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윈 이후 사이언스 클래식 14
스티븐 J. 굴드 지음, 홍욱희.홍동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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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자적인 광인은 적어도 재미있기라도 하지만

시대에 뒤떨어진 고루한 인간은 오직 가엾을 뿐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 [1]

 

 

 

진화론인가, 창조론인가. 이 해묵은 주제는 잊을만하면 등장한다. 창조론은 성경의 기록에 근거해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것이고, 진화론은 처음 하등동물에서 시작해 점점 인간의 형상으로 됐다는 것이다. 19세기 전반만 해도 창조론이 대세였다. 창조론의 대표적 이론가인 영국 신학자 윌리엄 페일리(William Paley)는 동물의 눈을 시계에 비유하고 시계의 설계자가 있는 것처럼 눈의 설계자가 반드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주장한 설계자는 하느님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고도의 능력을 갖춘 어떤 존재, 즉 신의 설계 때문에 탄생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창조론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진화론을 내놓으면서 창조론은 흔들리게 된다. 이후 진화론을 뒷받침하는 이론들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고 창조론자들은 숨을 죽여야 했다. 인류의 기원을 화석이나 DNA 분석을 통해 추적하는 과학적 방법에 종교적 세계관이 힘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진화론자와 창조론자 간 대결에 주저 없이 나선 학자이다. 그는 창조론이 과학적 · 논리적 허구를 교묘히 감춘 주장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2002년 굴드가 타계한 이후에도 창조론자들은 대대적인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 복음주의 기독교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는 미국 일부 지역에선 성서를 문자 그대로 따르는 과학적 창조론자라고 부르는 그룹이 등장하면서 진화론에 대한 공세를 펼친다.

 

진화론과 창조론자들의 전투는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국정 교과서 논란이 연일 화제가 되다 보니 일부 기독교단체가 생물 교과서에서 진화론 부분을 개정 · 삭제해 달라는 요구한 사실이 덜 알려졌다. 게다가 한 번도 아닌 몇 년 전부터 꾸준히 요구해왔다. 굴드는 1940년대에 진화 이론의 핵심이 본격적으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고 봤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너무 한참 멀었다. 생물 교과서가 진화 이론의 핵심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으면, 학생들이 진화 이론을 제대로 배울 기회가 줄어든다. 이 틈을 타 ‘한국창조과학회’ 소속 종교인 및 학자들은 중·고등학교 생물 교과서에 진화론과 함께 창조론도 수록하도록 교과서 개정 운동을 펼치고 있다. 현재의 양상은 여전히 창조론이 득세하던 1920~1930년대 상황과 유사하다.

 

역사뿐만 아니라 기초과학을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성공적인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과거의 낡은 사고를 깨치고 나아가는 용기 있는 결단과 도전이 필요하다. 굴드가 필력과 토론으로 창조론자들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낡은 사고방식에 얽매인 ‘희망적인 사고’를 경계했다. 일부 진화론자는 진화와 진보를 동일한 의미로 이해했다. 그래서 인류의 진화가 희망적인 진보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다. 하지만 굴드는 진화와 진보를 혼동하는 진화론자들을 비판한다. 진화는 인류를 지구상의 완벽한 존재로 만들어준 특별한 현상이 아니다. 다윈도 진화와 진보를 혼동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회발전을 설명하려는 열망이 강한 진화론자들은 진화를 ‘발전의 원동력’으로 해석했다. 이게 바로 ‘적자생존’과 ‘약육강식’을 내세운 사회진화론이다.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진화의 개념은 ‘사회진화론’에 가깝다. 유럽 진보주의자들은 이 담론을 통해서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자로 변신했다. 《다윈 이후》는 온갖 오해와 핍박으로 곤욕을 치른 진화론의 역사를 보여준다. 그래서 이 책은 진화론에 대한 왜곡과 오해를 넘어 진화론의 세계관에 대해 진정한 이해를 돕는다는 점에서도 일독할 가치가 있다.

