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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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씨의 리뷰가 불량합니다. 저항기가 있군요. C급입니다.”[1]

    

 

 

인생 여정의 중간 혹은 종착점에 이르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달려온 길이 고통스러워도, 현재의 삶이 가치 있다고 느끼면 뒤돌아보고 싶은 충동은 더욱 강렬하다. 부모님 세대는 청년기에 경험한 전쟁의 참혹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 그 지옥의 시간은 이미 소설이나 영화 속 과거가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 그런 시대를 얼마간 편안한 마음으로 보며 추억하고 있다. 50~70년대 시절 부모님 세대가 겪었던 분산된 기억들을 끄집어내 영화와 소설이라는 문화적 메커니즘을 통해 조직하고, 그리하여 개인들의 체험이 보편적인 경험으로 확대되고, 세대 차원의 공통된 기억으로 자리 잡게 하는 의미가 있다. 우리의 근대사는 감히 눈을 똑바로 뜨고 바라볼 수 없었던, 힘의 논리와 저항으로 일관됐던 부자(父子) 관계의 연속이었다. 그것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향수(鄕愁)의 힘이 필요했다.

   

공터에서는 마씨 집안의 삶을 통해 우리 시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마동수는 6 25전쟁 때 이도순을 만나 고생 끝에 가정을 이룬다. 그들이 낳은 자식 마장세와 마차세도 시대의 그림자에 벗어나지 않았다. 마장세는 복역 중에 월남전에 파병되었고, 제대한 후에 괌으로 건너가 사업을 한다. 그는 자신을 가족으로부터 격리된 삶을 산다. 장남의 빈자리는 자연스럽게 마차세가 이어받는다. 마차세는 아버지의 사망과 가난 때문에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다. 학업을 포기하고 신문기자로 취업했지만, 언론통폐합 조치로 펜을 내려놓게 되고 물류회사에 재취업하여 오토바이 배달을 한다. 고달픈 시련 속에서 마차세는 박상희의 내조에 힘입어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착실하게 살아간다.

     

작가는 현대사의 주요 계기들 속에서 무기력했지만, 묵묵히 시대를 감내하며 살아온 부모님 세대에 대한, 쓸쓸하면서도 애정 어린 연민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그려진 아버지상은 그런 역사의 질곡을 다시 바라보려는 과정에서 나온 타협의 산물이다. 이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폭넓은 공감은 이 시대의 고통과 상처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공동의 기억을 토대로 세워지는 상상의 공동체는 모든 세대를 하나로 묶는 데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인간은 미래에 대한 전망보다 과거에 대한 공동의 기억으로 더 잘, 더 쉽게 하나가 되게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진부한 징후들 속에서 음습하게 스며 있는 구시대의 늙은 유령의 그림자를 함께 본다. 김훈은 소설을 통해 아버지와 자신이 살아온 시대를 그리려 했다고 말한다.[2] 그 표면적 서사 밑에 독자들, 특히 중장년층 남자 독자들을 강하게 끌어당기는 또 하나의 흐름이 들어 있다.[3] 인내심과 책임감 그리고 힘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제에 대한 매혹이 그것이다. 부모님 세대들의 영혼 깊은 곳에 유령처럼 스며들어 있는 건 전쟁의 공포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향수는 현대에 들어 힘과 권위를 상실해가고 있는 중장년층 아버지들의 어깨를 다독여주는 환상의 그림자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의아한 장면이 있다. 마차세가 일자리를 잃어 백수로 지내고 있을 때, 박상희가 그에게 집안일을 맡겼다. 마차세는 아내의 요구를 순순히 응한다.

 

박상희는 마차세가 실직한 동안에 집안일의 일부를 남편에게 맡겼다. 마차세는 가끔씩 빨래를 널고 유리창을 닦고 싱크대를 청소했다. 박상희는 그 사소한 노동으로 남편의 마음이 일상에 정착하기를 바랐다. 마차세는 아내의 마음을 짐작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195)

 

박상희가 미대 출신이라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여성으로 보일 수 있다. 이에 대한 반론은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착시에 가깝다. 그러나 국가가 가부장적 권위를 강요하던 사회적 분위기를 생각해보시라. 1970년대의 여성은 보수적 분위기로 인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에 흡수될 수밖에 없었다. 가부장적 가치관을 등에 지고서 억척같이 밖에서 일했던 아버지들은 이 장면을 어떻게 볼지 무척 궁금하다. 아버지들은 집안일은 '아내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내를 존중하는 마차세의 배려심에서 비롯된 것처럼 그려지지만, 아무래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에게 호되게 당한 적 있는 작가가 의도적으로 여성성을 강조하고 싶은 걸까. 작가 입장에서는 이런 표현을 시도해볼 수 있지만, 조금은 생뚱맞게 느껴진다.

