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책도 가끔은 쓸모가 있지 - 옛 사람들이 알려주는 인생의 기술
엘리자베스 아치볼드 지음, 서민아 옮김 / 스윙밴드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사람들 사이에서 가면올빼미로 알려진 여자 예언가들이 젊음을 되찾기 위해 아기들 피를 뽑았다고 하는, 흔하게 전해 내려오는 옛이야기가 있다. 이 여자들은 마치 거머리처럼 왼쪽 팔의 정맥을 살짝 절개해 1~2온스의 피를 뽑은 다음 곧바로 같은 양의 설탕과 와인을 첨가했다고 한다. 이것을 배가 고프거나 목이 마를 때, 그리고 달이 차오를 때 마셨다.

 

(‘젊음을 유지하는 법중에서, 55)

    

 

마치 지어낸 이야기 같다. 그런데 이런 끔찍한 이야기가 실용 지식으로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젊음을 유지하는 법은 신비주의학자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1489년에 쓴 <인생의 책 3부작>에 있는 내용이다. 불로초를 찾아 장생불사의 꿈을 이루려 했던 중국 진시황이 기원전 3세기 사람이니, 늙지도 죽지도 않는 비법을 찾아다닌 인류 역사는 꽤 연원이 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과거에 각종 황당무계한 장수법이 판을 쳤다.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에도 사람들은 회춘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아기의 피를 먹으면 효과가 있다고 이를 행동에 옮기는 등의 혐오스러운 비법까지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피치노는 여자 예언가들이 건강하고 젊은 사람들의 피를 뽑지 않는 것에 의문을 품었다. 그 역시 피에서 젊음이 나온다고 믿었던가 보다. 실제로 젊은 남자의 피를 수혈하는 장수비법을 시도한 사람이 있었다. 교황 이노센트 8세는 어린 소년 3명에게서 피를 받았지만, 며칠 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수혈해서는 안 될 혈액형의 피를 받았던 탓으로 보인다.

 

동서양 가릴 것 없이 처녀나 아이들과 동침하거나 그들의 피를 마시면 회춘한다는 속설이 전해져 왔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국가 원수나 재벌이 자신의 혈액을 젊은 사람의 피로 바꿔 회춘했다는 소문이 심심찮게 들려온다. 전문가들은 젊은 피 수혈이 회춘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수혈된 피는 곧 자기 피로 정착되기 때문에 젊은 피라는 의미가 없다. 더욱이 비위생적인 시설에서 피를 교체하면 회춘은커녕 오히려 에이즈 같은 치명적인 질병을 얻을 수 있다. 최근에 미국 유명 대학교 소속 과학자들이 젊은 피가 청춘을 되돌릴 수 있다는 중세의 속설을 확인시켜줬다. 연구팀은 젊은 쥐의 피를 늙은 쥐에 다시 주입했더니 뇌와 근육이 젊어졌다는 결과를 발표했다. 그렇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성급한 결론이라고 반박한다. 쥐 실험에서 나온 연구 결과가 사람들에게서도 똑같이 나올지는 미지수다. [참고 1]

 

역사학자 엘리자베스 아치볼드는 옛날 책들에 기록된 실용 지식에 흥미를 느껴 수집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도서관 속에 오랫동안 잠들어있는 고서들을 들춰보면서 잊혀진 실용 지식을 발굴했다. 그다음에 자신이 발견한 것들을 공유하려고 블로그까지 만들었다. 블로그에 공개한 자료들을 정리한 책이 바로 옛날 책은 가끔 쓸모가 있지. 누군가가 이론적 지식은 쓸모없는 것이고 실천이 따라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치볼드의 책을 보게 되면 그 격언의 의미를 재고해 봐야 한다. 책에 나오는 옛날 실용 지식 대부분은 쓸모없다. 책 제목처럼 가끔쓸모가 있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옛사람들의 충고가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하나둘씩 빠지는 머리카락을 보면서 허탈해하는 탈모 인들은 탈모를 치료할 방법이라면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다. 옛날 사람이 말하기를, 양파를 갈아 문지르면 대머리 치료에 좋다고 한다. 양파. 먹지 말고 머리 피부에 양보하세요. 방송인 홍석천 씨는 방송에서 한참 탈모로 고민할 때 양파즙을 머리에 바른 적이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러나 양파즙을 머리에 바르는 민간요법은 전혀 근거가 없으니 금물이다. 오히려 양파의 황화합물이 두피를 자극하여 염분을 유발할 수 있다. 아까 한 말은 농담일 뿐 따라 하지 말자.

