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멈춘 사람들 혁신과 잡종의 과학사 1
남영 지음 / 궁리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리의 강물은 오류의 운하를 통해 흐른다. (타고르)

    

 

 

옛날 사람들에게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었다. 해와 달 그리고 별들이 모두 지구의 주변을 도는 것으로 믿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러한 믿음들은 미신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그 한 부분인 태양계 중에서도 아주 조그만 위성, 즉 티끌 같은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과학자들은 엄청난 사실을 밝혀내고서도 이를 떳떳하게 주장하지 못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미신에 사로잡힌 종교의 교리에 어긋난다. 이러한 주장은 이단으로 몰려 종교 재판의 대상이 된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처음 주장된 지동설이 갈릴레이에 의해 공개적으로 지지받기까진 근 10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우리 눈에는 잘못된 미신에 집착했던 옛날 사람들이 고지식하게 보인다. 답답하기 짝이 없다. 반면에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는 척박한 땅에서 활짝 핀 기적의 꽃처럼 느껴진다. 과학사는 위대한 천재들만 기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과학사를 혁신의 관점으로만 바라본다. 하지만 그들이 단지 비범해서 천재가 된 것이 아니다. 과학사는 시행착오와 오류의 역사이기도 하다. 착각과 실패가 교훈을 낳고 그 속에서 독창적인 아디이어도 생겨난다.

 

패러다임이 바뀐다는 것은 사고의 틀이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당대를 지배하는 사회체제, 보편적인 법칙과 이론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 사고의 틀이다. 패러다임이 바뀌고 사고의 틀이 바뀐다면 우리의 살아가는 방식도 바꿔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오랫동안 유지해온 사회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하면 사람들이 믿고 있던 가치관마저 혼란이 생긴다. 질서의 안정성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를 절대로 용납하지 못한다. “세상이 바뀌는 것은 알겠어, 그런데 나는 변하기 싫어!” 변화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과학사에서 빠지지 않는 내용이다. 따라서 낯선 변화에 대한 저항을 넘어서지 않으면 혁신은 결코 나올 수가 없다는 논리가 강조되기도 한다.

 

그러면 과거의 틀은 무조건 틀린 것일까. 절대 그렇지 않다. 과거의 틀은 과거의 상황에서 맞는 것이고 지금의 틀은 지금의 상황에서 맞는 것뿐이다. 갈릴레이 이전에 천동설은 옳은 것이었고, 갈릴레이 이후에는 지동설이 옳은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 사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그리고 뉴턴은 처음부터 과거의 틀을 완전히 바꾸려는 마음으로 연구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서양에서 유래한 대부분 학문의 뿌리를 캐다 보면 첫머리에 아리스토텔레스가 등장한다. ‘또 당신이야?’이라는 감탄이 나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거의 모든 학문 분야의 기초를 다진 명실상부 최고의 학자인 만큼 그 영향력이 아직도 건재하다. 그는 죽어서도 최고의 지식인으로 추앙받아 세상 사람들 위에 군림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고정된 천체로 인식했고, 그를 신봉하는 학자들마저 이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코페르니쿠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론에 의문을 제기한 것은 맞으나 과거 우주론을 완전히 폐기해야 할 낡은 틀로 생각하지 않았다. 코페르니쿠스는 과거의 틀을 참고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우주의 질서 속에 조화로운 수학의 패턴이 숨겨져 있다고 봤다. 이는 피타고라스학파의 생각과 유사하다. 피타고라스학파도 지동설을 먼저 생각해냈는데, 코페르니쿠스는 피타고라스학파가 생각한 과거의 틀을 정확한 관측과 수학적 계산을 이용해서 증명하고 싶었다. 과거의 틀을 조금씩 고쳐서 구체적으로 나온 것이 지동설이다. 결국,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과거의 틀이 섞인 잡종의 이론이다.