     

세대 갈등은 아버지와 아들의 불화(不和)’에 비유되곤 한다. 아버지 부정(否定)’은 누구나 한 번쯤 겪는 진통이다. 마차세는 아버지의 자리에 서면서 비로소 아버지를 이해하고 화해하게 된다. 박상희는 산파가 산모의 출산 과정을 돕듯, 마차세의 마음을 옥죄이는 아버지의 존재감을 떨쳐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그녀의 역할은 마동수의 아내이자 마장세 · 마차세의 어머니 이도순의 존재감을 위축시킨다. 이도순은 숨 가쁘게 달려온 현대사의 그늘에서 인고와 희생으로 우리 가정과 사회를 지탱해온 우리네 어머니들의 원형이다. 70년대엔 인내 · 순종 · 희생의 어머니상이 지배적이었다. 이도순은 마장세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의 고통을 언어로 호소한다.

 

너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무슨 헛것이 씌었는지 도통 밖으로만 싸지르고 두어 달에 한 번씩 집에 오는데, 왜 오는지 모르겠다. 내가 그 인간하고 살을 섞고 살아서 너희들을 내지른 세월을 생각하면 내 가슴에서 벌레가 끓고 들불이 인다. 너는 힘들고 쓸쓸하면 너보다 더 쓸쓸한 이 어미를 생각해라. 그게 내가 하려는 말의 전부다. (170)

 

가부장제의 큰 피해자는 아내어머니의 역할을 맡은 여성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은 개인이 되지 못했고, 자기 언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여성을 무겁게 짓누르는 가부장제 사회에 도전하고, 반항하는 소수의 목소리들도 있었다.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자행되는 여성에 대한 가부장제의 압력 앞에서 개인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한 목소리이다. 그런데 박상희는 힘들고 쓸쓸한이도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소설 속 박상희는 마차세의 아내로서의 역할을 보여줄 뿐이다.

 

박상희 : “어머니는 어땠어?”

마차세 : “그저 그래. 잠든 거 보고 왔어.”

박상희 : “어머니보다 당신이 더 가엾어.”

 

(245)

 

박상희는 치매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홀로 돌보는 남편의 정신적 부담감을 이해한다. 그녀는 마차세를 어머니보다 더 가엾은 남편(아들)’으로 바라본다. 그녀의 시선은 홀로 사는 어머니와 가족을 충실히 돌보는 가장의 고통을 부각할 뿐, 어머니의 고통을 외면한다. 이러한 박상희의 시선은 사회적 가부장제의 전형을 보여준다. 바로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가 그대로 반영됨을 의미한다. 박상희는 무의식적으로 가부장제 유지의 정당성에 가담하고 있다.

 

아버지, 아들로 이어지는 수직적인 가부장제 위계구조는 아들들을 또 다른 가부장으로 만든다. 마차세는 빈약한 물적 토대를 세워야하는 가부장이 된다.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니는[4] 마동수와 마차세는 지금 현실에서 강력한 권위를 가진 가부장을 갈망하는 중년 남성들의 무의식의 초상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40대 남성 독자들이 김훈의 소설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공터에서는 모든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실패한 소설이다. 김훈은 과거 가부장제의 환상에서 깨어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는 이번 신작 소설을 통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고 밝혔지만, ‘여성도 슬퍼했고, 아팠다라고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1] 원문은 김훈 공터에서193쪽

 

[2] <소설가 김훈, 장편 공터에서출간 “70년간 갑질의 시대아버지와 내가 살아온 야만의 시대를 그렸다”> 경향신문, 201726일자

 

[3] <김훈 공터에서베스트셀러 종합 1“40대 남성 독자 지지”> 아시아경제, 2017224

 

[4] 나의 등장인물들은 늘 영웅적이지 못하다. 그들은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리고, 죄 없이 쫓겨 다닌다. 나는 이 남루한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작가 후기, 공터에서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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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7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2-28 13:05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소설처럼 과거를 이해하면서, 희망을 발견했음을 암시하는 전개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전개는 단순하고, 뻔합니다.

이 소설의 독자서평을 다 읽어봤는데요, ‘아버지‘라는 인물에 초점을 맞춘 평이 많았어요. ‘어머니‘ 이도순에 대해 짧게나마 언급한 독자서평은 알라딘에 1편뿐이었습니다. 이도순도 마동수 못지 않게 힘들게 살아왔고, 개인적 상처가 깊은 인물입니다. 박상희가 마차세에게 ‘어머니보다 당신이 더 가엾어‘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고, 황당했습니다. 박상희를 제외한 마씨 집안 사람들 모두 가엾은 인물입니다.

레삭매냐 2017-02-28 09: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설의 시작이자 끝이 왜 독재자가 죽은 기미년
으로 잡았을까 궁금해집니다.

