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겠습니다 - 일본군 위안부가 된 남한과 북한의 여성들
이토 다카시 지음, 안해룡.이은 옮김 / 알마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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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이상한 단체’가 있다. 그들은 소녀상 철거를 주장한다. ‘이상한 단체’의 대표는 지난달 부산에 있는 ‘평화의 소녀상’ 옆에 쓰레기더미를 쌓아 놓고 간 사람이다. ‘이상한 단체’의 정체는 소녀상 설치에 반대하는 ‘진실국민단체’이다. 진실국민단체 회원들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을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세력들이 소녀상 설치를 추진한다고 비난한다. 그리고 소녀상 옆에 이승만, 박정희 대통령 흉상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70대 노인은 일본과의 우익을 증진하기 위해서 자신이 직접 소녀상을 훼손하려고 시도했다. 이처럼 평화의 소녀상에 대한 극우단체의 과격한 행동이 도를 넘었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이 20여 년간 이어온 투쟁은 2015년 12월 28일의 ‘졸속’ 한 · 일 위안부 합의로 빛이 바랬다. 박근혜 정부는 억울한 희생자들을 부끄러운 과거 역사의 한 부산물로만 간주, 은폐와 망각의 세월 속에 묶어 두려는 어리석음을 범해 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지금도 한국 땅은 물론 북한, 중국, 필리핀 전역에 종군위안부로 일제에 끌려갔던 피해 할머니들이 한 많은 사연을 널리 알리지 못한 채 불치의 병으로 혹은 가난으로 고통과 시련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그동안 일본군 성노예 피해 여성들을 ‘종군위안부(comfort women)’로 지칭했다. 그러나 피해 할머니들이 겪은 참담한 상황을 고려하면 ‘종군위안부 할머니’는 정확한 용어가 아니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한국, 북한 등 아시아 등지를 답사하며 성노예 피해자 할머니들을 만난 사진작가 이토 다카시(伊藤孝司)는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연행된 여성을 ‘일본군 전용 성노예 피해자(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로 부르고 있다.

 

 

지금도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종군위안부’라는 단어는 군 위안소에서 여성들이 받았던 피해 실태와는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 피해 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종군’한 것이 아니다. 장기간 감금하고 집단으로 강간한 행위를 ‘위안’이라고 부를 수 없다. 정확히 표현하면 ‘일본군 전용 성노예’이다. (14쪽)

 

 

일본 정부 관리들은 자신들이 만든 위안부 제도에 따라 한국과 중국, 필리핀 등지로부터 20만여 명의 여자들을 강제 또는 감언이설로 끌고 가 아시아 점령지역 주둔 일본군의 성적 노리개로 삼았다. 성노예 피해 여성들은 좁고 불결한 방에 하루 스무 명이 넘는 남성을 상대해야 했다. 탈출하다 잡혀 고문을 당했고, 많은 피해 여성들이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생존자들도 평생 지을 수 없는 정신적 · 육체적 상처를 입었다. ‘성노예’라는 강한 어감 때문에 이토 다카시가 사용하는 명칭이 부정적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과거의 부끄러운 행위의 의도를 어떻게든 축소하려고 ‘종군위안부’라는 표현을 고집한다. ‘종군’과 ‘위안’이라는 단어는 피해 여성들이 군인들에게 자발적으로 ‘성적 위안’을 제공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명확한 단어 사용이 필요하다.

 

 

 

 

 

명칭을 보다 알기 쉽게 전달하려고 간략하게 ‘성노예’로 부르는 경우가 있는데, 나는 ‘성노예’ 명칭을 사용되는 것에 반대한다. 명칭이 길어도 ‘일본군 전용 성노예 피해자’ 혹은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라고 정확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극우세력들은 전 세계 인류사를 통틀어 여성이 전쟁에 성노예로 동원된 역사의 전례가 있기 때문에 일본에만 ‘야만적인 범죄 국가’로 덮어씌우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한다. 특정 과거를 회피하기 위해 더 오래된 과거까지 들먹이는 그들의 논거가 빈약하기 짝이 없다. 일본이 만들어낸 위안부는 인류사상 전례가 드문 전쟁범죄 행위였다. 이토 다카시도 ‘대규모로 여성을 군대 전용의 성노예로 만든 국가는 일본뿐’(14쪽)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극우단체는 일본과의 외교적 친선 관계를 조성하기 위해 소녀상 철거를 시도하고,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충분히 받았다고 믿는다. 심지어 일본군이 여성을 강제로 동원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일본군 성노예 피해 문제를 지엽적으로 인식하는 그들의 태도는 ‘인류사에 남은 범죄’를 덮는 일본 정부를 돕는 형태다.

