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여자의 역사
클로딘느 사게르 지음, 김미진 옮김 / 호밀밭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백설 공주』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이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는 동화이다. 공주와 이를 시기하는 계모 사이의 갈등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 백설 공주 이야기는 일곱 난쟁이, 진실을 말하는 거울, 독 사과 등 상상적 소재들이 첨가되어 이야기의 재미를 더한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괴롭혀서는 안 된다는 교훈까지 보여주고 있어 더없이 좋은 동화로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백설 공주 이야기 같은 전래동화는 아이들에게 여성에 대한 잘못된 고정관념을 심어주기도 한다. 동화 속 계모는 어린 딸을 미워하고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는 사람으로 묘사된다. 백설 공주는 하얀 피부와 붉은 앵두 같은 입술을 가진 아리따운 모습이다. 계모는 백설 공주의 타고난 미모를 질투한다. 동화 속에서 여성은 착하고 예쁜 여성 아니면 나쁘고 못생긴 여성으로 그려진다. 또 여성을 괴롭히는 존재는 또 다른 여성, 즉 못생기고 성질이 고약한 여성이다.

 

계모의 질투심에 불을 지른 건 자신보다 백설 공주가 더 예쁘다고 일러바친 거울이다. 사실, 동화 『백설 공주』에서 악의 근원은 계모가 아니라 거울이다. 거울이 만들어지고부터 인간은 비로소 자기를 깊이 인식하고 또한 다른 사람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자기 얼굴을 알게 된 인간은 외모에 대한 우월과 차별을 알게 되었고 화려함과 누추함에 대해서도 자각하게 되었다. 거울은 나르시시스트(narcissist)를 양산하기도 했지만, 인간 대부분을 자기 혐오증에 빠져들게 했다.

 

과거에 남성은 외모보다는 주로 능력이나 성격으로 평가되었다. 요즘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하다 보니 남성도 외모가 중요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성은 마치 무슨 ‘사명감’처럼 무조건 예뻐야 하는 부담감을 짊어진 채 살아왔다. 여전히 여성은 사회적 · 경제적 능력보다 외모에 많은 가치 기준이 부여되고 있다. 여성들은 끊임없이 외모에 대해 평가를 받는다. 그렇다면 유독 여성의 외모에 더욱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시선은 현대인만의 특징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못생긴 여자의 역사》는 여성의 외모를 향한 평가와 혐오의 역사를 추적하고, 여성을 왜곡한 역사와 문화를 비판한다. 추함, 즉 ‘못생긴 여자’는 남성 중심의 공적인 역사에서 외면당하고 박해받았다. 이 책을 쓴 저자 클로딘느 사게르(Claudine Sagaert)는 못생긴 여자가 부정적인 존재로 규정되는 과정을 시대적으로 구분한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추한 존재였다. ‘여성은 신체적으로 남성보다 열등하게 태어났다’는 엉터리 통념이 이때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여성의 신체적 특성 때문에 사회적으로 열등할 수밖에 없다는 통념은 여성의 열등한 면뿐만 아니라 여성의 추함을 주장하는 근거로 작용했다. 고대 그리스인, 그리고 더 나아가 중세 시대 사람들이 생각한 여성의 ‘추함’은 신체적으로 추하고, 도덕적으로 추한 것을 의미했다. 노파와 마녀는 여성의 근본적인 추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존재로 미술에서 묘사됐다. 근대에 이르게 되면서 교양 없고, 자기 관리에 소홀한 여성이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노처녀, 똑똑한 독신녀, 페미니스트 같은 전통적 여성성에 벗어난 여성은 ‘못생긴 여자’로 취급받았다. 현대에 들어서도 ‘못생긴 여자’에 대한 남성 중심적 시각은 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시각은 못생긴 외모를 개인의 문제로 본다.

 

추한 것, 조화롭지 못한 것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법이다. 다만 이런 것에 대한 수용 능력이 부족한 사회가 문제다. 아름다움과 추함은 개개인의 정체성을 구분하고 확정 짓는 기준으로 작용한다. 추함을 거부하고 조롱하는 반응은 아름다움을 열렬히 추구하는 사회의 또 다른 역설이다. 이러한 기나긴 역설은 ‘못생긴 여자의 역사’가 반증한다. 이는 곧 아름다움 자체가 권력이 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나이 듦이 연륜이 아닌 추함으로 여겨지고, 복원될 수 없는 아름다운 젊음을 성형을 통해 조형하도록 요구하는 이 사회에서 여성은 어떤 이유로든 추함에 대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남성은 외모를 근거로 아름다움과 추함을 구분해온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남성의 편파적인 외모 평가는 여성을 무시하는 ‘예의 없는’ 태도이다. 나 또한 ‘예의 없는’ 남성으로 외모 차별에 연루되었음을 깊이 반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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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3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14 12:20   좋아요 0 | URL
서구인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면 하얀 피부는 백인, 까무잡잡한 피부는 흑인으로 구분합니다. 흑인들도 피부색에 대한 차별을 견디지 못해서 하얀 피부를 동경하기도 합니다.

