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는 지역과 시대를 막론하고 늘 존재해왔다. 서양 중세에서는 주로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내용들과 기성 질서에 이의를 제기하는 책들이 교황청으로부터 금서 처분을 받았다. 시민혁명의 열풍에 휩싸인 18세기 이후에는 근대적 시민사상을 담은 책들이, 계몽주의 시대에는 과학 · 학술 · 기술 등 관련 지식을 집대성한 《백과전서》조차 금서 목록에 들어갔다.

 

보들러리즘(bowdlerism)책의 외설적인 문장을 무단으로 삭제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18세기 영국의 출판편집자 토머스 보들러(Thomas Bowdler)에서 유래됐다. 1818년에 보들러는 셰익스피어(Shakspeare)의 작품들에서 외설적이라고 판단한 부분을 삭제하여 편집한 『The Family Shakspeare』을 펴냈다.

 

 

 

 

 

 

 

 

 

 

 

 

 

 

 

 

 

* 베르너 풀트 《금서의 역사》 (시공사, 2013)

 

 

 

금서와 검열의 역사는 길고 길다. 금서와 검열의 역사는 도덕과 금지의 규범에 대한 저항의 역사를 만들었다. 많은 책들이 검열되고 불태워졌지만 그 책들은 질기게 살아남았다. 금서들 중 상당수는 살아남아서 이젠 불멸의 고전으로 추앙받는다.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채털리 부인의 연인》도 금서였고,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율리시스》도 금서였다. 두 작품 모두 외설 시비에 휘말렸다. 권력자들은 종교, 국가, 미풍양속을 거스른다고 ‘위험한’ 책들을 금서로 만들었다. 금서는 기성 체제를 뒤흔들고 권력의 기반을 무너뜨린다. 중상비방과 추문이라는 오물을 뒤집어 쓴 채 금지된 책들이 결국은 낡은 사회를 뒤엎고, 새로운 사회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권력자들이 그런 책에 진저리를 치고 광분하는 것도 그들의 처지에서는 당연한 일이다.

 

금서와 검열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현재진행형이다. 국가 차원에서 검열을 가하지 않더라도 사람들 스스로 알아서 책을 검열하고, 미워하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검열의 기준은 검열하려는 자의 취향에 따라 달라진다. 당연히 검열 기준이 애매모호하고, 일관성이 없다. 무슨 이유에서 문제가 되는지 선뜻 이해하기 힘든 경우가 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창작자들은 자기 검열의 늪에 빠지게 된다. 다양한 문화 담론 형성과 역동적인 예술적 창조가 불가능해진다.

 

 

 

 

 

 

 

 

 

 

 

 

 

 

 

 

 

* 린 헌트 엮음 《포르노그래피의 발명》 (알마, 2016)

* 로버트 단턴 《책과 혁명》 (알마, 2014)

 

 

 

인간의 편견과 두려움은 책을 몰살시킬 뿐만 아니라 타자의 취향마저 억압하려고 애를 써왔다. 하지만 인간의 불온한 생각과 취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금서와 검열의 역사는 불온한 일탈과 이를 검열하려는 힘 사이의 끊임없는 줄다리기였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금서목록에 포함된 책은 포르노그래피(pornography)일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전의 금서목록에는 포르노그래피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금서로 지정된 포르노그래피는 대중이 즐겨 보는 베스트셀러였으며 봉건적 구체제(ancien regime)를 뒤흔들만한 선동적인 내용이 수록되었다. 프랑스 혁명 이전까지 포르노그래피는 성적 표현을 동원해 종교적 · 정치적 권위를 비판하는 ‘언어적 무기’였다. 이러한 정치적 포르노그래피의 기원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세기 이탈리아의 작가 피에트로 아레티노(Pietro Aretino)는 대화 형식의 포르노그래피를 썼는데, 이러한 형식은 17세기 포르노 작가들이 즐겨 쓰는 클리셰가 된다. 《포르노그래피의 발명》(알마, 2016) 《책과 혁명》(알마, 2014) 프랑스 혁명과 민주주의를 촉발한 포르노그래피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책이다.

 

 

 

 

 

 

 

 

 

 

 

 

 

 

 

 

 

 

* 게일 루빈 《일탈 : 게일 루빈 선집》 (현실문화, 2015)

* [절판] 캐서린 매키넌 《포르노에 도전한다》 (개마고원, 1997)

* [절판] 안드레아 드워킨 《포르노그래피 : 여자를 소유하는 남자들》 (동문선, 1996)

 

 

 

그러나 정치적 포르노그래피는 세상을 급진적으로 바꾸려는 세력의 전유물이 되지 못한다. 보수적인 왕당파들은 혁명파를 공격하는 선동적인 포르노 팸플릿을 만든다. 위기감을 느낀 그들이 ‘반격(backlash)에 나선 것이다. 보수 세력의 반격이 거세질수록 포르노그래피에 ‘음란물’ 이미지를 덧씌우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포르노그래피에 대한 검열과 규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미국의 페미니스트 법학자 캐서린 매키넌(Catharine Mackinnon)은 1980~90년대 반포르노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안드레아 드워킨(Andrea Dworkin)과 함께 ‘반포르노법’ 제정을 추진했다. 매키넌과 드워킨이 제안한 반포르노 법은 포르노를 ‘영상 또는 언어를 통해 여성을 복종시키는 성적 묘사물’로 규정한다. 매키넌과 드워킨은 여성이 결박당하거나, 고문당하는 장면이 나오는 포르노도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만드는 묘사라고 비판한다. 이렇듯 반포르노 세력은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을 포르노의 정의와 특징에 포함하는 반포르노 운동을 펼친다. 이로 인해 사도마조히즘, 즉 SM 문화는 성적 학대의 대명사로 알려진다.