 

 

 

 

이토 다카시는 20년 넘게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을 취재하면서 그분들의 목소리를 가까이서 들었다. 그의 눈은 ‘역사의 상처가 만든 흉터’를 바라봤고, 귀는 반세기 동안 과거의 틀에 영영 갇힐 뻔했던 할머니들의 처절한 목소리를 하나하나 흘리지 않고 담아냈다. 그의 사진은 너무나 생생하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꽃다운 나이 씻기지 않을 상처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보는 독자의 가슴에 멍울지게 한다. 《기억하겠습니다》는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를 좀 더 높이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 아니다. 1991년 처음으로 종군위안부의 비인도적 행태를 고발한 故 김학순 할머니의 유언처럼 《기억하겠습니다》는 ‘강요에 못 이겨 했던 그 일(위안부)을 역사에 남겨 두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위안부 문제가 제기될 때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바로 극우세력의 잘못된 시각이 오늘날 일본 정부가 보여 주고 있는 오만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무지로 무장한 극우세력의 태도는 은폐와 발뺌으로 일관해 온 가해자 일본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에 앞서 어쩌면 무관심과 망각으로 이를 방조해 온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에게 그 책임을 되묻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이 진심으로 과거를 반성시키려는 최소한의 노력마저 게을리 한 채 ‘과거 청산=합의금’으로 인식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기억하겠습니다》는 우리 사회가 처한 슬픈 현실이 어떤지 알려준다. 왜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들을 잊어서는 안 되는가를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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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30 15: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4-30 15:54   좋아요 4 | URL
이번에 당선된 대통령은 박근혜와 최순실이 같이 싼 빅똥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다만 힘센 남자라고 자랑하는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똥 치우는 일에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겁니다.

겨울호랑이 2017-05-01 13: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우리가 일본군에 의한 피해도 지속적으로 요구해야겠지만, 베트남전에서 우리의 잘못에 대한 사과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잘못에 대한 사과가 선행되어야 국제적으로도 우리의 요구가 보다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질 것 같습니다..

cyrus 2017-05-01 13:40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코피노 문제도 장기적인 관심이 필요한데, 너무 쉽게 잊혀집니다.

stella.K 2017-04-30 18: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작년 말인가?
소녀상을 지키는 기륵한 젊은이들이 있더군.
젊은이들 자기 밖에 모르고 스펙 쌓는데만 열 올린다고
하지만 그런 젊은이들도 있어.
심성정인가? 대통령되면 위안부 재협상 할 거라고 하던는 것 같은데
누가 대통령이 됐든 정말 이 문제는 다시 생각해 봐야한다고 봐.

cyrus 2017-05-01 13:42   좋아요 0 | URL
소녀상을 지키는 분들은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워요. 그들은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잖아요. 적극적인 행동은 못하더라도 ‘위안부 할머니‘ 명칭이 부정적인 이유 정도는 알고 있어야한다고 생각해요.

오쌩 2017-04-30 20: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시오노 나나미의 망언에 분노한적이 있었어요. 누가 위안부라고 이름 붙였는지 모르지만 참 상냥한 이름이라는 소리에, 과연 인간은 반성이 가능한 동물인가 생각했었죠.

다음 정부는 정말 할일이 많겠네요...

cyrus 2017-05-01 13:45   좋아요 0 | URL
저도 ‘위안부 할머니‘ 명칭을 안 쓰려고 해요. 쓰쓰이 야스타카의 망언이 공개되자마자 그의 책을 절판시킨 출판사들이 있는 반면에 여전히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펴내는 한길사의 행보를 보면 아이러니합니다.
 
라스푸틴 - 그는 과연 세상을 뒤흔든 요승인가
조지프 푸어만 지음, 양병찬 옮김 / 생각의힘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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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러시아 정교회는 발레 연극 『라스푸틴』(Rasputin)의 공연을 중지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니콜라이 2세(Nikolai II)가 연극 무대에 오르는 일이 성인(聖人)을 모독하는 불경죄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Bolsheviks)에 의해 일가와 함께 처형된 로마노프(Romanov)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다. 2000년 러시아 정교회는 니콜라이 2세 일가 전원을 러시아 정교회를 지키려다 순교한 성인으로 인정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무대 위에서 하얀 무용복을 입고 춤을 추는 성인의 모습이 눈꼴사나워 볼 수 없었다. 사실 그들은 제정러시아 시대의 막을 내리게 한 니콜라이 2세 일가와 라스푸틴의 친밀한 관계를 떠올리기 싫었을 것이다. 라스푸틴 평전을 쓴 조지프 푸어만(Joseph Fuhrmann)의 말대로 니콜라이 2세와 그의 황후 알렉산드라라스푸틴의 조종에 따라 움직인 '로마노프 가의 어릿광대들'이었다.

