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 재난 국가
이철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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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속담이 있다. 남 잘되는 상황을 볼 수 없다는 욕심, 한발 나아가 경쟁심과 시기심은 누구에게나 있다. 이 속담에 벼농사 문화의 특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우리나라 벼농사 문화는 농촌 특유의 연대 의식으로 똘똘 뭉친 공동체가 구심점이 되어 발전해왔다. 서로 협력하여 함께 농사일하는 풍습으로 두레라는 조직이 있었다. 벼농사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하기 때문이다만약 이웃이나 친족이 새로운 땅을 산다면 마을 주민으로 구성된 두레가 그 땅에 농사짓는 일을 도울 것이다. 두레 구성원에 친족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 사람은 사촌의 밭일을 돕는 일손이 된다. 이때부터 친족은 배가 살살 아파지기 시작한다. 자신의 땅 넓이와 벼 수확량을 사촌과 비교하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이철승의 책 쌀 재난 국가를 다 읽고 나면 상부상조 정신의 벼농사 문화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쌀 재난 국가는 벼농사 문화가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자라게 만든 오래된 씨앗임을 증명한 책이다책 제목은 불평등의 기원과 그 구조를 함축한 핵심 단어다두레는 협업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농촌은 비단 한국인의 주식 쌀만 생산하는 곳이 아니다. 이곳에서 태어난 사회구성원에게 농사일과 협동 정신을 가르치는 교육적 장소이기도 했다. 농촌에 오래 살면서 농사일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아랫사람들을 가르쳤거나 그들에게 과업을 부여했다. 농촌의 위계적인 문화는 시간이 지나면서 도시로 뻗어 나갔고, 연공제로 발전했다.


저자는 협업과 공동 노동을 중시한 벼농사 체제를 협력과 경쟁의 이중주시스템이라고 말한다. 두레 일손이 친척, 친구, 이웃의 밭일을 하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수확량에 관심을 가진다. 내 수확량이 남보다 뒤처져서는 안 된다는 경쟁심이 생기면서, 농민들은 수확량 경쟁에 돌입했다. ‘협력과 경쟁의 이중주문화는 기업이나 공장에 이식되었다. 도시의 노동자들은 가족 같은 동료와 함께 일하면서도, 동료보다 잘살고 싶어서(동료보다 높은 직급에 오르고 싶어서) 쉬지도 않고 일했다.


벼농사는 농촌 사람들의 운명이 걸린 거대한 인생 프로젝트이다. 흉년이 들면 식량이 줄어든다. 허약해진 농민들은 굶어 죽는다. 그래서 농민들은 재난에 민감하다. 비가 너무 많이 오면 불안하고, 비가 많이 오지 않아도 불안하다. 쌀 맛에 익숙한 선조들은 벼농사가 불리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협업의 기술사회적 조율을 통해 재난을 극복했고 벼농사를 고집했다. 농촌 주민들은 재난이 닥치면 개인의 권리를 기꺼이 포기했고, 공동체 규약을 지키면서 각종 생활 문제를 함께 해결했다따라서 협업의 네트워크속의 농촌 주민은 태어나면서부터 위계적인 협업의 네트워크와 규약에 따라 움직이는 마을 공동체 조직의 부속품이다.


저자는 여러 가지 자료들을 동원해서 연공 문화와 다양한 불평등 문제의 기원을 추적한다. 협업과 위계 중심의 벼농사 문화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악화시키는 구체제 유산이다. 이 오래된 유산은 자본주의 체제와 만나면서 도시에 정착한다. 저자는 전작 불평등의 세대》(문학과지성사, 2019)에 이어 쌀 재난 국가에서도 연공제를 비판한다. 연공제에 기반을 둔 위계적 질서가 지속할수록 비정규직 노동자의 한숨은 깊어지고, 청년 실업률은 높아지고,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막는 유리 장벽은 두꺼워진다.


저자가 지적한 불평등의 기원에 만족스럽지 못한 독자들이 있으리라. 그럴 수 있다. 나도 그렇고 대부분 사람은 농촌 사회의 상부상조 정신을 조상 대대로 이어져 오던 미풍양속이라고 배우면서 자라왔다. 어떤 사람은 농촌 공동체 문화가 복원되면 농촌이 자본주의 체제에 지친 도시인들의 안식처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농촌을 병든 자본주의 체제의 대안인 이상향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인데, 내가 보기에 순진한 발상이다. 불평등 문제를 양산하는 사회적 구조를 재구축하지 않는 이상 농촌은 협력과 경쟁의 이중주시스템이 일상화된 위성 도시가 될 수 있다(그렇다면 이곳을 유감스러운 도시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유감스러운 농촌이라고 해야 하나?). 농촌 주민들이 착하다는 생각은 농촌에 살아본 적 없는 사람의 착각이다. 친척이나 이웃이 잘 살면 배 아픈 사람들은 농촌에도 있다.