그 뒤의 등장할 격동의 현대사를 다룰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작은 의구심이 듭니다.

cyrus 2017-02-28 13:06   좋아요 0 | URL
그렇게 볼 수 있군요. 저는 시대적 배경과 이야기 전개 구조에 대해서 생각한 적이 없었어요. ^^;;

스윗듀 2017-02-28 16: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 cyrus님 문학동네이벤트 당첨되셨던데.... 50권이라니요..! 이거야말로 책심은데 책나고 가진 자가 더 가지는 상황 아닙니까? 에잇 ㅋㅋㅋㅋㅋㅋ 축하드려요!!

cyrus 2017-02-28 16:30   좋아요 1 | URL
이벤트 당첨 사실을 알리지 않는 성격이라서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걸 보셨군요.. ㅎㅎㅎ 축하 인사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

knulp 2017-03-01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리하게 분석하셨네요. 저 역시도 김훈의 글에 열광하는 1인. 뭐 가부장제에 딱히 동의하진 않지만 그의 문체가 좋습니다. 무겁고 무거운. ㅎㅎ 그래서 읽어요. 시대 의식도 강하고. 서평이 큰 공부가 되었습니다.

cyrus 2017-03-02 13:49   좋아요 0 | URL
저도 김훈 작가의 문체, 특히 그 문체의 매력이 많이 발산되는 산문을 좋아합니다. 이번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문체가 미장세가 초콜릿 한 입 베어 먹는 순간을 묘사한 내용이었습니다. ^^
 
라요하네의 우산
김살로메 지음 / 문학의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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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는 곳에서라면 어디에나 있는 ‘관계’. 그 다양한 맥락 속에 거짓과 위선, 희망과 진실이 한데 엉킨 삶의 모습이 있다. 김살로메의 소설집 《라요하네의 우산》에는 관계 맺기에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나온다. 인간 사이의 관계 맺기는 이 소설에서 중요한 핵심이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캐고 보듬는 가운데 얻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관계의 본질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은 운명적으로 자신의 타자가 된다. 작가는 “내 안의 위선과 진실, 내 안의 악마성과 순진성 사이에 소설이 존재”[1]한다고 말한다. 이런 이중성 때문에 일상의 삶은 흔들리고 부서진 것이 되며, 때로는 그것마저 실재감을 잃어버린 환상으로 빠져들기도 한다. 타인과의 관계 맺기 역시 불모와 불가능, 변질로 끝나기 십상이다. 자아의 정체성이든, 타자와의 관계든 거기에는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일’[2]이 깃들여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고통스럽고 부끄러운 일’을 공감하고 탐색하는 자세가 삶을 구성하는 능동적인 힘임을 믿는다.

 

『알비노의 항아리』의 주인공들은 빙 둘러 가는 접촉을 통해 힘겹게 관계 맺고 있다. 남편과 아내는 너무 다르다. 남편은 굳건한 일상의 틀을 지키면서 평범하게 살아가지만, 아내는 피부와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하는 알비노(Albino)라는 희귀 질환을 겪고 있다. 이 병의 원인에 대해 사람들의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아내는 태어날 때부터 환영받지 못하고 선입견 속에 살아간다. 일상의 세계는 인간끼리의 접속이 힘들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위험에 노출돼 있다. 아내의 소변을 정력제로 확신하는 남편의 어머니는 말해지지 않은 부부 사이 마음의 틈을 점점 벌어지게 한다. 언제 깨질지 모른다. 아무리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만 언제 깨질지 모른다. 그러나 마침내 부부는 서로 참다운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합일될 수 있는 관계에 도달한다.

 

『암흑 식당』은 자신에게 부과된 강제적 현실에서 벗어나려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준다. 우리 자신들이 모순적으로 겪고 있는 내면적 그늘을 남다르게 포착해내는 깊이를 내보이고 있다. 암흑 식당은 형상이 유발하는 선입관과 현혹이 완전히 차단되는 장소다. 그래서 지겨운 일상에서 눈을 돌려 암흑 식당 안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는 은밀해서 달콤하다.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의 가면을 벗기 위해 진짜 가면을 쓴 암흑 식당 손님들의 기이한 관계 맺기는 타인의 욕망 대상이 된다. 섹스는 이성적 합일을 완성할 수 있는 가장 극적인 체험이지만, 이 소설에서는 섹스조차도 그토록 열망한 사랑의 확인이 아니라 현대인의 불행을 보여준다.

 

작가는 『라요하네의 우산』에서 불안한 인간의 내면을 무심하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조각난 사건들을 보여주면서도 어떤 가능한 자기만의 세계를 그려낸다. 소설의 등장인물 샌드리는 시메트리(symmetry) 증후군에 시달린다. 그녀는 ‘균형’이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고 그 이미지의 압박감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이 소설에서 언급되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샌드리가 자신의 삶 속에 묻혀 있는 상처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자기 앞의 생》은 합리적인 우리 삶의 심층에 자리 잡은, 남모르게 앓고 있는 고통에 주목하는 문학 고유의 영역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누구에게나 평범하게 보이는 일상적 관계의 뒷면에는 잊힌 상처가 있다. 그것은 선천적으로 기형적인 육체의 아픔일 수도, 인간 사이에서 주고받는 고통의 기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두는 상처라는 이름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다. 《라요하네의 우산》의 매력은 요란스런 사건의 전개 대신 일상생활 속 아픔과 극복 과정을 잔잔한 어투로 복원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정신적 상처와 결핍의 모습은 생활을 통해 간간이 새어 나오는 슬픔이다. 있는 그대로, 자신을 상대방에게 속이지 않고, 또 자신을 속이지 않고, 자신의 나약함을 상대방의 결점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는 것. 그것이 이 소설집에서 확인할 수 있는 상처 치유력을 가진 정신적 약재들이다. 관계의 어긋남에서 비롯된 상처란 다시 관계 속에 던져져야만 진실하게 아물어 갈 수 있다.

