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목민심서
정약용 지음, 다산연구회 편역 / 창비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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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공 시절인 1986년, 정부는 각 언론사에 보도지침을 내렸다. ‘대통령의 임시 집무실에 놓여 있는 목민심서가 눈길을 끈다’고 보도할 것. 전두환 전 대통령은 외국행 비행기를 탈 때 기자들의 사진촬영에 대비해 이 책을 꼭 비치하도록 했다. 후안무치(厚顔無恥)도 유만부동(類萬不同)이다. 비록 읽지는 않고 선전용으로 홍보효과를 노린 것일지라도 이 책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는 있었던 것 같다.

 

조선 후기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의 대표 저서인 이 책은 지방행정관이 지켜야 할 준칙을 담고 있다. 책 전체에 흐르는 사상은 애민(愛民)정신과 실사구시(實事求是) 철학이다. 특히 관(官)이 몸을 낮추어 민생을 위해 헌신할 것을 강조했다.

 

옛말에 백성을 부양하는 것을 일러 ‘목(牧)’이라 했다. 이 책에는 목민관이 지켜야 할 6가지 계율이 있다.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가정을 바로 다스리고, 청탁을 물리치고, 철저히 절약하고, 즐겨 베풀라는 것이다. 다소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곧은 마음과 곧추선 자세야 말로 행정을 하기에 앞서 목민관이 가져야 할 덕목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 중심은 역시 민본주의이다.

 

이 책이 쓰인 1800년대 초반은 임진왜란 이후 군사력 증강에 국력을 기울인 결과 국가재정이 궁핍하던 때였다. 관리들은 뇌물 챙기기에 바빴다. 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졌으나 조정은 나라 다스리는 일보다 당파싸움에 빠져 국가가 몰락의 길을 걷던 시기였다.

 

사실 목민에 대한 정약용의 구상은 일찍부터 싹트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부친이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할 때 임지에 따라가서 견문을 넓혔다. 그뿐 아니다. 자신도 한때는 암행어사와 수령으로서 지방행정의 문란으로 인한 민생의 고통을 생생히 목도한 터였다. 그래서 다산은 책의 서문(자서, 自序)에서 수령들의 부패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따끔하게 질타하고 있다.

 

“오늘날 백성을 다스리는 자들은 오직 거두어들이는 데만 급급하고 백성을 기를 줄 모른다. 이 때문에 아랫사람들은 여위고 시달리고, 시들고 병들어 쓰러져 진구렁을 메우는데, 그들을 기른다는 자들은 화려한 옷과 맛있는 음식으로 자기만을 살찌우고 있다.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15쪽)

 

다산이 살다 간 시대와 오늘의 현실은 무엇이 다른가. 혹시 이 나라의 공무원들은 200년 동안 하나도 변한 게 없는 것 아닌가. 많은 사람이 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한국 정치의 후진성을 꼽는다. 정책 대결이 아닌 정당 간의 지역 대결만 있고 극단적인 분열과 대립 속에서 우리의 정치의 시계는 멈춰 선 지 오래다. 매일 보도되는 정치인들의 비리와 부정은 국민으로 하여금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불러일으켜 정치적 무관심을 만연시켰다. 아직도 이 나라는 부정과 부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공직자들의 부패 사건은 무시로 터지고 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정치권을 보면서 새삼 다산 정약용이 생각날 수밖에 없다. 백성이 수령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수령이 백성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강조한 다산이 요즈음 전개되는 정치권의 행태를 보면 이를 과연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다산이 암행어사와 부사 등의직무를 수행하면서 겪은 자신의 경험이어서인지 더욱 설득력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공직자의 처신은 다르지 않아 항상 청렴과 자기희생이 으뜸의 덕목으로 꼽힌다. 공직자의 몸가짐과 자기관리가 강조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다산은 "청렴은 천하의 큰 장사이다. 욕심이 큰 사람은 반드시 청렴하려 한다. 사람이 청렴하지 못한 것은 그 지혜가 짧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뇌물에 또는 사사로운 인연에 집착하다 보면 자신의 가족은 물론이고 후손에까지 불명예를 끼치게 된다는 것을 경계한 말일 것이다. 그 중 율기(律己)편에 나오는 한 구절. ‘청렴은 수령의 본래 직무로 모든 선(善)의 원천이며 모든 덕(德)의 근본이다. 청렴하지 않고서 수령 노릇을 잘할 수 있는 자는 없다.’는 말은 오늘날에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다.

 

‘관피아’ 문제가 부각되면서 정부는 대대적인 공직 개혁에 나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시 열풍’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수한 인재들이 국가 경영에 참여하고 국민들에게 봉사하고자 하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젊은이들이 투철한 국가관과 봉사정신을 갖추지 않은 채, 소시민적 안락을 추구하고자 공직을 지망한다면 걱정스럽다. 공직자는 귀찮은 일도 기피하지 않아야 하며, 때로는 골치 아픈 경쟁도 벌여야 한다.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들이 지망할 곳이 아니다.

 

공직자가 된 사람의 최고 욕심은 최고위 공직자의 지위에 오르는 것일 것이다. 그런 큰 욕심을 접고 눈앞의 조그만 뇌물에 현혹돼 중도에 흠집이 나거나 낙마하고 만다면 큰 욕심을 채울 방법이 없게 되므로 진짜 큰 장사꾼만이 청렴한 공직자가 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엄격한 도덕성으로 무장되지 않은 공직자가 돈까지 가지려는 데서 수많은 문제가 생긴다.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옛사람들의 뜻이었다. 교체되고자 슬퍼한다면 수치스럽지 않은가?” (해관 6조 중에서, 328쪽)

 

그 밖에도 다산은 청렴한 선비의 부임길 행장은 이부자리와 속옷 외에 책 한 수레라고 했다. 또 퇴임 행장은 낡은 수레와 여윈 말에 토산품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고생한 노력 끝에 높은 자리에 오르는 과정을 생각하면 공직에서 스스로 물러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공직을 통해서 자신의 소명을 이루었다면 물러날 때를 알아야하는 초연함도 있어야 한다. ‘공복(公僕)’이라는 초심을 잃고, 권력과 재물에 욕심을 부리면 ‘박봉(薄奉) 타령’을 늘어놓거나 ‘검은 돈’의 유혹에 빠져 패가망신하기 쉽다.

 

‘청렴’은 여전히 공직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공부문이 아직도 많은 영향력과 권한을 행사하는 우리 사회에서 공직자의 인간됨과 자세는 참으로 중요하다. 청렴 다음으로 정약용이 강조하는 것이 자기 수양이다. “아전을 단속하는 일의 근본은 스스로를 규율함에 있다.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일이 행해질 것이고, 자신의 몸가짐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하더라도 일이 행해지지 않을 것이다”고 말함으로써 목민관의 마음 자세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목민관의 몸가짐이 바로 서야 올바른 행동이 나오k고 이를 아랫사람이 본받아 원칙과 기강이 바로 서게 된다는 것이다.

