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인문학의 눈으로 본 신자유주의의 맨 얼굴
엄기호 지음 / 낮은산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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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켤 수 있다면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라디오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주었을 대
 그는 나에게로 와서
 전파가 되었다.

 내가 그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가 와서 나의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전파가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사랑이 되고 싶다.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켜는
 라디오가 되고 싶다. 
 
 - 장정일 <라디오와 같이 사랑을 끄고 결 수 있다면-김춘수의 '꽃'을 변주하여>

 
   

우리 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라디오는 기계에 달린 단추를 눌러 작동되고, 전파를 통해서 우리에게 방송을 들려 주는 물건이다. 그래서 단추를 누르지 않으면 라디오는 그냥 기계 덩어리일뿐이다. 이 시 속의 화자는 자산이 라디오의 단추를 눌러 준 것처럼 누군가가 굳어버린 핏줄기와 황량한 가슴 속 버튼을 눌러 주기를 바란다. 버튼을 누르면 자신도 그 누군가에게로 가는 전파가 될 수 있다. 시에서 말하는 전파는 화자와 그 누군가 간에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뜻한다. 서로의 단추를 눌러 주면 서로가 서로에게 전파가 되어 사랑으로 변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라디오는 끄고 싶을 때 끄고, 켜고 싶을 때 켜는 기계이다. 듣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라디오를 켜는 것이고, 음악을 듣고 싶지 않으면 라디오를 끈다. 즉 사람들의 편의나 실용성에 의해 라디오는 작동되는 것이다.  만약 사람들의 사랑이 라디오와 같은 것이라면 그 사랑은 편의적이다. 결국, 편의적 사랑은 오래 갈 수 없으며 그저 가볍게만 여기는 사랑의 의미를 받아들이는 현대 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등장

이 시는 장정일의 시집 <길안에서의 택시 잡기>에 수록되어 있다. 이 시집이 발표된 시기는 1988년이다. 1988년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잊지 못할 해이다.  서울 올림픽의 개최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 해에는 좋은 기억도 있지만, 안 좋은 기억도 있기 마련이다. 1987년에 발생한 KAL 폭파 사건의 범인으로 북한의 대남공작원 김현희가 매스컴에 알려지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국제적인 행사 이후 한국은 반세기만에 급격한 경제 성장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제 한국은 전쟁 때문에 가난한 국가가 아닌 세계적 경제 중심지의 아시아 국가였다. 그리고 서구의 문화들이 유입하기 시작되었으며 그 유입 뒤에는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있었다.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시장 개입이 아닌 시장의 기능을 자유화하고 노동시장의 유연화, 기업의 민영화에 의의를 두고 있다. 그리고 시장개방을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 예가 바로 '세계화' 이다.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우리나라는 1993년에 우루과이 라운드에 타결 합의하였으며 그 후로 세계무역기구(WTO)가 등장하였다. WTO 설립은 산업과 무역 간의 장벽을 무너뜨렸으나 세계의 모든 나라가 무한경쟁 체제에 돌입하게 된다.  

보다 많은 자본을 창출하고 얻기 위해서 금융업, 부동산업의 강세가 두드러지기 시작하였는데 지금도 우리나라 사회에 강조되고 있는 '재테크' 도 그 강세가 만들어낸 우리나라 특유의 신드롬이다.  사람들은 돈을 단순히 저축하고 모으기보다는 돈으로 이보다 더 많은 돈으로 불리기를 원했다. 요즘 세상에 주식이나 펀드, 그리고 땅 투자를 외면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그리고 저축으로만으로 1억을 모을 수 없고, 자신만의 집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사로잡힌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프리카리어트

이렇다보니, 신자유주의 사회에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불황과 실업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고, 빈부격차는 계속 벌어져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한경쟁 시스템 속에서 나 한 몸 잘 살기 위해서 상대방을 짓밝고 불법적인 수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경쟁 체제 속에 살아남은 자만이 어마어마한 자본들을 손에 쥘 수 있는 승자가 되었다. 무조건 이기는 자만이 모든 것을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IMF 한파 이후 무너져버린 중산층들은 오직 잘 살아야한다는 신념 하나로 발버둥을 처야만 했다. 그러나 발버둥을 쳐봐도 가난한 생활은 이어졌다. 자신들의 노동력을 받아주는 직장은 없었고, 그나마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 주는 쥐꼬리만한 보수만으로 삶을 연명하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행복하고 안정된 삶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 머리속에는 자신의 직업이 언제 짤리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이 가난한 삶이 이어진다는 불투명한 미래를 생각하면서 고달픈 노동으로 하루를 보낸다. 

'잃어버린 10년' 이후로 경제 불황에 허덕이고 있는 일본과 같은 경우에는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자못 심각하다.  우리들이 많이 알고 있는 '워킹푸어'(Working Poor)는 일본 사회의 병리적 문제가 만들어낸 신조어이다. 이는 일하는 빈곤층을 가리키고 있다. 일을 해도 가난하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프리카리어트'(Precariate)라는 신조어도 만들어졌는데 '불안정한' 이라는 뜻의precarious와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e)를 합성한 것이다. 미래가 없는 불안정한 삶을 사는 비정규직 노동자 계급을 뜻한다. 

