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
페터 비에리 지음, 문항심 옮김 / 은행나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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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자료실을 둘러보다가 우연히 《페터 비에리의 교양 수업》을 발견했다. 내가 제일 관심 있어 하는 ‘교양’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갔다.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일에 거부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과연 어떤 사람이 교양 있는 사람인가? 교양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독일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페터 비에리(Peter Bieri)‘자신을 위해 행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음, 이렇게 쓰고 보니까 무슨 의미인지 감이 오지 않는군) 비에리의 정의를 쉬운 말로 풀이하면 이렇다. 교양은 본인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양 있는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어떤 것’이 지식일 수 있으며 사물 또는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현상,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일 수 있다. 교양을 쌓기 위해선 개인적인 호기심이라는 매개가 필요하다. 교양을 쌓는 행위의 근저에는 이런 물음, 즉 호기심이 놓여 있다. 따라서 호기심은 세계를 더 넓고 깊게 이해하려는 지적 열망에 불을 지핀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교양에 대해서 말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독서’이다. 대부분 부모는 자녀가 책을 좋아하며 많이 읽는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처럼 책을 읽으면 참되고 바른 사람이 되는 길, 지식과 교양을 쌓으며 어려운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지혜 등 책을 통해 세상 살아가는 길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독서는 우리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비에리는 책의 뒤꽁무니를 졸졸 따라가는 데 급급한 독서만으로는 교양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어머, 이거, 내 얘기잖아!) 교양인은 책을 읽으면서 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책을 읽은 후에 변화하는 존재이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교양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처럼 책을 좋아하고 교양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간과하기 쉬운 것이 바로 ‘독서 이후에 생긴 인식과 행동 변화’가 아닐까 싶다. 결국,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내면에 큰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감동 없는 독서를 한 셈이다. 이러한 독서는 고독한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교양을 스스로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지식은 나를 위한 것뿐만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다. 제대로 아는 사람은 가짜 지식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며 그런 유혹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 희생자가 되는 것을 막아준다. 따라서 교양인은 나를 스스로 지킬 줄 알며 상대방을 지켜 주기도 한다. 그러나 간혹 교양의 힘은 남을 지배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교양의 힘이 남을 지배하고 공격하는 무기가 되지 않으려면 다양성을 인지해야 하고, 상대방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아는 것에 대한 우월감을 가졌더라도 곧 그 마음을 거둘 줄 알아야 한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적 과시를 통해서 우월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욕망이 있다. 이런 욕망을 가진 사람은 일반적으로는 상대를 무시하면서 가르치려고 한다. 자신의 지식을 뽐내면서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고 그것을 통해 욕구를 채우려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이런 행동은 타인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에 대해 진솔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교양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 또는 자아상에 대해서 잘 안다. 즉 자신의 결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자신의 결점을 받아들인다면 ‘완벽하고 숙명적인 것’에 대해 의식할 필요가 없다. 지금 알고 있는 최신 지식도 시간이 지나면 구식이 되기 마련이다. 또, 완벽한 인간은 없다. 완벽한 인간이 되기 위해 결점을 숨기면서까지 살아갈 필요가 없다. 자기방어에 치중한 지적 욕구는 부질없는 욕구이다. 치열한 지적 탐구나 성찰이 없기 때문이다. 비에리의 말에 따르면 교양인은 새롭게 자신을 점검하고 평가하는 쉼 없는 작업을 하는 존재이다. 그런 작업이 가능하게 하려면 호기심을 계속 살려야 한다.