저자는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협업과 조율의 문화를 벼농사 체제와 함께 공진화한 시민사회의 잠재력이라고 평가한다(170). 공진화(coevolution)는 둘 이상의 종이 서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영향을 받으면서 진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공진화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진화의 기본적인 의미를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는 원숭이 사회가 경쟁을 조장하는 위계 구조로 형성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위계 구조는 경쟁을 조장한다.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조직이나 그룹 내부에 위계에 따른 자리를 만들고, 높은 자리일수록 더 많은 보상과 노력을 보장하면 우리 인간들은 원숭이 사회로 돌아간다.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한쪽이 패배를 인정하거나 죽을 때까지 치고받고 싸운다. 자연히 이 위계가 보장하는 보상과 권력의 크기가 클수록, 원숭이들은 더 극렬하게, 더 잔인하게 싸울 것이다


(23~24)



점점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인간 사회가 원숭이 사회로 돌아간다고? 저자의 견해에 인간이 퇴화하면 원숭이로 돌아간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공진화를 쓴 저자는 진화론에 대한 정확하지 않은 견해를 내세우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견해는 진화론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주 하는 오해에 가깝기 때문이다. 진화론을 좀 안다는 사람들도 원숭이를 인류의 조상이라고 생각한다. 이 생각대로라면 인류는 원숭이가 진화해서 생긴 존재이다. 그러나 원숭이를 인류의 조상이라고 보는 견해는 진화론에 부합하지 않는다. 원숭이, 즉 전문 용어로 표현하자면 유인원은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 친척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하나의 공통 조상에서 독립적인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원숭이는 무조건 동족과 치고받고 싸우면서 살지 않는다. 이 편견을 뒤집은 책이 바로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침팬지 폴리틱스(바다출판사, 2018). 저자는 동물원에서 침팬지 무리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이 정치적 권력 관계와 위계질서를 형성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고 갈등을 해결하는 침팬지들의 모습도 확인했다. 치고받고 싸운 침팬지들은 나중에 서로 껴안으면서 키스하거나 서로의 털을 매만졌다. 원숭이 사회는 이익을 위해서 싸울 줄 알고, 타협도 하는 인간 사회와 거의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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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3 2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1-02-14 19:10   좋아요 1 | URL
저는 이 책이 도시와 농촌 간의 불평등 문제를 다룰 줄(조금이라도 언급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제가 알고 싶은 내용이 나오지 않았어요.. ㅎㅎㅎ

바람돌이 2021-02-14 0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좀 궁금했는데 드디어 리뷰를 보네요.
음 근데 협업과 위계 중심의 벼농사 문화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 문제를 악화시키는 구체제 유산이다.라는 문제 제기를 보니 좀.... 이런 식으로 과거의 어떤 특정한 문화를 현재의 문제와 연결짓는 진단법들이 대체로 만족스럽지 못하더라구요. 지나친 도식화랄까?
책을 볼까 말까? 고민 좀 더해봐야겠습니다. ^^

cyrus 2021-02-14 19:13   좋아요 0 | URL
다른 독자의 서평을 참고하시면 좋아요. 저도 저자의 주장에 빈틈이 있는지 찾아보면서 읽어봤는데요, 저자가 제시하는 통계 자료와 데이터에 두 손 들고 말았어요.. ㅎㅎㅎ 사회 현상의 원인은 복합적이니까 ‘벼농사 문화의 영향’은 불평등 문제의 여러 가지 원인 중 하나로 보시면 될 것 같아요. ^^
 
자연의 죽음
캐롤린 머천트 지음, 이윤숙.전규찬.전우경 옮김 / 미토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원서 평점


4점   ★★★★   A-




번역본 평점

(평점을 준 이유에 대한 설명은 미주알고주알’ EP. 6 참조)

 

1점   ★   F






태초의 신 가이아(Gaia)는 우주의 어머니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Uranus), 바다의 신 폰토스(Pontus), 산의 신 우로스(Ouros)는 가이아가 낳은 자식이다. 헤시오도스(Hesiodos)의 서사시 신들의 계보에 따르면 가이아는 단성생식(처녀생식)으로 세 명의 자식을 낳는다. 지리를 뜻하는 ‘geo’의 어원이 ‘Gaia’.


가이아 이론은 지구를 거대한 생명체로 보는 관점이다. 살아있는 지구는 생물체가 살기에 적합하도록 능동적으로 환경을 조정한다. 지진이 일어나고, 해일이 일고, 화산이 폭발하는 현상이 지구의 신진대사인 셈이다. 가이아 이론은 주류 학계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가설이다. 회의적인 사고를 가진 학자는 가이아 이론이 경계과학(fringe science)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환경 문제와 지구 온난화가 인류 최대의 현안이 돼버린 지금 살아있는 자연은 주목해볼 만한 개념이다.
 