 

게일 루빈(Gayle Lubin)은 반포르노 운동을 비판한 SM 레즈비어니즘 페미니스트다. 그녀는 최초의 레즈비언 SM 단체 ‘사모아(Samois)의 공동 창립자 중 한 사람이다. 루빈에게 SM은 개인의 ‘성적 기호’이자 ‘실천’이다. 그녀는 SM을 포르노와 동일한 해로운 현상으로 취급하는 반포르노 이데올로기를 비판한다. 이로써 SM과 포르노를 반대하는 페미니즘 세력과 SM을 옹호하는 페미니즘 세력 간의 대립이 지속되었고, 이 과정에서 루빈은 반포르노 페미니스트들로부터 중상모략과 인신공격을 받기도 했다.

 

검열의 본질은 두려움이다. 반포르노 세력은 포르노가 위험한 성적 행동에 일조하는 해로운 매체라고 주장한다. 도덕 유지를 강조하는 보수주의자들은 포르노, 심지어 성적 욕망마저 사회의 끔찍한 문제의 희생양으로 만든다. 이것은 오래전부터 반복되어 왔던, 국민 통제를 쉽게 하기 위한 프로파간다이다. 권력은 포르노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권력은 포르노의 악영향을 강조하여 음란물뿐만 아니라 사회 통념에 어긋나는 섹슈얼리티까지도 단속한다. 소수의 성적 취향은 ‘음란한 일탈’로 낙인찍히고, 다수의 대중은 일탈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분노와 적개심을 드러낸다. 과거보다 더 지능적이고 교묘한 검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국가에 의한 무자비한 검열은 차별과 혐오를 재생산하는 일상화된 검열로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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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8-14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8-14 11:01   좋아요 1 | URL
네. 오늘 연차 내서 쉬는 중입니다. ^^

2018-08-14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8-14 11:05   좋아요 1 | URL
성서도서관이에요 ㅎㅎㅎㅎ 어디에 계신가요?

2018-08-14 1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8-14 11:18   좋아요 0 | URL
점심 먹고 다시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ㅎㅎㅎ

stella.K 2018-08-14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syo님과 교신 중인가 보닷!ㅎㅎ

syo 2018-08-14 11:19   좋아요 0 | URL
귀신이시다....

cyrus 2018-08-14 11:19   좋아요 0 | URL
역시 세상은 좁아요 ㅎㅎㅎ

stella.K 2018-08-14 11:25   좋아요 0 | URL
ㅋㅋㅋ 귀신은...
좋아요 명단 보면 딱 감이 오는데...
두 분이 만나기로 했나?
그냥 그런 생각해 봤슴다.

아, 그런데 진짜 만나기로 했군요.
둘이 오붓한 시간되길...^^

syo 2018-08-14 11:39   좋아요 0 | URL
애초 만나기로 한 것은 아니었고, 도서관에 왔더니 사이러스님의 흔적이 남아있어서 확인해본 거예요 ㅎㅎㅎ

이럴 줄 알았으면 이쁘게 하고 올 것을?? ㅋㅋㅋㅋㅋㅋ

stella.K 2018-08-14 11:59   좋아요 0 | URL
ㅎㅎㅎ 둘이 사귑니까?
cyrus도 오늘 스요님 만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을텐데...ㅋ

암튼 둘이 예쁜 시간 가져요.
저도 사는 곳에 대구였으면 나갔을지도...ㅋ
그나저나 유레카님은 합류 안 하시려나?
요즘 안 보이시는 것 같던데
휴가 가신 모양인듯.
아깝네. 대구 막강 삼총사로 등극하셨는데 말이죠.ㅋㅋ

아, 근데 사이러스의 흔적.
나 보다 더 귀신인데요?ㅋㅋㅋ

cyrus 2018-08-14 15:48   좋아요 0 | URL
밖에서 가족이랑 점심 먹으면서 시간 보내느라 도서관에 못 갔어요.. ^^;;

왠지 주말에 도서관에 가면 또 syo님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ㅎㅎㅎ

syo 2018-08-14 15:56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저는 주말에는 도서관에 가지 않습니다. 주중에는 도서관에서 더위를 피하고 주말에는 다른 곳으로 더위를 피하러 가지요 ㅎ

카알벨루치 2018-08-14 16:29   좋아요 1 | URL
사이러스, syo님 웃겨 정말ㅋㅋㅋㅋㅋ

stella.K 2018-08-14 18:25   좋아요 1 | URL
엇, 그럼 오늘 못 만난 거야?
둘이 만나나 기대했는데...ㅠ

그런데 왜 내가 기대를 하는 거지...?ㅋㅋㅋ

레삭매냐 2018-08-14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턴의 <책과 혁명>은 구간을 사려고 그렇게
노력했으나 구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개정
판으로 사긴 했는데 여적 못 읽고 있네요...