 

청렴을 말하면 웃음거리가 되는 세상이지만, 그 무엇도 인물 검증의 잣대가 될 수 없어 보이는 현실에서 유권자의 이름으로 『목민심서』를 읽었는지 시험이라도 보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악독하고 간사한 자는 모름지기 정당(政堂) 밖에다 비석을 세우고 그 이름을 새겨 영구히 복직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이전 6조 중에서, 147쪽)

 

만약에 다산의 시험에 통과된 공직자 중에 도의에 어긋난 행동을 했다면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 과오를 덮은 채 공직에 복귀하려는 사람이 많다. 과연 누가 그들을 믿고 선거에서 표를 행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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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 - 교감 완역
이순신 지음, 노승석 옮김 / 민음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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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성인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 (니체 『이 사람을 보라』)

 

 

 

 Scene #1  우리는 진짜 이순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나라의 정세를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아침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동량(棟梁)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으니, 종묘사직이 마침내 어떻게 될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마음이 어지러워서 하루 내내 뒤척거렸다.” (을미년 1595년 7월 1일, 256쪽) 

 

이 절체절명의 위기가 주는 무게, 그것도 눈앞에서 선연하게 꿈틀거리는 위기가 미친 듯이 짓누르는 무게를 홀로 가늠한다. 눈앞이 캄캄하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그 무게를 칼 한 자루에 의지해 온몸으로 맞서 싸운 사람을 우리는 절대 잊지 않는다. 한국인의 머릿속에 영웅으로 깊게 각인된 그 사람, 이순신.

 

그동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의 고결하고 기품 있는 인품, 완벽한 전술전략과 통쾌한 승리, 나라에 대한 맹목적 충성, 그리고 비장미 흐르는 최후였을 뿐이다. 거기에 개인으로서의 ‘이순신’은 끼어들 여지가 전혀 없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에 우리가 감동 받은 건 그 부분을 바늘로 찔렀기 때문이다. 1인칭 관점의 개인으로서의 ‘이순신’을 보여주어, 그의 생각과 마음을 때로는 슬프게 때로는 참기 힘든 노여움으로 동감 작용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훈이 밝혔듯, 그건 작가의 상상력으로 만든 이순신으로 픽션일 뿐이다.

 

이 세상 누구도 자신이 하나의 상징적인 대상으로만 기억되길 원치 않는다. 피가 흐르고 눈물을 흘리는 인간으로서의 고뇌와 고통을 알아주지 않는다면 서글프다. 그를 한 여인의 남편 혹은 자식으로서,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그리고 외롭게 고군분투해야 했던 장군으로서 보고 겪고 느껴야 했던 인간적 면모를 이제 찾아줘야 한다. 현란한 색상으로 장식된 포장지를 벗기고, 있는 그대로의 이순신을 알아주는 일, 이순신이 원하는 건 바로 그것일 것이다.

 

 

 

 Scene #2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난중일기』는 “있는 그대로의 이순신”을 알 수 있는 첫걸음이다. 이순신이 직접 쓴 그의 일기를 보면 땀 잘 흘리고, 자주 아프고, 고민도 많고, “가슴이 찢어진다”는 말도 잘하고, “죽고 싶다”고 되뇌며 수시로 눈물을 흘리는 한 인간을 만나게 된다.

 

가을 기운 바다에 드니 나그네 회포가 산란해지고

홀로 배 뜸 밑에 앉았으니 마음이 몹시 번거롭다

달빛이 뱃전에 들자 정신이 맑아져

잠도 이루지 못했거늘 벌써 닭이 울었구나

 

(계사년 1593년 7월 15일, 130쪽)

 

이순신 역시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추위가 닥치고,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자연 앞에 속수무책이었던 한 평범한 인간이다. 너무 추우면 밖을 나다니지 못하고, 고민이 있을 땐 잠을 설치면서 자식과 늙은 어머니를 걱정하던 평범한 중년남성이었다.

 

임진왜란은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리고 총에 맞아 죽고, 불태워져 죽고, 굶어 죽고, 죽고, 죽고. 백성들이 굶주려 서로 잡아먹기까지 하는 전쟁이었다. 전쟁의 와중에 사람은 없다. 오로지 적군과 아군만 실재한다. 대체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경계란 무엇인가. 이순신 또한 사람과 사람 아닌 것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고뇌했다.

 

또한, 이순신은 우리 생각만큼 인자하고 자애로운 사람도 아니었다. 비록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걱정했지만, 그는 부대를 이끄는 최고 수장으로서 매우 엄격한 성품의 사람이었다.

 

 『난중일기』를 보면, 이순신에게 곤장을 맞은 자가 부지기수였고, 목을 베인 자도 무수히 많았다. 이순신의 판단 실수로 백성의 목을 베기도 했다. 그는 부하가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처단했고, 엄격한 군율 적용을 위해 부하의 잘못을 상부에 빠짐없이 보고했다. 이는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는 것이기에 보통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 일인데도 이순신은 그런 부류와 달랐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군대 기강 확립과 전투력 확보였을 뿐이다.

 

다만 당시의 다른 관리들보다 조금 나은 점이 있다면 이순신은 정직했고 자기의 임무에 대해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 사람이라는 것 정도다. 다른 관리들이 전쟁 중에도 타락한 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재산을 지키거나 권력을 잡는 데 목숨을 건 것과 달리, 이순신은 왜적을 물리치는 데 목숨을 건 것이다.

 

 

 

 Scene #3  피와 살이 있는 한 인간의 일기  

 

이순신은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을 기록을 남겼다. 12척의 초라한 배로 130여 척의 일본 함대를 물리친 장군이다. 자칫하면 더 치욕스러울 뻔했던 우리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만한 것으로 만든 민족의 영웅이다. 그런데 난중일기를 읽고 나면 안타까움이 커진다.

 

감옥에서 풀려난 날 쓴 일기,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 쓴 일기, 아들이 죽은 날 쓴 일기에 드러난 그의 애절한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이순신에 대한 우리의 편견 때문일까? 이순신을 수식하는 영웅다움이 커지는 만큼 이순신을 올바로 보는 정확한 시각은 가려지는 것 같다.