 

이 책의 후반부는 문학과 교양의 관계에 대한 비에리의 입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에리는 독자에게 왜 문학이 교양 쌓는 일에 중요한 것인지 알려준다. 그는 시, 소설 같은 문학 작품이 자신과 상대방의 내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문학적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복합적인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문학적 이야기는 수많은 등장인물과 그들이 처한 상황들을 마치 현재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간이 얼마나 다층적인 존재인지 알게 된다. 그러면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돌아보게 된다. 따라서 문학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에 여러 갈래의 길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요즘 사회는 오로지 대학 간판과 명함 따기를 위해서만 경쟁하고 공부할 뿐, 이 두 가지가 결정된 다음에는 거의 자기 성숙의 모색을 하지 않는다. 나는 대학 생활을 해 오면서 어렴풋이나마 교양의 중요성을 인식해 왔지만, 눈에 잡히는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기에 특별한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얇은 분량의 책(100쪽이 채 되지 않은 아주 가벼운 분량이다)은 나의 허점을 아프게 찌른다. 앞서 비에리가 강조했듯이 교양은 자기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다. 자기에게 가장 필요한 교양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교양을 쌓겠다는 무리한 욕심을 내는 것보다 먼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현재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그것이 교양 쌓기의 시작이다.

 

 

 

 

 

※ Trivia

 

 "아는 것이 힘이다.” 교양의 개념을 대표하고 있는 이 말에는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남을 지배하라는 뜻은 없습니다. (14쪽)

 

이 문장을 보는 순간, 비에리가 이렇게 말한 의도가 궁금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이 명제가 오랫동안 식민지를 침략, 약탈하면서 구축한 서구 문명의 지배 질서를 유지하게 만든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여 왔다는 사실을 비에리는 전혀 모르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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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0-19 2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끝문장에서 - 반대로 그런 사실을 알고 비에리가 말한 것처럼 저는 느꼈어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로 저처럼 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힘은 지배력을 갖게 되니까요.
앎을 찬양하되 지배는 하지 말라는... (아닌가요?)ㅋ

cyrus 2018-10-20 11:06   좋아요 0 | URL
페크님 말씀을 듣고 나서 제가 인용한 문장을 다시 읽어봤어요. 인용문 앞과 뒤에 있는 문장은 이렇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 교양의 개념을 대표하고 있는 이 말에는 자신이 가진 지식으로 남을 지배하라는 뜻은 없습니다. 지식의 힘은 다른 데에 있습니다. 지식은 희생자가 되는 것을 막아줍니다. 뭔가를 알고 있는 사람은 불빛이 반짝거리는 곳으로 무작정 홀릴 위험이 적고, 다른 사람들이 그를 이익 추구의 도구로 이용하려고 할 때 자신을 지킬 수 있습니다.


페크님 말씀대로 비에리는 “아는 것이 힘이다”의 악용된 사례를 지적하면서 경고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생각하는 올바른 지식의 힘을 언급하고 있고요. 제가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너무 성급하게 생각했네요. 좋은 의견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

syo 2018-10-23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서부에 들러서 이 책을 빌려왔는데, 지금 제가 손에 든 이 책이 사이러스님의 손길이 닿은 그 책인가요?? ㅎㅎㅎㅎㅎ

근데 이러니까 갑지기 분위기 스토커...

cyrus 2018-10-23 19:59   좋아요 0 | URL
책의 분량이 적어서 오늘 하루 만에 다 읽을 수 있을 거예요.. ㅎㅎㅎ
 

 

 

섹슈얼리티(sexuality)의 해방은 멀고도 험하다. 여성에 대한 억압과 규제를 통해 남성이 도달한 자기 만족적 섹슈얼리티 해방은 진보적인 의의를 지니지 못한다. 개인의 섹슈얼리티를 억누르는 사회적 제약을 해체하는 것이 섹슈얼리티 해방을 실천하는 ‘성 정치학(sexual politics)의 목표이다. 지금까지 성 해방론자들은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기존의 질서를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나남출판, 2010)

 

 

 