 

지금까지 라스푸틴은 니콜라이 2세 부부의 무한 신뢰에 힘입어 국정을 농단한 사악한 수도승으로 알려져 있다. 로마노프 왕조 최후의 생존자로 알려진 아나스타샤(Anastasia) 공주의 이야기를 그린 장편 애니메이션 『아나스타샤』에서 라스푸틴은 사악한 마술사로 그려진다. 아나스타샤는 라스푸틴이 일으킨 반란으로 피란을 떠난다. 라스푸틴은 역사적 고증을 무시한 채 만들어진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영향, 그리고 라스푸틴의 삶 자체를 오컬트 문화에 끌어들이고 싶어 하는 호사가들 때문에 흑마술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요승으로 변신한다.

 

조지프 푸어만의 《라스푸틴》은 무성한 소문과 편견으로 뒤덮인 수도승의 실체를 밝히는 책이다. 푸어만은 소비에트 체제에 의해 비공개로 봉인되었던 비밀문서들을 토대로 라스푸틴의 삶을 재구성한다. 그가 참고한 비밀문서 중에는 알렉산드라가 라스푸틴에게 보낸 연서로 알려진 편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 편지를 근거로 호사가들은 러시아 황후와 요승의 염문설을 제기한다. 그러나 푸어만은 염문설을 부정한다. 알렉산드라는 라스푸틴에 향한 기대감을 아주 크게 가지고 있었을 뿐 애정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기적에 가까운 라스푸틴의 예지 능력을 믿고 있었다. 특히 라스푸틴이 알렉세이(Alexei) 황태자가 앓던 혈우병을 고친 일은 왕족 부부의 환심을 얻는 데 성공한다.

 

그 당시에 혈우병을 고칠 수 있는 약이 존재하지 않았다. 왕족 부부와 라스푸틴의 추종자들은 황태자의 불치병을 낫게 해준 수도승의 능력을 '신이 내려준 신통한 힘'이라고 믿는다. 호사가들은 라스푸틴이 마술을 써서 황태자를 치료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증언과 주장 들은 '요승 라스푸틴' 신화를 만들어준 필수 요소가 된다. 사실 라스푸틴은 황태자의 병을 고치지 못했다. 알렉세이는 죽을 때까지 혈우병으로 고생했다. 라스푸틴은 화려한 언변으로 어린 황태자가 몸의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황태자의 마음을 진정시켰을 뿐이다. 왕족들은 황태자의 병이 나을 거라는 기대심이 컸고, 황태자의 통증을 잠시나마 완화해준 라스푸틴이 기적을 행한 거로 믿었다.

 

왕족 부부들은 철석같이 라스푸틴 한 사람에게만 믿고 의존했던 것일까? 니콜라이와 알렉산드라는 마치 최면술에 걸린 것처럼 라스푸틴이 알려준 조언들을 받아들였다. 수도승이 멋대로 국정을 휘어잡는 상황에 불만이 많은 왕족 측근들이 라스푸틴의 문제점을 알려줘도 왕족 부부는 무시했다. 반 라스푸틴 세력들은 라스푸틴이 문란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찌라시'까지 퍼뜨려보지만, 왕족 부부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데 역부족이었다. 왕족 부부는 보고 싶은 것만 봤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했다. 이렇다 보니 왕족 부부는 라스푸틴 추종자들의 선동과 라스푸틴을 음해하는 찌라시 사이에서 무척 갈팡질팡했을 것이다. 니콜라이 2세는 실제로 황제로서의 강력한 카리스마가 부족한 우유부단한 성격이었고, 알렉산드라는 오로지 라스푸틴의 기적을 믿었다. 이러한 왕족 부부의 착각에서 빚어진 지나친 믿음은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는 원인이 되어 러시아 혁명을 일으키는 빌미가 된다.

 

라스푸틴은 자기 관리가 철저한 인물이다. 그리고 권력에 눈이 멀어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지 않았으며 귀족 부인들과 은밀한 동침을 위해 유혹하지 않았다. 라스푸틴은 이름을 잘못 개명하는 바람에 부정적인 풍문에 시달려야 했다. 라스푸틴 집안은 원래 '로스푸틴(Rosputin)'이라는 이름을 가졌고, '라스푸틴'으로 개명했다. 그런데 '라스푸틴'이 방탕함을 의미하는 러시아어와 비슷했다. 라스푸틴은 젊은 시절부터 이름 때문에 추문에 시달렸다. 라스푸틴은 학교에 다닌 적이 없는 까막눈이였다. 그는 수도승이 되려고 단시간 안에 글자를 익히는 데 성공하지만, 여전히 그의 작문 실력은 형편없었다. 알고 보면 라스푸틴은 어린 시절부터 약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을 '아웃사이더(outsider)'라고 회상할 정도였다.

