 해석을 지양한다. 프랑스 출신의 화가 쿠르베는 “나는 보이지 않는 천사를 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을 실제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사실주의적 회회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이다. 몸젠은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으며 증명 불가능한 신화를 역사로 서술하지 않았다. 그는 신화를 ‘스스로 역사이기를 희망하지만 훌륭할 것 없는 단순한 설명’이라고 정의한다. 자신 즉, 역사가가 사료를 충분히 검토해서 설명될 수 있는 내용을 진짜 ‘역사’라고 인식했다. 몸젠의 로마사는 실증주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기 시작한 시대에 쓴 책이다. 간혹 전체적인 틀을 보는 거시사적 관점을 옹호하고 개인의 행위, 사유, 문학 등을 역사의 대상으로 제외해야 한다는 역사관을 드러나는 내용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역사관은 사망할 때까지 인생의 절반을 로마사 개정에 몸 바친 탐구 정신을 생각해서 애교로 봐주자.(몸젠이 최종적으로 개정 증보한 로마사는 그가 죽은 후 1904년에 출판되었으나 끝내 미완성으로 남겨지고 말았다) 소설에 가까울 정도로 자신의 목소리를 강하게 내세우는 일본인이 쓴 로마사와 비교하면 몸젠의 로마사는 인문학적 가치가 훨씬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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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배꼽, 그리스 - 인간의 탁월함, 그 근원을 찾아서 박경철 그리스 기행 1
박경철 지음 / 리더스북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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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화’의 히마티온을 벗은 그리스의 속살 보기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외국영화를 보게 되면 남녀 모두 하얀 천을 온몸에 두르는 형태로 옷을 입는 것을 볼 수 있다. 복장의 이름은 히마티온(himation). 고대 그리스 남녀 모두 착용한 전통 의상 중의 하나이다. 고대 로마인들의 복장과 비슷해서 똑같이 히마티온을 입을 거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식과 형태에서 히마티온과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명칭도 다르다. 고대 로마인의 전통 의상은 토가(toga)라고 부른다.

 

예전에 ‘그리스’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뜨거운 태양 햇살을 듬뿍 받은 채 자라는 올리브 나무, 히마티온을 입은 고대 그리스인들 그리고 옛날 그들이 숭배했던 올림포스의 신들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 그리스 로마 신화가 독서의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천상에 떠돌던 신들의 이야기를 故 이윤기 선생은 전령의 신 헤르메스가 되어 상상력이 메마른 우리나라의 땅에 안착시켰다. 이때부터 우리에게 그리스는 변방의 유럽 국가가 아닌 ‘신화의 나라’로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리스가 ‘신화의 나라’라고 해서 그곳 사람들이 고대인들처럼 히마티온을 입고 보이지 않는 신들에게 경배할까? 그렇지가 않다. 지금의 그리스를 보라. 젖과 꿀이 흐르는 풍족하면서도 영원불멸한 신들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는 예전의 ‘그리스’가 아니다. ‘경제 파탄 국가’, ‘경기침체의 화약고’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만 거론된다. 지금의 그리스는 최악의 경기침체 속에서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한때 최고의 관광국가로 손꼽을 정도로 살기 편한 나라였는데 이제는 치안마저도 위태로울 정도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골의사 박경철은 생뚱맞게 그리스를 여행한다. 그리고 그리스 땅에서 남겨진 자신의 발자국 흔적들을 한 권의 책으로 다시 되살려냈다. 시골의사의 그리스 여행은 언제 끝날지 모른다. 현재진행형이다. 그의 여행 안내자는 그리스를 대표하는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다. 여행을 떠나는 나그네를 인도해준다는 신계의 헤르메스가 아닌 진짜 그리스 인 카잔차키스와 동행을 선택했다. 시골의사의 여행 안내자 선택은 탁월하다. 만약에 헤르메스였다면 자신들의 이야기인 신화의 흔적만 쫓는 고리타분한 여행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카잔차키스와 함께하는 시골의사가 바라보는 그리스의 모습은 ‘히마티온’을 벗은 나체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신화’라는 이름의 히마티온에 의해서 드러나지 않았던 그리스의 속살을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크 안티시쥐지’, 이중적인 자아를 가진 그리스인

 

시골의사는 현재 그리스의 속살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 우리가 생각했던 그리스가 맞는지 의문이 든다. ‘신화의 나라’라는 신비스러운 이미지가 확 깨는 순간이다.

