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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지식총서 예술-인간 정신의 위대한 발현 세트 - 전5권 -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살림지식총서
권용준 외 지음 / 살림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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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플라톤 아카데미 행복한 책날개 선정도서 - 그리스 미술 이야기(노성두 저, 살림지식총서 114)

 

 


 Scene #1  그림의 기원은 그림자다

 

램프 하나가 어둠을 밝히고 있는 방 안에서 옆모습의 여인이 남자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고, 반쯤 앉은 자세로 여인을 부둥켜안은 남자의 얼굴은 위로 젖혀져 있다. 오른쪽에 있는 램프 불빛으로 여인의 옷과 목덜미가 환하게 빛나고 있고, 여인의 옆얼굴과 남자의 몸은 절반가량 어둠에 잠겨 있다. 왼편 벽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데, 여인은 연인의 등 너머로 벽에 비친 그림자의 윤곽선을 따라 남자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이별을 앞두고 자기 애인을 그림으로나마 간직하기 위해 벽에 비친 연인의 그림자를 그대로 따라 그리고 있는 여인은 고대 그리스의 도공 부타데스의 딸이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플리니우스는 저서 『박물지』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보조물로 그림자를 잡아두는 여인의 이야기가 서양회화의 시초를 알리는 것이라고 전한다.

 

‘실제 대상-그림자-회화’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 속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그림 그리기, 나아가 예술적 표현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전제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적 표현은 사적 욕망의 구체화라는 것,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욕망의 대상에 다가가고자 하면 할수록 그 대상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시간의 퇴적 속에서 예술적 표현의 방식이 보다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면서 이제 우리는 예술에 대한 원초적 욕망을 그저 희미한 화석으로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Scene #2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제욱시스의 포도 그림 주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묘사한 상상도

 

 

어느 문명,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과거에는 미술가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낼 때 ‘실물처럼 생생한’이라는 표현을 써 왔다. 신라시대의 화가 솔거에 대한 기록을 보면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각종 새들이 진짜로 알고 날아들다가 부딪쳐 떨어지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일견 상투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동물이든 사람이든 간에 관객의 눈을 속일 만큼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는 화가나 조각가의 놀라운 기술을 강조하는 이러한 일화들은 동,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자주 발견된다.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경쟁 이야기는 서양 미술사에서 특히 유명하다. 제욱시스는 포도를 너무도 잘 그려서 새들이 쪼아 먹으려고 달려들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너무나 자랑을 하자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를 불러다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 위에 천이 드리워져 있어서 이를 걷으려던 제욱시스는 천 자체가 파라시오스의 그림인 것을 뒤늦게 알고 감탄하면서 새를 속인 자신보다 화가를 속인 파라시오스가 한 수 위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그림들 모두가 현재 우리들의 눈에도 실물로 착각될 정도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었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화가는 대상으로부터 그것을 그것이게 만드는 것, 즉 대상의 본질을 뽑아내 화폭 위로 끌어온다. 그리고 대상에 우연히 덧붙여진 부수적인 요인들을 걸러내 제거한다. 본질이 아니면, 가장 인상적이고 강렬한 것, 그것을 미메시스(mimesis)는 드러낸다. 무명으로 알려진 도공의 딸부터 시작해서 고대 그리스 화가들은 가상의 공간 속에 현실을 옮겨놓는 예술적 미메시스를 시도했다.

 

플라톤은 예술적 미메시스가 현상을 모방해서 사람을 현혹하게 만든다고 부정했으나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를 왜곡의 속임수로 여기지 않고, 미메시스의 원리 속에서 회화 창작의 본질을 밝혀주었다.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림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추론하여 그림을 건너 대상 자체로 간다. 대상과 그림의 동일성을 파악하는 순간, 감상자는 그림이 포착한 대상의 본질을 배우며, 그림에 대한 미학적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Scene #3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다

 

 

 

 

 

(왼쪽) 벨베데레의 아폴론 / (오른쪽) 폴리클레이토스  「큰 창을 든 남자」

그리스 고전기 조각의 걸작인 밀로의 비너스는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함께 이상적인 인체비례로 유명하다. 즉, 고전기의 걸출한 조각가인 폴리클레이토스가 ‘카논(canon)’이라고 부른 황금비율(0.618:0.382)이 적용된 것이다. 이는 비너스 상의 머리에서 배꼽까지가 전체 신장의 0.382, 배꼽에서 발끝까지가 0.618에 이르는 비율이다.

 

초기 그리스 조각은 수직적이고 딱딱한 이집트 조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집트 조각은 지나치게 규칙이 엄격하고 자세가 경직돼 그리스 조각가들의 표현 욕구를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이집트 조각도 인체의 수와 비례관계를 정해두고 설계도에 있는 그대로 똑같이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가의 순수한 창작욕을 마음껏 발산할 수 없었다.

 

이집트식 카논대로 조각을 만들었던 그리스 조각가들이 입장에서는 더욱 답답했을 터. 그리스 조각가들이 원하는 것은 조각에서 느낄 수 있는 ‘움직임과 생명’이었다. 그들은 여인의 조각상을 진짜 살아있는 여인이 되기를 비너스 여신에게 소원을 빌었던 갈라테이아가 되고 싶었다.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던 그리스인들은 이집트 조각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자유로운 자세의 조각상을 만들려고 했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소크라테스는 조각가를 ‘조각에 살아숨쉬는 듯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자’라고 언급한다. 그리스 조각가의 능력을 넘어서 세계 미술의 진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식 카논을 높이 평하는데 적합한 최고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가 새와 사람을 속일 정도로 생동감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면, 무명의 그리스 조각가들은 눈속임을 넘어서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줄 알았다. 표현의 자유를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동시에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리스 조각가들은 끌과 망치를 가지고 자신의 확신을 이처럼 아름다운 조각 작품으로 실현했다. 후대의 미술가들이 밀로의 비너스를 보면서 닿지 못할 아름다움의 영원한 이상이 지상에 구현되었다고 찬사를 보낸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Scene #4  한 인간에게는 작은 그림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큰 도약이다

 