 

 

 

 

[1] 작가의 말, 317쪽

[2] 『라요하네의 우산』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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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2-03 14: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럼요..관계함으로써 상처가 없을 수가 없죠..서로 생채기를 내고..다시 보듬고..그래서 아물고 ...그러므로써 관계가 더 단단해져야하거든요..문제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이거 없다면 관계 자체가 성립하지 않으니까요. 가급적이면 서로가 상처를 주고 받기보다는 위로와 헌신과 희생으로 오고가면 더 좋겠지요.....

cyrus 2017-02-03 17:13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면 감정이 상하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살면서 겪어야 할 일입니다. 서로 간에 감정이 다치지 않도록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정말 중요합니다. 이게 안 되면 어렵게 맺은 관계를 회복하기 어려워요.

페크pek0501 2017-02-03 15: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통스럽거나 부끄러운 일’이 나만의 경험이 아니고 다른 누구도 겪은 일이라는 걸 확인할 때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요즘 공감하는 친구가 참 필요한 거구나, 친구 없는 사람은 외롭겠구나, 생각하게 되어요.
제일 듣기 싫은 말 중 하나는 ‘복에 겨워 그러는거야.˝라는 말이에요. 같은 일이라도 사람에 따라서 느끼는 강도가 다름을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우리 모두요...

cyrus 2017-02-03 17:16   좋아요 0 | URL
오늘 본 인터넷 뉴스 내용인데요, 30대 이후부터 친구 수가 줄어든다고 합니다. 저도 20대 후반을 살아오면서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친구가 소중한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2017-02-03 16: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3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4 09: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2-04 10: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스 함무라비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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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헌법 제11조 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 · 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 · 경제적 · 사회적 · 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법 조항은 일반적 평등조항으로 성 평등권을 명시한 것은 아니다. 성 평등은 한 사람의 남성과 한 사람의 여성 사이의 평등이 아닌,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불평등을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이 법에 보호받는다’는 발상의 이면에는 남녀는 같지 않으므로 결국 동등하게 볼 수 없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여성의 평등권은 법적인 면에서 보장되고 있지만, 여전히 형식상으로 인정될 뿐 불평등이 잔존해 있는 게 사실이다.

 

‘법’이라는 다소 어려운 주제를 웃음으로 버무려 낸 《미스 함무라비》는 부담 없고 통쾌한 장점이 한껏 돋보인다. 특히 우리 사회에 여성차별이 얼마나 뿌리 깊게 박혀있는지 놀랄 만큼 생생하게 그려냈다. 여성차별 문제라면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무관심한 남성들이 대부분이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힘이 남성보다 부족하기에 폭력을 행사함은 물론 부적절한 성차별적 언행을 한다. 정의 실현의 최후 보루인 법정 안에서도 여성차별은 엄연히 존재한다. 《미스 함무라비》는 습관이 돼버린, 그래서 더 무서운 성차별의 형태를 자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초임 판사 박차오름이 보고 겪은 일상적인 성차별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삶을 되짚어 보면서 때로는 뜨끔한 느낌을 받게 한다.

 

‘여자는 여자답게 조신해야 한다’, ‘성범죄는 짧은 치마를 입은 여자가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한세상 부장의 논리는 성폭력이 권력 관계에서 강자가 약자에게 성적으로 가하는 폭력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데서 나온다. 이런 관계는 피해자들의 저항을 어렵게 하고, 가해자의 법적 처벌을 면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만든다. 그리고 가해자들의 권력에 의해 이들 사건은 곧잘 왜곡되거나 은폐됐다. 아르바이트 여대생을 성희롱한 홍보부 차장의 아내는 가부장제 문화에 매몰된 여성이다.[1] 그녀는 신입사원 시절부터 남성 중심적 질서에 타협하여 살았기 때문에 남편(가해자)의 잘못보다는 피해 여대생의 품행을 의심한다. 그녀의 입장은 사회생활을 통해 더욱 강화돼 남성중심문화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서로 알고 있는 부부 사이에 일어나는 ‘아내 폭력’에도 여성책임론은 영락없는 단골 메뉴다. ‘아내 폭력’은 성차별적 가부장제에 의해 남편이 아내에게 가하는 신체적 · 정신적 폭행이다. 남편의 구타에 시달린 아내는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 자기방어에 가까운 범행을 저지른다. 그러나 아내가 휘두른 칼에 찔린 남편과 담당 변호사는 가부장적 권위를 앞세워 아내를 ‘서방 죽인 년’으로 몰아세운다.[2] 아내가 겪는 폭력의 심각성과 공포를 잘 모르는 법조인은 구타 피해가 입증돼도 가해자에게 미약한 수준의 처벌을 내린다. 폭력의 고통을 당해본 다음이 아니고서는 남편을 죽인 아내의 죄과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다. 박 판사는 어린 시절 ‘아내 폭력’의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했다. 그녀는 아빠에게 구타당한 엄마가 본연의 목소리를 잃고 정신적 외상을 입는 모습을 기억한다. 엄마는 남편의 명예와 딸의 행복을 위해 마음을 닫아걸고 억압을 표현할 용기를 잃었다. 박 판사는 이런 침묵 뒤에 가려진 피해 여성들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성차별과 성폭력은 한 인격을 모독하는 것이며 인권을 유린하는 행위다. 더욱이 인권을 보호해야 할 법원이 유독 이 문제에 대해 여성에게 불리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법원이 아직도 가부장적 문화를 방증하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한 부장처럼 남성중심주의 시대에 보호를 받고 자란 남성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그동안 억압받고 눌려왔던 여성들이 자기 자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을 자신들에 대한 복수나 억압으로 생각한다. 부당한 사회에 향한 여성들의 목소리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보복이 아니다. 어떤 사회 변화를 겪어도 남성과 여성이 공존하면서 사는 것은 불변의 진리다. 여성의 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아야 한다.[3] 성차별과 성폭력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혜안을 모아 여성의 인권을 유린한 자를 엄단하는 법조인이 많이 나오길 바란다.

