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정치학 - 가치 있는 역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하워드 진 지음, 김한영 옮김 / 마인드큐브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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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 이제 그의 이름만 들어도 믿음이 간다. 2010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미국 최고의 ‘행동하는 지성’으로 자리를 굳힌 역사학자였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과 베트남 반전운동의 중심부에 그가 있었다. 그는 강단에만 머무르지 않고 민중의 삶 깊숙이 뛰어들어 이론과 실천을 융합해왔다. 고령에도 그는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역사’를 강조하는 일관된 자세를 지켜왔다. 지난달에 진의 초기 저작이라 할 수 있는 《역사의 정치학》(마인드큐브, 2018)가 번역돼 나왔다. 1970년에 초판이 나오고 이십 년 후에 2판이 출간되었다. 《역사의 정치학》은 60~70년대에 본격적으로 체계화된 진의 급진적인 학문 세계와 역사관을 조망해볼 수 있는 책이다.

 

진은 이 책에서 3개의 대주제로 나누어 역사학자이자 사회운동가로서 자신이 부딪치고 건너온 시대를 에세이 형식으로 기술한다. 1부(‘접근법’)3부(‘이론과 실천’)는 미국 주류 역사학과는 궤를 달리하는 급진주의 역사관을 중점적으로 설명한다. 진이 말하는 ‘급진주의 역사’란 국가의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질서를 공고하게 만든 권력의 실체를 폭로하여 타파하는 변화 지향적 학문이다.

 

급진주의 역사는 정부 개혁의 한계, 정부와 부유한 특권층의 연결, 전쟁과 외국인 혐오를 부추기는 정부의 경향, 법의 중립성 뒤에서 벌어지는 돈과 권력의 유희를 폭로할 것이다. 급진주의 역사는 현실을 유지시키는 정부의 역할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힐 것이다. (『급진주의 역사란 무엇인가?』, 83쪽)

 

 

진은 반파시즘 역사학자 베네데토 크로체의 말을 빌리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과거가 ‘죽은 역사’라면, 되살아난 과거는 ‘현재’로 나타난다고 확신한다. 그러기 위해선 역사학자는 ‘현재 목표’를 설정하여 지난 역사를 되돌아봐야 한다. 우리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 역사를 되돌아보는 까닭은 과거에 대한 탐구가 현재를 넘어 미래 전망의 출발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현실 너머로 확장하려면 역사학자는 사회의 중대한 문제들을 침묵해선 안 되고, 중립을 지켜서도 안 된다.

 

 

 역사의 목적은 “과거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발견하는 것이므로…‥ [중략] 역사학자는 “자신의 과거를 초월하는 바로 그 행위에서 과거를 이용할 수 있고 또 이용해야 하는데” 이는 인류가 “미래에 대한 새로운 전망”을 향해 나아가도록 돕기 위해서다. (『역사학자』, 430쪽)

 

 

망각해선 안 될 과거의 기억들을 소환하여 다음 세대에게 전승하는 것은 역사학자의 중요한 책무이다. 진의 자서전 제목으로 알려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행동하는 지성’으로써의 진의 면모를 부각하는 명언이다. 그는 강단에 있을 때 학생들에게 이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급진주의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글의 첫 문단에 이와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진은 언행일치된 모습으로 강단에서 말한 내용 그대로 일상에서 실천했다. 상아탑 안에 안주하지 않은 진은 여느 운동가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전국을 돌며 거리 행진을 벌이고, 시위에 참여했다.

 

2부는 ‘미국 역사’를 주제로 한 에세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진의 관심은 미국 역사 속의 지배자들이나 그들의 이념이 아니다. 그는 건국 초기의 미국 역사부터 냉전 시대까지 두루 살피면서 미국 독립선언서의 자유, 평등, 행복의 추구라는 그럴싸하고 찬란한 표어 속에 가려진 역사 속의 희생자들을 소환한다. 2부에서 다루는 역사는 가난하고 억압받은 민중, 노예와 흑인들의 관점에서 보는 역사이다. 독자는 2부에서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재조명하여 민중과 흑인의 권리를 찾으려고 했던 진의 참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부와 3부를 먼저 읽고, ‘급진주의 역사’ 렌즈를 착용한 후에 2부로 접근해도 좋을 듯하다.

 

진은 미국인들이 권력의 기만에 잘 속아 넘어가는 이유는 비판적 역사관이 결여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오만한 제국’에 향한 그의 통렬한 지적은 지금도 유효하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진의 오래된 충언을 아는지 모르는지(상류사회의 교육을 받고 자란 그가 하워드 진을 알 리가 있겠나.) 유색 인종에 대한 경멸을 공공연히 습관처럼 내뱉었고 이를 실제 정책화하는 최악의 행보를 보인다. 역사를 모르거나 ‘중립’으로 일관하는 역사만 남으면 국민은 권력의 사리사욕을 보지 못하게 되고, 언론과 공권력은 오만한 권력을 보호하는 나팔수와 경호원이 된다. 역사는 우리가 가질 수 있고,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이다.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보다 비판적 역사관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면 우리는 다시는 속지 않을 것이다.

 

 

 

 

 

※ Trivia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번역문과 오자들이 곳곳에 보인다.

