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Dali 디스 이즈 달리 This is 시리즈
캐서린 잉그램 지음, 앤드류 레이 그림, 문희경 옮김 / 어젠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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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enzino - Dalí Van Picasso (Youtube)

 


 

 

 

 Scene #1  "I am a genius artist"  

 

한 예술가에게 ‘천재’라는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다소 위험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이 사람’만은 예외다.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에게 ‘천재’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아니, 달리 본인은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했다. 달리는 자서전의 서문을 “나는 천재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전 방위 예술가. 현대예술의 혁명적 전환점이었던 초현실주의 운동을 시각언어로 구체화한 대표적 화가. 무의식의 세계를 회화에 도입하고 회화를 통해 정신분석학을 탐구한 미술의 프로이트. 보통 사람에게 서라면 곧장 광기로 치달았을 내밀한 정신적 모순들과 신경증을 예술로 승화시킨 미치광이. 순수미술에서부터 영화, 패션, 광고, 보석디자인, 심지어 전 세계인들의 혀에 추파를 던지는 추파춥스 사탕에 이르기까지 예술과 삶을 넘나든 창조적 광기가 그를 그렇게 불리도록 했다. (추파춥스 로고를 달리가 만들었다)

 

왜 달리는 뻔뻔할 정도로 자신을 천재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이 궁금증을 풀려면 특이한 천재의 삶과 미술 세계를 알아야 한다. 『This is Dali』는 달리에 대해 자상한 안내서 역할을 하는 책이다. 책표지에 두 눈을 부릅뜬 채 멋지게 말려 올라간 콧수염을 뽐내는 달리가 독자들을 노려본다. 달리의 눈동자에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뿜어내는 천재의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는 눈으로 우리에게 말한다. "This is Dali!". 이것이 바로 ‘천재’ 달리다! 그 자체가 'Paranoia'(편집증적 망상)다. 제정신이 아닌 듯한 달리의 표정 때문인지 책 제목이 도발적으로 다가온다.

 

 


 Scene #2  “죽은 형을 보며 난 자랐어.”

 

 

 

 

 

이 책은 우선 재미있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달리의 도발적인 행동과 기상천외한 일화들이 책에서 손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데다 그래픽 노블을 보는 느낌이 나는 일러스트가 정말 재미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초현실주의 화가, 혹은 자신이 ‘천재’라는 사실을 미술의 ‘미’ 자도 모르는 독자들에게 세뇌시키려는 달리의 표정에 기죽을 필요 없다.

 

어렸을 때부터 달리는 남달랐다. 그의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장남의 부재에서 비롯되는 슬픔을 잊기 위해 둘째 아들 달리를 귀하게 보살폈다. 그렇게 달리는 장남 아닌 장남처럼 키워졌다. 형은 죽어서 이 세상에 없었지만, 여전히 동생을 늘 괴롭히는 존재였다. 형의 그림자는 늘 달리 곁을 따라다녔다. 마치 두 사람이 한 몸으로 붙어 있는 샴쌍둥이처럼. 부모는 달리가 죽은 장남처럼 커 주길 바랐다. 어린 달리는 강제적으로 죽은 형 코스프레를 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부모님은 달리라는 이름의 나를 사랑하는 걸까, 아니면 무덤으로 들어가 영원히 잠들어 있는 형을 더 사랑하는 것일까? 그냥 형이 아닌 살바도르 달리, 오로지 ‘살바도르 달리’를 사랑해주면 안 될까?’ 이때부터 달리는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 ‘살바도르 달리’가 되고 싶어 했을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달리’라는 자신만을 바라보고, 사랑해주는 것. 달리는 ‘세상의 배꼽’(중심)이 되고 싶었다. 일단 달리는 집안의 왕이 되었다. 그는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대로 했다.

 

달리는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고 느끼기 위해 온갖 기행을 일삼았다. 자기중심적이면서도 상대방을 향한 ‘돌직구’ 같은 독설도 서슴지 않았다. 프랑스 인상파를 강조하는 예술원의 교육에 반기를 들거나 자신을 가르치고 작품을 평가하는 신임 교수의 자질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예술원의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결국, 자신감이 충만하다 못해 넘칠 지경이었던 예술원의 시한폭탄은 자폭하고 말았다. 달리는 퇴학 처분을 받아 예술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Scene #3  “콧수염 한 올, 결국엔 이런 게 돈이 될지 몰라”
 
기묘하고 유별난 달리의 행동은 초현실주의 그룹에 가입하여 화가로서의 명성이 알려지기 시작할수록 점점 심해졌다. 특히 초현실주의 그룹의 우두머리이자 작가인 앙드레 브르통은 달리의 행보를 달갑게 보지 않았다. 브르통은 자신이 흠모하는 공산주의 지도자 레닌을 비하하고, 히틀러를 지지하는 그림을 그릴 정도로 파시스트에 가까운 가치관을 가진 달리를 무척 싫어했고, 정면으로 비난했다.

 

 

 

 

 

살바도르 달리  「삶은 콩으로 만든 부드러운 구조물 : 내전의 고통」 1936년

 

 

