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항쟁 - 1946년 10월 대구, 봉인된 시간 속으로
김상숙 지음 / 돌베개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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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파 못 살겠다, 쌀을 달라!”

 

(《10월 항쟁》 70쪽)

 

 

1946년 10월 1일 노동자를 비롯한 빈민들이 대구부청(현재 대구시청) 인근에 모여들었다. 빈민들은 오랫동안 굶주렸다. 광복 직후, 대구에 정착한 미군정은 식량난을 해결하지 못했고, 자신들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친일 보수 세력을 끌어들이기에 바빴다. 최악의 상황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빈민들은 미군정에 향한 불만을 표출하기에 이르렀다. 과거에 ‘대구 10·1 폭동’으로 알려진 ‘대구 10월 항쟁’의 시작이었다. 오후에 들어서자 시위 군중은 4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대치하던 경찰이 끝내 발포했다. 격렬한 대치 속에 경찰의 발포로 민간인 1명이 사망하자 시위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에 분노한 군중과 파업 노동자들은 다음날에도 대구부청과 대구역 광장으로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들을 해산시키려는 경찰이 또 한 번 총을 쐈다. 경찰의 위협에 희생된 민간인은 스무 명 이상이었다. 미군정은 대구에 계엄령을 선포했고, 몇 시간 만에 시위가 진압되었다. 그러니 민중 항쟁은 경북으로 번져 멈추지 않았다.

 

우파는 대구 항쟁을 ‘폭동’으로 규정지었다. 이 사건은 폭동의 요소와 항쟁의 요소가 때와 곳에 따라 혼재되어 있어 한마디로 단정 짓기는 어렵다. 그러나 빈민과 학생 그리고 노동자 등 계층을 초월한 민중이 참여한 이 이틀 동안의 시위는 ‘지역 민중 운동’이다. 즉 지도부 없이 민중이 능동적으로 전개한 대중 운동이다.

 

 

 

 

 

 

그런데 최근에 공개한 국정교과서에는 대구 항쟁을 공산주의자들의 선동으로 일어난 것처럼 소개했다. 이는 민중 항쟁의 의의를 무시하고, 왜곡했다. 대구 항쟁은 소련은 물론, 광복 직후 당시 대구에 조직 활동을 펼친 조선공산당 중앙조직의 개입이 없었다. 현재로썬 조선공산당 중앙조직이 대구 항쟁을 지도한 사실을 증명해주는 사료가 남아 있지 않다. 운동의 주체를 좌파적 시각으로만 바라본 탓에 대구 항쟁의 진상을 규명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총탄에 맞아 숨진 일부 희생자의 이름이 잊혔다. 언급하는 일 자체가 금기였다. 뒤이은 한국전쟁과 군사정부 시절, 그들의 후손은 조상의 죽음을 하소연하지 못했다. 해방공간부터 진행된 반공주의와 공산주의라는 극단주의의 갈등이 민중 운동의 흔적을 제거한 이유이다. 항쟁과 한국전쟁 전후 무고한 많은 민간인이 군경이나 인민군에 끌려가 죽임을 당했지만, 반공주의에 의한 트라우마 때문에 누구도 감히 학살의 얘기를 드러낼 수 없었다.

 

대구 항쟁, 경북 일대에서 일어난 민중 봉기 그리고 1948년 여순 사건 등을 진압하고 수립된 남한 정부는 반공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포장함으로써 지배할 수 있었다. 1987년 6월 시민항쟁까지 반공은 군정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 이 때문에 대구에 극단주의 반공주의가 내면화돼 좌익 운동의 중심지로서의 역사마저 완전히 잊혔다. 1960년대 이후의 한국 현대사에 익숙한 사람들은 대구를 ‘보수의 성지’로 생각한다. 요즘 대구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다. 최악이다. ‘나라를 엉망진창으로 만든 지도자가 태어난 지역’, 그리고 그 지도자를 뽑아주고, 열렬히 그 지도자를 찬양하는 ‘꼴통’ 시민들이 사는 지역. 다른 지역 사람들은 늘 ‘1번’으로 향하는 대구 민심을 싫어한다. 그렇지만, 미군정이 대구를 완전히 지배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 등 좌익 세력의 정당 조직이 활동했다. 그뿐만 아니라 좌우세력이 함께 건국 운동 준비를 시도한 적이 있었고, 공동으로 정치집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대구에 짧게나마 이념적 갈등을 넘어선 대중정치가 안정적으로 정착된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속절없이 흘러간 과거가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진다. 미군정과 친일 세력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대구가 좌우 세력이 공존하여 민중을 위한 정치문화가 본격적으로 싹 틔우기 시작한 지역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현재 유럽의 정치무대처럼 대구에 자유롭게 활동하는 진보세력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대구,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뿌리는 영광스럽지도 건강하지도 않다. 한마디로 말하면 썩었다! 불행하게도 대구와 대한민국은 미군정과 친일파들이 지배해왔다. 1946년 10월 이후부터 민심의 맥박과 함께 움직였던 대구의 시계는 멈춰진 상태다. 이 시계가 원상 복구하려면 친일 세력으로 인해 썩어버린 뿌리를 제거해야 한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뜨겁게 숨 쉬었던 대구의 그 시간, 1946년의 역사를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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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8 16: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2-08 19:30   좋아요 1 | URL
정말 간신히 살아남으셨군요. 이승만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민간인 학살의 주범이 누군인지 관심 없어하는 반응입니다. 그들은 좋은 것만 보려고 하죠.