 

이순신이 12척의 배만으로 왜적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명장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어쩔 수 없는 물리적 상황에 맞서 싸우며 평범한 인간에서 비범한 영웅으로 스스로 거듭나게 했다는 점에 있다. 당연히 여기에는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좌절과 고뇌, 고통이 따랐을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맞서 싸워야 했던 내부의 적에 대한 어찌할 수 없는 한탄이 있다.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에 짓누르는 슬픔을 이겨내야 했던 한 인간의 번민도 드러나 있다. 또 두려움에 떠는 참모들을 향해 호통을 쳐야 했던 막막한 사연도 있다. 내부의 적에게 더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던 진짜 이순신이 그의 일기 속에 있다.

 

전쟁에서 단 한 차례도 패배도 기록하지 않은 이순신. 그 기록에는 이순신의 무수한 피와 땀과 눈물이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이순신의 승리에 통쾌함과 자부심만 느꼈을 뿐, 그 승리에 이르기까지 그가 뚫고 나가야 했던 과정은 무관심해 왔다.

 

이제 이순신을 진정으로 알아주자. 딱딱하고 무감각한 신격화가 아니라 피와 살이 있는 인간으로 그의 일기를 읽어보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밤바다 위에서 긴장으로 핏발 선 눈빛으로 외롭게 서 있는 이순신. 그도 병에 시달리고 실수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 이런 평가들은 불경스럽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인간 이순신을 앎으로써 이순신을 더 존경하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인간’ 이순신 장군, 그의 진짜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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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시 삼백수 : 7언절구 편 우리 한시 삼백수
정민 엮음 / 김영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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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시비성(是非聲)으로 둘러싸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

 

 

 

 

 

최북 「계류도(溪流圖)」 연대 미상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최북은 이 시의 후반부를 첫 글자 ‘상(常)’만 ‘각(却)’으로 바꿔,

가야산 홍류동 계곡을 그린 「계류도(溪流圖)」의 화제(畵題)로 삼았다.

 

 

미친 물결 쌓인 돌 묏부리를 울리니

지척서도 사람 말 분간하기 어렵구나.

올타글타 하는 소리 내 귀에 들릴까봐

흐르는 물 부러 시켜 산을 온통 감싼게지.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최치원, 題伽倻山讀書堂 / 가야산의 독서당에 쓰다, 14쪽)

 

 

최치원을 좋아한 적이 있었다. 그의 재능이 좋았고, 그의 고독이 좋았고, 그의 시가 좋았다. 망해가는 신라의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좌절하고 가야산에 은거한 그의 삶이 좋았다. 시비(是非)하는 소리가 싫어 바위 사이를 울리며 흐르는 물로 차단해버리고 그 고독 속에 파묻힌 그의 결정을 부러워한 적이 있었다.

 

지금도 세상에는 수많은 언어들이 흘러 다닌다. 내가 내뱉은 언어, 내가 듣는 언어, 내가 주울 수 있는 언어, 내가 버린 언어. 세상은 바야흐로 언어의 천국이다. 내가 내뱉은 언어로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내가 듣는 언어로 인해 내가 아프기도 한다.

 

그런데 이제는 가능하면 모든 언어들을 있는 그대로 만나려고 노력한다. 그 언어가 시(是)하는 것이든, 비(非)하는 것이든 그 모두를 내 속에 받아들인다. 지난 시간과는 달리 내 속에 들어온 시비성(是非聲, 옳으니 그르니 하며 다투는 소리)은 아주 자유롭게 내 속을 흘러 다닌다. 흐르는 물소리로 시비성을 막아버린다고 시비성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是)’가 반드시 ‘시(是)’인 것도 아니고, ‘비(非)’가 반드시 ‘비(非)’인 것도 아니다. ‘시(是)’가 ‘비(非)’로 변하기도 하고, ‘비(非)’가 ‘시(是)’로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시비’ 모두가 상대적이라고 결정해버린다면 삶은 미궁으로 빠진다. 삶은 끊임없는 ‘시비’의 판단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치관이라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면 무엇으로 ‘시비’를 결정할 수 있을까? 상대적이라는 것은 개인의 가치판단이다. 개인을 넘어 집단을 대상으로 할 때 거기에 절대적인 판단의 기준이 생긴다. 어쩌면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도덕이고 법일 것이다. 우리가 도덕이나 법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시비성’이 들린다고 흐르는 물소리로 그 소리를 외면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그 소리와 만나야 한다. 그리고 소통해야 한다.

 

 

 

 Scene #2  아름다워 슬픈 여강, 어쩌면 다시 볼 수 없는 그림

 

 

천지는 가이없고 인생은 덧없거늘

호연히 돌아갈 뜻 어디로 가려 하나.

여강 한 굽이 산은 마치 그림 같아

반쯤은 그림인 듯 반쯤인 시인 듯.

 

天地無涯生有涯

浩然歸志欲何之

廬江一曲山如畵

半似丹靑半似詩

 

(이색, 麗江迷懷 여강에 마음이 심란하여, 108쪽)

 

 

 

여강(남한강)을 끼고 있는 경기도 여주 땅의 아름다움을 이만큼 잘 나타낸 시가 또 있을까. 고려 말의 대학자요 정치가였던 목은 이색은 자신의 고향인 여주를 이렇게 노래했다. 여주에서 그림 같고 시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여강의 풍경이다. 한반도의 중앙을 흐르는 남한강이 여주를 감고 돌면서 비로소 여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충청, 강원은 물론 영남지방에서 거둬들인 세곡을 실어 나르고, 한양으로 가는 길손들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런 강줄기를 여주 사람들은 ‘여강 백리길’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언제나 사람과 풍성한 물자로 흥청거렸던 이곳도 철도와 고속도로의 등장에 잊힌 강이 되어버렸다.

 

4년 전에 여강은 ‘4대강 살리기’ 사업의 핵심 구간이 되면서 찬반 세력이 첨예하게 맞선 곳이었다. 강 생태계 파괴로 환경재앙을 초래할 것이라며 환경운동단체들을 중심으로 반대운동이 벌어졌고, 공사로 파괴되는 현장을 직접 보려는 시민순례단의 답사 발길이 이어졌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공사는 진행되었다. 지금쯤이면 여강의 그림은 반쯤은 콘크리트이고, 반쯤은 식당일 것이다.

 

여강길은 철 따라 다른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물수제비를 뜰 수 있고 동물발자국과 희귀식물도 찾을 수 있으며 강을 울리는 메아리도 들어볼 수 있다. 자갈길과 모랫길, 억새길, 늪지길이 번갈아 나오는 그 길을 걸으면 이야기가 있고 유적도 있다. 그리고 눈물도 난다. 이름에 걸맞은 아름다움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에 심란하다.

 

 

 

 Scene #3  연밥 던지고 임도 보고

 

 

 

문혜정 「연곷 이야기 1」 2008년

 

 

가을날 맑은 호수 옥 같은 물 흐르는데

연꽃 깊은 곳에 목란배를 매어두고.