프리카리어트의 등장은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직 이 단어가 우리나라에는 통용되지 않았지만 우리 사회에서도 프리카리어트는 등장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프리카리어트는 아르바이트에 의존하려는 88만원 세대 그리고 정규직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일하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신자유주의 인류의 사랑

'무한경쟁' , '승자독식사회' 가 주를 이루고 있는 신자유주의 사회는 '아무도 안 믿는 세상' 이 되어 간다. 신자유주의는 경쟁을 부추기고, 이에 따라 사람들은 자본을 얻기 위해서 상대방과의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되고 만다.  인간 사이의 친밀감, 연대감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아르바이트와 취업 준비에 혈안이 된 88만원 세대들에게는 사랑과 연애는 사치일 뿐이다. 자신이 경제적인 자립이 안 되어있는 이상, 이들에게는 결혼이라는 것도 꿈도 꿀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오죽했으면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이 10대들의 섹스를 '슬픈 섹스' 라고 표현하였다.  이들에게는 그나마 이성 간의 사랑을 해갈해줄 수 있는 유일한 비상구는 동거뿐이다.  하지만 동거는 오랫동안 유지될 수 없는 사랑의 방식이다. 동거를 한다해도 부부로 연결되는 커플은 드물다.  이 시대에 사랑을 할 수 없는 것은 88만원 세대뿐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한민국 여성들 대다수는 결혼보다는 싱글을 택하고 있다. 경제적 자립을 이루어서 혼자서 편안한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병든 사회에서 경제적 자립하기란 하늘에 별 따기이다. 경쟁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이다. 치열한 경쟁다툼 속에서 살아남은 자만이 행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여성들은 고액 연봉의 직장에서 일하는, 앞으로의 삶이 보장되는 신랑감을 찾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사랑의 감정으로 만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오직 '돈' 을 가져야한다는 감정으로 이성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장정일의 시가 신자유주의 사회에 지배당한 사회를 예견했을지도 모른다. 서울 올림픽 이후로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우리 사회에도 불기 시작하면서 이 시 속 내용처럼 '아무도 안 믿는 세상' 으로 변하고 있었을 것이다.  

신자유주의 인간들은 누군가 자신의 버튼을 눌러주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다. 버튼이 눌러짐과 동시에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전파는 사랑이 된다. 그러나 현실은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  살기 바쁜 마당에 무일푼이며 보잘것없는 그에게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그럴수록 그는 사회 속에서 소외되어 간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상대방에 대한 믿음과 신뢰가 없으며 사랑을 가볍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나마 새 것처럼 보이던 라디오에 사랑의 버튼을 눌렀다가, 점차 헌 것으로 변하게 되면 버튼을 끄고 헌신짝처럼 버리게 된다.  '돈' 으로 사람을 만났다가, '돈' 이 궁하면 쉽게 헤어지는 요즘 사람들처럼 말이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단순히 책 제목이라고 보기에는 우리 사회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어서 무시무시하기도 하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남 관심 가져줄 여유가 없다. 일을 해야만 앞으로 남은 일생을 살아갈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남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는 이제 시대의 화석이 되었다.  지금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가 대세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인류에게는 상대방의 매력에 이끌려 정열적으로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사랑은 이제 없는 것일까?  88만원 세대로 살아가고 있는 나로써 이 책을 읽고 세상을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더욱 더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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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11-09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요번에 나온 그 책도 좀 관심이 가던데 말이죠~
이런 책이었군요?^^

리뷰가 좋은데요...라고 쓸려고 보니,
맨마지막 단락 씁쓸함에 눈길이 머무네요~

뭐 그래도 좋은건 좋다고 해야죠~^^

cyrus 2010-11-09 20:02   좋아요 0 | URL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위해 읽었건만 내용이 그리 밝지 않더라고요.
그렇다고 이런 세상, 눈 감고 외면할수도 없는거고요.
 
<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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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오웰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지금까지 국내에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작품이 번역되어 출간되고 있다.<동물농장Animal Farm><1984><버마 시절 Burmese Days>(열린책들에서 출판됨, 2002년에 서지원이라는 출판사에서 출간된 '제국은 없다' 는 제목만 다른 같은 번역가가 참여한 작품임) 까지, 오웰이 생전에 공식적으로 발표한 소설이 총 6편임을 감안하면 그의 소설이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된 편이다. 특히, <동물농장>과 <1984>는 국내에 많은 매니아를 확보하고 있는 유명 출판사 문학전집에서 번역되었다. <동물농장>은 민음사, 열린책들, 문학동네, 펭귄클래식에서 출간되었고, <1984>는 민음사, 열린책들, 펭귄클래식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그리고 고전도서 추천목록에서도 조지 오웰의 작품이 빠지지 않는다. 소설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험들을 토대로 쓴 르포 3편도 모두 번역되어 있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카탈로니아 찬가><위건 부두로 가는 길>) 그만큼 국내에서의 조지 오웰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은 소설, 르포뿐만 아니라 에세이스트로서도 두드러진 활약을 했는데, 그가 쓴 에세이만 해도 수백편이 넘는다. 오웰 사후에도 그가 남긴 에세이들도 문학적인 평가를 받기 시작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의 에세이집들이 번역되었지만 이전에 출간된 소설 작품보다는 크게 주목을 받지 않았다.  아무래도 국내의 독자들에게는 '에세이스트 오웰' 이라기보다는 '소설가 오웰' 이라는이미지가 강하게 인식된 탓일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출간된 <나는 왜 쓰는가>는 그동안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에세이스트' 로서의 오웰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그 수많은 에세이들 중에서 29편을 선별한 선집이지만 생전에 오웰이 유럽의 사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한 글들이 모여 만든 완성된 성찰의 결과물로도 손색이 없다.  

<우리들의 대한민국>을 통해 한국 사회를 날카롭게 후벼 팠던 박노자 교수는 오웰이 노동자 생활을 한 경험을 토대로 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 대한 추천사에서 책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정의하였다. 

  "  조지 오웰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조지 오웰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라면 나는 이책의 정의를 이렇게 말하고 싶다. 

  " 조지 오웰의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    

 

   

  조지 오웰을 읽게 된 동기

이 책의 타이틀이기 하면서도 동명 제목의 에세이인 <나는 왜 쓰는가 Why I Write>에서는 오웰 자신이 왜 글을 쓰고 있는가에 대해서 네 가지 동기를 소개하고 있다.  

오웰은 순전한 이기심, 미학적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등으로 자신의 글쓰기 동기를 구분하고 있다. 지금까지 써내려온 소설, 르포르타주, 에세이 등이 오웰이 구축한 문학적 동기가 만들어 낸 결과의 산물들이라고 볼 수 있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지금까지 내가 오웰의 작품을 왜 읽어왔는지 다시 한 번 생각케 해주었다. 그리고 그가 에세이에서 밝혔던 문학적 동기들을 지금까지 읽었던 작품에 투영해봄으로써 그전에 작품들을 읽으면서 지나쳤던 오웰이라는 인물의 생각, 그리고 그의 글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학적 매력을 발견할 수 있어서 좋았다.   