 

라스푸틴을 유혹하게 한 것은 그를 추종하는 여성들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돋보여주는 권력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다. 권력은 라스푸틴의 열망을 충족시켜줬다. 개명한 이름과 어린 시절의 약점을 잊으려고 자신을 과대 포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의심 없이 믿어버린 왕족 부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 라스푸틴은 달콤한 권력의 맛을 알게 됐다. 라스푸틴은 자신의 영적 능력이 사라지는 것에 두려워하는 망상에 시달린다. 사실은 권력에 취해 잊고 있었던 자신의 약점이 들통 나는 상황이 다시 찾아올까봐 두려웠다. 라스푸틴은 권력의 맛에 중독된 탐욕스러운 수도승이었다. 그는 왕족 부부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속이려고 했다. 신의 계시를 받은 인간으로 되려는 그의 부질없는 욕심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제정러시아의 파멸까지 초래했다. 로스푸틴이 '라스푸틴'으로 개명하지 않았거나, 아예 그가 태어나지 않았다고 해서 세상이 좋아질 거로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이 세상에는 라스푸틴처럼 이성을 마비시킬 정도로 인간의 심리적 약점을 교묘히 파고들어 이용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왕족 부부처럼 특정인을 의심 한 번 하지 않은 채 너무나 쉽게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도 있다. '좋든 싫든 이 세계는 라스푸틴의 작품'[1]이다.

 

 

 

 

 

[1] 제바스티안 하프너 《히틀러에게 붙이는 주석》 (돌베개,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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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4-25 15: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4-25 17:40   좋아요 1 | URL
제정러시아가 무너진 원인이 아주 많아요. 황제 부부는 정치적 시야가 좁은 라스푸틴 이 한 사람의 말만 믿었고, 이로 인해 제정러시아의 경제적 상황이 안 좋아졌고, 황제는 민심을 잃어버렸습니다.

캐모마일 2017-04-25 20: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라스푸틴은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주연급에 어울리는 인물 같습니다. 자연사 박물관에 보관된 라스푸틴의 중요 부위라는 사진이 검색하면 쉽게 나오고 한때 화제가 되었던 기억이 나네요. 당대에 크고 아름답다는 소문이 어찌나 무성했던지 그가 비명횡사한 뒤 한 여인이 떼어낸 게 지금까지 남아있다구요...ㅎㄷㄷ 죽기 전에도 독극물을 먹고 집단 린치에 총을 몇 발 맞아도 살았다는 이야기를 서프라이즈에서 봤네요. 그걸 그림이란 미드에서 괴담을 모티브로 괴물 종족을 설정하기까지... 이렇게 미스터리한 소문이 여전히 전래되는 이유는 살아 생전에 국가를 홀린 요승에다 온갖 추문의 주인공이었던 인물이라 그런가 싶기도 하네요.

˝무성한 소문과 편견으로 뒤덮인 수도승의 실체를 밝히는 책이다. 푸어만은 소비에트 체제에 의해 비공개로 봉인되었던 비밀문서들을 토대로 라스푸틴의 삶을 재구성한다.˝니 읽어보고 싶네요. 요승의 대명사 라스푸틴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cyrus 2017-04-26 11:39   좋아요 0 | URL
아마도 ‘서프라이즈’에서도 라스푸틴을 소재로 한 에피소드가 나왔을 겁니다. 제가 읽은 <라스푸틴>에 라스푸틴이 암살당하는 과정, 그리고 그 암살에 대한 여러 가지 가설들을 언급합니다. 저자가 라스푸틴과 관련된 ‘찌라시’성 가설을 반박하는 내용이 볼만했습니다. ^^
 
조선의 생태환경사
김동진 지음 / 푸른역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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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옛 전통마을은 산을 뒤로하고 하천을 바라보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가파르지 않은 남향 산기슭에 발달했다. 마을 앞의 논은 오랜 세월 산에서 흘러내린 유기질 토양이 쌓인 문전옥답(門前沃沓)이었다. 마을 뒤 경사면은 연결되었다. 이런 공간 배치는 풍부한 샘물로 취수가 편리하고, 일조량이 많고, 북서 계절풍을 피할 수 있으며 연료 채취에 유리했다. 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전에는 우리 조상들은 자연의 이치를 절로 체득했다.