 

생각의 잡종은 비단 코페르니쿠스의 머릿속에서만 나타나지 않았다. 튀코 브라헤는 천동설을 믿은 최후의 천문학자다. 그의 제자 케플러는 스승이 평생 행성을 관측해 남겨놓은 엄청난 양의 자료를 검토하여 천동설을 뒤집어 버렸다. 그리고 지구가 원을 그리며 태양 주위를 돈다고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브라헤와 케플러는 여러 면에서 정반대의 인물이었지만 생각의 교배를 통해 행성 운행의 원리를 밝혀낸 대혁명을 이루었다. 데카르트는 뉴턴이 새로운 역학과 우주론을 정립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포함, 모든 생명체를 복잡한 기계라고 생각했다. 뉴턴은 처음에 데카르트의 생각을 이어받아 자연현상을 바라봤지만, 몇 가지 결함을 발견하면서부터 자연현상을 움직이게 하는 의 실체를 수학적으로 증명하기 시작했다. 뉴턴은 데카르트의 어깨를 빌려 남들이 보지 못한 생각의 영역에 한 발짝 더 내디딜 수 있었다.

 

과학사는 혁신의 역사가 아니다. 혁신과 잡종의 역사다. 과거의 틀과 현재의 틀이 같이 공존하다가 점진적인 검증을 통해서 더욱 더 확실한 지식만이 현존한다. 천재들이 과학을 이끈 것이 아니라, 의심과 시행착오가 과학자들이 과학을 하도록 만든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과학자들은 앞선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가면서 새로운 지식을 획득했다.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이, 케플러, 뉴턴 등은 모두 자신들의 세계에서 진실에 가장 빨리 도달한 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 모두는 갈등에 시달리는 운명을 겪는다. 과거의 틀을 부인해야 하는 운명이다. 우리가 생각한 것과 달리 그들은 급진적 발상을 무모하게 시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앞사람들이 치열하게 생각했던 세상의 이론을 짓이겨놓지 않았다. 오죽하면 뉴턴이 자신을 단지 거인의 어깨 위에 서 있는 자라고 겸손한 말을 했겠는가. 과학의 진보는 특출한 개개인의 역량에 의해서 급작스럽게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를 톺아볼 때 조금씩 발현된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겨울호랑이 2016-10-04 2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yrus님의 글을 읽으니 `청출어람 청어람` 이 생각나네요 ㅋ

cyrus 2016-10-05 11:10   좋아요 1 | URL
책의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잘 요약했습니다. ^^

yureka01 2016-10-04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것이 진리겠죠.
변화를 예측하는 것의 진리와 오류들..
생명이 그러하고 죽음이 그러하니까요.

cyrus 2016-10-05 11:11   좋아요 0 | URL
그렇습니다. 변화는 살아있는 것들이 쇠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러운 변화와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yamoo 2016-10-05 0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어째, 쿤의 생각과 배치되는 것 같습니다.
과학사는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사실을 논파한게 쿤의 패러다임 이론이었다고 아는데요...새삼스럽게 옛 이론의 부활인 듯합니다...

cyrus 2016-10-05 11:12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카이스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를 정리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가 쿤의 관점을 토대로 과학사를 설명한 것 같습니다. ^^
 
인간 존재의 의미 - 지속 가능한 자유와 책임을 위하여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이한음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네 이웃을 사랑하라’로 요약되는 이타심은 종교의 영역에만 존재하는 것인가? 그렇지만 일상생활에서도 이타적 행동을 하는 사람들을 수없이 볼 수 있다. 대가가 없어도 헌혈을 하고, 불우이웃을 돕는다. 심지어 타인을 구하려다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들까지 있다. 이런 걸 보면서 “엄마, 세상은 참 따뜻한 거죠?” [주1] 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간 중에 원래 남보다 좀 더 선한 사람이 있다든가, 인간은 원래 선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성선설에 따라 인간은 선하기 때문에 이타적 행동을 한다는 설명은 너무 단순하다. 이 논리로 인간사회의 이타적인 행위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인간은 대개 이기적이다. 이기심은 인간의 생물학적인 본성인 동시에 인간 행태를 탐구하는 기본 전제이기도 하다. 다행스럽게도 이기적 인간들 사이에서 이타적 인간이 멸종되지 않고 살아남아 면면히 맥을 이어왔다. 상반된 이기심과 이타심의 공존하는 세상은 흥미로운 관찰 거리다. 인간이 아무 대가 없이 남을 도울 수 있을까, 아니면 무엇을 바라고 돕는 것일까? 수많은 학자가 인간 사회의 용기 있는 자기희생을 설명하기 위해 매달렸다. 대표적인 이론이 혈연선택설(kin selection)집단선택설(group selection)이다.