 

 

 

 

 

[1] 《미스 함무라비》, 105쪽

[2] 같은 책, 339~341쪽

[3] 같은 책, 125쪽(“권리 위에 잠자는 시민이 되지 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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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1-23 11: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을 만해서 때린다는 논리로 아이, 여성, 성별에 상관없이 폭력을 가하던데, 그 논리는 악행의 합리화일 뿐이죠.

cyrus 2017-01-23 14:59   좋아요 1 | URL
그런 논리는 맞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상대방을 약자로 설정합니다. 그리고 사실과 다르게 부당한 편견을 심어줍니다. 그래서 가해자가 ‘맞을 만해서 때린다’라고 주장하면 강자의 논리가 되어 자신의 폭행을 정당화합니다. 정말 위험한 발상입니다.

해피북 2017-01-23 16: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애너벨 크렙의 말이 떠오릅니다. ‘왜 여성 위인은 나오지 않는가‘ 외쳤던 그녀의 책(아내가뭄)이 말이죠 ㅎ 법조계에 여성이 많지 않은 것도 문제라고 생각합니다.아무리 여성들이 남성의 마음을 안다고 해도 다 알 수 없는거처럼 남성으로 이뤄진 법 테두리 안에서는 여성들의 불합리함을 속시원이 풀어내줄 사람이 없는것도 문제가 아닐까해요. 공감이 있어야 이해가 될텐데 말이죠. ㅎㅎ 잘 읽고 갑니다.

cyrus 2017-01-24 11:53   좋아요 0 | URL
제가 마침 정희진의 <아주 친밀한 폭력>과 애너벨 크랩의 <아내 가뭄>을 읽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남성은 이성, 여성은 감정이라는 편견이 법조인들에게도 남아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이런 편견 때문에 여성 법조인은 사건을 이성보다는 감정에 기대어 해결할거라고 착각합니다. ^^;;

무식쟁이 2017-01-23 17: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상에서 습관화 되어 있는 성차별 언행들을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걸러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참고 넘기는 건 곧 묵인하는거고, 묵인은 동조의 의미이므로.

cyrus 2017-01-24 11:55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제 자신에게 늘 주의를 줍니다. 여성에 향한 잘못된 언행이 나오면 그 자리에 반성하고,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가볍게 넘기는 것도 여성 차별을 강화하는 묵인과 동조의 의미입니다.

레삭매냐 2017-01-24 1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대회 참가하려고 도서관 대출을 기대해
보았지만, 선 대출자가 있어서 결국 빌려 보지
못했네요.

물론 사서 읽는 수고도 하지 않았구요. 대신
이렇게 간접으로나마 읽고 갑니다 :>

cyrus 2017-01-25 10:44   좋아요 0 | URL
사실 저도 이 책을 도서관에 빌리려고 했다가 이미 대출된 상태라서 포기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시청이 운영하는 작은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이 책을 봤습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
 
스파링 - 제2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도선우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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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저녁 여덟시 ‘뉴스룸’을 시청하고는 또 하루를 접는다. 그런데 매일매일 접하게 되는 뉴스이건만 한결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를 우울하고도 서글프게 만든다.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이 시대 사람들의 반응은 거의 무감하다. 사실 그것들은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되었고 또 그 존재를 이제 당연시하는 세태를 발견하게 된다. 번듯한 대학을 나와도 밥벌이를 찾을 수 없는 사회, 속고 속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불신, 상생(相生)할 수 없는 경쟁, 극에 달한 지도층의 부패……. 문제는 이 세상의 틀에 들지 못하면 낙오자가 되어버린다.

 

1956년인가. 그해에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outsider))》라는 책이 나왔다.아웃사이더는 세계와 자아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또한 그것을 반세계적으로 해결하려는 자들이다. 그로부터 60년이 흘렀다. 콜린 윌슨이 떠나고 없는 이 세상에 아웃사이더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장태주. 그는 사회와 화해하지 못하고 불온하다.