 

역사학자인 저자가 펴낸 《조선의 생태환경사》는 우리 선조의 삶에 깊이 뿌리내린 생태학적 관점을 찾아내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준다. 생물은 주위 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생물 상호 간에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살아간다. 이처럼 생물과 환경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으며 하나의 계를 이루는 것을 생태계라고 한다. 생태학(ecology)은 자연 존재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각종 지구 생명체를 부양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인간과 인간 문화도 그런 자연의 순환에 편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생태주의 시각으로 보면, 15세기 조선 건국 초기에 이미 생태주의에 반하는 문명이 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땅은 삶의 터전이자, 귀중한 목숨과도 같다. 농부들은 자연이 일으키는 핍박을 받으면서도 땅을 지키고 가꾸며 수확했다. 자연의 대지를 농지로 개간하는 과정에서 그곳에서 서식하던 호랑이들이 사람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호랑이는 가죽이 비싼 값에 팔리는 털가죽 때문에 조선 시대 중기부터 마구잡이로 포획되었다. 일반적으로 일제강점기에 한반도에 온 일본인 사냥꾼들이 호랑이 가죽을 얻을 겸 민족정신 말살 목적으로 호랑이를 사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호랑이 개체 수가 줄어들었다고 보기 어렵다. 조선 초기부터 호랑이 사냥 정책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호랑이 개체 수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다.

 

소나무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나무가 된 것은 농경문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화전을 일구면서 산불이 자주 발생하는 바람에 활엽수는 줄고, 침엽수인 소나무가 늘어났다. 전염병은 역사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인이 된다. 전염병의 유행을 일종의 재난으로 치부해 위정자의 허물을 물어 권력 교체가 이뤄진 적도 있다. 이런 전염병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저자는 농지를 소중히 여기는 농경문화에 혐의를 두고 있다. 조선의 전염병은 콜레라나 장티푸스, 이질, 홍역 등이 있었다. 누구나 한번은 걸린다고 하는 홍역은 전염성도 강해 일단 발생하면 삼천리 금수강산은 온통 죽음의 강토로 변하곤 했다. 그래서 ‘홍역을 치렀다’는 표현은 비참의 극을 형용하는 말이 되었다. 선조들은 전염병을 하늘이 내린 재앙으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땅이 내린 재앙이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선조들이 소중히 가꾼 농지에 전염성 세균이 득실거렸다.

 

안정된 생태계는 어떤 원인에 의해 평형이 부분적으로 깨지더라도 그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다시 원상태로 회복된다. 그러나 자기 조절 능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어떤 충격이 가해지면 생태계는 균형을 잃게 되어 평형은 깨어지고, 결국 생태계 전체가 파괴되기도 한다. 그리고 한 번 파괴된 생태계는 원상태로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만약, 생태계가 파괴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의 생존에 뜻하지 않은 중대한 피해가 발생하기도 한다. 농지를 만들기 위해 무너미(범람원의 순우리말)를 개간하면서 그곳에 서식하는 동물이 사라졌다. 선조들은 풍족한 쌀 수확량을 확보했으나 홍수와 전염병의 공포를 안고 살아야 했다.

 

자연에 대한 15~19세기 한국인의 태도는 기존에 생각한 것과 다르게 ‘자연 친화’와 거리가 멀다. 자연을 섬겼어도 생존과 직결된 상황이 생길 때마다 자연을 이용했다. 그 시절 한국인들도 자신을 한반도의 주인으로 자처하면서 자연 정복을 정당화했을 수도 있다. 이 책의 전체를 관류하고 있는 조선 시대의 생태환경에 대한 치밀한 관찰과 분석을 끝까지 따라가기만 한다면, 누구든지 자연에 대해 전과는 다른 시선을 가지게 될 것이다. 

 

 

 

 

 

※ 딴지 걸기

 

“일찍이 찰스 다윈(1809~1882)《동물학》(Zoonomia, 1794)에서 생명체를 개체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강조한 바 있다.” (프롤로그 10쪽)

 

→ 《동물학》의 저자는 찰스 다윈이 아니라 그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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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모마일 2017-04-06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덕분에 잘 모르는 양서를 소개받고 갑니다. 저도 베스트셀러, 신간류가 아니라 스스로 양서를 발굴해서 읽는 수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좋은 글 읽고 갑니다.^^

cyrus 2017-04-06 16:04   좋아요 0 | URL
알라딘이 잘 알려지지 않은 책을 읽으면서 리뷰를 쓰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저도 그분들이 쓴 리뷰 덕분에 관심 분야를 넓힙니다. ^^

낭만인생 2017-04-06 1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꼭 읽고 싶네요.

