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
김숨 지음 / 현대문학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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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과거는 역사로 기록되지 않는다. 과거의 일부분이 역사로 기록될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숱한 과거 중에서 기억되는 과거만이 역사의 현장으로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거를 기억하려는 인간의 의지보다 강렬한 건 과거를 아예 잊어버리려는 망각의 욕망이다. 인간은 그들이 속한 환경과 처지에 따라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과거를 망각하거나 왜곡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해방 후 70년이 지났건만 가혹 행위, 학살 등으로 점철된 위안부 문제는 그 실상이 오히려 망각이라는 편리한 도구에 편승, 한때 부끄러웠던 과거로까지 치부되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단지 민족적 비극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강제로 연행된 사람들의 인권에 관한 문제이다. 그런 점에서 위안부 문제는 민족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한 권리라는 보편적 층위에서 제기되어야 한다.

 

김숨의 《한 명》은 고난의 역사를 거쳐 오는 동안 무참하게 비틀리고 휘어진 한 개인의 이야기를 제시한다. 소설의 초반부에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불치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작가는 할머니의 감춰진 마음을 들여다보는 서술을 통해서 끔찍한 기억의 상흔을 보여준다.

 

입으로 가져가던 국숫발이 미끄러져 대접 속으로 떨어진다. 김치 서너 조각과 고추장으로 비벼 시뻘건 국숫발들은 그새 불고 있다. 국숫발들을 흩트리다 말고 슬그머니 젓가락을 놓는다. 국숫발을 뽑듯, 석순 언니의 몸에서 피가 쭉쭉 뿜어져 나오던 게 생각나 국수를 못 먹겠다. (19~20쪽)

 

할머니들의 정신적 상처는 인간역사의 부끄러운 상처일 뿐 아니라 개인의 인권이 조직의 힘으로 침해받은 상처다. 국가적인 아픔이기도 하나 그보다 피해자들인 여성에게 더할 수 없는 아픔이고 이제까지 겪어온 억울한 고통이기도 하다. 타인의 강압 때문에 몸과 마음이 유린당하는 것은 정신적인 살인을 당하는 것이라 할 정도로 그 아픔을 겪은 사람들의 상처는 그를 겪어보지 못한 이들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다만 그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치유가 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 정도를 할 수 있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작가에게는 곳곳에 산재한 망각과 왜곡의 욕망과 싸우면서 과거를 사심 없이 되돌아보는 진술의 힘과 이 진술을 한 편의 의미 있는 서사로 만들어내는 지혜가 있다.

 

 

 

 

 

독자들에게 《한 명》은 민족 수난이라는 구태의연한 플롯을 반복하는 무거운 소설로 읽힐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을 뒤로 돌리고 먼저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질문이 있다. 왜 우리나라에 위안부 피해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재현한 작품이 많지 않은 것일까? 1982년에 발표된 윤정모의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적 진실성을 명징하게 다룬 소설이다. 윤정모 작가는 이 소설을 본격적으로 집필하기 전에 故 임종국 선생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임종국 선생이 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지금 급선무는 위안부 문제를 외면한 친일파들의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위안부의 역사를 국민에게 널리 알리는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소설을 써주세요.”[주] 하지만 이 소설은 영화화되는 과정에서 선정적 작품으로 변질했다. 영화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만 외면한 채 일반인들의 호기심과 말초신경을 자극하려는 의도에서 성적인 장면만을 노출했다. 소설과 영화 모두 망각의 물결에 떠내려가면서 잊혀졌다.

 

할머니는 살아남기에 급급한 결과 자신이 역사의 피해자임을 자신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이른다. 할머니는 비록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있을지라도 불행의 상흔은 뚜렷하다. 그 흔적 중에서 가장 뼈아픈 것은 할머니에게 자아가 상실되어 있다는 점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은 그 다친 몸만큼 마음이 황폐해질 뿐 아니라 고립감과 죄의식을 갖게 되며, 자존감이 약해진다.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려 할 때마다 가장 먼저 치미는 감정은 수치심이다.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그녀에게 모욕적이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생각을 하지 않다 보니, 그리고 말을 하지 않다 보니,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잊어버렸다.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어서 쩔쩔매던 그녀의 손가락들에 다시 힘이 들어간다.

 

나도 피해자요.

