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는 우리의 면역계가 약해지는 순간에 불청객으로 찾아와 괴롭힌다. 제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살다 보면 피해갈 수 없는 것이 감기다. 대개 견뎌내기도 하고 시간이 흐르면 낫기도 한다. 나는 몸살 기운이 있으면 병원에 가는 대신 따뜻한 물을 마시거나 비타민 C가 함유된 과일을 섭취하면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몸을 따뜻하게 해서 일찍 잠을 청했다. 그렇게 해서 하루 푹 자고 나면 몸살 기운이 사라졌다. 하지만 우습게 여겼다가 심각한 후유증과 합병증으로 고생할 수 있다. 이번 달에 감기, 아니 독감의 위력에 아주 호되게 당했다.
감기는 코나 목의 점막이 다양한 종류의 바이러스에 감염돼 일어나는 급성 염증성 질환이다. 따라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의해 감염되는 독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감기는 일반적으로 콧물, 기침, 발열 증상 등이 나타나다가 1주일 정도 지나고 나면 가라앉는다. 반면 독감은 몸속에 침투한 바이러스가 활발히 복제하는 잠복기가 시작되면 발생한다. 이때 고열과 두통이 동반되고, 심하면 근육통도 생긴다. 고통스러운 전신 증상이 지속하면 폐렴과 같은 합병증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나는 근육통에 가까운 증상이 오지 않았지만, 며칠 동안 식욕이 떨어졌고,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몸을 가누기 힘들었다. 하필 독감 증상이 목요일부터 생기는 바람에 금요일 하루 동안 직장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버거웠다. 토, 일요일 내내 집에 누워 있었다. 그날 진짜 이불 밖이 위험하다는 걸 몸으로 느꼈다.
독감은 매년 약간씩 다른 균주들이 지역별로 유행하나 드물게 새로운 인플루엔자 바이러스가 전 세계적으로 퍼질 때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18년부터 3년 동안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이다. 독감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들이 바이러스를 묻혀와 미국에 퍼뜨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도 스페인 독감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유행 초기 스페인에서 사망자가 대량 발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페인 독감은 중세의 흑사병보다 더 무섭다고 했다. 8개로 이루어진 바이러스 유전자가 불안정한 구조여서 매년 변종이 나타나기 때문에 독감을 가장 효율적으로 예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백신 접종이다. 예방주사의 효력이 1년밖에 지속이 안 되므로 매년 접종을 받아야 한다.
독감은 치료제가 있는 반면, 감기는 아직 치료제가 없어 환자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한다. 환자들은 그럴 때마다 습관적으로 약물을 복용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하지만 이는 바람직스럽지 못한 습관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일반적으로 약국에서 판매되는 종합감기약에는 항히스타민제, 혈관수축제, 해열제 등 각종 약물이 들어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증상을 완화하는 것일 뿐 근본적인 치료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약을 자주 먹게 되면 인체의 내성을 키우게 되고, 정작 필요할 때 약을 복용해도 약효가 지속되지 않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인간은 각종 바이러스에 노출된 상태로 살아가고 있다. 과학자들은 앞으로도 바이러스를 퇴치하거나 인체의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반면에 바이러스도 마찬가지다. 특히 감기 바이러스는 리노바이러스(rhinovirus), 아데노바이러스(Adenovirus), 파라인플루엔자(parainfluenza) 등 수백 가지인데다 이들은 끊임없이 변신한다. 미국의 과학 저널리스트 칼 짐머는 인류가 리노바이러스를 과소평가하기 때문에 며칠 만에 치유할 수 있는 감기를 불치병으로 인식한다고 주장했다. 비단 리노바이러스뿐이겠는가. 우린 바이러스가 어떻게 감기를 유발하는지 잘 모른다.
인간은 오로지 자기 복제를 위해 무차별로 인체를 공격하는 바이러스에 취약하다. 바이러스가 인체에 침투하고, 나아가 인간 사이의 전염이 가능할 정도로 변이를 일으키면 심각한 위협이 된다. 바이러스는 인류에게 해롭기만 한 존재일까. 칼 짐머는 바이러스가 없으면 인류는 존재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바이러스는 산소의 상당 부분을 생산하며 지구의 기온을 조절하는 데에도 필요한 존재다. 바이러스는 파괴하는 자와 구원자의 모습을 동시에 가진 야누스 같은 존재다. 인류의 삶을 파괴하기도, 생명 활동을 돕기도 한다. 숙주인 사람과 우리가 병원체로 생각하는 바이러스가 공존하는 것도 하나의 자연 질서다.
감기 바이러스는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둘러싸여 있고, 계속 우리 몸에 침투하고 있다. 감기에 걸리고 걸리지 않음은, 바이러스가 아닌 몸의 면역력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래서 나는 감기에 걸리면 감기약을 먹지 않는 편이다. 알고 보면 감기는 단순한 질병이면서도 내 몸의 변화를 감지하여 면역력이 약해졌음을 알리는 경고 신호가 된다. 이럴 때 약을 의지하기보다는 면역력이 회복될 수 있게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다. 야근과 주말근무를 당연하게 여기는 헬조선식 근로문화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감기는 불치병으로 매년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 지나 콜라타의 《독감》은 1999년에 출간되었고, 2003년에 국내에 번역되었다. 지나 콜라타는 스페인 독감을 일으킨 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독감》을 집필했다. 이 책이 출간되고, 4년 뒤 국내에 소개되는 동안 스페인 독감의 원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도 독감이 인류에 미친 영향을 소개하는데 이만한 책은 없다. 2005년, 스페인 독감은 A형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의 변형인 ‘H1N1’으로 밝혀졌다. 우린 이 바이러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해도, 너무나도 친숙한 녀석이다. 2009년에 유행했고, 우리나라에서는 ‘신종 플루’로 알려진 그 녀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