임 만나 물 저편에 연밥을 던지고는

행여 남이 봤을까 봐 한참 부끄러웠네.

 

秋淨長湖碧玉流

荷花深處繫蘭舟

逢郞隔水投蓮子

遙被人知半日羞

 

(허난설헌, 採蓮曲 / 연밥 따는 노래, 324쪽)

 

 

 

가장 더운 여름날 새벽에 피어나서 밤이면 꽃잎이 닫히기를 3~4 일간 계속 되는 연꽃은 더러운 진흙 속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가장 깨끗하게 피어난다. 흔히 연꽃을 한 꽃 받침에서 두 송이가 핀다 해서 부부간의 금슬을, 연밥에는 씨가 많아 다산을, 연밥의 씨는 수백 년 동안 생명을 유지해서 장수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군자를 의미하고 절개를 뜻하는 연꽃도 한편으로는 사랑을 의미하기도 한다. 연꽃이 심어져 있어 연밥을 따는 연못은 남녀가 자연스럽게 만나 사랑이 무르익는 장소였으며 ‘연밥도 따고 임도 본다’는 대표적인 꽃이다. 연밥(蓮子)을 던져주는 것은 사랑 고백을 의미한다. 정민 교수의 해석대로 ‘연자’(蓮子)의 동음이의어 ‘憐子’로 읽으면 ‘그대를 사랑해요!’라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부끄럽지만 임을 위해서 자신의 감정을 과감하게 표현하는 구절이 뛰어나다. 사랑에 빠진 여인의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녀는 평생을 사랑으로 갈망하고 꿈꾸었지만 단 한 번도 연인을 가져보지 못했고, 지아비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난설헌의 문학적인 성취의 뒤편에는 더할 수 없는 비극적인 삶이 자리 잡고 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재능을 펼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던 당시의 시대 분위기에다, 기생집을 전전하던 남편, 그리고 재주를 질시하던 시어머니와의 끝없는 불화, 그리고 두 자녀의 죽음. 그녀의 삶은 질곡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한(恨)을 난설헌은 시로 옮겼다. 아름다운 연꽃잎은 기억할까, 여인의 눈물을. 진흙 속에 활짝 피는 연꽃잎을 만나면 시대와 불화했던 한 여인의 비극적인 삶과 못다 핀 사랑을 기억해야겠다.

 

 

 

 Scene #4 종소리보다 묵직하게 울리는 독립의 의지

 

 

사방 산 감옥 에워 눈은 바다 같은데

찬 이불 쇠와 같고 꿈길은 재와 같네.

철창조차 가두지 못하는 것 있나니

밤중의 종소리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四山圍獄雪如海

衾寒如鐵夢如灰

鐵窓猶有鎖不得

夜聞鐘聲何處來

 

(한용운, 雪夜 / 종소리, 612쪽)

 

 

 

김광균의 ‘설야’는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로 귀를 열게 하지만, 한용운의 설야는 몇 겹으로 갇힌 감옥 속에서 듣는 종소리로 귀를 당긴다. 안 그래도 감옥인데, 사방에 눈이 하염없이 쌓여, 갇힌 마음을 다시 섬으로 가뒀다. 외롭고 슬픈 마음에 이불도 이루 말할 수 없이 싸늘하고 꿈마저 으스스하다. 그런 가운데 문득, 가둔 울타리 모두 풀고 자유롭게 오가는 것이 있다. 저 종소리의 놀라움. 철창도 가두지 못하는 게 있다. 종소리를 가두지 못한다면, 마음인들 어찌 가둘 수 있으랴.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죄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만해 한용운 선생은 변호사를 대지 말고,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을 주변에 당부했다고 한다. 그가 수감 중 지은 시 '설야(雪夜)'는 꿈마저 재가 될 정도로 혹독한 감옥에서 한 밤 종소리를 들으며 느낀 비감한 심사와 독립에 대한 의지를 보여준다. 몸은 가둘 수 있어도 자유와 독립의 의지를 가두지는 못한다는 그 기개가 미명의 종소리보다 묵직하게 울려온다.

 

돌아온 봄에 꽃은 피고, 회복한 땅엔 새살이 돋았다. 아픔은 사라졌고, 흉터는 남았다. 남은 역사의 흉터가 부끄럽다고 외면하거나 거짓으로 미화할 수는 없다. 더욱 혹독한 아픔을 다시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 옥중에서 뽑아 올린 이 시가 아무리 드높은 예술로 승화된 절창(絶唱)이라 할지라도, 이런 절창은 결코 두 번 보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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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한시 선집 문학동네 한국고전문학전집 11
강혜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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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 같이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

 

이탈리아의 작곡가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중 아리아 '여자의 마음'에 나오는 노랫말 중 일부다. 노래만 들어서는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몰라주는 변덕스런 여자를 향한 안타까움과 원망이 담긴,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류의 탄식과 애원으로 들린다.

 

리골레토는 만토바 공작의 꼽추 어릿광대이다. 공작은 난봉꾼, 호색한이고 리골레토는 그 일에 충실한 조력자이지만 자신의 딸 질다가 혹여 그런 몹쓸 꼴을 당할까 전전긍긍이다. 하지만 신분을 숨긴 공작은 이미 질다를 만나 그녀의 사랑을 얻었고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리골레토는 청부업자에게 공작 살해를 요청한다. 공작을 유인하기 위한 방편으로 청부업자의 요염한 여동생이 등장하고 공작은 그녀를 꼬드기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그때 바로 이 유명한 아리아 '여자의 마음'이 나온다. 리골레토는 질다의 마음을 단념시키기 위해 공작의 실체를 알리려 그곳에 질다를 데려간다. 숨어서 자신에게 한 공작의 모든 말과 행동이 거짓이었음을 고통스럽게 확인하고도 질다는 공작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딸을 구하고 그 복수를 하려던 리골레토는 죽어 가는 딸을 부둥켜안고 저주하며 울부짖는다.

 

변덕스런 게 여자의 마음이라 알 수 없다는 공작을 목숨 걸고 사랑하는 질다가 숨어 가슴 치며 듣는 아리아가 바로 그 '여자의 마음'인 것이다. 그러나 원작을 보게 된다면 질다의 마음만이 변하기 쉬운 갈대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 아리아를 부르는 만토바 공작이 극악무도한 플레이보이라는 함정이 있다는 점. 부질없이 흔들리는 쪽은 남성인데도, 도리어 여성을 향해 변덕스럽다며 비난하는 노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여자의 마음은 갈대'는 쉽게 마음이 변하는 여성들을 조롱하는 관용어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대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문 닫기 아쉽기만 하네

 

 

 

 

 

신윤복  「연당여인(蓮塘女人, 연못가의 여인)」 18세기

 

 

 

누군가, 아니 일부 남자들 중에는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 이 말을 여자를 가리키는 공식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남자의 마음' 역시 갈대인 모양이다. 그리고 여자의 마음은 갈대만 있는 게 아니라 한 사람만을 바라볼 줄 아는 '해바라기'도 있다.『여성 한시 선집』에 수록된 조선시대의 여성들이 쓴 시를 읽으면 남성 독자들도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질 것이다. 