 

그리고 또 뭐라고 써야 하나? 막막해하던 그녀는, 자신이 아무것도 잊지 않았다는 걸 절실히 깨닫는다.

 

(149~150쪽)

 

 

 

할머니의 사연은 팔자가 기구한 여자의 일생처럼 보일지라도 거기에는 많은 생각을 유발하는 함축이 있다. 할머니의 과거는 단지 불행한 생애 일부가 아니라 할머니 자신의 이야기로 인식되지 못하는 혼란이다. 할머니는 살아온 과거가 치욕적으로 느끼는 까닭에 그것을 현재의 자신 속으로 돌이켜 끌어들이는 과정을 힘겨워한다. 위안부 문제의 실상이 오랫동안 은폐되고 방치되온 탓에 할머니들은 저주스런 과거를 감추면서 숨어 살아야 했다. 가족에게조차 말할 수 없었던 치욕스런 기억은 ‘봉인된 고통’과도 같다. 할머니의 자아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억은 응집성 있는 서사적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구성되어 역사라는 이름으로 표출된다. 할머니의 수치심은 야만의 세월이 힘없는 여성에게 초래한 비극이다. 할머니의 머리와 마음에서만 울리던 공허한 메아리를 김숨은 현실의 문제로 끄집어내어 독자들에게 들려준다. 그렇게 세상을 기피하며 살아온 할머니가 자신의 과거와 한 꺼풀씩 대면하는 과정이 종이 위에 아프게 펼쳐져 있다. 알려지지 않은 비극적 진실은 역사로 복원되어 생명을 얻게 되었다. 《한 명》이 할머니들의 슬픈 마음을 널리 전해주고, 아픔을 함께 느끼게 해주는 소설로 오래오래 기억되길 바란다.

 

 

 

[주] <위안부, 아직 끝나지 않은 지금 우리의 문제> 노컷뉴스, 2013년 1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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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부대 - 2015년 제3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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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나쁜 인터넷은 정신의 독약이며, 정신의 파멸을 가져온다. [주1]

 

먼지바람이 휩쓰는 길 한가운데에 두 총잡이가 최후의 결투를 준비한다. 구경꾼들은 결투 장면을 숨죽이며 지켜본다. 침묵 속의 기 싸움이 구경꾼들을 압도한다. 그들은 서로 자신들이 지지하는 총잡이가 이 결투를 어서 빨리 끝내주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총잡이는 자신이 아끼는 리볼버 권총을 쓰다듬는다. 상대가 따라 하지 못하는 자신만의 비장한 사격 솜씨를 내보일 준비 한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클리셰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도 결투와 싸움이 벌어진다. 권총을 대신한 무기가 댓글이다. 상대방을 굴복시키려고 저격하는 상황은 지금도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서부영화에서 악당이 빠질 수 없듯이 인터넷에서도 게시판 전체 분위기를 흐리게 만드는 누리꾼 집단이 존재한다. 그들은 차마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욕을 하거나 상대방을 비방하는 악성 댓글, 이른바 ‘사이버 폭력’을 일으킨다. 평화로운 게시판은 진흙탕 싸움이 벌어지는 장소로 변한다. 팝콘을 먹으면서 댓글 싸움을 구경하는 누리꾼들이 늘어난다. 댓글 싸움에 서부영화의 총싸움에서 허용되지 않는 특별한 무기가 동원된다. 그것은 상대방의 공격을 방어하는 특별한 ‘방패’다. 댓글로 공격한 누리꾼은 이 방패로 삼아 자신의 신분을 철저하게 보호한다. 그것이 바로 ‘익명’이다.

 

익명성은 분명 매력적이다. 특히 과거 감시와 통제의 그늘 속에 속박받던 세대들에게 그 가치는 충격적일 정도의 경이로운 일이다. 이데올로기로서 이미 그 효용가치를 상실한 공유와 평등은 인터넷으로 다시금 부활했다. 자연히 구성의 개체에 불과했던 개개인의 힘은 막강해졌다. 그러나 매혹적인 만큼 위험도 있다. 권위의 문턱을 훌쩍 뛰어넘어버린 익명의 힘은 누리꾼들의 자유를 침해하고 오히려 사람들을 고립시킨다. 급기야 통제 불가능한 괴물로 변한다. 대중매체를 휘어잡으려는 세력이 인터넷 괴물들을 동원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대중을 선동한다. 《댓글 부대》는 익명에 숨어들어 괴물로 둔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개해간다.

