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같은 기계’ 혹은 ‘기계 같은 인간’이 등장하는 시대가 올까. 명확한 답변을 내리기 어렵지만, ‘가능하다’는 낙관론이 확산하고 있다. 확실한 것은 인공지능(AI)을 넘어선 초인공지능(Artificial Super Intelligence, 이하 ‘ASI’)의 등장은 시간문제라는 점이다. 초인공지능은 인간의 지적 수준을 넘어선 초월적인 지능이다. 그것은 생물공학과 결합해 생물 또는 기계의 형태가 될 수도 있고, 컴퓨터처럼 스스로 업그레이드가 가능한 인공두뇌로 구현될 수 있다. 미래의 인류는 우리 자신보다 더 영리한 존재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 닉 보스트롬 《슈퍼 인텔리전스》 (까치, 2017)

* 레이 커즈와일 《특이점이 온다》 (김영사, 2007)

 

 

 

자연선택의 틀 안에서 이뤄지던 진화를 인간이 직접 결정하는 날이 멀지 않았을지 모른다. 인류가 과학기술을 이용해 스스로 진화한다는 주장은 이미 20년 전에 등장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철학과 교수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이 주도해 주창한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다. 《특이점이 온다》의 저자인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사이보그화된 트랜스휴먼(transhuman)의 등장을 예고하면서 급격한 기술 변화로 인류의 삶이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바뀌는 시점(singularity, 특이점)이 올 거라고 말한다.

 

 

 

 

 

 

 

 

 

 

 

 

 

 

 

 

 

 

 

 

 

 

 

 

 

 

 

 

 

 

 

* 유발 하라리, 재레드 다이아몬드, 닉 보스트롬 외 《초예측》 (웅진지식하우스, 2019)

* 유발 하라리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김영사, 2018)

*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김영사, 2017)

* 유발 하라리 《사피엔스》 (김영사, 2015)

 

 

 

다른 한편에선 인간이 초인공지능에 밀려 무력한 존재로 전락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시대는 끝나고, ‘호모 데우스(Homo Deus)의 시대가 될 것으로 예측한다. 진화 끝에 살아남은 호모 사피엔스가 스스로 그 역사의 막을 내리고 ‘신이 된 인간(호모 데우스)’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빛의 속도로 진보하는 기술은 인간을 더 이상 한계를 갖지 않는 신으로 만들어 버리고, 호모 데우스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 낸다.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인간을 완벽하게 통제하는 ‘데이터 교(Dataism)다. 하라리는 데이터를 신처럼 받드는 한편 인간 스스로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빅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분석 결과에 의존하는 미래 사회를 묘사하기 위해 이런 용어를 만들어냈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는 모든 권위가 인간으로부터 빅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넘어가는 ‘디지털 독재’를 우려한다. 최근에 나온 학자들의 대담집 《초예측》에서도 하라리는 인간과 기술의 진화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를 높인다. 인공지능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고 ‘쓸모없는 계층(useless class)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류 3부작(《사피엔스》, 《호모 데우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누누이 밝힌 기존 입장을 재차 강조했다. 《초예측》의 대담자로 참여한 닉 보스트롬은 트랜스휴먼의 시대는 필연적으로 등장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공지능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로랑 알렉상드르, 장 미셸 베스니에 《로봇도 사랑을 할까》 (갈라파고스, 2018)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생물학적인 인간은 기계에게 패배할 운명이라며 인간이 기계에게 추월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술과 결합해 ‘증강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급진적인 시나리오 때문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특이점’에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로봇도 사랑을 할까》는 트랜스휴머니스트와 트랜스휴머니즘을 비판하는 철학자가 열두 가지 주제를 놓고 벌인 (토론을 방불케 하는) 대화록이다. 트랜스휴머니스트 로랑 알렉상드르(Laurent Alexandre)는 트랜스휴머니즘의 흐름을 빨리 적응하는 나라일수록 세계 질서를 선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트랜스휴머니즘이 우리 삶을 편리하게 해줄 것으로 믿는다. 이렇다 보니 그는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안이한 인식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의 장밋빛 전망은 트랜스휴머니즘의 등장으로 서서히 부활하기 시작하는 우생학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간은 인간의 역량을 뛰어넘은 인공지능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철학자 장 미셸 베스니에(Jean-Michel Besnier)는 이 트랜스휴머니스트의 낙관론에 적절히 제동을 걸어 트랜스휴머니즘으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윤리적 문제를 환기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나온 트랜스휴머니즘 찬반 입장들을 살펴보면 늘 반복되는 한계가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에 대해 고민하고 토론하는 장에 ‘여성’과 ‘장애인’, ‘노년층’, ‘성소수자’는 배제되어 있거나 ‘주변화된 존재’인 것처럼 언급된다. 대부분 트랜스휴머니스트와 그들을 비판하는 학자는 ‘남성’, ‘시스젠(cisgender)’이며, 그들이 트랜스휴머니즘 담론을 독점하고 있다. 트랜스휴머니즘을 비판적으로 보는 유발 하라리는 동성애자이지만, 그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공개했을 뿐, 트랜스휴먼의 시대가 성소수자의 삶에 미칠 영향에 대해 진지하게 언급한 적이 없다.

 

 

 

 

 

 

 

 

 

 

 

 

 

 

 

 

 

 

 

* 도미니크 바뱅 《포스트휴먼과의 만남》 (궁리, 2007)

 

 

 

《포스트휴먼과의 만남》은 트랜스휴먼, 더 나아가 순수한 생물학적 인간이 완전히 사라진 ‘포스트휴먼(posthuman)의 미래 사회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의 부제는 ‘포스트휴먼 1세대로 살아갈 바로 지금 살아있는 세대를 위한 안내서’인데, 단점이라면 이 책은 ‘포스트휴먼 1세대로 살아갈 여성’에게 전혀 유익하지 않다는 점이다. 여성의 건강권에 대해서 단 한 줄도 언급 없이 ‘시험관 아기’ 시술을 낙관적으로 전망하고 있다. 그리고 유전공학 기술로 만들어진 여성의 가슴을 ‘멋진 발명품’, ‘사춘기 남학생들을 위한 차세대 수음 보조기’라고 언급한다.