 

혈연선택설에 따르면 혈연으로 연결된 개체들에 대해서는 희생을 아끼지 않는다. 혈연선택설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속담으로 요약된다. 궁극적으로 자신의 유전자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상호 협력하거나 이타적인 혜택을 베푼다. 반면 집단선택설에 의하면 개체들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스스로 희생한다. 이타적 행동을 하는 개체가 많은 집단일수록 생존율이 높다. 결국, 이타적 행위자가 많은 집단이 살아남는다.

 

 

 

 

 

에드워드 윌슨은 집단 선택설을 옹호한다. 그는 집단의 가치를 중시하고 인간의 사회 행동과 문화도 동물의 본성으로 풀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윌슨이 말하는 동물의 본성이란 진사회성(eusociality)을 의미한다. 윌슨은 이미 《지구의 정복자》(사이언스북스. 2013년)는 인간이 개미와 같은 진사회성 동물이라고 주장했다. 즉 인간은 여러 세대로 이뤄진 집단 구성원들이 분업하여 이타적인 행동을 하는 동물로 진화했다는 얘기다. 윌슨은 《인간 존재의 의미》에서도 집단선택설을 줄기차게 주장하면서 혈연선택설의 한계를 콕 집어 지적한다. 윌슨의 주장에 맞선 리처드 도킨스가 도발한다. “여러분, 윌슨의 책을 있는 힘껏 집어 던지세요!” [주2]

 

이 세상에는 이런 이론들로 명확히 설명될 수 없는 일들이 가득하다. 어떤 이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불길로 뛰어든다. 숭고하다고밖에 할 수 없는 의로운 희생들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의로운 희생을 추모하는 일을 위선적이라고 생각한다. 경쟁을 최적의 수단으로 간주하는 신자유주의의 독주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챙기는 것이 미덕이라는 이기심의 원리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현대는 경쟁 사회다’라는 명제에 반론을 제기하기는 쉽지 않다. 협력하고 이타적인 행동을 하면 손해 보고, 경쟁하고 남을 이용해야 성공한다는 주장이 뭔가 불편은 하지만 말이다. 윌슨은 인간의 감정이 시시때때로 변하고, 동시에 나타나기도 하는 ‘감정의 불안정성’이 인간 조건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관건으로 본다. 복잡한 감정 반응을 이해하면 합리적인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데, 윌슨은 우리가 직면하게 될 상황을 돕기 위해 ‘인문학’이라는 열쇠를 건넨다. 인문학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 물음에 대한 의미 있는 답을 제시하는 데 도움을 준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융합한 인간 지성은 환경의 위기와 지구 생명 전체의 미래에 대한 성찰을 지향한다.

 

인간은 순수한 돕기 능력에 있어서도 독보적이다. 이런 풍성한 이타적인 형질이 인류라는 종을 지구에서 가장 번성한 동물로 만든 핵심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협력은 결코 안정적인 전략이 아니다. 협력은 배신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다양한 선택지의 하나다. 한편으로 인간 사회를 진사회적 관점으로 바라보는 윌슨의 시선이 걱정스럽다.

 

 

인간 행동의 특징인, 또 하나의 유전되는 형질은 애초에 집단에 소속되려고 하는 압도적으로 강한 본능적인 충동이다. 이 충동은 대다수의 사회성 동물에게도 나타나는 것이긴 하다. 사회성 동물 개체를 강제로 홀로 지내게 하면 계속 고통에 시달릴 것이고 결국에는 미치고 말 것이다. 자신이 어느 집단의 일원인가 여부는 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 또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집단은 구성원에게 우월감을 제공한다. 심리학자들이 지원자들을 무작위로 집단을 나누어서 단순한 게임을 시키자, 각 집단의 구성원들은 곧 자기 집단의 구성원들이 상대편 집단의 구성원들보다 더 유능하고 더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35쪽)

 

 