 

 

 

 

Scene #2

 

“내 친구들이여, 세상에 친구란 없다네.” [주2]

 

《댓글 부대》가 갖는 섬뜩함은 ‘접속하는 순간, 당신도 교묘한 선동 전략에 당할 수 있다’라는 전제에서 시작된다. 인터넷 커뮤니티는 ‘다중 인격 사회’와 같다. 일상에서는 평범한 사람, 컴퓨터 화면 안에서는 상대방의 삶을 갉아먹는 괴물. 댓글 부대 ‘팀-알렙’의 ‘찻탓캇, 삼궁, 01某10’은 그러한 사회악을 일삼는 부류들이다. 이 세 사람은 가면을 쓰면서 여론 전체를 뒤흔들고, 사람들의 심리를 조종한다. 여론 조작의 동기가 밝혀지기 전까지 우리는 그들이 꾸민 음모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런 일이 자꾸만 누적될수록 댓글 부대는 이중인격자 집단이 되어간다. 소설 초반부에 칫탓캇이 신문기자 임상진에게 댓글 부대의 실체를 알리는 장면과 이 소설의 결말을 겹쳐 보시라. 은밀한 속임수와 폭력성이 익명성과 만나 극대화될 경우 얼마나 끔찍한 상황을 만들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지금 인터넷 웹(internet web) 어디선가 칫탓캇과 같은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은 먹잇감을 노리기 위해 누리꾼들이 모인 곳에 인터넷 거미줄(wed)을 잔뜩 치고 있다. 거미줄에 걸린 누리꾼은 수많은 정보가 오가는 인터넷에서 허구와 진실을 가려내지 못한다. 댓글 부대는 허구와 진실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는 미끼를 만들어낸다.

 

 

 

 

 

 

이중적 인격을 지닌 사람은 사회적 삶을 제대로 영위할 수 없다. 그들이 인터넷에 접속하는 순간, 지킬 박사에서 하이드로 금방 변하는 과정이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01某10처럼 대인관계 능력이 부족한 소극적인 새가슴도 인터넷 공간에서 사악한 속임수에 동참하는 게 이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다.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의 01某10은 칫탓캇과 삼궁에 비해 인간적으로 약점이 많은 편이다. 그렇다고 그가 만만하게 봐야 할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칫탓캇과 삼궁보다 더 위험한 인물일 수도 있다. 01某10은 상대방이 자신의 약점을 간파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약점을 감추려고 유흥업소 여자들과 어울리는 자신의 행동을 동료들에게 과장하면서 말한다. 01某10은 일상에서는 자신의 약점을 숨기려고 어설프게 행동하는 반면, 인터넷에서는 댓글 부대 조직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약점을 일부러 만들어서 드러내는 일에 참여한다. 01某10의 이중적 심리는 가상과 현실을 착각하여 생긴 심각한 병이다. 그는 맥플리커 증후군 환자다. 맥플리커 증후군에 시달리면 대인관계를 맺기를 원해도, 상대방의 표정이나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대인관계가 맺기 힘든 현실에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는 인터넷이다. 그곳에서 있으면 상대방이 무슨 생각을 하든지 살펴보지 않아도 된다. 특히 익명성은 불안정한 01某10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자신의 치부를 숨길 수 있고, 타인의 치부를 드러내는 댓글 부대 활동에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01某10은 정말 ‘인터넷을 위해 태어난 인간’이 맞다. [주3] 열등감이 많은 그가 인터넷을 접할수록 마치 자신이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진다. 01某10은 나르시시즘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약점을 노리고, 비방하는 댓글 부대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01某10의 행보를 유심히 살펴보시라. 현실의 어수룩한 양이 ‘쇼타임’을 즐기려는 순간, 인터넷의 포악한 늑대로 급변하는 모습을.