 

남과 같지 않다는 게 꼭 불행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남과 같지 않으려 노력해서 얻은 세상에서 살아간다면 그게 도리어 더 가치 있는 삶일 수도 있었다. (《스파링》 18쪽)

 

도선우의 소설 《스파링》에서 일찍이 세상에 환멸을 배운 주인공 장태주는 현실의 흐름, 그리고 그 속에서의 자신의 변화를 부정하거나 못 본 체해야만 한다. 이것은 분명 퇴행이고 나쁜 선택이다. 시련이 많았던 소년기를 지나 오염된 어른들의 세상으로 가기 위한 사내의 통과의례라고 하기엔 너무나 극단적이다. 하지만 세계에 냉소와 환멸을 표하는 성숙한 아웃사이더는 성장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매력적인 존재이다. 소설이 좋은 반응을 얻은 이유는 ‘참을 수 없는 저항’을 분출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공감을 얻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인물 설정이 성장소설에서 봤을 법한 클리셰로 반복되고 있는 것은 지적할 만한 문제다. 하지만 가장 이상한 것은 소설 안과 밖을 하나로 묶어주는 연민의 최면, 즉 자기 연민에 빠진 주인공을 연민하게 하는 최면이다. 여기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독자가 장태주를 연민할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그건 달리 말해, 인사이더(insider)에 속한 독자들이 정말 반역의 삶을 선택한 장태수를 옹호할 위치에 있는가에 대해 되물어야 한다는 의미다. 장태주는 세상과 잘 타협하지 못하는 비주류 삐딱이 그 자체다. 웬만한 인간은 모두 펀치를 날리며 읊조리듯 씹어대는 그의 독백에는 체제에 순응하기 위해 모순된 이중성에 눈감은 인사이더에 대한 혐오감이 담겨 있다.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 그 단어는 가면으로 이용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정의가 일종의 가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즈음에 이미 깨달았고, 살아오는 내내 그 가면을 어떤 인간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줄곧 봐왔다. 그것은 실로 역겨운 인간들의 전유물이었다. (63쪽)

 

인사이더는 어느 정도는 사회와 개인적 가치관의 불일치 그리고 되풀이되는 사회 악습의 심각성에 대해 고민하지만, 그것의 원인이나 문제점에 대한 생각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여기서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의 차이가 명확하게 대비된다. 아웃사이더는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집요하게 또는 너무 깊게 그리고 너무 많이 보려고 한다. 장태수는 인사이더들이 보지 못하거나 애써 무시하려 하는 지배 질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조롱했다. 《스파링》을 읽은 독자들이 불쾌한 세상에 통쾌한 주먹을 날리는 장태주에 열광하고, 그를 응원하는 반응에 그친다면 ‘무임승차’하기를 서슴지 않는 방관자에 남을 뿐이다. 사회적 실천에 뛰어들어 문제해결에 동참하고 그 열매를 나누어 가지려 하기보다는 뒷짐 진 채 뻔뻔한 얼굴로 방관만 하는 사람. 장태주는 이런 사람을 싫어한다. 이를 복싱 용어로 적용한다면, 목숨 거는 것에 두려워 피하기만 하는 아웃복서(Out boxer)다. 담임은 장태주에게 복싱의 의미를 가르치면서 정면승부를 펼치는 인파이터(infighter)가 되라고 강조한다. 인파이터는 오늘의 불합리한 사회체제를 정면으로 극복하고자 노력하며 더 좋은 사회를 꿈꾸는 아웃사이더와 비슷하다.

 

두 번째 질문은, 주인공에 향한 연민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결말에 대한 의문이다. 혹시 이 허접한 서평을 보고 있을 작가에게 한 번 묻고 싶다. 이게 최선입니까? 확실해요?[1] “내가 당신들한테 뭘 잘못했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장태주의 질문을 들은 나 역시 소설 속 기자들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이 말의 의미를 생각해봤다.[2] 《스파링》은 시종 건조한 장태수의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하면서도 그를 통해 독자의 감정적 혼란이 임계점에 이를 때까지 독하게 밀어붙인다. 그런데 자신을 괴물로 설정하는 세상에 향한 장태주의 질문은 ‘날 좀 제대로 봐 줘’ 식의 유아적인 칭얼거림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이라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장태주에게 사랑의 필요성을 알려주기 위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등장하는 설정은 뜬금없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ina)’다. 작가가 ‘사랑의 구원’이라는 결론에 기대는 것은 아웃사이더의 저항을 비웃으면서 가장 앞장서서 난타하고 있는 인사이더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곧 누군가를 희생제의 제물로 삼으면서 본심은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려는 자들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우회로가 된다. 이 모호한 위치의 ‘사랑’은 최면제가 되어 독자의 반성을 마비시킨다.

