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헤로디아(Herodias)의 딸은 이름이 없다. 그녀는 성경을 이탈하여 종이로 펼쳐진 무대가 설치된 희곡으로 향한다. 무대 한가운데에 서 있는 순간, 그녀는 헤로디아의 딸이 아니다. 이 주인공의 이름은 살로메(Salome).





















* 오스카 와일드, 오브리 비어즐리 그림, 임성균 옮김 살로메(지만지드라마, 2023)


* 오스카 와일드, 정영목 옮김 오스카 와일드 작품선(민음사, 2009)

 




성경에서 정숙하게 놀고 있던 헤로디아의 딸을 섭외한 극작가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그는 엄숙한 도덕을 마구 조롱하는 사나운(wild) 신사다. 와일드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대는 영혼을 불어넣었다이로써 메마른 헤로디아의 딸은 욕정으로 살찌운 살로메로 변신한다

















* 박세현 《비어즐리 또는 세기말의 풍경》 (한길아트, 2004)


* 박세현 《세기말의 그림은 악의 꽃이었다: 세기말적 멜랑콜리가 만든 기상천외한 화가들》 (청색종이, 2020)




병약해서 가늘어진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Beardsley)의 펜 끝에 검정과 흰색이 묻혀 있다. 비어즐리는 펜으로 와일드가 연출한 살로메의 영혼에 색기(色氣)를 입혔다. 와일드와 비어즐리는 무명의 여자를 단숨에 유명한 요부(femme fatale)로 만들었다.







오브리 비어즐리

The Stomach Dance

희곡 살로메》의 열세 번째 삽화

1893




살로메독자와 관객 모두 홀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와일드는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의붓아버지 헤롯(Herod) 영주 앞에서 춤을 춘다. 희곡 초판에는 일곱 면사포의 춤(Dance of the Seven Veils)’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와일드는 춤의 구체적인 묘사를 생략함으로써 독자와 관객에게 에로틱한 상상력을 일으키도록 부추긴다. 독자와 관객은 와일드가 꾸민 여백을 통과해 헤롯의 연회가 열리는 궁전으로 향한다. 이들은 다 같이 일곱 면사포를 하나하나씩 슬며시 벗기는 살로메의 스트립쇼를 숨죽여 지켜본다. 사실 그들은 살로메가 어떻게 춤을 추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 살로메를 쳐다보는 모든 남자는 비슷한 생각을 한다. 한 몸이 된 그들이 정말로 보고 싶은 건 춤이 아니다. 살로메의 알몸이다.
















* 오드리 로드, 주해연 · 박미선 함께 옮김 시스터 아웃사이더(후마니타스, 2018)




, 여기까지만 보면 살로메남성이 만든, 남성을 위한 에로틱한 희곡이다. 하지만 에로티시즘은 단순히 남성의 정욕을 유발하는 음란한 정서가 아니다. 미국의 시인 오드르 로드(Audre Lorde)여성의 진실한 성적 욕구와 관능적 끌림을 강조하는 건강한 에로티시즘을 긍정한다, ‘건강한 에로티시즘’을 성적 자유주의(sexual liberalism)와 쾌락주의의 동의어로 오해해선 안 된다. ‘건강한 에로티시즘과 성적 자유주의와 쾌락주의는 성적 본능을 말살하는 도덕규범과 종교적 권위에 저항한다. 하지만 건강한 에로티시즘은 성에 긍정적인 인식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개인이 원하는 성생활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강조한다.


헤롯은 포도주와 사과를 내밀면서 살로메를 유혹한다. 하지만 살로메는 헤롯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헤롯] 내 잔에 포도주를 따라라. (포도주가 들어온다.) 살로메, 이리 와서 나와 포도주를 마시자꾸나. 여기 최상급 포도주가 있거든. 시저께서 하사하신 거지. 네 붉은 입술을 포도주에 담가 봐, 내가 그 잔을 비울게.

 

[살로메] 목마르지 않습니다, 영주님.