 

 

그리스에는 지중해의 태양 같은 뜨거운 격정과 말라비틀어진 마른풀 같은 무기력이 공존하고, 처음 만난 여행자를 집 안에 들여 재워주는 인류애적인 친절과 백주대낮에 불법체류자를 둘러싸고 돌을 던지는 야만이 공존한다. (p 35)

 

 

그리스인은 ‘안티시쥐지’(antisyzygy), 이중적인 자아를 가지고 있다. 시골의사는 그리스를 여행하는 이방인이라면 이 정도의 당혹감은 충분히 감당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다. 그리스를 동경하는 이방인이라면 그리스의 속살에 크게 실망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특성을 제대로 모른다면 그리스를 제대로 안다고 말할 수가 없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같은 현자들만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불장난이 잦을 정도로 바람기 많은 제우스처럼 쾌락에 탐닉했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코린토스에는 아프로디테 신전 여사제들의 축제가 열렸는데 지중해를 드나드는 남정네 마음에 유혹의 손짓을 보낼 정도로 향락의 축제였다.

 

기원전 7세기에 코린토스를 다스렸던 페리안드로스의 이야기는 ‘그리크 안티시쥐지’(Greeks

antisyzygy)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페리안드로스는 경제학이 등장하기 오래전에 이미 노예제의 폐해를 지적했으며 훌륭한 통치술을 펼쳐 7대 현인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공(功)보다 과(過)가 더 많이 부각되는 편이다. 잔인한 독재자로서의 악명 높았다. 임신한 아내를 발로 차 살해하는 것도 모자라 코린토스의 모든 여자들의 옷을 벗겨 불로 태울 정도로 비정상적인 기행을 일삼았다고 한다. 로마의 네로, 칼리굴라 뺨칠 정도다. 후대의 평가 중에는 의도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악의가 포함된 것도 있지만, 우리는 페리안드로스의 모습을 통해서 자신을 파멸의 길로 스스로 몰아세우는 이중적 자아의 위험성을 볼 수 있다. 놀랍게도 경제 침체 이후 자아 분열의 조짐이 드러나고 있는 지금의 그리스를 보는 듯하다.

 

 

 

 낭만적 정열과 고요한 명상을 동시에 품다

 

그러나 그리스에는 ‘인류애’와 ‘야만’이 충돌하는 안티시쥐지만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그리스만의 독특한 매력이 있다. 침략자의 불의에 맞서 투항했던 시인 조지 바이런의 낭만적 정열이 남아 있으며 세속을 피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해 고요한 명상을 하는 수도원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그리스다.

 

 

 

 

그리스 테르베나키아에 위치한 콜로코트로니스의 동상

 

 

오랜 굴종의 끈을 단칼에 자르려 했던 그는 근대의 헤라클레스라 불려 마땅한 사람이었다. (p 147)

 

 

한국에 이순신이 있다면 그리스에는 혁명 영웅 콜로코트로니스가 있다. 그리스는 15세기 말부터 오스만투르크의 지배하에 있었다. 1822년에 그리스의 독립이 선언됨으로써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불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때 영국의 시인 조지 바이런이 그리스의 독립 전쟁에 참전했다. 콜로코트로니스는 게릴라 독립군 8000명을 이끌어 이보다 다섯 배 많은 3만 6000여 명의 오스만투르크 군을 격파한 공적을 세운 그리스의 진짜 영웅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리스인들로부터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다.