 

  

그리움과 만남이 다만 꿈에 기대니

내 임 찾아갈 때 임은 날 찾아왔나봐.

바라거니, 언젠가 다른 날 밤 꿈에는

같은 때 같이 길 떠나 도중에 만나기를.

 

- 황진이 《상사몽(相思夢)》(p 15) -

 

무엇을 간절히 원하면 그 꿈이라도 꾸게 된다고는 하지만, 그립고 보고 싶은 사람은 꿈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듯하다. 당대 사내들을 환장시킨 천하의 황진이(?~?)도 예외가 아니다. 왜 사내들이 그녀의 앞에만 서면 끙끙 앓았는가. 육체적인 사랑은 흔쾌히 동의해도 결코 마음을 내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황진이는 눈먼 기생어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자신을 낳은 어머니를 매몰차게 버렸다. 너무나 아름답게 피어난 황진이는 가슴 깊이 남자에 대한 불신과 냉담을 키우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꽃은 제 모습을 아무리 숨겨도 은은한 향기가 드러내는 법. 황진이도 천상 '여자'였다. 그녀 또한 상사병을 견뎌내기가 힘들었으리라. 자신 스스로 억압한 욕망은 꿈의 의식으로 발현된다고 프로이트가 말했던가.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그리운 임을 꿈 속에서조차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다음 꿈에서 만날 수 있기를 기약하는 마음을 읊조리고 있다. 비록 임과 이별하게 되어 몸은 멀리 떨어져 있어도 꿈 속에서라도 임의 곁에 있고 싶은 것이다.

 

 

기약하고 어찌 이리 돌아오지 않나요?

뜰에 핀 매화도 지려 하는데.

문득 들려오는 가지 위 까치 소리에

부질없이 거울 보며 눈썹 그려봅니다.

 

- 이옥봉 《규원(閨怨)》(p 28) -

 

 

이옥봉(?~?)은 허난설헌(1563~1589)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으로 조명받고 있다. 허난설헌의 기구한 운명 못지 않게 이옥봉의 삶 또한 그리 순탄하지가 않다. 옥봉은 서녀 출신이었다. 출신의 한계 때문에 자신의 결혼 생활이 첩살이 밖에 못함을 비관하고 있었다. 그녀는 결혼을 포기한 채 서울로 상경하여 본격적으로 문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의 작문 실력은 허난설헌의 동생 허균마저도 극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 뛰어났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어김없이 사랑의 콩깍지 귀신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옥봉이 사랑했던 사람은 조원(1544~1595)이라는 문신이었다. 옥봉은 그를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그의 첩이 되기를 간청한 후 하지 말아야 할 약속을 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두 번 다시 시를 짓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첩살이는 시작되었고 10년 채 안 된 어느 날 그녀의 시련은 시작되었다.

 

그 내용인즉, 조원 집안의 산지기가 소도둑으로 몰려 꼼짝없이 죽을 지경에 처하자 산지기의 아내가 이옥봉에게 찾아와 눈물로 하소연하며 조원과 각별한 사이였던 파주목사에게 살려줄 것을 부탁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산지기 아내의 말을 들어보니 분명 소도둑을 빙자해서 아전들이 돈을 갈취하려는 수작이라는 것을 쉽게 알게 되었다. 옥봉은 곧장 파주목사에게 자신의 장기인 시를 한 수 적어 보내 산지기는 이내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안 조원은 맹세를 깼다는 이유로 옥봉을 쫓아내고야 말았다. 옥봉을 쫓아낸 조원의 분노 속에는 그녀의 재주가 자신보다 뛰어난 점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생긴 일종의 질투심도 있었다.

 

옥봉은 남편을 향한 구애와 특출한 재능, 둘 다 외면받은 불행한 여자다. 그러나 재회할 가능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행여 다시 만날 수 있을까하는 기대 반 설레임 반에 거울을 보면서 화장을 한다. 임에 대한 그리움과 재회에 대한 염원의 심정으로. 그러나 옥봉을 더욱 처량하게 만드는 부질없는 일. 처량한 신세와 나날이 깊어져만 가는 고독을 견뎌내기에는 홀몸이 된 옥봉이 견뎌내기에는 힘들었던가 보다. 제목처럼 규방에서 혼자 원망의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급기야 자신이 쓴 시를 온몸에 칭칭 감고서는 바다에 뛰어들어 꽃 같은 생을 마감하기에 이른다. 소도둑으로 내몰린 산지기를 구하기 위해 시를 한 수 썼건만, 남편의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고 바다에 몸을 던져야 했던 그녀의 삶이 애처롭기만 하다.

 

 

봄바람만 공연히 불어오는데

밝은 달은 이미 황혼인 것을.

그대 오지 않을 줄 알면서도

문 닫기 아쉽기만 하네.

 

 

- 복아 《별주수남미로(別主倅南眉老, 사또 남미로와 헤어지며)》 (p 24)

 

 

기생 신분의 여인들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것'은 기생들의 세계에서는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남성이 지배하는 사대부 사회의 특성상 황진이의 명성 버금가는 정도가 아니라면 기생의 존재는 웃음을 파는 노류장화(路柳墙花)에 불과했다. 황진이도 그러했듯이 글솜씨가 출중한 기생들이 사랑의 원초적인 욕구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詩)였다. 우리에게 생소한, 복아라는 이름의 기생이 쓴 시는 떠나 보내야만 했던 남미로라는 사또를 향한 그리움과 애정을 표현했다. 그러나 문 닫기가 아쉬워하는 마음 뒤에는 슬픈 사랑의 결말이라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해진 복아의 외사랑이 더 애달프게 느껴진다. 과연 사또 남미로는 복아를 진정 사랑하고 있었을까?  저 멀리 복아는 홀로 쓸쓸히 이별의 쓸쓸함을 삼키고 있을 때, 남미로는 또 다른 기생들과 어울려 달콤한 술을 삼키고 있지 않았을까..   