 

[헤롯] 익은 과일을 가져와. (과일이 들어온다.) 살로메, 이리 와서 나와 과일을 먹자꾸나. 난 과일에 네 작은 이빨 자국이 난 걸 보는 게 좋아. 이 과일을 조금만 먹어 보렴, 남은 건 내가 먹을게.

 

[살로메] 배고프지 않습니다, 영주님.


 

(임성균 옮김, 75)


 

살로메는 모든 남자를 유혹해서 지배하려는 요부가 아니다. 그녀는 매력 없는 음탕한 노인이 성가시게 굴자, 거부 의사를 확실히 밝힌다. 
















* 파스칼 키냐르, 송의경 옮김섹스와 공포(문학과지성사, 2007)




극 중에서 살로메의 아름다움에 눈을 떼지 못하는 인물은 두 명이다. 헤롯과 호위대장 젊은 시리아인이다. 헤로디아는 남편이 된 헤롯에게, 헤로디아의 시종은 호위대장에게 살로메를 너무 빤히 쳐다보지 말라고 경고한다. 과연 이 두 사람은 살로메를 어떻게 쳐다봤을까?

 

프랑스의 작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였다면 두 사람이 정면으로 보지 않고, 곁눈질했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키냐르는 에로틱한 장면이 그려진 로마 폼페이 벽화를 보고 난 후섹스와 공포라는 책을 쓴다. 키냐르는 이 책에서 고대 그리스 · 로마인들의 성문화매혹과 공포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해석한다.


(키냐르가 생각하기에) 폼페이 벽화 속 로마인들의 눈빛은 음란하지 않다. 정욕만 넘쳐흐를 것만 같은 그들의 눈동자 한구석에 섹스를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는 마음이 고여 있. 그래서 자신의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곁눈질한다. 키냐르는 영화와 예술 작품에 묘사된 것처럼 로마인의 성문화가 향락적이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로마인들은 섹스를 불길한 죽음을 연상시키는 공포의 개념으로 이해했다. 절정이 지나가면 팔팔했던 몸은 축 늘어지고, 용암처럼 뜨거웠던 몸의 열기는 싸늘히 식어간다. 신화 속 영웅들은 섹스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바람에 자멸한다. 영웅호색의 뒤에 죽음이 따라온다. 섹스의 즐거움에 빠지면 파멸이 가까이 오는 것을 잊어버린다. 매혹과 공포라는 섹스의 두 얼굴을 바라본 로마인들은 스스로 경계한다. 따라서 그들은 섹스를 정면으로 마주 보지 않으려고 한다.

 

헤롯은 형의 아내(제수) 헤로디아와 결혼하기 위해 첫 번째 아내와 이혼한다. 우물(수조)에 갇힌 세례자 요한(히브리어: 요카난)은 근친상간을 저지른 헤롯을 계속해서 꾸짖는다. 헤롯은 성적 욕망을 이기지 못해 근친상간 금기(incest taboo)를 위반한 인물이다. 도덕적으로 파멸한 헤롯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요한의 질타에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고, 금기를 어긴 섹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달았다. 하지만 의붓딸 살로메 앞에만 서면 위험한 생각은 작아지지 않는다음란한 욕심이 커질수록 근친상간 금기는 잊어버린다. 이런 헤롯을 잘 아는 헤로디아가 가만히 있을 리 없다. 살로메, 헤로디아, 요한에 둘러싸여 난처한 상황에 처한 헤롯은 무의식적으로 살로메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대신에 곁눈질할 수 있다살로메의 성적 매력에 눈이 먼 호위대장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면서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슬쩍슬쩍 쳐다봤을 것이다.


키냐르는 어느 인터뷰에서 모든 해석은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책 섹스와 공포를 에로티시즘에 대한 하나의 (주관적) 견해라고 소개했다. 살로메에 대한 필자의 해석 또한 망상에 가깝다. 그래도 살로메는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정면으로 보든 곁눈질하든 다양한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매력적인 인물임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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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로메
오스카 와일드 지음, 오브리 비어즐리 그림, 임성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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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점  ★★★★  A-




성경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헤로디아(Herodias)의 딸은 이름이 없다그녀는 성경을 이탈하여 종이로 펼쳐진 무대가 설치된 희곡으로 향한다무대 한가운데에 서 있는 순간그녀는 헤로디아의 딸이 아니다. 이 주인공의 이름은 살로메(Salome).