집단을 우선으로 여기는 이타적 본성이 때로 다른 집단에 무서운 영향을 끼칠 수 있다. 극우 민족주의가 대표적인 예이다. 집단의 이타적 본성이 이기적 본성으로 변질하면, 다른 집단에 대한 공격으로 자기 집단의 영속성을 유지한다.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와 달리 집단 속에 있게 되면 평소와는 사뭇 다른 행동을 하게 마련이다. 많은 군중이 모이게 되면 혼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과감한 선택을 하게 되고, 그래서 결과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집단의 구성원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다른 집단과 차별화함으로써 소속감과 만족감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다른 집단과 더 차이가 나는 극단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인간은 사회성 동물이지 진사회성 동물에 가까운 수준은 아니다. 그리고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실망한 글이 <외계 생명체의 초상>이다. 이 글에서 윌슨은 인간 본성의 특징을 토대로 외계 생명체의 특징을 상상하는데, ‘외계인은 사회적 지능이 높다’라는 주장에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 말을 사회생물학의 논리로 보면 외계인도 유전자의 힘으로 사회적 행동을 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윌슨은 사회생물학이 인간으로까지 확대하는 것에 무척 조심스러워했다. 동물의 사회적 행동 메커니즘을 외계 생명체에도 적용하는 스승의 생각을 제자 최재천 교수는 어떻게 생각할까?

 

 

 

[주1] 1993년부터 사용한 MBC 구 로고송. 원전은 ‘엄마 세상은 참 따뜻한 거죠. 우리 문화방송’. 내가 초딩 때 이걸로 패러디한 유머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엄마 세상은 참 따뜻한 거죠. 미친놈아, 겨울이다’

[주2] 《인간 존재의 의미》 8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계 -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 EBS 다큐프라임 <생명, 40억년의 비밀> 3
김시준.김현우,박재용 외 지음 / Mid(엠아이디)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신앙심이 두터웠던 다윈의 아내 에마는 남편의 진화론에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다윈은 딸까지 병으로 세상을 뜨자 신에 대한 회의감이 극에 달하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진화란 인간이나 신의 의지가 아닌 냉엄한 자연의 법칙에 의해 진행된다는 확신이 갈수록 강해진다. 그러나 다윈은 자연선택으로 살아남은 개체적 특성이 세대를 통해 어떻게 전달이 되는가에 관해서는 명확한 설명을 하지 못하였다. 멘델과 드 브리스에 이르러서야 유전자와 돌연변이의 개념이 알려지면서 비로소 진화의 원인이 설명된다.

 

 

 

 

 

 

생물의 목적은 누가 뭐래도 다음 세대에 유전자를 남기는 것이다. 고등동물일수록 자식 사랑은 본능적이다. 고상하게 삶의 의미를 논하고 이 본능을 마다한 동물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이미 멸종했다. 진화론은 오늘날 과학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우리 스스로 진화의 정점이라 여기며 흐뭇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린 여전히 진화론에 파생된 오해를 믿고 있다. 진화론은 강자만이 살아남고 약자는 멸종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으로 발전했다. 권력욕과 폭력은 강자의 권리로 포장됐고 사회적 약자의 문제는 패배자들의 약한 소리로 전락했다. 우파는 진화론을 인간이나 사회에 대한 이론으로 해석했고, 인간의 불평등을 합리화했다.

 

진화는 더욱 완전한 존재를 향한 발전 과정이 아니다. 꼭 강한 자만이 살아남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의 동물과 식물은 진화라는 거대한 지구의 게임에 참가하고 있을 뿐이다. 최선의 적응전략을 갖춘 개체만이 진화 게임에 살아남는다. 반면에 운 없는 개체도 나온다. 진화 게임의 극명한 결과를 보여주는 생물이 바로 고래와 스텔라바다소다.