그리스 미술을 빼놓고 서양미술사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예술가와 미술애호가들은 그리스 미술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 후대의 미술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스 미술에 대한 숭배와 향수,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과 전복의 욕구야말로 서양미술사를 움직여온 원동력이다. 그리스 미술은 이처럼 서양미술사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미술은 근대 서양인에 의해 미화되고 왜곡된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대체로 그리스 미술을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관찰되었다. 그러므로 비너스나 많은 여신의 나신상들은 단지 옷을 벗은 여인의 아름다운 조각상만으로 받아들여졌고 파르테논 신전 같은 건축물들도 구조, 기둥모양, 비례 같은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건축적인 요소만이 부각되었다.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자국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큰 도약이다’, 달에 첫 발자국을 남긴 닐 암스트롱의 말을 떠올려 보자. 도공의 딸이 연인의 그림자를 보고 따라 그린 것이 한 인간에는 작은 그림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서양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큰 도약이다. 모방이라는 첫 발걸음을 시작해서 생동감이 느껴지게 만드는 카논까지 고대 그리스 미술은 작지만 큰 여러 번의 도약을 통해서 미술은 물론이고 뛰어난 문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고대 그리스 미술 또한 그렇다. 무명의 예술가들은 단순히 상상력에 기대지 않고, 실제로 자연을 관찰하고 비교함으로써 예술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그리고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미술은 서양 미술 문명의 기본적인 틀을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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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미술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114
노성두 지음 / 살림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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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그림의 기원은 그림자다

 

램프 하나가 어둠을 밝히고 있는 방 안에서 옆모습의 여인이 남자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고, 반쯤 앉은 자세로 여인을 부둥켜안은 남자의 얼굴은 위로 젖혀져 있다. 오른쪽에 있는 램프 불빛으로 여인의 옷과 목덜미가 환하게 빛나고 있고, 여인의 옆얼굴과 남자의 몸은 절반가량 어둠에 잠겨 있다. 왼편 벽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드러나 있는데, 여인은 연인의 등 너머로 벽에 비친 그림자의 윤곽선을 따라 남자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이별을 앞두고 자기 애인을 그림으로나마 간직하기 위해 벽에 비친 연인의 그림자를 그대로 따라 그리고 있는 여인은 고대 그리스의 도공 부타데스의 딸이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학자인 플리니우스는 저서 『박물지』에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난 자리를 대체할 수 있는 보조물로 그림자를 잡아두는 여인의 이야기가 서양회화의 시초를 알리는 것이라고 전한다.

 

‘실제 대상-그림자-회화’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 속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는 그림 그리기, 나아가 예술적 표현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전제를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술적 표현은 사적 욕망의 구체화라는 것,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 욕망의 대상에 다가가고자 하면 할수록 그 대상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것이다. 시간의 퇴적 속에서 예술적 표현의 방식이 보다 다양해지고 복잡해지면서 이제 우리는 예술에 대한 원초적 욕망을 그저 희미한 화석으로만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Scene #2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제욱시스의 포도 그림 주위로 날아다니는 새들을 묘사한 상상도

 

 

 

어느 문명,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과거에는 미술가에게 최고의 찬사를 보낼 때 ‘실물처럼 생생한’이라는 표현을 써 왔다. 신라시대의 화가 솔거에 대한 기록을 보면 황룡사 벽에 늙은 소나무를 그렸는데 각종 새들이 진짜로 알고 날아들다가 부딪쳐 떨어지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일견 상투적으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동물이든 사람이든 간에 관객의 눈을 속일 만큼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는 화가나 조각가의 놀라운 기술을 강조하는 이러한 일화들은 동, 서양 미술의 역사에서 자주 발견된다.

 

고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의 경쟁 이야기는 서양 미술사에서 특히 유명하다. 제욱시스는 포도를 너무도 잘 그려서 새들이 쪼아 먹으려고 달려들 정도였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너무나 자랑을 하자 파라시오스는 제욱시스를 불러다 자신의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 위에 천이 드리워져 있어서 이를 걷으려던 제욱시스는 천 자체가 파라시오스의 그림인 것을 뒤늦게 알고 감탄하면서 새를 속인 자신보다 화가를 속인 파라시오스가 한 수 위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그림들 모두가 현재 우리들의 눈에도 실물로 착각될 정도로 세밀하고 정확하게 묘사되었던 것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화가는 대상으로부터 그것을 그것이게 만드는 것, 즉 대상의 본질을 뽑아내 화폭 위로 끌어온다. 그리고 대상에 우연히 덧붙여진 부수적인 요인들을 걸러내 제거한다. 본질이 아니면, 가장 인상적이고 강렬한 것, 그것을 미메시스(mimesis)는 드러낸다. 무명으로 알려진 도공의 딸부터 시작해서 고대 그리스 화가들은 가상의 공간 속에 현실을 옮겨놓는 예술적 미메시스를 시도했다.

 

플라톤은 예술적 미메시스가 현상을 모방해서 사람을 현혹하게 만든다고 부정했으나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메시스를 왜곡의 속임수로 여기지 않고, 미메시스의 원리 속에서 회화 창작의 본질을 밝혀주었다.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은 그림 자체에 머무르지 않고, 추론하여 그림을 건너 대상 자체로 간다. 대상과 그림의 동일성을 파악하는 순간, 감상자는 그림이 포착한 대상의 본질을 배우며, 그림에 대한 미학적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Scene #3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다

 

 

 

 

 

(왼쪽) 벨베데레의 아폴론 / (오른쪽) 폴리클레이토스  「큰 창을 든 남자」

 

 

그리스 고전기 조각의 걸작인 밀로의 비너스는 벨베데레의 아폴로와 함께 이상적인 인체비례로 유명하다. 즉, 고전기의 걸출한 조각가인 폴리클레이토스가 ‘카논(canon)’이라고 부른 황금비율(0.618:0.382)이 적용된 것이다. 이는 비너스 상의 머리에서 배꼽까지가 전체 신장의 0.382, 배꼽에서 발끝까지가 0.618에 이르는 비율이다.

 

초기 그리스 조각은 수직적이고 딱딱한 이집트 조각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집트 조각은 지나치게 규칙이 엄격하고 자세가 경직돼 그리스 조각가들의 표현 욕구를 만족시키기 어려웠다. 이집트 조각도 인체의 수와 비례관계를 정해두고 설계도에 있는 그대로 똑같이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다 보니 예술가의 순수한 창작욕을 마음껏 발산할 수 없었다.

 

이집트식 카논대로 조각을 만들었던 그리스 조각가들이 입장에서는 더욱 답답했을 터. 그리스 조각가들이 원하는 것은 조각에서 느낄 수 있는 ‘움직임과 생명’이었다. 그들은 여인의 조각상을 진짜 살아있는 여인이 되기를 비너스 여신에게 소원을 빌었던 갈라테이아가 되고 싶었다.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였던 그리스인들은 이집트 조각에 만족하지 않고 보다 자유로운 자세의 조각상을 만들려고 했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 회상』에서 소크라테스는 조각가를 ‘조각에 살아숨쉬는 듯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자’라고 언급한다. 그리스 조각가의 능력을 넘어서 세계 미술의 진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식 카논을 높이 평하는데 적합한 최고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제욱시스와 파라시오스가 새와 사람을 속일 정도로 생동감 있는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면, 무명의 그리스 조각가들은 눈속임을 넘어서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을 줄 알았다. 표현의 자유를 무한대로 확장시키는 동시에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리스 조각가들은 끌과 망치를 가지고 자신의 확신을 이처럼 아름다운 조각 작품으로 실현했다. 후대의 미술가들이 밀로의 비너스를 보면서 닿지 못할 아름다움의 영원한 이상이 지상에 구현되었다고 찬사를 보낸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Scene #4  한 인간에게는 작은 그림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큰 도약이다