페크pek0501 2018-09-13 17: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 님 같은 분만 이 세상에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하는 생각이...

cyrus 2018-09-14 12:21   좋아요 0 | URL
제 혼자 이 세상에 있으면... 오래 못 살고 죽어요... ㅎㅎㅎㅎ

세상틈에 2018-09-13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백설공주 읽고는 같은 생각을 했네요.^^ 흥미로운 책 보관함에 넣어봅니다.

cyrus 2018-09-14 12:22   좋아요 0 | URL
공주가 주인공으로 나온 동화에 보면 악녀는 못생긴 외모로 나옵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대부분 사기꾼은 호감형 인상을 가지고 있거든요. ^^;;

조그만 메모수첩 2018-09-13 2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고대 그리스에서 여성은 존재 자체를 추하게 여겼는데(그리하여 열등한 존재), 지금 읽고 있는, 기원후에 정리된 <변신이야기>에선 여성들의 관능적 아름다움을 강조하는데(이며 이 아름다움은 남자들의 약탈 또는 착취대상이 되네요. 아름다운 소년도 마찬가지) 이 변화는 언제 어떻게 일어난 걸까 글을 읽으면서 문득 궁금해졌어요.

cyrus 2018-09-14 12:25   좋아요 1 | URL
그리스인들은 신화 속 여성, 즉 신비로운 여성의 아름다움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조각가들은 벌거벗은 여신을 묘사한 조각상을 만들었고, 남성들은 공개적으로 여성의 몸을 볼 수 있었어요.

힐리 2018-09-17 10: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호밀밭 출판사 편집자 박정오입니다. 저희 책에 관심 가져주시고 이렇게 정성스러운 서평까지 써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cyrus 2018-09-17 12:23   좋아요 0 | URL
서평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1853년 7월, 미국의 매튜 페리(Matthew Perry) 제독이 이끄는 네 척의 군함이 에도 만(현재의 도쿄 만)에 들어왔다. 페리는 해안을 봉쇄하며 통상 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이듬해 일본과 미국은 화친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서양 따라잡기에 나선 일본은 개항 50년 뒤 열강의 일원으로,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에는 강대국으로 인정받았다.

 

 

 

 

 

 

 

 

 

 

 

 

 

 

 

 

 

 

 

* 스기타 겐파쿠, 마에노 료타쿠, 나카가와 준안 《해체신서》 (한길사, 2014)

* 이종각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 (서해문집, 2013)

 

 

 

 

 

 

 

 

 

 

 

 

 

 

 

 

* [품절] 이종찬 《난학의 세계사》 (알마, 2014)

* 타이먼 스크리치 《에도의 몸을 열다》 (그린비, 2008)

 

 

 

과연 무엇이 일본의 근대화를 만들었을까? 페리 제독의 강압적인 요구를 시작으로 일본이 근대 국가가 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일본의 근대화는 오랫동안 누적된 도약이다.

 

일본 전국시대의 다이묘(大名: 대영주)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49년 규슈(九州)에 상륙한 스페인의 예수회 신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Francis Xavier)의 전도를 받고 기독교를 허용했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도 선교사들에 대해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출신의 선교사들은 비단 종교 활동만 한 것이 아니었다. 서양문물을 일본에 전해주는 역할도 했다. 일본은 선교 활동과 무역 활동을 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람들을 ‘남만인(南蠻人)’이라고 불렀다.

 

히데요시가 죽으면서 임진왜란은 끝났고, 일본은 그의 사후 권좌를 둘러싼 심한 권력 투쟁으로 들어갔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130년이나 계속된 전국 시대는 막을 내린다. 도쿠가와 가문의 막부(幕府)가 통치하는 에도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은 약 2백 년 동안 평화를 누린다. 도쿠가와 막부는 예수회가 교황을 위해 충성을 다하는 세력으로 판단했고 1612년부터 기독교 선교 금지령을 내렸다.