 

 

 

 세 명의 자식을 떠나보내야만하는 부모의 피눈물

 

닿을 수 없는 거리는 그리움을 낳고, 메울 수 없는 거리는 외로움을 낳는다. 바라는 보아도 품을 수 없는 것들은 사무침으로 다가온다. 가까이 있다가 멀어지면 그 거리만큼 눈물이 흐른다. 이별의 강은 그래서 마르지 않는다. 이별 중에서도 가장 비통한 것은 생전에 자식을 잃는 것이다. 허난설헌의 《곡자(哭子)》는 창자를 끊는다.

 

 

지난해는 사랑하는 딸을 잃고

올해는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었네.

슬프디 슬픈 광릉 땅

두 무덤 한 쌍이 마주 보며 솟았네.

쏴쏴 바람은 백양나무에 불고

도깨비불은 무덤에서 반짝인다.

지전을 살라 너의 혼을 부르고

술을 따라 너희 무덤에 붓는다.

나는 아네, 너희 형제의 혼이

밤마다 서로 만나 놀고 있을 줄.

배 속에 아이가 있다만

어찌 자라기를 바라랴?

부질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피눈물 흘리며 소리 죽여 운다.

 

 

- 허난설헌 《곡자(哭子)》(p 72) -

 

 

 

허난설헌은 명문가 집안의 딸로서 부러울 것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불우했다. 남편 김성립은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세 아이를 모두 잃은 것이다. 스물일곱에 생을 마감한 그는 생전에 앞의 글 《곡자》라는 시를 통해 자식 잃은 어미의 비통한 심정을 읊었다. 시는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의 슬픔을 절절히 담고 있다. 세상 누구라도 자식 잃은 비통함은 같겠지만 유일한 희망인 뱃속에 있는 세 번째 아이마저 잃어야했던 그녀의 절망적인 상황을 알고 난 뒤에《곡자》를 읊조리면 저절로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부질없이 슬픈 노래를 부르며 피눈물 흘리며 소리 죽여 운다.'라는 대목에서 그녀의 통곡은 이 세상 모든 부모의 통곡이 된다. 자식 잃은 부모의 비통함은 시대를 초월해 같다.
 

 

 

 케케묵은, 그러나 너무나도 슬픈...

 

조선시대 여성들이 쓴 시 속에 드러난 공통적인 감정들, 특히 연분을 맺은 임에 대한 그리움과 지고지순한 사랑의 표현들이 유교 사회가 여자들에게 강조했던 '삼종칠거(三從七去)'와의 관계성과 밀접한 의식의 흔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여성들은 자신의 감정과 정서를 표현하는데 자유롭지 못했다. 게다가 부녀자가 시작(詩作)을 한다는 것은 당시의 사회 통념에 반하는 일이었다. 그래도 오늘날에는 심적 고민들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 여성들이 힘든 시집살이가 기다리고 있는 '시월드'와 규방 속에 갇혀 억압된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풀 수 있는 건 문방사우(文房四友)뿐이었다. 양반 집안이 아닌 이상 평생 문자를 제대로 배우지 못했고 이름마저 없는 조선시대의 여성들의 삶을 생각한다면 글로나마 자신의 존재를 알린 소수의 여성들은 정말 축복을 받은 셈이다.『여성 한시 선집』에 수록된 글들은 그저 케케묵은 내용들이 아니다. 사대부 사회로부터 받은 사회적 소외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버림받아야만했던 마음의 상처와 눈물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슬픈 문장들이다. 여성을 '갈대'라고 생각하면서 본인이 여성을 무시하면서 '갈대'처럼 행동하는 남성중심적 사고야말로 케케묵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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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2-09-26 17: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도 없이 21세기인 현재 한글강좌에 등록한 이들은 모두 60세 이상의 여자들입니다.집에서 학교를 안 보낸 탓이죠.80년대까지만 해도 남녀의 대학진학률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cyrus 2012-09-27 23:21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해도 문자를 쓸 줄 아는 여성들이 극소수인줄 알았습니다. 유명한 여성
문인들이 황진이, 허난설헌, 이옥봉 등이 잘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 선집을 보면서 기생에서
사대부 부인까지 생각보다 꽤 많은 여성들이 한시를 썼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
 
다산어록청상 푸르메 어록
정민 지음 / 푸르메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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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투 한 벌을 지키고자 했던 러시아의 관리  

 

 

 

영하 40도를 오고가는 혹한기가 이어지고 있는, 사람 인적이 드문 한밤중에 러시아 뻬쩨르부르그의 거리에는 '아까끼 아까끼예비치'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유령이 떠돌고 있다.  

아까끼라는 이름의 유령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특별한 요구를 하는 것으로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특히 눈보라가 몰아치는 새벽에 문제의 거리를 지나가게 된다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까끼를 만날 수 있다. 유령 아까끼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깃을 잡아채며 고통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지으면서 요구를 한다. 

    " 난 네놈의 외투가 필요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존재를 마추친 사람들은 당연히 기겁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유령은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았다. 그저 외투가 필요하다고 고통스럽게 호소할 뿐이었다. 유령 아까끼는 왜 저승으로 떠나지 못한 채 외투 한 벌을 찾는 데 뻬쩨르부르그를 배회하고 있던 것일까?  

아까끼는 죽기 전에는 관청에 근무했던 하급 관리였다. 비록 처세 능력이 부족한데다 비천한 신분 때문에 관리직으로서 많은 급료를 벌어들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맡은 임무에 성실히 수행하면서 관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근검절약을 하면서까지 관리 생활을 하면서 얻은 수입으로 화려한 외투 한 벌을 마련하게 된다. 평생동안 낡은 외투만 입고 지낸 아까끼는 오랫동안 모아놓은 수입으로 구입한 새 외투 한 벌이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는 수많은 관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연회에 참석할 때에도 새로 장만한 외투를 입고 나타나 그동안 하급 관리라는 직함 때문에 드러나지 못했던 자신의 존재감을 마음껏 뽐내었다.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아까끼에게는 새 외투를 입고 있는 순간이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까끼의 행복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회에 참석하고 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강도에게 새 외투를 도둑맞게 되었다. 그는 거리에 보초를 서고 있는 경찰들 심지어 상급 관리까지 찾아가 외투를 도둑맞은 자신의 사연을 알렸다. 하지만 이들은 외투 한 벌을 도둑맞은 하급 관리의 사연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신의 슬픈 사연이 외면당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아까끼는 그 충격으로 심한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러시아 특유의 겨울 날씨를 이겨내지 못한 채 외투를 찾고 싶어했던 아까끼는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이후 뻬쩨르부르그에는 자신의 외투를 찾아 달라고 호소하는 유령이 떠돌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외투를 찾지 못한 채 주위의 조롱 속에서 죽어 간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였다. 