 

 

 

 

 

 

 

 

시비 거는 사람을 혼내주기 위한 호신술이 있다. 먼저 왼손으로 시비 거는 사람의 뒷덜미를 잡는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가랑이 사이의... 그러니까 거 있잖소? 남자의 급소! 옛날 남자들도 급소가 최대 약점이라는 걸 알았는지 급소를 보호하는 샅 주머니(Codpiece, 코드피스)를 입고 다녔다. 샅 주머니 부위를 꽉 잡고, 번쩍 들어 올려 넘어뜨린다. 이 호신술이 민망하다면, 냅다 발로 차면 된다. 특히 여자에게 집적대면서 시비 거는 남자들은 영 좋지 않은 곳이 불능 되도 싸다.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게 바로 사람들의 욕망과 관심사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세상이 급변할수록 과거에 알던 지식은 순식간에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가 옛날 사람들의 생각이 황당하고 쓸모없는 것으로 판단할 자격이 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혁신적인 지식의 절반은 10년마다 쓸모없어진다. [참고 2] 부끄럽게도 우린 언제가 무용지물이 될 지식이 고정불변한 진실로 믿고 있다. 가끔이지만, 옛날 사람들의 말이 틀리지 않을 때가 있다. 언제 필요할지 알 수 없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도움이 되는 건 분명하다. 우신 예찬을 쓴 당대 최고의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방귀 뀔 때도 인문주의적 정신을 발휘했다. 방귀를 예의 있게 배출하는 에라스무스에게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진다.

    

 

사내아이에게 복부의 가스가 새어나가지 않게 하려면 엉덩이를 꽉 조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다. 예의바르게 보이도록 노력하는 건 좋지만 이렇게까지 괴로워야 한다면 품위 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잠시 자리를 벗어나도 좋다면 혼자 살짝 나갔다 오게 하고, 그럴 수 없다면 옛 속담을 따르도록 하자. 기침으로 방귀를 감출 것.

 

(‘방귀 뀌는 법’, 33)

 

     

 

 

[참고 1] <회춘의 열쇠, "젊은 피에서 찾았다"... 실험쥐 통해 기억력 젊어지는 방법은>

(한국경제 201455)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5&aid=0000094923

 

<생쥐를 너무 믿지 마세요> (강석기의 과학카페 176, 동아사이언스 201456)

http://www.dongascience.com/news/view/4402

 

[참고 2] 지식의 반감기(새뮤얼 아브스만 저, 책읽는수요일, 2014)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6-09-19 1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남동녀 삼천명을 석선(돌배)에 태워 불로초를 구하러 보냈다는 전설은 진시황이니 가능했을 법도 하네요.왕으로 영원히 산다라면 존재 자체가 지옥같다면 이 건뭐 지루해도 죽지 못하는....인간이 유한해서 가치는 의미가 영원한 것 보다는 많을텐데 말이죠..지구도 수명이 있는데 어느 별의 행성으로 이주할 수 있다하더라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 참 모를 일입니다. 허무 맹랑한 속설이 참 많기도 하죠.^^. 어떻게 연휴..좋은 시간 되신건지요...

cyrus 2016-09-20 17:05   좋아요 0 | URL
연휴 마지막 이틀은 집에서 보내니까 연휴가 끝나도 아쉬운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ㅎㅎㅎ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믿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특이한 존재인 것 같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6-09-19 1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긴 말도 안 되는 속설이 옛날에는 진짜인 줄 알았죠.
옛날에는 조개는 새가 죽으면 환생한 것이라 여겼습니다...
정약전의 현산어보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cyrus 2016-09-20 17:06   좋아요 0 | URL
말도 안 되는 속설이나 풍습을 정리한 책을 보면 재미있긴 해요. 지금 우리들은 아주 오랜 옛날의 속설을 신기하게 생각하잖아요. ^^

뽈쥐의 독서일기 2016-09-23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부관리에 관심을 가지면서 각종 주사를 찾았던 때가 있었는데요, 그 중 기억에 남는 게 아기주사랑 연어주사가 있어요. 연어주사는 연어의 정소에서 뭔가를(?) 빼서 피부를 좋게한다고 하고요, 아기 주사는 갓 태어난 아이 중에 포경 수술하는 아이의 살갖에서 피부에 좋은 성분을 추출한다고 하더라구요. 아무리 아기 피부가 좋다해도 글치..ㅠㅠ 남들한테 잘 보이려고 피부관리하는 주제에 사람들한테 정이 똑딱 떨어졌었다는....
아기 피 수혈로 젊음을 되찾는다고 하니까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ㅎㅎ

cyrus 2016-09-23 18:07   좋아요 0 | URL
연어 주사와 아기 주사는 처음 들어봅니다. 연어 주사가 많이 사용된다면 연어의 개체 수가 줄어들겠어요. 아기 주사 이야기는 생각만 해도 이상합니다. 사람들이 갓 태어난 아이가 아픔을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

fledgling 2016-09-23 2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글 읽으면서 두 번 웃고 갑니다. ㅎㅎ 혈액이야기도 참 흥미롭네요.

cyrus 2016-09-24 11:07   좋아요 0 | URL
책에 황당하고 웃긴 내용이 많습니다. ^^
 

 

 

 

 

 

 

 

 

 

 

 

 

 

 

 

 

 

2009년 군대에 있었을 때, 중대장실을 청소했다. 중대장실 안에 훈련 교본과 국군 관련 잡지 등이 잔뜩 꽂힌 책장이 있었다. 청소를 하면서 중대장의 책장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거기에 특별한 한 권의 책을 발견했다.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군대에 역사교과서를 보게 될 줄이야. 처음에는 신기했다. 이 책으로 오랜만에 역사 공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런데 책을 보려면 중대장에게 허락을 받아야 한다. 중대장과 너무 가까이 지내면 남은 군 생활이 피곤해진다.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단번에 접었다.