 

도쿠가와 막부는 스페인과 포르투갈과의 교류를 끊으며 쇄국 정책을 취했고, 기독교 포교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네덜란드인들에게 나가사키의 인공 섬 데지마(出島) 거주를 허가했다. 네덜란드는 기독교 선교를 포기하는 대신, 무역을 허락받았다. 도쿠가와 막부는 데지마에 관리를 상주시켜 이곳을 통해 입수되는 정보를 바탕으로 군사기술, 의학, 과학 등 선진기술과 학문을 받아들이고,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일본은 이미 13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진출하여 무역 시장에 뛰어들었고, 히데요시는 ‘주인선(朱印船)’ 정책을 실시하여 일정한 조건 하에 허가를 받은 대외 무역을 허용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일본은 네덜란드의 발전된 문명을 ‘난학(蘭學)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통해 근대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

 

난학의 형성에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에도 시대의 의사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다. 스기타는 직접 해부 현장을 참관하고, 나가사키의 역관(譯官)을 통해 네덜란드어 해부 서적을 입수한다. 스기타가 참고한 해부 서적은 독일의 의학자 요한 아담 쿨무스(Johann Adam Kulmus)가 1772년에 펴낸 <Anatomische Tabellen>를 네덜란드어로 번역한 ‘타팔렌 아나토미아(Tabulae Anatomicae)였다. 스기타는 네덜란드어를 배운 난학자 마에노 료타쿠(前野良澤)와 네덜란드 의학에 관심이 많은 의사 나카가와 준안(中川淳庵)과 함께 그 해부서를 일본어로 번역할 것을 결심한다. 그들은 변변한 네덜란드어 사전도 없이 3년 만에 타팔렌 아나토미아를 《해체신서(解體新書)라는 이름으로 번역하는 데 성공한다.

 

 

 

 

 

 

 

 

 

 

 

 

 

 

 

 

 

* 가토 슈이치, 마루야마 마사오 《번역과 일본의 근대》 (이산, 2000)

 

 

스기타는 만년에 난학의 발전과 《해체신서》의 탄생 과정을 적은 《난학사시(蘭學事始)를 발표한다. 《해체신서》의 번역을 본격적인 ‘난학의 탄생’으로 본다면, 《난학사시》는 ‘일본 근대화의 초석’이 된 책이라 할 수 있다.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난학사시》의 가치를 재발견하여 ‘탈아론(脫亞論)을 내세운다. 과거 일본의 번역은 중국 한자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체신서》는 일본식 한자로 번역한 책이었고, 《해체신서》 번역은 단순히 서양 문물의 수용 행위가 아닌, 중화주의에 대한 도전이자 부국강병을 위한 중대한 과제였다.

 

《난학사시》의 한국어 번역문은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서해문집, 2013)《난학의 세계사》 알마, 2014)에 수록되어 있다. 두 권의 책속에 있는 《난학사시》 번역문을 같이 읽으면 사소한 차이점 하나 발견할 수 있다.

 

 

 

야마가타 번 의사인 야스토미 기세키란 사람이 에도 고지마치에 살고 있었다. 그는 나가사키에 유학을 가 ‘오란다[주] 25문자’를 배운 뒤, 그 문자와 ‘이로하 47문자(いろは, 일본어 가나 문자를 배열하는 순서)’를 비교한 표 같은 것을 가지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자랑하며 오란다어 책도 읽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종각 옮김,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 pp. 211)

 

 

야마가타 번 의사였던 야스토미 기세키라는 사람이 고지마치에 살고 있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유학하면서 알파벳 25자를 익히고 그 문자로 쓰인 《48문자 첫걸음》을 가지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자신은 책도 읽을 수 있다고 떠벌리고 다녔기에 신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종찬 옮김, 《난학의 세계사》, pp. 40)

 

 

 

이로하(いろは)는 일본의 고유 음절문자 ‘가나’의 첫 세 글자를 뜻한다. 가나를 하나씩 배열하여 ‘ABC송’처럼 만든 노래가 있다. 그러므로 가나의 ‘이로하’는 영어의 ‘ABC’에 해당한다. 이로하 노래의 탄생 과정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1192)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 시기에 나온 이로하 노래는 ‘가나 47글자’로 이루어져 있었다. ‘ん’을 포함한 가나 48자로 채워진 이로하 노래는 메이지 시대 때 나왔다. 따라서 기타가 살았던 에도 시대에 널리 애송된 이로하 노래는 ‘가나 47글자’로 된 것이다. 《난학의 세계사》의 ‘48문자 첫걸음’은 오역이다.