 

* 19쪽

도미니크 공화국의 트루히요 → 도미니카 공화국

 

* 20쪽

찰스 다윈은 1961년 한 편지에서 → 1861년

 

* 71쪽

나는 교회가 다시 과처처럼 행동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나 역시 그러지 않기로 다짐했습니다. → 과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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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10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3 11:36   좋아요 1 | URL
역사를 배우는 것보다 제일 중요한 것이 ‘피드백’입니다. 자기만족으로 역사를 배우면 그런 역사는 자신(의 이념)을 돋보이게 하는 장식품에 불과합니다.

2018-05-12 2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13 1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올해로 유관순 열사가 태어난 지 116년이 지났다. 열사가 우리 현대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만 유 열사의 생애와 업적에 비해 연구가 너무 미진하다. 철저한 고증과 균형감 있는 평전 한 권조차 나오지 않았다. 4년 전에는 유 열사에 대한 내용이 빠진 고등학교 교과서 4종이 확인되어 논란이 일어난 적 있었다. 유 열사가 항일운동을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나 친일파가 자신들의 과오를 무마하려고 의도적으로 부각한 인물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물론, 이를 반박하는 주장도 있다.

 

 

 

 

 

 

유 열사가 빠진 역사 교과서 논란이 일어났을 때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보수 언론 등은 가장 적극적으로 비판했다. 이들은 이 논란을 빌미 삼아 국정교과서 폐지를 지지하는 진보 세력까지 비판했다. 그런데 국정교과서에도 유 열사에 관한 내용이 담고 있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새누리당은 대변인의 입을 통해 유 열사가 없는 역사 교과서를 제작 · 배포하는 일은 열사에 대한 모욕이며 모든 독립 운동가들에 대한 배신이라고 공식 입장을 표명했다. 국회의원 배지를 단 친일 후손이 소속된 새누리당이 천연덕스럽게 그런 말을 하니까 어색하다. 그들의 생색내기는 결국 누워서 침 뱉기나 마찬가지인 상황이다.

 

 

 

 

 

 

 

 

 

 

 

 

 

 

 

 

 

 

* 전영택 《순국처녀 유관순전》 (늘봄, 2015)

 

 

 

생각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2015년에 최초의 유관순 전기로 알려진 전영택《순국처녀 유관순전》 (늘봄, 2015)이 복간되었다. 전영택은 교과서에도 실린 단편소설 『화수분』의 작가이다. 전기를 복간한 출판사명인 ‘늘봄’은 전영택의 호(號)다. 유관순 전기는 1948년에 출간되었다. ‘복간본 출간 열풍’이 있었던 시기에 나온 책이라서 초판 원문의 옛말을 그대로 살렸다. 이 책의 장르를 정확히 구분하자면 《순국처녀 유관순전》은 ‘완전한 전기’라기보다는 ‘간략하게 적은 소전(小傳)’에 가깝다. 전영택은 초판 서문에서 이 책을 ‘소전’이라고 밝혔다. 그래서 전기는 매우 얇은 소책자라서 분량은 100쪽이 되지 않는다. 전영택은 유관순을 ‘한국의 잔 다르크’로 표현했다. 그는 유관순 열사를 가르친 이화학당(이화여대의 전신) 교사 박인덕의 진술을 토대로 전기를 작성했지만, ‘소설가가 쓴 전기’이다 보니 과장되고 허구적인 묘사가 곳곳에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박인덕과 전영택은 친일 논란이 있는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유관순은 친일파들이 의도적으로 알린 과장된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의견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책의 해설은 홍찬식 동아일보 수석 논설위원이 썼다. 홍 위원은 친일 인사가 유관순을 발굴했다는 주장 자체가 ‘전체적인 진실’이 아닐 뿐더러 그런 측면이 일부 있었다고 해도 전영택 작가의 친일 경력을 문제 삼아 유관순 열사의 업적이 교과서에 누락 되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전영택 작가의 친일 경력을 교묘히 은폐하는 그의 논변이 거슬리지만, 이보다 더 불편한 사실은 그가 몸담고 있는 신문사이다. 동아일보 창업자 인촌 김성수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다. 아이러니한 건 그의 두 번째 아내 이아주는 3 · 1 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다.

 

유관순 열사 역사 교과서 논란은 교육부가 기록이 빠진 고등학교 교과서 4종에 2015학년부터 유 열사에 대한 내용을 다시 싣기로 해 일단락됐다. 그렇지만 유 열사에 대한 대접이 여전히 형편없다. 삼일절이 가까워지면 <삼일절 노래>와 함께 <유관순 노래>가 불린다.