지구에 정착한 가이아의 자식들은 살아있는 자연을 칭송했다. 그러나 시대가 지나면서 과학이 발전했고, 자연친화적 신화는 뒷전에 밀려났다. 가이아의 가호를 잊은 자식들은 지리학(geography)에 열광했다. 똑똑해진 이들은 지리학자와 탐험가, 선교사가 되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대항해 시대, 정복과 확장의 시대였다. 유럽에서 태어나고 자란 가이아의 자식들은 아메리카 대륙과 같은 새로운 땅을 개척한 자신들의 업적을 뿌듯하게 여겼다. 기고만장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대륙을 침범했고, 그곳에 살고 있던 가이아의 자식들을 잔인하게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었다. 이 모든 일은 불과 두 세기 동안(16~18세기)에 일어났다.


자연의 죽음: 여성과 생태학, 그리고 과학 혁명(The Death of Nature: Women, Ecology, and the Scientific Revolution)은 자연을 죽게 만든 과학 혁명(scientific revolution)의 어두운 면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 책을 쓴 캐럴린 머천트(Carolyn Merchant)는 미국의 에코페미니스트다. 저자의 주요 연구 주제는 지구 환경과 밀접하게 관련된 여성 문제, 과학사, 환경의 역사 등이다. 캐럴린은 고대의 세계관인 살아있는 자연’이 인류에 지배받는 수동적인 대상으로 전환된 시기를 과학 혁명이 일어난 16~17세기로 보고 있다. 과학 혁명 촉발에 기여한 과학자와 철학자들의 업적을 언급하고 있는 자연의 죽음은 과학사를 주제로 한 기존의 책과는 달리 균형 잡힌 서술이 눈길을 끈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등을 근대의 포문을 연 인류의 영웅처럼 그려지는 백인 남성 중심적인 역사관에서 벗어나 과학의 힘에 취해 자연을 지배하고 통제하는 과정에 나타난 침략과 착취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에 따르면 자연을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닌 기계로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은 자연과 여성의 착취를 허용하는 학문으로 발전한다. 그 학문이 바로 과학과 철학이다. 그래서 저자는 베이컨과 뉴턴뿐만 아니라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토머스 홉스(Thomas Hobbes)와 같은 근대 과학 건설의 아버지들이 남긴 유산을 비판적으로 평가한다. 이 아버지들은 시대의 흐름을 바꾼 인물이지만, 그들의 업적은 자연의 죽음을 초래했다.


자연의 죽음에서 저자는 생태주의 관점을 통해 과학진보의 이름으로 착취당한 채 죽어간 자연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이 책의 서론 여성과 생태론은 페미니즘과 생태주의가 손잡으면서 함께 나아가야 할 이유를 제시한다.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파생된 경쟁과 침략, 지배의 비용을 비판하는 관점이 저자가 생각하는 여성 운동과 생태주의 운동의 공통점이다. 그리고 여성 운동과 생태주의 운동은 성장지상주의와 과학기술의 힘에 기대는 낙관적인 진보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다. 


저자는 자연의 죽음문제가 재난으로 번진 사건으로 1979년에 일어난 스리마일 섬(Three Mile island) 원전 사고를 거론한다. 과학기술의 혜택을 지나치게 믿는 과학지상주의는 결국 인간의 죽음까지 초래한다자연의 죽음이 나온 이후에도 가이아의 자식들은 못된 버릇을 버리지 않았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같은 재난을 일으켰고, 여전히 지구를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중이다. 자연을 파괴하고, 환경 재난을 일으킨 가이아의 자식들은 정말로 나쁜 자식()들이다. 저자는 자연과 인간이 모두 공존하려면 지구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면서 살아 간다고 보는 생태주의에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자연의 죽음이 나온 해는 1980년이다. 40년이 지난 지금 환경운동가와 에코페미니스트들은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여러 갈래의 길을 열심히 찾고 있다. 사실 자연의 죽음은 초판 출간 40주년이 된 작년에 개정판으로 나와야 했다. 내가 읽은 번역본은 절판되었다. 나온 지 오래된 책은 절판되기 마련이지만, 역자의 무성의한 번역도 책의 수명을 짧게 만든다. 이 책에 세 명의 역자가 참여했다. 그런데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책에 오자가 많고, 외국 인명 표기도 엉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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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1-02-04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서가 좋은데 번역본 별로나니!ㅠ 관심있는 주제인데 아쉽네요!ㅠ

cyrus 2021-02-10 15:28   좋아요 1 | URL
맞아요. 이 책의 공동 역자 중 두 사람은 현재까지도 책을 쓰거나 역자 일을 하고 있어요. 이 좋은 책을 최악의 상태로 방치한 채 글을 쓰고 있는 두 역자의 행보가 아쉬워요.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 - 소년부터 성년까지 남자가 꼭 알아야 할 성 A to Z
인티 차베즈 페레즈 지음, 이세진 옮김, 노하연 감수 / 문예출판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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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I’m askin is for a little respect.

 

내가 바라는 건 작은 존중이에요.