성경에서 정숙하게 놀고 있던 헤로디아의 딸을 섭외한 극작가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그는 엄숙한 도덕을 마구 조롱하는 사나운(wild) 신사다. 와일드는 헤로디아의 딸에게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뿜어대는 영혼을 불어넣었다이로써 메마른 헤로디아의 딸은 욕정으로 살찌운 살로메로 변신한다


병약해서 가늘어진 오브리 비어즐리(Aubrey Beardsley)의 펜 끝에 검정과 흰색이 묻혀 있다비어즐리는 펜으로 와일드가 연출한 살로메의 영혼에 색기(色氣)를 입혔다와일드와 비어즐리는 무명의 여자를 단숨에 유명한 요부(femme fatale)로 만들었다.


살로메는 독자와 관객 모두 홀리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와일드는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는 의붓아버지 헤롯(Herod) 영주 앞에서 춤을 춘다희곡 초판에는 일곱 면사포의 춤(Dance of the Seven Veils)’이라고 언급되어 있다와일드는 춤의 구체적인 묘사를 생략함으로써 독자와 관객에게 에로틱한 상상력을 일으키도록 부추긴다독자와 관객은 와일드가 꾸민 여백을 통과해 헤롯의 연회가 열리는 궁전으로 향한다. 이들은 다 같이 일곱 면사포를 하나하나씩 슬며시 벗기는 살로메의 스트립쇼를 숨죽여 지켜본다사실 그들은 살로메가 어떻게 춤을 추는지 전혀 관심이 없다살로메를 쳐다보는 모든 남자는 비슷한 생각을 한다한 몸이 된 그들이 정말로 보고 싶은 건 춤이 아니다살로메의 알몸이다.


미국의 문학비평가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1964년에 발표한 평론 캠프에 관한 단상』(1964년)[주]에서 부자연스러운 것 인위적이고 과장된 것을 애호하는 취향캠프(camp)’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캠프는 과장된 것, 벗어난 것, 제 상태가 아닌 물건을 선호하게 만드는 감수성이다. 손택은 오스카 와일드의 글과 비어즐리의 그림을 캠프의 예로 든다. 살로메와 비어즐리의 삽화를 처음 접하는 사람은 좋다’, ‘나쁘다라는 식으로 판단한다. 살로메초연 당시 대중과 비평가의 대다수 반응은 나쁘다였다. 그들의 눈에 익은 엄숙하면서도 우아한 아름다움을 살로메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엄숙함을 조롱한 와일드는 도발적이고, 과장된 아름다움을 선호한다. 따분한 도덕보다 색다른 아름다움에 우위를 두는 와일드의 탐미주의는 캠프 감수성의 또 다른 요소인 동성애적 탐미주의와 결이 같다. 캠프는 양성적 스타일인데, 와일드는 양성애자다.


살로메에 불쾌감이 느껴질 정도로 잔인한 묘사가 나온다. 특히 절정에 이른 희곡의 결말을 장식한 비어즐리의 삽화는 지금 봐도 파격적이다. 손택은 캠프에 대한 최후의 진술을 남기면서 캠프에 관한 단상을 마무리한다.

 


58. 캠프의 최후 진술: 캠프는 끔찍하기 때문에 좋다.’



손택은 캠프에 강하게 끌리며, 또 그만큼 강한 거부감을 느낀다고 했다. 살로메를 보는 독자와 관객의 반응 역시 그렇다. 캠프 감수성이 충만한 살로메는 끔찍해서 매력적이며 동시에 거부감이 느껴지는 희곡이다.

   

살로메새 번역본은 원전을 장식한 유명한 비어즐리의 삽화가 수록되어 있다. 극 중 인물을 소개하는 장에 특별한 도판도 실려 있다. 러시아 아방가르르 운동에 참여한 화가 알렉산드라 엑스테르(Aleksandra Ekster)1917년에 제작한 무대 의상 디자인이다.






