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
우치다 타츠루 지음, 이지수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직업과 나이에 상관없이 어느 정도 경력만 쌓이면 ‘꼰대’가 된다. ‘꼰대’ 소리를 듣는 사람들의 특징은 이렇다. 첫 번째, 자신이 모든 걸 알고 있어야 한다(“내가 해봐서 아는데‥…”). 두 번째, 자신보다 어리거나 직위가 낮은 사람에게 반말한다. 세 번째, ‘내가 틀렸다’는 말보다 ‘네가 틀렸다’는 말을 자주 한다.

 

꼰대는 반민주적인 태도다. 권위주의에 기대서 세상을 보는 꼰대의 태도, 그것이야말로 서열에서 우위를 차지한 사람이 당연히 권력을 가지는 걸 합리화하는 태도다. 우리는 ‘나는 꼰대가 아니다’라고 말하지만(생각하지만) 실제로 꼰대 노릇을 즐겨 하고 있다. 나이가 들었어도 열정과 패기를 잃지 않는, 노익장의 정신을 유지하여 꼰대가 되는 것을 피해갈 수만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게 어디 뜻대로 될까 싶다.

 

세상엔 참으로 수많은 형태의 꼰대가 있다. 그중에 나는 ‘생각 있는 꼰대’가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생각 있는 꼰대’는 우리가 흔히 아는 꼰대(융통성 없이 꽉 막힌 늙은이)와 다르다. ‘생각 있는 꼰대’는 누구나 공감하는 ‘맞는 말’을 잘한다. ‘생각 있는 꼰대’도 ‘꼰대’가 되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들의 말에 수긍하고, 일말의 의심을 하지 않는다. ‘생각 있는 꼰대’는 몸소 모범을 보이고, 늘 명쾌한 해답을 제시해주는 ‘참 어른’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런데 ‘생각 있는 꼰대’가 너무 많아도 문제다. 그들이 하는 말은 100% 옳다. 하지만 ‘100% 옳은 말’이 많아지면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사람들도 많아진다. 정작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은 아예 듣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100% 옳은 말’은 ‘수신자(청자)가 없는 메시지’가 되어 떠돈다. 옳은 말만 하는 꼰대의 문제점은 ‘구체적인 말’을 하지 않거나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지 않는 것이다. ‘생각 있는 꼰대’는 앵무새와 같다. 앵무새는 올바른 말만 골라 듣고 그것을 똑같이 따라 한다.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는 내가 앞서 말한 ‘생각 있는 꼰대’의 특징과 문제점을 짚어낸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우치다 타츠루(內田樹)는 ‘옳은 말만 하는 어른’의 말하기 방식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생각 있는 꼰대’는 말 그대로 머릿속에 생각만 가득 차 있는 어른이다. 그들은 자신의 머리 밖에 있는 생각이나 말을 하지 않는다. ‘옳은 말’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다. ‘생각 있는 꼰대’는 옳은 말만 하면서 얻은 덕망이 조금이라도 손상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반대 의견이 나올 법한 사회 문제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첨예한 논쟁이 벌어지는 주제에 침묵한다.

 

이 책의 제목이 말하는 ‘말하기 힘든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정론이 틀릴 수 있다는 말’과 ‘무지를 인정하는 말’이다. 저자는 예측 불가능한 세상에서 무엇이 옳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이 깨달음은 훌륭한 어른이 되는 과정의 일부이다. 훌륭한 어른은 자신의 의견이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기 힘든 문제에 대해선 모른다고 말한다. 반면에 꼰대는 자신의 과거 고생담 얘기하는 걸 큰 자랑으로 여기고, 스스로 대접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착각한다. 꼰대의 ‘무식함’을 참 어른의 ‘무지함’과 똑같은 의미로 봐서는 안 된다. ‘무지를 인정하는 것’은 ‘내 주장이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겸손한 태도이다.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의견을 언제든지 수정한다.