  

 

  #1 순전한 이기심  

오웰은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정치인과 사업가들처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다거나 기억되고 싶어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오웰이 왜 이렇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유년시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어린 오웰은 학창 시절 내내 인기가 없을 정도로 외로운 시절을 보냈다. 그 고독 덕분에 오웰은 이야기를 지어내기 시작하였고 그 때부터 자신이 말을 다루는 재주, 즉 글쓰기에 대한 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고독으로부터 상처 받은 쓰라린 실패의 기억들을 글쓰기를 통해서 잊고 싶어했을 것이다.

   
 

나는 나에게 낱말을 다루는 재주와 불쾌한 사실을 직시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았고,  그것이 나날이 겪는 실패를 앙갚음할 수 있게 해주는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 <나는 왜 쓰는가> p 289~290 -

 
   

글을 쓰기 시작하게 동기의 근원이 고독이라는 점에서 오웰에게 위로 한 마디를 건네기에는 무색하지만 자신의 문학적 동기를 밝히기 위해서 마음 속에 품고 있었던 기억의 상처를 언급하는 오웰의 모습이 인간적이다. 그리고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보상받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으며 이 강력한 동기를 아닌 척하는 것은 허위라고 말할 정도로 오웰은 쿨한 글쓰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나 역시 조지 오웰의 소설들 그리고 이 에세이들을 읽는 것도 어쩌면 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지 못하고 있던 순전한 이기심 때문일 것이다. 조지 오웰의 유명한 소설 <동물농장>과 <1984>를 읽었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을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오웰의 소설들을 읽으면서 쓴 리뷰와 지금도 이 에세이집을 읽고 난 뒤 쓰고 있는 리뷰도 순전한 이기심이 만들어 낸 글인 것이다. 이것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똑똑해 보이고 싶으며 오랫동안 기억되고 싶은 인간의 허영심을 보여주고 있다. 

  

 

  #2 미학적 열정  

사실, 이 부분을 여러 번 읽어봤음에도 오웰이 말하고 있는 '미학적 열정' 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오웰이 미학적 열정을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 (p 293) 이라고 정의를 하고 있는데 오웰의 작품을 읽은 경험을 토대로 풀이하자면 책을 덮고 나서도 그 특정 문장에 대해서 잊혀지지 않는 강한 인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동물농장>에서는 농장의 동물들이 만든 일곱 가지 계명이 언급되는데, 이 계명의 내용 일부를 통해서 독자들은 작품 속 동물농장이 위험한 흑백 논리에 빠진 대중사회의 모습과 결부시킬 수 있다.  

   
 

   1. 무엇이건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  

   2. 무엇이건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친구이다.   

   (생략)

   - <동물농장> 도정일 역, 민음사, p 27 -

 
   

 

그리고 <1984>에서는 빅 브러더를 향한 집요한 저항 끝에 결국 처형당하는 윈스턴의 최후를 오웰은 시적인 문장을 곁들여 표현하고 있다.   

 

   
 

 그는 애정부로 돌아가 모든 것을 용서받았다. 피고석에 앉아 모든 죄를 고백했고,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공범자로 만들었따다. 그는 햇빛 속을 걷는 기분으로 하얀 타일이 깔린 복도를 걷고 있었다.  (중략)  그리고 그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총알이 그의 머리에 박혔다.   

  윈스턴은 빅 브라더의 거대한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그 검은 콧수염 속에 숨겨진 미소의 의미를 알아내기까지 사십 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오, 잔인하고 불필요한 오해여!  오, 저 사랑이 가득한 품안을 떠나 스스로 고집을 부리며 택한 유형이여!  그의 코 옆으로 진 냄새가 나는 두 줄기 눈물이 흘려내렸다

  - <1984> 정희성 역, 민음사, p 416~417 -  

 
   

윈스턴은 작품 속에서 빅 브라더 저항 활동을 펼치지만 결국을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총알이 자신의 머리에 박히고 난 후에서야 자신의 활동이 자신의 생에서 불필요한 오해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윈스턴의 회한과 눈물은 개인을 지배하고 있는 전체 사회집단의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조지 오웰의 소설은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일반적으로 문학 작품에서 갖추고 있는 낱말에 미학적 열정을 부여함으로써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독자들에게 실감나게 전달하고 있다.  

  

 

  #3, 4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오웰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p 294)를 역사적 충동이라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세 번째 동기와 네 번째 동기인 정치적 목적의 의미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사회 현실 속에서는 다양한 사상과 생각들이 상충하고 있다. 이런 복잡한 현실 속에서 하나의 사회 현상에 대해서 제대로 볼 줄 아는 식견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현상의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기도 하고, 남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바꾸려고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오웰은 문학과 정치는 땔래야 땔 수 없는 관계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소설과 르포에는 당시의 유럽 사회의 단점과 문제적인 현상들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를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의 글쓰기를 '정치적 글쓰기' 라고 정의하기도 하는데 [나는 왜 쓰는가]에서도 오웰은 자신의 작품들이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이 결합을 시도하였다고 밝혔다.

<동물농장>은 독재적이고 강압적인 소련 스탈린 체제, <1984>는 자유를 잃은 전체주의의 암울한 사회, <버마 시절>은 영국 제국주의의 허상, <카탈로니아 찬가>는 왜곡된 언론에 가려진 스페인 내전의 참혹한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이렇듯, 정치적 글쓰기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부조리한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목격하고 체험하려는 역사적 충동, 그리고 잘못된 정치적 편향을 바꾸려고 하는 정치적 목적이 있어서 가능한 것이었다.  