 

 

[주] オランダ, 네덜란드의 일본어식 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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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알벨루치 2018-09-04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이 네델란드에 대해 우호적이라고 하더라구요 그 대표적인 게 17세기 네덜란드 거리를 재현한 테마파크인 후쿠오카에 있는 하우스텐보스죠! 졸업여행을 거기갔었는데 글을 보니 기억이 나네요 ㅎㅎ

cyrus 2018-09-04 13:08   좋아요 0 | URL
네덜란드를 잘 아는 나라는 일본 밖에 없을 거예요. ^^

2018-09-04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04 13:20   좋아요 0 | URL
고등학생 시절에 세계사를 공부한 적이 있어요. 제가 배운 세계사 교재에는 근대화의 시작점을 페리 제독의 등장으로 보고 있었어요. 난학에 대해서는 비중있게 설명하진 않았어요. 일본은 임진왜란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동아시아 일대에서 무역을 시작했어요. 그 과정에서 동아시아에 진출한 서양의 무역 상인들을 만나면서 서양식 무기를 들여올 수 있었어요. 일본은 그 무기를 가지고 조선을 침략했죠.
 

 

 

금서는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늘 존재해왔다. 서양 중세에서는 주로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내용들과 기성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는 책들이 교황청으로부터 금서 처분을 받았다. 시민혁명의 열풍에 휩싸인 18세기 이후에는 근대적 시민사상을 담은 책들이, 계몽주의 시대에는 과학 · 학술 · 기술 등 관련 지식을 집대성한 《백과전서》조차 금서 목록에 들어갔다.

 

보들러리즘(bowdlerism)책의 외설적인 문장을 무단으로 삭제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18세기 영국의 출판편집자 토머스 보들러(Thomas Bowdler)에서 유래됐다. 1818년에 보들러는 셰익스피어(Shakspeare)의 작품들에서 외설적이라고 판단한 부분을 삭제하여 편집한 『The Family Shakspeare』을 펴냈다.

 

 

 

 

 

 

 

 

 

 

 

 

 

 

 

 

 

* 베르너 풀트 《금서의 역사》 (시공사, 2013)

 

 

 

금서와 검열의 역사는 길고 길다. 금서와 검열의 역사는 도덕과 금지의 규범에 대한 저항의 역사를 만들었다. 많은 책들이 검열되고 불태워졌지만 그 책들은 질기게 살아남았다. 금서들 중 상당수는 살아남아서 이젠 불멸의 고전으로 추앙받는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채털리 부인의 연인》도 금서였고,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율리시스》도 금서였다. 두 작품 모두 외설 시비에 휘말렸다. 권력자들은 종교, 국가, 미풍양속을 거스른다고 ‘위험한’ 책들을 금서로 만들었다. 금서는 기성 체제를 뒤흔들고 권력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중상비방과 추문이라는 오물을 뒤집어 쓴 채 금지된 책들이 결국은 낡은 사회를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권력자들이 그런 책에 진저리를 치고 광분하는 것도 그들의 처지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금서와 검열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재진행형이다. 국가 차원에서 검열을 가하지 않더라도 사람들 스스로 알아서 책을 검열하고, 미워하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검열의 기준은 검열하려는 자의 취향에 따라 달라진다. 당연히 검열 기준이 애매모호하고, 일관성이 없다. 무슨 이유에서 문제가 되는지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창작자들은 자기 검열의 늪에 빠지게 된다. 다양한 문화 담론 형성과 역동적인 예술적 창조가 불가능해진다.

 

 

 

 

 

 

 

 

 

 

 

 

 

 

 

 

 

* 린 헌트 엮음 《포르노그래피의 발명》 (알마, 2016)

* 로버트 단턴 《책과 혁명》 (알마, 2014)

 

 

 

인간의 편견과 두려움은 책을 몰살시킬 뿐만 아니라 타자의 취향마저 억압하려고 애를 써왔다. 하지만 인간의 불온한 생각과 취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금서와 검열의 역사는 불온한 일탈과 이를 검열하려는 힘 사이의 끊임없는 줄다리기였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금서목록에 포함된 책은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일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목록에는 포르노그래피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금서로 지정된 포르노그래피는 대중이 즐겨 보는 베스트셀러였으며 봉건적 구체제(ancien regime)를 뒤흔들만한 선동적인 내용이 수록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포르노그래피는 성적 표현을 동원해 종교적 · 정치적 권위를 비판하는 ‘언어적 무기’였다. 이러한 정치적 포르노그래피의 기원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작가 피에트로 아레티노(Pietro Aretino)는 대화 형식의 포르노그래피를 썼는데, 이러한 형식은 17세기 포르노 작가들이 즐겨 쓰는 클리셰가 된다. 《포르노그래피의 발명》(알마, 2016) 《책과 혁명》(알마, 2014) 프랑스 혁명과 민주주의를 촉발한 포르노그래피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책이다.