 

《말하기 힘든 것에 대해 말하기》는 우리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하는 ‘참 어른’, ‘훌륭한 어른’의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내가 생각하는, 또는 되고 싶은 ‘참 어른’은 프랑스의 사상가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ere)가 언급한 ‘무지한 스승’에 가깝다. 무지한 스승은 아는 것만을 가르치지 않고 모르는 것도 가르친다. 그들도 그렇고, 우리 또한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무지하다. 따라서 가르치는 스승도, 가르침을 받는 제자 모두 지적으로 평등하다. 항상 ‘옳은 말’만 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그들의 말에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보가 되기 때문이다. 지적 능력의 차이는 위계의 차이로 변질되고, 우리가 ‘참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듣는 사람을 편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말만 하는 ‘생각 있는 꼰대’가 된다. ‘참 어른’이 많아진다고 해서 세상이 좋은 방향으로 나아질까? 그들은 우리를 위해서 늘 명쾌한 해답만 주는 구세주가 될 수 없다. 아니, 그렇게 되선 안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학의 배신 - 모두에게 수학이 필요하다는 거대한 착각
앤드류 해커 지음, 박지훈 옮김 / 동아엠앤비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2006년에 응시한 수학능력시험의 수리영역(인문계) 점수는 삼십 몇 점이다. 십삼 년이나 흐른 지금은 점수가 몇 점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34점에서 37점 사이로 추정된다. 성적표를 봐야지 점수를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게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성적표를 갈가리 찢어 버리지는 않았다. 분명히 어딘가에 있다. 아무튼 성적표를 처음으로 확인했던 그 날 당시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2년 동안 모의고사를 여러 차례 보면서 가장 낮은 수리영역 점수는 단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2년 동안 교과서와 문제집 여러 권을 끄적거리면서 해온 수학 공부는 도로 아미타불이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수학능력시험은 열심히 노력만 해도 목표를 달성하지 못 하는 일이 있다는 걸 처음 깨닫게 해준 날이다.

 

내가 수험생이었던 시절에 수학을 포기한 자를 줄인 말(수포자)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아마도 그 시절에 수포자라는 말이 유행했더라면 나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수학 공부를 포기했을 것이다. 모의고사 수리영역 점수가 좋지 않았는데도 수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친구들은 나를 비웃었다. 그렇게 문제집만 보면 점수가 올라가느냐면서. 노력한 만큼 결과가 따라와 주지 않아서 마음이 울적한 내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수학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그분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모의고사 점수에 너무 실망할 필요 없어. 평소 하는 대로 꾸준히 공부하면 분명 수학능력시험에 고득점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수학 선생님은 모의고사 결과가 좋지 않게 나오다가 수학능력시험에서 고득점을 받은 제자들을 많이 봤다면서 나도 그런 학생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순진했던 나는 선생님의 말씀을 믿었고, 수학 공부를 포기하지 않으면 최후에 웃는 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분의 말씀은 수학 공부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을 괴롭히는 희망 고문이 될 수 있다.

 

존버 정신(존나게 버티는 정신)으로 수학 공부를 하면 수학 시험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그런 믿음은 착각이고, 때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수학의 배신은 시험을 통과하기 위한 과정 중 하나인 수학 공부를 강요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여러 가지 근거로 비판한다. 머리가 나쁜 학생도 수학 공부를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은 수학에 대한 미신(Math myth, 이 책의 원제이다)이다. 물론 열심히 공부하면 분명 고득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노력한다고 해서 무조건 잘 되는 건 아니다. 노력과 결실이 비례하지 않는 상황도 일어난다. 그런데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나 교수들은 어려운 수학이더라도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학을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일수록 똑똑하며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수포자가 되려는 학생들을 위한 희망의 동아줄이 되며, 이과계 학생의 취업률이 인문계 학생보다 높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수학의 배신은 그 말 또한 미신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학 성적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영향을 주는 변수가 되지 못한다. 수학을 잘한다고 해서 머리가 똑똑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

 