 

  

  조지 오웰의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  

올해가 조지 오웰이 세상을 떠난 지 60주년이 되는 일이다. 올해 들어서 조지 오웰의 작품들이 국내에서 출간되는 이유는 단순히 '조지 오웰' 이라는 작가의 사후를 기념하기 위해서, 혹은 그의 네임 밸류가 국내의 독자들에게 통할 수 있어서 나온 것은 아니다.  예전과 같으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 대문호들의 탄생일이나 사후일에 맞춰 그의 문학적 가치를 재조명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지 오웰 사후 50주년이 된 지금, 그의 문학을 재조명하는 기념회나 심포지엄을 열렸다는 소식을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다. 국내에 그의 작품들이 꾸준히 번역되어 나오는데도 말이다. 그의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동물농장>이 출간된 출판사만 해도 수십개 넘는다. 국내 출판계에서 고전문학 작품이 오랫동안 번역 출간되는 현상은 이례적인 일이다.  

출간된 지 수십년이 지난 고전이 번역되어 독자들에게 읽혀지는 좋은 현상이기는 하다. 하지만 박노자 교수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조지 오웰의 사상, 그리고 문학을 얼마나 이해하고 <동물농장>과 <1984>를 읽고 있을까?   

앞에서 언급한 순전한 이기심으로만 조지 오웰을 읽어서는 안 될것이다. 조지 오웰은 우리의 지적허영심을 채워 지적인 모습을 뽐내기 위해서 언급되야하는 그냥 단순한 작가 이름이 아니다. 그리고 조지 오웰은 단순히 순전한 이기심으로만 자신의 글을 순전히 '예술 작품' 으로 만든 것도 아니다. 오웰은 정치적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이 겪고 있는 사회 현상에 대해서 성찰하고 반성하려고 하였다. 이제 독자들도 조지 오웰의 작품들을 작가가 말한 글 쓰는 동기와 서로 유추해가면서 읽으면 오웰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그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사회 현실에 대해서도 성찰할 수 있는 안목과 사고력이 형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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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0-11-02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천문학사에서 나온 <코끼리를 쏘다>라는 오웰의 산문집이 있어요. '나는 왜 쓰는가'는 거기에도 실려있는 글인데 이번 산문집의 제목이 되었네요.

이 질문에 대한 오웰의 답을 읽노라면 저는 늘 김현이 생각나거든요.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할 수 없다. 그러나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이요. 오웰의 정치적 목적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cyrus 2010-11-02 12:18   좋아요 0 | URL
제가 소개한 책은 아니었지만 직접 읽어보니..
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싶어하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글들이 많이 있었고요.
반딧불이님이 언급하신 김현 씨의 산문집도 읽어봐야겠네요.
문학 평론에서 정말 유명한 사람인데 아직 못 읽었네요ㅎㅎ

양철나무꾼 2010-11-02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 사놓고 채 반도 못 읽었어요.
마저 읽긴 해야 할텐데 말이죠~ㅠ.ㅠ

cyrus 2010-11-02 13:02   좋아요 0 | URL
천천히 읽으시면 됩니다. 이 책이 짧은 에세이 형식이라서
저 같은 경우에는 소설이나 에세이는 금방 읽는 편이라서
글도 빨리 쓰고 올리게 된 것입니다.
반면 또 다른 평가단 책인 로쟈님의 책은,,,
전작보다는 내용은 쉬운데,, 그래도 내용이
인문학이라 천천히 읽고 있답니다.ㅎㅎ

꽃도둑 2010-11-02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지 오웰을 읽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같은 생각입니다.
저도 이번 기회에 '조지오웰 깊이 읽기'를 시도해볼까 하는데 키루스님 글에서 동기를 얻고 가네요..^^

cyrus 2010-11-02 13:04   좋아요 0 | URL
제 글이 꽃도둑님에게 유익한 도움이 되셨다니
기분이 뿌듯하네요^^
이번 기회 오웰의 르포들을 읽어보려고 합니다.
오웰이라는 작가를 재발견할 수 있어서 의미 있는거 같습니다.^^

굿바이 2010-11-08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꼼히 골라놓으신 책들 잘 봤습니다. <녹색세계사> 개정판이 다시 나왔군요. 시절이 그러하니 지금 읽어도 참 유용할 것 같습니다.

cyrus 2010-11-08 15:45   좋아요 0 | URL
네, 환경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세상이니 책의 저자가 말하고자 한 것도
예전의 주장과는 다르겠죠.^^
 
밥과 장미 - 권리를 위한 지독한 싸움
오도엽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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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는 왜.....” 
 
최근 인터넷에서 한 어린이가 쓴 짤막한 시가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고 있다. 모 연예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에서 출연한 어느 연예인이 초등학생들이 직접 쓴 동시들을 낭독하게 되면서 그 중에 이 시가 전국적으로 전파를 타게 되었다.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이뻐해주어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이 시가 낭독된 이후, 남성 연예인들은 어린이들의 순수한 동심에 웃었지만 그들의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웃음이 사라지자 그들의 얼굴에는 씁쓸함의 여운이 감돌고 있었다. 

자신들도 언젠가는 '아빠'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린이가 말한 이 시 속의 '아빠'도 될 수 있기에.....   

이 시가 TV에 공개되자마자 삽시간으로 인터넷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 방송과 관련된 인터넷 기사들도 올라오게 되었다. 이와 관련된 각종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기사들의 제목을 보게 되면 한 편의 어설픈 삼류 멜로 드라마 속 대사를 상기시킨다.  '이 기사 읽어보세요.'라는 식으로 어떻게든 기사 클릭 수를 높이기 위해서 제목에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문구들을 연발하고 있다.     

 

  '초등학생의 시가 대한민국의 아버지를 울리다.'   

  '초등 2년생의 시에 눈물젖은 대한민국의 아버지들.'

  '짧은 시에 담긴 우리네 아버지들의 슬픈 자화상.'   

 

기사의 출처와 작성한 기자가 각기 다른데도 서로 약속이나 하듯이 감성적인 문구를 타이틀로 내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런 기사문을 접한 네티즌들의 반응도 하나같다.  