저 방금 서구청 앞에 갔다 왔습니다. 제가 기대를 많이 해서 그런지 오늘 촛불 집회에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역시 대구는 새누리당 그늘에 벗어나기 쉽지 않은 지역입니다.

낭만인생 2016-12-08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주화의 중심이 대구였는데.... 두환씨가 잔머리 굴리면서 지역감정으로 찢어 놓고 이렇게 되 버린 것은 아닌지.....

cyrus 2016-12-08 22:29   좋아요 1 | URL
이승만과 친일 세력이 대구를 포함한 남한 전지역 좌파 세력을 억압했고, 여기에 반공주의를 박정희가 이어받아서 대구는 그렇게 박정희를 찬양하는 지역이 되었죠. 그리고 낭만인생님 말씀처럼 전두환이 지역감정을 부추겼어요.
 
비스마르크에서 히틀러까지
제바스티안 하프너 지음, 안인희 옮김 / 돌베개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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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민은 신과 인간에 대한 책임을 자각하고 합일된 유럽의 동등한 권리를 갖는 구성원으로서 세계평화에 기여할 것을 다짐하며 헌법 제정 권력에 의해서 이 기본법을 제정하였다.”

 

Im Bewußtsein seiner Verantwortung vor Gott und den Menschen, von dem Willen beseelt, als gleichberechtigtes Glied in einem vereinten Europa dem Frieden der Welt zu dienen, hat sich das Deutsche Volk kraft seiner verfassungsgebenden Gewalt dieses Grundgesetz gegeben.

 

 

이렇게 시작되는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은 통일 이전 서독 기본법의 연방정부 구성 원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독일의 기본적 국가 구성 원리는 1870년 비스마르크의 첫 도이치 제국 통일 후 만들어져, 바이마르 공화국, 히틀러의 나치 정부,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동독과 서독의 분단 상황을 거친 오랜 역사적 실험과 경험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연방정부의 새로운 기본법은 나치 독일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세계평화에 이바지할 것을 다짐하며 동서독의 통일과 유럽연합정부의 이상을 수용하고 있다.

 

패전국이 되었다는 것, 그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과거이다. 비스마르크의 도이치 제국에 패배한 프랑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오기까지 와신상담의 시간을 보냈고, 1차 세계 대전에 패배한 독일이 나치즘으로 접어들었던 과거를 볼 때 마음속에서 끝나지 않은 전쟁은 끝나지 않은 것일지도 모른다. 보불전쟁, 1차 세계 대전, 나치즘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등 이 긴 전쟁의 시대는 독일이란 단일 민족국가가 프랑스, 미국 등의 연합국에 무릎을 꿇는 것으로 끝났다. 그런데 이 시기 전체가 독일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패자인 독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쟁의 시대는 자멸의 길로 인도하게 한 과오의 시대였다. 독일의 언론인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독일이 전쟁 제국으로 팽창하는 과정을 되돌아보며 몰락의 원인을 파헤친다. 비스마르크와 히틀러. 시대를 초월한 다소 어리둥절한 조합이지만, 한때 독일제국의 위대한 영웅으로 숭배되었던 이 두 사람은 독일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과 혈(), 그리고 뛰어난 외교술로 독일 통일의 위업을 달성하고,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의 유럽 지도를 만들었던 인물. 비스마르크를 21세기, 그것도 독일이 유럽연합(EU)의 맹주로 자리 잡은 이 시기에 불러내는 작업은 쉽지 않다. 비스마르크의 주변이 항시 적과 동지로 나뉘었듯 그에 대한 평가도 극으로 갈린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를 나치 등장의 전조로 지목한다. 독일이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극단적 전체주의를 경험해야 했던 파행과 굴절의 이면에는 독일 제국의 권위주의 전통이 뿌리내리고 있다. 굳이 비교하자면 비스마르크와 미국의 대통령 트럼프에게 닮은 점, 닮은 환경이 없진 않다. 혹자는 트럼프의 등장을 히틀러의 부활이라고 냉소적으로 조롱하지만, 나는 그가 히틀러보다는 비스마르크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현재 미국이 친 트럼프(대안 우파)’반 트럼프로 분열돼 있다시피 한 것처럼 당시의 도이치 제국도 크게 보면 보수적인 구() 프로이센 진영과 민족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다. 통일 도이치 제국 역시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프너는 비스마르크의 도이치 제국이 20여 년 동안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트럼프가 대선후보로 등장하면서부터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다. 일명 트럼프 쇼크. 비스마르크가 들고나온 철과 혈도 당시 유럽인들에겐 충격이었다. 그러나 제국 통일 이후 비스마르크 2기는 달랐다.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비스마르크는 유럽 정복의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제국을 팽창하는 것만으로는 독일 내부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 수 없었다. 오로지 순수 독일 민족이 사는 작은 독일을 건설하는 것이 비스마르크의 원대한 꿈이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내부 분열의 잡음을 줄이기 위해 철과 혈 대신 실리와 실용’, ‘외교와 중재를 받아들였다. 그랬기에 비스마르크 2기 체제가 거의 반세기를 풍미할 수 있었다. 내년부터 트럼프가 내년부터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통령 권한을 행사할지 아직 알 수 없다. 워낙 자신감에 차 있고, 백인 민족주의를 천명한 그의 공약이 비스마르크의 정치적 노선과 다르지 않다. 대선후보 시절 무모할 정도로 강경한 자세로 자신의 공약을 주장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당선 이후 일부 변화의 모습을 보인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트럼프가 실리를 추구하는 정책을 펼칠지 지켜봐야 한다.