 

 

 3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면 유관순 누나가 생각납니다. 옥 속에 갇혀서도 만세 부르다 푸른 하늘 그리며 숨이 졌대요. (‘유관순 노래’ 1절)

 

 

노랫말을 만든 사람은 아동 문학가 강소천이다. 1915년에 태어난 강소천은 1902년에 태어난 유 열사를 ‘누나’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러나 백 년이나 지난 지금도 우리는 유 열사를 ‘누나’로만 기억하고 있다. <유관순 노래>는 동요다. <유관순 노래>를 접하는 어린이들은 ‘누나’라는 호칭으로 알려진 유 열사를 친근하게 느낄 수 있다. 열사를 ‘누나’로 호명하는 노랫말이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다 큰 어른들이 여전히 유관순을 ‘애국심 많은 누나’로 기억하고 있는 점이다. 어린 시절 때 들은 <유관순 노래>의 노랫말 속 ‘누나’가 지워지지 않은 기억에 콕 박힌 탓일까. 유관순을 누나라고 자연스럽게 부르면서 젊은 나이에 순국한 이봉창 열사(유 열사보다 일 년 먼저 태어났다)를 ‘형’이라고 부르지 않은 걸까. 만약 이봉창 열사를 ‘형’이라고 부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연세가 높은 어르신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노력한 선조를 모욕하는 무례한 호칭이라면서 역정을 낼 것이다. 그렇다면 백 년 전에 태어나 독립운동에 뛰어든 선조인 유 열사를 ‘누나’라고 부르는 것도 무례한 일 아닌가?

 

 

 

 

 

 

 

 

 

 

 

 

 

 

 

 

 

 

 

* 권김현영 엮음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교양인, 2018)

* 최기숙 《처녀귀신 : 조선시대 여인의 한과 복수》 (문학동네, 2010)

* [절판] 김종대 《한국의 학교괴담 : 한국의 학교괴담에 대한 민속학적 탐구》 (다른세상, 2002)

 

 

 

 

정희진은 유 열사가 ‘누나’라고 불리게 된 배경을 ‘가부장제 중심의 민족주의’에서 찾는다. 우리나라의 민족주의는 ‘남성의 이해가 반영된 젠더 정치’[1]다. 즉 민족주의는 남성 독립 운동가를 ‘민족의 대표’ 또는 ‘독립투사’로, 여성 독립 운동가를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성’으로 정체화하는 정치이다. 유 열사를 ‘유관순 누나’라고 호명하면 그녀의 역사적 발자취는 희석된다. 유관순 열사를 ‘여성’이라는 정체성에 가두면 ‘(남성) 일제의 고문으로 이른 나이에 죽음을 맞은 피해자’로 남게 된다. 지배세력에 향한 분노와 적개심, 그리고 그들에게 굴복한 경험에 대한 민족의 수치심이 불붙으면 ‘한(恨)의 민족주의’가 형성된다. ‘한의 민족주의’가 반영된 유관순 열사는 투지가 넘치는 ‘민족의 대표’가 아닌 ‘피해자 여성의 대표’로 남게 된다.

 

‘피해자 여성의 대표’로 정체화된 유관순 열사는 엉뚱하게도 ‘유관순 귀신’으로 소환된다. ‘공포 괴담’이 유행하던 90년대에 유관순 귀신이 등장하는 괴담이 만들어졌고, ‘유관순 괴담’은 다양한 형태로 알려져 아이들이 즐겨 보던 괴담집에 종종 수록되곤 했다. 지금 들어보면 참으로 황당한 내용이다.

 

 

 1) 새벽 12시에 불이 꺼진 화장실 속 거울 앞에 서서 <유관순 노래>를 열 번 부르면 거울에 비친 유관순 귀신을 볼 수 있다.

 

2) 불이 꺼진 화장실 속 거울 앞에 서서 유관순 이름을 세 번 부르면 유관순 귀신이 나타나 자신을 부른 사람의 목을 졸라 죽인다.

 

3) 모 초등학교의 수영장 탈의실 위에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다고 한다. 그 전에는 유관순 열사가 있었는데 자기 대신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에게 적의를 품어 밤 12시가 되면 나타나서 이순신 장군과 싸운다고 한다. (김종대 《한국의 학교괴담》 34쪽)

 

4) 매년 삼일절이 되면 학교 운동장에 세워진 유관순 동상이 살아 움직이면서 피눈물을 흘린다. (김종대 《한국의 학교괴담》 35쪽)

 

 

유관순 귀신은 현대판 ‘처녀 귀신’이다. 예나 지금이나 처녀귀신은 ‘원한에 맺힌 억울한 존재’ 또는 ‘공포의 대상’이다. 민간 전설, 고소설 또는 도시전설 속 처녀 귀신은 스스로 원한을 해소하지 못하는 ‘피해자’로 그려진다.

 

‘유관순 열사’ 또는 ‘인간 유관순’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날은 멀고도 요원하다. ‘친일 청산’이라는 적폐청산은커녕 사회에 고착화된 일제의 잔재조차 청산하지 못하는 이 나라에 유관순 평전이 나오는 건 불가능한 일인가?

 

 

 

 

 

[1] 정희진 『피해자 정체성의 정치와 페미니즘』 , 《피해와 가해의 페미니즘》 2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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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9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0 08:13   좋아요 1 | URL
유관순 열사가 ‘친일파가 과대 포장한 인물‘로 오해받기 쉬운 이유 중 하나는 그녀가 다녔던 학교인 이화학당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화학당은 이화여대의 전신인데 이화여대 초대 총장이 김활란입니다. 이 사람도 친일 경력이 있고, 그녀가 총장으로 활동하고 있었을 때 이화여대는 대대적으로 유 열사 업적을 알리기 시작했어요.

김활란이나 박인덕처럼 처음에는 독립운동을 했다가 나중에 변절한 친일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를 가리기 위해 동료의 이름을 내세워 열사로 만들려고 했을 것입니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습니다.

