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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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가 빠진 동그라미 같은 불구자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자신의 반쪽을 찾아 끊임없이 벌판을 방황한다. 그 벌판은 근대자본주의로 인해 황폐해진 불모지다. 동그라미는 그런 삭막한 곳에서 자신의 반쪽인 타자를 찾아 온전한 존재가 되고자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반쪽을 찾지 못하는 한 동그라미는 영원한 불구자일 수밖에 없다. 잃어버린 타자를 찾아 나서는 고독한 방랑자, 그 사람이 작가이다.

 

소설은 잃어버린 타자를 되찾고 타자와의 합일을 이뤄내고자 하지만, 당연히 그러한 지향은 실패한다. 그러나 실패할 줄 알면서도 그 세계를 강렬하게 지향한다. 그래서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이 얼마나 황폐한가를 깨달을 수 있게 한다.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것에 가치를 두어야 하고, 어떠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가를 뼈저리게 깨우쳐 주는 것, 그것이 소설의 장점이다.

 

도무지 줄거리가 중요치 않은 소설이 있다. 현실과 환상의 이음매 따위도 중요치 않은 소설. 그저 선연한 문장만이 어느 삶의 자락을 묵묵히 응시하고 묘사해 이야기의 맥을 겨우 이어가는 소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막연한 이미지들은 오히려 선명한 인상으로 각인된다. 바로 한강의 소설이 그러하다. 한강은 새로운 상상력과 형식, 너무나 신선해 독자를 아연하게 만드는 독특한 언어를 펼쳤다. 문체가 곧 소설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몇 되지 않는 소설가 중에 그녀가 있다. 남성작가들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또 하나의 세계로 독자들을 데리고 간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할 점. 한강은 늘 고통받는 인물을 다룬다. 《희랍어 시간》에 말을 잃어버린 여자와 빛을 잃은 남자가 있다. 여자는 열일곱 살에 원인도 없이 갑자기 말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여자는 이혼한 남편에게 아이를 빼앗기고 ‘말’을 찾기 위해 희랍어를 배운다. 그녀에게 희랍어를 가르쳐주는 남자는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유전병을 가졌다. 두 사람은 《검은 사슴》이나 《내 여자의 열매》, 《채식주의자》까지 기존에 발표했던 소설 속 주인공처럼 상처에 민감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다. 그로 인해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서늘함은 사실 상처에 기반을 두고 있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은밀한 트라우마를 작가는 뛰어난 상상력과 탁월한 묘사를 통해서 독자들 앞에 펼쳐 보인다. 그들은 분열될 수밖에 없는 자질을 지녔고 여러 운명적 불행과 고난을 만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굴하지 않는다.

 

한강은 ‘모험을 통한 타자 찾기’에 충실한 작가이다. 그녀의 모험은 현실사회 모순의 해부보다는 그 현실사회에서 불구자로 전락한 인간의 보편적인 존재 조건 탐색에 초점을 맞춘다.

 

 

수천 개의 바늘로 짠 옷처럼 그녀를 가두며 찌르던 언어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녀는 분명히 두 귀로 언어를 들었지만, 두텁고 빽빽한 공기층 같은 침묵이 달팽이관과 두뇌 사이의 어딘가를 틀어막아주었다. 발음을 위해 쓰였던 혀와 입술, 단단히 연필을 쥔 손의 기억 역시 그 먹먹한 침묵에 싸여 더 이상 만져지지 않았다. 더 이상 그녀는 언어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어 없이 움직였고 언어 없이 이해했다. (15쪽) 

 

 

내가, 눈이 완전히 먼다 해도 지혜를 얻지 못할 사람이라는 걸 너는 알지. 마음의 눈 따위가 결코 떠지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혼란스러운 수많은 기억들, 예민한 감정들 속에서 길을 잃고 말거라는 걸. 타고난 그 어리석음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걸. 무엇을 기다리는지 모르면서, 다만 끈질기게. 하지만 믿을 수 있겠니. 매일 밤 내가 절망하지 않은 채 불을 끈다는 걸. 동이 트기 전에 새로 눈을 떠야 하니까. (83쪽)

 

 

남자와 여자는 급작스러운 변화 속에서 아직 또렷한 표현 수단을 체화하지 못한 반쪽 사람들이다. 인물들은 감각과 표현수단을 잃어버림으로써, 타인과의 소통은 물론 자기 생각마저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이 고통에 몸부림치다 완전히 달라진 내면을 갖게 된다. 하지만 언어를 사용하고, 눈으로 사물을 인식하는 가장 기본적인 삶의 행위조차도 깡그리 부정하고 난 뒤에서야 비로소 인간존재의 진정한 의미를 힘겹게 터득해 나간다. 어느 벼랑이나 심연의 끝에서 꿋꿋이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남녀는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말을 할 수 없는 여자는 남자에게 다가와 손가락으로 잃어버린 언어를 적는다. 고독과 고통을 칭칭 몸에 휘감고 살아가는 여자는 남자의 살갗에서 세상을 만난다. 두 남녀가 마침내 한 공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에 고요한 절정을 이룬다. 그들 마음속 빈자리에 ‘타자’를 향한 존재의 갈망이 채워진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정말이지 ‘아픔이 성숙으로 빛나는 것이란 저런 것이구나’라고 절감했다.

 

생명체는 자기표현으로 존재를 증명한다. 억압된 감정에 대한 자기표현의 욕망, 즉 말하기의 욕망을 분출하는 것이 문학의 출발이다. 누구에게나 있는 무엇인가 결핍된 욕망, 상처, 고통 등 말로 할 수 없는 걸 쓰는 것이다. 말이 침묵하는 곳에서 쓰기가 시작된다. 문학적 표현 방법이 곧 삶의 방식이고 사고의 방식이다. 문학은 상실과 절망을 언어적으로 처리하는 과정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 한강의 문학은 억지로 극적인 희망과 화해를 말하기보다는 그저 혼자 간절하게 빛과 회복을 더듬어본다. 별다른 설명 없이도 미약하지만 분명하게 삶에 대한 의지가 스미는 순간을 포착한다.