 

프랑스 황제에 올라 유럽제패를 꿈꾸었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한 국가의 정치는 그 나라의 지리로부터 나온다는 말을 남겼다. 정치현상이 이뤄지는 공간적인 실체, 즉 영토를 중시한 발언이다. 작은 독일제국으로 한정된 환경과 지리는 정복 열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최적의 조건이었다.작은 독일제국은 자신 주변에 둘러싸인 유럽 연합의 힘을 상당히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독일 제국은 유럽 연합의 힘에 밀려 고립될까 봐 두려웠다. 독일 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이 뒤숭숭한 분위기를 극복하고, 민족적 자존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생존 방식을 선택한다. 제국의 극단적인 논리는 나치스의 인종차별과 게르만 민족의 세계지배 이론을 뒷받침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긴 했으나 사민주의적 이상주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바이마르공화국 헌법을 가진 독일은 20세기 전반기 이미 시민사회가 발달한 선진국이었다. 이때 독일은 민주주의를 재건해야 했다. 그런데 히틀러는 민주주의적으로 집권해 전쟁을 일으켰고, 유대인을 학살했다.

 

비스마르크는 정치를 이념이 아닌 힘의 논리로 파악했다. 그것은 유럽 정복이 아니라 독일 제국이 평화적으로 발전하기 위해 선택한 차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차례로 통일 독일제국의 제물로 삼아 평화로운 제국의 이득을 취했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정복의 야욕을 불러일으키게 한 중대한 배경이 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1871년 비스마르크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진 이후부터 독일 제국에 제국주의적 야망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은 절대로 제국주의자가 아니라고 밝혔지만, 비스마르크의 작은 독일 제국을 키워 준 토양은 역설적이게도 나라를 더 크게 만드는 제국주의의 거름이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전쟁이든 정치적 모험이든 단 한 번의 승부에 국가와 자신의 미래를 걸지 않았다. 절제를 알았고 한계를 알았다. 그런데 히틀러는 자신의 열망을 조절하지 못했고, 위험한 망상에 사로잡혀 유럽 전체를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독일은 다시 한번 유럽의 패권 국가가 되려는 야망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철저한 사과로 전쟁 책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처럼 보였던 독일에서도 여전히 미해결의 문제들이 남아 있다. 네오나치 단체들은 여전히 히틀러의 제3 제국 질서를 그리워하고, 나치의 상징인 하겐 크로이츠(Hakenkreuz)에 향수를 느낀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의 좌절감과 무력감을 교묘하게 자극하고, 거기에서 자란 정치적 허무주의를 발판으로 역사상 전대미문의 절대 권력을 장악, 독일 국민을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갔다. 민족적 자존심을 내세운 기개는 너무 지나치면, 막상 대안 없는 변화가 몰아올 결과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독일이 과거에 만들어진 비스마르크와 히틀러, 두 개의 이름으로 남은 제국의 향수(鄕愁)를 말끔히 씻어내지 못하면, 4제국으로 꾸미려는 위험한 향수(香水)가 될 수 있다. 독일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가 지금 걱정해야 할 것은 정치에 대한 국민의 좌절감과 무력감이 자칫 정치적 허무주의를 가꾸지나 않을까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는 여전히 1970년대에 제조된 박정희 향수를 못 잊고 있다. 허무주의의 기운이 이미 흘러간 시대의 향수를 자극하여 시대착오적인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환상을 키울까 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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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1 08: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2-01 18:39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요즘 히틀러를 중심으로 한 독일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어요. 독일 역사를 계속 공부하게 되면 비스마르크까지 관심의 폭을 넓혀볼 생각입니다. ^^

2016-12-02 09: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02 10: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낭만인생 2016-12-02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정희 향수... 전라도 사람들 조차 박정희는 좋게 평가하시는 분이 많아 걱정입니다.

cyrus 2016-12-02 14:38   좋아요 1 | URL
과거 지도자를 선호하는 것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지도자의 업적만 찬양하고, 문제점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건 올바르지 않습니다.

yureka01 2016-12-02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단..도종환 시인의 시집 하나 들고 갈 작정입니다..오시면 꼭 싸인 받고 싶어요 ㅎㅎㅎ

cyrus 2016-12-02 14:39   좋아요 1 | URL
시인께서 바쁘시더라도 꼭 오셨으면 좋겠어요.. ^^

2016-12-02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02 14: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메두사를 잡은 영웅 페르세우스는 보기만 해도 돌이 되어버리는 괴물을 잡기 위해 거울을 사용했다. 추악한 자신의 모습을 비춰줌으로써 메두사의 공포를 잠재울 수 있었다. 자신도 놀랄 추악한 이면을 그제야 메두사가 본 것이다. 본래는 미녀였으나 신의 저주로 괴물이 돼버린 메두사, 그 스스로 바라본 공포는 자신마저도 돌로 만들어버렸다. 메두사의 공포를 거울이 비추듯, 이성을 저버린 폭력의 추악한 본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전부라고 말할 수 없겠지만, 문명은 자연의 상태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기괴한 폭력을 만들어냈다. 여기에는 유형의 폭력보다 더 잔혹한 무형의 폭력도 포함된다. 문명이 온라인 공간으로 확대될수록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폭력이다. 언제 누가 휘두르는지 알 수조차 없는 이 폭력은 갈수록 정교하고 악랄해져 간다. 인터넷의 대중화는 갖가지 무형의 폭력이 번식하는 좋은 환경이 되었다.