[] 출전: 이민아 옮김, 해석에 반대한다 (이후,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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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파네스 희곡선 범우문고 168
아리스토파네스 지음, 최현 옮김 / 범우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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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점  ★★  C





아리스토파네스의 는 우화 형식이 섞인 희극이다. 피테타이로스(Pisthetaerus)는 아테네에 불만이 많다. 그는 새의 왕을 직접 만나 하늘에 거대한 도시를 세워 옛날처럼 인간을 다스리라고 설득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작품에서 길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빈곤으로 인해 국력이 소진되고 있는 아테네의 세태를 풍자한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곡선에 수록된 작품은 두 편이다. 구름. 구름은 아리스토파네스의 대표작으로 철학자 소크라테스(Socrates)와 그 제자들을 희화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이 소크라테스가 무대 장치에 탄 채 구름에서 내려오는 모습이다. 구름이 공연된 이후에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선동하고, 신을 모독한 혐의로 재판받는다.


아리스토파네스는 극 중 인물들의 목소리로 간접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냈다. 따라서 아테네의 당시 상황과 작품에 언급된 인명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독자는 대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비극적인 상황에 부닥친다. 아리스토파네스 희곡선의 서문(이 책을 읽는 분에게)과 역주가 독자의 도우미가 되고 있지만, 역주가 있어야 할 대사가 많다의미를 알 수 없는 대사 속 단어와 인명을 몇 개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사카인 (109)


팔레로스의 정어리 (112)


가브조스 (135)



역주가 부족한 번역서는 완성된 책이라고 말할 수 없다. 독자는 역주 없는 번역문을 대충 읽으면서 넘기고 만다. 눈으로 한 글자 한 글자 다 본다고 해도 띄엄띄엄 읽는 행위를 완독이라고 보기 어렵다. 책을 성의 없이 읽는 독자는 잘못이 없다. 완독 불가능한 책을 만든 주범은 역자와 편집자다.


108쪽 역주는 프로크네와 필로멜라이야기에 대한 설명이다. 역자는 테레우스가 아내 프로크네의 동생 필로멜라와 결혼하기 위해 아내를 죽이려는 음모를 꾸몄다라고 썼다. ‘프로크네와 필로멜라이야기의 출전은 오비디우스(Ovidius)변신 이야기》(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17년). 그런데 역자의 설명과 변신 이야기에 기록된 프로크네와 필로멜라이야기가 다르다. 원래 이야기는 잔혹하고 끔찍한데, 테레우스는 아내 모르게 필로멜라를 강간한다. 그리고 필로멜라의 혀를 잘라내고 그녀를 감금한다. 역자가 언급한 프로크네와 필로멜라이야기의 출전은 어쩌면 변신이 아닌 다른 고대 문헌일 수 있다.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출전을 밝혀야 한다.


117쪽 역주의 문둥병’, ‘문둥이는 눈에 거슬리는 단어다. 한센병(나병)과 한센병 환자를 멸시하는 반응이 녹아든 낡아빠진 표현을 이제 안 쓸 때가 되지 않았나. 오역과 오류를 말끔히 지운다고 해서 개정판이 되는 건 아니다. 시대착오적인 단어를 고쳐 쓴 개정판도 나와야 한다.


종반부에도 소크라테스를 풍자한 대사(192, 코러스)가 나온다.



스키아포데스의 나라에 오염된 늪이 있어

소크라테스가 그 늪에서 사람의 혼을 부른다.



의 원문을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아마도 다이모니온(Daimonion)’을 뜻하는 단어일 것이다. ‘다이모니온신령스러운 것또는 영적인 것으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소크라테스 철학이 압축된 플라톤의 대화 편에 자주 나오는 개념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다이모니온은 자기 내면에서 등장하는 반대의 목소리. 플라톤(Plato)알키비아데스 Ⅰ』(김주일 · 정준영 옮김 알키비아데스 ·Ⅱ》, 아카넷, 2020년)에 묘사된 다이몬니온은 자신을 지켜주는 후견인이다.