 

《희랍어 시간》은 궁극적으로 인간 존재에게 결여된 빈 공간이자 잃어버린 타자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작품이다. 소설 속 남녀처럼 우리도 잃어버린 타자를 찾기 위해 모험하는 중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인물들이 서로의 고통을 마주 보기. 그다음, 상처를 보듬어주는 소통의 접촉. 비록 허황한 몸짓이 될지라도 버거운 삶을 버텨내기 위한 시도는 더욱 값진 의미가 있다. 천형처럼 고통의 운명을 짊어지고 소통을 시도하려는 인간이 더욱 고귀해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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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ra 2016-06-23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고선 희랍어를 배우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cyrus 2016-06-24 17:00   좋아요 0 | URL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를 읽고, 그리스에 가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루쉰P 2016-06-24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루스님은 문학평론가 하셔도 되겠어요. 아 읽으면서 이해가 쏙쏙되네요 ㅎ 요전에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사서 읽었어요. 뒤에 해설이 나오는 데 제 개인적인 이해력의 한계이지만 뭔 소리인지 전혀 이해를 못 했어요 @.@

게다가 소설은 너무나 무겁고 으시시시해서 다 읽기는 했지만 어떤 감상을 쓰지를 못 하겠더군요. 근데 시루스님의 말처럼 강렬하다는 것, 선명하게 남는 다는 것 그건 있어요. 한강의 문장들이 장면으로 연상되어서 강한 불쾌감을 주더군요. 새를 물어뜯고 반나체로 있던 여인의 모습이나, 꽃그림을 그리고 붕가붕가 하던 그 커플이나, 앰블러스에서 너 미친거지라고 외치던 그 장면이나...글을 정말 잘 쓰는 것 같아요.

취향이겠죠? 저에게는 정말 안 맞는 작가구나란 생각을 했어요. 그러고 보면 뉴스 사회면을 보면 소설보다 더 기가 막힌 일들이 나오고, 그런 것을 경악하면서 보는데 왜 소설은 그걸 제가 인정치 않은 것일까요? 그런 의문이 들더군요...

뭐이리 주저리 ㅋㅋㅋ 썼지.

정말 글 좋습니다. ㅎ 감탄하고 가요 ㅎ

cyrus 2016-06-24 17:05   좋아요 0 | URL
이번에 나온 한강의 <흰>을 읽었는데, 처음에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몇 번 더 읽으니까 이 책에서 말하는 ‘흰 것’의 의미가 뭔지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채식주의자>는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그로테스크한 장면을 좋아해요.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개인의 취향을 존중합니다. ㅎㅎㅎ

alummii 2016-06-25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읽고싶네요!ㅎㅎ

cyrus 2016-06-25 16:01   좋아요 0 | URL
줄거리가 쪼금 난해할 수도 있습니다. ^^;;
 
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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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정말 싫어.”, “싫으면 시집가.” 어릴 때 친구들과 놀 때, ‘싫다’라고 말하면 그 말에 붙여 ‘싫으면 시집가’라고 대꾸하던 기억이 있다. 옛날 여자가 시집살이를 시작하면 처가에 자주 들릴 수 없게 된다. 부모님들은 딸에게 장난으로 말한다. 이 집구석 싫으면 얼른 좋은 사람 만나서 시집이나 가라고. 그러면 부모님은 딸 속 썩이고, 반항하는 행동을 못 볼 테니까. 장난 같은 말이지만 여기에 혼기에 찬 딸을 염려하는 부모님의 진심이 숨어 있다.

 

혼자 살기도 벅차서 연애하기도 힘든 청춘이 늘고 있다. 그들 앞에 이런 말장난을 쉽게 하지 못한다. 당사자의 부아를 돋을 수 있다. 좋은 사람 만나 시집가고 싶어도 시집가기 위한 경제적 형편이 마땅치 않다. 얼마 전까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삼포 세대. 그리고 내 집 마련, 인간관계를 포기하는 오포 세대. 꿈과 희망마저 포기하는 칠포 세대까지 나왔다. ‘n포 세대’도 있다. 아예 모든 걸 포기하는 세대이다. 열심히 일해서 다 되는 건 아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평균적으로 산다는 게 힘든 현실이다. 잘 나가는 기성세대들은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쉽게 말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아픔을 겪은 만큼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청춘의 불만은 ‘헬조선’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사회가 팍팍할수록 그 사회의 모순을 예리하게 묘사한 소설, 드라마, 영화 등이 인기를 얻는다. 그것들을 많이 찾는 사람 대부분은 팍팍한 사회 속에서 고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윤태호의 웹툰 《미생》의 주인공 장그래를 통해 미생도 되지 못한 청춘들은 노동시장으로 내던져진 청년층의 고단한 처지에 공감했다. 고졸 출신이 대기업 비정규직으로 입사해 멋지게 성장하는 이야기가 어느 영웅담 못지않은 카타르시스를 주는 이유도 그만큼 현실에서 실현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장강명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소설 《한국이 싫어서》의 제목만 보고 카타르시스를 느낀 독자가 많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이 카타르시스만 주는 작품으로 기억되지 않기를 바란다. 이 소설로 돈, 학벌, 취업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사는 한국인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 만족해선 안 되고, 행복한 인생을 위한 해답을 찾아서도 안 된다. 기자 출신 작가는 실제로 호주 시민권을 취득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20대 후반 여주인공 계나의 삶을 구성했다. 그렇지만 계나처럼 ‘이민’이 자신만의 행복을 찾을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다면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다.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을’이 아니라 ‘어떻게’ 쪽이야.” (152쪽) 계나가 말하는 ‘어떻게’를 독자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어떻게 하면 호주 이민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한 독자가 있을 거고, 계나처럼 어떻게 자존심을 지키면서 행복하게 사는지 고민하는 독자도 있다. 이 책으로 ‘어떻게’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찾으려고 한다면 오산이다. 현재의 기쁨을 만족하는 ‘현금흐름성 행복’, 아니면 미래를 위해 차곡차곡 준비하는 ‘자산성 행복’을 위해 살아갈지 고민해야 한다.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 속에 사회에 대한 불만을 하나씩 품고 산다. 우리는 ‘헬조선’의 쳇바퀴에 벗어나지 못한다고 불만을 늘어놓지만, 지금 어디서 누군가는 비정규직 신세에 벗어나지 못해 이 쳇바퀴에 오를 자격이 못 된 채 살기도 한다. 《한국이 싫어서》의 계나는 현실과 판타지의 경계선에 있는 중간 지점에 있는 인물이다. 그녀처럼 돈이라도 있으면 행복에 대해 고민할 시간이라도 있지, 아예 없으면 행복을 위한 도피를 꿈꿀 수조차 없다. 이 소설의 해피엔드는 팍팍한 사회에 지친 독자들을 위한 판타지적 선물처럼 느껴진다. 한국이 싫은데 이 불만을 어떻게 참고 살아야 할까. 뭐라도 손에 쥐면서 이게 뭘까 저게 뭘까 고민이라는 걸 하고 싶다. 이런 답답한 현실 앞에 대고 ‘싫으면 시집가’라는 농담도 할 수 없으니, 참. ‘한국이 싫으면, 시집가!’, 이 한 마디 농담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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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20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0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안녕반짝 2015-09-20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넉넉하게 10장 안되게 했는데 분량제안이 있으니 뭔가 할 말을 다 못해서 글이 이상해져 버리더라고요 ㅜㅜ 참여에만 의의를
두자 하고 그냥 올렸어요! 이 책은 재밌나요? <그믐,>은 뭐랄까 문학상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cyrus 2015-09-20 21:42   좋아요 1 | URL
네, 저도요. ㅎㅎㅎ 《한국이 싫어서》에 대해서 쓴소리 더 하고 싶었는데 분량 제한 때문에 더 쓰지 못했어요. 주인공이 고생해서 결국에 행복한 결말이 이르는 이야기가 재미있긴 한데, 사회에 대한 주인공의 불만이 공감되어서 재미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어요. 그래도 《표백》보다는 어두운 분위기가 덜해서 좋았어요. 《그믐》의 서평을 몇 편 읽어봤는데 내용이 조금 어려울 것 같아요.