 

암살은 인간의 불확실성이 취약할 때 드러나는 유형 또는 무형의 폭력이다. 암살은 종종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길 정도로 엄청난 나비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역사를 봐도 그렇다. 1914년 6월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페르디난트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사건으로 촉발된 제1차 세계대전이 있다. 평범한 주부였던 코라손 아키노는 야당 지도자였던 남편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이 암살당하자 정계에 뛰어들었다. 그녀는 20년 마르코스 독재 정부를 무너뜨리는 등 비폭력 시위의 세계적인 선구자가 됐다. 길게 언급하지 않겠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 사건도 한국의 운명을 바꿔버린 결정적인 사건이다.

 

 

 

 

 

세기의 암살자들 대부분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우리나라는 사실상 사형제 폐지 국가이다. 인권이 인류의 삶을 보호하는 공통의 가치로 자리 잡았음에도 사형제를 추진하는 사람들이 있다. 언제부터인가 범죄에 대한 형벌이라면 으레 교도소에 구금하는 징역과 같은 자유형을 떠올린다. 자유형은 신체의 자유를 박탈한다는 의미에서 붙인 말이다. 피해자뿐 아니라 국민도 범죄자가 징역을 살지 않으면 처벌이 적정하지 않은 것처럼 인식하기 일쑤다. 그러나 자유형이 주된 형벌이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오히려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신체형과 사형이 주된 형벌이었다. 사형은 유사 이래 가장 오래된 형벌이다. 최초 성문법인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법전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복수원칙을 비롯해 25개 죄에 대해 사형으로 처벌토록 했다. 그만큼 사형은 인류 역사와 함께 한 형벌이었다.

 

 

 

 

 

 

 

 

인간의 잔혹성을 인정한다고 해도 인간 심리를 파악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사실 인간의 잔혹성이 문명의 발달과 함께 줄어들 것이라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어떤 형태의 폭력이나 잔혹성은 사라져가고 있어도 모양이 다른 폭거는 여전히 인간사회에 감춰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잔혹성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는지 알고 싶으면 내가 직접 특별한 이름을 붙여준 ‘죽이는 책’들을 보면 된다. 서론이 쓸데없이 길어지고 말았는데, 책에 대한 내용의 50%가 서론에 소개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1. 콜린 윌슨
《잔혹》 (구판)
《인류의 범죄사 : 인류의 시작부터 현대까지 방대한 범죄의 역사》 (개정판)
《현대살인백과》

 

 

 

 

 

 


《아웃사이더》로 영국 문단에 충격을 준 콜린 윌슨은 왕성한 집필 활동을 펼치면서 살인, 불가사의 등 특이한 분야에 관심을 보였다. 《잔혹》(작년에 나온 개정판 제목은 《인류의 범죄사 : 인류의 시작부터 현대까지 방대한 범죄의 역사》)과 《현대살인백과》는 《아웃사이더》의 엄청난 명성이 뿜어낸 빛에 가려졌지만, 평소에 접하기 힘든 어두운(?) 지식이 궁금한 독자들에게 흥미를 선사해줄 수 있는 저작물이다. 윌슨은 살인 또는 암살 사건에 관련된 각종 자료를 수집하면서 인간의 잔혹성을 분석하여 자신만의 결론을 도출한다. 그는 살인이 자기 통제와 자기 파괴의 메커니즘을 통해 발생한다고 봤다. 자기 존재를 각인시킬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살인 또는 암살이다. 연쇄살인범과 암살자는 이러한 자기 파괴를 통해 과시욕을 느낀다. 1980년 존 레논의 암살범 마크 채프먼은 암살 직후 “모든 사람이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레논을 죽임으로써 자신이 유명해질 것으로 생각했다. 자신의 삶 그리고 천재 뮤지션의 삶까지 파괴하려는 그의 끔찍한 선택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과 존 레논 그리고 《호밀밭의 파수꾼》을 세상에 널리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2. 칼 시퍼키스 《암살》

 

 

 

무슨 이유에서인지 저자에 대한 소개가 빈약하다. 역자의 말에 따르면 저자가 UIP 통신의 사회부 기자로 한때 몸담았고, 프리랜서 작가로 전향했다고만 소개했다. 이 책의 주제와 내용 구성면만 봐서는 콜린 윌슨의 책과 유사하다. 칼 시퍼키스의 《암살》 역시 콜린 윌슨의 《잔혹》을 펴낸 하서출판사의 책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마하트마 간디, 에이브러햄 링컨, 장 폴 마라, 명성황후, 박정희, 육영수, 제임스 1세 암살을 기도한 가이 포크스, 케네디 형제 등 굵직한 인류사의 중심을 관통한 암살 사건들이 백과사전식 형태로 정리되어 있다. 이 책의 장점이라면 역사 교과서에서도 보기 어려운 암살 사건들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으로부터 백여 년 전, 암살자의 총탄에 맞아 쓰러지기 직전인 미국 뉴욕 시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은 사진도 실려 있다. 이 사진의 진실을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미국인들도 이 사건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중남미, 아프리카에서 벌어진 테러 사건까지 소개되었기 때문에 사건항목별 내용이 비교적 적은 편이다. A4용지 1장 절반 분량이다. 어차피 이 책은 절판되었고, 암살의 역사를 정리한 책들이 많이 나왔으니 사서 보는 것을 추천하지 않는다.