2018-05-10 0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10 12:29   좋아요 1 | URL
젊은 나이에 순국한 위인을 정답게 부르려고 ‘형’, ‘누나’ 호칭을 자주 사용되는 것 같아요. 전태일 열사에게 ‘전태일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도 예전에 그렇게 불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형’ 호칭을 쓰기가 거북해요.
 
중세의 재발견 - 현대를 비추어 보는 사상과 문화의 거울
박승찬 지음 / 길(도서출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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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는 흔히 인문주의의 태동과 결부시켜 설명되는 게 일반적이다. 신 중심 세계관이 지배했던 중세 시대와 달리 르네상스는 중세‘암흑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인간을 세계의 중심에 놓고 삼라만상을 설명하려고 한다. 중세라고 하면 고대 그리스 · 로마 문명과 근대 산업혁명 사이에 존재했던 암흑의 시대였다는 혹평이 우리 뇌리에 많이 각인된 것이 현실이다.

 

중세 철학을 전공한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과 교수는 ‘중세를 재발견’하여 중세에 대한 그동안의 편견을 바로잡아준다. 중세 철학에 관한 강연 활동을 했던 경력이 말해주듯 중세 철학(신학도 포함) 원전에 기초한 충실한 설명이 책의 미덕이다. 물론 1,000년이 넘는 중세 역사를 한 권으로 소개한다는 일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중세의 문화 및 사상, 그리고 중세의 위대한 인물, 주요 사건, 논쟁 등을 통해 일반 독자들에게 오랫동안 ‘암흑’에 가려졌던 중세의 윤곽을 보여준다.

 

저자는 ‘중세’가 ‘현대를 비추어 보는 사상과 문화의 거울’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저자의 관점은 무엇보다 유럽사의 암흑기로 평가되는 중세가 사실은 그 어느 시기보다 찬연한 학문적 성과를 낳은 시기였다는 ‘중세의 재발견’으로 요약할 수 있다. 중세 철학은 서양 문화의 두 축을 이루는 고대 그리스 · 로마 사상(이성)과 그리스도교 사상(신앙)의 조화이다. 중세 철학 연구는 서양의 근본정신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그렇다면 현재 이 시점에서 우리가 중세를 재발견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르네상스는 인간을 해방해 인간의 모든 욕망을 풀어헤쳐 놓았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가 강해졌고, 욕망으로 발현되는 감정은 실종되었다. 서양 근대는 절대적 신의 왕국을 자처했던 중세 시대를 극복하려는 몸부림 속에서 ‘이성의 빛’에 의한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야심이 지배한 세상이었다. 그런 야심 찬 이성적 문명의 기대가 1,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크게 좌절되었고, 이성에 대한 절망의 그림자가 깊게 유럽을 드리웠다. 허무주의는 그런 시대정신의 표현이었다. 그리하여 저자는 근대 사상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해법으로 중세 철학을 제시한다. 아우구스티누스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은 배타적인 가톨릭 신학이 아니라 윤리적 통찰을 제공하는 철학이다. 이성과 신앙의 합일은 교부(敎父)와 스콜라 철학자들을 통해 각각의 자율성을 존중하면서도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중세 후기를 거치면서 이처럼 어렵게 성취된 조화로운 관계가 결정적으로 파기되고 분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중세는 어떤 측면에선 암흑이었지만 나름대로 ‘다양성’을 보여준 시대다. ‘샤를마뉴’로 알려진 중세 프랑크 왕국의 카를 대제는 자신의 왕궁에 재능 있는 학자들을 모아 문예 부흥을 일으켰다. 그는 인내심을 갖고 교육의 열매가 숙성되기를 기다린 끝에 ‘카롤링거 르네상스’를 여는 데 성공했다. 전문적인 교육과 연구를 함께 하는 기관인 대학은 이미 중세에 존재했다. 세계 최고(最古)의 대학인 볼로냐 대학은 학문과 예술의 중심지였다. 중세 대학은 대학생, 지식인들의 자유로운 학문 활동을 보장해주었고, 그 후로 줄곧 자유로운 사상의 온상이 되어왔다. 학문을 사랑하는 마음, 그 마음을 ‘공부하는 자세’로 실천할 수만 있다면 신분, 국적에 상관없이 누구나 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수 있었다. 여기서 궁금한 점. “중세의 대학인에 ‘여성’이 있었을까. 저자가 그 부분을 언급하지 않아서 아쉽다. 아벨라르를 사랑했던 제자 엘로이즈를 제외하면 이 책에 중세 여성의 역사를 심도 있게 다루지 않는다. 중세는 ‘암흑의 시대’가 아니어도 중세 여성은 여전히 남성 중심 사관(史官)이 만들어 낸 ‘암흑’에 가려져 있다. 어쨌든 대학이 자유로운 지성의 산실이자 진리의 보고로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해야 사회가 바로 설 수 있다. 저자는 중세 대학이 추구했던 ‘학문에 대한 사랑’과 ‘자유를 위한 투쟁’을 강조하면서 우리 사회의 대학들에는 대학의 근본적 역할에 대한 철저한 자기반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고대 그리스 철학과 그 맥을 이어온 중세 철학이 없었다면, 오늘의 서양 문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중세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인문학적으로도 훨씬 뛰어난 업적의 시기였다. 중세를 서양 문명을 지탱한 ‘척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구 중심의 근대가 갖는 맹점과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중세에 주목해야 한다. 중세를 암흑의 시대라고만 정의하는 것은 불충분하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중세는 이상과 현실, 구(舊) 사상과 신(新) 사상이 대립하고 타협하던 시대였다. 중세의 빛과 그림자가 중세만의 특수한 것이 아닌 보편적인 시대의 모습임을 깨달을 때 진정으로 중세를 재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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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2 14: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5-02 17:27   좋아요 1 | URL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주변 인물 중심으로 읽어보려고 해요. **님이 언급하셨듯이 소설에 마녀로 몰린 여성이 나오고, 성 밖에 사는 하층민 공동체도 나옵니다. 중세 역사가들이 주목하지 않은 계층과 그들의 문화를 살펴보고 싶습니다.