2015-09-20 21: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5-09-20 21:52   좋아요 1 | URL
저는 평소에 한국소설을 즐겨 읽지 않는 편인데 적립금 욕심 때문에 책을 읽고 글을 썼어요. 한국 시도 마찬가지에요. 시가 관념적일수록 독자는 자꾸 거기서 해석하려고 해요. 마치 수능시험 지문으로 나온 시를 분해하듯이 해석하는 것처럼요. 이래서 사람들이 시를 지루하고 어려운 글로 생각해요.

보물선 2015-09-20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랑 별점이 같으십니다 ㅎㅎ

cyrus 2015-09-20 21:53   좋아요 1 | URL
제가 별점은 짜게 줍니다. ㅎㅎㅎ

2015-09-20 2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1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0 23: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1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9-21 2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ㄱㅈㅆㅇ 2015-09-21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런 개저씨스러운 농담을 들으면 한 대 치고 싶을 것 같군요.

cyrus 2015-09-21 17:37   좋아요 0 | URL
제 글 어느 부분에 불만을 느끼시는지 모르겠지만, 제 글을 비판하고 싶으면 회원 로그인으로 접속하셔서 좀 더 확실하게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비속어, 모욕적인 단어를 쓰지 않는 비판이라면 받아들입니다. 이런 님의 아리송한 내용의 댓글을 보면 지우고 싶군요.

맥거핀 2015-09-21 1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여러모로 아무리 봐도 계나보다는 제가 더 한국을 싫어하는 것 같은데, 저는 이렇게 아등바등 한국에 껌딱지처럼 붙어있군요. 안 떨어지려고 애쓰면서..

AgalmA 2015-09-21 11:47   좋아요 0 | URL
어학 연수도 거부했던 me too;;

cyrus 2015-09-21 17:39   좋아요 0 | URL
저도 그래요. 대한민국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그나저나 아갈마님은 무슨 이유로 어학연수를 거부했는지 급궁금합니다.

AgalmA 2015-09-21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학연수 보내주겠다는 나라가 싫어서ㅎ; 지나고나니 호강을 발로 찬 멍청이가 된!

cyrus 2015-09-21 18:38   좋아요 0 | URL
아이고, 이런... 웃을 수가 없군요.

북다이제스터 2015-09-21 20:24   좋아요 0 | URL
ㅠㅠ

북다이제스터 2015-09-21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못 읽어보고 저자 인터뷰만 들었는데요... 저자 의도는 이민이 아니고 남아서 뭘 할것인지 반감을 느끼도록 일부러 이렇게 썼다고 하더라구요. 정말 그런 느낌 드는 책인가요?

cyrus 2015-09-22 18:15   좋아요 0 | URL
제 생각으로는 작가의 의도가 반은 실패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한국이 싫어서> 서평을 몇 편 봤는데, 정말 이민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고, 대부분은 사회에 대한 반감만 확인하는 경우에 그치는 감상이었어요. 사회의 문제점을 자세하게 써서 좋긴 한데, 작가의 의도가 독자에게 제대로 어필했는지 의문입니다.

마키아벨리 2015-09-21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장님 유머로 받자면)시집이나 가라고 자꾸 그러셔서 여자들이 CGV에 많다는...

cyrus 2015-09-22 18:16   좋아요 0 | URL
이 글의 베스트 댓글로 선정하고 싶습니다. ㅎㅎㅎ
 
소년이 온다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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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랄한 폭력은 기억까지 깨부수지는 못한다.
광주는 요구이고
거절이고
회생이다.
하나로 합쳐진 복합적인 의미를
그 어떤 힘이 으스러뜨린다는 것인가.

 

(김시종 「입 다문 말 - 박관현에게」 중에서, 《광주 시편》 42쪽)

 


1980년 5월 18일, 하루 동안 그야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변칙적인 야만적 폭력이 급조되었다. 광주항쟁. 5월 광주에 관한 이야기가 그만큼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1980년의 기록들은 이제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기에 제목만 듣고도 무슨 내용일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활자를 통해 전이되는 광주의 역사에 익숙해질수록 사람들은 떳떳하게 고개를 들지 못한다. 여전히 무자비하게 살해된 광주 시민들이 길바닥에 널브러진 흑백사진 앞에서 고개를 돌리고, 기억에서 지워버리려고 한다. 그것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갖는 거리감과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그들이 힘겹게 싸우고 상처받는 투쟁의 길을 그저 눈으로만 바라보고 분노할 수 있어도 그 고통을 고스란히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역사의 잔인한 부조리에 대해 여린 가슴만 치는 나약한 감상주의자가 될 우려가 있다. 역사를 책이 아닌 왜곡된 정보로 가득한 인터넷으로만 배우는 청소년이라면 광주항쟁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봤거나 책을 읽었더라면 이렇게 쓸 것이다. ‘80년대의 암울한 독재 정권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한다.’ 역사의 감상하는 태도는 최악의 역사관을 형성하기도 한다. 광주항쟁을 북한이 개입된 날조된 사건이라든가 신군부의 위대한 업적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이들은 광주의 아픈 속살을 들여다본 적이 없다. 

 

광주라는 거대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기 위해선 광주 희생의 슬픈 바닥 얘기에서 재출발해야 한다.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강제로 봉인된 억울한 호소를 역사로부터 외면된 채 잊힌 영혼의 목소리로 되살린다. 열여섯 살의 나이에 희생된 어린 영혼은 극한의 폭력에 유린당한 인간이 죽어서도 어떻게 짓밟히며 은폐되는 과정을 담담하게 전달한다. 