 

 

 

 

 

 

 

 

 

 

 

 

 

 

 

 

 

 

 

 

 

 

 

 

 

 

 

 

 

 

 

 

 

 

 

 

전역 후 학교를 다시 다녔다. 한국 현대사를 주제로 한 과제를 준비했다. 한국 현대사 관련 자료를 찾던 중에 드디어 군대에 만났던 교과서를 입수했다. 책이 학교 도서관에 있었다. 《대안교과서 한국 현대사》도 있었다. 난 처음에 대안교과서가 엄청 대단한 책인 줄 알았다. 그런데 책 내용을 검토하면서 적지 않은 문제점을 발견했다. 그리고 교과서 편찬을 주도한 ‘뉴라이트’의 실체도 알게 되었다.

 

오늘 같은 뜻 깊은 날에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은 광복절을 ‘건국절’로 해야 한다고 우길 것이다. 그들은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된 8월 15일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더 중요한 기념일로 여긴다.  

 

해방의 진정한 의미는 1948년 자유, 인권, 시장 등의 인류 보편의 가치에 입각하여 대한민국이 세워짐으로써 비로소 확보될 수 있었다. 광복절의 역사적 의미를 미래지향적으로 고쳐 생각해야 한다. 종래 광복절을 해방절로만 기억해 온 것을 지양하고, 보다 중요하게 건국절로 경축해야 한다.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144쪽)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헌법)

 

 

뉴라이트의 건국절 집착은 헌법 전문에 명시된 3.1 운동과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깎아내린다. 이승만 정부 출범부터 대한민국 역사를 다시 쓰려는 뉴라이트의 숙원은 극단적인 역사 왜곡이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60주년은 그것을 '건국'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에게는 '잔치'지만, 그것을 '분단'으로 간주하는 부류에게는 일제의 한국 지배는 한국인의 정치적 권리를 부정한 폭력적 억압 체제였다.

 

국내외의 한국인들은 불굴의 투쟁으로 독립의 권리를 끝내 쟁취하였다. 그 시기는 억압과 투쟁의 역사만은 아니었다. 근대 문명을 학습하고 실천함으로써 근대국민국가를 세울 수 있는 ‘사회적 능력’이 두텁게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78쪽)

 

식민지 한국의 경제통계가 1980년대 말부터 한국과 일본의 경제학자들에 의해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10~1940년에 한국에서 일본과 동일한 속도로 연간 3.6%의 경제성장이 있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오늘날 국내외 대부분 학자는 식민지 한국을 비정상적 형태이기는 하나 근대화된 자본주의사회로 이해하고 있다.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96쪽)

 

 

식민지근대화론과 수탈론의 논쟁은 치열하고도 질기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접점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뉴라이트 경제학자들은 일제 식민지를 암흑기가 아니라 한국 자본주의 성장의 뿌리로 본다. 그들의 주장을 반대한다고 해서 경제성장이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아니다. 경제가 발전하고,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분명 가장 기본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을 기준으로 역사를 본다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는 기준이 모호해진다. 식민지 조선의 근대화 촉진을 옹호하는 논리는 일본 우익의 역사 왜곡 논리와 닮았다.

 

이승만의 정치이념과 정책은 자유민주주의, 반공주의, 반일정책, 북진통일로 요약된다. 이승만의 정치이념은 자유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였다. 자유민주주의에 철저했던 만큼,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다. 그의 비타협적 반공주의는 신생 대한민국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고 동질적 국민의식을 배양하는 데 기여하였다. 하지만, 반공의 이름으로 반대파가 탄압되거나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인권이 부정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그는 공산주의 국제세력의 공세로부터 대한민국을 방어하고, 대한민국의 기틀을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올바로 잡는 데 동시대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커다란 공훈을 세웠다.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158쪽)

 

그(박정희)는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데 소수 엘리트의 지도적 역할을 중시하였다. 그는 민주주의에 관해 개인의 이기심에 기초한 서양식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족과 국가에 대한 헌신에 기초한 민주주의로서 민족의 새로운 역사를 개척하는 데 도움이 되는 민족적 또는 행정적 민주주의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의 권위주의적 통치는 한국 사회에 역사적으로 축적되어 온 성장의 잠재력을 최대로 동원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186쪽)

 

뉴라이트의 우상은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 각각 ‘시장경제의 토대를 마련한 건국의 공로자’, ‘근대화의 주역’으로 규정한다. 해방 직후 친일파 처단을 위한 반민족특위가 조직됐지만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건 이승만 정권에 의해 와해했다. 해방 뒤에 친일파를 처벌하고 민족정기를 세워야 할 일이 지배 우파세력의 이익 때문에 당장 정쟁이 되어버렸다.

 

 

 

 

 

 

 

 

 

 

 

 

 

 

 

 

 

지금 와서도, 마땅한 역사적 과제인 ‘친일 잔재 청산’이 공론화되는 순간 바로 특정 정파 편들기 또는 죽이기가 되어버린다. 뉴라이트는 이승만 정권이 체제를 위협하는 좌파 공산주의자들의 위협을 막고, 내부 단결을 강화하기 위해 친일파를 껴안을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승만 정권의 과오를 알면서도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정치이념을 ‘반일정책’이라고 강조한다. 친일파를 권력의 기반으로 삼았음에도 강한 반일을 견지했던 이승만 정권의 타협 흔적마저 나 몰라라 한다.