겨울호랑이 2018-05-02 15: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암흑기라 불렸던 중세도 최근 재조명받는 것을 보면 역사는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cyrus 2018-05-02 17:33   좋아요 1 | URL
역사는 살아있는 학문입니다. 역사가가 역사를 재해석하는 일을 멈춘다면 그 역사는 ‘죽은 학문’입니다. ^^

sprenown 2018-05-02 21: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위징아도 중세에 대해 상당히 좋게 평가 한다더군요^^‘.중세의 가을
이라는 책을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역사라는게 끊임없이 흐르는 강물이겠조.

cyrus 2018-05-03 14:27   좋아요 1 | URL
중세를 공부할 때 하위징아의 책을 꼭 읽어야 해요. 중세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문장들이 좋아요. ^^

옥토끼샘 2018-05-03 15: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승찬 교수입니다. 소중한 서평에 감사드리며 궁금해 하신 질문에 대해 간단하게라도 답해 봅니다.

중세 대학의 설립기를 탐구하면서, 매우 안타까운 것은 대학을 통해서 널리 퍼져 나간 평등의 원리에서 여성들이 철저히 배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자 수도원이 남자 수도원과 함께 열띤 학문적 토론의 장이었던 12세기만 해도 빙엔의 힐데가르트 수녀원장이나 아벨라르두스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엘로이즈와 같은 지성적으로 뛰어난 여성들이 비교적 많이 배출되었습니다. 그러나 13세기 들어와 여러 학교들이 대학으로 체계화되면서 여성들은 오히려 이성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최고의 교육기관으로부터 제도적으로 배제되었습니다. 당시 여성 차별은 일반적인 것이었지만, 중세 대학은 ‘여성이 사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교육에서 배제시켰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파리대학에서 모두 남성이었던 학생과 교수들이 대학에 들어갈 때 기사들과 같이 “지성적 십자군”에 나설 것을 서약할 때 여성들은 원천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서구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서 여성들은 갑자기 고등 교육의 기회 접근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여성들은 도시에 살며 그들의 부모가 부유한 경우에 한해서 특정한 기초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을 위한 고등 교육의 기회는 수도원에만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수도원에서의 교육을 통해 사회적인 신분 상승을 이룬다는 것은 그다지 간단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여성들이 수도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신분에 맞게 결혼하기 위해 가져가야 하는 지참금보다는 적었다고 하더라도 수도원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지참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cyrus 2018-05-03 19:55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교수님. 제 궁금증을 해소하는 답변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내에 중세 여성을 주제로 한 책이 많이 나오지 않은 걸로 압니다. 아일린 파워의 《중세의 여인들》을 포함해
해서 열 권도 채 되지 않습니다.

이번 달 독서 모임을 위해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을 예정입니다. 교수님이 쓴 《중세의 재발견》을 읽고나서 중세 철학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습니다. 교수님이 쓰신 다른 책들도 참고해야겠습니다. ^^

옥토끼샘 2018-05-03 15: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더 상세한 내용이 필요하시면 제 논문 박승찬, 「‘신의 모상’으로 창조된 여성의 진정한 가치- 토마스 아퀴나스의 여성이해에 대한 비판적 성찰」, 『가톨릭철학』7 (2005), 148-190쪽. 과 그곳에 제시된 참고문헌들을 참조해 보시기를...
 
신이 된 인간들 - 한국의 산신 그 신화와 역사를 담다 문화와 역사를 담다 5
박정원 지음 / 민속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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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인간에게 길흉화복을 내린다고 믿어지는 초자연적인 존재이다. 조상들은 산에 신이 살고 있다고 믿어 산신제를 올렸다. 산신은 산 혹은 그 산의 영역에 속한 모든 자연물을 관장하는 신령이다. 서양인에게 산은 신을 만나는 다리 역할을 했다. 그리스인들은 높다란 언덕에 신전을 지었고, 기독교인들은 높은 산에 올라 하느님을 만났다. 그와 달리 동양인에게는 산 자체가 숭배 대상이었다. 특히 우리 민족에게 산은 아름다움의 대상만이 아닌 살아 숨 쉬는 신성한 존재였다. 조상들은 위대한 장수나 임금은 죽어 산신이 되어 마을을 지키고 나라를 지킨다고 믿었다. 지금도 사찰에 가면 산신을 모시는 장소가 있다. 그 앞에서 저마다 소망을 담아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단군 역시 산신이 되었다는 기록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산신은 인격신이 아닌 민중의 정신적 지주였다.