 

그들이 다가왔어. 얼룩덜룩한 군복에 철모를 쓰고, 팔엔 적십자 완장을 차고서 빠르게. 그들은 2인 1조로 우리들의 몸을 들어올려 군용 트럭에 던져넣기 시작했어. 이상하게도 나는 혼자였어. 그러니까 혼들은 만날 수 없는 거였어. 지척에 혼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린 서로를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었어. 저세상에서 만나자는 말 따윈 의미없는 거였어. (46~47쪽)

 

지금까지 알려진 광주의 이야기와 기록된 역사는 피해자의 진실을 서둘러 봉합하려는 침묵의 합의에 불과하다. 그것은 반쪽짜리 명복이다. 소년 동호는 가슴 아픈 역설적인 상황을 포착한다. 추도식에서 애국가를 부르고,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유족들의 모습을 본 동호는 나라라고 부를 수 없는 잔인한 행동을 한 국가의 상징물이 개입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장면은 강압적인 권력 앞에 무너진 광주의 비감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원통한 죽음이 가려져 있다면
대지는 이제 조국이 아니다.

 

(김시종 「명복을 빌지 말라」 중에서, 《광주 시편》 52쪽)

 

광주 시민들의 원통한 죽음은 나라라고 부를 수 없는 대지의 기(旗)에 가려지고 말았다. 학살에 가담한 자는 십 년 뒤에 기득권이 되어 희생자들을 태극기가 펄럭이는 망월동 묘역에 봉인했다. 이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진실로 영원히 규명하지 못했다. 죽은 자는 영원히 말이 없고, 가해자 집단은 상투를 든 기득권자가 되어 스스로 면죄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눈을 감을 수 없는 죽음은
떠돌고 있어야 위협이 된다.
움푹 팬 눈구멍에 둥지를 튼 원한
원귀가 되어 나라를 넘치라.
기억되는 기억이 있는 한
뒤집을 수 없는 반증은 깊은 기억 속의 것.
감을 수 없는 사자(死者)의 죽음이다.
땅에 묻지 마라.
사람들아,
명복을 빌지 마라.

 

(김시종 「명복을 빌지 말라」 중에서, 《광주 시편》 52쪽)

 

 

군인들에 의해 버려진 광주 희생자들의 증언은 ‘눈을 감을 수 없는 죽음’이다. 한강은 눈을 감지 못한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무덤 밖으로 꺼낸다. 왜 하필 광주의 생존자가 아닌 희생자들을 이야기에 등장시킨 것일까. 이것은 억울하게 땅속에 묻힌 잊힌 광주의 기억을 복원하는 문학적 작업이다. 만약에 작가가 《소년이 온다》를 애초에 생존자들이 겪은 질곡의 시간을 기록하고 묘사했다면 독자는 실질적인 고통의 연대감을 형성하지 못할 것이다. 세월의 바람에 훅 날아가기 쉬운 공허한 문자로 된 명복의 문장만 읊조릴 뿐이다. 독자는 사진과 문자 그리고 생존자의 구술로 재구성된 광주의 역사에 너무나도 익숙하다. 생존자들이 광주의 상황을 묘사하는 서사에 이제 독자는 분노하지 않는다. 그저 역사교과서에 실리는 하나의 사건으로만 바라볼 뿐이다. 그러므로 《소년이 온다》의 구성 방식은 이전에 나온 광주를 소재로 한 문학작품을 뛰어넘는다. 이 소설은 단순히 광주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문장 덩어리가 아니다.

 

《소년이 온다》의 키워드는 ‘상처 입은 시간’이다. 열흘 동안 진행되는 이야기는 역사교과서에 볼 수 없다. 인간의 잔혹함이 어디에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섬뜩하게 증언한다. 차마 이 자리에 옮길 수 없는 그 참혹한 고문들을 통해 많은 사람이 육체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파멸했다. 조금 전까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도청을 지키던 동료가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모습은 살아남은 자들의 기억 속에 아로새겨졌다. 피비린내 감도는 폭압 속에 외부와 단절된 고립무원 광주의 시간은 그렇게 멈추고 말았다. 상흔으로 남은 기억은 원고지 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문장이 되어 한 편의 문학으로 변주한다. 한강은 평생 지워지지 않을 정신의 상처, 혹은 살의까지 가 닿는 증오를 다독이기 위해 원고지를 채우기 시작한다. 

 

기억의 창고에는 축적된 고통과 행복의 기억, 나이를 먹어도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망각되지 않는 기억이 쌓여 있다. 감성이 차갑거나 슬퍼질 때 그 기억은 소리 소문 없이 일상에 파고들어 나지막이 속삭인다. 기억 저편에서 잠들기만 원했던 감정들이 선명하게 수면 위로 떠오르면 우리는 하는 수 없이 그 순간들을 마주해야 한다. 그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잊을 수 없을 만큼 힘들고 아프다.

 

한강은 왜 고통스러운 글쓰기를 감행했을까. 그녀가 광주의 상처 입은 시간을 다시 불러온 것은 단지 “권력에 대한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이다”는 밀란 쿤데라의 잠언을 소설로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다. 나아가 5월 광주를 ‘독자가 죽은 자의 그림자 속으로 뛰어드는 봉합의 세계’로 확장한다. 독자는 폭력에 무너지는 광주의 정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소년이 온다》앞에서 무자비한 폭력의 참상을 더 이상 침묵할 수 없다. 독자가 소설에서 보는 것은 죽음에 에워싸인 인간의 실존적 공포다. 총과 칼로 정당한 외침을 짓이기는 군인 앞에 내 가족과 이웃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당연한 투쟁은 역사의 의미를 따지기 이전에 절박했던 인간의 몸부림이다. 우리는 묘역에 말없이 잠들어 있는 그들 영혼의 슬프고도 생생한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했다. 그 목소리를 귀기울이고 이승으로 소환한 사람은 바로 한강이다.