 

과학은 원인과 결과가 있는 학문이다. 또 여러 사람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수십 년 만에 혹은 수백 년 만에 새로운 이론이 탄생한다. 그래서 하나의 현상을 한 줄로 딱 설명하기가 불가능하다. 진화론을 설명하더라도 라마르크(Lamarck)의 용불용설, 라이엘(Lyell)의 지질학 이론, 그리고 멘델(Mendel)의 유전 법칙 등을 언급해야 제대로 된 개념을 전달할 수 있다. 결국 대중을 위한 과학서는 읽는 이로 하여금 복잡한 내용을 편안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다윈 이후》는 이미 폐기되어버린 사소한 이론에서 출발해 복잡한 이론을 설명하는 방식을 택했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해석은 오늘도 진화하고 있다. 이타주의에 대한 다윈주의적 해석이 논란에 휩싸이는가 하면 진화를 ‘본성’으로 설명하려는 진화심리학이 주목받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진화론자들 사이에서도 의견 충돌이 빚어진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 진화론을 허술한 이론으로 보는 것은 엄청난 착각이다. 의견이 다르더라도 진화론자들은 스스로 과학적인 검증을 주도하고 있다. 그만큼 진화론은 건강한 이론이다. 무조건적 믿음을 고수하는 창조론자들과 차원이 다르다. 이래도 진화론에 거부감이 느껴지는가? 굴드 사후 15년이면 이제 충분하지 않은가?

 

 

 

※ 서평 제목의 원문 :

“다윈 이후 100년이면 이제 충분하지 않습니까?” 1959년 미국의 저명한 유전학자 허먼 조지프 멀러가 볼멘소리를 했다. (《다윈 이후》 7쪽)

 

[1] 《다윈 이후》 2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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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1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21 17:50   좋아요 0 | URL
과학과 대립하는 종교를 비난하기보다는 종교가 진실인 것처럼 주장하는 비합리주의를 비판해야 합니다.

북프리쿠키 2017-03-2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러스님 다윈의 <종의기원> 출판사 추천좀 부탁드립니다.^^

cyrus 2017-03-21 17:58   좋아요 1 | URL
예전에 <종의 기원>을 해설한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이라는 책을 쓴 박성관 씨는 시중에 나와 있는 <종의 기원> 번역본 중에 제대로 된 번역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펴낸 시기가 2010년이고, 그 이후로 한길사의 <종의 기원> 번역본이 나왔습니다. 한길사 판본이 믿고 읽을 만한 책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 생각에는 <종의 기원> 완역본 읽기에 도전하기보다는 <종의 기원>을 충실하게 해석한 관련 도서 몇 권 읽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한길사 판본이 나오기 전에 ‘동서문화사’ 판본을 읽어봤어요. 솔직히 재미없었습니다. 한길사 판본으로 다시 도전해봤는데, 너무 지루해서 읽다가 포기했어요. 믿을만한 <종의 기원> 해설서가 몇 권 있습니다.

<How to read 다윈>, <종의 기원을 읽다>, <종의 기원 이펙트> 그리고 제가 앞서 언급한 박성관 씨의 책입니다. 정말 <종의 기원> 독서에 한 번 도전해보고 싶다면, 해설서 먼저 참고하는 것이 좋습니다.

2017-03-21 1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21 17:59   좋아요 1 | URL
제가 무교라서 머릿속에 깊이 박힌 종교적 신념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학자들도 검증 절차를 무시하면서까지 창조론을 옹호할 정도면 종교 신념의 위력이 무섭게 느껴집니다.