이 책은 수학자나 이과 계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면서 수학이 우리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책의 장()과 장 사이에 현장의 목소리라는 제목이 붙은 익명의 말들을 모아놓은 작은 장이다. 이 장은 수학 미신에 속은 독자들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해준다. 익명의 목소리들은 이구동성으로 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 훌륭한 의사와 변호사, 용접 전문가가 될 수 있었던 인력들인데, 아무런 연관성 찾기 힘든 수학 성적을 이유로 꿈이 좌절되었죠. (40)

 

* 나에겐 공인회계사 자격증이 있어요. 그런데 지금까지도 삼각법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비즈니스 스쿨에서 왜 미적분을 배워야 하는지도 의문이고요. 한 번도 쓴 일이 없거든요. (65)

 

* 나는 평생을 엔지니어로 일해 왔어요. 대수학? 미적분? 미분방정식? 쓸 일이 없다 보니 거의 다 잊어버렸어요. (83)

 

*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대부분을 풀 수 있으면서도, 배우자를 고르는 눈은 영 아닌 사람들이 많다. (125)

 

 

수학 미신을 비판하는 수학자와 이과계열 전문가들은 수학이 학생들의 대학 진학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것에 염려한다. 실제로 대부분 미국 학생들은 수학 과목에 고득점을 받지 못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하는 불운을 겪는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에서 가르치는 수학이 이과계열 직업 업무에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적다. 다만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인이며 당연히 이 책에 나오는 사례들은 미국 사회 및 교육제도와 관련되어 있으므로 국내 현실과 차이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책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수학 교육과 수학에 대한 무비판적인 찬양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우리에게 크고 작은 혜택을 가져다준 수학의 유용성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의 저자는 목욕물을 버리면서(수학 교육을 비판하면서) 목욕하는 어린아이까지 버리는(수학의 유용성까지 무시하는)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다. 수학 공부를 포기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는 현상의 원인은 수학이 아니라 수학 교육이다. 저자는 수학 공부에 초점이 맞춰진 교육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면서 철학, 예술, 신학, 역사 분야 공부에 중점을 두는 교육 제도를 제안한다. 저자의 제안은 좋긴 한데 학생들이 인문학에 올인(all-in)하는 교육 제도도 한계가 있다. 인문학도 현재의 수학 과목처럼 시험 통과나 입사를 위한 목적으로 가르치는 분야가 된다면 학생들은 난해하기 짝이 없는 철학책을 펼치게 될 것이다. 정말로 그런 날이 오면 수학의 배신후속편 격인 인문학의 배신이라는 제목의 책이 나올지도 모른다. 저자가 후속편에서는 대안이랍시고 수학과 인문학을 같이 공부할 수 있는 교육 제도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겠지? 제발 그런 말이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어른들의 교육 제도 논쟁에 학생들 머리 터진다.

 

 

      

 

Trivia

 

 

*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게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17)

 

시작하기로 고쳐야 한다.

 

 

* 앉아서 원장에 합계를 기입하는 크라칫과 바틀비[찰스 디킨스의 소설 <크리스마스 캐롤>의 등장인물이다옮긴이]를 떠올려보라. (58)

 

옮긴이가 쓴 방주(旁註)바틀비가 누군지 알려주는 설명이 없다. 바틀비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단편 소설 <필경사 바틀비>의 주인공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5-08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5-08 17:41   좋아요 0 | URL
캐나다 학교에 가르치는 과목 명칭을 정확히 말하면 ‘산수’입니다. <수학의 배신>에 보면 산수와 수학의 차이점이 나옵니다. 따님이 캐나다에서 배운 산수는 학생들의 수준에 맞는 과목입니다. 산수를 제대로 배우면 기본적인 사칙연산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수학은 미적분, 벡터, 삼각법, 대수학 등을 말합니다. 이과 계열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공부하는 것들이죠.

웃긴 게 상아탑에 오랫동안 갇혀 지낸 이과계열 교수들은 미적분을 모르는 신입생을 만나면 기본 교양이 부족하다면서 학생들이 문제 있다는 식으로 지적합니다. <수학의 배신>의 저자가 비판하는 대학 교수들은 수학을 찬양하고, 입시 위주의 교육 제도를 옹호합니다. 이런 교수 밑에 배운 수학 교사는 학교에 배치됩니다. 이렇게 되면 입시용 수학을 포기하는 교육 제도를 고치기 힘들어요.