 

그리스 미술을 빼놓고 서양미술사를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예술가와 미술애호가들은 그리스 미술을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 후대의 미술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스 미술에 대한 숭배와 향수,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과 전복의 욕구야말로 서양미술사를 움직여온 원동력이다. 그리스 미술은 이처럼 서양미술사에서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 미술은 근대 서양인에 의해 미화되고 왜곡된 대표적인 예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대체로 그리스 미술을 아름다움이라는 관점에서 관찰되었다. 그러므로 비너스나 많은 여신의 나신상들은 단지 옷을 벗은 여인의 아름다운 조각상만으로 받아들여졌고 파르테논 신전 같은 건축물들도 구조, 기둥모양, 비례 같은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건축적인 요소만이 부각되었다.

 

‘이것은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자국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큰 도약이다’, 달에 첫 발자국을 남긴 닐 암스트롱의 말을 떠올려 보자. 도공의 딸이 연인의 그림자를 보고 따라 그린 것이 한 인간에는 작은 그림에 불과하지만 인류에게는 서양미술의 시작을 알리는 큰 도약이다. 모방이라는 첫 발걸음을 시작해서 생동감이 느껴지게 만드는 카논까지 고대 그리스 미술은 작지만 큰 여러 번의 도약을 통해서 미술은 물론이고 뛰어난 문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고대 그리스 미술 또한 그렇다. 무명의 예술가들은 단순히 상상력에 기대지 않고, 실제로 자연을 관찰하고 비교함으로써 예술의 가능성을 실험했다. 그리고 새로운 표현 가능성을 모색했다. 이러한 높은 수준의 미술은 서양 미술 문명의 기본적인 틀을 만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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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림이 되다 - 루시안 프로이드의 초상화 현대미술가 시리즈
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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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정직하게 그린 여왕의 얼굴

 

피카소는 인물화(portrait)는 ‘주관적 기록’이라고 했다. 대상의 묘사가 아니라, 작가의 눈과 마음으로 느낀 가변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초상화, 인물화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서서히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 잡았는데, 통치자나 종교적 지도자들을 그리던 관습은 점차 폭을 넓혀갔고, 사진이 발명된 19세기부터는 가히 폭발적으로 확대된다.

 

명함판 사진이 유행하면서 사회적으로 알려진 명사의 사진은 하루에 몇 천 장씩 팔려나가는 일종의 품귀현상도 빚었다. 인물의 이미지를 기억하려는 사람들의 욕구는 사진의 대중화와 맞물렸고, 좋아하는 사람,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의 모습은 복잡한 감정의 문제와 함께 부흥했다.

 

이렇게 사진이 인물의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대체하면서 회화에서 인물화는 그 명맥을 유지하기 어려운 듯 보였지만, 1970년대 이후 다시 인물화의 변화가 눈에 띈다. 그 중에 주로 인물 초상화를 그린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가 루시안 프로이드(1922~2011)이다. 낯선 이름일 수 있겠지만, ‘프로이드’라는 성(姓)을 보는 순간 유명한 정신분석학자가 먼저 생각날 것이다. 그렇다. 루시안 프로이드는 당신이 생각하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이다. (일반적으로 유대인 정신분석학자의 이름을 ‘프로이트’라는 영문 표기법을 많이 사용한다. 간혹 ‘프로이드’라고 표기되기도 하는데 여기서는 책의 제목을 고려해서 ‘프로이드’로 통일해서 쓰겠다)

 

 

 

 

루시안 프로이드  「엘리자베스 2세」 2001년

 

 

그래도 이 사람이 ‘듣보잡’(듣도 보지 못한 잡놈) 화가라고 생각하는가. 프로이드는 영국의 최고 화가답게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를 그리기도 했다. 그가 그린 영국 여왕의 초상화로 영국 언론과 문화계가 떠들썩할 정도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2001년에 제작된 영국 여왕의 초상화는 자신의 특유한 자연주의 기법으로 그린 가로 15.2㎝, 세로 23.5㎝의 작은 유화이다. 초상화에 나타난 여왕은 단호하며 웃음기가 없는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당시 이 그림을 평한 더 타임스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려진 영국 여왕의 초상화 중에서 가장 아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고 있다. 언론은 프로이드의 영국 여왕 초상화를 가장 훌륭한 왕실 초상화라고 찬사도 나오는 반면, 대중지 선(Sun)은 여왕의 품위를 손상시킨 프로이드를 런던타워에 투옥해야 한다고 혹평했다.

 

여왕 얼굴을 너무 '정직하게' 그렸던 탓일까. 사실 프로이드가 바라본 여왕 얼굴은 아름답고 기품 있는 표정이 아니다. 깊게 파인 주름에 고집 센 중년 얼굴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프로이드는 너무나도 솔직하게 그림을 그렸다. 여왕을 미화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신비의 베일에 감추어져 있던 여왕의 실제 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러니 여왕을 신격화하는데 익숙해졌던 사람들 입에서 여왕 모독죄라는 혹평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유명세를 타는 사람들은 남에게 어떻게 보이는가에 더 신경을 쓴다. 예를 들어 황제의 얼굴에는 권위와 권력을 곳곳에 투영시켜야 했다. 때문에 늙지도 않고 인간적인 고뇌도 느껴지지 않는, 신 같은 인간으로 그려지는 것이 관례였다. 어디 황제의 얼굴뿐이겠는가. 모델 입장에서는 화가가 자신의 모습을 멋지게 그려주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하다.

 

 

 

 Scene #2  화가와 모델, 서로 그림이 되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가장 기쁘게 느꼈던 특별한 경험이 언제일까? 오랜 시간 끝에 그림 한 점이 완성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희열감 아니면 모델이 자신의 초상화에 흡족해서 화가에게 수고비를 줄 때?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다만 아무래도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에 어울리는 모델을 발견하고, 그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아내는 과정이 아닐까?

 

화가의 사랑하는 연인이나 친구, 가족은 화가의 마음을 잘 알기에 선뜻 모델이 되어주기도 하며 그의 작품 세계를 가까이 이해하기도 한다. 그림이 너무 독창적이어서 제 아무리 친한 친구나 가족이라도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래도 화가는 이들을 끊임없이 설득할 수 있으며 자신의 생각을 그림으로 몸소 증명한다. 화가의 이력과 내면을 알지 못하는 외부인일수록 그 화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편견을 가지기 쉽다.