cyrus 2017-04-06 16:05   좋아요 0 | URL
내용이 어렵지 않습니다. 미시사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
 

 

 

 

 

 

 

 

 

 

 

 

 

 

 

 

 

 

 

 

*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프랭크 맥린 (다른세상, 2011년)

* 《로마인 이야기 11 : 종말의 시작》 시오노 나나미 (한길사, 2003년)

 

 

과거 동 · 서양의 왕가들은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근친혼을 했다. 《명상록》의 저자 로마 오현제(五賢帝)의 한 사람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사촌지간인 파우스티나(Faustina)와 결혼했다. 마르쿠스의 일대기와 《명상록》을 같이 읽어보게 되면 황제의 결혼 생활이 실제로 어떤지 궁금할 수 있다. 역사가들은 이 주제에 상당히 흥미로워했다. 프랭크 맥린(F. McLynn)과 (역사가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지만) 시오노 나나미(Shiono Nanami)는 고대 문헌들을 토대로 황제의 결혼 생활을 주목 · 분석했다.

 

정설에 따르면 마르쿠스의 아내 파우스티나는 ‘정숙하지 못한 아내’로 알려졌다. 그런데 마르쿠스는 《명상록》에 아내에 향한 헌사를 남겼다.

 

 

“너무도 순종적이고, 너무도 사랑스러우며, 너무도 소탈한, 너무도 좋은 여인.”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456쪽)

 

 

“더없이 다소곳하고 더없이 다정하고 무엇보다도 전혀 꾸밈이 없는 여자” (《로마인 이야기 11 : 종말의 시작》 158쪽)

 

마르쿠스와 파우스티나가 부부로서 함께 지낸 생활은 30년. 그 짧지 않은 세월 속에 파우스티나는 14명 혹은 15명의 자식을 낳았다. 시오노 나나미는 파우스티나가 다산한 사실만 가지고 두 사람의 성생활이 활발했으며 결혼 생활이 행복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서술했다. 시오노 나나미가 역사가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가끔 그녀는 역사를 서술할 때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다. 물론, 성생활이 부부의 행복에 무척 중요하다. 그렇지만 성관계를 더 많이 한다고 해서 무조건 부부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성관계의 빈도보다는 부부 간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만족감을 느끼는 성관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1]

 

 

 

 

 

 

 

 

 

 

 

 

 

 

 

 

* 《고대 로마인의 성과 사랑》 알베르토 안젤라 (까치, 2014년)

 

 

로마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리 ‘사랑’해서 결혼하고, 섹스하지 않았다. 로마인은 결혼을 가문과 국가의 기강을 유지하기 위해 해야 할 사회적 규범으로 받아들였다.

 

마르쿠스 시대의 역사가들은 파우스티나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를 근거로 현대의 역사가들과 《명상록》의 번역가들은 파우스티나가 결점이 많은 아내로 소개했다. 프랭크 맥린은 파우스티나의 부정적인 측면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 번째 근거, 정치 문제에 지나치게 간섭했던 것. 두 번째 근거는 고집 세고 잔소리가 심한 황후의 성격이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Xanthippe)와 닮았다는 점. 마지막으로 황후가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해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점이다. 마르쿠스와 파우스티나는 완전 정반대의 성격이다. 마르쿠스는 늘 차분한 성격에, 어떤 일에 대해서 신중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성관계를 좋아하지 않았다. 파우스티나 입장에서는 굼뜨고, 무미건조한 남편이 답답해 보일 수밖에 없다.

 

고대의 역사가들은 동시대의 황제에 대판 평을 다분히 주관적으로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역사가가 어떠한 사료를 참고했는가에 따라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 또한, 그 사료를 참고한 학자는 자신의 입맛에 맞게 역사를 편집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마르쿠스 시대의 역사가들의 증언을 참고할 뿐 비중 있게 보지 않는다. 그녀는 고대의 사료를 무시하고, 파우스티나가 ‘현모는 아니었지만, 틀림없이 양처였을 것’이라고 썼다. 그 근거로 《명상록》에 있는 아내를 위한 헌사인데, 솔직히 이것만 가지고 파우스티나를 ‘양처’라고 추측하기에는 근거가 빈약하다. 시오노 나나미는 파우스티나가 전장으로 향한 남편이 돌아올 때까지 홀로 기다렸으며 병사들의 기지에 방문할 정도로 남편 못지않게 존경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파우스티나를 ‘악처’로 보는 프랭크 맥린의 주장과 충돌한다.