방랑 2019-05-08 17: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06년도 수능을 응시하셨다면.. cyrus님의 연세가.
저는 수학을 싫어하진 않았어요
물론 대학교 입학 후에는 아예 본 적이 없게 되었죠.

cyrus 2019-05-09 16:09   좋아요 0 | URL
30대 초반입니다. 저는 수학 문제를 푸는 것은 싫어하고, 수학사나 수학자들의 에피소드 같은 ‘이야기 있는 수학’을 좋아해요.. ^^
 

 

 

역사적으로 장애를 극복하여 큰 업적을 남긴 사람들이 많다. 들을 수 없는 가운데 총 9곡의 교향곡을 만든 음악가 베토벤(Beethoven), 소아마비를 앓았던 미국의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 ‘루 게릭 병(Lou Gehrig’s disease)’으로 알려진 근위축성측색경화증으로 인해 전신이 마비된 이론물리학자 스티븐 호킹(Stephen Hawking) 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자신의 한계를 넘어선 인간의 아름다움을 보여줬던 이 위대한 인물들에게 많은 사람이 존경의 박수를 보냈다.

 

2005년에 상영된 영화 <말아톤>은 다섯 살 지능을 가진 스무 살 자폐 청년이 마라톤에 도전하는 이야기다.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초원은 얼룩말과 초코파이를 좋아하고 아무 데서나 막춤을 추는 종잡을 수 없는 면모를 가졌지만 달릴 때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듬해에 나온 영화 <맨발의 기봉이>는 지적장애 1급인 엄기봉 씨의 실화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겨놓은 것이다. 기봉 씨는 팔순의 어머니를 극진하게 모시는 효자로 온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다. 그는 어머니의 틀니를 사드리기 위해 마라톤을 시작하지만, 지병인 협심증의 위협과 주변 사람들의 만류로 달리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그는 하프 마라톤 대회에 참가한다. 두 편의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장애를 가졌지만,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역경을 헤쳐 나간다. 그들의 모습은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감동을 줬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영화 밖으로 나와 우리 곁에 있다면 어땠을까. 스크린 속에만 있는 그들은 적어도 낯선 느낌이 들지 않기 때문에 친근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아톤>, <맨발의 기봉이>와 같은 영화로 인해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들의 인식은 ‘착하고 순수한 존재’로 이해된다. 문제는 이러한 이해가 장애인을 특정 이미지로 고착시킨다는 점이다. 영화와 현실 사이의 벽이란 이런 것이다. 영화가 아닌 우리 주변에 볼 수 있는 장애인이라면 ‘비장애인에게 도움을 받아야 하는 불행한 존재’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애인에 대해 대부분 비장애인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이미지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는 데 일부 언론이 큰 몫을 했다. 신문과 방송에서 개인의 능력을 통해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들을 마치 한 편의 영웅담을 들려주는 것처럼 보도하는 방식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다. 언론과 영화가 만든 ‘장애인 영웅 서사’를 보고 듣고 자란 비장애인은 장애를 ‘장애인이 극복해야 할 삶의 일부’이며 반드시 극복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장애인 영웅 서사’는 장애인들이 직접 겪고 있는 장애의 진정한 모습을 가린다.

 

 

 

 

 

 

 

 

 

 

 

 

 

 

 

 

 

 

* 해릴린 루소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 (책세상, 2015)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해릴린 루소(Harilyn Rousso)는 장애인 인권운동가이자 여성 운동가이다. 루소는 사람들에게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Don’t Call Me Inspirational)고 말한다. 이 메시지는 그녀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루소는 이 책에서 한 개인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는 이분법적 인식이 장애인들을 어떻게 타자화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녀의 삶은 자신을 ‘대단한 영웅’ 또는 ‘불쌍한 괴물’로 보는 사회적 편견과 맞서는 투쟁의 과정이다. 그녀는 자신을 ‘생긴 그대로의 모습’으로 봐주길 바란다.