 

장태주는 마음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은 채 미래조차 불투명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장태주의 무력함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무력함이 자기 연민으로 이어진다면, 그 어디서도 출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세상과 화해하지 못한 장태주의 결말은 투정만 부리다가 성장을 멈추어버린 소년이나 다름없다. 이런 점에서 《스파링》은 성장소설이라 할 수 없다. 장태주만의 사랑이 있고, 그가 행복할 수 있는 세계는 찾기는 쉽지 않다. 없는 세계(Utopia)이기에 또다시 절망하지 않을 수밖에 없다. 불행하게도 이 세상에 수많은 장태주가 있다. 살아가야 할 방향의 선택을 확인할 여유도 주지 않는 세상의 혼돈 속에서 방황하는 젊은 세대는 슬퍼하고만 있다. 과연 이들은 장태주처럼 거대한 세상에 멱살을 부여잡고, 거부하는 몸짓을 할 수 있을까. 아웃사이더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1] 드라마 ‘시크릿 가든’ 대사

 

[2] “내가 당신들한테 뭘 잘못했습니까?”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은 기자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내가 하는 말의 의미를 다른 이들에게 묻듯, 서로 얼굴을 돌아보면 눈치를 살폈다. (《스파링》 3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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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7-01-24 17: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알던 분이 쓴 책이라 서점에서 읽기에
도전했지요. 딱 101쪽 읽고 나서 고만 읽었어요.

나머지는 나중에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려구요.
아직 도서관에 안 들어온 모양이네요.

책 읽으면서 리뷰 제목도 정해 놓았었는데 다
잊어 버렸네요. 인간은 참 망각의 동물인가 봅니다.

cyrus 2017-01-25 10:48   좋아요 1 | URL
작가분이 네이버에 서평 블로그를 운영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았습니다. 한 번 그 분의 블로그를 봤는데 역시 일반 독자서평과 다른 아우라를 느꼈습니다. 알라딘에서만 활동하니까 네이버에 서평을 쓰는 좋은 독자들의 존재를 보지 못했었습니다. 작년에 예스24 블로그를 만들면서도 느꼈지만, 제가 그동안 알라딘 램프 안에 오랫동안 있었습니다. 생각보다 책을 좋아하고, 좋은 서평을 쓰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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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 원래 조직폭력배라는 의미로 사용돼온 경찰 전문용어였다. 지금 조폭은 가장 익숙한 말 중 하나가 됐고, 그 실체는 일상적인 존재가 되었다. 각종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문화 속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조폭들의 모습은, 우리에게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아마도 배신과 불신이 판치는 세태에 거친 사나이의 야성적 매력과 자기들끼리긴 해도 끈끈한 의리랄지 우정 같은 것들이 재미를 주기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천명관의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는 조폭물의 세계를 비꼬고 희화화한 코미디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천 뒷골목 조폭 두목과 건달들은 그저 우습거나, 망가지는 존재로 묘사된다. 작가는 처음부터 익숙한 조폭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시종일관 액션과 웃음 속에 막판 감동을 살짝 끼워 넣는 뻔한 줄거리의 조폭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기 위해 노력한다는 점이 돋보인다. 의리나 인정 같은 조폭 세계에 대한 알량한 미화는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생존을 위한 싸움에 휘말린 인물들의 이야기 속에서는, 조폭 그 자체보다는 남자들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일상적 폭력성과 먹이 사슬을 형성하는 사회 구조의 모순에 대한 공포가 더욱 구체화하여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건달 울트라는 정식 조직원이 되는 것이 꿈이다. 그런데 그가 심부름을 가던 도중 재수 없게 일이 꼬이는 바람에 조직원 전체가 원산폭격(손을 뒤로하고 머리를 박는 벌)’을 받게 된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울트라는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당해 공포를 느끼기 시작한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단체로 요가라도 하는 중인가? 울트라는 단순하고 무식했지만 그래도 예감이라는 게 있었다. 그 예감은 뭔가 일이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울트라는 답답하고 무서워 미칠 것 같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못 본 척 사무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오금이 저려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41)

 

이 소설에 묘사된 조직 내 가혹 행위는 남자들이 말하기 불편했던 익숙한 문제이기도 하다. ‘원산폭격은 지금은 사라진 군대식 기합이다. 과거에는 연대 책임이라는 군대 문화 때문에 장병들은 연일 군홧발에 죽도록 맞고 원산폭격을 밥 먹듯 했다. 의무적으로 군대에 몸을 담게 되는 대한민국 남성은 두 가지 선택을 강요받는다. 적응할 것인지, 반항할 것인지. 그러나 개인의 힘으로 군대의 조직문화에 반항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상 한 가지의 선택을 강요받는 셈이다. 그렇게 대한민국 남성들은 권위에 복종하고, 불의와 타협하는 법, 비합리적 상황에 맞서기보다는 적당히 피하는 법을 배운다.

 

군대에 다녀와야 사람이 된다는 말을 누구나 들어봤을 것이다. 이 말은 곧 군대에 다녀와야 복종과 포기를 내면화할 수 있다는 말과 같다. 다시 이 말을 조금 순화하면 군대에 다녀와야 사회생활 잘하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런 말은 명백한 불의와 부조리에도 불구하고 원래 조직사회란 그런 곳이라고 합리화하는 수단일 뿐이다. 엄격한 위계질서와 상명하복의 원리는 군대뿐만이 아니라 많은 조직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내리 갈굼으로 표현되는 일방적 의사소통 구조, 강요되는 복종의 문제는 비단 군대 내의 문제만은 아니다. 좀 더 넓게 보면 권력에 의한 일상적 폭력은 가정에서도 일어난다.