 

- 아레사 프랭클린(Aretha Franklin)의 노래 <Respect> 중에서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의 원제는 ‘respect’. ‘respect’존중또는 존경하다라는 뜻을 가진 단어다. 예전에 리스펙이라는 은어가 유행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찬사를 보낼 때 리스펙!’이라는(감탄하거나 환호하고 있다는 반응을 보여주기 위해 리스펙뒤에 느낌표를 붙여줘야 한다) 단어를 사용하거나 말할 땐 짧고 굵게 외친다.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성교육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인티 차베즈 페레즈(Inti Chavez Perez) 스웨덴 정부 성평등 고문으로 활동한 성교육 전문가다. 그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자세를 먼저 갖춰야 만족스러운 섹스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상대방을 존중하는 일은 모든 일의 시작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만남은 인간관계를 맺는 기본이고, 우정과 결혼은 이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상호 존중이 없다면 관계가 형성될 수 없다.


저자는 남학생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두 사람 모두 섹스를 좀 더 멋지게 즐기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그럴 때 저자는 서로를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서로의 성적 취향을 이해하게 되며 누구도 불편하지 않은 섹스를 즐길 수 있다고 대답한다섹스는 쾌감을 얻을 수 있는 육체적 행위이다. 하지만 섹스를 삽입하는 행위로만 인식하면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채 강압적인 섹스를 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 포르노를 보면서 섹스를 배운 사람, 특히 남자들은 포르노 배우처럼 다양하고 기상천외한 체위를 시도해보고 싶어 한다. 이들은 이런 체위를 하면 여자들이 좋아하겠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자들은 이런 남자들의 단순한 생각을 좋아하지 않는다상대 여성의 성적 취향이 뭔지 잘 모르면서 무턱대고 삽입을 시도하려는 남자는 섹스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섹스를 잘 모르는 남자를 만난 여자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섹스를 경험하게 된다. 


이 책에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역자와 감수자가 성교육 현장에 통용되고 있는 성차별 언어를 성평등 언어로 바꿔 표현했다는 점이다. 리벤지 포르노는 디지털 성범죄처녀막은 질 주름으로, ‘자궁’은 포궁(胞宮)으로 대체되었다저자는 섹스를 그저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행위로 간주하는 반응을 경계한다. 섹스하면서 무엇을 좋아하는지 안 좋아하는지는 우리 자신이 정할 수 있다. 상대방에게 육체적 · 정신적 상처를 주지 않고, 서로를 향한 배려와 존중을 전제로 한 섹스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저자는 이 책을 보다가 어떤 대목이 너무 나갔다 싶으면 그냥 책을 덮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문제의 대목을 다시 보라고 조언한다. 저자가 말한 어떤 대목섹스에 대한 저자의 과감한 견해를 말한다. 사실 이해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한라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 몇 개 보인다그래도 저자의 견해를 무작정 받아들이기보다 신중하게 따져봐야 한다내가 인용한 문장은 여러 가지 자위 방법을 소개한 내용의 일부이다.



* 46

 

 포르노 영화에서 몸에 정액을 맞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면, 그게 어떤 기분일까 궁금할지도 모릅니다. 한번 실험해보세요. 침대에 반듯이 누운 채로 사정을 하면 배나 상반신에 정액이 튈 테니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죠. 엉덩이에 쿠션을 받치고 벽에 머리를 기대면 얼굴이나 입에 정액을 맞는 경험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포르노 속 장면을 따라 하는 자위 방법은 청소년에게 권장하기 어렵다. 게다가 이런 자위는 위험하다. 정액이 눈에 들어가면 안구가 충혈되어 따가울 수 있다. 정액 알레르기(semen allergy)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정액 알레르기 증세는 주로 여성에게 나타난다. 성관계 이후에 음부가 가렵거나 화끈거리는 증상이 나타난다. 증세가 심하면 두드러기, 호흡 곤란,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알레르기성 쇼크까지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정액 알레르기가 있는 여성은 성관계와 임신을 할 수 없게 된다. 정액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는 남자가 있다는 연구 결과는 없다(연구 결과가 있는데 내가 찾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래도 (피부)에 정액을 맞는 자위를 하고 나서 조금이라도 몸에 이상 반응이 생기면 안 하는 것이 좋다.

 

포르노에 자주 나오는 장면 중 하나가 남자 배우가 여자 배우의 얼굴이나 복부에 사정하는 행위다. 저자는 포르노에 나오는 사정 행위 장면에 호기심을 느끼면 한번 실험해보라고 주장하면서도(43) 현실의 섹스를 포르노 배우가 하는 것처럼 따라 할 필요 없다고 말한다(55). 이러한 저자의 발언은 모순이다. 질외 사정은 상대 여성 입장이 불쾌감을 느낄 수 있는 행위이다. 특히 정액 알레르기가 심한 여성에게는 위험한 상황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성관계를 할 땐 콘돔을 사용하자






Mini 미주알고주알

 

 

* 쪽수 미확인

 

 섹스에서 부정적 신호는 부정적 신호일 뿐이고, 싫다고 했으면 싫은 겁니다! 예외는 없다는 것을 똑독히[] 알아두세요. 한쪽이 흥분했거나, 술에 취했거나, 이미 커플 사이라는 이유로 성적 유린을 눈감아줄 수는 없습니다.