 

그리스의 도시 중심부에 벗어나 한적한 시골에 가면 고요한 정교회의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다. 지리산 청학동처럼 속세의 발길이 드물고 정진과 수행에 집중하는 수도사들을 볼 수 있다. 수도원은 절벽이 깎아 내지르는 산 중턱에 위치한다. 적의 침략을 피할 수 있으며 세속과 단절하려는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수도원들이 신앙만 추구한 것은 아니다. 그들도 한때 세속의 한가운데에 뛰어든 적이 있었다. 1821년 그리스 독립 전쟁 때 수도원들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전쟁에 참전했다. 성스러운 심장 속에 국가를 위해 몸 바칠 줄 아는 정열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세속과 홍진의 때를 억지로 떼어내지 말자

 

아기가 태어나면 탯줄은 필요하지 않아 퇴화하게 되는데, 그 탯줄이 떨어지고 남은 자리에 생기는 것이 배꼽이다. 배꼽은 태어나기 전, 생존을 위해서 필요했던 탯줄의 흔적이다. 태어나고 나서는 인체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않는다. 배꼽에는 피부의 다른 부위와 같이 피부 분비물, 각질의 죽은 세포 등이 뭉쳐서 때가 생기고, 주름이 많은 구조이기 때문에 때가 쌓이기 쉽다. 또한, 주름에 의해서 습한 환경이 조성되어서 세균이 번식하기도 좋은 조건이다.

 

서양 문명의 발상지인 그리스를 ‘문명의 배꼽’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그리스는 과거의 영화를 누렸던 ‘문명의 배꼽’이 아니다. 서양 문명의 발전에 기여했던 역사의 흔적만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잦은 외적의 침략과 내부 분열을 거듭한 문명의 배꼽은 우리가 생각해왔던 ‘우라니아(Urania, 천상)’의 그리스가 아니다. ‘판데모스(Pandemos, 세속)’의 그리스가 있다. 문명의 배꼽 안에는 세속과 홍진의 때가 쌓여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세속의 그리스를 외면해야 되는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시골의사의 여행안내자 카잔차키스는 그리스를 동경하는 우리들에게 말한다. “그리스의 얼굴은 열두번씩이나 글씨를 써넣었다 지워버린 팰림프세스트이다.”(니코스 카잔차키스 <모레아 기행> p 7) 과거에 썼던 글자를 지우고 또다시 새로운 글씨를 쓰는 양피지처럼 지금의 그리스 또한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무수히 많은 변화의 역사를 겪었다. 그러한 역사의 지층 속에 ‘우라니아(Urania, 천상)’의 그리스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문명의 배꼽에 남아 있는 세속과 홍진의 때를 억지로 떼어내지 말자. ‘우라니아’의 그리스로 만들기 위해 ‘판데모스’의 그리스를 외면한다는 것은 히마티온에 오랫동안 가려져 있던 그리스의 속살을 보지 않는 것만 못 하다. 예민한 문명의 배꼽에 편견의 자극만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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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 짜게 본 역사, 간을 친 문화
유승훈 지음 / 푸른역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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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옛날이여", 화려했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소금

 

이틀 전에 방영된 KBS 2TV '비타민'에서 '나트륨 중독'에 대해서 소개했다. 나트륨, 즉 소금 섭취 과잉은 근래 한국인의 나쁜 생활습관으로 가장 중요하게 지적되고 있는 것 중 하나다. WHO의 하루 소금 권장 섭취량은 2,000mg(5g) 이하다. 반면 2012년 현재 한국인의 1인당 1일 평균 소금 섭취량은 WTO 권장량의 2배를 훨씬 넘는 5000㎎(12.5g) 선인 걸로 나타났다. 짜게 먹는 한국인의 식습관이 주요 질병의 증가 원인이 되고 있다. 소금 섭취량이 늘면 고혈압, 심장병 등 주요 만성질환 발생 위험이 높아진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소금 섭취를 줄이는 방법 밖에 없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소금에 대한 인식은 딱 두 가지다. 음식에 간을 맞추기 위해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 될 조미료. 그리고 반대로 설탕과 마찬가지로 너무 많이 섭취하면 건강에 해로운 조미료. 좋든 나쁘든 간에 결국 우리가 생각하는 소금의 존재는 우리 입으로 들어가는 조미료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소금의 역사를 되돌아본다면 지금과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조금은 놀라울 것이다. 사실 인간에게 소금은 생존상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금을 얻기 위한 노력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다. 본격적으로 정착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 신석기 시대의 주거 지역의 특징은 강이나 바다가 근접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신석기 시대 사람들이 이 곳에 정착하게 된 배경을 어획 방법의 발달로 보고 있지만 놀랍게도 이 때부터 고대 사람들은 바다를 통해서 소금을 얻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소금이 산출되는 해안, 염호가 있는 장소는 교역의 중심이 되고, 산간에 사는 수렵민이나 내륙의 농경민은 그들이 잡은 짐승이나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기 위하여 소금 산지에 모이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이나 아시아에서도 소금을 얻기 위한 교역로가 발달되었다. 또, 고대 그리스 사람은 소금을 주고 노예를 샀으며 고대 로마의 병사들은 월급으로 소금을 받았다. 그래서 '급여, 월급'을 뜻하는 영어 Salary가 소금의 Salt에서 비롯되었다. 간략하게 이 정도의 역사적 상식만 본다면 과거의 소금은 그저 음식을 위한 조미료가 아니라 경제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또는 재화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소금이 없다면 나라가 발전 못해요, 아~ 미운 소금~~♬"