달리가 1936년에 완성한 「삶은 콩으로 만든 부드러운 구조물 : 내전의 고통」은 피카소의 「게르니카」와 더불어 스페인 내전의 공포와 비극을 묘사한 작품으로 알려졌다. 달리는 이미 스페인 내전을 예감하고 「내전의 고통」을 그리기 시작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스페인은 달리의 작품 설명대로 ‘괴기스러운 혹 모양의 팔다리로 제 목을 졸라 죽이는 망상에 빠져 서로를 잡아 뜯는’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러나 이런 비극적인 그림을 그렸다고 해서 달리가 스페인을 잡아 뜯는 파시스트 정권에 저항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스페인 내전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이는 기회주의자였다. 처음에 혁명군을 옹호했지만, 돌연 파시스트 정권 편으로 돌아섰다. 이런 달리의 태도는 스페인 미술계와 초현실주의 그룹 동료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세상의 왕답지 않은 달리의 굴복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세상의 왕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자신의 천재성을 알아본 갈라가 있었다. 달리가 ‘세상의 왕’이라면 갈라는 여왕이다. 아니, 그 누구도 감당하기 힘들다는 이 괴짜 왕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가지고 노는 ‘킹왕짱’이다. 달리보다 열 살 연상인 갈라는 그를 어린애 취급했고, 마치 어린 아들을 키우는 것처럼 대해줬다. 그러면서도 세상의 왕을 더욱 위대하게 만들기 위해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했다. 갈라는 달리의 상징인 콧수염 한 올을 30만 달러(우리 돈으로 3억 3450만 원 정도)로 책정하기도 했다. 달리 못지않게 돈을 엄청 밝혔다. 달리는 자신의 작품으로 얻은 수익을 무조건 갈라에게 바쳤다. 달리는 갈라를 위해 성(城)을 사주었는데 갈라가 이곳에서 마음껏 애인을 만날 수 있었다. 반면 달리는 함부로 갈라가 사는 성에 방문할 수 없었다. 여왕님의 초대장을 받아야 했다. 또 달리는 매번 성에 찾아가면 갈라를 위한 선물을 챙겼다. 

 

 


 Scene #4  "아마 누군간 나를 미쳤다고 보겠지만

                  난 그런 걸 상관 안 하는 성격이지." 

 

 

 

 

 

 

달리가 고안한 초현실주의적 물건

 

달리는 자신이야말로 ‘초현실주의자’라고 했다. (그는 자신을 정의내리기는 엄청 좋아하는 것 같다) 달리 자신이 직접 내린 정의인 ‘나는 천재다’, ‘나는 세상의 배꼽이다’와 함께 ‘망언 3종 세트’를 이룬다. 궤변으로 들리지만, 정말 달리는 초현실주의 화가였고, 살아가는 방식 또한 초현실주의였다. 어느 것이 진짜인지 거짓(과대망상)인지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살았다. 달리의 그림도 마찬가지다. 달리는 무의식과 의식세계의 육체적 장벽을 허물었다. 말(馬)이 여인의 나체로 보인다든가, 하나의 풍경이 여러 개의 얼굴로 비친다든가 하는 기상천외한 다중 이미지를 좋아했다.

 

『This is Dali』는 독자들에게 그동안 달리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여러 단편 지식과 다양한 이미지들이 완전히 틀렸음을 보여준다. 책에 달러의 전반적인 삶에 대한 내용이 작품 설명보다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특히 달리의 단점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제목이 『This is Dali』가 아니라 달리를 은근히 비판하는 ‘Diss(디스) is Dali’가 어울린다. 예컨대 열정적인 예술가적 기질의 사랑으로 이어진 달리와 갈라의 관계는 낭만과 거리가 멀다. 두 사람 다 정상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연애를 했다. 그냥 아예 대놓고 바람을 피운다. 그들은 ‘예술’이라는 이름 앞에서만 연인이었을 뿐이다. 틀에 박힌 달리의 그림 서명처럼(달리는 항상 작품에 ‘갈라 살바도르 달리’라고 서명했다) 말이다.

 

달리는 그림으로 세상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은 그를 아인슈타인과 프로이트와 더불어 ‘20세기의 천재’로 인정했다. 달리는 특이한 천재이다. 괴팍한 취향과 자유분방한 사고를 지닌 ‘20세기의 돌아이’다. 자신을 지나치게 과장하고, 이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존경해줄 것을 원했다. 달리는 ‘Famous artist’이자 ‘Fuckin artist’였다. 당신은 이 괴짜 예술가를 감당할 자신이 있는가. 누구든 『This is Dali』을 읽는다면 놀라겠지. 흠칫

 

 

 

 

 

※ 「삶은 콩으로 만든 부드러운 구조물 : 내전의 고통」의 영문 원어명은 ‘Soft Construction with Boiled Beans: Premonition of Civil War’이다. 우리나라에서 이 작품은 원어명을 그대로 번역한 ‘내전의 예감’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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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사랑한 화가 밀레
알프레드 상시에 지음, 정진국 옮김 / 곰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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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이발소에서 흔하게 보는 화가의 그림

 

 

 

 

 

장 프랑수아 밀레  「이삭줍기」  1857년 

 

 

1830년대에 화가들이 화려한 파리를 떠나 바르비종이라는 조그만 마을을 찾았다. 그들은 인적이 드문 숲 속 풍경과 농촌 풍경을 진실하게 그리고 싶었다. 이 ‘바르비종파’의 중심에는 장 프랑수아 밀레가 있었다. 1849년에 바르비종에 정착한 그는 시대와 시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이미지로 농민상을 그렸다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 만큼 우리에게 친숙한 그림은 없을 성 싶다. 밀레의 그림을 볼 때마다 무언가 가슴속에 와 닿는 것이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전의 밀레는 불행했다. 동시대의 화가들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은 것은 물론 화랑들은 팔리지 않는다고 그의 그림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동안 어떤 화가도 시골의 노동을 그림의 주제로 다루지 않았다. 반면에 밀레는 농부들에게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부여했다. 그림 속에 나오는 농촌 풍경은 밀레가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농촌 생활의 일부였다. 농촌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은 일상적인 것에 품위와 무게를 불어넣으려는 그의 예술관을 형성했다.

 

 

 

 

 

 Scene #2  예술의 씨앗이 살아 있지 못한 자

 

밀레의 그림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고, 이발소 벽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기 있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밀레가 왜 농민들의 모습을 고집스럽게 그렸는지 잘 모른다. 올해가 밀레가 태어난 지 200주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밀레의 그림이 재평가받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나마 밀레의 그림이 아닌 그의 생애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전기 한 권이 나오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다. 밀레의 전기는 1881년에 나왔다. 밀레가 세상을 떠난 지 6년이 지난 뒤이다. 전기 작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알프레드 상시에는 밀레를 비롯한 바르비종파를 높이 평가한 인물이다. 밀레 전(傳)은 단순히 밀레의 그림을 홍보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상시에는 밀레가 농촌 그림을 그리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 그리고 그의 예술관에 큰 영향을 주는 인물들까지 삶의 전반적인 모습까지 글로써 생생하게 전달하려고 했다. 