 

 

 

 

 

 

 

 

 

 

 

 

 

 

 

 

 

 

 

* [품절] 척 팔라닉 《질식》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척 팔라닉(Chuck Palahniuk)의 소설 《질식》의 일부 장면을 인용하면서 포스트휴먼을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존재로 상상한 내용은 불쾌감을 유발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으로부터 최대한의 흥분감을 맛보고 싶어한다”고 척 팔라닉은 자신의 소설 『질식』에서 단언하다. 그는 작품 속에 퇴폐적이면서 약간 정신이 돈 듯한 인물들을 등장시킨다. [중략] 『질식』에서는 비행기와 공항에서 자기들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는 쿨하스적인(건축가 렘 쿨하스를 가리키는 말로 출장이 잦음을 빗대어 하는 말―역주) 국제적 사업가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러시안 룰렛에 비견할 수 있는 섹스놀이를 고안해낸다. 비행기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지 않고 기다리다가 제일 처음 화장실 문을 밀고 들어온 승객에게 자신을 제공하는 것이 이들이 생각해낸 놀이다. 이들은 “아무 곳도 아닌 허공을 날아 히드로 공항에서 요하네스버그 공항에 도착하기까지 14시간 동안 적어도 10번 정도의 모험을 즐기며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낀다.” 이는 마치 낚시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당신이 남자라면 가장 좋은 방법은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당신 거시기를 공중에 내놓은 다음 당신 거시기가 정오를 가리키게 될 때까지 열심히 혼자서 작업을 하라. 그런 다음 가만히 기다리면 된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은 없다. 플라스틱 변기에 앉아 그럴 듯한 모험이 시작되기를 기대하면서 기다린다면 훨씬 기분이 나을 것이다.” “아예 문을 열고서 당신 마음에 드는 사람이 들어오면 그때 볼일을 보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이 놀이에서 가장 흥미를 돋우는 대목은 도전과 위험 감수로 인하여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왕성해진다는 점이다. [중략]

  척 팔라닉 소설의 주인공들은 인생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생각을 버린 사람들이며, 자신들의 실존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보겠다는 생각을 단념한 지 오래다. [중략] ‘답이 없다는 게 정답’임을 알기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의 삶을 가지고 끊임없이 채널 돌리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이들은 삶을 최대한 밀도 있는 순간들의 연속으로 만들 수 있는 놀이를 고안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삶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모델로 삼아 구축한 것이나 다름없다.

 

(《포스트휴먼과의 만남》, 194~196쪽)

 

 

 

《포스트휴먼과의 만남》을 쓴 저자는 소설에 묘사된 ‘범죄 행위’에 가까운 섹스 놀이를 포스트휴먼의 시대에 일어날 법한 상황으로 제시한다. 심지어 포스트휴먼 시대의 ‘게이’를 ‘섹스에 혈안이 된 인간과 동물의 잡종’이라고 묘사한다. 동성애자를 ‘변태성욕자’로 보고 있다.

 

 

 신종 게이는 예전처럼 남자와 여자의 잡종이 아니라 인간과 동물의 잡종으로 섹스에 혈안이 된 자들이었다. 예를 들면 성인 남자(여자도 가능하다)와 카멜레온이 반반씩 섞여 긴 혀의 움직임이 매우 유연한 자들이 여기 속한다. ‘모피로 된 비너스’, 다시 말해서 온 몸이 모피로 덮인 여자들도 있다.

 

(《포스트휴먼과의 만남》, 228쪽)

 

 

동성애자는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쾌락만을 좇는 변태성욕자가 아니다. 유발 하라리가 이 대목을 본다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

 

 

 

 

 

 

 

 

 

 

 

 

 

 

 

 

 

 

*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성의 변증법》 (꾸리에, 2016)

 

 

 

《로봇도 사랑을 할까》의 장 미셸 베스니에는 인공 자궁을 여성 해방에 기여하는 발명품이 될 것이라고 전망했던 철학자 앙리 아틀랑(Henri Atlan)을 언급한다. 그러나 1970년대에 이미 여성 해방을 위한 획기적인 수단으로 인공 자궁의 실현 가능성을 언급한 여성이 있으니 그녀가 바로 슐라미스 파이어스톤(Shulamith Firestone)이다. 1970년에 그녀는 자신의 책 《성의 변증법》에 인공 자궁에서 태아를 잉태해 남성도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했다. 로랑 알렉상드르는 인공 자궁 기술을 예찬하면서도(그는 미래지향적인 모든 과학 기술을 찬양한다) ‘남자도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임신과 출산 경험이 없는 ‘남성’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인공 생식’ 기술의 등장에 지나치게 열광한다. 그들은 인공 생식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여성의 몸’을 등한시한다. 그리고 ‘인공 생식’ 기술이 등장하면 ‘불임’을 ‘치료해야 할 문제’로 보게 만든다. 모든 인간에게 생식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불임은 무조건 치료해야 할 문제인가? ‘불임은 무조건 고쳐야 한다’는 식의 발상은 불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여성의 몸을 ‘열등한 몸’으로 규정하면서 배제한다.