 

그러나 산신은 토속신과의 혼용, 융합과정 등 여러 세월을 거치는 동안 미신의 산물로 퇴색된다. 급격하게 불어 닥친 도시화 물결 속에서 산신과 관련된 상징물들은 미신을 타파한다는 이유로 쓸쓸히 방치되거나 폐기됐다. 이제 남은 것이라곤 별로 없다. 예전에 있었던 산신 문화를 전해줄 수 있는 고령의 마을 사람들마저 사라지고 나면 기나긴 역사와 조상의 얼이 담긴 산신 문화의 명맥이 잊힐 것이다.

 

「월간 산」의 박정원 기자가 펴낸 《신이 된 인간들》(민속원, 2018)은 이처럼 사라져 가는 산신 문화의 흔적을 찾아내는 한편 조상들의 마음속에 담겼던 기원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신화 자체는 물론 전설과 민담에서 화석으로 남은 산신의 조각을 모아 잃어버린 산신 문화의 원형을 추적한다. 문헌상으로 산신의 시원은 단군 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단군은 우리나라 초대 산신이다. 조상들은 자연에 대해 외경심을 갖고 있었다. 특히 자기가 사는 마을 근처의 산과 강, 언덕에는 마을을 지켜주는 자연신이 있다고 믿었다. 애초에 자연신은 여성 산신이었으나 농경 중심 정착 사회와 유교 문화가 결합한 이후로 남성 산신이 숭배의 대상이 됐다.

 

민중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은 죽어서도 산신으로 추앙받았다. 전설에 따르면 단종의 영혼이 백마를 타고 태백산으로 와서 산신이 되었다고 한다. 단종은 문종의 뒤를 이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즉위했다. 그러나 3년 뒤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청령포로 유배되어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다. 영월에 유배됐던 단종에게 자주 머루와 달래를 진상했던 신하 추익한은 단종이 죽던 날 곤룡포를 입고 태백산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이 지역 사람들은 단종을 태백 산신으로 모시고 해마다 음력 9월에 제를 올리게 됐다.

 

우리나라 신의 종류는 한둘이 아니다. 산신과 용신, 천신에 속하는 옥황상제와 관우, 최영 같은 장군신 등이 있다. 특히 최영은 우리나라 최고의 장군신이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에게 밀려 비극적 최후를 맞은 최영은 무속에서는 중요한 신격으로 추앙된다. 최영은 역사 속에 자신의 자취를 분명히 남긴 현실의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무당들의 수호신이 되어 신격화되었을까. 최영의 억울한 죽음에 답이 있다. 무속 신앙은 억울하게 죽은 영혼은 저승에 안착하지 못하고 떠돈다고 생각한다. 그중에서 억울하게 죽은 왕(앞서 소개한 단종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장군 등은 신격으로 추대된다. 최영은 사후 100년도 안 되어 장군신으로 숭상된 특별한 인물이다. 조상들이 굿을 한 까닭은 자신과 가족의 고통을 덜기 위해서였다. 이때 좌절한 영웅들의 영혼을 위로해주고 자신들의 어려움을 호소하면 그들이 들어준다고 생각했다. 장군신에 대한 조상들의 생각은 단순히 미신의 형태라기보다는 ‘민심’에 가깝다. “민심은 천심이다”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천심’은 ‘신의 마음’인 셈이다. ‘현실적인 신’이나 다름없는 왕이 무능하면 민심을 읽지 못한다. 민중은 무능한 왕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신이 된 인간’, 즉 산신에게 기도를 드린다. 따라서 산신 문화에는 조상들의 소박하고도 간절한 마음이 깃들어 있다.

 

지역마다 다양한 산신 문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 만큼 여성 산신이 차지하는 비중도 무시할 수 없다. 남성 중심의 가치관이 지배하면서 많은 여성 산신들이 사라지거나 남성 산신으로 대체되는 바람에 여성 산신을 숭배하는 문화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산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이다. 정견모주는 가야산 자락에 사는 민중들이 가장 우러러보는 신이었다. 천신(天神) 이비가지의 아내가 된 여신은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금관가야국의 수로왕을 낳았다. 제주도 탄생 설화에 반드시 언급되는 설문대 할망도 꼭 기억해야 할 여성 산신이다. 제주도를 만든 설문대 할망이 있었기에 제주도는 예로부터 ‘여성이 많은 섬’으로 알려져 왔다.

 

대대로 내려오는 신화나 설화 그리고 산신 등에서 볼 수 있듯 우리나라에는 다양한 문화들이 현존한다. 우리 조상들은 삶을 살아왔다. 기쁨은 나누고 슬프고 힘든 일은 함께 극복하려 했다. 산신 문화는 이웃과 희로애락을 같이 할 수 있었던 하나의 놀이문화였다.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산신 문화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산신은 우리나라의 민속 신앙임에도 비현실적 존재로 치부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를 번성시킨 곳에는 풍부한 상상력을 재료로 삼은 튼실한 구조의 신화가 있었다. 신화는 인류의 삶의 시작과 함께 존재해 왔다. 신화의 주인공 신은 내밀한 인간 정신의 기원을 파악할 수 있는 ‘뿌리’와 같다. 그 뿌리를 따라가다 보면 가정과 국가의 평안을 바라는 우리의 산신 문화가 깊게 자리 잡고 있다. 산신 문화에 근원을 둔 역사적 가치가 잊히는 것은 우리의 뿌리를 스스로 외면하는 일이다.