 

 

 

 

 

 

 

 

 

 

 

 

 

 

 

 

 

 

* [절판] 앨리슨 래퍼 《앨리슨 래퍼 이야기》 (황금나침반, 2006)

 

 

 

앨리슨 래퍼(Alison Lapper)는 발과 입으로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예술가다. 그녀의 두 팔은 아예 없고 다리는 자라다 말았다. 래퍼는 팔과 다리가 짧은 해표지증(海豹肢症)이라는 희소병을 진단받았다. 생후 6주 만에 거리에 버려져 복지시설에서 자랐다. 20대에 결혼했지만,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가 9개월 만에 헤어졌다. 그녀는 장애인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의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들을 낳았다. 래퍼는 자신의 벗은 몸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그녀는 자신의 몸, 즉 장애인 여성의 몸을 작품 소재로 삼음으로써 자신을 기형이라고 여기는 비장애인들에게 정상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지 물음을 던져준다.

 

해릴린 루소와 앨리슨 래퍼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비장애인들은 그녀들을 볼 때마다 ‘불쌍하다’ 혹은 ‘대단하다’라는 양가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런 반응에 저항하면서 분투하는 삶은 절대 쉽지 않았으리라. 장애인에게 진심 어린 찬사를 보내는 것마저도 왜 이리 깐깐하게 구느냐고 말하는 분도 있겠지만(또 어떤 분은 내가 ‘정치적 올바름’에 너무 몰입하고 있다면서 말할 것이다), 사소하면서도 익숙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장애인을 막 대하게 만드는 편견으로 굳어진다. 그러한 편견은 너무나도 투명해서 쉬이 제거하지 못한다. 장애인은 투명한 공기와 같은 세상의 온갖 편견들을 마시고 걸러내면서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근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 - ‘명색이 페미니스트’ 마리 루티의 신랄하고 유쾌한 젠더 정신분석
마리 루티 지음, 정소망 옮김 / 앨피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은 만족을 얻는 방법이나 대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에서 제각각이다. 그런데 그 방식이 자아 발달의 초기 단계에 머무는 경우가 있다. 프로이트(Freud)는 그 초기 단계를 구강기, 항문기, 남근기로 나눴다(나머지 두 단계는 잠복기, 생식기). 초기의 세 단계가 인간의 성격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 단계가 모두 성공적으로 척척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각 발달 단계에서 욕구가 과도하게 충족되거나 억압되면 고착(fixation)이 발생한다. 프로이트는 리비도(libido), 즉 성 충동을 욕망의 실체로 규정했다. 하지만 욕망을 특정 대상에 고착시키게 되면 욕망이 불안을 증식시켜 인간을 집어삼킨다.

 

프로이트가 눈여겨본 단계는 남근기다. 남성 아동은 이성인 어머니에 대한 관심, 동성인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을 갖게 되는데, 거세 불안(castration anxiety)을 느끼게 된다. 이때 고착이 발생하면 남근 중심적 성격을 갖게 된다고 한다. 거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남성 아동은 어머니가 인정하는 남성성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 힘을 과시하고 숭배하며, 정복욕에 사로잡힌다. 자신에게 남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여성 아동은 남근을 선망하게 되고(penis envy), 남근을 가진 아버지를 애정의 대상으로 생각한다. 이때 여성 아동은 남근이 없는 것에 열등감을 느끼고, 신체적인 결핍 상태를 어머니의 탓으로 여긴다. 프로이트에게 남근은 생물학적 성기인 페니스(penis)라면, 라캉(Lacan)에게 남근은 상징적인 성기인 팔루스(phallus). 팔루스는 남성이 사회적으로 가질 수 있는 모든 권력을 상징한다. ‘라는 주체는 팔루스를 가지려는 욕망을 느낀다. 그러므로 욕망이란 남근이 없는 상태, 곧 결여를 가리킨다.