 

트랜스휴먼 시대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려면 우리 삶을 관통하는 젠더, 연령, 계층, 장애 유무 등의 여러 가지 사회적 · 문화적 배경들을 고려하는 포괄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미래를 향한 기술 발전의 최우선 목표는 모든 인간에게 삶의 성취를 제공하는 일을 만들어내는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다. 특정한 인간을 주변화하고 소외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이 장악한 미래는 인간 존재의 존엄성 자체가 쓸모없어진 디스토피아(dystopia)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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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왜 극단적일까 - 사회심리학자의 눈으로 본 극단주의의 실체
김태형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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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냐 우파냐, 여당이냐 야당이냐, 성장이냐 분배냐, 문명이냐 야만이냐, 갑이냐 을이냐. 인간의 특성 중 가장 나쁘고 고질적인 것이 있다면 이분법적 사고방식이다. 그 사고 속에는 내 편은 무조건 선이고, 내 편이 아닌 타인이나 집단은 반드시 배척해야 할 악이라는 관념이 배어 있다. 모든 사고를 이분법적으로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에 ‘내 편’과 ‘내 편이 아닌 남(others)’이 존재한다. ‘내 편’은 무조건 맞고, ‘남’은 무조건 틀린다. 타자에 향한 혐오를 드러내는 이런 ‘편 가르기’ 프레임의 천박성은 익명성이 보장되는 인터넷에서 극에 달한다. 여성이나 난민에 대한 배타성은 가히 폭력적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이 보기에 옳다고 확신하는 것에 과도하게 몰입하는 ‘극단주의’에 빠진다. 오랫동안 굳어진 이분법적 사고에서 시작된 극단주의는 인간관계를 해치면서 우리 사회 전체를 갈등과 대립으로 몰아넣는다.

 

우리는 곧잘 자신이나 주변의 누군가가 그 어느 한 편과 동일시되고 그 때문에 배척당하기 쉬운 ‘극단주의의 세상’ 속에 살고 있다. 사실 여부와 무관하게 일단 한번 그렇게 ‘찍히면’ 거의 속수무책이다. 지금 우리 삶의 주변을 둘러보면 거의 모든 장면에서 극단주의가 발견된다. 어디든 극단주의자나 극단적인 집단이 있다. 다만 자신과 다른 생각을 얼마나 강하게 배척하는지의 여부가 중요하다. 극단주의자들은 자신이 누구인가에 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자기 생각과 일치하거나 ‘내 편’이라고 느껴지는 집단에 속하려고 한다. 내 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입장, 사정, 이익 등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들을 비하하는 언어를 만들어 사용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자신들만의 동질감을 느끼려고 한다. ‘~노?(일베에서 시작한 말투)’, ‘젠신병자(트랜스젠더와 정신병자의 합성어로, 트랜스젠더를 비하하는 용어)’ 같은 혐오 발언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극단주의는 매우 편협하고 자기들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냉혹하게 배타적으로 된다.

 

그런데 극단주의는 ‘유유상종(類類相從)’만으로 설명이 가능한 현상인가. 동질감이 극단주의를 불러일으키는 주범인가. 동질감이나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의 본질인데, 동질감을 무조건 나쁘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 사실 특정 집단 안에 공유하고 있는 동질감을 문제 삼으면서 그들을 극단주의라고 규정하는 논리는 극단주의의 정의를 오용했을 뿐만 아니라 그 집단의 실체를 왜곡한다.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가 화두로 삼은 출발점이 바로 극단주의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현실적인 정의와 그것이 일어나는 다양한 배경에 대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극단주의는 배타성, 광신, 강요, 이 세 가지 경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배타성은 이미 언급했다. 배타성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이 아닌 타자나 집단을 배척하는 경향이다. 광신은 객관적인 사실이나 진실을 무시하고 주관적인 믿음이나 망상에 집착하는 비이성적인 반응이다. 강요는 진실과 거리가 먼 헛된 생각을 타인에게 믿으라고 억지로 요구하는 태도이다. ‘가짜 뉴스(Fake News)’를 만들고 유포하는 것도 극단주의자가 할 수 있는 강요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가짜 뉴스는 누구나 쉽게 이용하는 미디어 플랫폼에 ‘정식 기사’로 둔갑하여 나타난다. 감쪽같이 변장한 가짜 뉴스들은 사람들의 입맛에만 맞으면 쉽게 유포되어 확산한다. 개인의 감정과 신념이 객관적 사실의 자리를 대신하는 ‘탈진실 시대(post-truth)’는 극단주의가 자랄 수 있는 최적의 시대적 환경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가짜 뉴스는 역설적이게도 종교에 특히 많다. 과거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한 휴거 종말론은 사이비 종교가 만들어낸 대표적인 가짜 뉴스다. 종교와 극단주의는 서로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일신교인 기독교와 이슬람은 다른 종교를 ‘이단’으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기독교 ·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각각 성경과 꾸란의 무오류성을 고수하면서 자신들이 믿는 교리를 타인에게 강요한다. 극단주의자는 타인을 내 편으로 만들기 위해 자기 생각을 강요할 뿐만 아니라 양자택일해야 하는 상황까지 요구하기도 한다. 극단주의자는 자기 생각을 거부하는 타인을 증오한다.

 

극단주의를 분석한 미국의 심리학자들은 ‘유유상종’을 극단주의의 주요 원인으로 본다. 특히 캐스 R. 선스타인(Cass R. Sunstein)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한 데 모여 폐쇄적인 의견을 나누게 되면 더 극단적인 입장이 나온다는 이른바 ‘집단 극단화 이론’을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는 선스타인을 비롯한 서구 학자들이 믿는 집단 극단화 이론의 한계를 지적한다. 집단 극단화 이론은 사회적 동물(social animal)인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동질감을 냉소적으로 보게 만들며 동질감을 공유하면서 구질서에 저항하는 ‘민중’을 억압하는 이론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는 극단주의 자체뿐만 아니라 극단주의라는 용어를 이용하여 타인이나 집단을 억압하는 특정 세력을 비판한다. 그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성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희생양’을 만들어 낸다. ‘희생양’에 ‘극단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면 민중의 분노는 ‘희생양’에 향한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사회에 대한 불만이나 분노를 권력층이 아닌 자신보다 약한 타인이나 집단에 표출한다.