AgalmA 2017-03-21 17: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운동법칙 ˝무거운 것이 먼저 떨어진다˝를 갈릴레오가 깨기까지 2천년이 걸렸습니다. 그러나 갈릴레오와 뉴턴의 결정론적 세계도 확률을 제기한 양자역학이 나오기까지 300년 동안 독보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결정론적 세계관이 완벽히 깨졌느냐 아니잖아요. 과학자조차도 환원적이고 결정론적 세계관 믿는 사람들 많잖아요^^;
인류 역사에게 가장 오래된 이데올로기인 ‘신‘이 단 100년으로 깨질 수 있겠습니까ㅎ; 진화론은 역사를 통해 볼 때는 아직 어린 수준입니다. 비하가 아니라 그 역사적 기간으로 볼 때 사람들의 인지도와 신뢰도에서 아직까지 밀릴 수밖에 없다는 것. 안 믿겠다는 데 어쩔ㅎ;;
그렇다면 철저한 교육? 계몽?
<신의 입자>보면 리언 레더먼이 하버드를 졸업하는 학생들 강연에서 지구의 겨울과 여름의 차이가 왜 생기는지 물어보죠. 대부분 ˝태양이 가까워서?˝ 등으로 태양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지구 자전축의 기울기˝ 때문이라고 정확하게 말한 비율은 15% 남짓이었죠. 리언 레더먼은 무려 하버드가! 하면서 개탄ㅎㅎ 제가 이 일화를 가져온 건 교육, 관심, 노력 모든 게 총체적으로 맞물려가야 어떤 변화든 가능하다는 걸 말씀드리는 것.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죠.
유발 하라리가 그러더군요. 다윈의 진화론의 가장 뛰어난 점은 그 기원으로 신을 상정할 필요가 없다는 점. 동감입니다.

cyrus 2017-03-21 18:06   좋아요 2 | URL
Agalma님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죽고 나서도 진화론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ㅎㅎㅎ

다윈이 진화론을 발표한 시기가 1856년이니까 1940년대에 진화론이 제대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 어떻게 보면 행운일 수도 있겠어요. 그리고 스티븐 제이 굴드처럼 종교 도그마에 대항할 수 있는 학자들이 많았었죠. 이들 덕분에 어느 정도 창조론의 위세가 약화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굴드는 세상을 떠났고, 그의 역할을 대신할 새로운 학자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도킨스도 이제 고령에 접어들었고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신’이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힘들어질 것 같습니다. 점점 세계가 불안해질수록 종교에 의지하려는 심리가 생기니까요.

AgalmA 2017-03-22 01:44   좋아요 2 | URL
그즈음 다윈이 진화론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고 해도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가 진화론을 가지고 나왔을 겁니다. 즉 진화론은 반드시 나오고야 말 이론이었다는 거죠. 자본주의와 자유주의가 힘이 커지면서 낙후된 체체주의(규율, 교리, 원죄론 기타 등등)로 변질된 종교는 힘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교의 성질상 멸절하진 않을 거고 이것도 하나의 수순인 거죠.
약화됐다 해도 신과 종교가 왜 지금까지 굳건하겠습니까. 인간은 진화론이라는 ‘사실‘보다 ‘의지‘할 게 더 필요한 나약한 존재입니다. 니체가 초인 얘길 멋부리려고 했겠습니까. 인간의 그런 점을 간파한 거죠. 합리론이니 경험론이니 인간이 왜 그런 지적 체계를 구축해겠습니까. 팩트 팩트 따지는 지금 세태 보세요. ‘사실‘ 또한 우리의 의지처이며, 우리의 속성입니다. 종교도 여러 ‘사실‘을 끌어와 ‘신‘으로 설명하면 그만입니다. 아무리 다른 사실을 들이댄들 인류가 멸망할 때까지 신을 믿는 사람은 있을 겁니다. 종교의 ‘자유‘도 인권이잖아요. 암요.
문장이 좀 격앙되어 있는데 cyrus님께 따지는 건 아님^^; 제가 보기엔 그렇다라는 제 의견임.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해 대재앙을 일으킬 가능성은 실제로 얼마나 될까? 이에 대한 천문학자들의 대답은 지금까지는 ‘충돌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계속 주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실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공상과학영화 속의 얘기만은 아니다.