그렇지만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기존의 질서에 반기를 들고, 여성의 성적 욕망을 긍정적으로 추구한 페미니스트들의 성 해방 담론조차 ‘섹스(섹슈얼리티)에 대해서 말하기’라는 성에 대한 근대적 담론의 개념 틀 안에 있었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에 따르면 근대사회는 섹슈얼리티의 각축장이었다. 부르주아는 (sex)에 대해 고백할 수 있는 공적 영역을 만들어내면서 ‘어느 성이 합법적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은밀하게 숨겨진 섹슈얼리티는 담론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 섹슈얼리티는 권리 박탈과 금지를 통해서 규제만 되는 게 아니라 고백을 통해 재생산된다. 그가 규명한 문제는 성의 억압이 아니라 성에 대해 끊임없이 말하게 만드는 권력이다. 다시 말해 근대사회의 섹슈얼리티 담론은 인구를 관리 및 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식 권력(savoir-pouvoir)’의 산물인 것이다. 푸코는 근대사회에 시작된 이 지식 권력을 ‘교활한 속임수’라고 비판한다. 섹슈얼리티는 자유와 ‘자기 결정’의 보루인 것 같아 보여도 그것은 시대의 맥락에 따라 또는 권력의 의도에 따라 달라진다.

 

 

 

 

 

 

 

 

 

 

 

 

 

 

 

 

 

 

*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문학동네, 2008)

* 조형준 《주디스 버틀러, 젠더 트러블》 (커뮤니케이션북스, 2016)

* 임옥희 《주디스 버틀러 읽기》 (여이연, 2006)

 

 

 

이러한 푸코의 논의는 성 해방 자체를 문제 삼은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입장과 궤를 같이 한다. 그녀는 섹스(생물학적 성), 젠더(사회적 성, gender), 섹슈얼리티 모두를 이성애적 지배 담론 중심의 문화와 사회가 반복적으로 주입해서 만들어진 구성물이라고 주장한다. 앞서 말했듯이, 섹슈얼리티와 마찬가지로 젠더도 역사적 맥락에 의해서 달라지는 가변적인 것이다. 이성애적 지배 담론은 전통적인 성(생물학적 성) 역할에 기반을 둔 이성애적 관계를 사회의 기본적이고 자연스러운 섹슈얼리티로 정당화하게 만든다. 이성애적 지배 담론을 지지하는 사회 속에서 말하게 되는 성은 이성애 관계에서 고려되는 ‘연애법’ 또는 ‘성애술’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자연스럽게 이성애와 동성애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요청되는 성 역할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면서 만들어 간다. 이 반복적인 수행으로 인해 ‘이성애적 성 정체성’이 만들어진다. 이성애적 지배 담론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성별 이분법에 벗어난 성(sex)과 섹슈얼리티를 비정상 혹은 변태로 규정한다.

 