 

 

 

Scene #3

 

인간 :

자기 마음속에 그리는 제 모습에 도취되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동물 [주4]

 

《댓글 부대》를 읽은 독자들 누구나 댓글 부대의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 한 번쯤 생각한다. 그만큼 이 소설의 미덕은 소재 자체가 품고 있는 선정성을 깊이 파고들었다는 점에 있다. 인터넷 여론선동이라는 소재로 인간의 이중적 정서에 다가서려 했다는 점에서 《댓글 부대》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댓글 부대》는 실체가 알려지지 않은 음모를 그린 흥미진진한 소설이 아니다. 그리고 《댓글 부대》는 실패한 작품이 절대로 아니다. 톱니바퀴가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척척 진행되는 전개가 작가의 과장된 비약으로 보지 않는다. 《댓글 부대》는 인터넷의 익명성으로 인해 상대방뿐만 아니라 자신마저 속이는 자아가 늘어나고 있는 요즘 사회에 적지 않은 생각 거리를 던지기 때문이다. 이 세상 대부분 인간은 본성을 숨긴 채 거짓된 얼굴로 살아간다. 양심도 죄의식도 없이 타인이 고통당하는 과정을 놀이처럼 생각하는 댓글 부대원들의 모습은 파괴적인 본성을 가진 인간의 초상이다. 이는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이 댓글 부대원의 모습에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게 하는 하나의 장치가 된다. 사실 댓글 부대의 ‘쇼타임’보다 더 무서운 게임이 펼쳐진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남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들여다보고, 들불처럼 번지는 인터넷 마녀사냥에 동조하여 희열을 느끼는 우리가 과연 익명이라는 무기와 폭력성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운지 한 번쯤 돌아보게 한다. 관음적인 엔터테인먼트가 일상인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에 누구나 ‘더럽고 야비한 짓’을 할 수 있다. [주5]

 

아직도 《댓글 부대》가 일상의 현실을 침투한 작가의 상상력만 기억 남는 음모론적 작품으로만 보이는가. 책을 덮은 후에 댓글 부대의 실체 여부를 상상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사회 구조가 변하지 않는 이상, 소설의 이야기가 현실에 일어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따라서 범죄의 가해자 혹은 피해자, 그리고 구경꾼이 될 수 있다. 이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두 모이면 ‘진짜 쇼타임’이다.

 

 

 

 

[주1] 쇼펜하우어의 말 “악서는 정신의 독약이며, 정신의 파멸을 가져온다.”를 패러디했음.

[주2] 코코 샤넬의 말

[주3] 《댓글 부대》 70쪽

[주4] 앰브로즈 비어스 《악마의 사전》(이른아침. 164쪽)

[주5] “누구나 더럽고 야비한 짓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민주화” (《댓글 부대》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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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1 05: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0-01 15:17   좋아요 0 | URL
제 생각인데, 정부의 얼굴이 달라져도 여론조작 문제가 생길 것 같습니다.


stella.K 2016-10-01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장강명의 판정승의 해는 아닐까 한다.
몇년 전엔 김애란의 해였는 것을 기억하는데 말야.
해마다 한 해를 빛낸 작가 정도는 기억해 줘야할 것 같아서...ㅋ

얼마 전 정지돈이 후장사실주의라더니,
이제 장강명은 월급사실주의란다.
예전의 작가들은 정자세로 쓰기만 했는데
요즘 작가들은 말장난도 곧 잘 잘하나 봐.ㅋ

cyrus 2016-10-01 15:20   좋아요 0 | URL
《댓글부대》는 알라딘 올해의 도서에 선정될 겁니다. 은근히 책도 꾸준히 나와요. 최근에 에세이집 나오고, 10월에 출간 예정 작품이 있던데요. ^^

서니데이 2016-10-01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cyrus 2016-10-01 15:21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서니데이님도 주말 잘 보내세요. ^^
 
누운 배 -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이혁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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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성공’이라는 단어는 좋아하지만 ‘실패’라는 단어는 의식적으로 싫어한다. 실패를 숨기고 싶은 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심리이다. 실수, 실패를 어떻게 해서든 덮어버리기에 바빴다. 실패란 목표나 목적 달성에 이르지 못한 것을 의미하는 결과 지향적인 말이지만, 실수는 다분히 과정 지향적인 말로, 부주의에서 발생한 것으로 실패를 일으키는 하나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실패를 은폐하면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거나 더 큰 실패를 하기 마련이다. 실패는 확대 재생산된다. 실패의 요인과 장치를 명확히 밝혀 요인과 장치를 바꾸는 등의 대책을 취하지 않으면 같은 요인이 같은 장치를 통해 실패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같은 ‘실패의 맥락’에서 실패가 반복되면 나선형으로 악순환을 일으켜 그 타격은 더욱 심각해진다.