 

 

[] 똑똑히의 오자.

 

 

 

* 253

 

 세이프 섹스로 예방할 수 없는 성생활의 다른 문제들을 지적해두고 싶네요. 첫째, 사면발이[]는 음모에 붙어사는 미세한 벌레로 가려움증을 유발하지만,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습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후 약국에 가면 효과 좋은 치료제를 구입할 수 있을 거예요.

 

 

[] 표준어는 사면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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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1-01-19 14: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 호기심을 느끼면 한번 실험해보라는 주장과 따라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은 모순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게 모순이 되려면 ˝필요가 없는 행동은 하면 안 되는 행동이다˝라는 전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므로 성관계를 할때는 콘돔을 사용하자˝라는 문장으로 보아 사이러스님은 피임법(?)으로서의 질외사정과 몸에 정액을 뿌리는 행위를 같다고 보고 계시는 것 같은데, 콘돔을 사용해서 성관계를 하다가 사정시 콘돔을 제거하고 정액을 복부나 얼굴에 사정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잖아요. 콘돔 사용과 복부나 얼굴에 정액을 사정하는 행위도 택일은 아니죠.

말씀하신대로 이 책의 원제는 <존중>이잖아요. 제가 읽은 이 책은 진짜 ‘합의‘의 중요성을 말하기 위해 썼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걸 강조하던 기억인데요. 정액 알레르기가 있는 여성이나 정액을 뿌리는 행위 자체에 불쾌감을 느끼는 여성에게 저런 행동을 하거나 억지로 동의를 요청하는 건 옳지 않지만, 무리없이 합의가 이루어진 경우에는 가능하지 않을까요? 물론 얼굴이나 복부에 정액을 뿌리는 행위가 권력적/정복적 욕망을 투사하는 행위임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요. 섹스 중 일어나는 행동들에 관한 사람의 욕망은 굉장히 다종다양해서, 저런 걸 좋아한다고? 싶은 걸 좋아하는 사람들도 잔뜩 있고.....

cyrus 2021-01-19 15:22   좋아요 0 | URL
제가 동정남인데다가 여전히 성에 대해 보수적인 생각이 있고 무지해서(솔직히 말해 저의 성적 취향이 구체적이 뭔지 잘 모르겠어요. 예전에 레드스타킹 멤버들과 각자의 성적 취향에 대해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저는 진짜 몰라서 대답을 못했어요) 그런지 저자가 언급한 자위 방식에 거부감을 느꼈어요. 제가 표현한 ‘모순’이라는 단어가 syo님이 지적하신대로 문맥상 맞지 않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저는 저자의 두 상반된 입장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는 질외사정을 완벽한 피임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질외사정을 피임법의 한 방법이라고 언급하지 않았어요. 진짜로 이렇게 썼다간 왜곡된 성 지식을 전달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글 마지막에 강조한 콘돔 착용의 중요성은 뜬금없는 문장일 수 있지만, 성교육 책에서 반드시 나오는 내용이라서 언급해봤어요.. ㅎㅎㅎ

사정 후 정액을 여자의 몸에 뿌리고 싶다는 남자의 요구에 상대 여성이 분명히 동의한다면 문제없다고 봅니다. 성적 취향이나 욕망의 형태는 다양하고 천차만별이니까요. 남자의 요구를 흔쾌히 수락하는 여성이 있겠죠..? ㅎㅎㅎ 잘 모르겠어요. ^^;;

카스피 2021-01-20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모쏠들은 끼기 힘든 주제같네요^^;;;

cyrus 2021-01-21 07:27   좋아요 0 | URL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사람 인생은 알 수 없으니(연애와 결혼에 대한 약간의 희망을 가진다면) 성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해요.. ^^
 





임신부는 출산하기 전에 다음 사항들을 지켜주세요.”

 






1. 생필품 점검하기: 화장지, 치약, 비누 등의 남은 양을 확인하여 집에 있는 가족들이 불편하지 않게 합니다.

 

2. 밑반찬 챙기기: 냉장고에 오래된 음식은 버리고 가족들이 좋아하는 밑반찬을 준비해주세요. 그러면 요리에 서투른 남편이 삼시 세끼 잘 챙겨 먹을 수 있습니다.

 

3. 옷 챙기기: 입원 날짜에 맞춰 남편과 아이들이 갈아입을 속옷, 양말, 겉옷 등을 옷장에 보관해둡니다.

 

 

저기요, 선생님. 임신부가 아닌 제가 봐도 지침 내용이 이상한데요? 누가 그러던가요? ? ○○시 임신출산정보센터 웹사이트에 나온 내용이라고요? 어휴, 내가 임신부라면 이걸 전부 지켜야 할 바에 차라리 아이를 안 낳고 말지. 선생님. 밥 챙겨 먹고, 옷 갈아입고, 생필품 점검하는 건 남편도 할 수 있어요.



