 

대안교과서에 이승만 전 대통령을 ‘자유민주주의에 철저했던 만큼, 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라고 규정하는데 이는 민주주의의 대척점이 공산주의라는 잘못된 인식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이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이 공산주의라고 믿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다. 민주주의는 정치 체제를 의미하는 단어이고, 공산주의는 경제 체제다. 민주주의의 반대말은 권력이 소수에게만 있는 독재 전체주의다. 유신체제는 한국 정치사에서 가장 ‘전체주의’에 유사한 체제였다. 전체주의는 세상의 모든 구성원은 하나(국가)가 되어 움직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데올로기다. 그런데 뉴라이트는 박정희 정권의 전체주의를 ‘민족과 국가에 대한 헌신으로 기초한 민주주의’로 미화했다.

 

대안교과서 집필진은 한쪽 전체를 할애하면서까지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을 찬양했다.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기여한 기업 및 기업인에 대한 설명도 비중 있게 다루었다. 안창호, 김구, 윤봉길 등 독립운동에 기여한 인물들에 대한 설명이 작게 배치된 것과 비교된다. 이승만과 박정희 우상화 작업에 몰두하는 뉴라이트의 모습은 과거 권위주의 시절을 방불케 하고 있다. 이는 북한 따라 하기와 다름없다.

 

 

이승만 정부는 야당과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할 의도로 강한 반발을 무릅쓰고 1958년 12월 국회에서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이승만에 대한 개인숭배도 강화되었다. 초등학생들은 조회 시간에 대통령 찬가를 불렀다. 대통령의 업적을 찬양하는 편지쓰기 같은 행사가 강요되었다. (《대안교과서 한국 근.현대사》 163쪽)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뉴라이트 성향의 단체 자유경제원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찬양하기 위해 ‘이승만 시 공모전’을 주최했다. 그리고 알다시피 ‘세로 드립’으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판한 내용의 시 두 편이 수상작에 선정됐다가 취소되는 일이 일어났다. 뉴라이트는 권력에 기생하여 역사의 진실을 무시하면서까지 자신들의 입지 기반을 다지려고 하는 세력이다. 이런 세력은 ‘진짜 보수’라고 말할 수 없다. 뉴라이트는 자신들의 주장을 비판하는 의견을 좌파의 공격적인 태도로 매도한다. 그들은 대안교과서 서문에서 비판을 관대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이 책은 모든 종류의 모든 수준의 비판에 열려 있다. 사실이 잘못 소개된 곳이 있으면 기꺼이 고치겠다. 역사관이 편향되었다면 바로잡음에 망설이지 않겠다. 이 책이 열려 있음은, 그렇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결국 좀 더 정확하고, 좀 더 유익하고, 좀 더 성찰적인 역사로 가득 찬 교과서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 물려줘야 한다는 큰 뜻에서, 너의 내가 따로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 2008년 3월, 교과서포럼 일동 (책을 내면서, 7쪽)

 

 

뉴라이트 역사관은 퇴행적인 역사 인식이다. 5·16 세력이 산업화·근대화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해서 헌정 질서를 뒤엎은 쿠데타마저 정당화할 수는 없다. 역사도 공과 과를 함께 안고 있기 마련이다. 또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가치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역사와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훼손하는 편견을, 그것도 교과서에 기술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대안교과서에 향한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교과서를 고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역사를 지우고, 권력을 그리려는 사람들과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다. 교과서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책이 버젓이 서점에 팔리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ransient-guest 2016-08-17 07: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소가 필요합니다. 쓰레기 청소가...극단적이지만 맘 같아서는 싹 긁어모아서 어디 외딴 무인도에 떨어뜨려놓고 배틀로얄이라도 시키고 싶어요...그러면 안되겠지만...(되려나??)ㅎㅎ

cyrus 2016-08-17 12:07   좋아요 0 | URL
한 곳에 모이면 자신들만의 구역을 만들어 활동할 사람들입니다. ㅎㅎㅎ
 
전쟁터로 간 책들 - 진중문고의 탄생
몰리 굽틸 매닝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맥심 사 오랬더니.’ 이 사진의 제목이다. 사진 속에 맥심커피 상자를 들고 있는 군인의 뒷모습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온라인 커뮤니티에 알려진 고전유머 사진이다. 얼핏 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진이지만, 그 제목과 배경을 알고 보면 보는 이에게 폭소를 자아내게 하는 상황이다. 이 사진을 이해하려면 약간의 상상력과 군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잡지 맥심은 사병들의 필독서다. 휴가를 나온 후임에게 선임이 잡지 맥심을 사 오라고 부탁을 했는데, 후임은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커피믹스를 산 것이다.