버틀러는 ‘남성 이성애자’, ‘여성 이성애자’만이 주체라고 보는 지식 권력인 가부장적 이성애주의의 문제점을 폭로하면서 페미니스트들이 바라던 성 해방은 ‘이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60년대에 불어 닥친 성 해방의 열기는 성별 이분법과 그것의 근원인 이성애적 지배 담론 둘 다 전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남성(성)과 여성(성), 그리고 이성애와 동성애를 구분하는 것은 지식 권력이 만들어낸 섹슈얼리티 담론이며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발생시킨다. 그러나 이런 내부에 작용되는 지식 권력을 전복시키는 것 역시도 사회 내부의 실천 의지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 섹스, 젠더,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포괄하는 급진적 학문이 되기 위해서는 일상에 맞닿아 있는 다양한 양상의 지식 권력을 분석하면서 균열을 일으켜야 한다.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 속에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지만, 꼭 그것을 하나의 목소리로 수렴할 필요가 없다. 서로 다른 입장의 차이를 반목과 혐오로 치환될 수 없다. 그리고 그 차이를 무시하거나 덮어버려선 안 된다. 차이가 갈등과 분열이 되지 않으려면, 그 차이를 인정하고 이해해야 한다. 이것마저 어렵다면, 페미니즘과 퀴어 이론이 누군가에게 또 다른 배제와 폭력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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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사회
줄리언 바지니 지음, 오수원 옮김 / 예문아카이브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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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옥스퍼드 사전이 선정한 ‘올해의 단어’는 ‘post-truth’이었다. 원어의 의미를 그대로 살린 채 우리말로 번역하면 ‘탈(脫)진실’이 될 수 있겠다. 탈진실은 객관적 사실보다는 개인의 감정이나 주관적 확신에 호소하는 정치 캠페인을 묘사할 때 많이 사용됐던 말이다. 특히 선동가들이 때론 진실과 다른 내용으로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일 때도 널리 사용됐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 등 연이은 충격적인 사건 여파로 이 단어가 큰 관심을 모았다. 진실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있는 탈진실의 시대 속에서 사회적 관심이 집중되는 의사결정은 머뭇거려질 수밖에 없다. 특히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중대한 의사결정에 관련해서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다원화된 사회에는 다양한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온다. 민주사회이기에 가능한 상황이다. 권위주의적 권력이 지배하던 시절 공동묘지의 고요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가치다. 자유 민주 질서는 다원화를 촉진하고 생산적으로 살리는 데서 건실하게 뿌리내릴 수 있다. 하지만 탈진실의 시대에 접어든 우리 사회가 생산적인 시끄러움이 아니라 분열과 갈등을 일으키는 시끄러움에 휩싸이고 있다. 이 시끄러움은 출처가 불분명한 ‘가짜 뉴스’에서 나오는 시각적 소음이다. 검증되지 않은 거짓 정보들이 넘쳐흐르고, 그것이 진실인 양 둔갑하여 또다시 거짓 정보를 재생산해내는 악순환이 일어난다. 가짜 뉴스는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한다.

 

탈진실보다 더 무서운 건 아예 진실 자체를 외면하고 무시하는 상황이다. “오늘날 진실은 이렇게 훨씬 더 복잡하고 안개 자욱한 모호한 것이 되어버렸다(《진실 사회》 12쪽).” 영국의 철학자 줄리언 바지니(Julian Baggini)의 말처럼 ‘안개’가 된 진실은 좀처럼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로 남는다. 손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진실은 점점 외면받는다. 반면 거짓은 진실의 가면을 쓰고 활개 치며 우리를 유혹한다. 하지만 바지니는 진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진실은 살아있다고 믿는다. 과거에는 ‘보이는 것’이 진실이었다. 이때 진실은 아주 단순했다. 그렇지만 세상이 변하면서 다양한 목소리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진실의 다양성과 상대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보이는 것만 전부(진실)가 아니다. 오늘날의 진실은 복잡성을 띠고 있으며 우리 눈앞에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진실을 누가 말하고, 누구를 위한 것인지 분간할 능력이 없다.

 

《진실 사회》진실이라는 개념 자체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지니는 진실의 존재를 위협하는 거짓의 유해성을 밝힐 뿐만 아니라, 진실의 복잡성이 어떻게 거짓을 양산하는지 살핀다. 바지니는 진실의 복잡성을 설명하기 위해, 진실을 열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1. 종교적 진실

2. 권위적 진실

3. 은폐적 진실

4. 이성적 진실

5. 경험적 진실

6. 창조적 진실

7. 상대적 진실

8. 권력적 진실

9. 도덕적 진실

10. 총체적 진실

 

 