* 존 러스킨, 마르셀 프루스트 참깨와 백합 그리고 독서에 관하여(민음사, 2018)




보아하니 선생님은 영국의 사회평론가 존 러스킨 씨군요. 참깨와 백합이라는 책을 쓰신 분 맞죠? 참깨와 백합참깨: 왕들의 보물백합: 여왕들의 화원이라는 두 편의 글을 묶은 책이죠. 첫 번째 글에 올바른 독서법이 나오고, 두 번째 글에 선생님이 생각한 여성의 사적·공적 역할과 여성이 받아야 할 교육이 나오죠. 그런데요, 선생님. 한 손에 참깨와 백합을 들면서 여성 앞에 설교하면 안 됩니다. 지금은 21세기에요. 참깨와 백합이 나온 19세기가 아니란 말이에요.

 

선생님은 백합꽃을 정말 좋아하시네요. 하긴 선생님은 유럽의 중세를 동경했던 만큼 중세의 귀부인을 상징하는 백합에 애착이 강할 수밖에 없죠. 참깨와 백합에서 드러난 선생님의 모습이 마치 백합과 같은 집 안의 여성을 보호하는 중세의 기사 같았어요. 선생님의 눈에 비친 여성은 가정의 안락함을 지키는 천사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집에 없으면 남성은 집안일을 하지 못해서 쩔쩔맵니다. 선생님은 남편이 집안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임신부에게 가사 노동을 해달라고 당부했어요. 저와 선생님을 포함한 남성이 집에서 누린 안락함은 집안일을 도맡은 여성의 노고와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어요



















*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엄마는 페미니스트: 아이를 페미니스트로 키우는 열다섯 가지 방법(민음사, 2017)




엄마는 페미니스트를 쓴 나이지리아의 작가 치마만다 아디치에가 남편이 아이를 돌보는 것은 아내를 돕는 일이 아니라고 말했어요. 집안일은 아내와 남편이 같이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선생님, 제발 정신 차리세요! 출산을 앞둔 임신부에게 가족을 위한 배려를 강요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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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1-14 1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지침 기사 보고 정말 황당했는데 속시원한 글 감사합니다 ㅎㅎ

cyrus 2021-01-14 11:06   좋아요 1 | URL
제가 캡처한 내용보다 더 심각한 것도 있어요.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을게요. ^^;;

미미 2021-01-14 10: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가스활명수 찾다가 이 글 읽고 관뒀습니다.ㅋㅋ

cyrus 2021-01-14 11:07   좋아요 2 | URL
센스 있는 칭찬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

페넬로페 2021-01-14 11: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 문구가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 찍힌 거라구요?

cyrus 2021-01-14 11:08   좋아요 4 | URL
네. 서울시 임신출산정보센터 홈페이지에 있었던 내용입니다. 지금은 삭제돼서 없지만, 검색창에 ‘서울시 임신출산정보센터’를 입력하면 관련 기사와 캡처 사진들이 나옵니다.

mini74 2021-01-14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출산 하러 가기 전날 저희 시어머님이 저 말씀 고대로 하셨죠. 저희 시어머님인줄 ㅎㅎ 저희 시어머님은 그래도 40년생이시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래도 분노가 차오르는데 참 갈 길이 먼 것 같아요 ㅠㅠ

cyrus 2021-01-14 19:01   좋아요 0 | URL
변화의 흐름을 받아들이고 나 자신을 바꾼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아요. 제 자신도 변화에 둔감한 편이라 남들보다 늦게 유행을 받아들이거나 변화의 흐름을 이해하는 편이에요. ^^;;

psyche 2021-01-14 15: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저 글을 페이스 북에서 보고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현재 대한민국 서울시에서 나온 거라는 게 믿을 수가 없더라고요.

cyrus 2021-01-14 19:04   좋아요 0 | URL
이번 해프닝을 보면서 점점 변해가는 시대에 맞추지 못하고, 거꾸로 가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걸 느꼈어요.
 
공정하다는 착각
마이클 샌델 지음, 함규진 옮김 / 와이즈베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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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점  ★★★☆  B+






능력. 표준국어대사전은 이 단어를 일을 감당해 낼 힘이라고 정의한다. 능력의 의미를 쪼개서 살펴보자. 감당또는 감당하다는 어떤 일을 맡아서 능히 해내는 것(또는 견디어 내는 것)을 뜻한다. ‘의 사전적 의미는 다양하다. 이 중에서 능력이라는 단어에 가장 부합하는 의미가 있다. 개인이나 단체를 통제하고 강제적으로 따르게 할 수 있는 세력이나 권력.