 

《그들은 왜 극단적일까》는 사회심리학의 관점으로 극단주의를 분석한 책이다. 이 책에 극단주의로 설명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례들이 나오지만, 그렇다고 이 책이 ‘극단주의의 모든 것’을 알려준다고 볼 수 없다. 분명 다른 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극단주의는 다각적이고 복합적인 원인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극단주의는 한 가지 원인이나 특징을 콕 집어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학제간 접근을 통한 극단주의 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극단주의는 평범하게 사는 일반인과 거리가 먼 남다른 사람들에게만 있는 특별한 반응이 아니다. 극단주의자는 누구나 될 수 있다. 사람이라면 완벽할 수는 없다.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이분법적 사고, 하나의 기준을 가지고 사람 또는 전체를 판단하는 오만함, 내가 믿고 있는 지식이 옳다는 착각 등은 살아가면서 몇 번 이상은 인간이라면 다 빠질 수 있는 ‘생각의 함정’이다. 삶의 모든 순간 동안 현실 감각을 유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사람에게는 자기 생각이 맞는지 성찰하고, 타인의 생각에 대해 꼼꼼하게 따져보는 능력도 있다. 잘못된 사고방식을 원천봉쇄하고 살 수는 없지만 경계할 수 있다. 결국 ‘생각의 함정’에 몇 번씩 빠지더라도 탈출하려고 노력한다면 극단주의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생각의 함정’에 너무 오래 갇혀 있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극단주의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본인이 비이성적 믿음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Trivia

 

 

* 데스먼 투투 성공회 대주교는 극단주의를 “다른 관점을 인정하지 않을 때, 자신의 견해를 대단히 배타적으로 고수할 때, 다를 수 있음을 용인하지 않을 때”라고 정의했다. (초판 1쇄, 26쪽)

 

→ ‘데스먼 투투’는 ‘데스먼드 투투(Desmond Tutu)의 오식으로 보인다.

 

 

 

* ‘광신(fanaticism)’의 어원은 로마어 ‘fanum’인데, 이 말은 ‘성스러운 장소 혹은 사원’을 의미한다. 현재에는 터키에 속하는 카파토키아 지역의 여신인 코마나가 로마로 수입되면서 벨로나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는데, 이 벨로나 여신을 추종하는 신도들이 사원에서 미친 사람들처럼 피투성이의 제의를 벌이는 것을 본 로마인들이 이들을 ‘광신도(fanatici, fanatic)’이라고 불렀다. (초판 1쇄, 60쪽)

 

 

→ 고대 로마인들이 사용한 언어는 ‘로마어’가 맞긴 하나 오늘날에는 주로 ‘라틴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카파토키아’는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오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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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2-24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종로에는 대형 성조기와 이스라텔
깃발이 휘날리더군요.

어느 집회에서는 욱일승천기도 등장했
다고 하던데... 현실이 상상을 능가하는
시절이 되었네요.

포용의 정치가 아니라 혐오의 정치를
구사하는 이들의 종말이 보고 싶습니다.

cyrus 2019-02-25 15:48   좋아요 0 | URL
역시 서울의 집회 스케일은 상상초월이네요... ^^;;

2019-02-24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25 15:49   좋아요 1 | URL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 - 강남순의 철학에세이
강남순 지음 / 한길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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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남성, 여성이라는 두 개의 범주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이상한 존재로 규정해버린다. 젠더(gender)는 외모와 행동을 통해 단박에 알 수 있다는 믿음이 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러한 믿음은 상대방과 관계를 맺는 과정에 큰 영향을 준다.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보면 저 사람의 외모와 행동만으로 남자인지 여자인지 추정하거나 판단한다. 상대방의 젠더를 외모와 행동과 같은 외적인 단서로 추정하는 것을 ‘젠더 귀인(gender attribution)이라고 한다.[주1] 젠더 귀인에 의해 부여된 성 역할은 개개인을 속박하고 예외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

 

젠더 이분법(gender binary)은 안정적이다. 견고하던 젠더 이분법에 파열음이 나기 전까지는 이러한 남녀 사이의 구분이 전통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더 많은 젠더가 있으며 그 젠더마다 어떤 규범대로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각각 부여된 고정된 성 역할에서 벗어나게 되며 새로운 성 정체성을 주체적으로 확립할 수 있다. 또 외모와 행동이 알려주는 정보, 그중에서 젠더 귀인과 관련한 정보는 그리 정확하지 않다. 상대방의 젠더가 모호하거나 젠더 이분법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하여 ‘저 사람은 남자일까, 여자일까?’라는 반응을 드러내는 순간 젠더를 인식한다. 이를테면 손톱에 매니큐어를 한 남자를 만났다고 치자. 아마도 당신은 ‘저 사람, 남자 맞아?’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손톱에 매니큐어를 하지 않은 남자를 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우리는 남자가 매니큐어를 하지 않는 것을 당연하고 매우 자연스러운 사실로 여기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매니큐어 하는 남자를 게이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화장하는 남자들이 많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남자가 화장하는 것을 불편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게이들이 외모에 많이 신경을 써서 미용에 관심이 많다고 생각한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실제 인물이다. 신학자 강남순의 강의를 들었던 학생이다. 그녀뿐만 아니라 강의실에 들어오는 학생들은 매니큐어 하는 남자를 이상하게 보지 않는다. 또 그 사람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젠더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사실 매니큐어 하는 남자를 ‘남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젠더 귀인에 익숙해진 우리는 겉모습을 보고 남성으로, 매니큐어 하는 행위를 보고 여성으로 판단한다. 그런데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자기 자신을 남성으로 인식할까? 이것은 본인만이 답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자신을 여성으로 인식할 수도, 남성인 동시에 여성으로 인식할 수도, 자신을 남성도 여성도 아닌 에이젠더(Agender)로 인식할 수 있다.