'가정을 위해서 밤까지 일하는 아버지들의 모습이다.' ,  

'일 때문에 아이들과 같이 놀아준 적 없는 무책임한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반성할 수 있었다.'    

'주말에 쉬는 날이면 평일 직장 생활 때문에 피곤해서 아이들과 제대로 논 적이 없는 거 같다.'

그리고 어느 기사의 마지막 글에는 대한민국의 아버지들의 존재감을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마지막에 희망적인 메시지로 마무리지어서 우울한 기사문의 반전을 꾀하려는 기자의 의도는 좋다.  

하지만, 이번 초등학생이 쓴 시가 모든 아버지들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감동적인 메시지로 봐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 시가 모든 아버지들이 씁쓸한 웃음만 나게 해주는 것도 아니다. 직장 없는 아버지들은 이 시를 보자마자 쓴웃음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처지에 분노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일을 하지 못해서 슬픈 비정규직 근로자 부모님들  

이 시를 쓴 초등학생은 일 나가는 자신의 아버지가 집에서 놀아주지 못한 점에 대해서 집에서 놀아주는 어머니를 비교하여 집에서 존재감이 없는 아버지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래서 초등학생이 쓴 시의 아버지는 일을 하고 있는 '근로자'이며 '노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모든 아버지들이 다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어디선가 자신의 직장을 되찾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투쟁을 벌이는 비정규직 근로자(노동자)들도 있다.    

이 책에서는 오늘도 일 할 권리를 찾기 위해서 투쟁중인 비정규직 근로자의 삶과 애환을 담아내고 있다. 책에 등장하는 이들의 사연은 다양한다. 적은 보수이지만 가정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직장을 가진 근로자였다가 한순간에 '비정규직' 근로자가 되어버렸는데, 대부분 회사가 갑작스럽게 파산을 맞게 되면서 직장을 잃어버렸다거나 열악한 작업환경 속에서 고생해서 일하다가 결국에는 보수나 재정적 가치는 한 푼도 받지도 못한 채 퇴직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받는다.' 라는 속담처럼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고생한만큼 그에 대한 대가를 얻는 보람조차도 느끼지 못하였다.   

비정규직 근로자가 아버지들만 있는 것인가?  아이들을 예뻐해 주는 어머니들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병원에서 간호 업무를 맡았다거나, 대학교 내 청소 용역, 학습지 교사 등 직업은 각기 다르지만 이들에게는 죽어라 일만 하다가 얻은 것이 신체를 망가뜨린 '병' 그리고 이제는 일을 할 수 없는 비정규직 근로자라는 꼬리표를 다면서 생긴 '마음의 상처'였다.  

특히 부부중에 자식들에 대한 관심을 많이 쏟은 사람이 어머니다. 제 자식 좋은 교육 받게 해서 좋은 대학 보내주고 싶은 마음은 자식을 향한 모든 어머니들의 공통된 애정이다. 보이지 않는 희망을 되찾기 위해서 하루하루 24시간 공장 밖에서 병든 몸을 이끌고 피켓을 든 채 울부짖는 비정규직 근로자 어머니들은 자식들을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 무능력함에 대한 절망감 때문에 마음도 병이 든 채 살아가고 있다.   

   

 비정규직 아버지를 두 번 죽이게 만든 초등학생의 시 
  

  대기업이 건설하는 아파트 브랜드 이름을 보세요.
  이곳에 살면 삶이 참 안락하고 행복할 것 같잖아요.
  하지만 이 아파트를 짓는 사람들은 늘 공포와 불안 그리고 고통에 시달려요.    

  - 『밥과 장미』 [어느 아파트 건설업체 비정규직 근로자의 말] 오도엽, 삶이 보이는 창, p 142 -  

어느 비정규직 근로자의 말처럼 잘못될 대로 잘못되어가는 대한민국 사회에 살고 있는 아버지들의 삶과 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50%의 아버지들은 늦은 시간동안 일을 하다가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과 제대로 놀아주지 않는다. 아이들과 놀게 되면 단지 피곤하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집에서만 여유롭게 일에 대한 피로를 풀고 싶어 한다. 이들에게는 집에 오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과의 생활이 고통스럽다고 행복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머지 50%의 비정규직 근로자 아버지들은 오히려 그런 삶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아니, 자신들도 정규직 근로자 아버지처럼 되고 싶어할 것이다. 아이들 앞에서 무능력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비춰질까봐 마음 한 구석에는 공포와 불안, 그리고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 돈을 벌오기는커녕 하루종일 노조투쟁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온 그런 아버지를 보고 자식들은 뭐라고 생각할까?   

학교에서 아버지의 직업을 써놓은 공간에 당당히 '비정규직'이라고 쓰는 아이들도 있다고 말하는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의 말처럼 그런 아이들이야말로 정말 자신의 아버지가 왜 그러고 사는지, 그리고 왜 있는지 조소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저 초등학생의 시 한 편 가지고 대한민국 아버지들의 존재감을 일깨워주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그리고 일 할 권리조차 얻지 못한 비정규직 근로자 아버지들에게는 자신의 무력한 존재감을 다시 한 번 각인시켜주는, 잔인한 메시지가 되고 말았다.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햇새벽 
 

  어쩔 수 없이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절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 박노해 <노동의 새벽> 중 일부 - 
  

지금도 박노해 시인의 시 내용처럼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절망적인 삶의 벽인 노동 현실을 분노하면서도 그 운명을 감싸안고 살아가려는 몸부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에는 부질없는 몸부림만 하다가 하루가 저물 즈음에는 소주로 분노를 달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이런 슬픔을 이겨야 하겠다는 깡다구와 오기가 서려 있다. 그런 독한 정신이 있기에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일을 하고 있으며, 일을 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근로자들도 일 할 권리를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저 시의 마지막 구절처럼 대한민국의 비정규직 근로자들이 정규직 근로자답게, 아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시작되는 햇새벽이 찾아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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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19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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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제자들이 찾아낸 기성품 문장