 

본격적으로 화가로 활동하기 전, 도제 시절을 거친 젊은 밀레는 살롱에 인정받는 주류 화가가 될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고향 인근에서 그림공부를 하다가 장학금을 얻어 파리에 진출해 들라로슈의 제자가 됐다. 당시 들라로슈는 고전주의 풍 그림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있었다. 이때 프랑스의 아카데미는 고상한 분위기가 나는 그림을 그려야 했고, 살롱은 그런 취향의 그림을 선호했다. 노동자나 농민은 그려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 그림을 그려봤자 쟁쟁한 화가들이 등장하는 살롱에서 인정을 받을 수가 없었다. 밀레가 독창적인 화풍과 주제를 선보이기에는 파리라는 세상은 너무나도 냉정했다. 특히 종교적인 집안에서 자란 촌놈은 화려한 불빛이 넘치고, 소란스러운 음악이 연신 들려오는 이 쾌락의 도시가 부담스러웠다. 아웃사이더 밀레의 외로운 마음을 이해해주거나 새로운 화풍을 시도하려는 과감한 도전 정신을 알아주는 이도 많지 않았다. 들라로슈의 화실에서 같이 배우는 동료들은 간혹 스승의 정신에 어긋나는 그림을 그리는 밀레를 무시하기도 했다. 파리 생활에 정착하기 시작한 젊은 밀레는 미생(未生)이었다. 훌륭한 실력을 품은 예술의 씨앗이 살아 있지 않았다.

 

 


 Scene #3  바르비종의 화가로 완생하다
 
아무도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파리, 예술에 대한 방황이 더욱 길어질수록 밀레는 시끌벅적한 소음이 가득한 도시에 고립되어만 갔다. 심지어 그를 믿어주는 가족들마저 한 명씩 세상을 떠나면서 실의에 빠진 밀레는 거의 죽어 있는 상태에 이른다. 그러나 ‘미생’ 밀레는 자신이 원하는 예술을 표현할 수 있는 화가로 완생(完生)할 가능성이 있었다.

 

일단 밀레는 아카데미와 살롱이 선호하는 누드화 제작을 포기하기로 한다. 어느 날 그는 목욕하는 여인을 있는 자신의 그림을 본 사람들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누드를 즐겨 그리는 화가라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자존심이 상한 밀레는 아내에게 자신의 포부를 떳떳하게 밝혔다.

 

“다시는 이런 그림을 그리지 않겠어. 그러면 생활은 더욱 어려워지고 당신 고생도 더 심해지겠지만 나는 자유롭게 오래전부터 생각하던 것을 할 수 있겠지.” (129~130쪽)

 

밀레가 오래전부터 자유롭게 생각했던 그림. 그것은 바로 농촌 예술이었다. 밀레는 어렵고도 큰 결심 했다. 그가 농촌 그림을 그리려고 바르비종으로 이사한 1849년은 예술가들에게 힘든 해였다. 밀레도 궁핍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시골에 사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밀레는 그림 주문을 받았고, 주로 그렸던 그림은 대부분 누드화였다. 자유로운 예술을 원하는 밀레는 도제 시절 때 배운 아카데미 풍 그림과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릴 수 있는 도전의 장소인 살롱에 대한 미련을 과감하게 포기한다. 그리고 살아 있지 않은 상태가 된 예술의 씨앗을 다시 살리기 위해 여생을 바르비종의 흙에 묻기로 했다. 바르비종은 ‘미생’ 밀레를 바르비종파의 기둥으로 우뚝 솟게 만들어 주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그의 예술을 알아주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났다. 테오도르 루소와 상시에라는 든든한 예술적 동지를 만났다.

 

 


 Scene #4  잊지 말자. 나는 할머니의 자부심이다 

 

밀레는 레지옹도뇌르 훈장을 받을 정도로 명예를 누리게 되면서 예술가로서 완벽히 다시 태어나는 데 성공한다. 그렇지만, 밀레는 여전히 경건하고 엄숙한 농촌 그림 제작을 포기하지 않았다. 농민들의 건강한 웃음소리가 가득한 농촌은 밀레에 딱 맞는 아틀리에였다. 풍족한 생활은 밀레를 세속의 명리에 쫓는 사람으로 변하게 할 수 없었다. 밀레는 순결한 사람이었다. 오로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자신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우려는 매우 착한 심성이었다. 특히 그는 자연을 무척 사랑했다. 이러한 성품이 형성된 것은 할머니의 영향이 무척 컸다. 그에게 할머니는 위대한 종교 그 자체였다. 할머니는 엄숙하지 않은 파리에서 생활하는 손자가 못마땅했으나 그가 위대한 화가라고 될 것이라고 믿었다. 밀레는 할머니의 자부심이었다.

 

이것이 훌륭한 종교였다. 할머니는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 그것을 그토록 사랑하는 힘을 주었다. 할머니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안심하게 하고, 그들의 잘못을 안타까워하면서 그들을 돕거나 가엾어했다. (밀레의 일기를 인용함, 23쪽)

 

밀레를 파리에서 고립된 생활을 했을 때 그를 견디게 해준 원동력은 의외로 예술이 아닌 할머니에게서 배운 세상에 대한 애점이다. 세상이 그를 쌀쌀하게 대해주었어도 밀레 본인은 그런 세상을 저주하거나 증오하지 않았다. 그는 ‘좋은 사람’, ‘좋은 화가’가 되고 싶었다. 자신을 믿고 아껴준 할머니를 생각해서 화가 이전에 먼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래, 못된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좋은 사람도 있다. 좋은 사람 하나가 많은 못된 사람에 대한 위안이 된다. 도와주려 손을 내미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는 구걸하진 않았다.” (102쪽)

 

우리는 밀레를 이발소 그림으로 워낙 낯이 익어 편안한 농촌화가 정도로 여기지만, 상시에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밀레의 삶은 화가로 살아남으려는 파리 미생의 치열한 인생사였다.  그런 모습을 기록으로 보존한 밀레 전은 예술적 고뇌의 산물을 느낄 수 있다.