 

강남순이 쓴 글의 제목이자 에세이집의 표제인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젠더 이분법에 저항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는 퀴어(queer)한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다. 견고한 젠더 이분법 구조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그 구조 바깥에서의 삶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젠더 이분법은 너무 일상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젠더 이분법은 젠더에 대한 구분과 편견을 강화하고 다른 젠더의 정체성을 부정한다. 대상을 둘로 나누면 편하다. 이러한 간편하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젠더 이분법은 성소수자를 차별하거나 혐오하는 효과적인 선전 도구가 된다. 강남순의 말에 따르면 우리 사회에 가장 심각한 병은 ‘획일화된 존재 방식의 절대화’이다. 쉽게 말하면 시스젠더(cisgender)는 성별과 관련된 ‘획일화된 프레임’을 절대적으로 신봉한다. 시스젠더는 성별이 남성과 여성, 이 두 가지로 고정돼 변하지 않는다는 인식 속에서, 사람들은 태어남과 동시에 의사나 부모에 의해 하나의 성별을 지정받고 그것에 따른 겉모습, 성역할 등을 요구받으며 자란다. 그리고 젠더 이분법에 맞지 않는 사람들에게 겉모습이 어떤지, 성격이 남자/여자답지 못하다든지 등 여러 가지 간섭과 억압을 받는다. 이러한 억압이 강압적으로 반복되면 획일화된 젠더 이분법의 틀에 벗어난 퀴어를 향한 혐오와 증오 범죄가 일어난다.

 

저자는 성서의 구절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전통 신학의 맹목적인 해석을 비판한다. 그녀는 성서가 인간이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에 적확한 답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하면서 ‘성서를 잘 읽는 방식’을 제시한다. 성서와 함께 생각하면서, 성서에 ‘저항(비판)’하는 독서 방식이다. 교회는 전통적 여성의 역할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라고 말하면서 소명을 거부하는 불순종은 죄악의 근원이 된다고 가르친다. 그리고 여성과 성소수자들이 여성 해방과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장하면 창녀 · 죄인 · 이단으로 취급하여 배척한다. 보수적인 기독교는 신앙의 이름으로 ‘물음표를 박탈하는 종교’[주2]이다. 우리나라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문제이다. 차별과 혐오를 묵인하고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우리나라 기독교는 사회와 단절된 채, 자신들만의 성서에 갇힌 종교가 되었다.

 

누구나 ‘연대’라는 말을 좋아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연대’는 참으로 어렵고 현실적으로 와 닿지 않는 말이다. 특정 집단이나 상대방을 지지하면서 ‘연대’를 누누이 외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을 차별할 수 있고 차별을 묵인할 수도 있다. 페미니스트든 진보주의자이든 누구나 ‘인식론적 사각지대’[주3]에 빠진다. 그러나 연대가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리고 언젠가는 ‘인식론적 사각지대’라는 함정에 여러 차례 빠질 수 있다고 해서 살아있는 한 지속적인 사유를 멈출 수 없다.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젠더 트러블》 서문에 ‘살기 위한 욕망, 삶이 가능해지도록 만들려는 욕망, 그 가능성을 다시 생각해보려는 욕망’에 의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인간이라면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욕망이 있다. 이 기본적인 욕망이 없는 인간은 ‘좋은 삶’이 무엇인지 사유하지 않게 된다. 그는 살아 있어도 죽은 존재이다. 나를 둘러싼 이 세상에 무엇이 문제인지, 더 나아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며, 누구와 함께 연대해야하는지 생각하는 것은 제대로 살고자 하는 욕망이다. 《매니큐어 하는 남자》는 독자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는 욕망을 깨운다.

 

 

 

 

 

 

 

 

[주1] 케이트 본스타인, 조은혜 옮김, 《젠더 무법자》, 바다출판사, 54~56쪽, 2015.

 

[주2] 강남순, 「아담과 하와는 몇 살이었을까」, 《매니큐어 하는 남자》, 한길사, 212쪽, 2018.

 

[주3] 강남순, 「유아인은 페미니스트인가」, 《매니큐어 하는 남자》, 한길사, 136쪽,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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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19-02-23 0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서지상주의, 문자지상주의, 특히 절대적으로 구약에 기대는 문제는 비단 LGBTQ에 대한 자세를 넘어 한국개신교의 고질적인 문제라고 봅니다. 포교/선교/헌금활동/교리/강론을 들어보면 구약을 근거해서 나오는 것이 많고 신약은 곁다리 같이 보일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신약은 용서와 관용이 주된 내용이지만 구약은 아전인수로 갖다 붙일 것들도 많고 흑백을 나누는 성향이 있어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cyrus 2019-02-24 16:20   좋아요 1 | URL
대부분 사람은 성서를 고전으로 분류합니다. 그런데 성서를 비판적으로 읽지 못하게 한다면 성서가 고전으로서 자격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우리 몸이 세계라면 - 분투하고 경합하며 전복되는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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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불의의 사고로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면? 불치병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게 된다면? 뜻하지 않는 재난과 질병으로 장애인 또는 망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 우리는 불안에 휩싸인다. 활기 넘치는 젊음과 건강함을 추구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우리 몸은 사회로부터 ‘소외당할’ 가능성에 늘 노출돼 있다.