움베르토 에코가 쓴 사회비평서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No. 19)에는 이탈리아 신문 기사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이 언급된다. 에코의 제자들이 신문기사에서 찾아낸 상투적이면서도 자극적인 문장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퀴리날레는 전쟁 준비가 되어 있다> <정부가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신이여, 친구들에게서 나를 구하소서.> <최악의 파트너 선택>  

이 문장 이외에도 에코의 책에서 열거된 이탈리아 어 문장들은 은유적이라서 우리나라의 신문기사 내용과 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얼핏 사설에서 볼 수 있는 문장들 같다. 사설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 주관적인 생각과 의견을 적는 것이다. 그러나 사설은 기사문과 다르다. 기사문은 사실을 보고 들은 그래도 기록되는 것이다. 신문 독자들에게 한 쪽 입장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성과 객관성이 요구된다. 에코는 이런 문장들을 ‘기성품 문장’이라고 비꼬면서 이런 문장들의 50%는 신문기자들이 만들었고, 나머지 50%는 관련기사 속 인물들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나라 신문 헤드라인에서 찾은 기성품 문장 

우리나라 신문들도 보게 되면 에코가 말한 기성품 문장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탈리아처럼 기사문 내용 안에서는 많이 발견되지 않지만 독자들의 이목을 단시간에 끌 수 있는 헤드라인에서는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필자도 에코의 제자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나라 신문 헤드라인 속의 기성품 문장들을 찾아보았다.

  #1 [짐승이라니… 격조 있게 한번 울어봐라]
  #2 [與 계파초월 ‘밥상 정치’] 
  

#1 헤드라인은 헤드라인 자체만 봐서는 기사 내용을 가늠할 수가 없다. 처음 헤드라인 문장을 접하게 된 신문독자로 하여금 기사 속 내용이 궁금하게 만든다. ‘짐승’ 이라는 단어에서 나오는 단어의 강한 인상, 그리고 ‘격조’ 라는 명사와 ‘울다’ 라는 동사라는 낯선 조화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게 한다. #1은 2010년 8월 24일에 천안함 사고 유족 자들에게 ‘짐승’ 비하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은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가 천안함 묘역에 찾아가 참배했다는 단순한 기사의 내용이다. 기사가 게재된 당시,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는 ‘짐승’ 발언 이후로 천안함 유족 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 분위기였다. 헤드라인의 문장은 조현오 경찰청장이 참배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천안함 유족 자 중의 한 사람이 항의하면서 나온 말이다. 기자가 이런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정하게 된 의중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기사 속 인물의 말을 빌려 헤드라인으로 사용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비극적 사고로 자식을 잃은 유족 자의 울분과 슬픔을 감정이입하게 만들고 있다. 반면에 공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발언을 하게 된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는 ‘나쁜 놈’이라는 인식을 하게 만든다. 조현오 후보자의 발언은 당연히 비난받아야 할 일이지만 #1의 기사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통해서 조현오 후보자의 비행을 은연중에 강조시키고 있다.  

 

#2 헤드라인의 기사는 28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친이계 진영의 이재오 특임장관이 오찬을 통해 만나는 내용이다. 18대 총선 공천 파문 때문에 형성된 대립 구도를 탈피하여 화해 모드 전환 및 여당의 화합된 분위기를 도모하기 위해 친박계와 친이계 의원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사 속 내용에는 이들의 만남을 ‘식사 정치’라고 언급하면서도 헤드라인만은 ‘밥상 정치’라고 표현하고 있다. 싸우다가 다시 친해지고, 또 싸우는 친박계와 친이계의 모습이 기자는 비꼬려는 의도일까? 헤드라인에도 격조 있게 ‘식사 정치’라고 해도 될 텐데 말이다. 헤드라인 속 문장 하나 때문에 계파의 갈등을 넘은 화합의 장이 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격하시키고 있다.  

  

그리고 오늘 열린 김황식 총리 후보자의 국회청문회에 대한 기사에서는 특정 인물의 행동과 말 위주로 보도되는 ‘가차 저널리즘(Gotcha journalism)'을 볼 수 있다. 부동시로 인한 병역면제 때문에 여당으로부터 썩 좋지 않은 이미지를 받고 있는 김 후보자인 만큼 이런 기사들은 보는 신문독자들은 김 후보자에 대한 병역면제 의혹을 더욱 증폭하게 된다.   

 

  #3 [김황식 "안경점에서 '짝눈' 이렇게 심하냐고 놀라더라"] 
 #4 [안경 고쳐 쓰는 김황식 총리 후보자..`부동시라서···`]  

 

#3의 헤드라인은 부동시에 대한 김 후보자의 해명을 오히려 의혹에 대해 변명하는 식으로 만들고 있다. #4는 인터넷 뉴스 속의 포토뉴스 헤드라인이다. 이 기사에는 안경을 고쳐 쓰는 김 후보자가 찍힌 사진과 달랑 두 줄만의 문장만 있을 뿐이다. 김 후보자의 안경을 고쳐 쓰는 행동을 가지고 부동시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가차 저널리즘의 형태는 사안의 맥락과 관계없이 흥미 위주로 보도된다. 그래서 #4 기사의 경우, 부동시와 병역면제 때문에 국회에서 곤혹을 치르고 있는 김 후보자를 겨냥한 가차 저널리즘의 기사인 것이다. 
 

 

 

우리나라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이탈리아 신문의 현실에 대한 에코의 따끔한 비판은 기성품 문장의 과도한 사용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텔레비전의 등장하기 전에는 신문이 1차적 정보 전달의 근원지였지만 지금은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인해서 경쟁에서 밀려났으며 상황이 이렇다보니 텔레비전과 같은 흥미 위주의 정보 전달에 급급하여 신문 정보의 질이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이제 이탈리아 신문은 텔레비전의 시녀라고 말하기도 한다.  