 

 

 

 

※ Trivia

 

* 근대 철학자 칸트‘신은 죽었다’고 과감하게 주장했다. (28쪽)

→ 저자는 글을 쓰면서 과감하게 실수를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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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20 12: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4-20 15:46   좋아요 1 | URL
산에 자주 가면 신기를 느낄 수 있는 건가요? ^^
저는 산 차제가 신이라고 생각해요. 산꼭대기에 오르려면 산신의 심기를 건드리면 안 돼요.. ㅎㅎㅎ

sprenown 2018-04-20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터키를 형제의 나라라고 하지요.
왜냐 하면 같은 신을 모셨거거든요.단군이 터키어 탕그리와 같답니다.
하늘 신이란 뜻이예요!
마침 좋은 날씨에 제주에 내려왔어요!
너무 좋네요. 한라산도 올라서 백록담도 봤구요
한라산 등반할땐 등산 스틱 꼭 챙겨오세요!

cyrus 2018-04-20 15:52   좋아요 0 | URL
와우! 정말 부럽습니다. 날씨가 한창 좋을 때 제주에 가셨군요. 지금 대구 날씨도 엄청 좋은데 미세먼지 때문에 나들이를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ㅠㅠ

제주도에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어요. 그때 겨울이었어요. 무슨 산인지 기억이 나지 않은데 등정 코스가 유명한 산이었어요. 친구와 그 산에 갔는데 날씨가 최악이었어요. 산에 오르기 전에는 비가 내렸어요. 산 중반까지 올라갔을 때 비가 눈이 되는 마법을 목격했어요.. ㅎㅎㅎ 시간이 지날수록 눈바람이 거세졌어요. 정말 그때 등산하다가 죽을 수 있겠다는 두려움을 느꼈어요.. ㅎㅎㅎㅎㅎ 그래서 빠른 포기를 하고 하산했습니다. 하산하니까 눈바람이 잠잠해졌어요. 역시 산은 아무나 오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 제주도에서 즐거운 시간 되시길 바랍니다.

sprenown 2018-04-20 1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박4일간의 좋은 여행이었어요!
한라생태숲은 꼭 와보세요.
정말 종습니다.노루도 뛰어다닙니다!
이제 비행기 탑니다.담주부터 열심히 일 해야죠!

cyrus 2018-04-20 15:58   좋아요 0 | URL
일상으로 돌아오셔서 책도 읽어야죠..^^

sprenown 2018-04-20 17: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 서울에 도착했어요.
주말에 마저 읽고 올릴게요!
독서에 대해 강박관념을 갖을 필요는 없는데.. 나름대로 규칙이 있어야 할것 같더군요^^.1주일정도에 한권읽고 독후감 써보려고요

cyrus 2018-04-21 10:45   좋아요 0 | URL
제주도 여행하면서 찍은 사진도 보여주세요. ^^

sprenown 2018-04-21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북풀이나 서재기능에 익숙치 못해 사진올리는 법을 모릅니다. 그냥 책읽고 간신히 독후감써서 올릴줄 밖에 몰라요. 별로 필요성도 못느끼구요^^. 어젠 낮술에 제주 떠나는게 아쉬어서 자랑이 심했네요. 주위에서도 그러던데 저도 한 1년정도 휴직하고 살고 싶더군요^^.

cyrus 2018-04-22 11:41   좋아요 0 | URL
놀러 간 거 자랑할 수도 있죠. sprenown님과 댓글을 주고받았을 때 제주도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어서 좋았어요. ^^
 
성장의 문화 - 현대 경제의 지적 기원
조엘 모키르 지음, 김민주.이엽 옮김 / 에코리브르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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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진보한다’는 명제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역사의 진보나 발전의 방식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서 입장이 갈린다. 《역사란 무엇인가》(까치, 2015)로 유명한 카(E. H. Carr)는 역사의 진보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모든 시간을 하나로 통합하는 총체적인 진보로 해석한다. 프랑스 아날학파를 대표하는 페르낭 브로델은 전통적 역사학이 단기적 시간 속에 매몰된다는 점을 비판하며 장기지속, 중기지속, 단기지속이라는 시간의 세 층위에 따라 역사를 바라봤다. 물론, 역사의 흐름은 단선적이지 않다. 역사를 살펴보면 우연한 사건이 역사의 큰 물결을 변화시킨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역사는 너무나도 변화무쌍하고, 복잡하다. 루이 알튀세르의 말을 빌리자면 역사는 ‘예견할 수 없는 길’이다.