 

 

 

 

머리 좋은 후임이라면 커피믹스 상자 안에 잡지를 숨겨올 수 있다. 남성 잡지나 성인 잡지는 부대 반입 금지 품목이다. 하지만 사병들은 여자 사진이 많은 잡지를 보고 싶어 한다. 내가 근무한 부대에 볼 수 있었던 교양 잡지는 샘터월간 에세이였다. 입대 전에 평소 책을 안 읽은 사병들이 글자가 많은 잡지를 거들떠볼 리가 없다. 사병들이 제일 좋아하는 책은 이런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군인들은 섹스 장면이 많이 나오는 책을 가장 좋아합니다.” [1]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요즘 부대에 운동시설, 사이버지식정보방 등이 설치되어 있다. 운동과 컴퓨터, 책보다 재미있는 것들이다. 군인들을 위한 편의시설이 많아질수록 진중문고의 존재가 희미해진다. 사실 진중문고도 군인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서 보급된 오락거리다. 전선에 배치된 군인들은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포탄의 위협에 불안감을 느끼면서 지냈다. 옆에서 식사하던 동료 군인이 그다음 날 전사자가 되는 모습은 군인들이 자주 보는 일상적인 장면이다. 적은 내부에도 있다. 향수병은 군인들의 정신력을 감퇴시켰다. 전쟁의 공포와 생존의 희망이 교차하는 일상은 군인들의 정신을 혼란하게 만든다. 삶에 대한 허무감이 점점 온몸을 휘감는다. 우울 증세는 불시로 군인들을 덮쳤다. 병사들의 사기를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도입된 것이 진중문고 제도다.

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는 시기에 미국 전역의 사서들이 군인들에게 전달할 수백만 권의 책을 모았다. 전쟁터에서의 상황, 인쇄상황에 맞게 작은 페이퍼백을 찍어 보급하게 되었다. 사서들은 책이 인간에게 미치는 긍정적인 효과를 잘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 간 책들은 때론 군인들을 즐겁게 하는 친구가 되기도 하고, 불안감을 떨쳐주는 어머니의 역할까지 해주었다. 베티 스미스의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은 군인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을 받은 진중문고 중의 한 권이다. 군인들은 그녀의 소설을 읽고 난 뒤, 소중한 삶의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그냥 잊힐 뻔한 그저 그런 책이었다가 진중문고 제도 덕분에 다시 알려진 책이다. 군인들은 개츠비의 삶을 보면서 부와 사랑에 대한 열망이 간절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군인들이 일반 소설만 좋아했던 것은 아니다. 군인들은 외설적인 장면이 있는 소설을 읽고 싶어 했다. 진중문고를 선정하는 미국전시도서협의회는 군인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당혹스러워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진중문고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전역 군인들이 사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도움 주는 책들이 진중문고로 선정되었다. 진중문고는 말 그대로 전쟁 중에 읽는 책(陣中文庫)’이다. 책은 전쟁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군인들이 뛰어놀 수 있는 안식처였다. 그리고 포탄에 산화될 때까지 군인들의 곁을 지켜준 든든한 벗이었다. 진중문고는 군인들에게 진짜 중요한책이다.

 

우리나라 군대는 진중문고의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것 같다. 사람들이 많이 보는 책들을 잔뜩 고른다고 해서 좋은 진중문고라고 할 수 없다. 군인 간부들의 입맛에 맞춘 책은 진중문고가 아니다. 군인들이 읽고 싶은 책이 진중문고다. 진중문고의 가치를 모르는 간부들은 훈련 교본, 뉴라이트 계열의 책들이 장병들에게 유익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쉬는 시간에도 국군의 본분을 잊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해 주고픈 간부의 마음이다. 이런 간부는 전시 상태에 진중문고를 선정할 때 훈련 교본, 성경 같은 책들을 보낼 것이다. 안 되겠다. 전시 상황에 대비한 나만의 진중문고를 미리 갖추어야겠다.

 

 

 

[1] 전쟁터로 간 책들183

 

[내가 단 주석 1] 캐슬린 윈저의 영원한 엠버는 외설적인 성애 장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군인들이 열광한 인기 도서였다. (전쟁터로 간 책들184) 이 소설은 내 사랑 엠버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분량은 네 권으로 되어 있다. 출판사는 90년대 출판시장을 주름잡았던 추억의 이름, 고려원. 당연히 구하기 힘든 책이다.

 

[내가 단 주석 2] 전쟁터로 간 책들243쪽에 던위치의 공포와 그 외의 기이한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온다. 이 책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없지만, 제목만 봐도 책의 저자가 누군지 알 수 있다. 미국의 공포소설 작가 러브크래트프다. ‘던위치의 공포는 러브크래프트가 쓴 단편소설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ureka01 2016-08-09 18: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식적인 진중문고는 ㅎㅎㅎㅎ아실 겁니다..그 진부함과 고루함을....

뭐 정권에 잘 맞는 책들까지 포함해서....

cyrus 2016-08-09 19:35   좋아요 0 | URL
미국 정부도 사회주의 관련 서적을 진중문고에 포함시키지 않아서 사서협회의 반발이 일어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정부는 종북 기준이 모호한데다가 안 읽어놓고선 무조건 금서라고 규정합니다.