 

 

 

 

 

 

 

 

 

 

 

 

 

 

 

 

 

 

 

 

 

 

 

 

 

 

 

 

 

 

 

 

 

 

 

 

 

 

 

 

 

 

* 칼 세이건 《코스모스》 (사이언스북스, 2006)
* 칼 세이건 《혜성》 (사이언스북스, 2016)
* 다치바나 다카시 《21세기 지의 도전》 (청어람미디어, 2003)
* 게릿 L. 슈버 《대충돌》 (영림카디널, 2004)
* 콜린 윌슨 《세계의 불가사의 1》 (간디서원, 2004)

 

 

 

1908년 시베리아 퉁구스카(Tunguska) 지역의 원시림 위로 불덩어리가 떨어졌다. 정체불명의 폭발로 인해 약 2,000㎢의 숲이 완전히 타버렸다.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 1,000개가 폭발하는 것과 맞먹는 충격이었다. 미제로 남은 ‘퉁구스카 폭발 사건’은 지금도 여전히 소행성과 혜성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관심사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건임에도 우리나라에 퉁구스카 사건의 경위를 소개한 책이 많지 않다. 내가 알아본 바로 칼 세이건(Carl Sagan)의 《코스모스》의 4장, 다치바나 다카시(たちばなたかし)의 《21세기 지의 도전》, 게릿 L. 슈버의 《대충돌》 그리고 콜린 윌슨(Colin Wilson)의 《세계의 불가사의 1》이 전부다. 《혜성》에는 퉁구스카 사건을 조금만 언급했다. 칼 세이건과 다치바나 다카시는 퉁구스카 사건의 원인 가설들을 과학적으로 검증했다.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퉁구스카 대폭발의 이유를 ‘운석 충돌’이라 설명했다. 즉, 수십 미터 크기의 운석이 지구로 떨어지면서 일으킨 폭풍 때문에 그 같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폭발 지점에는 거대한 구덩이가 생기지 않았다. 정말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운석이 땅에 떨어졌다면, 미국의 애리조나 운석구덩이(Meteor Crater)와 같은 거대한 접시 모양의 흔적이 남아야 했다.

 

칼 세이건은 ‘혜성의 조각’이 지구와 충돌했다는 가설을 지지한다. 퉁구스카의 대폭발은 정확히 1908년 6월 30일에 일어났다. 매년 이 날을 기점으로 유성우가 떨어진다. 이때 지구는 앵케 혜성(Encke’s Comet)의 궤도에 지나게 된다. 혜성과 유성우가 충돌하면서 떨어져 나간 혜성의 조각이 퉁구스카에 추락했을 가능성이 있다. 소행성은 지구의 대기권에 진입 · 통과하면 속도가 감속되고, 대기권의 공기층에 의한 마찰열로 인해 분해된다. 불에 타오르면서 지구에 떨어지는 자잘한 부스러기가 운석이다. 그러나 대기권을 통과하는 혜성의 조각이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땅에 충돌할 때 지진과 유사한 엄청난 충격이 일어나고, 삼림을 한 번에 다 태워버린다. 혜성의 조각은 얼음 덩어리로 이루어졌다. ‘거대한 불덩어리’로 변하는 과정에서 얼음 덩어리가 녹아버렸기 때문에 엄청난 충돌에도 땅에 구덩이가 생기지 않는다. 러시아의 과학자들이 퉁구스카 폭발 현장을 조사하면서 미세한 다이아몬드 알갱이를 발견했다고 한. 이 다이아몬드 알갱이는 혜성과 운석 물질을 이루는 구성 성분으로 추정할 수 있다.

 

또 다른 가설은 ‘UFO 충돌설’이다. 과학적으로 명확히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에 ‘운석 및 혜성의 조각 충돌설’에 완전히 밀린 가설이다. 칼 세이건과 다치바나 다카시도 코웃음 치는 가설이다. 상상력에만 너무 의존하는 사람들이 ‘UFO 충돌설’을 선호한다. 우리보다 월등히 수준 높은 외계 지적 생명체가 탑승한 우주선이 지구의 대기를 지나갔다. 그런데 우주선이 고장 나는 바람에 퉁구스카에 추락했다. 과학소설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다. 일단 우주선의 일부로 보이는 잔해가 발견되지 않았다. 콜린 윌슨은 ‘혜성의 조각 충돌설’에 동의하면서도 공중에 폭발한 물체의 정체가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별에 날아온 우주선일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역시 오컬트에 심취한 작가다운 주장이다.