 

 

3. 카를 브루노 레더
《세계 사형 백과》 (구판)

《사형 : 사형의 기원과 역사, 그 희생자들》 (개정판)

 

나와 유미오 《일본 고문형벌사》

 

 

 

 

 

이 책도 하서출판사에서 나왔다. 그래서 1990년에 나온 구판의 제목이 《세계 사형 백과》였다. 아마도 이때 출간된 콜린 윌슨의 《현대살인백과》과 짝을 맞추려고 의도적으로 이런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인간의 생명가치를 신성시하는 사상은 필연적으로 사형 폐지 쪽으로 이어진다. 사형제 폐지론자들은 아무리 흉악한 살인자라도 사형은 그보다 더 잔혹하고 비인도적이며 인간의 존엄을 깎아내리는 제도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오판, 인종적 사회적 차별과 편견이 개재될 위험도 높다. 하지만 사형제 유지 찬성론자들의 주장 또한 완고하다. 강간, ‘묻지마 살인’ 같은 흉악 범죄에 대한 사형은 사회 안정에 기여함은 물론 살인자는 생명으로 죗값을 치러야 세상의 이치와도 맞는다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범죄를 억제한다’는 통념에 비추어볼 때 사형 폐지는 범죄 피해자들에게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충격을 줄 수 있다. 독일의 방송 극작가인 저자는 《사형 : 사형의 기원과 역사, 그 희생자들》을 통해 사형의 부당성을 부각해 사형제가 권력에 의한 살인행위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일본 고문형벌사》는 다양한 일본의 전통 고문 방식을 집대성한 책이다. 주로 에도 시대의 고문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에도 시대 때 그려진 고문 장면을 묘사한 그림도 실려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괴롭게 느껴지는 그림들이 있으나 흑백 도판인 데다가 크기가 크지 않다. 고어 영화의 잔혹한 장면에 익숙할 정도로 비위 강한 독자는 시기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런데 고문 장면을 묘사한 그림 대부분은 여성들이 가혹하게 당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벌거벗은 상태의 여성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도 있다.

 

 

우리는 폭력을 증오한다. 누구도 폭력 앞에서 겪은 공포와 수치를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폭력을 가한 상대를 오랫동안 기억하며 증오하고 저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력에 열광하는 전근대적인 모습을 재현한다. 우리는 폭력을 증오하는 동시에 동경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단두대 주변에 모여 사형수의 목이 뎅강 잘려나가는 모습을 구경하는 과거 사람들과 우리는 과연 얼마나 다른가. 폭력이 한갓 호기심 어린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은 살아 있는 자의 존엄성에도 상처를 내는 것으로 어떤 명분이든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 속에서 여전히 들끓는 폭력에 대한 증오와 의존의 이중적 감정을 조정하기가 쉽지 않다. 애초부터 악마는 없다. 거울에 비추어 보면 누구라도 추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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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6-11-11 14: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아,,, 잔혹 이거 진짜 끝내주는 책인데....

cyrus 2016-11-11 18:18   좋아요 0 | URL
콜린 윌슨의 책을 좋아해서 절판본을 구하는 중입니다. ^^

북프리쿠키 2016-11-11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보다보니 평소 잘 몰랐던 단두대가 떠오르네요ㅎㅎ
프랑스혁명에 관해 잘 쓰여진 책 한권 추천부탁드립니다. 나폴레옹과 마리앙투아네트까지 잘 곁들여진 재미난
바이블이 없을까요?

cyrus 2016-11-11 18:21   좋아요 1 | URL
어려운 질문이군요. 프랑스 혁명 관련 책 중에 읽은 게 《오늘 만나는 프랑스 혁명》입니다. 프랑스 혁명부터 나폴레옹의 등장까지의 역사를 소개한 책입니다. ^^

블랑코 2016-11-12 0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 가는 책들이 많은데 전자책으로는 절대 안 나오겠죠? ㅠㅠ

cyrus 2016-11-12 17:23   좋아요 0 | URL
살인, 범죄 주제의 책은 많이 팔리지 않아서 일찍 품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현대살인백과》는 한동안 품절되었다가 다시 판매되기 시작한 책입니다. ^^;;
 
글로벌시대에 읽는 한국여성사
정현백 외 지음 / 사람의무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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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한다. 불과 30여 년 전만 돌아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미흡한 구석이 남아 있다.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아직도 상당 부분 개선해야 한다. 남성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회 구성원이 육아와 가사는 여성이 담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가장 쉽게 떠오르는 문제다. 잘못된 사회 구조와 의식이 성 불평등을 일으킨다. 여성은 생명의 뿌리이자 역사의 대지였다. 이름 없는 꽃이자 면면히 흐르는 생명의 물결이었다. 아쉽게도 역사 속에서 그 목소리, 그 모습을 쉽게 보고 듣지 못했다. 역사의 언어 바깥에서 흘러왔기 때문에 제대로 기록되고 평가되지 못한 채 여성들의 삶은 잊혀졌다.