우리는 어떤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능력이 있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말한다.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능력이 별로다’, ‘능력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사회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제대로 찍히면 무능력자가 된다. 더 이상 성과를 내지 못해서 동료들이 쌀쌀맞게 대하면 무능력자는 일을 그만둔다. 무능력자로 판정받은 이 사람은 자괴감을 들게 하는 무능함과 그걸 곱게 보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하지 못한 것이다. 동료들은 일을 그만둔 무능력자 뒤에서 수군거린다. “쯧쯧, 저 사람, 뭘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만두는구나. 다른 곳에 가서 잘 할 수 있을까?” 어떤 일을 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거나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스스로 그만둘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개인의 신중한 결정마저도 무능력자의 전형적인 행동으로 본다. 그리고 무능해서 일을 포기한 저 사람이 과연 다른 일도 잘 할 수 있을까라면서 약간의 조롱이 섞인 걱정도 한다.


무능력자를 하대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일을 잘하는 편일까? 물론, 남들에게 인정받는 능력자라면 무능력자가 일을 잘 할 수 있도록 조언과 충고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무능력자를 무시하거나 가르치려 드는 사람 대다수는 본인 스스로 능력자라고 생각한다. 잘한 것도 아닌데, 그렇다고 너무 형편없는 것도 아닌, 평범한 수준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자신은 어떤 일이든 능숙하게 잘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고, 남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했다고 자부한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생각보다 위력이 강하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개인이나 사회 집단을 통제하는 ‘힘이 된다. 이러면 능력자는 개인이나 사회 집단을 마음껏 주무르는 이 된다. 반면에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해도 사람들에게 일단 욕부터 듣는 무능력자는 이다. 우리 사회에서 능력은 한 사람의 수준을 가늠하는 평가 기준이다. 자신과 상대방이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 비교하고 싶은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갑을 관계는 과연 바람직할까?


공정하다는 착각에 제2의 제목이 있어야 한다면, 능력주의라는 착각으로 붙여주고 싶다. 이 책을 쓴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능력만 있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meritocracy)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능력주의란 개인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물질적 보상을 해주는 사회 체계를 의미한다능력주의를 믿는 사람들은 뭐든지 열심히 하면 노력의 결실이 나올 것이며, 그에 따른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능력주의에 대한 낙관적인 믿음은 현실과 정반대다. 저자는 타고난 재능, 근면, 정당한 자격 등 개인적인 요인보다 교육 기회의 불평등, 대물림되는 특권과 특혜 등 비능력적 요인이 신분 상승에 더 많은 영향을 준다는 것을 수많은 사례와 연구를 통해 증명해 보인다저자는 능력주의에 대한 지나친 경도가 지속하면 학벌주의 문제를 낳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능력주의는 계속 굴릴수록 점점 커지는 눈덩이와 같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학위가 없는 사람은 무능력자로 규정되며 이들의 노력과 사회적 기여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다. 특히 대학 학위가 없는 정치인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문은 좁아진다. 능력주의를 지향하는 고학력 정치인들이 정계를 차지하게 된다면, 능력 중심 시장주의에 기반을 둔 정책을 내세운다. 고학력 정치인들은 대학 교육을 받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으며 자연스럽게 사회적 불평등이 해결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고학력 정치인들의 엘리트 의식에 실망한 대중은 능력과 노력만 강조하는 정책에 불만을 느낀다. 민심을 읽지 못한 고학력 정치인들의 정책 실패는 국수주의와 편 가르기를 조장하는 대중주의(populism)에 불을 붙인다. 작은 눈덩이로 시작된 능력주의가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한다.


능력이라는 게 뭔가 있어 보이고 특별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능력주의 중심 사회에서 능력자는 성공한 자’, ‘인생의 승리자’, ‘자수성가형 부자로 주목받는다. 하지만 저자는 능력과 능력자를 더욱 특별하게 만드는 능력주의의 어두운 이면을 걷어낸다. 그러면서 스스로 노력해서 성공했다고 믿는 사람들의 인식에 의문을 제기한다. 자수성가형 인물을 우러러보는 사회일수록 노력했는데도 성과가 나오지 못한 사람들의 입지는 줄어든다. 그 사람들은 실패자’, ‘무능력자로 분류된다. 저자는 능력주의에서 나온 오만을 경계한다. 능력자가 오만해지면, 자신의 성공을 자화자찬하게 되며 성공의 또 다른 요인인 우연과 행운을 외면한다.