 

알키비아데스(Alkibiades)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정치가다. 그는 잘생긴 외모로 대중의 인기를 얻었으나 정치적 음모에 휘말리는 바람에 아테네의 적국 스파르타 편을 들었다. 알키비아데스는 지지 세력의 힘을 입고 다시 아테네로 돌아오지만, 친스파르타 행적이 그의 발목을 잡는다. 결국 알키비아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하게 된 원흉으로 지목되어 몰락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알키비아데스를 혀짤배기 소리로 말하며 아테네 평화에 위협적인 인물로 묘사한다(『벌』, 『개)

 

알키비아데스 Ⅰ』는 플라톤의 대화 편에서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오랫동안 위작으로 알려진 탓에 깊이 있는 철학적 대화를 나눈 소크라테스와 알키비아데스의 모습은 묻혀버렸다.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두 사람의 관계를 동성애로 바라보는 피상적인 인식이 강하게 뿌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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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SAC 아트 페스티벌대구 달서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지역민을 위한 예술 축제다. 이 축제에 총 6회의 공연 및 연주회가 편성되어 있다. 그중 다섯 번째로 순서로 진행되는 행사가 달서 청년연극제







826일부터 3주간 매주 토요일 오후 3, 7시에 청년 연극인들의 공연을 볼 수 있다. 내가 보려는 공연은 내일 선보이는 극단 폼(form)의 보이첵(Woyzeck, 보이체크).































* 게오르크 뷔히너, 임호일 옮김 보이체크 / 레옹스와 레나(지만지, 2019)

 

* 게오르크 뷔히너 원작, 타데우시 브라데츠키 연출 보이체크: 연습과 과정의 기록(올댓콘텐츠, 2011)

 

* [절판] 게오르크 뷔히너, 최병준 옮김 보이체크(예니, 2005)

 

* 게오르크 뷔히너, 박종대 옮김 뷔히너 전집(열린책들, 2020)

 

* 임호일 게오르크 뷔히너의 문학과 삶(지만지, 2021)




보이체크는 독일의 극작가 게오르크 뷔히너(Georg Büchner, 1813~1837)의 미완성 유작이다. 뷔히너는 보이체크를 포함한 희곡 세 편(당통의 죽음》과 레옹스와 레나), 단편소설 한 편(렌츠)만 남긴 채 23세로 요절했다. 걸출한 소설가와 시인들이 남긴 불멸의 고전들로 채워진 독일 문학사에 극작가 뷔히너가 있어야 할 자리는 좁아 보인다. 소설과 시는 책 좋아하는 독자들이 문학의 범주를 논할 때 가장 먼저 나오는 친숙한 장르다. 문학의 한 장르인 희곡과도 친해지면 고전으로 불릴 만한 극 작품을 접할 수 있으며 위대한 극작가를 만나게 된다. 보이체크는 지금까지도 여러 차례 공연된 고전 희곡이다. 뷔히너는 독일 문학사에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극작가다.


뷔히너는 낭만주의 문학의 중심지인 독일에서 태어났다. 낭만주의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강조한 이성과 합리주의에 반발하여 생긴 사조이다. 그래서 낭만주의 문학은 감정과 상상력을 중시한다. 낭만주의자들이 현실 너머세계로 시선을 향하고 있을 때 뷔히너는 현실 그 자체’만 바라보고 있었다. 뷔히너는 유복한 유산계급인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뷔히너는 안락한 삶을 살아가기를 거부했다. 그는 하층민을 억압하는 사회에 비판 의식을 가졌고, 정부와 지배 계급을 비판하는 팸플릿을 만들어 농민들에게 배포하기도 했다.


















* 장 코르미에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 2005)

* [절판] 체 게바라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황매, 2012)



 

혁명가 기질을 드러낸 청년 뷔히너의 모습은 남미의 혁명가 체 게바라(Che Guevara)의 젊은 시절과 비슷하다. 체의 아버지는 병원 원장이었고 체는 의대를 졸업했다. 체는 오토바이를 타고 남미 대륙을 여행하면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빈민들을 만난다. 오토바이 여행 이후로 체는 의사 가운을 벗어 던지고, 군복을 입어 혁명에 뛰어든다.