 

 

 

 

 

며칠 전에 퉁구스카 사건에 관한 자료를 모으는 중에 흥미로운 보도 기사 한 건을 발견했다. 그 보도 기사에는 러시아 과학자들이 퉁구스카 폭발 현장에서 UFO 잔해를 발견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게 정말 사실이면 가장 신빙성이 높은 ‘운석 및 혜성의 조각 충돌설’은 폐기된다.

 

그런데 뭔가 수상하다. 러시아 과학자들이 발견한 잔해가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이란다. UFO를 믿는 사람들은 이것만 듣고도 흥분하겠지만, 회의주의자들은 그걸로 만족하지 않는다. 외계 우주선 잔해 말고도 ‘50kg에 달하는 암석’을 발견했다고 하던데, 아마도 국내 기자가 ‘운석’을 ‘암석’으로 잘못 적은 것 같다. 설마 그럴 리 없겠지만, 기자가 ‘운석’을 몰라서 ‘암석’으로 고쳐 썼을 수도 있다. 아무튼 ‘50kg의 돌덩어리’라면 그리 적지 않은 무게이다. 이 정도 무게이면 맨눈으로 확인 가능한 크기이다. 그런데 1926년부터 총 여섯 차례에 걸쳐 현지 조사를 진행했던 레오니드 쿨리크(Leonid Kulik)는 폭발 현장에 운석 부스러기조차 발견하지 못했다. 1958년 이후에 재개된 현지 조사에서도 운석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주선의 잔해와 ‘50kg에 달하는 암석’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신뢰가 가지 않는다.

 

2004년 이 보도 이후로 우주선의 잔해와 ‘50kg에 달하는 암석’의 실체를 규명한 새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아마도 ‘오보’일 가능성이 있다. 러시아 과학자들의 발견을 처음 보도한 언론이 인테르팍스 통신(Interfax, Интерфакс)이다. 이 언론사는 러시아 최대의 민영통신사인데, 오보율이 높다고 한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간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혜성의 조각 충돌설’을 반박한다. 얼음 덩어리로 된 혜성 조각이 폭발 지점으로 추정되는 상공의 7,000Km 지점에 떨어지기 전에 이미 녹아 분해되었다고 주장한다. 듣고 보니, 그럴싸한데? 녹아버려 거의 분해되기 일보 직전인 혜성 조각이 ‘거대한 불덩어리’가 될 수 없게 되고, 충격의 힘도 약해진다.

 

칼 세이건은 구소련 시절에 활동한 러시아 과학자들의 조사 결과를 인용했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외국 과학자들의 조사 결과만 확인한 것이 아니라 퉁구스카에 거주하는 몽골계 소수 민족 에벤키족(Evenki, 과거에는 ‘퉁구스족’이라고 불렀다)의 후손들에게 전해 내려온 폭발 사건 당시의 증언까지도 채록했다. 발품 들여 조사해서 검증한 다치바나 다카시의 분석에 당연히 신뢰할 수밖에 없다.

 

1908년 퉁구스카에 살았던 에벤키족이 대폭발을 가까이에서 본 목격자이다. 그리고 정확히 집계되지 않았으나 대폭발의 충격으로 적지 않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에벤키족은 폭발이 일어난 퉁구스카 현장을 자신들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으로 여긴다. 그래서 러시아 당국은 현지 조사 진행에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 또 그들이 소수 민족이라는 이유로 퉁구스카 폭발로 사망한 에벤키족의 희생자 수를 집계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외국에서는 퉁구스카 사건이 지구 멸망을 초래할 뻔했지만, 희생자가 단 한 명도 없는 ‘역사상 최악의 행운’(《대충돌》 174쪽)으로 소개한다.

 

 

 

 

 

칼 세이건은 에벤키족을 ‘미개한 퉁구스족’(《코스모스》 165쪽)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예기치 않은 자연재해로 그 자리에 사망한 에벤키족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수 있다. 하지만 ‘미개한’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그의 표현에 어폐가 있다. 에벤키족은 특정 지역을 나타내는 지도를 나뭇잎으로 직접 만들 정도로 뛰어난 지리학 지식을 가지고 있다.