단턴의 다른 책들에만 눈길이 가네요 읽지도
않을 거면서 말이죠 ㅋㅋ

cyrus 2018-08-14 15:54   좋아요 0 | URL
단턴의 《시인을 체포하라》는 책도 흥미진진해요. 분량은 적당하고, 민중이 여론을 형성하는 과정을 알 수 있는 책이에요. 아마도 그 책에도 포르노 팸플릿에 대한 언급이 나온 걸로 기억해요.

카알벨루치 2018-08-14 18:28   좋아요 0 | URL
두 분 외계에서 오셨나봐 한국인인데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오, 나의 무지여!

북프리쿠키 2018-08-14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 두분 ~ 저도 오늘 연차냈어요ㅎ
대구라서 언젠가는(?) 만나게 될 듯합니다ㅎㅎㅎ

cyrus 2018-08-14 20:09   좋아요 1 | URL
오늘은 저와 공통점이 있는 분들이 많네요. 저와 syo님은 같은 장소에 있었고, 저와 북프리쿠키님은 쉬고 있었네요. 그리고 셋 다 모두 대구 사람!! ㅎㅎㅎ

stella.K 2018-08-14 20:15   좋아요 1 | URL
앗, 쿠키님도 대구에 사시죠?
유레카님까지 사인방이어요.
 
에도의 몸을 열다 - 난학과 해부학을 통해 본 18세기 일본
타이먼 스크리치 지음, 박경희 옮김 / 그린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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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대국굴기의 꿈을 무척이나 효율적으로 달성한 국가이다. 일본과 서양의 만남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18세기 에도(江戶)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그랬듯이 서양은 총과 대포 등 새로운 무기와 과학기술, 그리고 기독교를 가지고 일본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동북아시아의 여타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바쿠후(幕府) 역시 쇄국정책을 펼쳤다.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야 했던 바쿠후는 기독교의 포교를 묵인했지만, 가치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 학자들은 서양문화를 이해하며 자기 사상을 깊이 되돌아 볼 기회를 가졌다. 일본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 난학(蘭學)이 이들을 통해 형성된다. 네덜란드는 16세기부터 일본과 가장 친한 서방국가였다. 일본인들은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랜드(Holland)를 한자어로 바꿔 ‘화란(和蘭)’이라고 불렀다. 난학은 네덜란드인들이 전파한 지식을 연구한 학문으로, 일본의 근대화에 대한 각성은 지식인들에 의해 싹트기 시작했다.

 

난학의 형성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스기타 겐파쿠(杉田玄白). 1774년에 겐파쿠와 그의 동료 학자들은 《해체신서(解體新書)라는 의학 서적을 편찬했다. 《해체신서》는 일본에 번역된 최초의 서양 해부학 전문서적이다. 《해체신서》가 알려지면서 일본의 의학기술은 급속하게 발전했으며, 일본에서도 인간의 몸을 ‘열어 본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타이먼 스크리치(Timon Screech)《에도의 몸을 열다》(그린비, 2008)는 ‘인간의 몸을 여는’ 해부학 열풍이 에도 시대의 문화 변동에 끼친 영향력을 추적한 책이다.

 

사무라이의 검이 힘을 잃은 시대에 외부에서 들어온 서양식 날붙이에 일본인들은 열광한다. 그리하여 그림들에 거의 예외 없이 가위와 나이프가 등장한다. 일본인들은 서양식 날붙이를 의학 도구라고 상상했다. 인간의 몸을 절개하는 메스에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일본인은 몸에 칼을 대는 것 자체에 공포를 느꼈고, 전통의학을 고수한 의사들은 서양 외과를 불신했다. 해부학이 본격 도입되기 전까지 일본 전통의학의 본류는 한방의학이었다. 일본의 한방의학자들은 약을 짓는 일에 관심을 가졌을 뿐 몸을 절개(해체)해서 들여다보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서양 외과술을 접한 일본 의사들도 서서히 서구의 영향 아래 몸에 대한 인식에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해부학은 신체를 하나의 소우주로 본다. 인간의 몸은 우주 질서의 상징이고, 해부는 그것을 하나하나씩 해체하여 이해하는 일이다. 몸 위에서 펼쳐지는 해부 기술은 결국 세상 그 자체에 대한 해부였다. 메스로 몸을 여는 행위는 책 제목처럼 ‘에도’라는 몸이자 소우주를 여는 행위였다. 일본 지식인들에게 해부는 몸과 세계에 대한 앎의 욕구였다.

 

해부도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시선에는 몸의 내부를 보고 싶은(알고 싶은) 욕망과 절개에 대한 공포 사이의 긴장감이 서려 있다. 해부도는 몸에 관한 지식을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매혹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인이 해부도를 보면서 느꼈을 ‘매혹적인 당혹스러움’은 해부도가 지닌 그로테스크한 매력이다. 시각적인 것은 대부분 이미지로 소비되는 속성을 지닌다. 이미지의 소비는 달리 말하면 ‘정신적 사유의 회피’라고 할 수 있다. 시각적인 것은 본질적으로 포르노그래피의 성질을 지닌다. 타이먼 스크리치는 《해체신서》를 모방한 춘화 세 점‘색다른 재미’가 느껴진다고 했다. 시각적 매체가 수용자를 매혹하고 붙들어 가는 방법의 하나가 성(性)이다. 섹슈얼리티(구체적으로 말하면 성욕 또는 성적 호기심)는 시각적인 매체 내용에서 중요한 요소이며, 해체된 육체에 성적 자극을 느끼는 기이한 섹슈얼리티는 해부도에 의해 계발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이렇듯 해부도는 에로틱한 매력과 그로테스크한 매력을 동시에 가진 시각적 매체였다. 에도 시대의 해부도 열풍은 서구가 찍어 놓은 근대의 발자국을 좇는 단순 유행이 아니었다. 해부도 열풍의 근저에는 이미 근대적 자극, 즉 ‘에로 그로’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에로 그로’는 1930년대로 접어들어서야 현실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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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13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 과학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우리와
일본은 달랐던 모양입니다.