 

그래서 특별히 자신의 감정을 잘 들여다보는 이들을 만나 기쁨을 맛본다면 창작열이 솟구칠 것이다. 화가와 모델의 혼연일체, 일심동체. 그런 모델과는 당연히 오랫동안 함께 작업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세월 속에 우러난 장맛처럼 모델의 겉모습과 작가의 내면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화가와 모델의 혼연일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프로이드와 미술평론가 마틴 게이퍼드일 것이다. 게이퍼드는 프로이드에 관한 책을 쓰고 준비하는 동안 스스로 화가의 모델을 자처한다. 화가 앞에서 미술 평론가가 아닌 모델이 되어 초상화가 제작되는 것. 참으로 흥미로운 제작 과정이다.

 

미술사에 보면 유명 화가들이 남긴 초상화 중에는 종종 평론가를 모델로 삼아 그린 것이 있다. 이런 그림들은 화가와 평론가 사이에 친분이 있기에 가능하다. 그러나 미술 평론가라는 직업은 화가에게는 야누스의 얼굴이다. 자신의 작품 세계를 이해해주고 찬사를 보내는 친구가 되기도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의 심미안에 맞지 않으면 혹평으로 돌변하기도 하는 존재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을 옹호한 프랑스의 소설가 에밀 졸라가 어린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던 세잔에게만 악의적으로 혹평을 하자 서로 관계를 단절한 예술사의 에피소드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루시안 프로이드  「파란색 스카프를 맨 남자」 2003~2004년

 

 

인지도 높은 이 미술 평론가가 프로이드의 그림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는 이상, 절대로 프로이드을 소개하는 책을 집필할 수 없었으며 직접 그의 모델이 되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게이퍼드는 2003년 11월 28일부터 2004년 7월 4일까지 런던에 있는 노화가의 작업실에서 모델로서 30회 정도 만났다. 그 만남의 과정 중에 프로이드가 게이퍼드를 모델로 한 초상화가 바로 「파란색 스카프를 맨 남자」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이 그림 한 점을 완성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7개월 정도. 미술에 무지하고 모델비를 챙기는 것이 목적인 모델이라면 이 7개월의 제작 과정을 참고 기다리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게이퍼드에게 이 7개월이라는 시간은 소중하고 흥미로웠다. 그가 만난 당시 프로이드의 나이는 82세. 대화 내용은 물론이고 자연스럽게 프로이드의 생애와 예술론, 시대정신, 지인들과의 관계, 작업에 임하는 자세와 소소한 습관 등을 더욱 가까이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노화가에 대한 단순한 전기 수준을 넘어 그의 은밀한 심리적 생태적 상태와 지적 면모까지 생생한 육성과 행동을 통해 그려낸 한 편의 사실적 그림인 셈이다. 화가 프로이드가 모델 게이퍼드의 얼굴을 그리고 있을 때, 모델은 펜을 붓으로 삼아 자신을 바라보는 화가의 초상화를 한 권의 책으로 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Scene #3  인간에 대한 열정적 표현

 

컨템퍼러리 미술에 대한 일반인의 불만 중 하나는 작가들이 추하고 섬뜩할 정도로 혐오스러운 이미지들을 거침없이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미술을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불쾌감을 자극하고 꿈자리를 고약하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루시안 프로이드  「잠자는 사회복지 감독관」 1995년

 

 

프로이드의 그림 또한 여전히 고귀하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선호하는 사람들에게는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마틴 게이퍼드의 책에 수록되지 않은 그림이지만) 뉴욕 경매에서 생존작가 최고가 경신을 기록했던 1995년 작 「잠자는 사회복지 감독관」을 보라. 살이 비곗덩어리처럼 부풀려져 숨쉬기도 힘들어 보이는 뚱뚱한 여인이 소파에서 누드로 잠자는 모습을 그렸다.

 

도저히 아름다움을 찾아보기 힘든 이 그림이 수백억 원을 호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그림의 경제적 가치를 먼저 따지는 것이 아니라 프로이드가 이 뚱뚱한 사회복지 감독관, 그것도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벌거벗은 그녀를 그린 의도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예술의 가치가 적어도 미(美)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더니즘 시기에 미와 조화가 미술의 중요한 추동력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프로이드는 이러한 편견을 공격하면서 추해 보이는 형상 속에 숨겨진 진실을 발견하려 한다.

 

 

 

 

루시안 프로이드  「벗은 남자, 뒷모습」 1991~1992년

 

“모델 작업을 마친 뒤 나는 가능한 내 모델들의 느낌과 감정에 동감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작품이 내게서 나오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작품이 모델들에게서 비롯되기를 바랍니다.” (루시안 프로이드, 17쪽)

 

 

프로이드에게 아름다움이나 추함은 예술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와 추라는 외적 허상들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실재)을 얼마나 깊이, 밀도 있게 파고드느냐 하는 점이다. 그 실재는 기존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미세하고 오묘한 세계다. 프로이드의 인물화는 메모리칩처럼 진실의 미세한 정보들이 얼마만큼 압축돼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루시안 프로이드  「쉬고 있는 화가의 어머니 I」 1976년

 

“몇 년 전 어머니를 그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나는 과거 그 어느 때에도 그리고 그때 이후로도 그렇게 슬펐던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어머니가 입은 원피스에 있는 페이즐리 무늬를 그리고 있었는데 내가 느끼는 슬픔이 페이즐리 형태에 투영될까봐 걱정했던 일이 기억납니다. 아마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루시안 프로이드, 72쪽)

 

그렇다고 모든 화가가 초상화 작업에 이렇게 긴 시간을 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프로이드는 초상화가 모델로부터 비롯되기를 원했다. 계산적인 구성을 밀어내고 ‘진실의 어색함’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진짜 ‘사람’을 그리는 것이다. 그의 바람은 고흐가 자살하기 한 달 전 여동생에게 쓴 편지와 통한다. “무엇보다 큰 열정을 품게 되는 대상. 초상화다. 한 세기 뒤 사람들에게 유령처럼 보일 초상화. 사진의 유사성이 아니라 인간의 열정적 표현에 의한.”

 

나는 드로잉과 채색만큼이나 대화가 모델 작업의 일부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초상화는 대상에 대한 관찰을 필요로 한다. 이때 대상은 활성과 움직임이 없는 살아 있는 동상일 뿐만 아니라 각양각색의 분위기와 환경 속에서 음직이고 말하고 반응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중략) 그(모델)의 눈과 입, 얼굴 표정의 유동적인 지형학이 이미지를 밀랍 인형이 아닌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다. (마틴 게이퍼드, 19쪽)

 

프로이드의 모델이 되는 동안 게이퍼드는 느꼈다. 노화가가 끝까지 인물화 제작을 고수하는 이유를. 프로이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린다. 사람의 마음, 감춰둔 이야기, 말할 수 없는 것들을 화폭에 담는다. 모델의 감정에 동감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훈련 덕분에 프로이드는 그것들을 하나의 ‘진실’로 끄집어내서 인물화로 구현한다. 그는 피카소처럼 주관적인 직관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인간의 초상과 누드 등을 대상으로 그들의 모습이 아닌 삶 자체를 인물화에 투영시키려고 한다. 화가와 모델 사이에서 오고가는 진솔하면서도 유쾌한 열정적 표현이 꾸밈없는 진실한 그림을 완성하도록 만든다.