 

사고는 늘 예측하지 못한 시간에 돌발적으로 발생한다. 《누운 배》는 진수식을 마친 배가 쓰러지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커다란 재앙은 회사 내부의 안정적인 분위기마저 순식간에 집어 삼켜버린다.

 

 

그날 2002호가 이렇게 누울 거라고 상상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그런 상상이 가능하다고 상상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 1년 넘게 걸려 지어온 쌍둥이 배 두 척의 처지가 백지장처럼 찢어져 엇갈리는 데 하룻밤의 반절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안정과 평화란 이처럼 나약했다. (19쪽)

 

 

이 소설에서 배가 쓰러진 이유가 중요하지 않다. 회사는 사고 원인을 규명하기보다는 사고 수습에 부랴부랴 매달린다. 회사가 평소보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이 더욱 복잡하게 꼬인다. 조선회사 회장은 배를 고쳐서 세우자고 결정한다. 배를 재건조해서 팔아넘기면 막대한 이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더미인데, 회장은 ‘기업의 목적은 오직 기업의 이익’이라는 신조를 먼저 내세운다. 회사 임원들은 기업의 이익에 휘둘리고 순응한다.

 

사회를 구성하는 각종 조직은 인간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다. 기업은 사람이 필요로 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조직들은 조직의 생존에 필요한 작업을 논리적으로 체계화시키고 거기에 맞는 기술을 개발하고 인적자원을 충당함으로써 장기적 생존을 보장받으려고 한다. 경영자나 구성원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조직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적인 생각이 몰락하는 조직의 문제점을 보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다.

 

《누운 배》의 회사는 기업 논리와 결탁한 관료제에 의해 운영된다. 이것은 하나의 ‘기업 관료제(corpocracy)’다. 주인공은 회장의 입김이 들어간 조직의 규율을 따라야 한다. 기업 관료제는 내부 단점을 재빨리 인정하고 보완한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기업 효율성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보면 심각한 부작용을 낳는다. 관료제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막스 베버가 말하는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쾌락주의자’로서 현대의 관료는 기업 임원일 수도 있다. 베버가 그려내는 현대 관료제는 영혼이 없는 기계다. 영혼도 가슴도 없는 터라 일단 스위치가 켜지면 무한 작동한다. 선악도 미추도 다 소용없다. 누가 스위치를 내릴 때까지 그냥 그렇게 움직인다.

 

 

회장은 경영계획 회의보다 배를 일으키자고 사람을 선동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었다. 관리 체계를 세우는 것보다 당장 돈이 굴러들어올 거리에 마음이 가 있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귀가 있고 생각이 있으면 임원들의 횡설수설을 모를 리 없지 않은가? 상관없었다. 회장은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틀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회장의 힘이고 지위고 회장을 둘러싼 찬란한 광배였다. 회장은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강력하게 군림했다. (84쪽)

 

 

이 시점에서 임원들은 고민에 빠진다. 수직적인 상하관계로 이루어진 조직 내에서 임원들이 기업의 ‘진짜’ 문제점을 소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똑똑한 임원이라도, 그렇게 만들기는 쉽지 않다. 임원들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시스템에 대항하는 힘이 없다. 관료제는 신분이 높은 사람도 천한 사람도 모두 똑같이 문서를 통해 다루고자 하는 속성을 지닌다. 문서에 의존하는 조직은 현장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문서라는 것은 얼마나 우스운 것인가? 문서란 엉성하고 허술한 현실에서 부스스 떨어져 내린 각질에 불과했다. 하지만 누가 문서를 우습게 보는가? 아무도 없다. 모든 사람이 문서를 자기 머리 위에 올려놓는다. (99쪽)

 

 