 

바다에 사는 포유동물 고래는 생물 계통상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유전자 분석상 하마에 가깝다. 고래의 조상은 몸길이가 3m가 채 되지 않는 곰만 한 육식동물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인 육상동물과 달리 두 눈의 간격이 좁고 주둥이가 길며 발달한 긴 꼬리를 갖고 있었다. 이와 함께 네 다리를 가졌으며 우제류의 특징적인 발목뼈 구조를 보여줬다. 그런 동물이 바다에 적응하더니 최대 150t이나 되는 초대형 고래로 진화했다. 고래가 코끼리보다 훨씬 큰 크기로 진화하게 된 이유는 체온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덩치가 큰 개체는 적의 눈에 띄기 쉽다. 특히 인간의 눈에 띄면 씨가 마른다. 다 자란 놈의 몸무게가 10t이나 됐던 스텔라바다소는 한때 북태평양 전역에서 살았지만, 인류의 눈에 띈 지 단 27년만인 1768년에 종의 수명을 다했다. 움직임이 느리고 순해 선원과 상인의 손쉬운 식량감이었다. 스텔라바다소는 현존하는 듀공, 매너티와 비슷하게 생겼다. 이 세 동물은 바다소목에 속한다. 듀공과 매너티도 최근 그 수가 격감하여 멸종위기에 있다.

 

 

 

 

 

번식은 동물의 본성이다. 그렇지만 섹스가 불가피하다는 뜻은 아니다. 사실 동물에게 섹스란 무척이나 복잡한 과정이며 성가신 일이다. 게다가 수명을 단축할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가 드는 중노동이다. 똘똘한 자식을 만들어줄 섹시한 파트너를 차지하기 위해 사투도 벌여야 한다. 수컷은 자신이 진화적으로 더 적합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거추장스러운 페니스를 과시한다. 그런데 진화를 위해서 페니스를 퇴화하는 종이 있다. 페니스가 없는 종은 번식에 불리하다. 하지만 닭과 타조 등을 제외한 조류는 하늘에 오래 날기 위해서 페니스를 포기했다. 그뿐만 아니라 조류는 작은 파충류로 진화의 여정을 시작하여, 깃털을 발달시키고, 서서히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형태로 진화했다. 그 과정에 뼈가 있는 꼬리와 이빨이 사라졌다. 꼬리가 있던 자리에 가벼운 꼬리 깃털이, 이빨 대신에 튼튼한 부리가 생겼다.

 

 

 

 

 

 

벌거숭이두더지쥐는 털이 없고, 눈은 좁쌀만 하다. 앞니만 톡 튀어나온 게 못생겨도 이렇게 못생길 수가 없다. 그러나 이 형태 또한 삶의 환경에 따라 진화한 것이다. 작은 눈은 평생 땅속에서 살기 때문에 빛만 감지하면 되므로 큰 눈이 필요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입 주변에 있는 수염이 눈 역할을 대신해 사물을 감지한다. 또한 털이 없는 이유는 땅속은 기온이 일정하므로 털의 역할이 없어져서 저절로 퇴화했다.

 

경계 : 배제된 생명들의 작은 승리는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까지 숙연한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진화는 있을지언정, 실패 없는 진보는 없다.’는 것.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인간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인류의 진보를 종교처럼 떠받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일 진화론을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적용해보자. 수많은 종이 멸종하고 새로운 종들이 탄생해왔듯이, 인간도 언젠가는 새로운 종으로 진화한다거나 혹은 아예 멸종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이 멸종한 생물들을 진화에 실패한존재로 규정할 자격이 없다. 우리는 인류의 생태적인 성공이 수많은 시련과 난관을 거쳐 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류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이 시도라는 긴 대열에서 유래했다. 스텔라바다소의 사례에 볼 수 있듯이 진화가 오로지 진보와 발전이 아닌 퇴행도 함을 잘 보여준다. 진화는 크고 작은 시련의 연속이다. 살아남은 생명은 또 하나의 가능성에 매달리면서 마침내 새로 진화했다. 새롭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수천만 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장대한 시련의 연속 속에서 종은 살아남기 위하여 나무로, 물로, 하늘로, 마침내 땅으로 내려와 도전과 실패의 과정에 종지부를 찍었다. 진화 게임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 진화 게임은 완벽한 진보의 혜택을 누린 승자를 원하지 않는다. 진화의 의미는 막다른 환경의 골목에서 새로운 길을 찾는 데 있다. 이는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인간은 여전히 자연의 변화 앞에 미약하고 무력한 존재다. 이제 우리는 다른 차원의 시련에 맞닥뜨렸다. 진화의 세계를 혹독하게 경험했던 털 없는 원숭이는 자연을 점점 더 큰 재앙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16-09-18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진화에 관심이 많아요. 별로 아는게 없어서 항상 새로운데 cyrus님 페이퍼 읽으니 역시나 많은 걸 배우게 되네요^^