 

상처 입은 시간은 기억하는 사람의 몫이라고도 하지만 모두가 기억할 때 그 고통은 용서와 화해로 치유될 수 있다. 한(恨)과 외면으로는 안 된다. 그날을 기억하고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상처는 들쑤셔서도 안 되겠지만 눈 돌린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과연 광주항쟁의 희생자들을 제대로 명복을 빌었는지 반성해야 한다. 세월이 지날수록 땅에 묻힌 광주의 진실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땅에 묻히지 않은 광주의 기억은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광주를 잊는 것은 인간의 존엄을 망각하는 것이 된다. 기억을 온전히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공허한 명복은 거부한다. 차라리 명복을 빌지 말라. 광주를 기억하는 것이 깨달음과 행동이 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워도 일종의 성역처럼 된 광주의 상흔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가장 악랄하고 잔인했던 국가 폭력 집단의 후예들이 얼마 남지 않은 광주의 기억을 깨부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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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5-02-06 0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는 광주를 생각하면 윗선만 생각했어요. 그런데, 요즘은 직접적인 이득을 챙긴 윗선의 악행도 그렇지만, 절대다수였던 군인들. 그러니까 진압군으로 들어간 그들은 왜 지금까지도 침묵하고 있는건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다수인 그들이 역사앞에서 진실을 이야기하고 참회를 하든, 변명을 하든, 무엇인가 얘기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하는데, 오히려 숨어버리고, 뒷방에서 자조하면서 추억삼아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하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cyrus 2015-02-06 14:33   좋아요 0 | URL
예전에 광주 항쟁 관련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어요. 아마도 프로그램명이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일 겁니다. 광주 항쟁에 나섰던 군인을 인터뷰한 장면이 있는데 힘없는 시민을 무참하게 폭력을 저지른 행위에 대한 죄책감에 그 때 그 참상의 기억을 지우지 못해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고 있더군요. 폭력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환경 탓에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소수의 가해자들의 상황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transient-guest 2015-02-07 05:09   좋아요 0 | URL
양심적인 소수는 나서지 못하고, 다수는 행위를 정당화하면서 살고 있을 거라고 봅니다. 그게 화가나요..

단발머리 2015-02-06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도 광주에 대한 이야기는 두렵고 무섭습니다. 영화로 몇 장면, 책으로 몇 장, 사진 몇 장을 보았는데도 너무 무서워요. 아직 이 책을 읽지 못하고 있어요. 하지만, 광주가 잊혀져서는 안 되기에, 아무도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용기를 낸 작가 한강이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5-02-06 14:36   좋아요 0 | URL
소설 초반부에 죽은 광주 시민들의 시신을 관리하는 장면부터 압권입니다. 한강 작가가 이 장면을 가까이서 보듯이 세밀하게 묘사했더라고요. 이 장면에 할애되는 분량만 해도 열 쪽은 넘을 겁니다.

맥거핀 2015-02-06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나서 한강의 이 작품은 소설 이상의 소설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솔직히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명칭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요즘에 역사 시간에 `운동`이라고 배우니 어떤 온건한 무엇처럼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운동이라기보다는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죠. 광주학살 혹은 광주항쟁이라는 말이 차라리 더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도 소설을 읽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참혹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더라구요.

말씀하신 대로 어떻게든 기억하려고 애써야 하는데, 참..기억은 잊혀져가고 더 나아가 이상한 소리를 하는 사람들까지 있고, 살인마도 여전히 뉘우치지 않고 잘 살고 있고..29만원이니 뭐니 하면서 조롱받으면서 끝날 사람이 아닌데..마음아픈 현실입니다.

cyrus 2015-02-06 14:39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 말씀을 보면서 이제부터 ‘광주항쟁’이라는 말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요즘 ‘민주화’라는 단어도 일베들에 의해서 그 의미가 완전히 이상하게 변질되고 말았으니까요. 일베가 단어를 지들 마음대로 바꾸면서 광주 항쟁을 조롱하고, 전두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transient-guest 2015-02-07 05:10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 광주항쟁이 더 정확하게 느껴지네요. xx운동이라는 건 순화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cyrus 2015-02-07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guest님 고맙습니다. 글에 광주항쟁으로 고쳤습니다. 역사를 교과서에 있는 그대로 배우다보니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단어가 익숙해진 것 같습니다.
 
순이삼촌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순이. 이 여자를 아시는 분? 아! 생각났다. 나훈아 ‘18세 순이’와 송대관 ‘우리 순이’. 우디 앨런 아내 순이 그리고 현기영의 단편 『순이 삼촌』에 나오는 제주도 출신 순이.

 

순이가 살다 갔던 제주도는 아름답다. 바다며 산이며 들이며 할 것 없이 모두 아름답고, 몸을 낚아챌 정도로 부는 바람도 아름답다. 누군가 그랬다. 이 땅에 제주마저 없었다면 얼마나 밋밋했겠느냐고. 신혼부부가 손을 맞잡고 유채꽃 사이를 달린다. 조랑말이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해변을 노닌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제주의 이미지는 ‘신혼부부의 섬’이요, ‘낭만의 섬’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유채꽃에는 한(恨)이 서려있음을 아는지. 제주의 아름다운 풍광 구석구석에는 역사의 상처가 베어있다. 이틀 동안 제주에 머물면서,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알 것 같았다. 끝없는 오름들, 쉴 새 없이 불어대는 바람, 바다에 몸을 숨기는 해녀들 그리고 곳곳에 남아 있는 가슴 아픈 이야기들.

 

여기에서 저기로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사무친다’는 형용사를 끝없이 떠올린다. 아름다운 섬이 분명한데, 그저 예쁘고 아름답다는 말만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사무침이 이 섬에 있다.

제주 북촌 마을 옴팡밭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 1978년 현기영이 『순이 삼촌』에서 이야기했던 바로 그 옴팡밭이다. 살 사람과 죽을 사람을 갈라 세웠다던 운동장에서 죽음이 결정된 사람들은 옴팡밭에서 처형당했다.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 선택하라는 군인들 앞에서 사람들은 헷갈렸겠지. 어느 편에 서야 진짜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인지 열심히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겠지. 애초에 이념을 가지고 저항한 이들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 힘겹게 살아왔을 뿐인 사람들이기에,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어디든 선택하라는 명령에 다만 얼떨떨할 뿐이었겠지.

 

그렇게 수백 명의 목숨은 까닭도 모른 채 쓰러져 갔다. 북촌초등학교 운동장에서 학살 장소인 옴팡밭까지, 채 10분도 안 걸리는 길을 걸었다. 생의 마지막 10분, 그 길이 그네들에겐 얼마나 길고 아득한 길이었을까?

 

트라우마는 강간, 억압, 전쟁과 같은 육체적, 심리적 충격을 경험한 후 나타나는 정신적 외상이다. 인간의 마음이란 때론 만물을 만들어낼 정도로 강력하지만, 어떤 때엔 조그마한 충격에도 바람 앞의 촛불처럼 심하게 흔들릴 정도로 나약하다. 그래서 육체는 멀쩡한데 정신은 멀뚱멀뚱한 사람들이 많다.