 

상시에는 파리에 익숙한 도시인마저 자연 앞에서 온화하게 만드는 밀레를 발견했다. 그런 훌륭한 재능을 가진 밀레를 되살려기 위해서 상시에는 화가의 전기를 써내려갔다. 세상을 사랑스럽게 보는 따뜻한 시선. 밀레는 자신이 사랑하던 것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사랑했던 것마저도 그림으로 되살려내는 위대한 화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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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30 2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4-11-30 22:16   좋아요 0 | URL
네, 맞습니다.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어제 에피소드에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거든요. ^^
 
앵그르의 예술한담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지음, 이세진 옮김 / 북노마드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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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cene #1  "선을 많이 그려보게."

 

 

"드가는 드로잉을 참으로 사랑했다."

 

 

1917년에 세상을 떠난 에드가 드가의 묘비명이다. 드가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의 묘비에 이런 문장을 새겨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정말 드로잉을 지나치게 사랑했다. 그의 연필, 그의 파스텔, 그의 붓은 결코 포기를 몰랐다. 그의 묘선(描線)은 그가 원하는 것에 충분히 가까워져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한없이 그림에 달라붙어 그걸 한장 한장 모방하고, 다시 모방하여 더 심화시키고, 옥죄이고, 감쌌다. 그에게 하나의 작품은 결코 끝이 났다고 말할 수 없었다.

 

드가가 드로잉을 중요하게 여기게 된 계기는 무명시절에 만난 '대가'의 조언에서 시작되었다. 1855년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드가에게 '대가'는 이렇게 말했다. "선을 그리게. 기억을 되살려서든 자연을 보고서든 선을 많이 그려보게." 이때부터 드가는 그림을 그리기 전에 항상 드로잉에 충실했으며 지금까지도 방대한 드로잉 작품이 남아 있다.

 

드가가 만난 '대가'는 바로 고전주의의 대가 앵그르였다. 앵그르는 회화에서 형식을 중시하는 소묘파의 거두였다. 회화에서는 소묘파와 그림의 중심은 색이라고 말하는 색채파 간에 오랜 논쟁이 있었다. 푸생과 라파엘로로 대표되는 소묘파는 그림의 기초인 데생이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주장했고, 루벤스로 대표되는 색채파는 회화의 생명은 색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전자의 소묘파는 앵그르로 이어지고, 색채파는 낭만주의 대표 화가인 들라크루아로 그 계보를 잇는다. 그러나 젊은 드가가 앵그르를 만났던 시기는 소묘파가 색채파의 힘에 밀려 약화되고 있었다. 젊은 들라크루아는 데생과 형식을 고집하는 앵그르를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화가라고 비난했다. 그렇지만 앵그르는 고대 그리스·로마 미술을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사물을 보는 최고의 방식으로 데생을 수없이 강조했다. 결국 앵그르의 데생 사랑은 드가에게로 이어졌으며 피카소의 누드작품에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Scene #2  “내 화실에 문패를 단다면 나는 ‘데생 교실’이라고 내걸 테다.”

 

드로잉. 데생·소묘라고도 불리는 드로잉은 일반적으로 밑그림으로 인식되는 게 우리네 현실이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그림 이전의 단계라는 이야기다. 그런 드로잉이 예술표현 수단으로 독자적인 자리매김을 한 것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이르러서였다. 18세기 이후엔 드로잉 위작이 나돌 정도였으니 이미 수집가들의 수집대상이 되었음을 말해준다. 앵그르 역시 드로잉 수집가 대열에 합류하여 르네상스 회화 같은 세밀한 고전적 묘사의 기초를 다지게 되었다.

 

앵그르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지닌, 그래서 피가 도는 사람인지 아니면 저 먼 고대의 이상적인 대리석 조각인지 모호할 정도로 어여쁜 여성상을 많이 그렸다. 아름다운 선과 정확한 형태는 대상을 아름답게 재현하는 예술적 방법이었다.


예술적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앵그르는 자신만의 노트에 따로 기록했다. 1867년 제자들에 의해 편집돼 세상에 공개된 『앵그르의 예술한담』은 생전 그가 흠모했던 고대 예술의 대가들부터 음악, 연극 관련 주제까지 일관성 없이 잡다한 생각들이 적혀 있다. 그의 데생 사랑은 생전에 공개되지 않은 비밀노트에 꾹꾹 눌러 담았다. 앵그르가 기록한 짤막한 글에서 젊은 드가에게 데생의 중요성을 알려준 대가의 목소리가 생상하게 들려온다. 

 

 

 

 

데생은 단순히 윤곽선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데생은 그저 선으로만 되는 게 아니다. 데생은 표현, 내부 형태, 면, 양감이기도 하다. (44쪽)

 

 

 

 

 

앵그르 「학생들에게 선사한 반신 자화상」 18세기기경

 

만약 내 화실에 문패를 단다면 나는 ‘데생 교실’이라고 내걸 테다. 그리해도 내가 화가들을 키워낸다는 점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45쪽)

 

아펠레스는 선 하나도 긋지 않고 보내는 날이 하루라도 있으면 안 된다 하였다. 그가 이 말을 통해서 가르치고 싶었던 바를 내가 여러분에게 거듭 말하겠다. 선은 데생이고, 데생은 전부다. (47쪽)

 

알렉산더 대왕의 전속 화가로 활동했던 아펠레스는 윤곽선을 매우 중시했고, 매일 선 긋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앵그르도 아펠레스처럼 매일 선 긋는 연습을 했는데 그 결과 꽤 많은 드로잉 작품을 남겼다. 그리다 만 형태로 남은 앵그르의 드로잉 작품은 지금도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앵그르에게는 드로잉은 더 나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의 과정일 뿐이었다. 수많은 제자를 양성하는 스승의 자리에 오를 정도로 예술적 경지에 이른 순간에도 앵그르는 데생이라는 기본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비밀노트는 앵그르의 미술 세계가 꾸밈이나 자기검열 없이 그대로 보존된 귀중한 문헌이다. 앵그르가 생각나는 대로 기록한 내용에는 무한한 데생 사랑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다. 앵그르의 그림을 아는 독자라면 그가 남긴 그림들이 희미한 실루엣처럼 떠올릴 수 있다.