 

페미니즘 사상에서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그러나 남근을 기준으로 자아 발달 과정을 설명하는 그들의 이론은 종종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페미니스트 인류학자 게일 루빈(Gayle Rubin)은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이 여성 억압을 남근 중심으로 환원하여 남근 선망을 재생산한다고 비판한다. 젠더와 섹슈얼리티를 연구한 영문학자 마리 루티(Mari Ruti)도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에 거부감을 가진 페미니스트였다. 그랬던 그녀가 프로이트를 조금 너그럽게 바라보면서 남근 선망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남근 선망은 여성들이 느끼는 불만족의 초기 징후이다(6). 그러므로 프로이트는 남근 자체를 선망의 대상인 양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이성애 가부장제(heteropatriarchy) 사회의 문제점을 감지했다고 볼 수 있다.

 

마리 루티는 자신의 책 남근 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에서 남근 선망을 포함해 이성애 가부장제 사회가 만든 이분법을 비판한다. 남성은 남근을 가진 존재로, 여성은 남근을 가지지 못한(남근이 없는) 존재로 보는 경직된 이분법적 사고는 여성과 성 소수자를 차별하는 일련의 행위와 관련이 있다. 이 책의 제목에 있는 나쁜 감정들(bad feelings)이란 남근 중심주의에 눌리거나 찢기면서 일어나는 정서 상태를 말한다. 우울, 불안, 자신감 결여, 자기 비하 등의 나쁜 감정들은 충족되지 못한 욕망이나 열등감으로부터 생겨난다. 나쁜 감정은 여성만 느끼는 건 아니다. 남성도 나쁜 감정의 늪에 쉽게 빠지며 이성애 가부장제 사회가 옹호한 남근 중심주의의 그늘에 벗어나지 못한다. 밖에서 소심하고 나약해 보이는 남성도 성폭력의 가해자가 될 수 있다. 그들이 너무 착해서여성을 위협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을 거라고 보는 건 편견이며 엄청난 착각이다. 그들도 자신보다 약한 자를 괴롭히면서 성취감을 느낀다. 약한 자에게는 강하고, 강한 자에는 약하다. 강한 척하는 남성들의 모습은 자신의 취약한 점을 숨기면서 동시에 권력을 과시하는 거짓 위장(27)이다.

 

루티는 일상에 굳건히 뿌리박고 있는 젠더 이분법을 고집하는 이성애 가부장제를 거부하는 라캉의 이론을 인용하여 자아를 완벽하게 조정하는 절대적 주체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미래를 꿈꾸도록 부추기는 좋은 삶에 대한 환상을 비판한다. 승자 독식의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필연적으로 양산되는 다수의 소외당한 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자신의 암울한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자기 계발에 몰입한다. 이성애 가부장제와 신자유주의가 합작(collaboration) 형태로 이루어진 사회 속에 있는 개인은 남과 비교하면서 자신의 결핍된 상태나 신체적 결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돈 많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 뛰어난 외모를 가진 사람, 행복하게 잘살고 있는 부부를 보면 부러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 학벌, 결혼 등 행복한 삶의 필요조건으로 알려진 것들은 신자유주의 사회의 팔루스다. 이 팔루스들은 욕망의 궁극적 대상이 되고, 개인은 가질 수 없는 팔루스를 욕망한다. 루티가 문제 삼은 팔루스는 신자유주의의 자본주의적 욕망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남근 상을 파스키눔(fascinum)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번영, 권력과 더불어 행복의 상징이었다. 지금도 우리 주변 곳곳에 파스키눔이 있다. ‘가진 자만의 특권으로서 말이다. 우리가 신자유주의 시대의 파스키눔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인다. 우리는 그토록 싫어하는 신자유주의 문화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272). 루티는 나쁜 감정들을 불러일으키는 신자유주의적 파시눔을 피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신자유주의에 맞서 저항하자'는 식의 뻔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는다. 그녀는 라캉을 인용하면서 신자유주의 문화가 만들어내는 실존적인 나쁜 감정들을 없앨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아주 현실적인 해결책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에 굴복하는 태도로 보일 수 있지만, 채워도 끝이 없는 욕망을 완전히 없애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분명히 좋은 시도이긴 하나 신자유주의 문화에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칠수록 스트레스는 더 늘어난다. “행복해야 한다는 행복지상주의는 그 자체로 불만을 낳는다. 행복이 주관적인 것, 실체가 명확하지 않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이 허상임을 깨달을 때, 헛된 욕망에 매달린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3일 전인 월요일에 경계 없는 페미니즘함께 읽기를 끝냈다(아쉽게도 그날 나는 개인 사정이 있어서 마지막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 한 권의 책을 읽는 데 걸리는 기간은 4주였다.