 

『순이 삼촌』은 트라우마에 걸린 한 인간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 일인칭 화자인 나는 한때 우리 집에 식모살이를 했던 순이 삼촌(제주에서는 먼 친척어른을 남녀 구분 없이 삼촌이라 부른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30여 년 전 제주도 4.3 학살사건을 떠올린다.

 

당시 사건은 무장대에 의해 발단되었다. 2연대 3대대 군인 일부가 시찰을 마치고 함덕으로 돌아가는 도중 무장대가 군인들을 기습하여 군인 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를 심각하게 여긴 마을 원로들은 죽은 군인들의 시신을 들고 함덕에 있는 대대본부로 찾아갔다. 그런데 분노한 군인들은 부대를 찾아온 마을 원로들 10명 가운데 9명을 즉석에서 총살해버렸다.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 군인들은 2개 소대 병력을 풀어 북촌마을을 덮쳤다.

 

군인들은 주민 모두를 초등학교에 집결시키고 마을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운동장을 에워싼 군인들은 총을 장전한 채 주민들의 도주를 차단했고, 현장에서 주민 7~8명을 즉결 사살했다. 그리고는 군경가족이나 민보단 가족을 주민들에서 분리시켰고, 이런 군인들의 조치에 공포에 질린 주민들은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주민들을 학교 동쪽에 있는 당팟과 서쪽 너븐숭이 일대로 끌고 가 총살을 시작했다. 총성은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500명 가까운 주민이 목숨을 잃고 나서야 우여곡절 끝에 멈췄다. 당시 어린아이들은 태어나도 이름을 짓거나 호적에 올리는 등의 일을 미루던 시기였기에, 유아 대부분이 이름이 없던 시기다. 피해자 수가 아직까지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는 이유다.

 

순이 삼촌도 북촌사건 당시 군인들에 의해 총소리 통곡소리가 진동하는 옴팡밭으로 끌려갔다. 순이 삼촌이 현장에 끌려갔을 때 사람들은 밭에 안 들어가려고 밭담 위에 엎어져서 이마에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그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순이 삼촌은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는 군인들이 총을 쏘기 직전에 실신해서 넘어졌으므로 총탄을 피할 수 있었고, 깨어났을 때는 그의 몸은 시신들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무구한 주민들이 목숨을 잃은 장소였던 옴팡밭은 순이 삼촌네 소유였다. 사건이 끝나고 며칠이 지나도 옴팡밭에는 끝까지 찾아가지 않는 시신들이 널려 있었고, 사람을 빌어 시신을 다 치운 다음에야 고구마를 갈 수 있었다.

 

북촌사건이 발생했던 1949년은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지만, 옴팡밭에는 죽은 시신을 먹은 고구마들이 목침덩어리만큼 큼직큼직했다. 작품에 등장하는 또 다른 친척 어른이 당시를 회상하는 증언이다.

 

“그핸 숭년(흉년)이라, 보릿겨범범 먹던 때지만 그 아지방네(아주머니네) 밭에서 난 감저(고구마)는 사름(사람) 죽은 밭엣 거라고 사름(사람)들이 사먹질 않했쥬.”

 

학살현장에서 두 아이를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순이 삼촌은 그 후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한번은 순이 삼촌이 이웃집에서 메주콩을 잃어버린 일로 시비가 벌어진 적이 있는데, 이웃사람의 ‘경찰서로 가자!’라는 말 한 마디에 철퍼덕 주저앉아 똥오줌을 싸는 바람에 범인으로 오해받으면서 환청이 시작되었다. 평생 30년 전 그날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순이 삼촌은 자식이 둘이나 묻힌 그 옴팡밭에서 사람의 뼈와 탄피를 골라내며 살다 결국 살육의 현장에서 약을 먹고 개처럼 죽고 말았다. 그녀는 지금 죽었지만 그녀는 이미 30여 년 전에 죽어버린, 유예된 죽음을 살았던 것이다.

 

세월은 흐르고 정권도 바뀌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우리는 제주도를 트라우마 섬이 아니라 '익사이팅'한 관광의 섬으로만 기억한다. ‘4.3특별법’이 제정되고, 희생자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 등이 이어지고 있지만, '어떤 위로와 사과로도 제주사람들이 겪은 고통을 다 지우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몇 마디 위로의 말로 혹은, 요식행위에 불과한 법 제정만으로 그들이 겪은 '팔열지옥(八熱地獄)'의 고통을 지울 수 있을까?

 

아직도 제주에는 제삿날이 같은 집이 동네마다 지천이다.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어둡고 습한 그늘. 이 비극의 역사를 위정자들은 ‘4.3폭동’, 우리들은 ‘제주 4.3항쟁’이라 부른다.

 

언제나 외세와 육지 사람들로부터 수탈당하고 차별과 억압을 당해왔던 섬 제주는 어느 곳보다 공동체가 살아있고 평화의 정신이 살아있는 곳이었다. 제주도민은 남과 북이 갈리기를 원하지 않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원하지 않았기에 통일과 자주를 외치며 저항했다. 또 친일경찰들이 해방 이후에도 버젓이 세를 누리며 민중을 억압하고 3·1절 시위에서 무력진압을 해 사람을 죽이고도 사과를 하지 않는 불의에 저항한 것뿐인데 그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던 것이다. 게다가 세월이 흐르도록 역사적으로는 빨갱이로 몰리고 그 가족마저 연좌제의 고통을 당했다. 피해자들은 억울한 피해자이면서도 무조건 빨갱이 취급을 받을까봐 피해 사실조차 입 밖으로 내지 못하며 숨죽여 살아야 했다.

 

우리는 시간이 흐르면 지나간 역사의 충격과 아픔을 잊어버리고 가끔씩 생각해내겠지만, 순이 삼촌 같은 분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과거의 그 한 순간에 영원히 머물러 고통 받으면서 산다. 지제주도 바람에 묻어오는 순이 삼촌의 흐느껴 우는 소리를 들으면서. 커플티를 입고 온 신혼여행객들의 자지러지는 웃음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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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
이정서 지음 / 새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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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예술은 가짜다

 

바다 물은 파랗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파란 색깔을 띠지 않는다. 이렇게 감각을 통해 인식하는 현상과 실제 사실이 같지 않은 경우가 많이 있다. 우리는 육체적 감각을 통한 인식의 확실성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즉, 여기서 사물이나 현상의 실재 사실에 대해 육체적 감각과 경험에 기초한 주관적 인식이 객관성과 보편성을 지닐 수 있는가가 문제다. 우리는 감각과 경험을 통해 얻는 지식을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앎의 개념과 연관시켜 생각하지만, 경험을 통해 인식하는 지식은 실제로는 진실이나 사실에 대해 불확실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경험은 육체적 감각의 관점에서 해석된 것으로 개인의 주관성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화가나 시인에 의해 표현되는 예술은 감각에 의해 인식되는 현상을 모방하는 것이기 때문에 현상의 본질인 이데아(idea)와 두 단계나 떨어져 있어 실재를 왜곡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이데아를 모방한 것이 현상이고, 현상에 대한 또 한 번의 모방을 예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예술은 참다운 실체인 이데아로부터 동떨어져 있어 실재가 아닌 허상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즉, 플라톤에게 예술은 가짜다.