 

세계사에 영향을 줄 정도로 화려했던 역사라고 해서 우리가 흔하게 보는 소금을 그저 짠 맛의 조미료로만 보지 말지어다.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해서 그렇지 한국사에서도 소금의 존재와 그 영향력은 무시 못한다. 조금 과장되게 표현하자면 소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의 전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염전에서 얻게 되는 소금량에 따라 국가의 발전에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을 주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에도 소금은 그에 동등한 가치를 지닌 생산물과 거래, 교환할 수 있는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산으로 둘러싸인 내륙 지방의 사람들은 소금 맛 보기가 귀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해안 지방에 위치한 염전업자들 간에 농산물을 소금과 교환하는 거래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렇다보니 염전업자는 최대의 이윤을 얻을 정도로 최고의 직종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과거에는 소금을 부엌에서 볼 수 있는 단순 조미료라기 보다는 국가 발전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경제적 재화 정도로 인식했다. 고려의 시조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위한 재정이 손쉽게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소금의 최대 생산지였던 전남 지역을 점령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원나라의 간섭으로 인해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고려 말의 충선왕은 '각염법'이라는 소금 전매법을 시행하였다. 국가가 직접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이다. 백성들이 소금을 얻기 위해서는 세금의 일종인 '소금세'를 지불한다거나 또는 일종의 생산량을 교환해야만 했다. 소금 생산 및 판매로 벌여들인 소금세와 교환 거래를 통해 국가 재정을 좀 더 수월하게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국가 또는 관리가 염전사업에 관여하다보니 정작 소금이 필요한 백성들이 피해를 얻는 문제점이 속출하게 되었다. '국가 재정'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를 급하게 찾다보니 소금을 요리에 필요한 조미료라는 아주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용도를 잊고 말았다. 국가가 시행하는 소금 전매법에 관여하는 왕족 또는 권문세족들에게 소금은 부를 축적하기 위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본의 용도로 보고 있었다. 소금이 권세가들만을 위한 귀한 최상급의 조미료가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 고려 정부도 소금을 자신들과 가까운 왕족, 고급관리들에게 분배할 정도였다. 그래서 백성들이 일정 기간 소금세와 생산량을 바쳐도 백성들이 양손 한 가득 소금 담기가 하늘에 별 따기였다. 원나라의 간섭에 의한 조공을 피하기 위해서 만든 각염법이 아이러니하게도 지배층들의 폐단을 더욱 낳게 만들었으며 백성들의 삶을 어렵게 만들어주었다. 고려 말의 소금 전매법의 폐단은 조선 건국 초기까지 이어질 정도로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해나가야 할 하나의 사회문제가 되었다. 조선 건국의 공신 중의 한 사람인 삼봉 정도전이 태조에게 염법의 문제점을 지적할 정도로 국가 발전에 있어서 소금 개혁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염법 개혁에도 불구하고 '국가 및 왕권 강화를 재정 확보'와 '백성들의 민심 얻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가 쉽지 않았다.

 

 

 

 

 누가 소금을 외면하게 만드는가

 

어떻게 보면 소금은 지금이나 과거나 중요하면서도 백성들에게 불편을 준 양면적인 존재다. 오늘날에는 건강상 해로운 조미료라고 인식하고 있다면 과거에는 권세가들의 배만 불리게 만드는, 백성의 생활을 괴롭게 만드는 조미료였다. 그러나 역사를 볼 땐 공과 사는 확실하게 구분해야 하는 법. 국가 재정 확보에 있어서 농산물과 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소금의 존재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조선의 성군 세종은 오랜 기근 생활로 인해 피폐해진 백성들의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한 복지정책의 재원으로 소금을 사용했으며 임진왜란 시기 속에서도 백성들의 식량과 군사들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한 해결 방법을 류성룡은 염전에서 발견했다.