보이체크하층민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희곡이다. 보이체크는 희곡의 주인공 이름이며 실존 인물이다. 보이체크는 자신과 교제한 과부를 죽여 처형당한 인물이다. 여기까지만 보면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다. 당시 의사들은 보이체크의 정신 상태를 관찰했는데, 그들이 남긴 보고서에 따르면 보이체크를 정신 이상자로 판단했다. 뷔히너는 이 보고서를 참고하면서 희곡을 썼다. 하지만 보이체크의 범행을 단순히 성격 결함에서 비롯된 끔찍한 일탈로만 보지 않는다. 뷔히너가 묘사한 보이체크는 인간으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하층민을 상징한다


보이체크는 대위의 이발사로 일하지만, 궁핍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위는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비천한 보이체크를 깔본다. 보이체크의 연인 마리는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일상에 권태감을 느끼고, 군악대장(‘고수장으로 번역되기도 한다)과 바람피운다. 보이체크는 돈을 더 벌려고 아르바이트까지 하게 된다. 그 일은 바로 의사의 황당한 실험 대상이 되는 것. 의사는 사람이 완두콩만 먹으면 당나귀로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의사는 자신의 생각을 증명하기 위해 보이체크에게 완두콩만 먹인다. 보이체크는 완두콩을 먹은 대가로 매일 2그로셴을 받는다


하층민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사회 구조에서 인간과 비인간을 나누는 기준은 계급이다. 보이체크는 불평등한 사회 안에서 아이러니한 비극을 겪는 인물이다. 보이체크는 자신을 가난하고 쓸모없는 비인간으로 취급하는 현실을 견디지 못한다. 그의 분노는 마리에게만 향해 있다. 결국 살인을 저지르면서 분노를 표출한다. 보이체크는 살인자가 됨으로써 인간이길 스스로 거부한다.


보이체크는 일반적인 희곡과 확연히 다르다. 보이체크는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기승전결의 서사 구조로 되어 있지 않다. 완성되지 않은 초고 형태라서 제목이 없는 2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연출 지시문도 많지 않다. 보이체크》에 27개의 글 파편과 뷔히너의 여백만 남아 있다. 연출가와 각색자는 새로운 대사를 추가해 뷔히너의 여백을 채울 수 있다. 배우는 뷔히너가 종이 위에 만들다 만 인물들을 무대 위에 올려 자신만의 연기력으로 빚어서 만들 수 있다. 그렇기에 극단 폼이 보이첵을 어떻게 보여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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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3-09-01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좋겠다. 난 언제 연극을 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ㅠ
부럽다. 좋은 시간되길...^^


cyrus 2023-09-04 20:10   좋아요 1 | URL
토요일에 갑자기 일이 생겨서 공연 못 봤어요... 정말 그날 생각하면 너무 아쉽고 화가 나네요.. ㅎㅎㅎㅎ
 




고대 그리스 비극과 관련해서 가장 유명하고, 지금까지도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는 여성이 헬레네(Helen), 안티고네(Antigone), 메데이아(Media) 등이다. 국내에서의 인지도가 다소 낮지만, 사실 이피게네이아(Iphigeneia)도 앞의 세 사람 못지않게 우여곡절을 겪은 비극적인 인물이다.































[대구 책방 <일글책> 시카고플랜 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 

에우리피데스, 천병희 옮김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 1, 2(도서출판 숲, 2021)

1권 『메데이아수록, 2권 『헬레『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 수록

 

[대구 책방 <일글책> 시카고플랜 고전 읽기 모임 선정 도서] 

소포클레스천병희 옮김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도서출판 숲, 2008)

안티고네』 수록


* 소포클레스, 김기영 옮김 오이디푸스 왕 외(을유문화사, 2011)

안티고네수록

 

* 소포클레스, 강대진 옮김 오이디푸스 왕(민음사, 2009)