 

 

 

 Scene #2  표절도 가짜다

 

세계 철학자들의 할아버지에, 할아버지에, 그 고조할아버지보다 더 오래된 철학의 조상님 플라톤이 이정서의 소설 『당신들의 감동은 위험하다』를 읽었다면 현상과 본질을 구분하지 못하는 세상에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현상에 대한 또 한 번의 모방을 시도하는, 사이비 같은 예술 안에서 또 다른 사람이 자신의 작품인 것처럼 거의 비슷할 정도로 모방을 시도한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플라톤은 예술을 일종의 사이비라고 생각했는데 그 중에 제일 싫어했던 예술가가 바로 시인이었다. 아마도 책 제목처럼 멋진 문학적 수사로 가득 찬 시, 소설을 읽고 감동받는 우리에게 위험하다고 경고했을 것이다. 너희들은 현실의 모방에 모방, 특히 윤리적으로 어긋나고 거짓에 가까운 표절의 예술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하고 있었다고.

 

물론 처음에 현상을 모방한 원작자도 플라톤의 비판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원작자 순수의 창작물을 허락도 없이 자신이 창작한 것처럼 모방하는 것도 이데아의 본질에 맞지 않으며 실재의 현상을 더욱 왜곡하는 것이다. 진짜 실재를 부정하는 대신 거기에 자신이 그 실재인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표절이다. 원작의 일부이든 전체이든 원작자의 허락 없이 몰래 모방하는 것은 실재가 아닌 허상에 불과하다. 표절자는 실재가 아닌 허상을 자신이 만든 실재인 것처럼 연기한다. 말 그대로 표절도 가짜다.

 

 

 

 Scene #3  ‘표절’이라 쓰고, ‘인용’이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심심하면 표절 논란이 생긴다. 남이 쓴 논문이나 소설에 일부 문장을 똑같이 따와서 자신이 쓴 문장처럼 사용한다. 표절을 의심받은 사람들은 다들 입을 맞춘 듯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인용했을 뿐이라고. 그런데 놀랍게도 원작자의 동의 없이 인용하거나 ‘인용’이라고 말하기엔 너무나도 민망할 정도로 흡사한 문장이 버젓이 보이는데도 표절을 부정한다. 가방끈 짧은 사람도 보면 표절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오히려 가방끈 긴 사람들은 오리발을 내민다. 표절과 인용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말하는 ‘인용’은 글을 좀 쓰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해보는 표현(?)의 방식쯤으로 여긴다. 즉, 학계나 문단이나 글을 쓰는 사람들이 표절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표절이 드러나면 재수 없는 것이며 안 걸리면 장땡이다. 일단 절대로 자신의 표절이 타인에게 들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하에 표절자는 원작의 모방을 몰래 시도한다.

 

원작의 악의적 모방을 시도하는 표절 행위 자체도 잘못한 것이지만, 그것을 묵인하고 면죄부를 주는 사회도 더 잘못됐다. 이러니까 우리 사회가 ‘표절 공화국’ 소리를 듣지. 잘못된 표절을 밝혀내는 일이야말로 당연히 정의롭고 옳은 행동이지만, 의외로 표절 문제를 처음 제기하거나 밝혀내려고 꼬치꼬치 캐묻는 사람들은 환영을 받지 못한다. 특히 오랫동안 사회적 명성을 두텁게 유지하고 있는 거물급 인사일수록 표절 논란에서 운 좋게 살아남는다(?). 표절이 증명되면 자신의 명예에 약간 흠집이 생길 뿐,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흠집은 잊히기 마련이다. 오히려 거물급 인사의 표절 행위를 문제 제기한 정의로운 사람이 정의롭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자신의 명예에 심한 흠집이 생긴다. 이렇듯 부당한 표절 행위를 증명하려는 소수의 아웃사이더는 외롭고 쓸쓸하다.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대중이나 아예 진실을 왜곡하기 위해서 눈을 가리는 위선자들로부터 날아오는 비난의 화살을 맞을 각오는 해야 한다. 아마도 이 사람 또한 그랬을 것이다.

 

그는 ‘문단의 게릴라’로 통한다. 혹자는 ‘비평계의 골칫거리’라고도 한다. 하지만 불편부당한 ‘독립적 지식인’으로 인정하는 이도 적지 않다. 문학평론가 이명원. 그는 극단의 평가를 받는다. 2000년에 낸 첫 평론집 『타는 혀』가 발단이다. 교수들에게는 일개 대학원생으로 보이는 사람이 김현 같은 한국 비평계의 거목을 겁 없이 비판한 것이다. 뭐, 일단 여기까지는 괜찮다. 그러나 이명원이라는 이름의 석 자로 인해 학계 전체가 발칵 뒤집혀버린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김윤식 교수의 저작물을 ‘표절’이라고 제기한 것이다.

 

“어떻게 자식이 아버지를 죽이려 드나? 너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너무 강한 거 아냐?”, “자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 역시 자네를 제도적으로 매장시킬 수밖에 없어.” (219~220쪽)

 

이 사건 때문에 아웃사이더는 스스로 ‘이단’의 십자가를 졌다. 이런 파문으로 대학원 박사과정도 자의반 타의반 중도하차해야만 했다. 학계의 권위주의와 패거리주의의 벽은 개인이 돌파하기엔 높고 두터웠다. 이씨는 스승을 비판한 뒤 자신에게 가해지는 제도적 폭력에 견디지 못해 자신이 다니던 대학원을 자퇴하며 ‘꿇고 사느니 서서 죽겠다’는 도발적인 제목의 자퇴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정서의 소설이 십여 년 전에 있었던 이명원 사건을 소설로 재구성한 것이다. 소설에서는 실명 대신에 ‘이인서’라는 가명을 썼지만, 표절 논란의 당사자인 김윤식 교수는 실명 그대로 나온다. 후학이 선학에게 문제제기를 할 수 없게 만들고, 표절 행위를 묵인하는 권위적인 학계의 몰상식한 모습을 다시 한 번 고발하고 부각시키려는 작가의 비판의식이 돋보인다.