 

 

 

 

 

앵그르  「물에서 태어난 아프로디테」 1848년

 

우리가 실질적으로 조각가들처럼 작업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조소적인 그림을 그려야 한다. (50쪽)

 

 

 

 

 

앵그르  「세 개의 팔을 가진 여인, '터키탕' 습작」

 

좀더 상세한 크로키를 그릴 짬이 있거든 애정을 품고 모델을 취하고, 그 모델을 관찰하고, 온갖 형태로 그려보라. 모델이 여러분의 머릿속에 들어앉을 만큼, 모델이 무슨 소유물처럼 머릿속에 처박힐 만큼. (55쪽)

 

 

 

 

 

앵그르  「도송빌 백작부인의 초상」  1848년

 

인물화를 잘 그리려면 우선 그리고자 하는 얼굴에 깊이 빠져야 한다. 그 얼굴을 오랫동안, 주의깊게, 모든 면에서 숙고해야 한다. 첫 번째 포즈 시간은 아예 거기에 다 할애해야 할 정도다. (69쪽)

 

앵그르의 그림은 부드럽다. 특유의 섬세한 필치는 여인의 곡선을 띤 몸에 누구보다도 잘 어울렸으며 실제로도 그는 벗은, 특히 목욕하는 여인의 몸을 잘 그렸다. 앵그르의 스승 다비드는 “미술이란 자연을 가장 아름답게, 완벽하게 모방하는 것이며 미술 작품의 목적은 눈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앵그르는 이 가르침을 그림 속에서 엄격한 리얼리즘으로 승화시켰다. 그리하여 강조와 비례의 미묘한 변화, 우아함과 사실적 깊이로 19세기 고전주의 미술의 극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앵그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 1808년

 

나는 우연히 거울을 통해 내가 그린 오이디푸스의 허벅지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하얀 옷감이 따뜻한 금빛 살갗의 색상과 나란히 놓이니 더욱더 눈부시고 아름답게 보였다! (63쪽)

 

앵그르는 1808년에 완성된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가 본인에게 있어서 가장 완벽한 그림으로 보였을 것이다. 앵그르의 비밀노트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라파엘로 같은 르네상스 회화의 대가의 그림들을 칭송하는 글이 많은데 앵그르 자신의 그림을 자찬하는 내용으로는 이 글이 유일하다. 앵그르의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푸는 오이디푸스」를 보라. 선이 만들어낸 세련된 남성 육체의 관능미가 느껴지는가. 남자인 내가 봐도 오이디푸스의 튼실한 허벅지가 이렇게 섹시하게 느껴질 수가. 여성 관람객이라면 당연히 오이디푸스의 허벅지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갈 것이다.

 

 

 

 

 

앵그르 「호메로스 예찬」  1827년

 

호메로스는 문학에 있어서나 미술에 있어서나 온전한 아름다움의 원칙이자 모델이다. (97쪽)

 

고전주의 미술이 유행하던 시절에는 고대 그리스 예술작품뿐만 아니라 신화나 비극 같은 고전 문학작품들도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앵그르도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감명 깊게 읽었다. 시간을 초월한 고전의 가치를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발견했다. 이러한 고전주의 예술에 대한 앵그르의 신념은 1827년에 완성된 「호메로스 예찬」에서도 드러난다. 앵그르는 이 그림을 통해 위대한 시인을 신격화한다.

 

 

 

 

 

앵그르  「그랑드 오달리스크」 1814년

 

모델의 목이 가늘더라도 굵게 고쳐 그리지는 말라. 그러나 그 가느다란 느낌을 과장하는 것도 삼가라. 특징을 잘 표현하기 위해 어느 정도의 과장은 허용된다. 특히 아름다움의 요소를 확 터뜨리거나 부각시키는 것이 중요할 때가 그렇다. (128쪽)

 

들라크루아의 후예들은 앵그르가 전통을 고집한 보수적인 화가라고 폄하했으나 앵그르는 정통파의 양식을 어느 정도 고수하면서도 해부학적 묘사를 고의적으로 거부했다. 허리뼈가 세 개나 더 있다는 조롱을 받은 「그랑드 오달리스크」가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그림에서 모델은 큰 엉덩이 때문에 허리는 비정상적으로 잘록해 보인다. 

 

 

 

 Scene #3 “나는 혁명가가 되고 싶다.” 

앵그르는 자신의 비밀노트가 제자들에게 공개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앵그르의 속마음은 그랬을까. 그의 문체는 노트가 자신이 죽은 뒤에 언젠가 읽어보게 될 후손 또는 제자들에게 직접 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 비밀노트를 생전에 공개하지 않았을까?

 

노트를 영원히 비밀로 간직하고 싶었던 앵그르의 모습에서 발자크의 단편소설 미지의 걸작에서 완벽한 여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싶었던 주인공 프렌호퍼를 보는 듯하다. 완벽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프렌호퍼는 완성이 되지 않은 미지의 걸작을 공개하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앵그르는 완벽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한 방법을 찾기 위해서 계속 고민하고 아무렇게 쓴 노트를 누구에게도 공개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완벽한 그림을 그리기 위한 정답을 끝끝내 찾을 수 없었기에.

 