안티고네수록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Agamemnon)은 트로이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결성된 그리스 동맹군의 총지휘관이다. 그런데 아울리스 항구에 순풍이 불지 않아서 수많은 군함이 꼼짝하지 못한다. 예언자의 신탁에 따르면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를 아르테미스(Artemis) 신에게 제물로 바치면 순풍이 생길 수 있다. 아르테미스의 도움을 받은 이피게네이아는 죽음을 면하고, 타우로이족이 사는 타우리케라는 곳에 살게 된다. 그녀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일을 하는 사제가 된다. 제물은 표류 중에 타우리케에 당도하는 그리스인들이다. 타우리케에 있는 그들은 이방인이다


에우리피데스(Euripides)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는 이피게네이아가 타우리케에서 우연히 만난 동생 오레스테스(Orestes) 일행과 함께 극적으로 탈출하는 과정을 그려낸 공연극이다


제물 바치는 신전에 이피게네이아와 하녀들이 함께 살고 있다. 하녀들은 포로로 잡혀 온 그리스인들이다. 하녀들은 합창하는 코로스(Chorus)극 초반부에 이피게네이아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여기에 맞춰 코로스는 이피게네이아의 불운과 비관적 상황을 강조하는, 상당히 어두운 분위기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그대의 노래에 화답하여, 여주인이시여,

나는 아시아풍 가락의 야만적인 노래

부를 것인즉 이것은 죽은 자를 위한

무사 여신들의 만가에서나 울려 퍼지고

하데스가 환희의 찬가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부르는 그런 노래예요.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179~185, 천병희 옮김, 296)



에우리피데스는 아시아풍 가락의 야만적인 노래(180행)를 죽은 자를 위해 부르는 만가(挽歌)와 같다고 묘사한다.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봐야 하겠지만, 그리스인들의 머릿속에 그려진 아시아(에 속한 나라)’는 우리가 생각하는 아시아와 다를 것이다. 그리스 비극 작품들을 꼼꼼하게 읽으면 이방인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스인들은 자기 나라 사람이 아니면 이방인으로 간주한다. 때론 이방인을 민주정과 평화를 중시하는 그리스적 정체성과 상반되는 야만적이면서 호전적인 존재로 취급한다.


타우리케의 포로가 된 그리스 여성들은 자신들 또한 억압받는 이방인이지만, 또 다른 이방인들의 나라인 아시아를 야만적인 나라로 보고 있다. 그리스인을 이방인과 거리를 두면서 그리스 문화 및 민족의 우수성을 은근슬쩍 드러내는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는 비극인데도 비극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코로스의 노랫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자면, 타 국가로부터 억압받는 여성을 단순히 피해자범주로 분류할 수 없다. 그들의 정체성 및 사회적 지위와 관련된 인종과 계급은 피해자 집단 내에 차별을 생산한다. 여성은 단순하지 않다. 여성은 살아가는 과정이 비슷하고, 공통된 차별을 경험하는 단일하고 매끄러운 존재가 아니다


이방인을 향한 곱지 않은 시선, 거기서부터 생긴 편견과 차별은 아주 질긴 생명력으로 지금도 다양한 형태로 자라나고 있다. 인종 혐오와 차별은 잘라내도 그 자리에 또 다른 머리가 생기는 신화 속 괴물 히드라(Hydra)와 같다.

















[대구 장르문학 전문 책방 <환상문학> 여름 호러 독서 모임 선정 도서]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김지현(아밀) 옮김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크툴루의 부름 외 12(현대문학, 2014)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정진영(정탄) 옮김 러브크래프트 전집 1(황금가지, 2009)

 

*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정진영, 류지선 옮김 러브크래프트 전집 4(황금가지, 2012)




고대부터 존재해온 인종 차별’ 히드라는 러브크래프트(Howard Phillips Lovecraft)의 소설 속에서도 살고 있다러브크래프트우주에서 온 미지의 존재가 등장하는 공포소설을 쓴 공포문학의 대가. 러브크래프트가 만든 괴물들은 소름 끼칠 정도로 외형이 끔찍하다. 불쾌한 냄새까지 풍긴다그로테스크한 괴물들은 소설 속에서만 나타나는 가공의 존재다. 하지만 인종 차별히드라는 소설과 현실 속에 살고 있다.
