종교적 진실은 사유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거의 몸으로 느끼면서 발견하는 진리에 가깝다. 그러므로 종교적 진실은 개인의 자아의식과 정체성과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전문가의 인식론이 반영된 권위적 진실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인다. 그렇다고 해서 권위나 권위자 자체를 무조건 거부해선 안 된다. 비록 정확하지 않더라도 그 권위가 강조하는 ‘주제’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근거를 가지고 작용하는지 우리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진실은 은폐될수록 음모론이 계속 나오며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저자는 순수 이성을 통해 확실한 진리에 도달한다고 보는 이성적 진실을 경계한다. 왜냐하면, 이성을 가진 인간은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 때문이다. 권력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진실을 만들고 싶어 한다. 권력적 진실은 권력자의 ‘통제’에 의해 만들어진다. 우리가 살면서 쭉 믿어왔던 단 하나의 진실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진실과 관련된 가치관과 세계관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진실은 개인의 가치와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을 정도로 ‘총체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타인의 진실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부정하는 반응은 그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가장 합리적인 수단은 명백한 근거와 진실이다. 바지니는 탈진실 시대일수록 진실을 바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기본적인 덕목으로 ‘진정성’과 ‘정확성’을 언급한다. 탈진실 시대의 도래는 그동안 믿어왔던 많은 것들을 바꿀 것이다. 이는 진실을 믿으려는 이들의 가치관을 흔들 만큼 엄청난 혼란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가올 미래의 혼란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그에 앞서 왜 우리가 눈앞에 있는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피하게 됐는지 자성이 필요한 때이다. 진실과 거짓을 분간하기가 어렵다고 해서 무관심과 냉소주의 뒤에서 숨고 있을 수만은 없다. 진실과 정의를 확보할 의지가 없다고 생각하면 살아갈 의미 없는 인생이 되고 만다. 그러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가짜 뉴스의 노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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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10-02 17: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확증편향을 원하는 이들에게 진짜 진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저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필요할 따름이죠.

존재의 상실감을 자신이 원하는 가짜 진실로 채
우려는 욕망이 문제라고 하네요.

cyrus 2018-10-03 13:48   좋아요 0 | URL
자신의 모습을 거짓 진실로 꾸며서 과대 포장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SNS이에요. 북플도 인스타, 페북처럼 유사해져서 지적 허영심을 드러내기 딱 좋은 곳이에요. 요즘 독서모임을 통해 책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보니까 제가 그동안 글을 쓰면서 지적 허영심을 충족시켰다는 걸 깨달았어요.

2018-10-03 08: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03 13:48   좋아요 0 | URL
가짜 뉴스를 믿는 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
 
계몽주의 시대의 급진철학자들 반철학사 4
미셀 옹프레 지음, 남수인 옮김 / 인간사랑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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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시대의 급진철학자들》‘반(反)철학사’ 시리즈 네 번째 책이다. 이 책에서 미셸 옹프레(Michel Onfray)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철학의 계보를 정면으로 비판하면서 제도권 지식인층에 밀려난 급진적 사상가 여섯 명의 생애와 철학을 재조명한다.

 

계몽주의 시대는 무엇인가? 계몽주의는 18세기 유럽에서 광범하게 일어난 지적 사상운동이다. 프로이센(Prussia)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Frederick II)[주]를 비롯해 당대의 많은 사람은 “새로운 시대가 문을 두드린다”는 볼테르(Voltaire)의 외침에 심취했다. 당시 유럽의 지성인들에게 볼테르를 만나는 것은 철학자 혹은 계몽주의자로 인정받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계몽주의 시대는 ‘이성의 시대’였고, ‘빛의 시대’였다. 종교가 지배하는 계몽주의 이전은 자연과 신에 대한 질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개인은 자연과 우주 만물을 다스리는 신의 뜻에 의해 움직인다고 보았다. 그러나 계몽주의가 등장하면서 전 세대보다 밝아진 이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존엄과 평등, 자유권을 강조함으로써 중세를 지배한 전제군주와 종교의 독단적 권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런데 옹프레는 18세기를 새롭게 규정한다. 그는 18세기가 봉건적 시대, 군주 왕정 시대, 가톨릭 시대였다고 주장한다. 볼테르, 루소(Rousseau), 디드로(Diderot) 등 프랑스 계몽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이 철학자들은 자유와 관용을 호소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교육을 받고 재산을 소유한 사람, 따라서 이성을 자유롭게 활용할 줄 아는 부르주아였다. 옹프레는 계몽주의자들을 ‘겁쟁이’라고 비판한다. 언행 불일치. 계몽주의자들은 말(생각)만 앞세우고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사유재산제, 군주 및 가톨릭 권위에 순순히 따르는 보수주의자였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유럽 계몽주의의 정점이었을까? 옹프레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는 18세기가 프랑스 혁명을 준비하는 시기로 보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이 뿌리 깊은 기독교의 권위를 단호하게 공격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종교를 신뢰하는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무신론자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급진적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무신론자’라는 오명을 씌우게 된다.