cyrus 2016-09-18 18:39   좋아요 0 | URL
MID 출판사에서 나온 <멸종>과 <짝짓기>를 같이 읽으시면 진화 개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2016-09-18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6-09-18 18:51   좋아요 0 | URL
비밀 댓글로 설정 안 하셔도 됩니다. 그 문장을 다시 보니까 표현이 어색하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페니스가 없는 종은 번식에 불리하다.`로 고쳤습니다.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
 
생명의 기억 - 고롱고사국립공원에서 펼쳐진 자연과 인간, 그 아름다운 공존의 기록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지음, 최재천.장수진 옮김 / 반니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모잠비크의 고롱고사(Gorongosa) 국립공원은 성경 속 대홍수 때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땅으로 알려진 곳이다. 실제 노아의 방주가 도착한 곳이 고롱고사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나올 만큼 고롱고사가 태고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낙원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고롱고사의 숲은 16년 동안 일어난 내전에 휘말리면서 처참하게 훼손됐다. 군인들이 고기를 얻고자 야생동물을 마구잡이로 잡았다. 이렇게 황폐해진 이곳 생태계를 살리기 위해 미국인 자선사업가 그레고리 카를 비롯한 환경운동가들은 초식 동물들을 이주시켜 이들이 안전하게 번식할 수 있도록 하는 한편 육식 동물들도 천천히 늘려나가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어찌 보면 ‘현대판 노아의 방주’를 시도한 셈이다. 이러한 노력 덕택에 코끼리와 하마를 시작으로 버펄로, 사자 등 야생 동물들이 점차 고롱고사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생명의 기억》(A Window on Eternity)은 고롱고사의 생태계를 회복하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기록이다. 세계적인 생물학자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은 고령과 비행기 트라우마에 불구하고 고롱고사의 땅을 밟는다. 그곳에서 노학자는 야생이 녹아 흐르는 자연의 대지를 관찰한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에 있을 때 가장 빛이 난다. 고롱고사 국립공원에서 만난 동물들은 우리가 도시의 동물원에서 보던 동물들과 완전히 달랐다. 사자의 위엄 있는 모습, 사체에 모여 살점을 뜯어먹는 독수리들, 황새의 우아한 날갯짓 등은 진정한 생명력을 가진 동물들에게서만 볼 수 있다. 인간들의 눈요기를 위해 차고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서 사는 동물원 동물들의 피곤하고 생기 없는 모습이 새삼 안쓰러워진다. 일생을 비좁은 동물원의 ‘감옥’에 갇혀 사는 동물들과 달리 숲에서 있는 그대로의 야성을 발산하는 동물들은 경이로움을 넘어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생태계를 흔히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세계라고 말하지만, 그 속에는 오묘한 조화와 조물주의 섭리가 배어 있다. 이 조화로운 섭리가 흐트러지면 생태계 전체가 와르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생태계를 구성하는 동물들의 숫자는 먹고 먹히는 관계를 통해 조절된다. 어떤 지역의 생물의 종류와 수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을 생태계의 평형이라고 한다. 먹이 연쇄의 한 단계를 이루는 어떤 생물의 수가 많이 줄어들게 되면, 생태계 전체에 영향을 준다. 먹이사슬의 고리 하나가 빠져나가면서 연쇄적인 붕괴가 시작된다. 내전이 끝났을 때 고롱고사의 평원을 누비던 사슴과 버펄로의 개체 수가 줄어들자 사자와 치타 등 대형 포식자도 자취를 감췄다.

 

곤충 역시 생태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존재다. 곤충이 살아나지 않으면 생태계도 살아남지 못한다. 죽은 동물의 사체는 미생물에 의해서 천천히 부패하다 토양으로 사라지며 다시 자연 일부가 된다. 그런데 미생물의 역할만으로는 이러한 생태계 순환 과정이 더디게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사체 분해를 빠르게 도와주는 청소부 곤충들이 있다. 이들은 사체를 먹으며 잘게 부수어 미생물의 번식을 빠르게 만들고 동물의 배설물도 먹어 치우며 생태계 전반에서 순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들이 배설물, 부패한 시체 등을 먹는다는 이유로 더럽다고 느낄 수 있지만 명백한 생태계의 순환의 일꾼들이다.