유가 정신을 내세우며 신체발부 수지부모
라 하여 시신에 칼을 대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 같은데, 일본에서는 상대적
으로 자유로웠던 것 같네요.

에로 그로라... 아니메와 연관되어 생각해
보면 아주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닌
듯 합니다.

cyrus 2018-08-13 21:37   좋아요 0 | URL
요즘 ‘에로 그로‘ 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그 문화의 기원이 궁금했어요. 그래서 에도 시대 역사서까지 찾아 보게 됐어요.

<감각의 제국>과 <기니어피그>, 두 영화는 공통으로 신체 부위가 절단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절단된 신체를 보면서 쾌감을 느끼는 영화 속 인물의 심리상태는 병리적이라기 보다는 에도 시대 해부도 유행이 만든 ‘에로 그로‘ 문화의 일종이라 생각이 듭니다.
 

 

 

8월 14일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입니다. 세계 각지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기리기 위한 국가기념일입니다. 1991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공개 증언한 故 김학순 님을 기억하고, 피해자와 생존자들의 명예회복과 인권을 위해 지정됐습니다. 이 기념일을 맞아 전국에 일본군 ‘위안부’ 여성의 삶과 운동의 역사를 알리는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는 8월 14일 제6차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을 맞아 대구에서도 행사가 열립니다. 세계일본군‘위안부’기림일공동행동대구·경북조직위원회“그녀들의 용기, 우리들의 위드 유”라는 슬로건으로 강연, 전시회, 문화제 등 다양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8월 3일 오후 7시 국가인권위대구사무소 대구인권교육센터에서 일본군 ‘위안부’ 기림의 날 첫 번째 기획 강연이 열렸습니다. 이날 강연은 이인순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장님이 맡았습니다. 내일이죠. 10일 두 번째 강연은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님의 「페미니즘 관점으로 본 일본군 ‘위안부’ 운동」입니다.

 

강연을 시작하기에 앞서, 저는 ‘위안부’에 왜 작은따옴표가 붙여져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이 궁금증은 강연이 시작된 지 20분 만에 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실도 새로 알게 됐습니다. ‘위안부(Comfort Women)’는 ‘자발적으로 한 성매매’ 행위를 반영하는 용어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일본 극우는 지금도 ‘위안부’ 피해 여성을 자발적인 매춘부였다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위안부’ 명칭의 문제점을 부각하고, ‘위안부’ 피해 여성을 정의하는 명칭이 대체할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작은따옴표를 써야 합니다. 저는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요. 막연히 ‘위안부’를 부정적인 의미를 가진 용어로만 알고 있었어요.

 

 

 

 

 

 

 

 

 

 

 

 

 

 

 

 

 

* 이토 다카시 《기억하겠습니다》 (알마, 2017)

* 안세홍 《겹겹》 (서해문집, 2013)

 

 

 

우리는 ‘위안부’ 또는 ‘종군위안부(Military Comfort Women)라는 용어에 익숙합니다. ‘위안부’가 나오기 전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을 ‘정신대(挺身隊)라고 부른 시절이 있었어요. ‘정신대’와 ‘위안부’, ‘종군위안부’ 명칭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연구가 나오면서 명칭 변경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최근에는 일본군의 반인권적 범죄 행위를 잘 드러나는 용어인 ‘일본군 성노예제(Japanese Army Sex Slaves)[주1], 또는 ‘일본군 성폭력 피해자(Japanese Military Sexual Violence Victims)라고 쓰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몇몇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는 ‘성노예’와 ‘피해자’라는 표현에 거부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공인된 정식 명칭은 아니지만,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라는 용어도 쓸 수 있습니다. 이인순 관장님은 지금 생존한 ‘위안부’ 할머니들 모두 세상을 떠난 뒤에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그 시기가 오면 ‘일본군 성노예제’라고 부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책임져야 할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은 전쟁 중 일본군의 성욕 해결과 성병 예방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의 여성을 강제로 연행(동원)한 ‘국가적 방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일본군 ‘위안부’는 국가 권력 및 공권력에 의한 성폭력이며 반인권적 범죄 행위입니다. 강제연행의 유형은 다양합니다. 집에 무단 침입해서 억지로 끌고 간 사례도 있지만, ‘취업 알선’을 미끼로 가난한 여성을 납치하거나 인신매매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 극우주의자들은 일본 ‘위안부’의 강제연행마저 부정하고 있습니다. 일본 군부가 국가적 차원으로 강제연행을 기획하고 실행한 증거들이 있는데도 말이죠.