 

이 책은 그러한 여성의 삶과 정신을 역사의 수면 위로 올려놓는 작업이다. 한국사를 관통하며 강인하고 폭넓은 정신으로 자기 세계를 일구어낸 여성의 역사를 정리해 공식적 역사로서 정당한 자리매김을 시도한다. 한국 여성사를 쓰는 것은 일반적인 역사 쓰기와 구별된다. 역사를 여성주의 관점으로 보는 작업이다. 유명한 여성인물 중심도, 사건 중심도 아닌, 일반적인 역사에서 보지 못했던 여성들의 삶을 고대부터 시작해서 현대까지 총체적으로 되살리는 것이다.

 

고대 모계사회에서 다산(多産)은 가장 중요한 생산력이었다. 여자가 많은 아이를 생산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수렵보다 채집이 안정된 생산을 보장했던 선사시대에서 생리적으로 채집에 유리한 조건을 가진 여성이 중심이 되는 모계사회는 당연했다. 하지만 노동력이 요구되는 농경사회에 진입하면서부터 남성들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고, 그 결과 가부장 사회로 진입했다. 고구려, 고려 시대에는 시집살이가 일반적인 풍습이었다. 흔히 쓰는 ‘장가간다’는 표현은 ‘사위가 장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고려 시대에는 형제, 자매들이 유산을 골고루 상속받아 해마다 돌아가며 제사를 지냈다. 아들이 없으면 딸과 사위 혹은 외손이 모계 쪽 제사를 지냈다.

 

하지만 처가살이와 모계사회의 흔적은 조선 시대 중기 이후 유교식 가부장제가 뿌리내리면서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남존여비와 남아선호 사상이 굳어지면서 딸의 상속권도 인정받지 못했다. 조선 시대의 여성들은 집안을 벗어난 사회 활동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었을 뿐만 아니라, 집에서도 가부장제라는 남성 중심의 규율에 따라 생활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그러나 가부장제의 희생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어두운 상황 속에서도 당당히 자신의 삶을 살아간 여성들도 있었다. 특히 여성들이 배운 한글은 자신의 존재를 부각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다.

 

 

 

근대사회로 넘어오면서 봉건적 모순이 결집한 결혼제도에 비판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여성평등문제가 구체적으로 제기된 것은 동학 농민전쟁 때 동학군이 과부의 재가허용을 요구한 것이 처음이다. 이후 재가허용, 조혼, 이혼의 자유 요구는 남녀평등문제의 핵심으로 제기됐다. 이와 함께 전통사회에서 교육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했던 여성들에 대한 제도교육의 필요성도 지적됐다. 이후 여학교 교육을 받은 이른바 신여성들이 1920년대 들어 늘어났다. 신여성들은 여성의 직업 활동과 함께 자유분방한 연애, 이혼의 자유를 주장하고 몸소 실천함으로써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근대 여성사를 논할 때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여성운동을 빠져선 안 된다. 최근 의병장으로 활동한 윤희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뒤늦은 감이 있지만 반가운 일이다. 윤희순은 항일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의병가를 직접 지어 부르고, 군사훈련에 참여했다.

 

여성이 시대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예견되는 지금까지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여성의 삶은 여전히 감추어져 있다. 역사의 갈피마다 배어 있을 여성의 활동을 조명하기에는 기록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남자의 글과 책 속에 묻혀버린 여성의 목소리와 삶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절실하다. 여성의 활동을 보존한 기록을 발굴하는 과정 중에 과거의 못된 남자들의 생각도 함께 발견하게 된다. 놀라운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자들을 가볍게 보는 남자들의 시선이다. 1920년 처음으로 여성 전화 교환수가 등장했다. 이들의 고충은 성희롱이었다. 조선의 남성 고객, 일본 남성들은 여성 전화 교환수들에게 성희롱을 일삼았다. 꼭 기억되어야 할 역사 속에는 이처럼 남자들이 부끄럽게 여기는 이야기가 있다. 뭐 부끄러워도 좋다. 역사 속에서 더 많은 여성의 삶을 불러내야 한다.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삶의 현장에 도전하고 승리했던 여성들에 대한 기록을 모으고 정리하여 우리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바로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다. 국정교과서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런 건 불쏘시개로 쓰고, 역사 속의 여성을 발굴하고 보존한 국사 교과서를 보고 싶다. 미래의 아이들이 이순신, 세종대왕 같은 남자 위인보다 여자 위인을 많이 찾는 날이 올 수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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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6-11-08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성 의병장 이야기는 정말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습니다. 역시 책 세계 이야기는 그 깊이를 가늠 할 수 없네요.

cyrus 2016-11-08 15:47   좋아요 0 | URL
특정 분야를 깊이 파고든 사람이 아닌 이상 많이 알려지지 않은 지식이나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
 

 

 

 

 

 

 

 

 

 

 

 

 

 

 

 

 

 

 

 

최순실 대통령의 시녀 박근혜는 우주의 기운이 도와줄 때까지 청와대에 나갈 생각이 없는 듯하다. 최순실 게이트를 보도한 뉴욕 타임스는 “무속인이 남한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고 전했다. 최순실이 포함된 비밀모임 ‘팔선녀’가 막후에서 국정개입은 물론 재계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언론 보도마저 나왔다. 무속신앙과 정치권력의 결탁으로 인해 우주의 기운이 오기는커녕 국가의 기운이 빠져버리고 말았다. 영생교를 둘러싼 최순실과 박근혜의 연결고리 그리고 이와 관련된 음모론이 쏟아져 나오는 상황을 보면 디트리히 에카르트와 히틀러와의 관계가 떠올린다.