문서 작업은 너무 복잡하다. 그래서 문서로 일을 처리하는 관료제에서는 누구나 움직임이 굼뜨다. 조직사회는 끈끈한데, 그 끈끈함이 거기 속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안전함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오래되고 불만족스러운 기업 내부 문제점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실패가 우리 주변에 널리 퍼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잘 드러내지 못하는 이유는 실패에 대한 비난과 책임추궁을 피하기 어려운 분위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기본을 무시하고 규칙과 질서를 지키지 않는 풍조에 물들었다.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는 것은 고사하고 잘못된 것을 느끼지도 못하는 실패 불감증에 깊이 빠져 있다. 우리 조직에 만연된 책임 전가와 상호 불신,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 및 권위주의와 타율, 무소신과 무책임 등이 온갖 불감증을 두둔하기 때문이다. 성공보다 실패가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에 대해서는 대대적으로 찬양하고 벤치마킹이니, 성공사례 발표니 떠들썩하게 축하를 해준다. 우리는 실패 불감증을 떨쳐낼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경멸하고, 두려워하면서도 성공에 눈이 멀어진다. 《누운 배》는 ‘눈먼 힘’에 의해 무기력하게 작동되는 조직의 민낯을 보여준다. 권력 통제와 능률에 따라 움직이는 회사는 관료제의 성이다. 그 회사에 영혼이 없다. 영혼 없는 임원들이 모인 회사가 만든 배가 침몰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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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6-09-05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제목을 보고, 처음에 세월호를 떠올랐어요..
의식 깊은 곳에 세월호가 많이 있나봐요..

cyrus 2016-09-04 18:24   좋아요 0 | URL
세월호 사고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상처 같은 기억입니다.

yureka01 2016-09-04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대우조선이 딱 떠 오릅니다.ㄷㄷㄷㄷ

cyrus 2016-09-05 13:39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 생각했습니다.
 
표백 - 제16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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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추석이 싫었다. 매번 찾아오는 명절이지만 “취업 안 하느냐?”는 어른들의 성화가 불편했다. 추석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 사실 취업하고도 귀향을 꺼리는 젊은이들이 적지 않다. 이제는 “언제 결혼할 거냐?”는 질문에 시달려야 한다. 제발 이번 추석에는 결혼 얘기 좀 그만했으면 좋겠다. 어른들은 ‘불운한 삶 속에 진정한 인생의 가치가 있다’고 속삭여 왔다. 그러나 삶의 미래가 불투명한 현실 앞에서 고상한 삶의 의미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회는 청춘의 눈에 나오는 푸석한 눈물을 인정하지 않는다.

 

언제부터인가 청춘에 대한 갖가지 정의들이 생겨났다. ‘88만 원 세대’부터 시작하여 ‘흙수저’까지 우리 사회는 청춘이 처한 경제적 고통으로 세대의 특성을 규정했다. 장강명의 《표백》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옴짝달싹할 수 없게 된 사회에서 단지 ‘표백’된 세대다. 암울한 미래에 별다른 희망 없는 ‘나’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 몇 년 전부터 자살을 준비해온 세연은 친구들을 설득, 자신이 자살한 5년 후에 자살할 것을 다짐받는다. 사회에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살밖에 없다는 것을 알리는 일이다. 표백 세대는 세상에서 자신들을 완전히 지워버리면서 극단적으로 상실감을 표출한다. 버거운 현실의 벽을 뚫지 못한 표백 세대의 자살은 ‘저항’보다는 ‘자기파괴’에 가깝다. 장강명은 절망적 처지 그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들의 삶을 묘사함으로써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표백 세대들은 아주 적은 양의 부를 차지하기 위해 이전 세대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경쟁을 치러야 한다.” (196쪽)

 

소설에 나온 이 문장은 청춘들이 겪는 상황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꽃다운 청춘을 만끽하려면 유아기부터 시작되는 학벌 획득의 장기전에 임해야 한다. 대학이라는 중간 고지에 잠시 이르렀으니, 한숨 돌리고 새로운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다음 고지는 '취업'이다. 인생의 장기전에 가까스로 살아남은 독자들은 《표백》이 불편하게 느낄 것이다. 《표백》은 피땀과 눈물 흘리면서 청춘을 보낸 이들의 환부를 다시 찌른다.

 

소설 같은 일이 매일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충분히 현실을 직시했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과연 이 시대의 청춘들은 아무것도 보탤 수 없고 보탤 것도 없는 표백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솔직히 나도 잘 모르겠다. 이 글에서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강조해도 그때뿐이라면 슬랙티비즘(Slacktivism)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라는 말 역시 또 하나의 슬랙티비즘이다. 정말 이 말만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개인의 노력과 인내를 감성적으로 전달하는 위로는 공허한 말이다. 젊은 세대는 청춘을 훈계하는 사회에 향해 돌을 던질 힘이 있어야 한다. 저항과 연대의 힘이 두텁지 못하면 다음 세대도 무기력한 표백의 세계 속에서 살아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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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6-08-22 23: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이번 명절에는 어른들 뵈면 백세 시대를 맞아 노후준비는 어떻게들 잘 하고 계시냐며 선빵날릴라구요.