 

파우스티나를 크산티페와 동일한 인물로 보는 맥린의 관점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 소크라테스는 가정을 소홀히 한 남편이다. 남들과 달리 평범하지 않는 남편 때문에 크산티페는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파우스티나는 악처도 양처도 아니다. 그저 자신과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남편을 만나 고생하면서 살다간 여인이었다. 이 두 사람이 합의 이혼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로마의 여성은 남편 그리고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정숙’하도록 살아야 했다. 본능을 숨기면서까지 품위를 유지하면서 지내는 일이 답답했을 터. 로마 남성들은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마음껏 성적 쾌락을 누릴 수 있었지만, 여성들은 평생 남편의 울타리에 갇혀 지냈다. 그녀들이 조금이라도 바람을 피우면 가문과 남편을 욕보이는 부도덕한 행동이라고 비난받았다. 그렇다고 해서 바람을 피운 파우스티나를 옹호하는 건 아니다. 그녀가 그렇게 살아야 했던 원인을 단순히 그녀 개인의 결점으로만 보는 관점에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아무리 많은 사료가 남아 있다고 해도 그것만 가지고 한 사람을 평가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음침한 마음! 여자 같으며 완고한 마음, 사납고 어린애 같으며 짐승 같고 어리석으며 교활하고 상스러우며 부정적이고 폭군적인 마음. (《명상록》 제4장, 황문수 역)

 

 

정말 마르쿠스는 파우스티나를 진심으로 사랑했을까? 부부가 행복하게 살았는지 아니면 ‘황제’의 명예가 조금이라도 손상되지 않기 위해 부부가 30년 동안 끝까지 참고 지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만약 마르쿠스가 아내를 싫어했다면, 《명상록》 제4장에 나오는 저 문장이 아내를 향한 마르쿠스의 진심일 수도 있다. 파우스티나의 진짜 품성과 기질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늘 논란거리가 되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2]

 

 

 

[1] 『1주일에 한 번 성관계 맺는 부부가 가장 행복』 뉴시스, 2015년 11월 19일

[2] 《철인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4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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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1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21 13:47   좋아요 1 | URL
결혼과 섹스가 인생의 의무가 되는 바람에 이 둘 다 못 하면 ‘등신‘ 취급 받습니다. 둘 다 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도 있는데 이를 무시하는 사회의 편견이 가혹합니다.

2017-02-21 14: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21 17:20   좋아요 1 | URL
속 시원하게 해주는 사이다 말씀입니다! ^^

북프리쿠키 2017-02-21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에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요.
세월이 훌쩍 흐른 지금 십자군이야기를 읽으니 보는 관점에 따라 상당부분 취사선택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싸이러스님의 비판적 읽기에 또 배우고 갑니다.^^;

cyrus 2017-02-21 17:25   좋아요 1 | URL
제가 어렸을 때 시오노 나나미를 역사가로 믿었고 <로마인 이야기>를 직접 사서 읽었습니다. 고딩 때 공부하느라 7권까지 사다 말았어요. 그런데 나중에 시오노 나나미를 비판하는 입장을 본 이후부터 저 역시 역사를 보는 관점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시오노 나나미의 책을 무조건 믿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비판적으로 보는 능력은 많이 부족하지만, 같은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살펴볼려고 합니다. 머리가 아프지만, 이렇게라도 여러 번 시도를 해볼려고요. 귀찮다고 안 하면, 역사를 자신이 믿고 싶은 한 가지 관점만 보게 됩니다. 박사모처럼 말이죠. ^^;;
 
독도강치 멸종사 - 오키 견문록 : 종 멸종에 관한 반문명사적 기록 라메르(La Mer) 총서 1
주강현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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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끊임없이 논쟁이 되는 독도 영유권 문제는 양국 간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한다. 독도는 조선 전기부터 우산도 또는 삼봉도로 불리며 강원 울진현에 속해 있었다. 17세기 한일 간에 울릉도 영유권 문제가 야기되자 안용복 일행의 외교활동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울릉도와 함께 독도가 한국의 영토임을 인정받았다. 사절단도, 중앙관리도 아닌 평범한 어민에 불과했지만,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인 것을 일본 막부가 자인하도록 활약한 민간 외교가이다.

 

“독도가 왜 우리 땅이냐?”고 물어보면 대다수 국민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식의 답변에 머문다. 역사에 관심 있으면 “신라가 우산국(울릉도)을 편입했다는 옛 문헌이 있다”거나 “안용복이 독도에 잠입해 있던 일본 어부들을 쫓아냈었다”는 말이 나온다. “다케시마는 우리 땅”이라고 생각할 일본인에게 독도가 대한민국 땅인 이유를 설명해 줄 확실한 논리는 있어야 한다. 일본 시마네 현에 만들어진 독도 관련 홍보 자료에는 독도가 ‘에도시대부터 일본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한 곳’이라든가, ‘러일전쟁 이후 국제법상 일본 영토가 되었다’는 등 독도 영유권을 정당화하는 내용이 있다.