 

자염은 질박한 토기에 바닷물을 담은 뒤에 끓여서 소금을 채취하는 방식이다. 천일염은 갯벌에 바닷물을 가둔 뒤에 바람과 햇볕으로 수분을 말려 소금을 얻는 방식이다. 자염이 사라진 이유는 일제 강점기 시절, 산업과 철도를 중심으로 한 국책 사업에 밀리는 바람에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바람과 햇볕에 의해 말리는 천일염의 등장으로 인해 오랜동안 누려온 화려한 역사를 뒤로 한 채 사라졌다. 그러나 천일염의 등장으로 인해 우리나라의 염전은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 식생활에서 음식의 간을 조절하는 것은 소금, 간장, 된장 등 소금기가 있는 조미료였다. 우리 여성들은 짠맛을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화려했던 '짠맛의 시대'는 가고 '단맛'과 '매운맛'의 시대가 왔다. 짠 음식과 소금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널리 퍼지고 있다. 역설적으로 소금을 불필요하게 짜게 만들어 건강을 해치게 한 장본인은 인간이었다. 부엌에 있어야 할 소금을 그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황금'으로만 봤던 것이다. 그러하기에 방대한 역사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들려오는 소금의 화려했던 블루스가 너무나도 짜게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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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2-09-01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곳곳에 소금에 관한 우여곡절들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삼국지에도 보면 관우가 하던 일이 소금 밀매업자와 연결되어 있다, 혹은 그의 뒤를 봐주던 사람이다, 혹은 소금 밀매업에 종사하던 사람이다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cyrus 2012-09-03 11:17   좋아요 0 | URL
오~~! 그렇군요. 알라딘 검색창에 소금이라고 검색하면 꽤 소금의 역사에 관한 책이 많았어요. ^^

아이리시스 2012-09-03 1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금으로 역사책이 나오는 게 신기하네요. 미시사도 좋아하지만 소금책도 읽는 시루스님이 더 좋아요.
제목 좋네요, 소금 블루스.
예전엔 오롯이 국가사업이었고, 부의 사업이었고, 권력과도 연관이 되어있었던 것 같아요.

cyrus 2012-09-03 15:07   좋아요 0 | URL
예전에 나온 책 제목 중에 슈가 블루스라고 있어요. 설탕이 건강에 유해하다는 사실을 반박하는
일종의 설탕 예찬론에 관한 책이었는데 거기서 따왔어요. 사실 지금 소금도 설탕과 마찬가지로
건강에 유해한 조미료라는 인식이 강하잖아요, 하지만 과거 역사를 되돌아보면 소금의 존재가
얼마나 유용했는지 소개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 책 제목에서 따온거에요 ^^
 
근대를 말하다 - 이덕일 역사평설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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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역사의 트라우마가 만들어 낸 '반일' 감정  

 

 

 

 

 

 

KBS 드라마 '각시탈'은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일본을 응징하는 한국판 슈퍼히어로의 대활약을 그려낸 이야기다. 시청자들은 2대 각시탈 이강토(주원 분)가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의 악랄한 만행을 제대로 다뤄주길 원하고 있다.

 

그렇다보니 '각시탈' 연출 관계자들은 드라마를 애청하는 시청자들 때문에 종종 곤혹을 치뤄야 할 때가 있다. 지난 7월에 모 포털 사이트에서는 ''각시탈' 속 기미가요 장면 논란'을 주제로 네티즌 투표가 실시된 적이 있었다. 7천명이 넘는 네티즌이 참여한 가운데 '연출을 위해 필요한 장면'이라는 대답이 70.6%로 나타났다. 반면 '한국 드라마에서 기미가요는 부적절한 장면'이라는 대답은 29.4%로 집계됐다. 이에 대해 '각시탈' 측 연출 관계자는 "기미가요는 극의 흐름상 꼭 필요했던 장면의 일부였을 뿐 중점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이강토는 각시탈로 변신, 일본 형사들을 모조리 제압한다. 통쾌한 복수극에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모두 환호하고 박수를 보냈다. 이처럼 '각시탈' 항일정신이 부각되는 시점이면 온라인 반응은 뜨겁기만 하다. 하지만 일본인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될 때는 여지 없이 혹평이 쏟아진다.