 

장애와 죽음의 공포에 떠는 우리 몸은 계속해서 ‘좋은 몸’이 되라는 정언 명령을 듣게 된다. ‘좋은 몸’이란 ‘건강하고 일할 수 있는 이성애자’의 몸이다. 경제 성장을 지향하는 국가 통치는 국민의 몸을 생산의 주체, 혹은 생산에 참여하지 못한 타자로 나눈다. 병든 몸, 늙은 몸, 장애를 가진 몸, 출산하지 못하는 몸, 그리고 퀴어(queer)[주1]한 몸은 생산 ․ 재생산에 참여하지 못하는 ‘비(非)국민’으로 분류된다. 인간은 누구든 자기 위치에서 ‘좋은 몸’에 대한 강박을 짊어지고 산다. ‘정상성’의 굴레 속에서 인간은 ‘건강하고 일할 수 있는 이성애자’로 살기 위해 끝없이 스스로 채근하고, 통제한다. 또 ‘좋은 몸’에 부합되지 않은 타자를 배제하고 차별하면서 자신의 정상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개인들의 강박을 사투로 만드는 것은 ‘정상적인 몸’과 그렇지 않은 몸을 구분하게 만드는 권력과 그로부터 비롯된 지식이다.

 

《우리 몸이 세계라면》은 다양한 몸들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가르는 지식이 무엇이며, 사회 안에서 어떻게 생산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책을 쓴 김승섭 교수는 인간의 몸을 위계화 하는 지식에 향해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지식은 타인을 차별하고,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는 권력에 의해 만들어지고 생산되어 왔다는 것이다. 모든 지식에는 누군가의 관점이 반영하기 마련이고, 어떤 지식은 권위 있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의학 지식은 성인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해서 발견된 것이다. 이렇다 보니 남성 의학자와 의사들은 여성에게만 일어나는 증상이나 의약품의 부작용 등을 진지하게 분석하지 않았다. 진화가 잘 된 백인과 진화가 덜 된 유색인종을 분류하는 인종주의는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식민지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 인종주의 과학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으려는 일본에 주요한 관심사가 된다. 일본은 자신들의 인종적 우월함을 과시하는 동시에 조선을 통치해야 할 과학적 근거를 찾으려고 했다.

 

과거의 구습으로 남게 된 지식과 그로 인해 생긴 폐해를 지금에서야 따지면 뭐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불행하게도 차별과 불평등을 부추기는 지식은 지금도 재생산되고 있으며 타인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좀 더 설명하자면, 지식이 우리 사회에 어떻게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지 살펴보지 않는 것 자체가 위험한 수준이다. 무관심으로 가장한 차별은 혐오를 강화하는 ‘방관자 효과(bystander effect)’를 낳을 뿐이다. 알게 모르게 일상생활 속의 크고 작은 지식은 타인에 향한 차별, 혐오와 폭력을 조장하게 만든다. 그러한 지식 일부는 검증을 제대로 거치지 않았거나 특정 세력의 필요에 따라 날조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의료 기술과 의료 복지 수준은 선진국에 뒤지지 않지만, 정작 성소수자들은 의료 서비스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성소수자의 건강 실태를 전면적으로 파악하는 연구 분위기조차 조성되어 있지 않다. 성소수자들에게 필요한 지식이 빈곤할수록, 또 덜 알려질수록 성소수자의 몸은 소외되고, 아무도 그들의 몸에 관심을 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지식이 있어야 할 곳에 편견과 가짜 뉴스가 채워진다. 이로 인해 성소수자는 건강하지 않은 존재로 이야기되며, 건강하지 않은 존재는 사회와 질서를 위협하고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비국민’이 된다.

 

저자는 이 책의 마지막에 부조리한 사회로 상처받은 사람들의 고통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그 일을 계속 해보겠다고 다짐한다. 오드리 로드(Audre Lorde)의 말을 빌리자면, 김승섭 교수의 글쓰기는 ‘성찰하는 일에 친숙해지는’[주2]이다. 정상적인 몸, 건강한 몸, 우월한 인종, 순수한 민족이라는 것은 과장되었고 어떤 의미에서 허구적이다. 우리는 조작된 환상의 몸이 아닌 ‘진짜 몸들’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해야 한다. ‘나쁜 몸’, ‘이상한 몸’을 규정하는 지식을 어떻게 간파하고 벗어날 것인지 계속 질문해야 한다. ‘당연한 것들’에 질문하는 일은 각자가 서로 다른 진짜 몸과 삶의 실체를 알아가는 일이다.

 

 

 

 

 

※ Trivia

 

* 29쪽

 

1890년 미국의 여성 소설가 샬롯 퍼킨스 길먼(Charlotte Perkins Gilman)이 발표한 단편소설 「노란 벽지(The Yellow Wallpaper)」의 줄거리입니다.

 

→ 「노란 벽지」가 발표된 해는 1892년이다.

위키피디아 ‘Charlotte Perkins Gilman’ 항목 참조.

https://en.wikipedia.org/wiki/Charlotte_Perkins_Gilman#Short_stories

 

 

 

* 258쪽

 

20세기 초 미국 남부 앨라배마 메이컨 카운티의 면방직 공장의 사장이었던 브루커 T. 워싱턴(Brooker T. Washington)은 여러 자선사업가들의 자금을 모아 흑인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학교, 공장, 기업 등을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지원합니다.

 

‘부커 T. 워싱턴(Booker T. Washington)의 오자다.

 

 

 

 

 

[주1] 지정 성별, 성별 정체성, 성별 표현, 성적 지향의 측면에서 사회적 소수자의 위치에 놓인 인구 집단을 아우르는 표현이다. 시우, 《퀴어 아포칼립스》, 현실문화, 2018, 277쪽 참조.