앵그르에게는 이 노트가 단순히 다음 작품을 만들기 위해 생각해낸 아이디어 모음집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앵그르는 입체적인 형태 표현과 세밀한 소묘, 매끄러운 기교 등이 완벽한 구도와 함께 조화를 이루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술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선만으로는 부족했다.예술은 지금 변혁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러한 혁명가가 되고 싶다는 말을 할 정도로 앵그르는 스승 다비드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묘사를 시도한다. 신체 비례가 왜곡된그랑드 오달리스크와 같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정당화한다. 이러한 일관성 없는 기록은 표현에 대한 화가의 자기모순을 읽을 수 있다. 하지만 앵그르의 노트는 어설픈 내용이 있는 기록으로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 위대한 예술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고전주의의 대가가 수없이 고민하고 기록한 변증법적 탐구의 흔적이다. 여기에 고전주의의 대가로만 머물지 않고,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술의 혁명가가 되고 싶은 앵그르의 뜨겁고 치열한 예술혼을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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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갈, 꿈꾸는 마을의 화가 - 내 젊음의 자서전 다빈치 art 17
마르크 샤갈 지음, 최영숙 옮김 / 다빈치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마르크 샤갈   「나와 마을」 1911년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시를 읊어보면 막연한 이국의 마을 풍경이 떠올린다. 김춘수의 시에 영감을 준 모티브는 1911년에 그려진 「나와 마을」이다.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화면 분할로 인한 시각적 분리가 아니다. 나와 마을의 거리를 친근하게 보여주는 그만의 독특한 예술적 질서일 것이다. 기억하는 것은 아름답다. 그래서 그에게 ’눈 내리는 마을‘은 그가 떠나온 고향이자, 아득한 희망이었으며 끝내 갖지 못한 낭만이 됐다. 재현불가능한 꿈을 샤갈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마르크 샤갈 「마을 위로」  1915년

 

 

오늘이 바로 샤갈이 태어난 날이다. 7월 7일. 지금쯤 그는 벨라와 함께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비테프스크 위로 훨훨 날다가 파리의 에펠 탑 꼭대기에서 앉아서 숨을 고르고 있을 것이다. 그와 벨라의 영혼은 지금도 그림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샤갈의 그림을 보면 행복해진다. 어둡고 무거운 느낌을 주는 그림들과 달리 샤갈은 원초적이고 감성적인 색체 그 자체로, 우리의 영혼을 파고든다. 달콤하고도 몽환적인 사랑의 꿈. 우리를 꿈꾸게 하는 이 행복한 그림들은, 이방의 삶을 살았던 샤갈의 어두운 현실에서 퍼 올린 것이다. 예술이 너무 안락한 삶속에서는 꽃 피우지 못한다는 새로울 것도 없는 진리가 샤갈의 경우에도 딱 맞아떨어진다.

 

샤갈은 전 세계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화가 중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샤갈은 한 번도 어떤 주의, 주장, 단체에 머문 적이 없다. 샤갈은 자신의 작품 세계를 분석하고 설명하기를 꺼렸다고 한다. 정규 교육도 별로 받지 않았고, 유대인이면서도 종교에 집착하지 않았고, 파리 뉴욕 등지에서 숱한 예술인들과 교류했지만 어느 유파에도 가담한 적이 없다. 이런 변경의 삶은 그의 작품 세계에 그대로 녹아 있다.

 

특이하게도 샤갈은 자서전을 이제 막 이름이 알리기 시작되는 젊은 시절에 자서전을 썼다. 제목도 거창하다. 나의 삶. 이 때 샤갈의 나이는 서른 초반이었다. 자서전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마무리된다. 샤갈은 98세로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후반기를 담을 수 있는 자서전 2부를 쓰지 않았다. 서른 초반에 자서전을 쓰기고 결심한 샤갈은 60년 인생 더 살 거라고 예상이나 했을까.

 

샤갈에 관한 책을 쓴 미술사가 모니카 봄 두첸은 자서전이 과장되고 거짓으로 가득한 과대망상증 환자의 작품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림에 비해서 낮은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에 소개된 자서전의 제목은 사뭇 낭만적이다. ‘샤갈, 꿈꾸는 마을의 화가’, 부제는 ‘내 젊음의 자서전’  사실 인생 전반을 소개하는 자서전이라기보다는 유년 시절과 화가로 데뷔한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서전은 샤갈의 그림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문헌이다.

 

샤갈의 마을, 그리스 정교회당과 유대교 예배당이 자리한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비테프스크. 유대인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그 마을은 샤갈의 기억 중추에 굳게 자리하며 평생의 테마가 된다.

 

샤갈은 러시아 초등학교로 편입하여, 반유대주의에 시달리면서 상처를 받아 말더듬이가 될 정도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이미 화가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가수, 바이올리니스트, 무용수, 시인이 되고 싶은 꿈 많은 아이였지만, 샤갈은 자신의 그림 실력을 의심치 않았다. 그 아이는 자라서 파리로 가 화가가 되어, 버리고 온 초라한 마을 비테프스크를 떠올린다. 그의 마음 한 켠에 따뜻하게 자리 잡은 그곳의 풍경을 잊지 못한다.

 

중력을 무시하고 우주 유영을 하듯 날아다니는 꽃, 사람, 동물, 집들은 ‘떠나 있지만, 매이지 않는, 그러기에 떠돌 수밖에 없는 자기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외국인으로, 유대인으로, 방랑자로 신산한 삶을 살았지만 그의 그림에는 분노가 없다. 삶의 즐거움과 행복한 꿈이 가득하다.

 

 

 

 

 

 

마르크 샤갈 「비테프스크 위로」  1914년

 

가엾은 고향 마을이여, 나를 용서해 다오. 현기증이 날만큼 그토록 높은 곳에 나는 너를 혼자 남겨 두었구나. 슬프고 기쁜 내 고향 마을이여! (10쪽)

 

눈이 하얗게 비테프스크를 덮고 있는 황량한 겨울, 어깨에 자루를 메고 손에는 지팡이를 쥔 남자가 허공을 날고 있다. 「비테프스크 위로」는 ‘아이의 눈’으로 비테프스크를 바라봤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샤갈이 환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어린 샤갈은 자신의 집 다락방에 엎드려서 마을 풍경을 바라봤다. 창문으로 보이지 않으면 할아버지와 함께 지붕 위로 올라가 마을 풍경을 바라보곤 했다. 그 곳에 가면 사랑스러운 하늘과 별들이 호기심 많은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에서 하늘을 둥둥 나는 노인은 ‘아이의 눈’을 가진 샤갈 본인 혹은 그의 할아버지일 것이다. 

 

샤갈에게서 비테프스크와 그의 뮤즈 벨라를 빼버린다면 무엇이 남을까. 자서전에 샤갈과 벨라의 운명적인 만남이 묘사되어 있다. 샤갈은 벨라의 친구 테아라는 여자와 사귀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의사인데 샤갈은 진찰실에 있는 긴 의자에 누워서 테아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누군가가 진찰실에 들어왔다. 그런데 테아가 아닌 벨라였다. 샤갈은 그녀의 방문에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샤갈의 심장은 벨라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에 뜀박질하고 있었다. 그리고 심장이 샤갈에게 말한다. 저 여자가 바로 너의 아내라고. 친구의 친구를 사랑한 샤갈의 예언은 적중했다.