 

만약 프로이드가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면 게이퍼드의 초상화 연작을 시도했을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 프로이드가 사망함으로써 자연스럽게 모델로서의 게이퍼드의 활동은 접게 된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시간이 지난 뒤에 유령처럼 보일 수 있는 초상화를 그리는데 성공했다.「파란색 스카프를 맨 남자」와 반쯤 그리다만 미완의 작품까지 프로이드의 작업실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인물화들은 화가, 아니 그림을 좋아하는 인간의 열정적 표현을 보여주는 위대한 족적이다. 프로이드는 자신의 마지막 예술의 불꽃을 되살려주는 일생의 모델을 만날 수 있었고, 게이퍼드는 그림에 스며든 화가의 열정, 치열한 직업의식을 글로서 영원토록 기억하게 만들었다. 아마 앞으로 프로이드-게이퍼드 조합 같은 멋진 관계에서 비롯되는 인간적인 예술을 만나가가 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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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림이다 - 데이비드 호크니와의 대화 현대미술가 시리즈
마틴 게이퍼드 지음, 주은정 옮김 / 디자인하우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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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멀티 아티스트' 호크니

 

 

 

 

 

 

데이비크 호크니 「무제, 2009년 7월 5일, No. 3 」 2009년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를 친구로 두었다면 매일 아이폰으로 그린 새벽 풍경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호사를 누리게 될지 모른다. 그의 아이폰 그림은 붓으로 그려낸 듯한 섬세한 터치가 인상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아이폰의 브러쉬 기능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린 뒤 갤러리에 판매하고 있다. 호크니의 드로잉에서 ‘보는 것’이 주는 기쁨을 발견하는 순간 당신을 둘러싼 세계 역시 달라질 것이다.

 

1960년대 영국 팝아트를 대표하는 팝 아티스트, 새로운 접근의 포토 콜라주를 시도한 사진가, 일러스트레이터, 판화가, 무대 미술가 그리고 최초의 스마트폰 화가. 영국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는 데이비드 호크니를 수식하는 단어는 매우 다양하다. 호크니에 대한 설명은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 저명한 미술 평론가인 마틴 게이퍼드는 이 ‘멀티 아티스트’와 나눈 10년간의 대화를 한 권으로 정리했다. 호크니 자신이 생각하는 세계란 어떤 것인지에, 인간은 어떻게 그것을 재현하고 있는지 등 주제는 다양한 영역을 넘나든다.

 

호크니는 청년 같은 왕성한 호기심과 실험정신으로 다양한 매체와 예술 영역을 유랑했다. 그가 평생 몰두한 미술은 ‘사람과 그림’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그림이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고 믿는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착각하게 하는 사진이나 영상이 아닌 3차원을 2차원의 평면으로 옮겨 놓은 그림이 어떻게 무엇을 볼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일까.

 

호크니는 관찰하고 묘사하고자 하는 욕구를 발동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그렸다. 매일 보는 똑같은 풍경도,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꽃병도, 방금 벗어놓은 모자나 슬리퍼도 그에게는 언제나 새로운 것과 다양한 것을 품고 있는 피사체였다. 길을 가다가 차를 세우고 스케치북을 열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풀들을 스케치하곤 했다. 호크니는 그 풀을 사진으로만 찍었다면 드로잉을 할 때만큼 유심히 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피사체의 고유한 특징과 매력은 열심히 관찰한 사람들만이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오랫동안 열심히 바라보는 것’은 호크니의 삶과 예술에서 핵심적인 행위였고, 큰 기쁨의 원천이었다. 매력적인 풍경화를 많이 그린 호크니에게 늘 그 자리에 있는 자연은 무한한 다양성을 지닌, 그래서 보면 볼수록 많은 것이 보이는 그런 주제였다. 호크니는 렘브란트, 반 고흐, 모네의 그림이 놀랍고 감동적인 것은 화가가 많은 것들을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Scene #2  눈을 커지게 만드는 그림

 

 

 

 

데이비드 호크니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모티브에 관한 회화」 2007년  

 

 

호크니의 미술에 관한 열정과 통찰력은 진정 감동적이었다. 책 초반부에 월드게이트 숲을 그린 장부터 이미 인상적인 풍경화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특히 5장 ‘점점 더 커지는 그림’을 읽다가(66~67쪽) 입이 딱 벌어졌다. 거기에는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 또는 새로운 포스트-사진 시대를 위한 모티브에 관한 회화」가 담겨 있다. 게이퍼드는 아마도 미술 역사상 가장 큰 풍경화라고 소개한다. 적어도 전적으로 야외에서 그린 가장 큰 작품인 것은 분명하다며, 이 작품은 소설과도 같은 시각 경험을 제공해 준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책의 도판을 보면서, 그저 그림의 떡이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내가 이걸 볼 수 있을까?”하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서 놀랍게도 현실이 되었다. 지금 ‘데이비드 호크니: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전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중앙홀에서 올해 2월말까지 호크니의 큰 나무들이 그 무성함을 직접 뽐낸다. 이 그림은 높이 4.5m, 폭 12m에 이른다. 총 50개의 캔버스를 이어 하나의 대형 풍경을 펼쳐낸 대작이다.

 

자연은 시시각각 변한다. 해가 환하게 미소 짓다가도 금방 심술궂은 먹구름이 온 세상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때때로 굵은 빗줄기를 대지에 쏟아 붓는다. 나무와 들풀도 바람에 몸을 파르르 떨며 잠시도 똑같은 몸짓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서양화가들은 하나하나의 정지된 순간을 고정된 시점으로 포착할 뿐이다.

 

호크니는 이런 게 불만스러웠다. 그는 자연의 다양한 모습을 담아내려면 이런 방식으로 대상을 바라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은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작품 중 하나다. 50개의 캔버스는 하나의 풍경을 포착했지만 각각의 캔버스는 서로 다른 순간을 저마다 다른 느낌으로 표현되었다. 관객은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수십 개 또는 그 이상의 나무 풍경을 감상하게 되는 셈이다.