 

[주2] 오드리 로드, 주해연 ․ 박미선 공역, 《시스터 아웃사이더》, 『시는 사치가 아니다』, 후마니타스, 2018, 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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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12 0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2-12 16:41   좋아요 0 | URL
일상의 절반은 책 읽는 시간이라서 책 안 읽으면 마음이 허전해요. 독서와 글쓰기가 저의 헛헛한 시간을 채워줍니다. ^^
 
성性 정치학
케이트 밀렛 지음, 김전유경 옮김 / 이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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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여성 혐오(misogyny)와 함께해왔다. 문학 속 여성 혐오를 비판하는 페미니즘 비평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누군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젠더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남성 작가 또는 남성 비평가 여러 명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문단의 이너 서클(inner circle)에 속해 있다. 이들은 지금도 문단을 주름잡는 대선배들을 떠받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너 서클에 속한 남성 작가와 남성 비평가들은 자신의 패거리를 지키기 위해 용감하게 싸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권위는 이너 서클 자체를 거부하는 작가나 비평가들을 공격하는 데 활용한다.

 

남성 작가의 문학작품에 반영된 여성 혐오를 지적한 페미니스트 작가나 비평가는 문단을 파괴하는 악마로 취급받아왔다. 어느 사회나 페미니즘은 잘못된 특권 의식을 지닌 여성을 조롱하기 위한 수사로 소비되곤 한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The personality is the political)라는 구호로 제2세대 페미니즘이 가장 활발히 전개되었던 1970년대에 케이트 밀렛(Kate Millett)은 남성 작가들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녀가 쓴 박사학위 논문 성 정치학(Sexual Politics)1970년에 출간된 이래 지금은 페미니즘 비평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다. 밀렛은 이 책에서 사회 곳곳에 침투한 가부장제라는 권력 구조를 역사와 문학비평을 통해 날카롭게 분석한다. 그리고 데이비드 허버트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헨리 밀러(Henry Miller), 노먼 메일러(Norman Mailer) 등 남성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그들이 어떻게 여성을 비하하고 있는지 낱낱이 파헤친다.

 

밀렛은 남성 작가의 문학작품 속에 있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관계를 정치적 관점에서 해석한다. 성 정치학의 제3(문학적 고찰)의 첫 장(‘D. H. 로렌스’)에서 로렌스의 소설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야한 장면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로렌스의 소설들에 등장하는 남성들은 남근 우월주의자. 그들은 남근으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지배하려고 하며 여성들은 남근을 숭배하거나 남근을 과시하는 남성성에 억압당한다. 소설 내용의 일부를 이루고 있는 야한 묘사조차, 엄연히 따져보면 이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는 남성과 여성의 권력 관계를 반영하고 있다. 밀렛은 여성의 억압, 즉 남성의 여성 지배는 가부장제가 가져온 뿌리 깊은 토대를 지니고 있으며, 이제는 여성을 통제하는 거대한 권력 구조로 발전되었다고 지적한다.

 

밀렛은 인간의 섹슈얼리티에 대한 관념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은 프로이트(Freud)의 정신분석이론과 그의 추종자들도 비판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따르면 여자아이는 자신은 남근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녀는 자신의 클리토리스와 남자아이의 남근을 비교하면서 남성에 대한 열등감을 갖게 되고, 남근을 가지고 싶어 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여성의 심리를 남근 선망(penis envy)이라고 하였다. 밀렛은 프로이트의 남근 선망 이론을 비판한다. 그녀가 보기에 남근 선망 이론은 여성을 수동적인 존재로 부각시키기 위해 만든 남성 우월적인 개념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론에는 여성은 동등한 존재로서가 아닌, ‘남성에 의해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밀렛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남성 작가는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장 주네(Jean Genet)이다. 밀은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의 영향을 받아 여성도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고, 테일러와 함께 여성의 종속을 썼다. 장 주네는 동성애자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과 희곡을 썼는데, 주네가 묘사한 동성애자들은 남성인 동시에 여성이다. 그들은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권력 관계를 폭로하고 해체하려고 한다.

    

성 정치학은 가부장적인 남성지배의 문화에 익숙한 남성 작가들의 책에 침을 뱉은 도발적인 책이다. 성 정치학의 초판 서문에 그녀가 지향하는 문학비평과 글쓰기 정신이 드러나 있다. 밀렛은 책의 저자이기 전에 인간의 삶을 왜곡하는 문학에 저항하는 독자가 되어 이 책을 써 내려갔다. 리뷰를 쓰고 있는 나는 그녀의 확고한 신념을 본받고 싶다.

 

 

 

  문학비평이라는 모험적 작업에 대한 나의 신념은 이러하다. 비평은 작품에 충실하게 아첨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문학이 묘사하고 해석하며 심지어 왜곡하기까지 하는 에 대한 폭넓은 통찰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

 

(초판 서문, 26)

      

 

아무리 훌륭한 책이라도 저항하는 독자들’이 휘두르는 비판의 칼날을 피할 수 없다. 시대가 변하면서 페미니즘 비평은 다양한 분파의 형태로 발전하게 되고, 성 정치학도 후대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에 직면한다. 프로이트 이론을 분석 도구로 삼는 줄리엣 미첼(Juliet Mitchell) 같은 페미니스트들은 밀렛을 비롯한 급진(radical) 페미니스트의 프로이트 비판이 가혹하다고 반박한다.

 

이번 한 달 동안 레드스타킹 멤버들과 함께 성 정치학을 읽었는데, 책의 문제점과 한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느 분은 밀렛이 동양의 여성 문제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지적했다. 일례로 그녀는 1970년 기준으로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세계에서 매춘이 없는 유일한 나라라고 언급했다[주1]. 정말로 1970년대 중국에 매춘이 없었을까? 그러나 밀렛은 중국에 매춘이 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 또 다른 분은 여성의 연대를 강조하는 밀렛의 주장에 공감하지 못했다고 말했다.[2]

 

 

 성 혁명과 이를 이끌어 온 여성운동은 기사도 정신의 가면을 벗기고, 그 정중한 예의라는 것이 교묘한 조작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해야만 한다. 또한 공동의 대의를 위해 계급의 전선을 뛰어넘어야 하고, 숙녀와 공장 노동자가, 방탕한 여성과 지체 높은 여성이 하나가 되도록 해야 한다.