 

어제 SNS를 중심으로 경기 고양시 지하철 3호선 화정역 광장의 모양이 일본의 '욱일승천기' 문양을 그대로 닯았다는 논란이 확산되었다. 욱일승천기는 일본 국기인 일장기의 붉은 태양 문양 주변에 붉은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양을 형상화해 만든 것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상징으로 인식돼 있다.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한일간 외교 관계가 불화의 국면 상태로 접어들고 있는지라 국민들의 반일(反日) 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고 있는 해프닝이다. 우리나라가 광복을 맞이한 지 67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국민들의 마음 속에는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 드라마 속 기미가요 장면에 대한 시청자들의 예민한 반응 또한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기피감으로부터 비롯된 반일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 찬탈의 원인을 고종과 노론에서 찾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세력 다툼 속에서 쇠락의 기운이 완연했던 대한제국의 모습 그리고 일제의 식민 통치로 얼룩진 한국의 근대사. 그 당시 우리 민족에게 행했던 일제의 만행만큼이나 한국 근대사 역시 우리가 똑바로 바라보기를 꺼리는 역사이기도 하다. 현재와 가장 가까운 시기지만 고대와 중세보다도 더 멀게 느껴진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국민들은 일제 강점기 역사를 기피하고 자세하게 알지 못하면서도 '친일' 문제만큼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면모를 전혀 보이지 않는 일본정부의 몰염치를 끊임없이 비판, 감시하면서도 우리 안에 있는 친일 잔재를 청산하는 작업도 병행해야 한다. 다만 이러한 역사적 작업이 대대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관심이 선결조건이 되어야 한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은 자신이 펴낸『근대를 말하다』에서 친일파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집권했던 일제 강점기 역사를 제대로 성찰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과거와 같은 똑같은 역사적 실수와 비극을 되풀이할 것이라고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다. 역사를 성찰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알아야 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덕일 소장은 조선 망국의 뿌리를 1623년 인조반정 체제로까지 끌어올린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과 그 후예인 노론은 조선을 시대착오적인 사회로 끌고 갔다. 사지선다형이어야 할 외교는 숭명(崇明)이란 이념으로 통일되어 선택의 여지를 없애버렸다. 여러 사상 중 하나에 불과한 주자학을 유일사상으로 만들고, 해체되어야 할 신분제를 더욱 강화시켰다. 이런 상황 속에서 '500년 조선'은 단 30분 만에 이루어진 협상에 의해 멸망되었다.

 

노론 세력의 기득권 유지 속에서도 대한제국이 망국의 길을 걷을 수 있도록 더욱 재촉하게 만든 것은 고종의 리더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지금까지도 고종의 리더십을 둘러싸고 대한제국의 멸망을 이르게 한 무능한 군주인지 아니면 근대화를 앞장서 이끈 개혁을 시도한 군주인지 대해서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2010년에 펴낸 『조선 왕을 말하다 2』에서도 이덕일 소장은 고종의 '개혁군주론'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그의 리더십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듯이 이 책에서도 망국의 결과를 초래한 고종의 오판에 대해 질타한다.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고종(사진 왼쪽에서부터 두번째 인물, 1896년 아관파천)

 

 

 

고종에게는 시대의 흐름을 읽는 혜안이 없었다. 그리고 친일파만 득실거릴 뿐, 국제 정세에 해박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 주변에 없었다. 그게 대한제국으로서는 가장 뼈아픈 점이었다. 고종은 개화를 추진하다가도 입헌정치체제가 전제왕권을 조금이라도 저해하면 하루아침에 돌변해 관련 인물들을 제거했다. 갑신정변으로 급진 개화파를 척살했고, 아관파천(약 1년 동안 고종과 왕세자가 왕궁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에 옮겨서 거처한 사건)으로 온건 개화파를 몰아냈다.