 

 

 

 

 

 

 

 

 

 

 

 

 

 

 

 

   

 

* [레드스타킹 추천 도서] 찬드라 탈파드 모한티 경계 없는 페미니즘(여이연, 2005)

    

 

     

레드스타킹 모임 분위기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일사천리로 책을 읽는 것 같다고 생각하지 싶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레드스타킹 멤버 대부분은 책을 읽을 때 밑줄을 긋고 책의 여백에 필기한다. 그분들은 나보다 책을 아주 꼼꼼하게 읽는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책 내용만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 본인이 동의하기 힘든 저자의 입장도 언급한다. 여러 사람이 똑같은 책을 읽는다고 해서 무조건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책에 대한 평가는 제각각 다르게 나타날 수있다.

    

 

 

 

 

 

 

 

 

 

 

 

 

 

* [레드스타킹 추천 도서] 케이트 밀렛 성 정치학(이후, 2009)

* [레드스타킹 추천 도서]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나남출판, 2010)

    

 

 

아무리 뛰어난 페미니즘의 고전이라고 해도 냉정할 정도로 박하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그런 유형의 사람이다. 이를테면 나와 몇몇 멤버는 케이트 밀렛(Kate Millett)성 정치학을 비판적으로 읽었고,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성의 역사1을 읽었을 때도 푸코의 한계를 지적한 멤버들이 있었다.

    

 

 

 

 

 

 

 

 

 

 

 

 

 

 

* [2018년 레드스타킹 추천 도서] 패트리샤 힐 콜린스 흑인 페미니즘 사상(여이연, 2009)

* 벨 훅스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문학동네, 2017)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창비, 2016)

    

 

 

서구 중심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책을 주로 펴내는 여성학 전문 출판사 여성문화이론연구소(줄여서 여이연’)도 비판의 칼날을 피하지 못한다. 작년에 여이연 출판사에서 나온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읽었을 때 휴머니즘으로 귀결되고 마는 저자의 입장에 이의를 제기한 의견이 있었다. 사실 벨 훅스(Bell Hooks)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Chimamanda Ngozi Adichie)도 그렇고, 몇몇 흑인 여성주의자는 여성을 위한 페미니즘을 넘어 남성을 포용하는 휴머니즘을 얘기한다.

 

 

 

 

 

 

 

 

 

 

 

 

 

 

* 오세라비 《그 페미니즘은 틀렸다》 (좁쌀한알, 2018)

 

 

 

나도 남성을 위한 페미니즘에 동의한다. 그러나 문제는 반 페미니스트들(자신을 여성주의자 또는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도 한다)페미니즘은 휴머니즘이다라는 수사를 왜곡하면서 악용하고 있는 점이다. 그들은 페미니즘을 벗어나서 휴머니즘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들의 논리 저변에는 페미니즘 자체를 쓸모없는 사상으로 만들려는 의식이 깔려 있다. 또 그들이 말하는 휴머니즘은 남성과 여성 모두 연대하면서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남녀 모두를 위한 휴머니즘은 인본주의라고 말은 하면서도 젠더 이분법에 포함되지 않는 성소수자를 배제한다. 흑인 여성운동가들이 추구하는 휴머니즘은 인종차별뿐만 아니라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억압을 극복하여 모든 사람이 인간답게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휴머니즘과 연관 지으려는 페미니즘은 어떤 맥락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 ‘남성을 위한 페미니즘을 비판한다고 해서 남성을 혐오하자는 것이 아니다. 남성을 위한 페미니즘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즘 이론도 시간이 지나면 모순과 한계를 드러낸다. 페미니즘 이론은 죽을 때까지 믿어야 하는 절대적인 신념이 될 수 없다. 아니, 그렇게 되어선 안 된다. 변치 않는 신념으로 자리 잡은 페미니즘 이론은 독단(dogma)에 빠진다. 경계 없는 페미니즘101쪽에 페미니스트라면 깊이 새겨들어야 할 의미 있는 문장이 나온다. 모순이 전혀 없는, 혹은 순수한페미니즘은 가능하지 않다.”