 

 

 

 

 

 

 

 

 

 

 

 

 

 

 

 

* 서울대 인권센터 정진성 연구팀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푸른역사, 2018)

 

 

 

 

 

 

 

 

 

 

 

 

 

 

 

 

* 윤명숙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 (이학사, 2017)

* 안병직 옮김 · 해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이숲, 2013)

* [절판] 모리카와 미치코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 (아름다운사람들, 2005)

 

 

 

이인순 관장님은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이숲, 2013) 93, 168쪽과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아름다운사람들, 2015) 66, 67쪽의 문장을 인용하면서 비교했습니다. 두 책에 나온 문장을 비교해서 검토하면 버마(지금의 미얀마) 전선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故 문옥주 님의 증언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옥주 님은 1943년 12월과 1944년 7월에 버마로 향하는 위안단이 부산항을 출발했다고 증언했습니다.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이 쓴 1943년 7월 10일 일기에 보면 1942년 7월에 위안단이 부산항을 출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주2].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는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버마와 싱가포르에 근무한 일본군 위안소 관리자(쵸우바, 帳場)로 일한 조선인이 쓴 일기입니다. 이 기록은 일본 군부가 일본군 ‘위안부’를 계획적으로 동원하고 위안소 운영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일기를 우리말로 옮기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해제를 쓴 안병직 교수는 ‘뉴라이트’ 계열 학자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소극적으로 바라보고, 심지어 이 문제 자체를 부정하는 뉴라이트 역사관의 행보를 생각하면, 일기 번역과 해제를 뉴라이트 진영에서 활동하는 학자에 맡긴 건 분명 ‘옥에 티’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자료의 가치마저 깎아내리면 안 됩니다. 어떤 독자는 “이 책을 통해서 무언가 의미를 도출하기 어렵다”라고 썼던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안소 관리자의 일기는 일본군 ‘위안부’의 실체를 알릴 수 있는 증거 자료입니다. 이 일기가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일본군 위안소를 운영하거나 관리한 조선인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것입니다. 일본 극우주의자들은 이 사실을 근거로 일본의 국가 책임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실만 가지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할 수 없습니다.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연구한 윤명숙 교수는 조선인의 일본군 ‘위안부’ 징모(徵募, 국가가 국민을 징집하는 일) 문제는 일제 강점기가 낳은 조선 민족 내부의 모순이며 이 비극의 역사를 우리나라 스스로 청산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주3]. 조선인이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 관여한 일을 인정하는 것도 일제 잔재 청산의 길입니다.

 

 

 

* Trivia

 

故 문옥주 님은 1936년 16살에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만주와 버마 등지에서 고초를 겪었습니다. 故 김학순 님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본인의 피해 사실을 밝혔습니다. 《버마전선 일본군 위안부 문옥주》는 문옥주 님의 생애를 정리한 책입니다. 지금은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책이 되었지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 · 생존자들의 증언을 모은 《끌려가다, 버려지다, 우리 앞에 서다》 1권에 문옥주 님의 증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주1]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채록한 일본의 사진작가 이토 다카시(伊藤孝司)‘일본군 전용 성노예 피해자(Japanese 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이토 다카시 지음, 안해룡 · 이은 옮김, 《기억하겠습니다》, 알마, 2017)

 

[주2] 안병직 옮김,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 이숲, 2013, pp. 93.

 

[주3] 윤명숙 지음, 최인순 옮김,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 이학사, 2015, pp. 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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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 높은 구두, 단발머리, 각선미가 드러난 치마, 양산. 1920~30년대 식민지 조선에 등장한 ‘신여성’, ‘모던 걸’의 이미지들이다. 그녀들은 학교에 다니고, 자신의 욕망에 따라 곳곳을 누비며 유행을 선도했고 자유연애를 주장했다. 이후 이들의 삶은 어떻게 전개되었고, 당대 남성들은 그녀들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 박차민정 《조선의 퀴어》(현실문화, 2018)

 

 

 

지난달에 《조선의 퀴어》(박차민정 지음, 현실문화, 2018)를 읽고 한동안 근대 일본과 근대 식민지 조선의 문화 및 역사를 훑어봤다. 흥미진진한 독서였다. 살아보지 않은 시대의 모습들이 눈앞에서 펼쳐지는 재미, 그것이 역사책을 읽는 즐거움이다. 그렇지만 식민지 조선의 시대상을 더 알면 알수록 마음이 씁쓸해진다. 모던의 향취를 뿜어대는 신여성의 뒷모습은 쓸쓸하다. 사철 서양식 치마를 갈아입고, 구두를 갈아 신는 신여성도 알고 보면 가족 부양을 위해 부잣집 첩살이로 들어가는 불행한 인텔리 여성에 불과했다. 모던 보이들이 처한 상황도 녹록지 않았다. 일류신사를 꿈꿨던 모던보이들은 전문학교를 졸업하고도 취직을 못 해 거리를 헤맸다. 그 시절에도 지금처럼 패션과 유행에 민감한 사람들이 있었다.

 

 

 

 

 

 

 

 

 

 

 

 

 

 

 

 

 

* 김주리 《모던 걸, 여우 목도리를 버려라》(살림, 2005)

 

 

 

구두와 치마, 단발머리가 신여성을 상징하는 이미지라면, 모던보이의 상징은 일본에서 직수입된 중절모와 양복이다. 모던보이들은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에 살면서도 양복을 입고 다녔다. 당대 언론은 현실과 동떨어진 과도한 사치를 추구하는 모던보이의 태도를 비판했다.