 

    

 왕의 남자였다가 하루아침에 유배객이 된 조선의 관리  

 

  

다산 정약용 (1762~1836) 

 

1762년, 명망 있는 벼슬 집안에서 태어난 다산 정약용은 어릴 적부터 영특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4세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세에 한시를 짓기 시작했다. 다산은 한창 젋은 20세부터 본격적으로 입신(入身)의 생활을 하기 시작했는데 28세의 나이에 벼슬에 올라 자신의 재능을 유감없이 펼쳤다. 거기에다가 그 당시 임금이었던 정조에게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관료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정조의 지극한 총애 덕분에 정약용은 대왕의 최측근 관료로서 승승장구하였다. 

그러나 관리로서의 부귀영화는 한순간에 바닷가의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정조가 승하하고 난 후에 터진 천주교를 박해한 신유사화(辛酉士禍)에 연루되면서 천주교도인이 많았던 정약용 가문은 한순간에 풍비박산나게 되었다. 다행히도 다산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이 때부터 기나긴 유배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라남도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이 무려 18년 동안이나 이어질 줄은 다산 본인은 예감하고 있었을까? 한순간에 부귀영화를 잃어버린 그에게는 강진에서의 유배생활은 무척 고통스럽고 보고 싶은 가족을 만날 수가 없었던 외로운 시기였지만 후세 학자들에게는 실학 사상이 완성될 수 있었던 다양한 분야의 학문이 다산(多産)할 수 있었던 위대한 시기였다.  

 

 

 조선의 관리가 러시아의 관리에게 해줄 수 있는 충언   

다산은 유배 생활을 지내는 동안 퇴계 이 의 글이 실린 <퇴계집>을 읽으면서 얻게 된 느낌을 단상으로 하루에 한 편씩 기록하였다. 기록의 결과물은 지금의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이라는 이름의 저작으로 남게 되었다. 말 그대로 <퇴계집>을 읽으면서 느낀 맑은 생각들을 기록한, 다산 본인을 위한 개인적인 문집인 것이다. 

책 제목의 '청상(淸賞)'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산의 맑은 생각들은 현대인들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삶의 자세 전반에 대한 성찰과 충고를 담고 있다. 다산의 <도산사숙록>에는 인생의 대선배로써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의 체험에서 깨닫거나 성찰 뒤에 얻게 된 마음가짐을 엿볼 수 있다. 

책에 수록된 몇 몇 단상들 중에는 고골의 소설에 등장하는 하급 관리 아까끼 아까끼예비치에게도 충언을 해봄직할만한 내용이 있다. 비록 태어난 곳과 사용하고 있는 언어는 다르지만 관료 경험을 따져본다면 다산이 훨씬 선배격인 셈이다. 그리고 다산은 대왕의 총애를 듬뿍 받을 정도로 고급 관리로써 화려한 명예를 누려 본 적도 있다. 말단 하급 관리로 지낸 아까끼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경력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도산사숙록>에서의 다산의 모습은 과거의 부귀영화를 회상하여 자랑을 한다거나 그 때의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고 있다. 화려했던 관리로써의 부귀영화 시절은 다산의 인생에서는 그저 지나가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기나긴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다산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 한 때 누리고자 했던 부와 명예는 한순간의 욕심일 뿐이며 자신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지는 순간 자신에게 굽실거렸던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지는 것을 다산은 보고, 느꼈던 것이다.  

'밤 한 톨'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단상에서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대상이 상실된 후 겪게 되는 인간의 상반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밤 한 톨을 도둑맞은 어린아이의 심정은 외투를 도둑맞은 아까끼와 비슷한데다가 부와 명예에 대한 욕망과 집착으로 점칠된 속세에 달관하는 경지에 이른 다산의 고고한 태도가 한층 더 부각되고 있다.  

 

우연히 한 어린아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울부짖으며 참새처럼 수도 없이 팔짝팔짝 뛰는 것을 보았다. (중략) 하도 참혹하고 절박해서 얼마 못 가 곧 죽을 것만 같았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봤더니, 나무 밑에서 밤 한 톨을 주웠는데 다른 사람이 그걸 빼앗아갔다는 것이었다. 아아! 천하에 이 아이가 우는 것처럼 울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저 벼슬을 잃고 세력이 꺾인 자나, 재물을 손해보고 돈을 다 써버린 자, 그리고 자식을 잃고 슬퍼 실성할 지경이 된 사람도 달관한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모두 밤 한 톨의 종류일 뿐이다.   

("두 아들에게 보여주는 가계" 중에서, pp 30)

  

다산은 한 때 한 순간의 사건으로 인해 물거품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린 벼슬의 명예에 대해 크게 절망했던 순간이 있었다. 자신의 인생을 든든하게 지원할 줄 알았던 정조 대왕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대한 슬픔을 시로 표현할 정도로 유배 생활의 시작은 다산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였고 고난의 시작이었다. 하지만 유배 생활을 지내면서 중년의 다산은 젊은 시절, 과거에 집착했고 상실된 명예로 가득한 부귀영화가 인생에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 다른 단상에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한 인생의 과정 속에 느낄 수 있는 고락(苦樂)에 대처할 줄 알아야 한다고 적고 있다.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온다.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다.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온다. 즐거움은 괴로움의 씨앗이다. 괴로움과 즐거움이 서로를 낳는 것은 동정(동정)이나 음양(음양)이 서로 뿌리가 되는 것과 같다. 통달한 사람은 그러한 까닭을 알아 깃들어 숨어 있는 것을 살피고 성하고 쇠하는 이치를 헤아려, 내 마음이 상황에 응하는 것을 항상 뭇사람들이 하는 것과 반대로 한다. 그런 까닭에 두 가지가 그 취향을 나누고 기세를 죽인다. 

([고락에 대처하는 방법] "우후 이중협을 증별하는 시첩의 서문' 중에서, pp 50) 

  

樂生於苦, 苦者樂之根也. 苦生於樂, 樂者苦之種也.
   

 

즐거움은 괴로움에서 나오며 괴로움은 즐거움의 뿌리이다. 그리고 괴로움은 즐거움에서 나오며 즐거움은 반대로 괴로움의 뿌리이다. 다산이 말하고 있는 역설적인 문장은 우리 삶에 마주치며 반복되고 있는 화복(禍福)의 순리를 표현하고 있다. 동시에 화복의 순리 앞에 마주친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외투 한 벌에 웃고 울어야 했던 러시아 하급 관리 아까끼다. 외투 한 벌로 인해 고락의 감정을 한꺼번에 느껴야했던 아까끼는 화복의 순리를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화복의 순리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탓에 자신 스스로 몸과 정신을 파괴하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성을 지닌 동물이라고 하는 인간이라도 어떠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면 어린아이 수준의 단순한 감정을 지니는 경우가 있다. 즐거움을 오랫동안 누리다보면 괴로움이 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고 즐거움을 오랫동안 누리고 싶은 기대와 열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마는 욕심 그리고 집착으로 변질된다. 반대로 하늘이 무너질듯한 절망을 느끼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괴로움의 나락 속으로 빠진다. 괴로움이라는 늪에 깊숙하게 빠진 이상 정신을 옥죄게 만드는 이 위험천만한 마음에서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다.   