 

개미 연구 전공자답게 윌슨의 개미 사랑은 여전하다. 윌슨은 침으로 자신의 손가락 살을 찌른 개미 한 마리가 다치지 않게 조심스레 떨어뜨린다. 그리고 줄지어 가는 개미 떼의 행렬을 밟지 않는다. 연구 대상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에 대한 경외심이리라. 재미있는 사실은 개미를 좋아하는 학자가 거미 공포증을 느낀다.

 

윌슨은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보호 구역은 절반이라도 그대로 두자고 제안한다. 인류는 자신이 자연의 주인이라고 자처하면서 끝없는 자연정복과 자기중심적 약탈을 정당화해왔고 이러한 과정을 진보로 규정했다. 윌슨은 ‘진보’라는 열매 속에 든 독성에 대해 주의를 환기한다. 인류의 탐욕에 의한 끝없는 자연 개발은 자연은 물론 인류의 존속까지 위협한다. 우리나라가 생물 종(種) 다양성이 풍부한 아프리카처럼 야생동물을 자연 상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국립공원이나 사설 보호구역을 만드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인간만의 지구가 아니라 모든 생물이 공존하는 지구임을 깨달아야 한다. 산업화, 도시화와 함께 자연에 대한 감성이 무디어지면서 자연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파괴되고 있는지를 느낄 수 없게 됐다.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생물이 ‘더 소중하거나, 소중하지 않다’라고 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두가 그 존재의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만약 더 소중한 생명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지 그렇게 판단하는 인간의 생각 속에만 존재한다.

 

 

 

 

 

※ 깜놀주의!

 

* 50쪽 : 동물 사체를 뜯어먹는 독수리 떼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

* 77쪽, 78쪽, 80쪽, 83쪽 : 거미를 클로즈업한 사진, 거미공포증이 있는 독자는 주의할 것.

* 86쪽, 96쪽, 100쪽, 103쪽, 124쪽, 143쪽 : 개미를 클로즈업한 사진

* 130쪽 : 작은 개구리를 잡아먹는 거미를 클로즈업한 사진

* 141쪽 : 밤나방 애벌레를 클로즈업한 사진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yo 2016-09-08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절한 cyrus님. 사진 있는 책마다 등장하는 ˝깜놀주의˝ 코너.

cyrus 2016-09-09 09:15   좋아요 0 | URL
제가 곤충 사진을 무서워해요. 밤에 혼자 이 책을 보다가 거미 사진에 깜짝 놀랐습니다. ^^;;

yureka01 2016-09-08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고 아프리카가서 사진 찍고 싶습니다..ㄷㄷㄷㄷ6^..

cyrus 2016-09-09 09:16   좋아요 0 | URL
그 꿈 꼭 이루셔서 사진집을 내셨으면 합니다. ^^

페크pek0501 2016-09-10 1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같은 사람은 조심해야겠군요. 티브이의 동물의 왕국 같은 프로를 보면
잔인하게 뜯어먹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는 다른 데로 고개를 돌리게 되더라고요.
기다렸다가 다시 봅니다.ㅋ

cyrus 2016-09-10 21:13   좋아요 0 | URL
피 튀기는 장면이 나오는 무서운 영화를 못 보는 사람도 있어요. 끔찍한 사진이나 장면 한 번 보고, 그게 머릿속에 남으면 후유증이 오래 가요. ^^;;
 

 

 

 

어젯밤 유성우가 쏟아져 내리던 하늘을 보지 않았다. 옥상에 올라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집 주변에 가로등과 건물 사이로 흐르는 빛의 세기가 강했다. 하늘 위로 뻗은 도시의 빛 때문에 유성우를 맨눈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나는 밖에 나가지 않고 오랜만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펼쳤다. 그 책에 재미있는 일화가 나온다.