오거서 2016-08-09 1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심 박스를 보면서 배꼽을 잡습니다. ㅎㅎㅎㅎㅎ

cyrus 2016-08-09 19:37   좋아요 0 | URL
요즘 군인들도 맥심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

transient-guest 2016-08-10 0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안에 숨겼을 듯..ㅎㅎㅎ 이 책도 얼른 보관함으로 옮겼습니다. 전장에서의 독서라..뭔가 비극적이기도 하고, 공포를 느끼게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낭만의 내음이 피어납니다. 마치 Band of Brothers를 보는 것 같네요..그나저나 한국군에선 옛날이라도 책읽기는 일단 상병정도를 달지 않으면 매우 어려웠을 듯 합니다. 지금은 다른 시설도 그렇지만, 책이라고 해야 어록이나 정치인 자서전 나부랭이나 비치해놨을 것 같아요.. 장군들 수준이 딱 그 정도잖아요..

cyrus 2016-08-10 07:53   좋아요 0 | URL
진중문고에 관한 에피소드가 흥미진진합니다. 전사자의 옷에 책을 발견하는 장면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마음이 짠했습니다.

제가 입대했을 때 병영 생활 개선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절이라서 선임 눈치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

yamoo 2016-08-1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이런 페이퍼를 쓸라고 벼르고 있었는데, 역시나 사이러스 님이 먼저 선수를...--;;

cyrus 2016-08-11 20:39   좋아요 0 | URL
글을 누가 먼저 쓰느냐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쓰고 싶은 내용이 있으면 그냥 쓰는거죠. ^^;;
 
대분기 - 중국과 유럽, 그리고 근대 세계 경제의 형성
케네스 포메란츠 지음, 김규태 외 옮김, 김형종 감수 / 에코리브르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세계사 교과서를 펴 보면 유럽사가 절반 이상을 차지할 만큼 유럽사는 곧 세계사라는 인식이 강하다. 지금까지 서양은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합리성과 진보적인 사산을 발판으로 세계의 정상에 우뚝 섰다고 인식하고 있다. 반면 동양은 비이성적이며, 나태하고, 야만적이라는 것이 유럽 중심적인 관점으로 전통적인 오리엔탈리스트에 대한 해석이다. 이러한 시각은 동양을 서양의 수동적인 상대로 묘사해 오로지 서양만이 독자적이고 진보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주장을 펴기 위한 이론의 틀 역할을 해 왔다. 서구 문명을 예외적으로 특권화하여 격상시키는 서구중심주의는 비서구 문명을 자신들이 만든 잣대로 재단해 격하하는 오리엔탈리즘과 짝을 이룬다.

케네스 포메란츠의 대분기는 지금까지 유럽중심주의적 역사 서술의 문제점을 낱낱이 공개한다. 저자는 서유럽과 중국 경제발전 수준을 비교하여 근대 경제 체제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국은 1830년대만 해도 세계 제조업 생산의 30%를 차지하는 제조업 대국이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부터 산업혁명의 발원지인 영국에 밀렸다. 여기서부터 학자들이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18세기 중국에서는 영국처럼 산업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이와 관련해 포메란츠는 1800년경까지의 중국은 인구, 농업기술 등 모든 면에서 유럽과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되면 서구의 패권 질서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되는 대분기(The great divergence)’의 시점이 달라진다. ‘신대륙 발견이후 세계로 뻗어 나가던 15세기 전후부터가 아니라 1750년대 중반으로 봐야 한다.

 

15~18세기 기간은 무역에 관한 한 중국이 유럽보다 우위에서 주도권을 행사했다. 그 대표적 사례로 명나라 제독 정화의 남해원정을 통한 무역로 확장을 들 수 있다. 당시 유럽은 이슬람 세력의 견제로 아시아와의 자유로운 무역을 행사하기가 힘들었다. 콜럼버스나 마젤란 같은 항해가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새 교역로를 찾으려고 시도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중국과 인도를 중심축으로 이뤄지던 세계적 무역체제가 역전됐다. 그 순간은 영국 산업혁명과 식민지 경제의 개척을 통해 촉발됐다. 가장 먼저 산업화를 주도한 영국은 면직물 하나로 세계 시장을 지배했다.

 

포메란츠는 이런 서구의 부상이 우연에 가까운 행운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서구와 아시아의 격차가 생겨난 것은 필연적이지 않다는 말이다. 영국 산업화는 석탄, 증기기관 발명 등 우연한 사건 집합체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국을 제외한 몇몇 유럽 지역은 자원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낙후한 상태였다. 게다가 폭발적인 인구 증가,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해 숲이 파괴되었고, 농사지을 땅의 상태도 나빴다. 포메란츠가 수집한 각종 통계 수치 자료들은 근대 유럽의 우월한 신화가 허위였다는 사실을 증명해준다.

 

 

 

 

 

 

이 책의 분량은 두껍다. 어떻게 보면 역사 전공자들을 위한 딱딱한 학술서적처럼 느껴진다. 유럽중심주의를 옹호하는 제도학파 역사관과 이를 수정하려는 캘리포니아학파 역사관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읽으면 엄청 지루하다. 포메란츠의 서술 방식이 독자에게는 불친절하다. 주요 핵심 내용을 후방으로 배치하고, 이와 관련된 각종 자료와 근거들을 장황하게 설명하다. 포메란츠의 대분기2000년에 출간된 책이다. 이미 다른 캘리포니아 학파 역사가들의 책이 국내에 소개된 것에 비하면 꽤 늦게 나온 셈이다. 안드레 군더 프랭크의 리오리엔트(이산, 2003), 로버트 마르크스의 어떻게 세계는 서양이 주도하게 되었는가(사이, 2014)를 먼저 읽었으면 포메란츠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이 책 한 권을 열심히 만든 출판사 편집자, 번역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완독이 부담스러운 독자는 대분기를 소개하면서와 서론만 읽으면 된다. 아니면 로버트 마르크스의 책을 읽으면서 캘리포니아학파 역사관을 이해할 수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비종 2016-06-04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면가왕>이란 TV프로그램을 아시나요? 복면을 쓴 가수들의 노래 대결에서 99명의 판정단이 등장하죠. 결국 서구의 부상은 거의 대등했던 상황에서의 행운스러운 우연이란 말이군요. 49대 50의 판정 결과로 판세가 갈리는 것처럼요^^