cyrus 2016-08-23 13:30   좋아요 0 | URL
크~~ 시원한 사이다 댓글입니다.

stella.K 2016-08-23 14:33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뭐 나름 좋긴한데 좀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요?ㅋㅋ

syo 2016-08-23 14:54   좋아요 0 | URL
괜찮을 것 같아요. 중요한 건 그런 질문들 자체가 듣는 사람한테 어떤 드러운 기분을 불러일으키는지 한번 체험해 보실 수 있도록 도와드리는 거니까요.^^

yureka01 2016-08-23 0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넌장가 갔냐.왜 못갔냐 우리 아들 장가갔다....넌 쥐직했냐 왜 못했냐 우리 아들은 취직했다. 이거였더군요. 당신 아들 장가 못가고 취직 못했으면 묻지 않거든요. 그런 질문에는 이면에 담긴 심리가 뭔가 내세우고 싶을 때 물어 보거든요.

cyrus 2016-08-23 13:32   좋아요 0 | URL
부모는 자녀의 성공에 기대서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좋은 대학 가서 돈 많이 주는 곳에 취직하는 것을 선호하죠. `자식 농사`라는 말이 괜히 나왔겠습니까? ㅎㅎㅎ

yamoo 2016-08-23 12: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강명 소설을 한 권 읽었는데, 대실망을 했습니다. 이 소설도 그렇고 그런 거 같아요. 한국이 싫어서...와 비슷한 주제의 소설같은데...이 작가는 그리 대성할 것 같지 않습니다..

cyrus 2016-08-23 13:33   좋아요 0 | URL
《표백》, 《한국이 싫어서》만 읽었는데요, 현실을 포착한 묘사는 좋았지만, 일말의 희망 없는 결말은 아쉬웠습니다.
 
-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차미혜 사진 / 난다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흰》 종이에 허무와 슬픔이 흠뻑 배어있다. 그 종이 속에 두 여자가 있다. 그녀들의 삶은 하얗다. ‘나’는 일상을 매일 쥐어짜는 극심한 편두통에 시달린다. 그녀에겐 태어나 두 시간 만에 죽게 된 언니가 있다. 따뜻한 어머니 품속 같은 흰 배내옷은 곧 싸늘한 수의가 된다. ‘나’는 얼굴이 흰 조그만 언니를 떠올리며 이 세상의 ‘흰 것’들을 하나씩 건져내기 시작한다. 65개의 조각 글은 한 편의 비가(悲歌)다. 흰색 톤의 ‘나’는 비현실적이면서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자꾸만 마음이 끌린다. 어떻게 보면 《흰》은 행동의 모호함과 혼란에 대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행동이 순수함을 향한 몸부림인지, 아니면 단순한 욕망의 표출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사람들이 살아가며 일상적으로 겪는 고뇌를 표현한 것인지 규정하기 힘든 장면이 잇따라 등장하기 때문이다.

 

흰색이 검은색보다 언제나 순수하고, 하얀 눈처럼 순수함을 상징한다는 식으로 그려졌다면 이 소설은 도식적이고 심심해졌을 것이다. 우울, 희열, 평안을 오가면서 흰 것에 집착하는 ‘나’의 모습은 기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한강의 글은 불편하고 때론 괴롭지만, 소설 속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흰 것에 대해 마음껏 상상한다. ‘나’는 흰 것의 상징과 은유로 근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금만 벗어나도 과장스럽게 보였을 ‘나’의 글쓰기를 우리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작가가 형이상학적 소재를 세심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는 흰 것에서 ‘죽음’을 대면한다. ‘달떡처럼 희고 어여뻤던 아기’가 죽은 자리에 태어난 ‘나’는 불현듯 죽음과 가까워지는 순간을 느낀다. 문득 자신을 덮칠 듯한 거대한 무색 공포, 즉 ‘죽음’에 몸을 떨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다. 죽음처럼 완전히 혼자다. 태어날 때부터 ‘형의 죽음’이라는 상처가 그의 이름과 생일에 낙인찍혀버린 반 고흐처럼 말이다. ‘나’는 오랜 고통의 영향으로 ‘피 흐르는 눈’[주1]을 가졌다. 그 눈으로 들여다본 마음의 심연은 엑스레이 사진처럼 해골만 남은 채 텅 비어 있다. 마음의 심연이 붉게(살과 근육) 보이지 않는다. [주2]