 

에코가 지적한 이탈리아 신문의 현실은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신문에서도 볼 수 있다. 사실 모 일간지를 구독하고 있는데 매일 일간지 사이에 끼워져 나오는 얇은 부록 특집기사들을 보면 신문에 부록 전달에만 할애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구독자에게 생활에 유용한 다양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은 좋다. 그리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구독자들의 취향도 달라지기 때문에 실용 정보에 관심 있는 요즘 구독자의 취향에 발맞춰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과도한 부록 특집기사는 사건에 대한 사실이나 해설을 널리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만든 신문으로서의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배보다 배꼽이 커버리게 되는 것이다.

요즘 신문사에서는 자체로 시사 관련 방송 채널을 만들어 TV에서도 신문기사들을 전달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많은 부수기록을 자랑하는 모 경제 일간지 회사가 운영하는 경제시사 방송 채널에서는 다음날 신문기사 내용들을 전날 밤에 미리 확인할 수 있는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했다. 따끈따끈한 경제의 동향을 미리 알 수 있어서 기획의 취지는 좋지만, 신문으로서의 정보 전달의 주도권이 이미 TV 쪽으로 넘겨줘버린 꼴이다. TV만 신문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스마트폰의 빠른 보급도 신문을 죽이고 있다. 관심 있는 사건을 알고 싶으면 굳이 신문을 구독할 필요도 없이 간단히 스마트폰의 인터넷으로 검색만 하면 된다.   

 

정보 통신의 발달로 종이 책만 위기가 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종이 신문도 사라질 수도 있다. 저널리즘에 대해서 깊이 있는 지식이 없어서 무조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우리나라 신문이 살아나는 방법으로는 종이 언론의 영향력이 떨어지는 현실을 방관하지 말고, 구독자들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차별화된 기사의 콘텐츠를 구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구독 수의 많고 적음에 연연하지 말고 독자들도 기자가 되어 저널리즘의 영역으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확대하면 신문 기사의 양도 늘리는 것과 동시에 기사 정보의 질도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획일적인 색채의 정보로 치우친 옐로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에서 벗어나 다양한 색채의 정보들로 가득 찬 퍼블릭 저널리즘(Public journalism)로 전환하는 길만이 우리나라 신문의 미래가 한층 더 밝아질 수 있는 청사진이다.  

 

 

 

* 헤드라인 관련 기사 출처 링크 

 

  #1「조선일보」2010년 8월 25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4/2010082401185.html

 #2「동아일보」2010년 9월 29일  

http://news.donga.com/Politics_List/3/00/20100929/31466084/1

 #3「조선일보」2010년 9월 29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29/2010092901052.html

 #4「이데일리」2010년 9월 29일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DA32&newsid=02361606593105040&DCD=A01503&OutLnkCh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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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9
박경태 지음 / 책세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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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들의 수난

요즘 프랑스가 유럽 국가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프랑스에 정착하고 있던 집시(Gipsy)들을 강제 추방하는 정책이 화근이었다. 집시는 일정한 거주지 없이 항상 이동하면서 생활하는 소수 유랑 민족이다. 미신적이고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가져 이들이 가지는 직업이 대부분 점쟁이나 가수, 춤꾼이 많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키는 호칭이 많은데 일반적으로 그들을 보헤미안(Bohemia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속세의 관습이나 규율 따위를 무시하고 방랑하면서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예술가나 그런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어원의 유래는 15세기경 프랑스 사람들이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 사는 집시들을 가리켜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보헤미안이라는 단어를 알려지게 만든 프랑스가 왜 집시들을 추방하려는 것일까?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국가 내 치안 안정 및 범죄를 줄이기 위한 조치로써 집시들을 강제 추방하기로 결정했음을 밝혔다. 정부는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집시들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 이주해왔었으며, 주로 빈민가에서 불법 행위를 저지른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자, 프랑스 내 인권단체 측에서는 사르코지의 정책이 인종차별적이라고 반발하며 나섰다. 사르코지의 집시 추방은 유럽 국가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졸지에 집시를 프랑스로 이주하는 것을 방조(傍助)한 국가가 되어버린 루마니아, 불가리아는 사르코지의 발언에 언짢아하였으며, 유럽 연합(EU)과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프랑스의 정책에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심지어 비비안 레딩 EU 사법·기본권 담당 집행위원은 프랑스의 집시 추방은 과거 독일 나치의 유대인 추방을 상기시킨다는 발언까지 함으로써 사르코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내 집시 추방 정책은 계속 되고 있으며 올해 들어 추방된 집시들의 수는 7천 명 이상으로 집계되고 있다.  

 

지금도 집시 추방 정책으로 인해서 프랑스에서 만개했던 관용(Tolerance)의 꽃들은 점점 시들고 있으며, 수백 명의 집시들은 떠돌이 민족이라는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면서 프랑스 국경을 넘고 있다.   

  

 

  

인종주의의 진화, 신 인종주의 
 

앞에서 언급했던 집시 추방에 대한 글 중에서 프랑스 인권 단체가 사르코지 정부를 비난하는 근거를 유심히 보아야 할 대목이다. 인권 단체가 표현하고 있는 ‘인종차별적’이라는 단어에는 ‘인종주의(Racism)’라는 이념을 내포하고 있다. 인종주의는 인종의 생물학적 차이에 따라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사고방식이다. ‘흑인은 머리가 나쁘니, 머리가 좋은 백인들에게 지배를 받는 것은 합당하다’라는 식의 주장이 구시대적 인종주의다. 최근에는 생물학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인종주의가 과학적이지 않다는 연구 결과가 나옴으로써 인종주의는 사실상 폐기되었다. 그런데, 사르코지 대통령은 집시들이 머리가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쫓아낸 것이 아닌데 인권 단체와 다른 유럽 국가들이 ‘인종차별적’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구시대적 인종주의는 사라졌다 한들, 자유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새로운 차원의 인종주의로 진화하였다. 구시대적 인종주의의 뜻과 차이를 두기 위해서 ‘신 인종주의’라고 불리고 있다. 신 인종주의자들은 구시대적 인종주의에 대해 확실히 선을 그으면서, 생물학적 차이를 강조하는 구시대적 인종주의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인종의 ‘문화’에 차이를 두고 있으며 자신들의 문화가 우월하며, 철저히 자문화의 가치와 습관으로 타 민족의 문화를 바라보고 평가한다. 그래서 자민족 중심주의의 영향으로 신 인종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집시라는 민족의 문화는 방랑과 미신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진보적인 문화를 영위하는 선진국 사람들은 집시 문화를 근본 없고 미천한 문화라고 생각한다. (집시 족의 인류학적 뿌리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자세히 밝혀진 것이 없다) 그래서 집시들을 온갖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범죄만 일으키는 민폐 끼치는 민족이라고 자연스럽게 결부하게 된다.   