 

 

 

 Scene #3   결국, 그림이다 

 

 

 

 

데이비드 호크니 「개로비 언덕」 1998년

 

 

현대인의 눈은 스스로 세상을 인식하는 것보다 카메라 앵글로 조작된 세상(사진, 영화, 광고 등)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재료의 거친 날것이 주는 신선함보다는 조리된 인스턴트 음식의 편안함에 손이 가듯이 말이다. 최근 미술에서의 ‘사실화 경향’ 중 하나도 카메라의 앵글을 통해 기록된 것이거나, 카메라의 기록과 컴퓨터의 조작, 손을 통해 재생산된 이미지들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호크니의 미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의 그림은 화가의 내부세계와 그림의 소재가 된 외부의 세계가 발가벗고 만나는 과정, 생생한 라이브 쇼를 우리에게 보여주며 지각의 주체로서의 시각 인식의 중요성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작품 소재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자신감의 근원은 어디 있는 것일까. 오랫동안 작가 자신의 생활 태도와 경험에 의한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화면에 담는 대상을 정확히 관찰하고 소화하고 이해해서 ‘나의 것, 나의 이야기, 나의 이미지’로 전환하는 것이 그 구체적인 작업의 시작이다. 반복되는 스케치를 통해 여러 각도에서 세밀하게 관찰하고 동시에 이런 요소들을 큰 화면으로 구성하는 작업인 것이다.

 

호크니는 인간의 눈, 더 이상 과거 이성을 대변하는 눈이 아닌 여타의 감각을 담아내는 눈을 이야기하고 있다. 호크니는 카메라의 눈으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변화와 생생함을 회화, 즉 그림만이 잡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를 그리기 위해 ‘오랫동안 바라보기,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를 자신의 눈으로 실천했다. 실제로 밖에서 자신이 본 풍경을 최대한 그대로 관객에게 전하고자 관객을 둘러쌀 정도의 거대한 멀티캔버스 회화를 펼쳐 보이고 있다. 관객은 그의 작품 앞에 서는 순간, ‘저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가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스쳐지나갈 수도 있을 법한, 어쩌면 큰 특징이 없기까지 한 자연 풍경은 작가의 예민하고 섬세한 눈에 포착되어 우리 앞에 자리한다. 아니 우리가 그 안에 자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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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잘라 2014-02-20 1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시회 다녀오셨군요! 저도 꼭 보고 싶은 그림인데.. 이번 주말이 마지막 기회네요. 음...

cyrus 2014-02-20 22:27   좋아요 0 | URL
서울에 들릴 때 정말 큰 맘 먹고 과천까지 이동해서 그림을 봤어요. 서울에 한 번 전시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어요..

아이리시스 2014-03-04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폰에 있는 기능을 듣긴 했는데 저처럼 그림그릴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마저도 그림의 떡인데... 요즘은 드로잉이라도 연습해야하나.. 그러고 있어요. 하다보면 어떻게 안될까.. 잘그려서 화가 될것도 아닌데...

저 논밭 그림 예뻐요!

cyrus 2014-03-04 23:58   좋아요 0 | URL
오랜만이에요, 아이리시스님. 잘 지내시죠? 요즘 스마트폰으로 손수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도록 알려주는 어플이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요즘 스마트폰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보기가 힘들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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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순례 - 옛 그림과 글씨를 보는 눈 유홍준의 미를 보는 눈 2
유홍준 지음 / 눌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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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그림 보는 안목은 예술적 감동에서 시작된다

 

아마도 우리는 '그림'이라는 예술작품을 맞대면하면 그림 자체에 압도되어 그림 안에서 허우적대고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겨우 빠져나오면 '왜' 이런 그림을 그렸냐는 궁금증에 앞서, '어떻게'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지 하는 궁금증이 앞선다. 그건 내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어떤 경지에 대한 경외감 때문일 것이다.

 

그런 궁금증까지 해결이 되었다면 작가가 보일 것이고 그의 삶과 사상이 보일 것이다. 그 이후에나 시대적인 관점에서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거시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에서 그림을 내려다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림밖에 안 보이겠지만, 알고 나면 다른 많은 것들이 보인다.

 

여기서 '시대적인 관점'으로 그림을 보는 것이란,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당대의 문화·경제·정치·일상 등의 관점으로 또는 관점과 함께 그림을 보는 것일 게다. 즉, 그림이라는 프레임(창)을 통해 당대의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하는데, 바로 그 대화의 방법론으로 그림을 사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감상법을 어디 가서도 배우기 힘들기 마련인데 그림의 세상으로 향하게 만들도록 우리들 마음의 문을 열어 준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유홍준 명지대 교수다. 그는 고마운 분이다. 우리 것을 대하는 대중의 문화적 눈높이를 한껏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작품을 보는 자신만의 눈을 갖고 싶어 한다. 그것을 안목이라고 한다. 안목을 기르는 방법으로 명작을 많이 대하는 것만큼 좋은 길은 없다. 거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안목 높은 사람들의 작품 보는 법을 자신의 시각과 비교해봄으로써 예술 감상의 폭을 넓히는 것이다. ('책을 펴내며' 중에서, 4쪽)

 

이 책 한 권에는 그동안 가치를 몰랐던 명작, 그 명작들에 드리운 아름다움, 새기지 못했던 감흥, 가늠하지 못했던 가치를 제대로 느낄 수 있도록 안목을 틔워주는 설명, 길라잡이가 돼주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 책만 읽는다고 해서 예술 감상의 안목이 한순간에 기를 수 없다. 어떤 사물을 두 눈으로 본다는 건 눈의 숫자만 많아지는 게 아니라, 사물을 제대로 살피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어떤 눈으로 뭔가를 보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같은 걸 보는 건 아니다. 대개의 경우 아는 만큼만 보인다.

 

명작이야 말로 아는 만큼 보인다. 모르고 보면 그냥 그림이거나 글씨에 불과하지만 알고 보면 감탄을 자아낼 서정적 극치의 아름다움과 보석보다도 값진 실물적 가치가 보이게 된다. 그러기에 명작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명작을 보는 안목을 길러야한다. 특히 그 안목은 실제 작품에서 받은 예술적 감동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림 속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눈으로 보고, 그걸 마음으로 느껴야 한다.

 

 

 

 Scene #2  험준한 산 속에서도 인간의 역사는 있었다네

 

 

 

 

이인문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부분) 18세기 후반

 

 

사방이 온통 험한 절벽으로 막혀 있는 이곳은 걸어서는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곳이다. 언제부터 이곳에 들어와 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때부터였다고도 하고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였다고도 하는 걸 보면 꽤 오래전부터 이곳 산 속에 들어와 살았던 것만은 확실하다. 육대 조 할아버지가 경치 좋은 곳을 찾다 이곳에 반해 눌러 앉았다는 얘기도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물론 그 전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말이다.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외줄에 매달려 오르락내리락해야 하는 도르래밖에 없는 곳이 좋아 눌러 앉을 바보는 없을 것이다. 모르긴 해도 세상 사람들과 떨어져 살아야만 할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지금은 시대가 바뀌어 이곳 사람들을 험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위험하지만 절벽 사이로 난 길을 통해 바깥세상 사람들이 찾아올 때도 있다. 그래도 이곳 사람들은 여전히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낯설어한다.