 

 

그보다 오래전,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그녀는 뼈들의 다양한 이름에 매혹되었다. 복사뼈와 무릎뼈, 쇄골과 늑골, 가슴뼈와 빗장뼈, 인간이 살과 근육으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상하게 다행으로 느껴졌다. (‘흰 뼈’ 중에서, 89쪽)

 

 

생각도 고통도 없는 해골이 된다는 것은 무척 슬픈 일이다. 하지만 기막히게 좋은 일이 될 수 있다. ‘흰 뼈’라는 제목의 글은 마치 삶의 유한성을 일깨우는 ‘바니타스(Vanitas)’ 회화 속 해골을 연상시킨다. 다소 우울하지만, ‘나’가 자신의 엑스레인 사진을 보는 행위는 ‘진정한 삶을 찾기 위한 과정’에 참여했음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화된 바니타스를 탐구하는 것이다. 바니타스의 구현은 모든 것이 헛되기 때문에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진실한 의미를 찾지 않으면 무의미한 일상에 반복되는 헛됨에 사로잡힐 수 있음을 알려준다. 우리가 보는 것들은 진실일까? 허상일까? 진실이라 믿고 있었던 것들이 거짓으로 밝혀졌거나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은 현실이 진실임이 드러날 때가 있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다 진실은 아니다. 과연 검은색만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울 듯한 꺼림칙한 기분을 주는 색깔일까. 한강은 각인된 인상에 비롯된 허상을 좇는 독자들에게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던진다. 흰색에도 ‘덧없는 삶’,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이라는 이면의 진실을 감추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몸 그 자체 속에 들어 있는 해골이다. 우리가 몸속에 있는 해골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죽음’이라는 진실을 들여다보지 못하면서 살아간다. 해골을 소재로 한 글은 독자에게 자신의 진실한 내면과 만나는 기회를 제공한다.

 

<입김>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나’가 차가운 겨울 입술에서 피어나오는 흰 입김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입김이 ‘살아 있다는 증거’이자 생명의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이라고 표현한다.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덮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입김’ 전문, 89쪽)

 

 

65개의 글 전체에 슬픔과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다. 차가운 죽음과 따뜻한 삶 사이에서 삶 쪽으로 퍼져나가는 소중한 기적도 있다. 그것이 바로 ‘살아있음’을 눈으로 확인하는 확연한 증거이자 흔적이다. 비록 입김 또한 삶이 덧없다는 것을 뜻하는 바니타스 상징으로 볼 수 있지만, 따뜻한 입김의 조그만 조각도 누군가의 몸속으로 전달되어 생명의 날숨이 되어주는 소중한 매개체다. 따라서 이 글 속에서 ‘나’는 마음속으로부터 삶을 갈망하는 욕망도 얼핏 읽을 수 있다. 

 

삶과 죽음이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는 《흰》을 읽으면 무의식 속에 방치했던 기억들이 재생되고 숙연해진다. 《흰》에서 여러 종류의 사유를 발견할 수 있지만, 유독 많이 보이는 것은 삶이라는 의미와 죽음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극대화된 허무이자 절대적인 죽음의 앞에서 절망하지만, 근본적인 회의를 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죽지 마라. 제발’ 이 독백은 어찌 보면 하나뿐인 생명력이 회복하기를 원하는 간절한 외침이 아니었을까. 한강은 형용하기가 어려웠고, 두려웠을 소재를 곱씹어서 65개의 글로 종이 위에 토해냈다. 그녀의 글을 읽으면서 잠깐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준 한강 작가가 고맙다.

 

 

 

 

※ 주1) 한강의 시 「피 흐르는 눈」 1연 1행 (‘나는 피 흐르는 눈을 가졌어’,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52쪽)

 

※ 주2) 한강의 시 「피 흐르는 눈」 5연 1행 (‘마음의 심연이 붉게 보이지 않는다’,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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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6-27 21: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페이퍼입니다. 감사합니다.

cyrus 2016-06-28 11:35   좋아요 1 | URL
별 말씀을요. 책에 대한 제 개인적 느낌만 적었을 뿐입니다.

빠르릉 2016-06-27 22: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