 

 

 

 

 

 

 

 

 

 

 

 

 

 

 

 

 

 

* 게일 루빈 《일탈 : 게일 루빈 선집》 (현실문화, 2015)

* [절판] 캐서린 매키넌 《포르노에 도전한다》 (개마고원, 1997)

* [절판] 안드레아 드워킨 《포르노그래피 :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 (동문선, 1996)

 

 

 

그러나 정치적 포르노그래피는 세상을 급진적으로 바꾸려는 세력의 전유물이 되지 못한다. 보수적인 왕당파들은 혁명파를 공격하는 선동적인 포르노 팸플릿을 만든다. 위기감을 느낀 그들이 ‘반격(backlash)에 나선 것이다. 보수 세력의 반격이 거세질수록 포르노그래피에 ‘음란물’ 이미지를 덧씌우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검열과 규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학자 캐서린 매키넌(Catharine Mackinnon)은 1980~90년대 반포르노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과 함께 ‘반포르노법’ 제정을 추진했다. 매키넌과 드워킨이 제안한 반포르노 법은 포르노를 ‘영상 또는 언어를 통해 여성을 복종시키는 성적 묘사물’로 규정한다. 매키넌과 드워킨은 여성이 결박당하거나, 고문당하는 장면이 나오는 포르노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만드는 묘사라고 비판한다. 이렇듯 반포르노 세력은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을 포르노의 정의와 특징에 포함하는 반포르노 운동을 펼친다. 이로 인해 사도마조히즘, 즉 SM 문화는 성적 학대의 대명사로 알려진다.

 

게일 루빈(Gayle Lubin)은 반포르노 운동을 비판한 SM 레즈비어니즘 페미니스트다. 그녀는 최초의 레즈비언 SM 단체 ‘사모아(Samois)의 공동 창립자 중 한 사람이다. 루빈에게 SM은 개인의 ‘성적 기호’이자 ‘실천’이다. 그녀는 SM을 포르노와 동일한 해로운 현상으로 취급하는 반포르노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이로써 SM과 포르노를 반대하는 페미니즘 세력과 SM을 옹호하는 페미니즘 세력 간의 대립이 지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루빈은 반포르노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중상모략과 인신공격을 받기도 했다.

 

검열의 본질은 두려움이다. 반포르노 세력은 포르노가 위험한 성적 행동에 일조하는 해로운 매체라고 주장한다. 도덕 유지를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은 포르노, 심지어 성적 욕망마저 사회의 끔찍한 문제의 희생양으로 만든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왔던, 국민 통제를 쉽게 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이다. 권력은 포르노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권력은 포르노의 악영향을 강조하여 음란물뿐만 아니라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섹슈얼리티까지도 단속한다. 소수의 성적 취향은 ‘음란한 일탈’로 낙인찍히고, 다수의 대중은 일탈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분노와 적개심을 드러낸다. 과거보다 더 지능적이고 교묘한 검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국가에 의한 무자비한 검열은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는 일상화된 검열로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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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4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8-14 11:01   좋아요 1 | URL
네. 오늘 연차 내서 쉬는 중입니다. ^^

2018-08-14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8-14 11:05   좋아요 1 | URL
성서도서관이에요 ㅎㅎㅎㅎ 어디에 계신가요?

2018-08-14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8-14 11:18   좋아요 0 | URL
점심 먹고 다시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ㅎㅎㅎ

stella.K 2018-08-1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syo님과 교신 중인가 보닷!ㅎㅎ

syo 2018-08-14 11:19   좋아요 0 | URL
귀신이시다....

cyrus 2018-08-14 11:19   좋아요 0 | URL
역시 세상은 좁아요 ㅎㅎㅎ

stella.K 2018-08-14 11:25   좋아요 0 | URL
ㅋㅋㅋ 귀신은...
좋아요 명단 보면 딱 감이 오는데...
두 분이 만나기로 했나?
그냥 그런 생각해 봤슴다.

아, 그런데 진짜 만나기로 했군요.
둘이 오붓한 시간되길...^^

syo 2018-08-14 11:39   좋아요 0 | URL
애초 만나기로 한 것은 아니었고, 도서관에 왔더니 사이러스님의 흔적이 남아있어서 확인해본 거예요 ㅎㅎㅎ

이럴 줄 알았으면 이쁘게 하고 올 것을?? ㅋㅋㅋㅋㅋㅋ

stella.K 2018-08-14 11:59   좋아요 0 | URL
ㅎㅎㅎ 둘이 사귑니까?
cyrus도 오늘 스요님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텐데...ㅋ

암튼 둘이 예쁜 시간 가져요.
저도 사는 곳에 대구였으면 나갔을지도...ㅋ
그나저나 유레카님은 합류 안 하시려나?
요즘 안 보이시는 것 같던데
휴가 가신 모양인듯.
아깝네. 대구 막강 삼총사로 등극하셨는데 말이죠.ㅋㅋ