 

 

 

 

 

나는 그녀가 바로 나의 아내임을 예감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과 눈. 그녀의 검은 눈은 얼마나 둥글고 큰가! 그것이 바로 나의 눈, 나의 영혼이다. (71쪽)

 

샤갈을 색채의 마술사라기보다는 ‘꿈의 마술사’라는 별명이 더 어울린다. 우리는 꿈을 꾸면 형상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흐릿한 형체만 느낄 뿐이다. 꿈의 장면을 컬러 TV를 보는 것처럼 볼 수 없다. 그래서 꿈을 묘사한 샤갈의 색채는 강렬하다. 그것은 샤갈 고유의 색이라기보다는 유대교의 영향에서 받은 강렬한 빨강, 깊은 심연의 파랑, 3월의 보리밭처럼 짙푸른 초록으로 자기화하고 형상화된 색채다. 파랗게 물든 파리의 하늘에서 꿈꾸는 암소를 통해서 샤갈은 시적 감성으로 자신이 꿈 꾼 세상으로 우리를 부른다. 샤갈의 그림은 양식과 유파를 뛰어넘어 세계인들에게 서정과 꿈, 순수성과 영적인 감동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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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4-07-08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 보니 오래 전, 강남역에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란
카페가 있던 기억이나. 이름이 특이해서 친구들이랑 몇 번 다녔었지.
커피맛도 괜찮았고. 결국 그것도 세월 속에 묻히고 말았지만.
10년 전쯤엔 샤갈전도 보러간 기억도 나네. 그림이 몽환적이고, 독특하지만
참 괜찮은데 말야. 책은 또 그렇지 않는가 보군.^^

cyrus 2014-07-09 15:18   좋아요 0 | URL
샤갈의 자서전이라고 해서 특별할 줄 알았는데 특별하기보다는 특이했어요. 자서전이 자신의 삶을 남들에게 이야기하는 글쓰기라고 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을 편집 없이 나열한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간혹 샤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있었고요.. ^^;;
 
몸단장하는 여자와 훔쳐보는 남자 - 서양미술사의 비밀을 누설하다
파스칼 보나푸 지음, 심영아 옮김 / 이봄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Scene #1  누드는 왜 불편한가  

 

인간의 벗은 몸은 논란거리다. 하지만 목욕탕의 전라와 수영장의 반라가 문제되지 않듯, 문제는 “알몸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또 얼마나 드러내고 감출 것인가. 영국의 미술사가 케네스 클라크는 ‘누드’(Nude)와 ‘네이키드’(Nakded)의 차이는 옷을 벗었다는 것에 대한 자의식의 유무라고 말했다. 네이키드는 ‘벗은’ 몸이고 누드는 몸 자체다. 그의 기준에 따른다면 말끔하게 차려 입은 두 남자 사이에서 침착하고 정숙한 자태로 벌거벗은 채 앉아 있는 여인이 등장하는 에두아르 마네의 그림 「풀밭 위의 점식 식사」는 누드화고, 벌거벗은 모습을 들키고 부끄러워하는 여인이 등장하는 「수산나와 두 원로들」은 네이키드화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섹슈얼리티를 담아낸 수많은 미술 작품들이 당당하고 자연스러운 관능미뿐만 아니라 에로틱한 상상, 신체의 변형이나 왜곡을 통한 변태적 성애를 대담하고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어 사실상 예술에 있어서 누드와 네이키드의 구별은 상당히 모호할 수밖에 없다.

 

여자 연예인들이 누드집을 낸다고 하면 사람들은 노골적인 성의 상품화를 기대하는 심리가 있다. 전통적인 윤리가 몸의 드러냄을 억압해 왔다. 따라서 이와 같은 기대심리를 합리화시킬 포장술이 필요하다. 바로 ‘예술’이다. 그렇다고 신체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누드집이나 벌거벗은 여체를 그린 예술작품을 성의 상품화와 결부시키는 것은 곤란하다. 금기를 의식하지 않는다면 누드는 자유로운 자기표현이 될 수 있다.

 

예술 작품으로서의 누드가 관음증의 일종으로 비난을 받는 이유가 근본적으로 우리 인간은 이성의 알몸을 좋아하는 엉큼한 본능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몸을 보면 성적으로 흥분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누드를 무척 좋아한다. 특히 남자라면 벌거벗은 여자의 알몸을 그냥 안 보고 지나칠 수 있을까. 지금도 회자되는 호기심 가득한 영국의 양복점 직원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창문으로 엿보는 행동 하나로 양복점 직원은 한순간에 관음증 환자가 되고 말았다.

 

 

 

 

 

 

존 콜리어  「고다이버 부인」  1898년

 

 

11세기 영국 코벤트리라는 도시를 다스리는 영주는 농민 수탈에 혈안이 돼있었다. 그러나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을 본 영주의 부인 고다이버는 남편에게 과중한 세금을 줄여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영주는 특별한 제안을 한다. 알몸으로 말에 올라 성 안을 한 바퀴 돌면 세금을 거두는 정책을 철회하는 것이다.

 

고다이버는 농민들을 구하기 위해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남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사건은 곧 농민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코벤트리 주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희생하는 영주 부인의 알몸을 볼 수 없다며 창문을 걸어 잠그고 커튼을 친 다음 그 누구도 내다보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알몸으로 말을 타고 가는 부인의 모습을 커튼 사이로 몰래 엿본 사람이 있었으니 톰이라는 양복점 직원이었다. 하늘도 노했는지 그는 나중에 장님이 되고 말았다는데 여기서 남몰래 엿보는 사람, 즉 관음증이 있는 사람을 피핑 톰(Peeping Tom)이라고 한다.