 

 

 

 

 

디트리히 에카르트는 히틀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별 볼 일 없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을 탕진하고, 노숙자 신세를 졌다. 에카르트는 헨리크 입센의 희극 《페르 귄트》를 독일어로 각색하여 대박을 터뜨렸다. 그는 자신과 알고 지낸 히틀러에게 《페르 귄트》를 헌정했다.

 

 

 

 

히틀러는 에카르트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에카르트는 히틀러를 위해 멋진 프렌치코트 한 벌 사줬고, 베를린 왕립 극장의 연극 공연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실 히틀러는 남들보다 책을 많이 있었어도 글쓰기 실력은 형편없었다. 전문적으로 글을 썼던 에카르트는 히틀러의 ‘빨간펜 선생님’이 돼 주기도 했다. 히틀러는 여러 차례 연설할 기회를 가졌고,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서재에 보관되었던 장서들을 조사하여 히틀러의 생애를 추적한 《히틀러의 비밀 서재》의 저자 티머시 W. 라이백은 히틀러가 에카르트의 각본에 따라 ‘가장 악명 높은 반유대주의자 역할’을 맡았다고 주장했다.

 

 

 

 

 

 

 

 

 

 

 

 

 

 

 

 

 

 

 

히틀러의 주임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 1905~1981)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히틀러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고 썼다. 히틀러는 자신의 추종자나 심복이 많음에도 사적인 친밀감을 느끼기 어려운 폐쇄적인 성격이었다. 슈페어는 루돌프 헤스(Rudolf Hess, 1894~1987)의 증언을 토대로 히틀러와 가깝게 지낸 에카르트를 주목했다.

 

헤스는 당시에 단 한 사람만이 히틀러와 친밀한 인간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디트리히 에카르트였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히틀러의 입장에서 보면 우정이라기보다는 연장자에 대한 예의였다고 보는 편이 옳다. 그는 반유대주의 계열에서 가장 저명한 작가였다. 1923년 에카르트가 사망하자, 히틀러가 친한 친구끼리 사용하는 호칭 ‘Du’(2인칭의 친근한 표현, 너)로 부르는 사람은 네 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헤르만 에서, 크리스티안 베버,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에른스트 룀이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 174쪽)

 

 

에른스트 룀(Ernst Röhm, 1887~1934)은 나치돌격대(SA) 참모장으로 히틀러의 권력 장악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룀은 히틀러의 2인자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히틀러는 그런 ‘친근한’ 룀의 존재감을 부담스러웠다. 1934년 6월 30일 이른바, ‘장검의 밤’(Nacht der langen Messer)이라는 사건이 일어나 룀 세력과 나치돌격대 일원 모두 체포, 살해했다.

 

티머시 W. 라이백은 히틀러의 서재에 발견된 오컬티즘(Occultism) 관련 서적이 히틀러가 오컬트와 신비주의 등에 심취한 사실을 알려주는 증거로 봤다. 히틀러 음모론 중 절대로 빠지지 않은 필수 요소가 바로 ‘히틀러와 오컬트의 연관성’이다. 박근혜가 ‘우주의 기운’을 믿었다면, 히틀러는 순수 혈통으로 이루어진 아리안(Aryan) 족의 우수성을 믿었다. 두 사람이 간절히 믿었던 대상은 실제로 성립 불가능한 것들이다. 히틀러는 순수한 아리안 혈통이 더럽혀지는 것에 대한 강박에 사로잡혀 유대인을 ‘세상의 질병’으로 매도했다. 오컬트 마니아들은 히틀러가 ‘신비주의 밀교 조직’에 가입하여 자신을 지배한 사탄을 위해 세계를 파괴하는 음모를 꾸몄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그래도 히틀러가 ‘신비주의 밀교 조직’ 비슷하게 분위기를 띤 단체와 밀접하게 관련 있는 점은 사실이다.

 

 

 

 

 

 

 

 

 

 

 

 

 

 

 

 

 

1918년 뮌헨에 창설된 툴레 협회(Thule-Gesellschaft)는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모임이지만, 정식 명칭이 ‘고대 게르만족에 관한 연구 모임’이다. 툴레 협회 일원들이 공통으로 연구하는 것은 신비주의인데, 이들은 영적인 힘을 빌려 ‘아리안의 부활’을 기도했다.