관리 그리고 인생의 대선배인 다산이 병들어 죽어가는 러시아 하급 관리 아까끼에게 자신이 터득한 삶의 지혜를 알려줬다면 아까끼는 유령이 되면서까지 외투에 집착하는 기이한 상황이 연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지키는 집" , 수오재(守吾齋) 

다산은 유배생활을 통해서 실학 사상을 집대성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을 반추함으로써 그 경험으로부터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달아 자신의 남은 여생을 통해 삶의 지혜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수신'(修身)이라 함은 '자신의 몸을 지킨다'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수신의 자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학문 수양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리고 석가모니, 예수와 같은 성인의 경지에 오르지 않는 이상 다양한 삶의 변화 속에서 변하기 쉬운 인간의 유동적인 마음이 한결같이 유지된다는 것도 쉽지가 않다. 

그러나 다산은 '나'(自)라는 존재를 온전히 유지하여 스스로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한 다산의 태도는 '수오재기'(守吾齋記)라는 유명한 수필에서 알 수 있다.  정민 교수가 편집한 <다산청상어록>에서는 '수오재'라는 명칭을 통해 다산이 스스로 깨닫아 독백하는 장면이 있는 일부 내용만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전체적인 내용을 볼 수는 없지만 이 부분만으로도 다산이 후세의 사람들에게 말하고자하는 메시지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무릇 천하의 사물은 모두 지킬 것이 없다. 오직 나만은 마땅히 지켜야 한다. (중략) 오직 이른바 '나'라는 것은 그 성질이 달아나기를 잘하고, 들고 나는 것은 일정치가 않다. 비록 가까기에 꼭 붙어 있어서 마치 서로 등지지 못할 것 같지만, 잠깐만 살피지 않으면 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록(利祿)으로 꼬이면 가버리고, 위협과 재앙으로 으르면 가버린다. (중략) 한번 가기만 하면 돌아올 줄 모르고, 붙들어도 끌고 올 수가 없다. 그래서 천하에 잃기 쉬운 것에 '나'만 한 것이 없다. 마땅히 꽁꽁 묶고 잡아매고 문 잠그고 자물쇠로 채워서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나를 지켜라] "수오재기" 중에서, pp 43)

 

내용만 봐서는 다산이 직접 '수오재'라는 명칭을 붙인 걸로 이해하기 쉽지만 책에서 생략된 내용에 보면 알 수 있듯이 다산의 맏형인 정약전이 자신의 집에 붙인 것이다. 다산은 처음에는 형이 만들어낸 집의 명칭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수오재'라는 의미에 대해서 형을 통해 알게 되고 난 뒤, 다산의 마음가짐은 달라졌다. 그는 유배 생활 이후, 자신의 지난 부귀영화의 삶이 허망했음을 깨닫고, '나'를 둘러싸고 있는 현상적 자아에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본질적 자아인 '나'를 지켜야 한다는 깨달음에 도달한 것이다. 본질적 자아, 즉 내면적 자아를 유지할 때 비로소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거나 유혹당하지 않게 된다.  

형은 자신의 집에 스스로 명칭을 붙여 자신을 지키고자 했고, 그 동생은 그러한 마음의 수양을 기(記)를 통해서 삶을 성찰할 수 있는 저본으로 삼고자 했다.  이런 자세야말로 바로 지식과 행동이 서로 일치된다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인 것이다.

오늘날처럼 복잡하면서도 하룻밤 자고나면 쉽게 변화되는 이 세상 속에서 '성찰', '수신', '청상'이라는 단어는 고리타분한 고어에 불과하며 그런 일상에 쫓기듯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는 실천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책에는 다산이 학문적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공부 방법과 수많은 저작을 펴낼 수 있었던 비법, 공부의 기본 자세,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지에서부터 거처의 규모와 생활의 법도, 재산 증식과 경제활동에 이르기까지 다산이 들려주는 삶의 성찰과 충고를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비록 유배에 묶인 몸이지만 그가 쓴 맑은 글 속에는 여전히 세태를 꿰뚫어보는 지성과 함께 묻어나는 '인생의 대스승'으로서 살가운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높은 관리에서 하루아침에 유배객이 된 다산은 자신의 처지에 좌절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해 5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어마어마한 책의 권수로 남겨진 학문적 업적만으로 다산 정약용의 업적을 평가하기에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그는 학자이기 전에 민의(民意)를 먼저 생각했던 관리였다.실용에 맞지 않으면 임금 앞에서도 승복하지 않았고, 진리를 위해서라면 주자(朱子)와도 맞섰으며, 처절한 불행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았던 다산에게서 다시금 삶의 혜안(慧眼)을 구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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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1-11-27 2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천하에 잃기 쉬운 것에 '나'만한 것이 없다.」

요즘 읽는 책마다 그 속에 '내'가 있어서
'거 참, 여기 저기 나를 많이도 흘리고 다녔구나.'
싶던 차에 저 말을 읽으니, 참,
아픕니다.

cyrus 2011-11-29 12:26   좋아요 0 | URL
ㅎㅎ 저도요. 저는 어제 학교 수업 시간에 이고그램 평가를
해봤는데요.. '나'라는 존재를 잃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본인 스스로 자신의 본질적 모습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하더군요,
다산 선생의 짧은 말씀이 한 쪽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

yamoo 2011-11-27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민 샘 책이 눈에 들어오네요~ 정민 샘 글 좋지요~^^

다산이 지은 책이 500권이 넘는답니다! 후와~~ㅎㅎ

cyrus 2011-11-29 12:27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이 분이 쓰신 글을 좋아하면 즐겨 읽는 편입니다.
가끔씩 생각나면 다시 읽기도 합니다. ^^

아이리시스 2011-11-29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와- 500권. 저는 어젯밤부터 <흑산> 읽는 중인데 정약용 형제의 삶은 매번 읽어도 매번 대단해요. 얼마나 잘 까먹는지 읽을 때마다 새롭고..^^

cyrus 2011-11-30 23:47   좋아요 0 | URL
최근에 나온 김훈의 신작이 정약용과 관련된 이야기였군요,
저도 꼭 읽어봐야겠는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