cyrus 2016-06-05 20:19   좋아요 0 | URL
네, 항상 본방 사수합니다. 서양 중심 역사를 반대하는 학자들은 서양이 자원을 활용해서 경제가 성장한 상황을 우연으로 봅니다. ^^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 - 르네상스부터 리먼사태까지 회계로 본 번영과 몰락의 세계사
제이컵 솔 지음, 정해영 옮김, 전성호 부록 / 메멘토 / 201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회계’는 ‘수학’ 다음으로 머리 아프게 하는 학문이다. 특히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 연구자, 인문계열 학생이라면 회계 앞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마련이다. 재무제표, 복식부기, 대차평균의 원리, 기업회계기준, 원가회계. 회계를 공부하면 알아야 할 내용이 상당히 많다. 오죽하면 회계학을 가르치거나 공부하는 이들도 회계가 골치 아프다고 말한다. 그런데 괴테는 회계를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자신의 책 《총.균.쇠》에서 인류가 문자를 만든 이유가 회계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경제는 신용사회를 기반으로 한다. 신용사회 기반인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해 회계감사 시스템이 개발됐다. 적정한 회계처리와 엄정한 회계감사는 자본주의 경제를 든든히 세우는 시스템이며 필수 절차다. 회계를 잘 모르더라도 ‘분식회계’가 무슨 의미인지 아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분식회계는 엄청난 국가적 재앙을 몰고 온다. 1999년 대우그룹 분식회계 사건은 분식회계가 가져올 수 있는 재앙이 어느 정도인지 극명하게 보여줬다. IMF 외환위기를 불러온 장본인이 바로 회계의 불투명성이었다. 2000년 미국 7위의 매출액을 자랑하던 엔론(Enron)은 분식회계를 통해서 순익을 부풀리다가 끝내 회계부정 사실이 적발되어 순식간에 파산했다.

 

미국의 역사학자 제이컵 솔은 어둠의 경제를 밝힌 회계의 찬란한 역사를 주목한다. 경영학과 출신이나 기업인이 아니더라도 그의 책 《회계는 어떻게 역사를 지배해왔는가》를 읽어보시라. 누구도 회계를 외면하면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역사 속 회계는 자본주의 세계의 언어다. 만약 회계가 없다면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바벨탑 같은 혼란을 겪었을 것이다. 회계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로마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중세까지도 채권·채무나 재산관리를 위해 기록해두는 단식부기에 머물렀다.

 

 

 

 

 

복잡한 상거래를 한눈에 파악하게 하는 복식부기는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시기에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3대 거장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활동하고 있었다. 이탈리아에는 이 세 사람을 능가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루카 파치올리다. 그는 복식부기를 확산시키며 주식회사 출범과 근대적 자본의 축적을 이끌었다. 사실 파치올리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다빈치의 친구였다. 유유상종이다. 복식 부기의 가장 큰 긍정적 효과로는 상인 계급에 대한 공신력을 크게 높였다는 것을 꼽을 수 있다. 투명하고 정확한 원칙은 회계 정보에 대한 신뢰를 끌어올렸다. 회계 정보 작성 과정뿐만 아니라 회계 감사의 효율성도 제고됐다.

 

그러나 회계가 재평가받기 전까지만 해도 파치올리는 ‘잊힌 천재’였다. 파치올리 이외에도 회계의 가치를 알아본 이들이 있었으나 시대는 그들의 능력을 알지 못했다. 회계 업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곱지만 않았다. 회계 업무 종사자들은 늘 항상 죄책감을 느끼면서 회계 장부를 들여다봐야 했다. 회계사의 수호신 성 마태오는 재산 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돈 만지는 일이 세속적인 죄라고 주장했다. 회계사들은 수호신의 말씀을 어기지 않으려고 했다. 자신들의 업무를 중대하고 신성한 일로 여겼지만, 도덕주의자들은 돈 거래하는 회계사들을 혐오스럽게 생각했다.