 

당시 동아시아의 패자는 일본이었다. 외형적으로는 러시아가 강했지만, 국민적인 단결이 이뤄진 일본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일본의 선제공격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됐을 때까지도 고종은 러시아의 승리를 믿고 있었다. 청일전쟁 직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되돌려주는 것을 보고 러시아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이 승리한 후, 조선은 일본의 지배권에 놓이게 된다. 이때부터 고종의 이중적인 처신은 극에 달한다. 이미 세계가 대한제국을 일본의 몫으로 인정했음에도 고종은 줄타기 외교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러시아의 영향력은 완전히 소멸됐고, 급기야 고종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 조약 체결 당사자인 외부대신 박제순을 의정대신으로 승진시키고, 학부대신 이완용을 임시 외부대신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고종은 뒤로는 의병들에게 밀서를 내려 나라를 되찾자고 독려했다. 이 같은 이중적인 정치 행보는 조선이 망국의 길을 내달리는 동안 계속됐다.

 

 

 

 

 개나 고양이보다 못했던 조선인들의 삶   

 

1910년 한일합방 이후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총독정치'가 시작되었다. 조선총독은 일왕 이외에 그 누구에게도 책임을 지지 않으면서, 조선인에게는 일방적으로 복종만을 강요하는 명령권자였다. 조선에서는 그의 말이 곧 법이었다. 무단통치는 헌병경찰제도에 기반을 두었다. 헌병경찰제도는 군사경찰인 헌병이 보통경찰의 직무를 겸직할 수 있게 한 제도였다. 이것은 헌병으로 하여금 경찰권을 장악하게 한 것이다. 헌병경찰은 곧 총독의 수족이었다. 조선인을 완전무장해제시킨 다음 조선인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탄압하고 규제하기 위하여 헌병경찰에게 일정한 사법관의 특권을 부여하고 태형 제도를 제정, '범죄즉결례'를 공포했다.

 

이 때 무단통치의 시기의 조선인들의 삶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인간답게 살지 못했다. 불경한 언어와 거동, 일본인들에 대한 욕설 등을 이유로 조선인들은 일본 순사에게 강제로 연행되어 태형을 맞곤 했다. 태형 장면을 목격한 한 독립운동가의 증언을 보게 된다면 일본의 비인륜적 통치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할 수 있다.

 

 

일본인들이 벌려놓은 형틀과 그 형편(刑鞭, 채찍)은 조선 왕조가 자국민을 징치(懲治)하기 위하여 시행했던 고대의 태형과는 그 성격과 내용이 달랐다. 형판(刑板)에 사람이 엎드리면 음부가 닿는 곳에 구멍을 뚫었으며 두 팔을 십자판에 벌려놓고 두 다리와 허리를 묶었다. 그들이 사용하는 우음경(牛陰莖, 소 음경으로 만든 매)은 끝에 납을 달아서 노출된 둔부를 치면 그 납이 살에 파고들어가 피가 흐르고 살이 찢긴다. 매는 1차 80대가 보통이며 중도에 기절하면 회생시켰다가 3일 후에 다시 때린다.

 

 

 

일본은 조선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해서 조선의 산업자본을 키우고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제국의회에서 회사설치법안을 통과시키고,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여 토지매수에 힘을 기울였다. 비옥한 토지를 강제로 사들여 조선총독부 소유로 만들고 토지에서 생산되어 나온 곡물들을 일본으로 반출해나갔다. 일본의 토지 착취 이후로 조선의 자작농들은 가난한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일본은 농업 경제만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산업 경제의 발전을 저해하기도 했다. '회사령'을 공포하여 조선인만 회사를 설립, 운영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기형적인 법령을 제정하기도 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한 민족자본 형성을 애초부터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의도 하에서 제정되었다. 조선인들에게만 부당하게 대우하는 일제 강점기의 법령들은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한 일본의 속셈이 뻔히 드러나 있다. 그러면서도 당시 일본 관리들은 조선 회사령의 목적을 '조선 경제계의 발달에 기여하는 제도'라고 주장했다. 자신들의 식민 통치를 한국의 근대화 발전에 기여했다는 근거를 들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오늘날 일본 극우파들의 모습과 일맥상통하다.