 

장 멜리에(Jean Meslier)는 ‘무신론자’ 사제이다. 옹프레의 표현에 따르면 그는 18세기를 폭파시킬만한 다이너마이트를 가진 사상가였다. 멜리에는 무신론자였을 뿐만 아니라 재산과 토지 공동 소유를 주장한 공산주의자이기도 했다. 라 메트리(La Mettrie)는 데카르트(Descartes)의 심신 이원론을 비판하며 인간에 대해 철저하게 유물론적인 정의를 내세운다. 그는 인간 역시 기계이며 인간의 정신은 뇌의 물질적인 작용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멜리에와 라 메트리는 급진적 유물론자이다. 모페르튀이(Maupertuis), 엘베시우스(Helvètius), 돌바크(d’Holbach)도 유물론자이지만, 이 세 사람은 공리주의적 입장을 드러낸다. 엘베시우스는 화폐의 폐지, 공산주의 유토피아에 반대했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한 점진적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무신론자가 확실한 돌바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신과 종교를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계몽주의 지식인들이 모여 만든 《백과전서》의 편찬자였고, 이 책에 400개의 주석을 달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백과전서》 집필에 참여한 루소와 볼테르는 무신론자들을 공격했고, 무신론자를 비난한 내용이 있는 《백과전서》 항목이 기재되기도 했다. 옹프레는 이 책에서 ‘계몽주의 시대의 희생자’ 또는 ‘해방자’로 재평가받는 사드(Sade)를 비판한다. 그는 사드가 성범죄자이며 파시즘의 전체주의적 · 우생학적 속성을 이해한 ‘봉건주의의 화신’이라고 주장한다. 사드의 작품 속에 나타난 파시즘의 속성을 제대로 보지 못한 사드 옹호론자들에게도 가차 없이 비판을 가한다. 사드의 소설을 읽기 전에 사드의 봉건주의적 사상을 분석한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반드시 읽어볼 것!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이 이룩한 문화와 문명에 고취되어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문화와 문명을 진보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은 세상을 확 바꿀만한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서 있던 자리는 자유와 평등을 외친 민중이 모인 광장이 아니라 귀족을 알현하는 안락한 실내였다. 볼테르가 자신에게 연금을 주는 귀족의 방에 찾아가서 문을 두드리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는가. 인간의 이성이 굳어지면 또 다른 권위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이성은 속박에 갇힌 모든 사람을 위한 만능의 열쇠가 아니다.

 

 

 

[주] 《계몽주의 시대의 급진철학자들》에서는 프랑스식 표기에 따라 ‘프레데릭 II세’라고 되어 있다.

 

 

 

 

 

※ Trivia

 

‘인간사랑’ 출판사에 나온 책에서 유독 오자 한두 개가 발견된다.

 

 

 옹프레는 18세기의 철학을 기술하기에 앞서 18세기는 이 세기의 말엽인 1879년에 일어난 프랑스의 대혁명을 준비한 시대라고 설정한다. (10쪽)

 

‘1789년’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256쪽에 있는 ‘타르수수의 바오로’를 ‘타르수스(Tarsus)의 바오로’로 고쳐야 한다. 287쪽의 ‘에피큐로스’는 에피쿠로스(Epikuros)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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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09-13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루소가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낸 걸 이해하게 되었어요. 잘못 생각했다고 시인한 대목이 뭉클합니다. 팟캐스트에서 들었어요. 나쁜 마음으로 그런 건 아니라 오판했다는 거죠. 저는 믿습니다.