 

 

 

신 인종주의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 이유

인종주의가 한 단계 진화된 신 인종주의가 하나의 사회 집단에 자리 잡게 된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타 민족에 대한 편견이 만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인종주의를 낳게 한 뿌리이다. 신 인종주의론자들은 ‘집시는 범죄를 일으키는 나쁜 민족이니깐, 집시가 싫다’라는 식의 잘못된 논리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집시가 ‘나쁜 민족’이라는 관념을 형성하게 만드는 것이 대중매체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집시가 범죄 행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추측성 언급을 하게 되면 대중매체는 이를 부풀려 왜곡되게 한다. 한순간에 집시가 범죄인 민족 집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대중매체의 왜곡된 정보를 대중들은 무비판적으로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대중매체와 신 인종주의, 이들의 잘못된 만남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요즘 미국 내 정세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01년, 9.11 테러 발생 이후 미국의 언론매체는 쌍둥이 빌딩과 펜타곤을 습격한 테러리스트를 이슬람 국가로 규정하였으며 이를 반 인륜적인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전 세계 곳곳에 전파하는 이런 언론매체의 소식은 미국 내 여론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론은 이슬람 국가에 대한 편견을 형성 하는데 일조했다. 최근에 9.11 테러 기념일에 맞춰 광신적 기독교 목사가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을 불태우겠다는 엄포의 해프닝을 일으켰던 것과 아직까지도 논란 중인 모스크 사원 건립 반대는 신 인종주의 앞에 눈이 먼 미국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왜곡된 대중매체의 정보와 오류가 가득한 신 인종주의는 사회화된다. 사회화는 사회 집단에 속하는 인원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그 사회 고유의 문화를 습득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회 집단에 내려져오는 인종주의적 논리는 자연스럽게 습득하여 계승하게 된다. 인종에 대한 잘못된 편견, 대중매체, 그리고 두 개념이 잘 버무려져 사회화되어 탄생된 신 인종주의는 사회 내의 악습관으로 쉽게 자리 잡게 되지만 그 과정이 순환 되다보니 신 인종주의가 죽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성숙된 다문화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개발도상국에서 온 외국인들은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우리나라도 건너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비참하다. 회사 지배인은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니 열심히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하루 동안 일반인들도 하기 힘든 중노동 일을 부여한다. 하루 동안 고된 중노동 작업 끝에 손에 쥐어지는 것은 쥐꼬리만 한 월급. 이들이 원하는 안정된 생활은 언제 올지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친정 가족들이 굶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먼 낯선 땅, 한국으로 건너 와 한국 남자와 결혼한 베트남 처녀는 ‘외국인’이라는 주위 한국인의 시선이 따갑기만 하다. 타국의 생활을 적응하기 위해서 고생해서 배워 서툴지만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녀를 단지 외국인으로만 보고 있다. 자신의 뱃속에서 태어난 혼혈 자녀들에게도 이방인에 대한 시선을 피할 수 없다. 학교 친구들은 ‘깜둥이’, ‘왕눈이’ 등 피부색과 신체를 이유로 놀림감을 당하기 일쑤이다. 어느 베트남 신부는 속궁합도 제대로 맞춰 보지 못한 채 한국인 신랑을 만난 지 8일 만에 살해되었다. 살인죄로 구속된 신랑은 정신병 증세가 있는 걸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국내 여론은 억울한 베트남 신부의 죽음을 크게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단지, 이전에 시행하지 않았던 정부의 국제결혼에 대한 법적 규정 개정에만 중점적으로 다뤘다. 그나마 부산에서 베트남 신부의 죽음을 추모하고, 베트남 국민들에게 사죄하는 작은 행사가 열렸을 뿐이다.

우리나라도 프랑스와 미국의 사례를 수수방관(袖手傍觀)해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는 다문화주의로 향하고 있으며, 외국인과의 결혼으로 이루어진 다문화가정도 늘어나고 있다. 다문화사회의 발전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수용한 서구의 인종주의의 뿌리가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상태에서 국내에 유입된 세계화가 거름이 되어 자란 신 인종주의라는 나무 그늘 때문에 이제 막 움튼 다문화 사회의 새싹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있다. 다문화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자민족 중심주의를 탈피하고 타 문화의 차이를 인식하려는 관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 타 민족들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적 장치 마련이 절실하다. 

 

최근에는 밝은 다문화가정 사회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모 기업의 광고가 대중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다문화가정의 자녀가 열심히 노력하여 장원급제하는 내용, 피부색이 각기 다른 나라의 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아 강강술래를 하는 장면은 기업 이미지 자체를 떠나서 보는 이로 하여금 훈훈함이 느껴진다. 단순히 광고 속 내용 자체가 참신하다고 여기지만 말아야 할 것이다. 곧 다가올 다문화사회가 된 우리나라의 모습이다. 다문화사회로 향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청사진에 대해서 한 번쯤은 재고해봐야할 것이다. 

  

 

 

* 관련 기사 인용 및 링크

[프랑스, 집시 추방 논란] 경향신문, 2010년 7월 30일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301802385&code=970205

[佛 집시 추방에 교황도 '한 마디'] 연합뉴스, 2010년 8월 23일자 입력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617866

["집시 추방을 나치의 유대인 추방에 비유?" 佛 사르코지, EU 정상회담서 발끈]  

조선일보, 2010년 9월 18일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18/20100918001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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