 

‘사후 확증 편향(Hindsight Bias)’라는 용어가 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한 다음에는 그 일이 사실로 인상에 강하게 남고 그 결과, 사전에 예측한 일의 가치를 과대평가하는 현상을 말한다. 처음에는 그런 결과가 나올 줄 전혀 몰랐으면서도 사건이 지난 뒤에 우리는 자신이 처음부터 그런 결과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역사는 어느 문명보다도 번성한 유럽 문명을 중심으로 기록된 역사다. 그래서 서양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유럽 문명의 경제적 번영이 처음부터 예견된 일인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유럽을 ‘세계 경제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만든 원동력, 즉 진보의 힘에 부러워한다. 또 진보적인 세상을 만들려고 했던 유럽 지식인들이 얼마나 위대한 인물인가 하고 감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관점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보인다. 유럽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도 마찬가지다. ‘유럽은 이렇다’라는 해석이 어떤 이에게는 서구중심주의로 비칠 수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서구중심주의 비판론으로 비칠 수도 있다. 경제사학자 조엘 모키르《성장의 문화》(에코리브르, 2018)는 ‘세계의 패권’을 차지한 유럽의 역사적 배경에 주목한다. 저자는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유럽은 언제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을까? 어째서 중국은 유럽처럼 세계의 패자로 군림하지 못했을까?” 저자는 유럽 패권의 역사, 그중에서도 유럽 문명이 가장 자랑스러운 전성기로 믿어 의심치 않는 근대 초기(1500~1700년) 경제 성장의 역사‘문화’라는 새로운 관점으로 파헤친다.

 

서구 역사가들은 유럽이 특유의 합리성과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근대 자본주의를 ‘발명’했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모키르는 1500년부터 1700년까지 2백 년의 유럽사를 분석해 새로운 결론을 제시한다. 그는 근대 초기 유럽의 경제 발전에 기여한 문화적 토대는 ‘계몽주의’라고 말한다.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소수의 엘리트 계층이었다. 그들은 과학과 기술 등 ‘유용한 지식’에 관심을 가졌으며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꿈꿔왔다. ‘국경을 초월한 사랑’이 있듯이 지식애(知識愛)도 국경은 무의미하다. 유럽의 지식인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새로운 지식을 공유했고, 유용한 지식이 활용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도 했다. 저자는 아이디어가 공유되는 초국가적 네트워크를 ‘편지 공화국’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진보가 가져다주는 혜택을 누리려면 현상 유지를 선호하는 기득권 세력과의 충돌이 불가피하다. 오늘날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인간의 이성과 과학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세상을 만들려는 개혁자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혁신을 거부하는 그 시대 사람들이 바라본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별종’에 가까웠다. 모키르는 이 ‘소수의 별종’을 가리켜 ‘문화적 사업가(Cultural Entrepreneurs)’라고 말한다. ‘문화적 사업가’는 현 체제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도전 정신이 강하다. 이 책에서 모키르는 유럽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대표적인 문화적 사업가로 프랜시스 베이컨아이작 뉴턴을 꼽는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형성된 ‘유럽 특유의 문화’는 문화적 사업가들조차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모키르는 경제 번영이라는 성공적인 결과를 필연이 아닌 ‘우연’이라고 말한다. 근대 유럽이 번영하게 된 데에는 여러 시기적 요건들이 맞아떨어졌다. 종교개혁 이후 각각의 종교들은 자신들의 교리의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교육 홍보에 열을 올렸다. 예수회 같은 일부 종파는 유용한 지식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이렇게 경쟁적으로 교육을 가르치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대중이 유용한 지식에 접근하는 기회가 늘어난다. 그러므로 ‘성장의 문화’를 단순히 우연적인 현상으로 보면 안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는 단순하지 않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연이든 필연이든 문화가 유럽의 운명 자체를 바뀌게 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문화가 만든 번영’을 이해하려면 복합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성장의 문화》는 경제학 방법론과 문화진화론 방법론 등을 이용하여 근대 유럽의 번영기를 다채롭게 접근하여 분석한다.

 

그렇다면 다시 저자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왜 중국은 세계의 중심이 되지 못했을까? 중국은 유용한 지식에 대한 믿음, 지식을 자유롭게 공유하는 인적 네트워크 등과 같은 개방적인 문화적 풍토가 생기지 않았다. 중국도 유럽에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교육 수준이 높았고 발전 가능성이 높은 나라였다. 중국은 번영의 열매가 자라나는 지식의 씨앗을 가지고 있음에도 제대로 발아할 수 있는 환경적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중국과 유럽과의 수준 격차는 벌어졌다.

 

경제가 성장하려면 지식은 긴밀하게 연관돼 있고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 문화적 사업가는 신선도 좋은 지식을 갈구했고, 그것을 경제적 이익을 증진하는 데 사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변화가 두려운 사회는 문화적 사업가의 활동을 막는 규제를 강화한다. 중국이 우위를 유지하지 못하고 정체되고 만 것은 바로 현 체제에 순응하려는 편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도 그런 편향을 고치지 못하고 있다. 《성장의 문화》가 보여준 역사의 교훈은 ‘예견할 수 없는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미래사회의 희망적 모델이 될 수도 있고, 닮지 말아야 할 반면교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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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04-19 23: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역사가 진보한다는 명제를 부정합니다. ㅎㅎ
심지어 진보나 발전을 거부합니다. ^^
아마 저만 아닐걸요. ^^

cyrus 2018-04-20 11:42   좋아요 1 | URL
저도 북다이제스터님의 생각과 같습니다. 진보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믿는 것에 거부감을 느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