 

 


 Scene #2  욕망, 그림의 또 다른 이름    

 

사실 고금을 막론하고 명화는 온통 여체의 이미지다. 하지만 그림 속에 유달리 여자가 많다는 사실을 이상히 여기는 사람은 없다. 예전에도, 지금도 유명한 화가는 대부분 남자였으니까. 그림은 인간의 욕망과 닿아 있다. 욕망이야말로 그림의 또 다른 이름이다.

 

수많은 누드화를 봤을 미술사학자 파스칼 보나푸는 자신을 그동안 어두컴컴한 벽장 속에서 누드를 몰래 본 관음증 환자라고 커밍아웃(Coming out)했다.

 

"당신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따지고 보면 그림을 보는 행위는 관음증 환자의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그림은 언제나 욕망과 맞물려 있었다." (8쪽)

 

그리스, 로마시대와 중세의 벗은 몸은 남녀를 불문하고 신화나 성서의 이야기를 차용해 교훈을 남기기 위한 표현의 수단이었다. 그림 속 누드는 인간이 아니라 성서나 신화속의 주인공, 즉 신의 모습인 것이다. 나체의 모델은 비너스, 아담, 이브, 제우스신, 아폴론 등이 자주 등장했다. 물론 당시도 성서나 신화의 이름으로 귀족들의 취향을 만족시켜 주기 위한 에로틱한 주제의 그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림을 보면서 음란한 생각을 해도 모두 용서받을 수 있었다. 성경 속 다윗과 밧세바의 불륜을 그린 한스 멤링의 「목욕하는 밧세바」를 주문한 사람이나 관람자는 한번쯤은 다윗처럼 음란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한스 멤링  「목욕하는 밧세바」  1485년경

 

 

이렇듯 화가는 매혹적인 여성의 모습을 통해 남자 관람객을 만족시켜주는 그림을 제작했다. 보는 이의 마음속에 욕망을 불러일으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인 역시 보는 이가 혹할 정도의 자태를 뽐내고 싶어 해 이해가 맞아떨어졌다. 몸단장하는 여인의 모습은 오랜 시간 그림의 주제가 됐다.

 

누드화에서 여성은 피관찰자이며 관찰자는 남성이다. 여성은 그림 속의 여성을 통해 피 관찰자로서 판단되는 관습을 발견하며 보이지 않는 제3의 시선을 의식한 채 거울 앞에 앉아 몸단장을 한다. 한편 남자는 예술가로 관찰자로, 그리고 주체로 존재한다.

 

 

 

 

 

 

르누아르  「여인의 나신」  1876년

 

 

르누아르는 여성의 몸이 뿜어내는 매혹을 찬미하고 칭송하는 것에 자신의 예술혼을 쏟아 부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젊은 여인의 장밋빛 피부와 원활한 혈액순환을 짐작케 하는 피부’였다. 여성 누드는 그에게 단순히 예술의 기본이자 실험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장미를 그리면서도 여성의 누드를 위한 피부색을 연습하고 있다고 말할 만큼 이 주제에 대한 화가의 몰두는 대단했다. 노년의 르누아르는 류머티즘으로 붓을 쥐어야 할 손이 점점 굳어가고, 진통이 오는 고생을 겪었지만 핏줄처럼 펄떡대는 욕망을 멈출 수 없었다. 실제 그는 “여인을 그린 경우에는 그 가슴이나 등을 쓸어 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드는 그림을 좋아한다”고 할 정도로 누드를 사랑했다.

 

 

 

 Scene #3  욕망이라는 이름의 샘

 

누드를 본다는 것의 즐거움은 오랫동안 남성성의 대표적인 표징이었다. 남성들에게 보편적으로 내재된 성적 특성인 ‘관음증’이라는 명분으로 길가는 여성의 신체 부위를 훑어보며 즐거워했고, 에로틱한 시선으로 감상해왔다. 근대 서양회화의 누드화에서도 여성은 오브제로서 보이는 광경이 되고 화가인 남성은 감상자가 된다. 예술 작품에 있어서도 이렇듯 본다는 것의 즐거움은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선정적인, 관음증 환자의 시선으로 보는 그림 이야기가 아니다. 예술에 있어 최고의 질료이자 탐미의 대상이 인간의 육체라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다. 여체의 그림을 보면서 야릇한 꿈을 꾼다. ‘관음증 환자’로 자처한 파스칼 보나푸는 이미 서문에서 우리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위선적인 독자가 될 필요가 없다. 그림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묵인하고 있었던 욕망을 끄집어 내 예술을 새롭게 보는 것이다.

 

 

 

 

 

 

조반니 벨리니  「몸단장하는 젊은 여인」  1515년

 

특히 한걸음 더 나아가 ‘보는 남성, 보여주는 여성’의 구도 속에 숨겨진, 남성의 눈을 통해 여성성을 획득하고 싶은 여성의 내밀한 욕망을 읽어낸다. 시대에 따른 소품의 등장과 달라진 화장법을 상상하는 일은 즐겁다. 더불어 그림을 통해 아름다움을 원하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과 마주한다. 여인을 바라보는 은밀한 시선뿐 아니라 자신의 몸을 단장하는 여인의 욕망 말이다. 누군가를 유혹하기 위한 과감한 포즈나 화장을 하지 않은 맨얼굴 등 아무에게도 보여주고 싶지 않은 부끄러운 여인의 마음을 읽는 일도 즐겁다. 여성의 시선으로 남성성이 보완되듯 남성성에 의해 여성이 만개할 수 있다. 그리고 남성 화가에 의해 창조된 아름다운 여성 이미지 속에 숨겨진 미적 에너지도 긍정적으로 보듬어 안는다.

 

‘외설’과 ‘음란’이라는 낙인이 찍히기 쉬울 정도로 대중과의 소통이 용이하지 않은 누드는 계속 그려질 것이다. 욕망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화가들은 여인의 곡선이 아름다워서 누드를 그리지 않을 것이다. 옷이라는 가면을 없앤 후 가장 본래적인 육체를 통한 감정을 그려내고자 한 것은 아닐까. 욕망이라는 이름의 감정의 샘을 표현하는 것이다. 누드모델을 두고 그림을 그리는 것 역시 감정표현을 위한 정지동작을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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