 

저자는 버락 오바마(Barack Obama)와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등의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의 엘리트 의식과 오만이 대중 친화적인 정책을 만들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공화당의 고학력 정치인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는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유발하는 발언을 하여 화제의 인물로 급부상했고, 저학력 노동자 출신 미국인의 표심까지 얻는 데 성공했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이변의 대선 결과를 낳게 만든 결정적인 원인힐러리 클린턴의 오만과 이를 이용한 도널드 트럼프의 대중주의적 공약을 다시 보게 만든다. 따라서 공정하다는 착각은 내년에 있을 다음 대선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때 이른 교훈을 준.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어느 대선 후보에게 표를 줄 것인지 생각해볼 수 있다. 엘리트 의식을 벗지 못해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공약을 내건 후보와 엘리트 의식을 비난하면서 민심을 단번에 사로잡는 공약을 내건 후보 중에 우리는 누구에게 표를 줘야 할까. 차악을 선택해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금부터 고민해도 이르지 않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으면 여전히 아메리칸 드림을 믿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심지어 명문대에 다니는 학생들은 자신이 열심히 노력해서 이 자리에 왔다고 생각한다. 능력자의 오만은 보수적인 기성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정치적 성향과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누구나 오만해질 수 있다


그런데 이 책에 좀 더 검토해야 할 내용이 있다. 샌델은 2018년에 나온 중국과 미국의 세대 간 이동성에 대한 세계은행의 자료 등을 근거로 내세워 중국이 미국보다 아메리칸 드림이 실현하기 쉬운 국가라고 주장한다.


 

 중국에서는 부자와 빈자 모두 소득 수준을 개선했다. 그 사이에 미국은 소득 수준 개선이 대부분 상류층에 집중되었다. 1인당 국민소득에서는 미국이 아직 중국을 훨씬 앞서고 있지만 오늘날 중국 젊은이들은 그 부모 세대보다 부유하다. 더 놀라운 점은 세계은행에 따르면 중국의 소득 불평등 수준이 미국과 엇비슷하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중국은 이제 미국보다 세대 간 이동성 정도가 높다. 이는 기회의 땅이라는 미국이 중국보다 밑바닥에서 위로 올라 성공할 가능성이 낮다는 뜻이다. (130~131)


 

샌델은 이 사실을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알려줬는데, ‘미국이 최고라고 믿으면서 자라온 학생들은 이 사실을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샌델의 주장에 대한 중국통의 입장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 중국에는 관시(관계)’ 문화가 견고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학벌과 지역의 연줄의식, 기업의 집단주의 문화가 여전히 강한 편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빈부 격차는 중국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로 꼽힌다. 중국 당국도 자국의 빈부 격차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작년에 프랑스의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Thomas Piketty)의 책 자본과 이데올로기가 중국에 출판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중국 출판사는 해당 책에 언급된 자국의 불평등 문제를 삭제해달라고 피케티에게 요구했다. 피케티는 출판사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본과 이데올로기는 중국에서 출판되지 못했다. 출판사는 출간이 성사될 수 있도록 계속 논의를 하겠다고 밝혔지만, 아직도 깜깜무소식이다.

 







Mini 미주알고주알

 



1

 

 

 

 

 

 

* 248

 

 대학들은 현대사회의 기회 배분 시스템을 주도하고 있다. 고소득 직업과 명예로운 지위로의 여정에 있어 관문 역학[]을 하는 학위를 발급하기 때문이다.

[원문]


 Colleges and universities preside over the system by which modern societies allocate opportunity. They confer the credentials that determine access to high-paying jobs and prestigious positions.

 


[] 역할의 오자.





 

2

 

    

 

 

 

* 308

 

 능력주의 시대는 노동자들에게 더 악랄한 상처를 입히고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의 존엄성을 깎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시험 점수를 잘 따고 대입 시험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브레인을 칭송하면서, 인재 선별기는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들[] 시궁창에 빠트렸다. 그것은 학력이 낮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하는 일은 돈 잘 버는 전문직업인들의 일에 비해 시장에서 별 가치가 없어요. 공동선에도 별 기여를 하지 않죠. 당연히 사회적 인정이나 명망도 별로 따라붙지 않아요.” 그것은 시장이 승자에게 퍼붓는 과도한 보상을 정당화함과 동시에 비대졸자 노동자에게 던져 주는 쥐꼬리 만한 보상도 당연시했다.

 

 

 

[] 사람들은에서 은 보조사다. ‘이 아니라 로 써야 한다. 그래야 문장이 자연스러워진다. “인재 선별기는 능력주의적 학력이 없는 사람들 시궁창에 빠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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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1-09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뉴스에 오르내리는, 교수들의 자녀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부모의 자녀들이 어떤 특혜를 받았는지를 잘 알 수 있어서, 열심히만 하면 된다, 라는 말은 우리를 기만할 뿐, 사실은 돈 있고 백 있어야 좋은 자리를 차리할 수 있다는 게 현실이죠.

이 리뷰 보고 제 책에도 두 군데 오자를 고쳐 놨어요. ㅋ 감사 ^^

cyrus 2021-01-11 10:37   좋아요 0 | URL
맞아요. 페크님이 언급한 내용이 책에 나옵니다. ^^

북프리쿠키 2021-01-09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능력˝이라는 신화로 얼마나 공정성을 해쳐왔는지~저도 이 책 꼭 읽고 싶어 도서관 대출 예약해두었어예~ ^^

cyrus 2021-01-11 10:38   좋아요 1 | URL
저는 운이 좋아서 도서관의 신간 도서 책장에 꽂혀 있는 걸 빌렸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