요즘 스피노자에 빠졌어요. 아니 더 빠져 살 예정입니당~~

cyrus 2018-09-14 12:28   좋아요 0 | URL
철학을 공부하기 전에 철학자의 생애를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아요. 그러면 그 사람이 왜 철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있고, 인간다운 결점도 알 수 있어요. 저도 스피노자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일단 먼저 데카르트의 철학부터 공부하려고 해요. ^^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지적 편력은 다양하다. 그래서 그를 특정한 범주에 잠시나마라도 붙들어 매는 것이 불가능하다. 푸코를 영유하는 방식은 사람들에 따라 너무나 편차가 심하다. 푸코의 대머리에 무작정 오르다가는 미끄러져서 떨어질 수 있다. 다행히 요즘은 푸코의 대머리에 오르는 데 유용한 사다리 같은 책들이 많다. 다만 오래돼서 낡아빠진 사다리는 피해야 한다. 튼튼한 사다리가 여러 개 있다면 오래된 사다리까지 챙겨야 할 필요는 없다.

 

 

 

 

 

 

 

 

 

 

 

 

 

 

 

 

 

 

 

* 자네트 콜롱벨 《미셸 푸코, 죽음의 빛》 (인간사랑, 1998)

 

 

 

《미셸 푸코, 죽음의 빛》(인간사랑, 1998)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오래된 사다리’다. 푸코의 철학을 소개한 책이지만, 내가 보기엔 필독해야 할 이유가 없는 책이다. 이 책은 20년(!) 전에 나왔다. 절판되지 않은 게 용하다. 이 책의 프롤로그인 『여정과 추억』은 저자가 자신의 푸코 읽기 여정을 말년 푸코의 삶과 겹쳐 술회한 내용인데, 쓸데없이 길다. 그래도 번역자의 꼼꼼한 역주는 읽을 만하다. 번역자는 참고 문헌들에 대한 세심한 검토를 곁들여 이 힘든 작업을 성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번역자도 사람인지라 종종 무지(無知)로 인해 잘못된 정보를 전하기까지 하는 오류를 범한다. 교정은 원고에 있는 오류를 바로잡고, 인쇄 상태를 바로잡는 행위이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교정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책은 ‘잘못된 책’이다.

 

 

 

 

 

 

 

 

 

 

 

 

 

 

 

 

 

 

* [아직 안 읽은 책] 미셸 푸코 《말과 사물》 (민음사, 2012)

 

 

 

 

 

 

 

 

 

 

 

 

 

 

 

 

* 노르베르트 볼프 《디에고 벨라스케스》 (마로니에북스, 2007)

* 자닌 바티클 《벨라스케스》 (시공사, 1999)

 

 

 

78쪽에 푸코의 《말과 사물》(민음사, 2012)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말과 사물』은 우연을 전제로 한다. 왜냐하면 거기엔 가장 걱정스런 것이 아직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의 발상은 보르헤스(Borges)의 한 텍스트로부터 연유한다”는 말로 『말과 사물』은 시작한다. 오히려 이 짧막한 문장은 『귀족의 딸들(Ménines)』의 화려한 묘사가 감추는 방법론적 서문에 의해 가려져 있다.

 

 

 

‘짧막한’은 ‘짤막한’의 오자(誤字)이다. 『귀족의 딸들』은 무엇인가? 스페인의 화가 벨라스케스(Velázquez)의 그림 『라스 메니나스(Las Meninas)를 말한다. 이 그림은 ‘시녀들’이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벨라스케스가 어린 공주와 시녀들, 그리고 공주의 놀이 상대였던 난쟁이와 개를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귀족의 딸들’은 나오지 않는다. 번역자는 벨라스케스의 그림 제목을 엉뚱하게 적었다.