 

인천 연안파 두목 양 사장의 유년시절은 참혹하다. 그는 뱃사람이었던 아버지의 폭행에 시달렸다. 아버지 때문에 어둡고 좁은 어창에 사흘 동안이나 갇히는 바람에 아사 직전, 죽음의 위기까지 갔다. ‘물고기 썩은 내가 진동하는어창에 갇힌 양 사장의 기억은 어린아이에게 있어 감당하기 힘든 정신적 충격이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양 사장의 정신적 탯줄이 끊겨버린다. 그렇게 일찌감치 존재의 연줄이 사라져 버린 양 사장은 남성성을 통해 자신을 살찌우면서 뒷골목 세계에 살아남는 법을 스스로 터득한다. 조폭 집단은 모든 권력이 한 사람, 즉 두목에게 집중되어 있다. 그는 강한 남성으로 행사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상처의 기억을 잊으려고 한다. 작가는 이런 양 사장의 심리적 경험을 따라가면서 그것이 왜곡된 남성성에 대한 집착임을 짚어낸다.

 

그러나 이런 세밀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가 관습화된 조폭물을 넘어설 만큼 특별한 무엇을 보여줬다고는 평가하기 힘들다. 작가가 노골적으로 묘사한 수컷의 모습들은 시시콜콜 헤집을 것까지도 없다.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려고 군대 미담을 언급하거나 지나가는 여자들의 몸매를 관찰하면서 희희낙락거리는 사내들의 모습은 남자들끼리 모여 있을 때 등장하는 공식 클리셰(Cliché). 무망한 목표를 위해 거칠고 물불 안 가리는 위험한 열정을 과시하면서 사력을 다하는 건달들의 모습은 우리 남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실상 남자는 상처를 지닌 하나의 작은 인간에 불과하다. 약점을 지우려고 남성성을 과시하려는 동족들의 호들갑이 불편하고,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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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9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11-29 19:51   좋아요 1 | URL
그쪽 세계를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더 무섭게 느껴져요. 제 친구 중에 조폭으로 활동하고 있다면, 연락을 끊을 겁니다. 괜히 친하게 지냈다가는 엉뚱한 일에 휘말릴 것 같습니다. ^^;;

자강 2016-11-29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봤습니다~ 수준높은 리뷰를 보니 같은 책 다른 리뷰라는 말이 머리속에 내내 남는군요 ㅜㅜ

cyrus 2016-11-29 19:55   좋아요 0 | URL
과찬입니다. 알라딘에 리뷰를 꾸준히 기록하시는 분들 보면 대충 쓴 티가 나지 않고, 생각 정리가 아주 잘 되어 있어서 읽기 편합니다. 자강님도 그러한 분들 중의 한 분입니다. ^^

stella.K 2016-11-29 17: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군대를 갖다 왔야 한다는 진짜 속내는 네가 지적한 말이 맞긴 할 거야.
근데 그것도 한끗 차이 아닌가?ㅋ
또 어떤 면에선 그게 여자들에겐 다소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고.
여자는 결국 거의 대부분이 의젓하고, 힘 세고, 자기를
보호해 주는 남자를 좋아하거든.
그리고 군대 안 갔다오면 엉덩이 뿔난 망아지 같다고 싫어해.ㅎㅎㅎㅎ

cyrus 2016-11-29 20:00   좋아요 0 | URL
맞아요. 노골적으로 말하면 남자 취급 안 해줘요. 저는 그런 상황을 지켜봤어요. 대학교 다닐 때 사정상 군대 안 간 선배가 있었어요. 제가 좀 눈썰미가 있는 편인데요, 예비역 선배들이 그 선배를 은근히 무시하는 태도가 보였어요. 제가 군대 안 간 선배 입장이었다면 그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았을거예요. 친한 척하면서 속으로 무시하는 사람들을 싫어하거든요. ^^;;

수다맨 2017-07-26 0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인 주관을 말하자면 천명관 소설은 수준 편차가 상당히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쓰인 소설(예컨대 ˝고래˝)은 맛깔나고 기름진 장광설의 향연을 보여주는 데 반하여 범작이나 졸작으로 분류되는 작품들은 재미와 의미를 확보하지 못하고 작가가 무절제하게 뱉어 놓은 요설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인상을 주더군요. 박하게 말하자면 저는 천명관이 ˝고래˝라는 기념비적 작품 이후로는 그가 가진 문학적 명성에 걸맞는 소설을 쓰지 못했다고 봅니다. 그는 확실히 구라를 푸는 재주는 탁발한 작가인데 그 구라가 깊이가 떨어지는, 범속한 수준에서만 계속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cyrus 2017-07-30 09:58   좋아요 0 | URL
오래 전에 독서모임에 가면 사람들이 가끔 천명관의 소설을 많이 언급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많이 호평한 천명관의 소설이 <고래>였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 이후에 나온 천명관 작가의 작품들에 대판 평가는 부정적이었습니다. 수다맨님이 말씀하신 것과 거의 비슷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