 

 

 

 

 

툴레(Thule)는 원래 고대 문헌 및 지도에 언급된 극북(Far North) 지역의 섬을 의미했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학자들은 온갖 상상력을 동원하여 툴레의 정확한 위치를 추정했다. 툴레 협회 일원들은 현실에 없는 섬에 관한 고대 전설에 매료되어 그곳이야말로 아리안 민족의 요람지로 믿었다. 히틀러가 툴레 협회에 가입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는지 불명확하지만, 히틀러와 툴레 협회의 관심사는 똑같다. 반유대주의자이자 히틀러의 ‘빨간펜 선생님’ 에카르트는 물론, 루돌프 헤스,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 1929~1945), 알프레트 로젠베르크(Alfred Rosenberg, 1893~1946) 등이 툴레 협회 회원이었다.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나치즘 옹호 이론가로 활동하여 《20세기의 신화》라는 책을 발간하여 독일 나치스(Nazis)의 중요 인사로 승승장구했다. 이 책은 히틀러의 《나의 투쟁》 다음으로 독일 제3제국을 대표하는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나, 앞에 서술했듯이 《20세기의 신화》 역시 잘못된 편견과 망상이 만들어 낸 ‘불쏘시개’에 가깝다. 《20세기의 신화》는 나치스의 이념인 국가 사회주의의 기초를 정립한 문헌이다. 그래서 에카르트와 로젠베르크 등이 활동한 툴레 협회를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 즉 나치스의 전신으로 보기도 한다. 하겐크로이츠가 툴레 협회의 공식 엠블럼과 유사하다.

 

로젠베르크는 히틀러에게 존경을 담아 《20세기의 신화》를 헌정했는데, 정작 히틀러는 이 책에 큰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 책에 나온 내용은 수십 년간 독서를 통해 히틀러가 이미 정립했던 것들이다. 아니면 누구보다 열등감이 강했던 히틀러가 로젠베르크의 필력에 질투했을 수 있다. 《나의 투쟁》 초판은 겨우 팔릴 정도였다. 실패작에 가까운 책은 권력에 힘입어 히틀러 시대의 필독서로 급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자신의 한계를 알았다. 자신 스스로 《나의 투쟁》을 형편없는 책으로 평가했다.

 

 

 

 

 

 

 

 

 

 

 

 

 

 

 

 

 

 

독일의 역사학자 제바스티안 하프너는 히틀러의 삶 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 되는 주석으로 ‘결핍’이라는 한 단어로 요약했다. 히틀러는 중급 공무원에 불과한 친아버지보다 작가로서 부와 명성을 거머쥔 에카르트에 더욱 기대어 의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가 준비한 각본을 믿고 따르며 정치가로 변신한 히틀러는 ‘실패한 화가’라는 굴욕적인 인생의 명함을 떼어내는 데 성공했다. 에카르트는 히틀러를 평생 괴롭히는 상처가 될 ‘결핍’을 채워준 중요한 존재이다. 그렇듯이 최순실은 박근혜의 ‘결핍’을 채워주기 위해 그녀를 도와주었고, 박근혜는 평생 꼬리표로 달라붙은 ‘박정희의 딸’, ‘만년 2인자’를 18대 대선에 승리하여 떼어냈다. 그렇게 의기양양한 최순실은 박근혜를 위해 옷 입은 것부터 시작해서 연설문 작성 등 모든 일에 관여했다. 다만, 최순실이 박근혜에게 가르쳐주지 못한 것은 작문 방식이다.   

 

에카르트는 히틀러의 나치스가 독일을 지배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만약 에카르트가 건강해서 히틀러의 곁을 지켰다면, 괴벨스(Goebbels, 1897~1945)는 선전장관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히틀러는 에카르트는 ‘나치 운동의 북극성’이라고 치켜세웠다. 히틀러는 에카르트라는 북극성의 기운을 받아 독일을 장악했다.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말을 빌리자면 “좋든 싫든 독일 제3제국은 히틀러의 작품”이었다. 여기서 더 크게 보면, 에카르트의 작품이었다. 독일 제3제국은 극작가 디트리히 에카르트가 원하던 세상의 무대이며, 그 무대 위에 선 주인공은 히틀러였다. 지금까지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연극했던 4년의 시간은 좋든 싫든 최순실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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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쥐의 독서일기 2016-10-30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요일 11시쯤에 하는 서프라이즈의 단골 주제가 히틀러거든요. 워낙 띄엄띄엄 봐서 연결이 잘 되지 않던 이야기를 쫙 정리해주시니까 이해가 잘 되네요. 근데 왜 마지막에는 열이 확 받는지.. 그간 찝찝한 부분이 드러나서 이제 시원(?)한 부분도 있는데 그 이상의 분노가 생기는 요즘입니다.

cyrus 2016-10-31 10:13   좋아요 0 | URL
<서프라이즈>가 문헌이나 인터넷 정보를 수집해서 방송 분량을 만드는 것 같은데, 문제는 인터넷 정보 대부분이 음모론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가끔 <서프라이즈>를 보긴 합니다만, 모든 방송 내용을 다 믿진 않습니다. 번거로워도 관련 서적 여러 권 읽는 것이 정확한 지식을 얻는 데 도움이 됩니다. ^^

yureka01 2016-10-30 1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히틀러도 웅변술이 일가견있죠.

그에 반해...원고 없이는 안된다는 게,
기자회견 라이브에 질답이 예약이었던걸 보면 뭐..ㄷㄷㄷ

cyrus 2016-10-31 10:16   좋아요 0 | URL
그 분이 기본 능력조차 없는 걸로 봐서는 우주가 그 분을 외면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