아, 근데 사이러스의 흔적.
나 보다 더 귀신인데요?ㅋㅋㅋ

cyrus 2018-08-14 15:48   좋아요 0 | URL
밖에서 가족이랑 점심 먹으면서 시간 보내느라 도서관에 못 갔어요.. ^^;;

왠지 주말에 도서관에 가면 또 syo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ㅎㅎㅎ

syo 2018-08-14 15:5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저는 주말에는 도서관에 가지 않습니다. 주중에는 도서관에서 더위를 피하고 주말에는 다른 곳으로 더위를 피하러 가지요 ㅎ

카알벨루치 2018-08-14 16:29   좋아요 1 | URL
사이러스, syo님 웃겨 정말ㅋㅋㅋㅋㅋ

stella.K 2018-08-14 18:25   좋아요 1 | URL
엇, 그럼 오늘 못 만난 거야?
둘이 만나나 기대했는데...ㅠ

그런데 왜 내가 기대를 하는 거지...?ㅋㅋㅋ

레삭매냐 2018-08-14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턴의 <책과 혁명>은 구간을 사려고 그렇게
노력했으나 구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개정
판으로 사긴 했는데 여적 못 읽고 있네요...

단턴의 다른 책들에만 눈길이 가네요 읽지도
않을 거면서 말이죠 ㅋㅋ

cyrus 2018-08-14 15:54   좋아요 0 | URL
단턴의 《시인을 체포하라》는 책도 흥미진진해요. 분량은 적당하고, 민중이 여론을 형성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책이에요. 아마도 그 책에도 포르노 팸플릿에 대한 언급이 나온 걸로 기억해요.

카알벨루치 2018-08-14 18:28   좋아요 0 | URL
두 분 외계에서 오셨나봐 한국인인데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오, 나의 무지여!

북프리쿠키 2018-08-14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두분 ~ 저도 오늘 연차냈어요ㅎ
대구라서 언젠가는(?) 만나게 될 듯합니다ㅎㅎㅎ

cyrus 2018-08-14 20:09   좋아요 1 | URL
오늘은 저와 공통점이 있는 분들이 많네요. 저와 syo님은 같은 장소에 있었고, 저와 북프리쿠키님은 쉬고 있었네요. 그리고 셋 다 모두 대구 사람!! ㅎㅎㅎ

stella.K 2018-08-14 20:15   좋아요 1 | URL
앗, 쿠키님도 대구에 사시죠?
유레카님까지 사인방이어요.
 
에도의 몸을 열다 - 난학과 해부학을 통해 본 18세기 일본
타이먼 스크리치 지음, 박경희 옮김 / 그린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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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대국굴기의 꿈을 무척이나 효율적으로 달성한 국가이다. 일본과 서양의 만남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18세기 에도(江戶)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그랬듯이 서양은 총과 대포 등 새로운 무기와 과학기술, 그리고 기독교를 가지고 일본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의 여타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바쿠후(幕府) 역시 쇄국정책을 펼쳤다.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야 했던 바쿠후는 기독교의 포교를 묵인했지만, 가치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학자들은 서양문화를 이해하며 자기 사상을 깊이 되돌아 볼 기회를 가졌다. 일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난학(蘭學)이 이들을 통해 형성된다. 네덜란드는 16세기부터 일본과 가장 친한 서방국가였다. 일본인들은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랜드(Holland)를 한자어로 바꿔 ‘화란(和蘭)’이라고 불렀다. 난학은 네덜란드인들이 전파한 지식을 연구한 학문으로,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각성은 지식인들에 의해 싹트기 시작했다.

 

난학의 형성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1774년에 겐파쿠와 그의 동료 학자들은 《해체신서(解體新書)라는 의학 서적을 편찬했다. 《해체신서》는 일본에 번역된 최초의 서양 해부학 전문서적이다. 《해체신서》가 알려지면서 일본의 의학기술은 급속하게 발전했으며, 일본에서도 인간의 몸을 ‘열어 본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타이먼 스크리치(Timon Screech)《에도의 몸을 열다》(그린비, 2008)는 ‘인간의 몸을 여는’ 해부학 열풍이 에도 시대의 문화 변동에 끼친 영향력을 추적한 책이다.