 

(2부 역사적 배경, 159)

 

※ 글꼴을 굵게 표시하고 밑줄 친 문장은 필자가 표시한 것임.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은 프롤레타리아 여성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는 기득권 부르주아 여성들과 연대하는 것에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그녀들은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부르주아 여성들은 겪는 프롤레타리아 여성들과 똑같은 형태의 억압을 경험하지 않는다고 본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주된 관심사는 프롤레타리아 여성의 해방을 위해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것이다.

 

만날 때마다 내가 감탄할 정도로 통찰력 있는 레드스타킹 멤버는 성 정치학을 이렇게 평가했다.좋은 책인 건 분명하나 페미니즘 문학이나 페미니즘 비평에 처음 접하는 독자에게는 추천하고 싶지 않다 그 분의 말에 동의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 원주, 248.

 

[2] 밀렛의 주장에 대한 레드스타킹 멤버들의 비판적 입장은 레드스타킹공식 인스타그램에 공개된 성 정치학의 두 번째 모임(1월 14일) 후기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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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9-01-31 0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경제적 계층의 차이 뿐 아니라 미국에서는 인종적인 차이도 너무 중요한 요소가 되는 거 같아요. 흑인 여성은 백인 여성보다는 흑인 남성이 당하는 억압에 더 공감할테니까요. 저만 하더라도 한국에 살고 있을때는 사실 백인 여성의 페미니즘에 공감했던 거 같은데 여기 살다 보니 흑인 여성의 이야기에 훨씬 더 공감이 가고 백인 여성 이야기는 좀 삐딱하게 보게 되거든요.

cyrus 2019-02-01 15:14   좋아요 0 | URL
교차성 페미니즘, 흑인 페미니즘을 공부하면 래디컬 페미니즘의 한계점이 보입니다. 다만 래디컬 페미니즘에 한계가 있다고 해서 이론 전체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페미니스트들 간의 입장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지날수록 사회뿐만 아니라 여성 문제도 복잡해지기 때문에 계층, 인종 등과 관련된 첨예한 쟁점들이 나올 것입니다.

stella.K 2019-02-01 1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근우월주의는 <채털리 부인...>만 있는 게 아니지.
너무 많고 많아졌어. <롤리타>도 그렇고
특히 영화는 말할 것도 없지.
그런데 이게 생각보다 심각한 게
유명한 사람들 성추행 해 놓고 모른다고 그러고,
아니라고 그러고, 항소하고 그러는 거 보면서
정말 그게 사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
자신이 저지른 성범죄를 성범죄로 인지하지 못하는 거.
워낙에 세상이 남성위주다 보니까 당연하고 문제로 인식 못하는 것 같아.
여자도 어떻게 해야할지를 잘 몰랐던 것 같고.
오늘 안희정 유죄 확정 받던데 왤케 시원하던지.

cyrus 2019-02-01 20:55   좋아요 1 | URL
남근뿐만 아니라 남성의 얼굴에 나는 수염도 우월한 남성성을 과시하는 상징이 되기도 해요. 양쪽 수염 끝이 뾰족하면서 살짝 위로 올라간 카이저 수염은 발딱 선 페니스를 연상합니다. 재미있는 건 남성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숨기기 위해 수염을 기르고 싶어 하지만, 여성의 몸이나 얼굴에 털이 나는 걸 싫어합니다.

오늘은 정말 의미 있는 날입니다. 오늘의 판결 결과는 그동안 페미니스트들이 문제 제기한 ‘권력형 성범죄’의 법적 처분이 상식이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줬으니까요. ^^

레삭매냐 2019-02-01 1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싸이러스님, 메리 설날 되시길 기원합니다 !

cyrus 2019-02-01 20:55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AgalmA 2019-02-04 1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세계의 판이 남성들에 의해 짜여지다 보니 구조든 언어적 표현이든 그들 중심인 거 파악은 되는데요. 여전히 ‘여성적‘이란 표현이 나약하고 어리석다, 혹은 교활하고 사악하다는 뜻으로 두루쓰이는 걸 볼 때마다 이게 바뀌기는 할까 싶어요. 애초에 상반되는 저 뜻이 문맥에 따라 이해되는 것도 웃기고ㅎ;;
마초이즘적인 니체의 책 읽다보니 바그너 욕하며 ‘여성적‘을 가져 오길래 우리의 위대한 반철학자 니체도 이 부분에선 어쩔 수 없군 하며 씁쓸 웃음을^^;; 루 살로메랑 결혼에 성공했으면 좀 나아졌을까요. 글쎄요...
테리 이글턴 <유물론> 읽으니 D. H. 로렌스가 니체를 열렬히 좋아했다고 하대요^^;;

cyrus 2019-02-10 14:43   좋아요 1 | URL
로렌스의 소설을 읽어보려고 하는데, 니체도 알아야 하는군요. 로렌스가 저를 피곤하게 만드네요.. ㅎㅎㅎㅎ

AgalmA 2019-02-10 23:58   좋아요 0 | URL
잘 몰랐는데 D.H 로렌스가 해외에서는 인지도가 많은가 봅니다?
국내에 번역은 안 되었지만 제프 다이어가 D.H 로렌스 전기를 쓰려 하다가 실패한 이야기 <Out of Sheer Rage>도 있더군요. 하긴 영국에서 현재 국민 작가급이라는 제프 다이어도 국내에서는 그리 유명하지 않지만;;

cyrus 2019-02-11 13:54   좋아요 0 | URL
지금 서구에서의 로렌스의 인지도는 어느 정도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1960년대 말에 성해방 운동이 일어났을 때 로렌스의 인기는 엄청 났었을 거예요. 로렌스 전기가 우리나라에 번역되었으면 좋겠어요. 나올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지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