 

 

 

 Scene #4  나의 작품을 만든 건 팔할이 ‘뻥’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히 권위만 남은 학계를 비판만 하고 있지 않다. 우리가 알고 있었던, 혹은 알면서도 모른 척 했던 작가의 표절 논란 그리고 특정 작가의 책을 팔기 위해서 출판사가 주도한 ‘사재기’ 등 은밀하게 감춰진 문학계 전체의 병폐를 은근슬쩍 고발한다.

 

우리가 감동받으면서 읽었던 유명 작가의 시나 소설이 알고 보니 작가를 꿈꾸는 무명의 문과생이 쓴 습작을 그대로 모방했다면? 베스트셀러라는 책 광고 문구에 혹해서 고른 책이 출판사의 사재기로 판매 부수를 올렸다면? 그것은 독자를 기만하고, 모욕하는 것이다. 그리고 순수 창작물이라고 생각했던 작가의 작품은 진짜가 아니라 허상, 말 그대로 ‘뻥’이 된다. 우리는 작가와 출판사가 꾸민 ‘뻥’, 즉 남의 문장을 표절하고, 출판사가 만든 베스트셀러에 현혹되어 감동을 느낀 것이다. 시인이야말로 현실을 모방하는 사기꾼이라고 비아냥거리던 플라톤이 문학의 사기꾼들에게 당하는 독자들을 보면 하늘에서 배꼽 잡아 웃었을 것이다.

 

현실을 모방하는 문학 자체를 문제 삼고 싶지 않다. 플라톤의 입장에서 오늘날의 문학을 ‘뻥’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이미 누군가가 현실을 모방한 문학을 버젓이 자신의 문학이라고 모방하면서 ‘뻥’ 치는 행위야말로 심각한 문제다. 그리고 문학성 떨어지는 문학을 문학성 있는 것처럼 ‘뻥’ 치는 출판계도 마찬가지. 문학가의 표절이나 출판사의 사재기 논란은 잊혀질만하면 뉴스에 나온다. 특히 출판사 사재기 논란은 정부 부처에서도 경고를 줄 정도로 단속과 처벌을 강화했지만, 최근에 모 출판사가 사재기 판정을 받은 사실을 생각한다면 고질적인 병폐가 쉽게 고쳐지지 않을 듯하다. 상황이 이런데 과연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들이 읽는 것은 모두 진실인가. 이래서 그들이 팔할의 뻥으로 만들어 낸 문학의 감동은 위험하다.

 

 

 

 Scene #5  당신이 우습게 보는 대중의 분노도 위험하다

 

이인서 아니 이명원이 본 교수사회는 만신창이가 됐다. 붕괴 일보 직전이다. 거친 풍랑에 휩싸인 난파선과 같다. 들이닥친 수모와 시련은 교수사회 스스로 초래했다. 교수사회는 그 동안 성채였다. 고인 물이 썩듯이 성채는 자기정화력이 약하다. 논문 표절 등 그릇된 관행이 지속됐다. 제어장치가 없어 오히려 분파돼 나갔다. 고전적인 기법인 논문 표절은 도를 넘어섰다. 제자의 논문 훔치기는 일상화가 되다시피 했다. 우월적 지위를 이용한 지식범죄이지만 통제기능은 전무하다. 심지어 대학과 교수가 한통속이 되어 학문적 범죄의 극단에 서 있다.

 

교수사회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는 글뿐만 아니라 사진 심지어 남의 인생 자체를 그대로 자신의 인생처럼 행동하는 경악스러운 사람도 있으니 ‘표절’이라는 모방에 전혀 죄책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것 같다. 겁 없이 표절과 도용을 행하고, 그것을 눈 감고 모른 척 하는 이 세상에서 과연 플라톤이 찾고자 했던 현실의 실재는 있을까. 진짜도 못 찾을 판에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도 못할 정도로 우리 사회는 정말 만신창이가 됐다.

 

플라톤도 이데아를 찾지 못할 것이다. 자신의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로 현실을 모방하는 사이비인 예술은 죽지 않았고, 시인이라는 직업은 쇠퇴하지 않았다. 예술의 힘이 유지할수록 플라톤의 이데아 찾기가 힘든데 거기에 정당한 ‘모방’이라고 예술을 ‘표절’하는 사기꾼이 늘어나니 천하의 플라톤도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세상은 진짜를 가장한 가짜 문학과 예술이 많다. 그리고 그 가짜에 우리는 너무 쉽게 속아 넘어가 감동받고, 가짜에 현혹되어 진짜를 외면하고 무시할 때도 있다. 참으로 이 세상이 혼란스럽고 머리가 아파온다.

 

그래 맞다. 인생은 어차피 표절이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 모두들 누군가를 조금씩 베끼며 살아간다. 티 안 나게 살짝 살짝.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능이 모방이야말로 창조의 원천이라고 자신의 스승을 반박했으나 안타깝게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했던 그 모방은 지금 표절의 원천이 되고 말았다.

 

모방을 악용하는 이 세상을 완전히 고치기는 힘들 것 같다. 표절 행위를 근절하는 것은 물론이요, 표절로 이루어진 가짜 문학을 구별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명원이 자퇴서에서 인용한 체 게바라의 말처럼 문학을 꿇고 사느니 서서 죽는 건 힘들지라도 진짜처럼 행동하는 가짜에 맞서는 용기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용기마저 우리 스스로 죽인다면 결국 가짜에 속고, 감동받는 우리에게 피해가 고스란히 돌아온다.

 

표절 행위를 용인하고, 우리도 악마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 표절을 한다면 현실을 어지럽게 하는 허상에 맞서는 용기의 힘은 줄어들고, 점점 죽어간다. 또 현실의 실재를 구별하고 찾는 분별력도 떨어진다.

 

착한 모방은 또 다른 창조의 원천이 될 수 있다. 혹은 짝퉁이 원조를 넘어서기도 한다. 그것에 비하면 표절은 찌질할 뿐이다. 더욱이 ‘모방’, ‘인용’이라는 이름을 함부로 갖다 대는 변명은 더 찌질해진다. 그러한 구차한 변명을 하는 예술이나 문학이 대중을 가짜 문학에 쉽게 감동받는 어리석은 존재로 본다면 오산이다. 불편한 진실이 끝내 밝혀지는 순간, 대중이 냉소적인 비난을 가득 담아 던지는 돌을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이 우습게 보는 우리의 분노도 위험하다.

 

그러니 김윤식 교수님, 그 때 그 사건이 잊혔을 거라 안심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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