 

사무라이의 검이 힘을 잃은 시대에 외부에서 들어온 서양식 날붙이에 일본인들은 열광한다. 그리하여 그림들에 거의 예외 없이 가위와 나이프가 등장한다. 일본인들은 서양식 날붙이를 의학 도구라고 상상했다. 인간의 몸을 절개하는 메스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일본인은 몸에 칼을 대는 것 자체에 공포를 느꼈고, 전통의학을 고수한 의사들은 서양 외과를 불신했다. 해부학이 본격 도입되기 전까지 일본 전통의학의 본류는 한방의학이었다. 일본의 한방의학자들은 약을 짓는 일에 관심을 가졌을 뿐 몸을 절개(해체)해서 들여다보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양 외과술을 접한 일본 의사들도 서서히 서구의 영향 아래 몸에 대한 인식에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해부학은 신체를 하나의 소우주로 본다. 인간의 몸은 우주 질서의 상징이고, 해부는 그것을 하나하나씩 해체하여 이해하는 일이다. 몸 위에서 펼쳐지는 해부 기술은 결국 세상 그 자체에 대한 해부였다. 메스로 몸을 여는 행위는 책 제목처럼 ‘에도’라는 몸이자 소우주를 여는 행위였다. 일본 지식인들에게 해부는 몸과 세계에 대한 앎의 욕구였다.

 

해부도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시선에는 몸의 내부를 보고 싶은(알고 싶은) 욕망과 절개에 대한 공포 사이의 긴장감이 서려 있다. 해부도는 몸에 관한 지식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매혹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인이 해부도를 보면서 느꼈을 ‘매혹적인 당혹스러움’은 해부도가 지닌 그로테스크한 매력이다. 시각적인 것은 대부분 이미지로 소비되는 속성을 지닌다. 이미지의 소비는 달리 말하면 ‘정신적 사유의 회피’라고 할 수 있다. 시각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포르노그래피의 성질을 지닌다. 타이먼 스크리치는 《해체신서》를 모방한 춘화 세 점‘색다른 재미’가 느껴진다고 했다. 시각적 매체가 수용자를 매혹하고 붙들어 가는 방법의 하나가 성(性)이다. 섹슈얼리티(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욕 또는 성적 호기심)는 시각적인 매체 내용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해체된 육체에 성적 자극을 느끼는 기이한 섹슈얼리티는 해부도에 의해 계발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이렇듯 해부도는 에로틱한 매력과 그로테스크한 매력을 동시에 가진 시각적 매체였다. 에도 시대의 해부도 열풍은 서구가 찍어 놓은 근대의 발자국을 좇는 단순 유행이 아니었다. 해부도 열풍의 근저에는 이미 근대적 자극, 즉 ‘에로 그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에로 그로’는 1930년대로 접어들어서야 현실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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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13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 과학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우리와
일본은 달랐던 모양입니다.

유가 정신을 내세우며 신체발부 수지부모
라 하여 시신에 칼을 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 같은데, 일본에서는 상대적
으로 자유로웠던 것 같네요.

에로 그로라... 아니메와 연관되어 생각해
보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닌
듯 합니다.

cyrus 2018-08-13 21:37   좋아요 0 | URL
요즘 ‘에로 그로‘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그 문화의 기원이 궁금했어요. 그래서 에도 시대 역사서까지 찾아 보게 됐어요.

<감각의 제국>과 <기니어피그>, 두 영화는 공통으로 신체 부위가 절단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절단된 신체를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영화 속 인물의 심리상태는 병리적이라기 보다는 에도 시대 해부도 유행이 만든 ‘에로 그로‘ 문화의 일종이라 생각이 듭니다.
 

 

 

8월 14일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입니다. 세계 각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기 위한 국가기념일입니다. 1991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故 김학순 님을 기억하고, 피해자와 생존자들의 명예회복과 인권을 위해 지정됐습니다. 이 기념일을 맞아 전국에 일본군 ‘위안부’ 여성의 삶과 운동의 역사를 알리는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는 8월 14일 제6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을 맞아 대구에서도 행사가 열립니다. 세계일본군‘위안부’기림일공동행동대구·경북조직위원회“그녀들의 용기, 우리들의 위드 유”라는 슬로건으로 강연, 전시회, 문화제 등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8월 3일 오후 7시 국가인권위대구사무소 대구인권교육센터에서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 첫 번째 기획 강연이 열렸습니다. 이날 강연은 이인순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장님이 맡았습니다. 내일이죠. 10일 두 번째 강연은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님의 「페미니즘 관점으로 본 일본군 ‘위안부’ 운동」입니다.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는 ‘위안부’에 왜 작은따옴표가 붙여져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이 궁금증은 강연이 시작된 지 20분 만에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실도 새로 알게 됐습니다. ‘위안부(Comfort Women)’는 ‘자발적으로 한 성매매’ 행위를 반영하는 용어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일본 극우는 지금도 ‘위안부’ 피해 여성을 자발적인 매춘부였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위안부’ 명칭의 문제점을 부각하고, ‘위안부’ 피해 여성을 정의하는 명칭이 대체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작은따옴표를 써야 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막연히 ‘위안부’를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로만 알고 있었어요.