 

 

 

 

 

 

 

 

 

 

 

 

 

 

 

 

 

* 박윤석 《경성 모던타임스》(문학동네, 2014)

 

 

 

1920~30년대 경성은 ‘리틀 도쿄’였다. 이때부터 영화, 음악, 각종 서구식 생활양식 등 근대문화가 일본 제국주의의 흐름을 타고 경성으로 들어온다. 혼마치(本町, 지금의 명동, 충무로 일대)는 신여성과 모던 보이들이 자주 드나드는 유흥공간이 많았다. 그곳은 일본의 긴자(銀座) 거리에 온 것처럼 화려했다. 신여성과 모던 보이들에게 혼마치는 도쿄의 분위기를 경험해보는 곳인 동시에, 겉으로 화려하지만 내면이 무력한 식민지인의 자화상을 확인하게 하는 구역이었다. 현해탄 물결에 젖어서 공주처럼 지친 채[주1] 고국으로 돌아온 일본 유학생들은 앞으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늠할 수 없는 꽉 막힌 현실, 지식과 능력을 사용할 곳이 없는 현실 앞에서 절망했다. 변변한 일자리 하나 찾기 힘든 식민지 현실이 그들을 절망하게 했고, 가족을 돌보기는커녕 호구지책도 마련하지 못해 거리를 헤매는 처지가 그들을 자학하게 했다.

 

 

 

 

 

 

 

 

 

 

 

 

 

 

 

 

 

 

 

* 소래섭 《에로 그로 넌센스 : 근대적 자극의 탄생》(살림, 2005)

 

 

 

일부 남성 지식인들은 향락적이고 퇴폐적인 서구 문화를 ‘부패한 에로’로 규정하여 비판했지만, 현실에 좌절한 모던 보이들은 ‘에로 그로’ 문화에 탐닉했다. 전근대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근대의 향락주의자들은 ‘변태 성욕자’로 낙인 찍혀 비판받았다. 그러나 ‘에로 그로’ 문화는 현실의 불만과 권태를 달랠 수 있는 해방구였다. 식민지 조선 남성은 ‘에로 그로’ 문화에 헤어 나오지 못한 자신의 상황뿐만 아니라 무기력한 현실에 대해서 냉소적인 반응을 보인다.

 

 

 

 

 

 

 

 

 

 

 

 

 

 

 

 

 

 

 

 

* 권김현영 엮음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교양인, 2017)

* 김미지 《누가 하이카라 여성을 데리고 사누 : 여학생과 연애》(살림, 2005)

 

 

 

식민지 남성의 냉소적인 반응은 동시대에 등장한 모던 걸, 신여성들에게 향한다. 모던 걸들은 남성성이 ‘거세된’ 식민지 남성 지식인들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는 대상이 된다. 신여성의 신체적 변화는 전통과 근대, 남성과 여성의 의식면에서 첨예한 갈등을 불러왔다. 예컨대 단발에 대해 남성들은 여성들이 단발하는 것을 남성을 흉내 내는 일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여성들에게 단발은 편리했으며 해방감을 가져다줬다. 남성 지식인들은 신여성들을 사치와 허영을 일삼는 존재로 바라봤다. 특히 금시계와 다이아몬드 반지를 위해 몸까지 파는 여성은 냉소적인 풍자의 대상이었다. 여학생들은 방학이 되어 고향에 내려가면 ‘저런 하아카라 여성을 누가 데리구 사누’라는 흉을 들었다. 전근대적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여학생의 자유연애가 못마땅했다. 가난한 형편으로 학비를 마련하지 못한 여학생들은 밀매음에 종사했는데, 그녀들을 ‘밀가루’라는 은어로 부르기도 했다[주2]. 이 은어에는 신여성의 과도한 화장을 비난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 김재용 외 《친일문학의 내적 논리》(역락, 2003)

 

 

 

신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한 교육과 정치 차명의 기회를 쟁취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향한 냉소적인 공격에 맞서 대응했다. 신여성은 철저히 식민지 조선 남성들의 감시 대상이었다. 식민지 조선 남성이 만들어낸 지극히 주관적이고도 자극적인 이미지를 벗겨내면 신여성의 주체적인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신여성도 한계가 있었다. 소수의 여성이 신식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 땅에 본격적으로 표면화되기 시작하면서 김활란, 모윤숙, 노천명 등의 신여성 지식인들은 ‘여성의 공적인 영역 진출’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전쟁 동원을 위한 국책 사업에 뛰어들었다.

 

신여성을 둘러싼 식민지 남성들의 시비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하는 시대 앞에 주눅 든 남성들은 말하고 행동하는 여성들에게 막말과 인신 모독성 비난을 한다. 식민지 남성들은 거리에 돌아다니는 모던 걸을 흘깃 쳐다보면서 ‘스튜릿트껄’이라 부르면서 그녀들의 허영심을 비꼰다. ‘스튜릿트껄’은 식민지 조선 버전 ‘김치녀’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성들은 반성해야 한다.