 

아무리 험준한 지형이라 해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길이 없으면 길을 내고 바위가 앞을 막으면 바위를 뚫는다. 계곡 위로는 다리를 짓고 절벽 위로는 잔도를 꽂는다. 비탈길에는 계단을 만들고 언덕위에는 누각을 짓는다. 아슬아슬한 벼랑 위에는 탑을 쌓고 계곡과 계곡 사이에는 구름다리를 걸친다. 그렇게 자연을 달래고 타협하고 부탁하며 살아온 것이 인간의 역사다.

 

그 유구한 인간의 역사를 담은 그림이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다. 강산은 끝이 없고 무궁무진한 것처럼 인간의 역사도 끝이 없고 영원하다. 조선 후기의 화가 고송(古松) 이인문이 끝없이 계속된 인간과 자연의 역사를 ‘강산무진도’ 속에 담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산과 바다와 호수가 있듯 그림 속에도 다채로운 자연경관이 펼쳐져 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험준한 기암괴석이 나그네의 발길을 가로막는다. 그 자연 속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한 줌의 흙만 있어도 풀이 자라고 나무가 자라듯 한 치의 땅만 있어도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   

 

‘강산무진도’는 8m가 넘는 대작이다. 아무리 좋은 화보집이라 해도 8m 그림이 온전하게 실려 있는 책은 없다. 사정이 그렇다보니 화보집을 통해 그림을 감상할 수밖에 없는 감상자들은 그림의 일부만 보고 만족해야 한다. 부분도는 전체 그림 중에서 이야기가 가장 풍부한 클라이맥스가 실려 있다. 작가의 필력이나 특징이 잘 드러난다. 그러나 화가가 어떤 의도로 그림을 제작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림 전체를 봐야 한다. 전체를 다 보지 않는 상황에서 그림의 전모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종이 한 페이지에 실린 그림 일부의 아쉬움을 고송의 다른 그림과 고송의 벗인 단원 김홍도의 그림 몇 점으로 달래본다.

 

 

 

 

 

김홍도 「송석원시회도」 1791년

 

 

고송과 단원은 동갑내기 궁중 화원으로서 서로 자웅을 겨룰 정도로 절친한 관계이다. 그렇지만 두 화가의 산수화를 비교해보면 자연을 표현하는 방식에 확연히 차이점을 알 수 있다. 고송은 시각을 넓게 잡아 전체를 그림으로 꽉 채우지만, 단원은 주변을 대담하게 압축하여 생략한, 그래서 똑같은 풍경을 그려도 이인문의 산수가 평수에서 훨씬 넓어 보인다.

 

 

 

 

 Scene #2  춘화도 명작이다

 

 

 

 

김홍도 「춘화(운우도첩 중)」 18세기 후반

 

 

엉덩이만 깐 채 맨바닥에 질펀하게 앉은 남자가 여인을 뒤에서 품에 안고 있다. 영화 '취화선'에서, 전통사극에서 패러디되는 도상이기도 하다. 자리도 깔지 않고 옷을 입은채 진행되는 것으로 보아 젊은 양반댁 자제들이 봄 풍류를 나섰다가 눈이 맞은 여인과 은밀한 곳을 찾아든 모양이다.

 

조선 최고의 춘화첩 운우도첩(雲雨圖帖)에서 만난 그림이다. 운우는 성희를 뜻하는 은유적 표현이다. 조선시대 에로티시즘의 절정, 춘화의 백미가 담긴 운우도첩과 건곤일회첩(乾坤一會帖)은 조선후기 춘화 가운데 가장 회화성이 뛰어나고 격조를 갖춘 작품집이다.

 

우리 춘화첩에는 남녀노소와 신분고하의 다채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대부분 부적절한 남녀관계를 그려 유교의 도덕개념으로는 매우 파격적인 당대 사회의 성문란을 보여준다. 신분사회에 대한 풍자와 농담이 짙게 깔려 있는데, 춘화가 중세의 유교적 엄격주의를 깨는 일에 더없이 좋은 예술적 소재였음을 시사한다. 때로는 해학적이면서 낭만이 흐르고, 때론 점잖은 듯 하며 가식 없는 에로티시즘의 감칠맛이 우리 춘화의 아름다움이다.

 

춘화는 그 옛날 거의 성교육을 받지 못하고 시집가던 일반 가정의 규수들의 첫날밤 두려움을 좀 덜어주기도 했고, 때로는 활량들이 기방 같은 곳에서 새로운 체위를 섭렵하기 위해 보여주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빨리 왕의 후계자를 낳아야 하는 어린 왕비나 세자빈들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 시각교재로 많이 사용됐기 때문에 전문 화가들의 우수한 작품들이 남기도 했다.

 

분명치 않은 춘화들도 많이 있는데 그 중에는 다른 화가의 작품의 모작도 있고 조잡한 것들도 있다. 현재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정재 최우석 등의 유명한 화가들이 그린 한 두 권씩의 화첩이 전해지고 있다. 이들에 대한 진위 여부가 계속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작품들의 예술성으로 보아 위작이라고 보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다.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조선조에서는 이런 그림들이 일반에게 잘 공개가 되지 않았다. 다락방 깊은 곳 같은 데에 숨겨져 있다가 없어진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뿌리 깊이 박혀 있었던 유교사상으로 생긴 성에 대한 편협한 생각과 이런 그림을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부끄럽게 여겼던 체면의식 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기는 몰래 보고 즐기면서도 안 그런 척 하는 우리네 내숭문화도 한 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술성 높은 춘화 중에는 야한 내용으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서정적이다. 그러니까 그림을 볼 때 배경을 꼭 같이 봐야 한다. 진달래가 흐드러진 곳이나 물이 한껏 오른 버드나무 옆에서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면, 그야말로 은밀하게 즐길 수 있는 무대로서(?) '세팅'이 아주 기가 막히다. 주인공과 무대를 같이 보라는 것이다. 자연 풍경의 운치 즐길 줄 아는 선조의 센스 있는 멋을 엿볼 수 있다. 의외로 이런 미적 감각이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자 행위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것이 바로 건전한 성(sex)이 아닌가. 물과 버드나무가 없었다면 그저 남녀가 질펀하게 몸을 섞고 있는 ‘야한 행위’만 남아 있었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포르노그래피'나 '야사'에 빗댈 수도 있겠지만 조선시대의 춘화를 보고 있자니 운치와 함께 유머가 느껴져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춘화도 떳떳이 명작이 될 수 있다.