 

시마네 현은 1905년 2월에 독도를 일방적으로 일본 영토로 편입했다. 을사늑약으로 조선의 주권을 찬탈했던 그해이다. 시마네 현이 독도를 노리는 것은 독도 주변의 어장 때문이다. 시마네 현은 1890년대부터 강치 조업을 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독도에는 강치가 많이 서식했다. 강치 모피에 쏠린 인간, 아니 일본인들의 욕심만 아니었다면 강치는 대를 이어 독도의 바위를 덮었을 것이다. 역사는 독도 강치가 1940년대에 멸종했다고 적고 있다. 안용복의 등장 이후로 한발 물러선 일본의 울릉도 침탈은 메이지 유신 이후의 대외팽창 흐름을 타고 재개됐다. 집요하게 반복된 일본인의 울릉도 연안 불법어로와 울릉도 불법 정착은 청일전쟁 승리 이후로 사실상 합법화됐다. 오키(隱岐) 섬과 울릉도를 수시로 오간 일본인들은 강치의 모피와 기름을 원했다. 나카이 요자부로라는 어업 종사자는 강치 남획 사업을 독점하기 위해 일본 내무성을 통해 조선으로부터 독도를 임대하려고 했다. 당시 일본은 군사상 필요하면 조선의 어떤 지역도 수시로 수용할 수 있었고 일본이 추천한 재정, 외교 고문이 대내외 정책을 좌지우지하여 조선의 주권은 허울뿐이었다. 독도의 군사적 중요성에 눈뜬 일본 정부의 속내를 읽은 그는 ‘독도 영토 편입 및 차용 청원’을 제출하는 것으로 방향을 틀었다.

 

일본은 일관되게 다케시마 영토론을 주장하며 그 근거로서 과거의 주장만 되풀이한다. 특히 오키 섬의 어민들이 강치잡이를 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내세워 다케시마가 국제법상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다. 독도 역사 및 강치 생태사를 추적한 주강현 박사는 우리나라 자료 및 일본 측 자료를 통해 다케시마 영토론에 요목조목 반박한다. 그리고 강치를 멸종시킨 과거 행적을 뻔뻔하게 독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로 삼는 일본의 태도를 비판한다. 일본은 지금도 여전히 자연에 대한 탐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멸종 위기에 몰린 고래를 보호해야 한다는 국제사회의 목소리에도 일본은 다시 포경에 나서기 시작했다. 과도한 포획으로 인해 머잖아 강치처럼 우리 바다에 대형 고래들이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강치는 독도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독도와 강치. 오랫동안 일본의 침략 근성에 시달렸다. 이제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로 만들려고 자신들이 멸종시킨 강치마저 왜곡된 역사에 편입한다. 심지어 뻔뻔스럽게도 강치 멸종의 책임을 우리나라에 떠넘기고 있으니 어이가 없는 일이다. 이 역사를 아는 대한민국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독도에는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군 폭격 연습장으로 사용된 가슴 아픈 역사가 있다. 당시 독도 주변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미군 전투기 폭격으로 사망했고, 독도 주변에 집단 서식하던 강치들도 모두 사라졌다. 동도 해안 한쪽 구석에는 그때의 상처를 간직한 초라한 위령비가 서 있다.

 

독도 문제로 일장기를 불태우는 감정적 대응은 한계가 있다. 오히려 독도 문제를 국제적 분쟁으로 몰고 가려는 일본의 책략에 말려드는 상황을 초래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 정부는 충분히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이게 처음은 아닐뿐더러 매번 소극적인 대응만 반복한다. 부산 소녀상 설치 관련 문제에 거세게 항의하는 일본 정부에 제대로 힘도 못 쓰는 외교부의 수준을 보면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정부는 소녀상 설치뿐만 아니라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논쟁을 한일 간의 외교 갈등으로 비화할 수 있는 민감한 문제로 인식한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지만 이럴수록 목청만 높일 게 아니라 독도가 우리 땅임을 주장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전략이 무엇인지 모두가 곰곰이 고민해야 한다. 거시적인 틀에서 독도 논쟁을 바라볼 수 있는 책이 바로 《독도강치 멸종사》다.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는 박제된 강치가 시마네 현 박물관에 외롭게 갇혀 있다. 독도 강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야 강치가 독도 주변 푸르른 바닷 품으로 돌아올 수 있다. 독도는 ‘주인 없는 섬’이 아니다. 강치의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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