 

 

 

 

 

[주1] “청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김기림, 『바다와 나비』 2연)

 

[주2] 소래섭, 《에로 그로 넌센스 : 근대적 자극의 탄생》, 살림, 2005, pp.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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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8-07 19: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세 여자>를 조금씩 읽고 있는데
정말 1920~30년은 흥미로운 시대야.
지식 팽창의 시대였던 것 같아. 연구해 보면 재밌을 것 같아.^^

수이 2018-08-07 20:35   좋아요 1 | URL
세 여자는 정말 보기 드물게 잘 쓰인 소설 같아요, 생각보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안타까워요.

cyrus 2018-08-08 15:12   좋아요 2 | URL
To. stella.K & 수연 // 허정숙에 대해 알고 싶어서 <세 여자>를 읽으려고 했어요. 권김현영 님은 허정숙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했어요. 국내 여성운동의 역사를 다시 쓰려면 조선에 활동했던 마르크스주의 여성운동가의 삶과 업적에 대한 연구가 필요해요.

knulp 2018-08-07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여러 권 올리는 글쓰기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cyrus 2018-08-08 15:14   좋아요 0 | URL
컴퓨터로 북플이 아닌 ‘알라딘 서재’에 접속하면 ‘마이페이퍼’ 기능을 쓸 수 있어요. 그러면 ‘알라딘 상품(책)’뿐만 아니라 사진과 동영상도 넣을 수 있어요. 저는 항상 아날로그 방식으로 글을 써요. ^^

knulp 2018-08-08 16:12   좋아요 0 | URL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아날로그 감성 최고죠^^

수이 2018-08-07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대 글은 역시나 꺠우침을 여러모로 많이 줘.

cyrus 2018-08-08 15:19   좋아요 0 | URL
그런가요? ㅎㅎㅎㅎ 페미니즘 관점에서 신여성을 재평가하는 분석은 이미 오래전에 나온 거예요. 저는 그냥 분석의 결과물들을 참고해서 정리했을 뿐이에요. 제 글은 대단한 건 아니에요. ^^
 
추사 김정희 -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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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우도(충청도 서부 지역) 비인현감  김우명은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던 안동 김씨 사람이다. 이 지역에 파견된 암행어사는 김우명의 실정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보고서를 작성하여 조정에 올렸다. 이로 인해 김우명은 파직당했다. 그 이후로 암행어사의 벼슬길은 순풍에 돛단 듯이 술술 풀려나갔다. 벼슬은 더욱 높아지니 암행어사를 시기하는 반대파들이 많아졌다. 그에게 앙심을 품었던 김우명은 암행어사의 아버지 김노경을 모함하는 상소를 올렸다.

 

 

  아! 전 감사 김노경의 죄를 어찌 이루 다 주벌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남이 손댈 수 없는 위치에서 실제로는 남보다 한 치의 장점도 없는데 화직(華職)과 요직에 두루 올라 가세가 엄청났습니다. (…)

  또 그의 요사스러운 자식은 항상 반론(反論)을 가지고서 교활하게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륜이 허물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주1]

 

 

왕은 김우명의 상소문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그에게 벌을 내렸다. 김우명이 암행어사를 얼마나 미워했으면 ‘요사스러운 자식’이라고 표현했을까. 암행어사의 정체는 바로 추사 김정희다. 그는 조선 최고의 서예가로 ‘추사체’를 완성했다. 고증학과 금석학에도 밝아 북한산에 있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기도 했다. 추사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난 신동이었다. 그가 일곱 살 때 남인(南人)의 재상 체제공은 추사의 글씨를 보면서 장차 명필이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체제공은 ‘섬뜩한 예언’도 했다. 추사가 명필가로 알려지게 되면 그의 운명이 기구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체제공의 예언은 정확했다. 추사는 시(詩) · 서(書) · 화(畵)에 통달함으로써 근세명필의 제일로 꼽혔다. 또 ‘당대 청조학(淸朝學: 청나라 시 · 서 · 화를 연구하는 학문)의 제일인자’[주2]로 평가받을 만큼 국제적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10년 가는 권세 없고 열흘 붉은 꽃 없다는 말이 있듯이 부귀영화는 오래 가지 못한다. 추사는 두 번에 걸쳐 11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어떤 인물을 제대로 알려면 그 사람의 행적을 살펴보는 노력도 필요하다. 인물의 인생을 보면 살아온 환경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온 환경에 대처하는 자세가 그 사람의 운명을 만든다. 산숭해심(山崇海心).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라는 뜻을 가진 구절이다. 추사는 중국의 학자 옹방강을 만나 교류하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체계를 구축했다. 추사의 학문 정신은 네 글자로 요약한 ‘산숭해심’에 숨어 있다. 실사구시는 ‘사실에 따라 사물의 진리를 찾는’ 정신이다. 유홍준 명지대 한국미술사연구소장이 다시 펴낸 《추사 김정희》(창비, 2018)는 실사구시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 있는 책이다.

 

많은 사람이 추사를 칭송했지만, 누구도 그의 전체 모습을 알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니, 그의 삶 자체를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완당 평전》(학고재, 2002)을 통해 추사의 온전한 모습을 그려내려 했던 유 소장도 ‘산은 높고 바다는 깊네’라는 말로 끝을 맺어야 했다. 최근에 《추사 김정희》를 읽으면서 유 소장이 16년 전에 펴낸 《완당 평전》을 쓰기 어려워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추사는 시, 서, 화, 금석학, 고증학에 두루 능한 인물이다. 그의 평전을 쓰려면 추사의 ‘높고 깊은 학문 세계’를 한 권의 책으로 아울러야 하고, 파란만장한 추사의 삶 속에 있는 ‘인간적인 내면세계’를 독자에게 전달해야 하는데 이런 일은 쉽지 않다. 유 소장은 《완당 평전》의 오류를 고쳤고, 새로 발견된 추사의 작품이나 추사 관련 문헌을 추가했다. 그리고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문장과 한시 번역문은 쉬운 말로 다듬었다.

