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 높은 구두, 단발머리, 각선미가 드러난 치마, 양산.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에 등장한 ‘신여성’, ‘모던 걸’의 이미지들이다. 그녀들은 학교에 다니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곳곳을 누비며 유행을 선도했고 자유연애를 주장했다. 이후 이들의 삶은 어떻게 전개되었고, 당대 남성들은 그녀들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 박차민정 《조선의 퀴어》(현실문화, 2018)
지난달에 《조선의 퀴어》(박차민정 지음, 현실문화, 2018)를 읽고 한동안 근대 일본과 근대 식민지 조선의 문화 및 역사를 훑어봤다. 흥미진진한 독서였다. 살아보지 않은 시대의 모습들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재미, 그것이 역사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그렇지만 식민지 조선의 시대상을 더 알면 알수록 마음이 씁쓸해진다. 모던의 향취를 뿜어대는 신여성의 뒷모습은 쓸쓸하다. 사철 서양식 치마를 갈아입고, 구두를 갈아 신는 신여성도 알고 보면 가족 부양을 위해 부잣집 첩살이로 들어가는 불행한 인텔리 여성에 불과했다. 모던 보이들이 처한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일류신사를 꿈꿨던 모던보이들은 전문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 해 거리를 헤맸다. 그 시절에도 지금처럼 패션과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었다.
* 김주리 《모던 걸, 여우 목도리를 버려라》(살림, 2005)
구두와 치마, 단발머리가 신여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라면, 모던보이의 상징은 일본에서 직수입된 중절모와 양복이다. 모던보이들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살면서도 양복을 입고 다녔다. 당대 언론은 현실과 동떨어진 과도한 사치를 추구하는 모던보이의 태도를 비판했다.
* 박윤석 《경성 모던타임스》(문학동네, 2014)
1920~30년대 경성은 ‘리틀 도쿄’였다. 이때부터 영화, 음악, 각종 서구식 생활양식 등 근대문화가 일본 제국주의의 흐름을 타고 경성으로 들어온다. 혼마치(本町, 지금의 명동, 충무로 일대)는 신여성과 모던 보이들이 자주 드나드는 유흥공간이 많았다. 그곳은 일본의 긴자(銀座) 거리에 온 것처럼 화려했다. 신여성과 모던 보이들에게 혼마치는 도쿄의 분위기를 경험해보는 곳인 동시에, 겉으로 화려하지만 내면이 무력한 식민지인의 자화상을 확인하게 하는 구역이었다. 현해탄 물결에 젖어서 공주처럼 지친 채[주1] 고국으로 돌아온 일본 유학생들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늠할 수 없는 꽉 막힌 현실, 지식과 능력을 사용할 곳이 없는 현실 앞에서 절망했다. 변변한 일자리 하나 찾기 힘든 식민지 현실이 그들을 절망하게 했고, 가족을 돌보기는커녕 호구지책도 마련하지 못해 거리를 헤매는 처지가 그들을 자학하게 했다.
* 소래섭 《에로 그로 넌센스 : 근대적 자극의 탄생》(살림, 2005)
일부 남성 지식인들은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서구 문화를 ‘부패한 에로’로 규정하여 비판했지만, 현실에 좌절한 모던 보이들은 ‘에로 그로’ 문화에 탐닉했다. 전근대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근대의 향락주의자들은 ‘변태 성욕자’로 낙인 찍혀 비판받았다. 그러나 ‘에로 그로’ 문화는 현실의 불만과 권태를 달랠 수 있는 해방구였다. 식민지 조선 남성은 ‘에로 그로’ 문화에 헤어 나오지 못한 자신의 상황뿐만 아니라 무기력한 현실에 대해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 권김현영 엮음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교양인, 2017)
* 김미지 《누가 하이카라 여성을 데리고 사누 : 여학생과 연애》(살림, 2005)
식민지 남성의 냉소적인 반응은 동시대에 등장한 모던 걸, 신여성들에게 향한다. 모던 걸들은 남성성이 ‘거세된’ 식민지 남성 지식인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는 대상이 된다. 신여성의 신체적 변화는 전통과 근대, 남성과 여성의 의식면에서 첨예한 갈등을 불러왔다. 예컨대 단발에 대해 남성들은 여성들이 단발하는 것을 남성을 흉내 내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단발은 편리했으며 해방감을 가져다줬다. 남성 지식인들은 신여성들을 사치와 허영을 일삼는 존재로 바라봤다. 특히 금시계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위해 몸까지 파는 여성은 냉소적인 풍자의 대상이었다. 여학생들은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가면 ‘저런 하아카라 여성을 누가 데리구 사누’라는 흉을 들었다. 전근대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여학생의 자유연애가 못마땅했다. 가난한 형편으로 학비를 마련하지 못한 여학생들은 밀매음에 종사했는데, 그녀들을 ‘밀가루’라는 은어로 부르기도 했다[주2]. 이 은어에는 신여성의 과도한 화장을 비난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 김재용 외 《친일문학의 내적 논리》(역락, 2003)
신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교육과 정치 차명의 기회를 쟁취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향한 냉소적인 공격에 맞서 대응했다. 신여성은 철저히 식민지 조선 남성들의 감시 대상이었다. 식민지 조선 남성이 만들어낸 지극히 주관적이고도 자극적인 이미지를 벗겨내면 신여성의 주체적인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신여성도 한계가 있었다. 소수의 여성이 신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땅에 본격적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하면서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등의 신여성 지식인들은 ‘여성의 공적인 영역 진출’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 동원을 위한 국책 사업에 뛰어들었다.
신여성을 둘러싼 식민지 남성들의 시비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하는 시대 앞에 주눅 든 남성들은 말하고 행동하는 여성들에게 막말과 인신 모독성 비난을 한다. 식민지 남성들은 거리에 돌아다니는 모던 걸을 흘깃 쳐다보면서 ‘스튜릿트껄’이라 부르면서 그녀들의 허영심을 비꼰다. ‘스튜릿트껄’은 식민지 조선 버전 ‘김치녀’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성들은 반성해야 한다.
[주1] “청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김기림, 『바다와 나비』 2연)
[주2] 소래섭, 《에로 그로 넌센스 : 근대적 자극의 탄생》, 살림, 2005, pp.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