* 미셸 우엘벡, 이채영 옮김 러브크래프트: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필로소픽, 2021)




러브크래프트는 외국인 혐오증(xenophobia)이 있는 인종차별주의자. 그는 흑인과 유대인을 싫어했다. 자신의 몸속에 백인 앵글로색슨의 피가 흐른다고 생각했고, 순수한 백인의 피에 다른 인종의 피 한 방울이라도 절대로 섞이면 안 된다고 믿었다러브크래프트의 극단적인 인종 혐오를 상세하게 설명한 책이 러브크래프트의 삶과 작품을 비평한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Michel Houellebecq)러브크래프트: 세상에 맞서, 삶에 맞서.


그가 쓴 소설 몇 편만 골라서 읽어 보면 인종차별적인 문장들을 확인할 수 있다러브크래프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크툴루의 부름악마를 숭배하는 이누이트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웹 교수는 48년 전에 고대 비문 발견에는 실패했지만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를 탐사한 일이 있다고 했다. 그때 그린란드 서부 해안의 고원 지대에서 쇠락한 에스키모 부족을 만났다. 그들의 종교는 악마를 숭배하는 기묘한 형태의 이교로서 무엇보다 극도로 잔인한 특성을 가지고 있어 웹 교수는 간담이 서늘해지고 말았다. 다른 에스키모 부족들은 그 종교에 대해 거의 몰랐고 설렁 거의 아는 이가 있다고 해도 몸서리를 치며 입에 올리기 꺼려했다.

 

(정진영 옮김, 러브크래프트 전집 1148~149)



아밀이라는 필명으로 소설가로 활동하는 김지현은 자신이 번역한 크툴루의 부름차별적인 의미가 담긴 에스키모(날고기를 먹는 사람들)’가 아닌 이누이트로 썼다. 실제로 이누이트는 고기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을 익혀 먹는다. 


김지현 작가가 번역한 단편 선집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크툴루의 부름 외 12레드훅의 공포는 수록되지 않았다. 레드훅의 공포는 러브크래프트 팬과 러브크래프트 전문 연구자들이 인정하는 최악의 작품이다레드훅의 공포에 눈이 째진 동양인들(정진영 번역, squinting Orientals)’이라는 표현이 있다. 러브크래프트는 이교 집단을 아시아의 원숭이들이 공포의 전율에 맞춰 춤을 춘다(정진영 번역, Apes danced in Asia to those horrors)’라고 묘사했다.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것은 비현실적인 괴물이 아니다. 여기저기 떠도는 인종 차별괴물을 경계해야 한다. 이 녀석은 현실적인 괴물이다. 죽여도 다시 살아난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이 괴물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눈에 보이는데도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는다. 대중의 침묵과 무관심을 먹고 자라는 인종 차별괴물이 더 무섭다.






<cyrus의 주석>



* 크툴루의 부름중에서,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크툴루의 부름 외 12182

 

 바로 거기서 시드니 사임[주1]이나 앤서니 앤거롤라[주2] 같은 화가의 그림에나 나올 법한 기괴한 아수라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 183쪽 역주


 Sidney Sime(1867~1941)[주1] 영국의 화가. 환상적이고 기괴한 장면을 많이 그렸다. 



[1] 시드니 사임의 출생 연도는 1865이다.


[2] 앤서니 앤거롤라(Anthony Angarola) 이탈리아 이민자 출신이다. 러브크래프트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다. 흑인과 유대인 등 타 인종을 혐오한 순수 백인 앵글로색슨 혈통주의자인 러프크래프트가 이민자 출신 화가를 좋아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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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오장원 2023-08-09 1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드훅의 공포 굉장히 매력적인 미스터리 스릴러물이라고 생각하지만 분명히 인종차별 요소가 두드러지는 작품이지요..

cyrus 2023-08-12 07:52   좋아요 0 | URL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읽다 보면 눈에 거슬리는 표현이 몇 개 나오지만, 러브크래프트의 한계를 인지하고 소설을 읽으면 무방하다고 생각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