 

 

 

 

 

 

스페인 황금시대를 이끌었던 펠리페 2세는 처음에는 파치올리의 회계에 관심이 있었다. 하지만 펠리페 2세는 회계를 쉽게 배울 수 있는 왕도(王道)를 찾지 못했다. 그는 회계 공부의 어려움에 절망하여 ‘회포자(회계를 포기하는 자)’가 되었다. 결국, 회계업무를 다른 행정가들에게 맡겼다. 왕실 회계원들은 스페인의 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음을 확인했다. 그들은 이 사실을 펠리페 2세에게 알리지만, 왕은 전쟁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왕실 자금을 비밀리에 횡령하던 고위 관리들은 자신들의 부정이 왕실 회계원들에 의해 발각될까 봐 두려웠다. 스페인 왕실은 행정 업무에 투입할 수 있는 회계원 양성을 소홀히 했다. 회계에 무지한 스페인 왕과 고위 관리들의 어리석은 컬래버레이션은 정부의 재정 문제를 악화시켰고, 스페인이 쇠퇴하는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다.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는 것과 동시에 회계가 태어났다. 회계는 정직과 성실을 가장 중시하는 학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경영의 기틀을 잡는 데 사용되었다. 우리나라도 오래전부터 회계의 장점을 알고 있었다. 책 뒤편에 한국의 전통 회계 방식에 관한 부록이 있다. 파치올리보다 200년 이상 앞서 고려 개성상인들이 복식부기를 썼다는 사실을 아시는가. 개성상인의 후손이 소장한 19세기 회계장부 14권은 2014년에 등록문화재 제587호로 지정되었다.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조상의 지혜에 새삼 감탄하면서도 왜 계승하지 못하고 단절됐는지 아쉬움이 크다. 정부가 앞장서서 우리나라의 회계 관련 법제도 등을 선진화해 왔고, 특히 국제회계기준(IFRS)을 전면 도입하여 회계 선진화의 획기적인 진전을 이뤄낸 것은 괄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회계에 대한 기본 인식을 선진국 수준으로 제고하려면 아직도 개선의 여지가 많다. 회계를 회계사들만 관리하는 특별한 학문으로 생각한다. 회계도 엄연히 말하면 돈 관리하는 일 중 하나인데도 우리는 여러 은행 금리가 어떤지 비교하거나 재테크 전략만에 관심을 쏟고 있다.

 

기업의 성장은 국가의 경제 발전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회계는 바로 그 기업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명확히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이다. 그런데 앞에서 언급했듯이 회계 업무의 조건에 정직과 도덕적 책임성을 무시할 수 없다. 분식회계 같은 어둠의 경제가 생기지 않도록 항상 밝혀야 할 회계도 가끔 어두워질 때가 있다. 부정회계에 눈 감은 회계사는 이기적인 경제적 인간의 모습만 보일 뿐 호혜적 인간의 향기는 느낄 수 없다. 이럴 때 정직한 회계와 회계사들의 입장은 난처하다. 신의 시대가 아닌 지금, 성 마태오를 불러야 하나.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5-30 15: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5-30 19:53   좋아요 0 | URL
제가 대학생 때 복수전공으로 경영학을 신청했습니다. ‘재무회계’ 과목이 필수과목이었는데, 기본 회계를 공부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덤비는 바람에 좋은 학점을 못 받았습니다. 그래서 부전공으로 변경했습니다. ㅎㅎㅎ

회계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대단해요. 회계가 복잡하다고 해도 한 번 문제를 풀면, 꽤 빠른 시간 내에 다 풉니다. 저는 계산하는 능력이 많이 딸립니다. ^^;;

yamoo 2016-05-30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계와 자본주의 역사라...재밌는 책인 듯합니다. 근데, 다이아몬드의 주장은 제고해 봐야 할 여지가 있긴 합니다.

자신의 책 《총.균.쇠》에서 인류가 문자를 만든 이유가 회계의 필요성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다이아몬드는 일단 주장하고 보는 거 같아요..ㅎ 근거가 매우 박약하거든요. 저 주장 다음에 뭔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문자를 만든 이유가 회계의 필요성 때문이라니...문자를 만들어 활용하다보니 회계라는 발견을 했을 수는 있지만...저런 인과는 정말 다이아몬드 스럽습니다..ㅎㅎ

어쨌거나 흥미있는 분야의 책이라 저도 관심이 동하긴 합니다.ㅎ 좋은 책 소개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6-05-30 19:55   좋아요 0 | URL
제가 책 내용을 잘못 기억할 수도 있습니다. 나중에 다시 한 번 <총균쇠>를 들춰봐야겠습니다. 그런데 야무님 말씀대로 다이아몬드의 주장 중에는 억측이 있긴 합니다. <나와 세계>를 읽고 실망했습니다. ^^

alummii 2016-05-30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회포자 나라 망치다 ..제가 젤 싫어하는 분야가 회계에요..이래서 사업은 절대로 못 한다는 ..ㅋ사실 월급 관리도 못해요ㅋ

cyrus 2016-05-30 19:56   좋아요 0 | URL
회계도 알아두면 좋은 내용인데, 경제학과 더불어 일반인이 어렵게 생각하는 저주받은(?) 학문입니다. ^^;;

뽈쥐의 독서일기 2016-05-30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포자..ㅋㅋ 저도 수포자였으니 회포자 될 가능성이 높겠죠ㅠㅠ 회사는 역시 숫자로 말하는 곳이라 일찌감치 수학 포기한 걸 정말 후회하고 있습니다. 살짝 흥미가 생기는 책이었는데 싸이러스님이 재밌게 써주셔서 급땡기네요. 근데 이 책 읽으면 회계능력이 좀 느나요~? 0자 맞추는데 스트레스 왕창 받아요ㅠㅠ

cyrus 2016-05-30 19:57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역사책이라서 회계 지식 몰라도 됩니다. 회계 관련 용어를 옮긴이가 주석으로 잘 설명해놓았습니다. 회계로 이점을 보는 사람과 반대로 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