 

 

 

 

 

『라스 메니나스』는 이야깃거리가 많은 그림이다. 그림 속의 벨라스케스(그림 왼쪽에 붓을 들고 있는 남자) 자신은 어린 마르가리타(Margarita) 공주를 그리고 있다. 이 그림의 흥미로운 점은 거울 속의 펠리페 4세(Felipe Ⅳ) 부부의 모습이다. 실제로 스페인 국왕 부부는 그림 모델로 서고 있는 공주의 지루함을 달래주기 위해 화가의 작업실을 찾았지만, 벨라스케스는 국왕 부부를 자세히 묘사하지 않았다. 벽에 걸린 거울 속에 비친 국왕 부부 모습(그림 중앙)을 그렸다.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 그림을 해석한다. 그는 이 그림이 “모든 것을 재현하려는 고전 시대의 욕망을 압축하여 표현한 작품”이라고 평가하면서, 이 그림에서 나타내고자 하는 주체가 생략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푸코의 해석에 따르면 『라스 메니나스』는 어린 공주의 모습을 재현한 그림이라 볼 수 없고, 공주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화가 자신의 행위를 재현한 그림으로도 볼 수 없다.

 

 

 

 

 

 

 

 

 

 

 

 

 

 

 

 

 

 

 

* 미셸 푸코 《광기의 역사》 (나남출판, 2003)

*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읻다, 2016)

 

 

 

 

 

 

 

 

 

 

 

 

 

 

 

 

* 월터 보싱 《히에로니무스 보스》 (마로니에북스, 2007)

* 월터 S. 기브슨 《히에로니무스 보스》 (시공사, 2001)

 

 

 

 

126쪽에 있는 ‘제롬 보스(Jerome Bosch)『광인들의 배(바보 배)』를 그린 네덜란드 화가 히에로니무스 보스(Hieronymus Bosch)를 프랑스어로 표기한 이름이다. 푸코는 보스가 그린 『광인들의 배』에 영감을 받아 《광기의 역사》(나남출판, 2013)를 쓰게 된다. 푸코는 이 책에서 『광인들의 배』가 그려진 르네상스 시대만 해도 광인은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었을 뿐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된 존재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독일의 인문주의자 작가 제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t)이 쓴 《바보배》(읻다, 2016)는 르네상스 시대 광인의 지위를 알 수 있는 문헌이다.

 

 

 

 

 

 

 

 

 

 

 

 

 

 

 

 

* 로제 마리 하겐 《피테르 브뢰헬》 (마로니에북스, 2007)

* [절판] 닐스 요켈 《브뢰겔》 (RHK, 2006)

* 월터 S. 기브슨 《브뢰겔》 (시공사, 2001)

 

 

 

보스와 마찬가지로 네덜란드 출신인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도 광인을 묘사한 그림 작품을 남겼다. 그런데 《미셸 푸코, 죽음의 빛》의 번역자는 동명이인의 브뤼헐을 언급했다. 126쪽 역주에 피터르 브뤼헐이 아니라 그의 차남 얀 브뤼헐(Jan Bruegel)을 설명한 내용이 있다. 얀 브뤼헐은 아버지와 다르게 주로 정물화를 그렸으며, ‘꽃의 브뤼헐’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브뤼헐’이라는 성을 가진 화가가 세 명(지옥, 광인 등을 주제로 기괴한 분위기의 그림을 그린 ‘대’ 피터르 브뤼헐, 그의 장남 ‘소’ 피터르 브뤼헐, 차남 얀 브뤼헐)이나 있다 보니 번역자가 이름을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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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8-09-10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파고 들고 싶은 사람이에요 ㅎ 푸코

cyrus 2018-09-12 06:55   좋아요 0 | URL
푸코가 독자에게 좌절감을 주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참고 책을 읽어보면 그의 분석에 놀라게 될 것입니다. ^^

2018-10-15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15 17:17   좋아요 0 | URL
어떤 음악인지 궁금하네요. 혹시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인가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한 그림을 보는 건 즐거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