 

 

 

 

 

 

 

 

 

 

 

 

 

 

 

 

 

 

세이건이 천문대에 일했을 때 겪은 일이다. 야간 근무 중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그가 전화를 봤자 술 취한 아재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천문학자 바꿔 봐!” 세이건이 자신이 천문학자라고 대답하자, 아재는 하늘에 이상한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세이건은 그 시간에 혜성이 지나가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재가 본 것은 혜성이라고 알려줬다. 아재가 혜성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세이건은 지름이 1km 넘는 눈 덩어리라고 설명했다. 한참 동안 수화기에 침묵이 흘렀다. 아재가 말했다. “진짜 천문학자 좀 바꿔 봐!”

 

혜성은 먼지와 얼음덩어리로 되어 있다. 혜성이 태양에 근접해서 오면 먼지와 얼음덩어리가 태양의 열에 녹기 시작한다. 그래서 혜성이 지나간 자리에 혜성에서 나온 물질이 남는다. 그 물질이 대기권으로 들어오면 유성이 된다. 요즘 혜성과 유성우 관측 시간을 언론으로 접할 수 있다. 천문대에 직접 전화를 걸지 않아도 된다. 언론이 알려준 관측 시간에 맞춰 밤하늘에 바라보면서 기다리면 된다. 언론이 유성우 쇼가 펼쳐진다는 식으로 보도하는 바람에 화려한 밤하늘을 기대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유성우가 잘 보이는 천문대로 찾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기대했던 것만큼 유성우가 보이지 않아서 실망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천문대 관계자는 시골이 관측하기 좋은 장소라고 말하자 허탈감에 빠진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천문대가 유성우를 관측하기 좋은 장소라고 믿고 찾아온 사람들이 시골에 가서 보라고 말하는 천문대 관계자의 태도에 화가 난 것이다. 이에 대해 천문대 관계자는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몰려들어서 안전을 위해 가로등을 끌 수 없었다고 해명했다. [링크]

 

유성우를 맨눈으로 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몇 분에 하나씩 스쳐 가는 유성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밖에 없다. 이번에 내린 유성우는 시간당 수백 개까지 내리는데, 엄청 많이 내리면 수십만 개 정도에 이르기도 한다. 그래서 천문학자들은 대기권으로 향하는 유성우의 수가 많으면 유성우 쇼라고 빗대어 표현한다. 그들은 유성우를 간절하게 보고 싶은 사람들을 낚으려고 거짓말하지 않는다. 사실 유성우가 어느 정도 내리는지 정확히 예측하기도 어렵다. 낙하하는 우주 물질은 태양과 주변 행성의 중력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특정 시점에 어느 위치에 떨어지게 되는지를 정확히 계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혜성이나 소행성도 마찬가지다.

 

유성우 쇼를 보지 못한 실망감에 천문대에 전화 걸어 화를 내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다. 천문대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에 들어가서 천문대 관계자들을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워서 비난하는 의견을 남기는 사람들도 없었으면 좋겠다. 부끄러운 행동이다. 새벽까지 인공 불빛이 번져있는 도시에서 유성우를 본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언론은 유성우 관측의 어려움을 제대로 알리지 않고, 마치 손쉽게 볼 수 있는 것처럼 보도한다. 그들이 천문학자에게 자문한다고 해도, 결국은 대중이 이해하기 쉬우면서 많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알린다. ‘화려한 유성우 쇼라는 과장된 표현을 써가면서 사람들의 기대감을 높인다.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은 유성우의 등장에 사람들은 크게 실망한다. 사람들은 유성우를 보지 못한 이유가 가까이에 있는데도 잘 모른다. 도심의 등잔 밑이 어둡기 때문이다.

 

 

 

[링크] [“별똥별 보러 천문대 오라더니, 다시 시골로 가라고?”] 연합뉴스, 201681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곰곰생각하는발 2016-08-13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예 볼 생각을 안 했씁니다. 빛 공해를 피해서 빛이 없는 공간을 찾아야 하는데 도시에서 그게 가능한가요... 어디..서울시 쌍문동에서 유성우 보겠다고 하늘 쳐다보는 거는 좀.... ㅎㅎ

cyrus 2016-08-14 06:26   좋아요 1 | URL
영화나 드라마에는 도시 밤하늘에 별이나 유성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나오잖아요. 그 장면을 믿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