 

 

 

 

 

 

 

 

 

 

 

 

 

 

 

 

 

* 이토 다카시 《기억하겠습니다》 (알마, 2017)

* 안세홍 《겹겹》 (서해문집, 2013)

 

 

 

우리는 ‘위안부’ 또는 ‘종군위안부(Military Comfort Women)라는 용어에 익숙합니다. ‘위안부’가 나오기 전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정신대(挺身隊)라고 부른 시절이 있었어요. ‘정신대’와 ‘위안부’, ‘종군위안부’ 명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연구가 나오면서 명칭 변경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최근에는 일본군의 반인권적 범죄 행위를 잘 드러나는 용어인 ‘일본군 성노예제(Japanese Army Sex Slaves)[주1], 또는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Japanese Military Sexual Violence Victims)라고 쓰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몇몇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성노예’와 ‘피해자’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공인된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라는 용어도 쓸 수 있습니다. 이인순 관장님은 지금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시기가 오면 ‘일본군 성노예제’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책임져야 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은 전쟁 중 일본군의 성욕 해결과 성병 예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여성을 강제로 연행(동원)한 ‘국가적 방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본군 ‘위안부’는 국가 권력 및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이며 반인권적 범죄 행위입니다. 강제연행의 유형은 다양합니다. 집에 무단 침입해서 억지로 끌고 간 사례도 있지만, ‘취업 알선’을 미끼로 가난한 여성을 납치하거나 인신매매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 극우주의자들은 일본 ‘위안부’의 강제연행마저 부정하고 있습니다. 일본 군부가 국가적 차원으로 강제연행을 기획하고 실행한 증거들이 있는데도 말이죠.

 

 

 

 

 

 

 

 

 

 

 

 

 

 

 

 

*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푸른역사, 2018)

 

 

 

 

 

 

 

 

 

 

 

 

 

 

 

 

* 윤명숙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 (이학사, 2017)

* 안병직 옮김 · 해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이숲, 2013)

* [절판] 모리카와 미치코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아름다운사람들, 2005)

 

 

 

이인순 관장님은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이숲, 2013) 93, 168쪽과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아름다운사람들, 2015) 66, 67쪽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비교했습니다. 두 책에 나온 문장을 비교해서 검토하면 버마(지금의 미얀마) 전선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故 문옥주 님의 증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옥주 님은 1943년 12월과 1944년 7월에 버마로 향하는 위안단이 부산항을 출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이 쓴 1943년 7월 10일 일기에 보면 1942년 7월에 위안단이 부산항을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주2].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는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버마와 싱가포르에 근무한 일본군 위안소 관리자(쵸우바, 帳場)로 일한 조선인이 쓴 일기입니다. 이 기록은 일본 군부가 일본군 ‘위안부’를 계획적으로 동원하고 위안소 운영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일기를 우리말로 옮기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해제를 쓴 안병직 교수는 ‘뉴라이트’ 계열 학자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소극적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이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뉴라이트 역사관의 행보를 생각하면, 일기 번역과 해제를 뉴라이트 진영에서 활동하는 학자에 맡긴 건 분명 ‘옥에 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자료의 가치마저 깎아내리면 안 됩니다. 어떤 독자는 “이 책을 통해서 무언가 의미를 도출하기 어렵다”라고 썼던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안소 관리자의 일기는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알릴 수 있는 증거 자료입니다. 이 일기가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일본군 위안소를 운영하거나 관리한 조선인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일본 극우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근거로 일본의 국가 책임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만 가지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할 수 없습니다.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연구한 윤명숙 교수는 조선인의 일본군 ‘위안부’ 징모(徵募, 국가가 국민을 징집하는 일) 문제는 일제 강점기가 낳은 조선 민족 내부의 모순이며 이 비극의 역사를 우리나라 스스로 청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주3]. 조선인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관여한 일을 인정하는 것도 일제 잔재 청산의 길입니다.

 

 

 

* Trivia

 

故 문옥주 님은 1936년 16살에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만주와 버마 등지에서 고초를 겪었습니다. 故 김학순 님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본인의 피해 사실을 밝혔습니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는 문옥주 님의 생애를 정리한 책입니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이 되었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 ·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은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1권에 문옥주 님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주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채록한 일본의 사진작가 이토 다카시(伊藤孝司)‘일본군 전용 성노예 피해자(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토 다카시 지음, 안해룡 · 이은 옮김, 《기억하겠습니다》, 알마, 2017)

 

[주2] 안병직 옮김,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이숲, 2013, pp. 93.

 

[주3] 윤명숙 지음, 최인순 옮김,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 이학사, 2015, pp. 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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