 

 

 

 

 

칼 세이건과 다치바나 다카시 같은 지성(知性)들이 왜 백 년이나 지난 폭발 사건에 관심을 가지는 걸까. 그리고 나는 왜 생뚱맞은 주제를 들고 나와 뭐 이리 길게 쓰고 있을까. 당연히 알아두면 좋은 내용이라서 썼다.

 

《21세기 지의 도전》의 독자 서평 중에는 이 책에 퉁구스카 폭발에 대한 내용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 독자는 퉁구스카 사건을 한낱 사라져버리는 ‘나무 한 그루’ 정도로 봤다. 그렇지만 남들과 다른 안목을 지닌 칼 세이건과 다치바나 다카시는 이 사건을 지구 생존 여부에 직결된 ‘나무 전체’ 수준으로 봤다. 퉁구스카 사건은 과학 교과서에 실을 만한 흥미로운 내용이다. 학생들은 이 사건을 접하면서 혜성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다.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하는 과정과 이유를 알게 되면, 말도 안 되는 ‘종말론’에 빠질 우려가 없다. 퉁구스카 사건을 공부하면서 자연스럽게 ‘검증, 또 검증하는’ 회의주의 방법론을 체득하게 된다.

 

칼 세이건의 4장 끝부분에 ‘지구는 참으로 작고 참으로 연약한 세계’라고 썼다. 다치바나 다카시도 퉁구스카에 다녀온 이후로 ‘푸른 별이 처해 있는 환경적 위험성’을 걱정했다. 우리는 과학이 발달하고, 여기에 투자 가능한 돈만 들인다면 거대한 혜성의 지구충돌도 예방할 수 있다고 낙관한다. 과학 산업이 튼튼한 강대국들이 그렇게 나서서 해주면 고마울 텐데, 정작 그들은 국가 예산을 엉뚱한 데 쓰고 있다. 힘 있는 국가들이 군사 강국이 되기 위해 지금도 생명 살상 무기와 ‘핵무기’가 만들어지고 있다. 핵무기가 터질 확률이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할 확률보다 높아 보인다. 종말론을 믿는 사람들 절반이 정신 차려서 ‘반핵 운동가’로 변신하면 좋겠는데, 이 확률도 희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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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eka01 2017-03-09 23:3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 당장이라도 딮 임펙트 같은 현실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은 없죠...우주에 수많은 별과 행성들의 명멸은 흔한 일상은 아닐까 싶습니다.

cyrus 2017-03-10 10:49   좋아요 0 | URL
네, 지금도 저 먼 우주에 소행성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을 겁니다. 지구 밖의 세계에 시야를 넓힌다면, 별의 일생이 우리 일생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요. 별은 항상 같은 자리에서 반짝거리지 않습니다.

레삭매냐 2017-03-10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일전에 저희 회사 이사님하고 테슬라와 관련되어
이야기했던 에피소드네요...

음모론에 심취하신 저희 이사님은 테슬라의 비밀시험
이었다는 주장을 하시더라구요 ㅋㅋ

cyrus 2017-03-11 09:45   좋아요 0 | URL
폭발 사건에 대한 원인 가설이 수백 개나 나왔다고 합니다. 이 중에 대다수는 안 봐도 되는 황당한 내용입니다. 회사 이사님이 믿고 있던 테슬러의 비밀시험 설도 그 중 하나겠어요. ^^;;
 

 

 

 

 

 

 

 

 

 

 

 

 

 

 

 

 

 

* 김훈 《공터에서》 (해냄, 2017)

 

 

 

생각보다 오래가지 않았다. 김훈의 《공터에서》에 둘러싼 논란 말이다. 이 소설을 안 읽어 본 사람들도 안다. 유아 성기를 묘사한 소설의 문장이 문제라는 사실을.