 

 

여이연에 나온 책들은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만듦새가 조악한 점이 아쉽다. 여이연에 나온 책들을 읽어보면 가독성이 떨어지는 번역문, 사소한 오류나 오자를 발견할 수 있다.

 

 

 

 

 

  

 

 

 

내가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경계 없는 페미니즘13쇄이다. 레드스타킹 멤버들이 가지고 있는 책 모두 13쇄이다. 그런데 내 책은 파본이다. 303~304쪽과 320~321쪽 본문 내용이 중복된 채 인쇄되어 있다.

 

경계 없는 페미니즘97쪽에 오자가 있다. 중앙아메리카 카리브 해 동남쪽에 있는 나라인 트리니다드 토바고(Trinidad and Tobago)트리니다드 토바고로 표기되어 있다.

    

 

 

 

 

 

 

 

 

 

 

 

 

 

  

* [절판] 태혜숙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여이연, 2001)

* [절판] 가야트리 스피박 다른 세상에서(여이연, 2008)

 

    

 

경계 없는 페미니즘탈식민주의 사상에 기반한 페미니즘을 다룬 책이다. 탈식민주의 사상에 대한 이론적 배경 지식이 있으면 누구나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여이연 출판사가 처음으로 만든 책이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이다. 탈식민주의 페미니즘가야트리 스피박(Gayatri Spivak)다른 세상에서》(번역본 초판의 출판 연도는 2003년)경계 없는 페미니즘, 흑인 페미니즘 사상으로 이어지는 출판물의 시조라 할 수 있다.

 

경계 없는 페미니즘의 저자인 모한티(Chandra Talpade Mohanty)1986년에 서구의 시선 아래서(Under Western Eyes)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한다. 모한티는 이 글을 통해 서구 페미니즘 담론이 재현하는 3세계 여성과 페미니즘방식을 비판한다. 그녀는 백인 여성의 경험을 강조하는 1세계 페미니즘에 문화제국주의가 스며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경계 없는 페미니즘의 마지막 장은 16년 뒤에 저자가 서구의 시선 아래서를 새롭게 검토하는 글이다. 일종의 보론(補論)인 셈인데 모한티는 이 글에서 국가라는 경계를 넘어 탈식민주의와 반자본주의(그리고 이성애중심주의)에 대항하는 초국적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재차 강조한다.

 

    

 

 

 

 

 

 

 

 

 

 

 

 

 

 

 

* 프라모드 K. 네이어 프란츠 파농, 새로운 인간(앨피, 2015)

* 이경원 파농(한길사, 2015)

* [품절] 알리스 셰르키 프란츠 파농(실천문학사, 2013)

    

 

 

역시 여이연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 아니라고 할까 봐 탈식민주의 페미니즘에도 오류가 있다. 서구의 시선 아래서의 발표 연도는 ‘1985으로 적혀 있다(9). 이 논문은 1986에 발표되었다. 반제국주의(anti-imperialism)‘anti-colonialism(반식민주의)으로 잘못 표기되어 있다(32). 탈식민주의 이론가인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알제리 지식인이라고 소개했는데(35), 이렇게 대충 소개하면 독자들은 그를 알제리에서 태어난 인물로 오해하기 쉽다. 파농은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알제리로 건너가 알제리 독립 운동에 헌신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