 

 

 

 

 항일 정신이 살아 숨쉬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

 

올해 3.1절을 맞아 전국 교교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정신대문제'에 대한 인식조사에서 의하면 고등학생들의 86%가 '잘 모른다'고 응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수의 학생들이 정신대문제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응답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학생의 67.8%이 정신대 문제에 대한 우리 정부의 일본 정부에 대한 태도를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일본정부의 고의적인 무관심에 대해서도 98%가 강력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조사 결과는 한ㆍ일 과거사에 대한 역사교육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역사를 배우고 있는 청소년들이 일제 강점기의 역사를 민족 수난의 아픈 상처들만 기억되는 암울한 시기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으로도 바라볼 수도 있다.

 

지금 일제 강점기 과거사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명확하면서도 한정적이다. 친일 청산 문제, 위안부, 독도. 이 세 가지 키워드를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결정적으로 국권을 온전히 일본에게 속절없이 넘겨져야만 했던 무기력한 국력 상태로 유지되어 온 일제 강점기 때부터 불거진 민감한 사안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아픈 과거사인데도 역사를 배우고 있는 청소년들 심지어 학창 시절 역사를 배웠던 한국의 성인들마저도 이런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다. 역사를 잘 모르는 것보다 더 심각한 것은 한국인으로서 기억하기 싫은 우울한 역사라고 해서 그것을 외면하는 인식이다.

   

과거사를 교과서 공부하듯이, 오직 '친일 청산, 위안부, 독도' 프레임으로만 보는 단순하고 획일적인 역사적 시각과 인식에서 탈피해야 한다. 항일무장투쟁은 을사늑약, 한일합방 이전 근대에서 발생했던 의병 활동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1920년대 초반이 절정기였다. 나라를 팔아먹은 왕족과 지배층은 일제에서 주는 합방공로작과 은사금을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반면에 일가족을 이끌고 북풍이 휘몰아치는 만주로 떠나 독립운동에 나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회영과 이시형은 전 재산을 정리해 마련한 광복 자금을 갖고 6형제 일가족 60여명을 이끌고 망명길에 나섰다. 일제 강점기의 조선은 국권을 상실한 이미 죽은 나라나 다름 없었지만 여전히 항일 정신은 살아 숨쉬고 있었다. 이렇듯 나라의 패망 시기에 엇갈린 판단으로 자신의 길을 찾았던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삶과 활동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매해 광복절 즈음에는 일본 군경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한 생존 유공자들이 쓸쓸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언론보도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이들은 정부에서 주는 적은 생계비에 의지해서 고령과 병마와 싸우며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다. 대한민국의 기틀을 세운 항일·독립유공자들이 국가로부터 정당한 예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국가적 불행이자 시대의 아이러니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항일'(抗日)의 사전적 의미는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움'이라는 뜻이다. '반일'(反日)은 '일본에 반대함 또는 일본에 반대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사실 '항일'과 '반일'의 사전적 의미만 본다고해서 양자의 의미가 서로 명확하게 구분되어지는 건 아니다. 어찌 보면 '항일'과 '반일'의 개념은 서로 비슷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과거사를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에서 일본을 반대하는 인식 및 정서를 과연 '항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반일'의 의미에 가깝다. 우리가 드라마 속에 흘러나오는 기미가요나 욱일승천기와 비슷한 이미지의 대상만 가지고 분노하는 것은 그저 역사 인식이 결여되고 과거사에 대한 불편한 기억 속에서 비롯된 '반일' 감정과 다를 바가 없다. 우리가 정말 과거사를 제대로 인식하려면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에 의해서 망국의 길을 걷게 된 역사적 원인 및 배경을 알고 있어야하는 건 당연하다. 그리고 망국의 책임을 고종과 노론에게만 씌울 수는 없다. 조선이 망할 수 밖에 없었던 그 당시 국제적 정세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될 역사적 사실이다.

 

과거사, 즉 일제 강점기의 근대사는 단지 우리 민족의 아픈 상처를 말끔히 지워낼 수 있는 청산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우리의 역사는 함께 지키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제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또한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고 올바른 역사관을 세울 수 있도록 정부뿐만 아니라 대중의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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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18: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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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1: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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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2:5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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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3 22: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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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4 19: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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