 

 

 

 Scene #3  조선 최후 화원의 슬픈 자존심

 

 

 

 

안중식 「백악춘효(가을본)」 1915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바로 앞에는 두 마리해태상이 놓여 있다. 해태는 갑옷처럼 두꺼운 외피와 부리부리한 눈, 큼직한 입을 가진 상상의 동물이다. 보기에 따라 숫사자 같기도 하나 그와 꼭 닮은 현실의 동물은 찾기 어렵다. 해태는 불을 먹고 산다는 말도 있고, 시비와 선악을 판단한다는 얘기도 있다.

 

광화문에 해태상을 둔 이유에 대해서는 이러저러한 얘기들이 전해온다. 남쪽 멀리의 관악산은 엄청난 화기를 머금은 불의 산이다. 도중에 한강이 가로질러 흐르지만 불기운이 워낙 드세 나무 목(木)자가 들어간 목멱산(木覓山ㆍ남산)을 불쏘시개삼아 도성을 단숨에 불지를 태세라고나 할까. 그래서 이를 예방하기 위해 불을 먹고 산다는 해태를 궁궐 앞에 파수꾼처럼 세웠다는 것이다.

 

화가 안중식이 그린 '백악춘효(白岳春曉)'는 해태상의 과거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광화문, 경회루, 근정전 등 경복궁의 주요 전각은 물론 그 뒤를 병풍처럼 둘러선 북악산과 북한산의 봉우리들을 부감법으로 고스란히 묘사했다. 안중식은 해태상을 맨 앞에 두고 경복궁 일대를 작품화해 해태상의 비중이 매우 컸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림을 그리면서 화가는 해태상과 경복궁의 불행한 운명을 예감했을까? 풍성했던 존재들이 시들고, 저물어가는 가을 분위기와 맞게 문 닫힌 광화문 등의 묘사에서 망국의 설움이 느껴진다.

 

안중식은 근대화가의 아버지로 알고 있지만, 그는 전통 기법을 지키기 위해 애쓴 조선 최후의 화원이기도 하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도화서가 폐지되면서 생업을 잃자 1911년 조선서화미술회를 설립해 제자를 키웠다. 그가 고수한 기법은 한국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장승업으로부터 비롯된 중국 장식화풍이었다. 비록 전통 계승의 의지와 항일의식까지 뚜렷이 갖고 있었지만 기법상으로는 과거의 답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안중식의 회화는 단순히 화원으로서의 고고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기법의 정체라고 보기 어렵다. 그 시대 화원이 가져야했던 망국의 근심이 자기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최고의 실력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1915년, 이미 경술국치(1910년)가 지난 시기에 그려진 '백악춘효'는 전통을 지키려는 의지와 새로운 기법 모색의 한계 사이에서 갈등했고 고뇌와 절망, 참여와 은둔의 복잡함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화원의 고고한 예술적 자존심이라기보다는 점점 외세로 인해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안타깝게 지켜보면서 슬픔을 심키고 있는 자존심이다.

 

작품의 완성도만 높다고 해서 '명작'인가. 그림은 때로 관객에게 어떤 삶의 자세를 갖고 있는지 되돌아보게 해준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림을 제작할 당시 혼란스러운 시대상과 망국의 슬픔을 달래고자 했던 화가의 정서가 관람객의 마음에 온전하게 전달되고 느껴진다면 두고두고 봐야할 명작이다.

 

 

 

 Scene #4   그림 감상에도 미메시스가 필요하다

 

그리스어 ‘미메시스(mimesis)’는 예술 창작의 기본 원리로서의 모방이나 재현을 의미한다. 예술은 자연이나 위대한 작품 같은 훌륭한 대상을 모방함으로써 시작된다는 뜻이다. 서양의 미메시스에 해당되는 행위를 동양화에서는 ‘방작(倣作)’이라 부른다. 옛 대가의 그림을 본 떠 그리는 것이 방작이다.

 

비슷한 단어로 ‘임모(臨模)’가 있다. ‘임(臨)’은 원작을 옆에 놓고 보고 그리는 것이고, ‘모(模)’는 투명한 종이를 사용해 윤곽을 본뜨는 것이다. 임모의 목적은 앞 시대 사람들이 그림 그릴 때의 경험을 배우는 것이다. 본뜬다는 점에서는 방작이나 임모나 오십보백보지만, 방작은 겉모습만 비슷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담긴 정신이나 뜻을 살리는 점이 임모보다 창작에 더 가깝다. 조선시대 화가들은 처음 그림을 배울 때 뿐 임모와 방작을 거듭했다. 대가가 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타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미메시스 그리고 임모와 방작는 일종의 선별과 선택의 작업이다. 그림의 형태만 똑같이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 속에 있는 예술적 본질을 읽고, 그것을 자신의 기법으로 만들 수 있도록 체득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인간이 뭔가를 배워나가기 위한 인간 고유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림을 감상하는 데 있어서 여기서도 미메시스의 역할은 중요하다. 그림을 보면서 명작으로서의 가치를 판별할 수 있는 안목을 스스로 체득해야 한다. 유홍준 교수, 저자가 선별한 그림 설명으로 이루어진 글의 순례길에만 쫓아간다면 정작 독자(또는 그림을 보는 관객)는 저자가 설명하는 그림의 내용만 이해하는데 그친다. 반면 저자의 순례길을 따라가면서도 가끔 정해진 방향과 반대로 가보거나 순례길에 볼 수 없는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찾아 본다. 결국, 전문가가 만든 순례길은 그저 참고사항에 불과하다. 이런 순례의 경험과 그 느낌을 살려서 순례길을 만든다면 자기만의 명작순례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이 책을 읽고 난 뒤에 쓰는 서평으로 기록한다면 순례의 감동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다.

 

이번에 쓴 글도 그런 맥락에서 작성한 것이다. 책 내용을 전반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쓴 서평에서 벗어나 명작순례를 통해서 느낀 감동과 정서를 최대한 드러내어 나만의 글길을 기록하고자 했다. 그래야만 나 스스로 명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예술적 가치를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책을 쓰고자 했던 저자 유홍준 교수의 목적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의 목적과 의도가 빗나가거나 저자가 명작을 보는 안목이 다르더라도 독자로서 예술적 가치를 스스로 이해하고 마음으로 느꼈다면 나만의 명작순례가 충분히 성공했다고 본다.

 

명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조건은 작품의 객관적 아름다움에 있지만, 우리는 그 명작을 감상할 수 있는 조건은 주관적인 감동이다. 전문가가 제공하는 그림의 기본 정보를 이해하고, 그걸 암기하듯이 알려고 한다면 절대로 그림 속에 숨어있는 본질인 예술적 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 전문가의 감상을 관람객 자신의 감상과 비교한다면 그동안 자세히 보지 못했던 세밀한 묘사마저도 아름답게 보이는 예술적 감동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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