 

《추사 김정희》는 추사의 삶을 탄생부터 만년까지 10개의 장으로 나누어 정리되어 있다. 아버지를 따라가 접한 중국 연경(燕京: 베이징) 지역 학자들과의 교류, 출세와 가화(家禍), 유배 시절, 그리고 추사 사후 평가까지 다루어 추사에 대한 모든 것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앞서 언급했듯이 추사가 학문과 예술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그를 중국 청나라 학문 및 문화를 맹목적으로 찬양하는 사대주의자로 보는 관점이 제기되었다. 유 소장은 비판적 관점에 가려진 추사의 식견, 즉 ‘근대적 감각’을 주목한다. 물론, 추사도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는데,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기운이 짙어가던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했다.

 

유 소장은 추사와 관련된 문헌들을 토대로 추사의 한계와 결점이 무엇인지 분석한다. 김우명이 추사를 ‘요사스러운 자식’이라고 말한 이유가 있다. 추사는 너무나 거침없는 성격이었다. 어려서부터 가문이 좋고 재능과 학문이 뛰어나다 보니 학문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다. 학문적인 논쟁이 일어나면 자기 생각과 다른 학자들의 기를 팍팍 죽일 정도로 신랄하게 비판했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어도 오만하고 잘난 사람은 미움 받는 대상이 된다. 깐깐하고 단호한 성격은 반대파들에게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졌을 것이 분명하다.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 등에게 보낸 추사의 편지에는 평생 유배의 고역이 따라다닌 신산한 삶이 있고, 다른 한편에 학자들과 나눈 우정의 흔적들이 어려 있다. 거부할 수 없는 유배 생활, 그 고통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독서와 글씨 쓰기였다. 그를 후려치던 분노와 고독감은 고스란히 서체에 녹아들었다. 추사체는 시대와 유리된 천재성의 산물이 아니라 추사 개인의 내밀한 감정의 산물이다. 유 소장이 주목한 것은 ‘천재’라는 화려한 평가에 가려진 추사의 인간적인 모습이다. 철저히 완벽을 추구했던 추사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었다. 그러나 유배의 절망을 견뎌내고 유배지에서 후대에 길이 남을 걸작을 남긴 추사는 결코 나약한 존재가 아니다. 추사가 위대한 이유는 절망의 시기 속에 자기완성이라는 창조적인 순간을 만들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자신만의 삶을 완성하는 비범한 능력이다. 시대와 불화하면서까지 자기만의 학문과 예술에 생명을 걸었던 추사의 분투는 지금도 박수 받을 만한 일이다.

 

 

 

 

[주1] 『조선왕조실록』 순조 30년(1830년) 8월 27일자, 유홍준, 《추사 김정희》, 창비, 2018, pp. 173.

 

[주2] 청조학과 추사 연구에 몰두했던 일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隣, 1879~1948)는 추사를 ‘청조학 연구의 제일인자’라고 평가했다. (유홍준, 《추사 김정희》, 창비, 2018, pp.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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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8-01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예전에 나온 <완당평전>하고 어떤 점에서
다른지 문득 궁금해 집니다.

지금은 절판되었지만 세 권인가로 해서 나왔던 것
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말이죠.

가혹한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 사대부가 서세
동점이라는 서구 해양세력의 동아시아 진출이라는
세계사적 흐름을 파악하기란, 역부족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cyrus 2018-08-01 16:59   좋아요 1 | URL
구판에는 한자어가 많았어요. 고등학생 때 <완당 평전>을 읽은 적이 있었는데, 뜻 모르는 한자어가 많아서 다 읽지 못하고 포기했어요. 한시는 읽기 쉽도록 의역했고요, 가독성이 좋아졌습니다.

책에 나온 내용인데요, 이양선이 자주 출몰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조선 시대 사람들이 패닉 상태에 빠진 시기가 있었어요. 그런데 추사는 서양의 배라면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어요. 추사는 청나라에 다녀오면서 서양 문물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서양인들이 청나라를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레삭매냐 2018-08-01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842년 아편전쟁이 동서양 역사의 분기점이
되지 않나 싶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동양의 생산력이 서양을
압도했지만 에릭 홉스봄이 이중혁명으로 규정한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을 통해 각성한 서양이
동양을 침탈의 대상으로 삼게 되면서 역사의 추
가 바뀌게 되었죠.

쇄국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이 시대의 흐름을 깨
닫고 문호를 열었더라면 일본 식민지가 되는 치욕
은 면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cyrus 2018-08-02 14:10   좋아요 1 | URL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레삭매냐님 말씀대로 조선이 문호를 개방했다면 근대 역사가 달라질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최악의 가정도 생각해볼 수 있어요. 열강이 조선에 진출하면 간섭을 할 거고, 거기에 빝붙는 세력이 나올 것입니다. 문호가 개방되었어도 식민 국가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있어요.

조그만 메모수첩 2018-08-02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사가 전직(?) 암행어사셨군요. 그냥 금석문•서예•문인화의 대가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덕분에 실학자였음도 알게 되었어요. 이상적이 중인임에도 불구, 신분에 관계없이 자신의 제자로 선뜻 받아준 풍모가 남다르다고는 생각했어요. 책 꼭 읽어보고 싶어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8-08-02 14:11   좋아요 1 | URL
추사도 다산 정약용만큼이나 제자를 잘 가르쳤어요. 추사가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을 때 제자들이 많이 찾아오곤 했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