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허한 말, 웃음을 유발하는 언사를 입에 올리지 말지어다.” [1]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소설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9)에 나오는 이 문장은 중세 유럽의 웃음에 대한 입장이 잘 드러나 있다. 현세의 행복을 뜻하는 웃음은 경박하며, 내세를 지향하는 경건한 기독교적 세계관과 상반되는 것이므로 피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9)
* [절판] 호르스트 푸어만 《중세로의 초대》(이마고, 2003)
* 만프레트 가이어 《웃음의 철학》(글항아리, 2018)
* 아리스토텔레스 《수사학 / 시학》(도서출판 숲, 2017)
* 아리스토텔레스 《니코마코스 윤리학》(도서출판 숲, 2013)
10세기 초 성직자들은 독일 호엔알트하임(Hohenaltheim) 주교 회의를 통해 ‘즐거워하는 육체’는 죄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2]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웃음이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는 특징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시학》과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웃음이 쓸모가 있다고 주장했다. 《장미의 이름》의 맹인 수도사 호르헤는 웃음이 신의 권능을 부인하는 해로운 악마의 선물로 여겼고, 《시학》 제2권 ‘희극론’을 ‘사람 목숨을 빼앗는 위험한 금서’로 만들었다. 그는 웃음을 사교의 덕 중 하나로 꼽은 《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까? 만약에 수도원 도서관에 웃음의 장점을 언급한 《니코마코스 윤리학》도 있었다면 호르헤는 이 책에도 독을 발랐을 것이다. 아무튼, 호르헤 같은 중세의 신학자나 성직자들은 진리 속에 있는 웃음을 추방했다. 그들은 경건함을 중시했다.
그렇지만 모든 중세 사람들이 웃음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창시자인 베네딕투스(Benedictus)는 “바보의 웃음은 떠들썩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은 조용히 웃는다”라고 말했다. [3] 카르미나 부라나(Carmina Burana)는 중세 유랑 탁발승이나 음유시인들이 도덕, 사랑, 유희, 외설 등을 노래한 작자 미상의 세속시가집이다. 이 시가집이 처음 발견된 곳은 독일 남부의 베네딕트 수도원이다. 이 시가집을 만든 사람(공동의 저자일 수 있다)이 누군지 영원히 알려지지 않겠지만 중세에도 억압과 고통을 해방하는 웃음의 긍정적 기능을 옹호한 윌리엄 수도사 같은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장미의 이름》의 윌리엄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의 가상 인물이다).
* 요한 하위징아 《중세의 가을》(연암서가, 2012)
웃음을 유일하게 허용하는 날이 있으니 그게 바로 ‘축제’가 있는 날이다. 중세의 문화를 연구한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는 중세 사람들의 마음속에 두 개의 인생관이 공존했다고 주장했다. 하나는 경건한 삶을 지향하는 금욕주의적 인생관, 또 하나는 방탕하게 축제를 즐기는 세속적 인생관이었다. 실제로 교회가 지정한 1년은 일하는 날과 축제하는 날로 구분되어 있다. 하위징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세 사람들은 ‘모순적이면서 열정적인 인간’[4]으로 살아왔다. 《장미의 이름》의 화자로 나오는 아드소가 ‘모순적이면서 열정적인 중세인’이라 할 수 있다. 소설에 묘사된 청년 시절의 아드소는 수도원에 몰래 들어온 마을 처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그는 자꾸만 샘솟는 욕망을 억제하기 위해 신앙심에 의지한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경건한 교회에 매일 빠짐없이 출석하면서도 향락적인 일탈을 꿈꿨던 중세 사람들의 인간상을 보여준다.
※ 로저 베이컨의 학문 세계를 소개한 책들
* 유대칠 《신성한 모독자》(추수밭, 2018)
* S. P. 램프레히트 《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 2008)
* 아먼드 A. 마우러 《중세철학》(서광사, 2007)
* F. C. 코플스턴 《중세철학사》(서광사, 1988)
윌리엄이 웃음의 기능을 옹호한다고 해서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까지 받아들였다고 판단하는 것은 오산이다. 윌리엄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스승이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이다. 로저 베이컨은 실제로 생존했던 영국의 스콜라 철학자이다. 그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였지만, 과학과 수학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자연철학자’였다. 베이컨은 열세 살(!)에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다. 옥스퍼드 대학의 초대 총장은 로버트 그로스테스트(Robert Grosseteste)다. 그로스테스트는 옥스퍼드 대학을 대표하는 철학자로 명성을 얻었으며 베이컨에게 영향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로스테스트와 베이컨의 스콜라 철학을 ‘옥스퍼드 파’로 분류한다. 이 두 사람은 이슬람 국가에서 전해지게 시작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렇게 열광적으로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과학적인 실험의 가치를 중요하게 여긴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동시대 학자들을 비판했다. 베이컨은 귀납법과 연역법을 모두 사용하여 어떤 진리의 진실성 여부를 검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절판] 최정은 《트릭스터, 영원한 방랑자》(휴머니스트, 2005)
아먼드 A. 마우러(Armand Augustine Maurer)는 베이컨을 스콜라 철학 시대의 ‘역설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한다.[5] 베이컨은 종교적 전통에 얽매이지 않은 학문적 시각과 태도를 유지했다. 과학(특히, 빛을 연구하는 광학)에 헌신한 그의 탐구 자세는 정통 교단으로부터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다. 그는 감옥에 수감되는 시련을 겪었다. 베이컨의 삶을 한마디로 말하면 ‘트릭스터(Trickster)’이다. 트릭스터는 사회가 만든 획일적인 규범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범한 용기를 가졌으며 자신의 욕망을 끝까지 추구한다. 트릭스터와 대비되는 인간상이 ‘하마르티아(Hamartia)’다. 이 용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 나온다. 하마르티아는 자신의 실수 또는 결함에 의해 불행을 초래하는 비극적인 인간이다. 하마르티아는 원래 ‘신에 의해 눈이 먼 인물’을 뜻한다. 윌리엄을 논쟁을 펼친 호르헤는 하마르티아에 속한다. 그는 신의 권능에 지나치게 믿은 나머지 자신과 다른 진리를 죄악시한다. 로저 베이컨은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이 겪는 네 가지 오류를 제시했는데, 특히 그가 엄중히 경고했던 오류는 ‘무가치한 권위의 복종’이다. 흥미롭게도 호르헤는 베이컨이 경고한 오류를 범했고, 베이컨의 제자인 윌리엄은 그와 논쟁을 할 때마다 고지식하고 권위적인 자세를 비판했다. 결국 호르헤의 치명적인 오류, 즉 결함은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을 발생하게 만들었고, 자신뿐만 아니라 수도원의 도서관까지 파멸시킨다. 호르헤는 신의 권능에 눈이 멀기 시작하면서부터 진리의 자유를 통제하는 악마가 된 비극적인 인간이다.
[1]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2002) 154쪽
[2] 《중세로의 초대》(이마고, 2003) 374쪽
[3] 《중세로의 초대》(이마고, 2003) 375쪽
[4] 《중세의 가을》(연암서가, 2012) 341~342쪽
[5] 《중세철학》(서광사, 2007) 16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