 

북청(北靑)에서 흥남에 이르는 해안 도로에 피난민들이 가득 차서 흘러갔다. 이도순은 머리에 쌀 한 말을 이었고, 신혼의 남편이 돌 지난 딸을 업었다. (중략) 아기가 남편의 등에서 오줌을 쌌다. 남편이 처네를 풀었다. 이도순은 보따리에서 기저귀를 꺼냈다. 딸아이의 작은 성기가 추위에 오므라져 있었는데 그 안쪽은 따쓰해 보였다. 거기가 따뜻하므로 거기가 가장 추울 것이었다. 젖은 기저귀에서 김이 올랐다.[1]

 

어떤 독자들은 이 문장을 보자마자 불편하다고 느꼈다. 특히 김현 시인은 ‘딸아이의 작은 성기’에 대한 묘사가 남성 중심적 시각이 반영된 관음증적 시선이라고 주장했다.[참고1] 그런데 이 문장을 남성 중심적 · 관음증적 시선이 빚어낸 최악의 표현으로 규정하는 비판의 근거들이 빈약해 보인다.

 

관음증은 남을 몰래 훔쳐보는 행위이다. 인간은 사회를 조직하고 집단생활을 하다 보니 개개인의 원시적 본능은 억제되어야만 했다. 남의 눈 때문에 억압되어 온 감정이 다른 사람의 사생활을 몰래 들여다보면서 해방감으로 전이돼 나타나는 것이 관음증으로 나타난다. 더욱 감춰질수록 관음증적 시선을 더 자극하는 법이다. 김훈이 묘사한 ‘딸아이의 작은 성기’는 감춰진 상태가 아니다. 이도순은 딸아이의 기저귀를 갈다가 그 신체 부위를 보게 된다. 딸이든 아들이든 신생아의 기저귀를 갈 때마다 어머니는 아기의 성기를 자주 볼 것이며,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살펴볼 수도 있다. 부모가 기저귀를 가는 도중에 아기의 성기를 흘끗 보는 것만 가지고 아이의 성기를 ‘성적 대상물’로 바라본다고 규정할 수 없다. 그리고 여자의 성기를 묘사한다고 해서 ‘성적 수치심’을 유발하는 문장으로도 볼 수 없다. 문장에 대한 지나친 과잉 반응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한다.

 

 

 

 

 

 

 

 

 

 

 

 

 

 

 

 

* 나탈리 앤지어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문예출판사, 2016)

 

 

나탈리 앤지어(Natalie Angier)의 책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나탈리 앤지어의 어머니는 친구의 어린 딸(이름은 수전)의 기저귀를 가는 중에, 어린 딸의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클리토리스를 보게 된다. 그 문장을 인용하겠다. 이 문장을 읽는 분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내가 아기였을 때, 어머니는 친구에게 자기 어린 딸을 좀 봐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딸을 수전이라고 부르자. 어머니는 신생아인 나 말고도 더 큰 딸이 있었으므로, 여자아기의 생식기가 어떻게 생겼는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수전의 기저귀를 갈아주다가 음순의 동그란 둔덕 사이로 삐쭉 튀어나와 있는 클리토리스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것은 음경 같지는 않았다. 내 어머니에게는 아들도 하나 있었기 때문에 아기 음경이 어떻게 생겼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여자아기의 것이라고도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코끝이나 새끼손가락처럼 보였고, 어머니가 천으로 닦아내자 당혹스러우면서도 신기하게도 약간 단단해졌다. 어머니는 수전의 두드러지게 튀어나온 클리토리스 모양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기 딸들을 생각했고, 토실토실한 외음부 안에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 만지면 느낄 수 있는 클리토리스가 깔끔하게 들어가 있는 자기 딸들의 생식기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2]

 

 

수전의 클리토리스를 자세히 묘사한 장면을 보고 불편한 감정을 조금이라도 느꼈는가. 정말 조금이라도 불쾌하게 생각했다면, (공개든 비밀이든) 댓글에 남겨주시라. 아! 덧붙여 말하자면, 나탈리 앤지어는 여성 작가이다.

 

성기가 따뜻해 보인다고 묘사한 문장도 성적인 자극을 불러일으킨다고 보기 어렵다. 이 문장이 정말로 외국에서는 ‘소아성애증(pedophilia)’으로 신고당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소아성애증은 사춘기 이전의 아이에게 성적 감정이나 성적 매력을 느끼는 증상이다. 소아성애자가 아무런 성적 의도가 없는 이 문장에서 성적 흥분을 느꼈다면 작가는 이 문장에 향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 문장이 ‘소아성애증’을 유발하는 위험한 묘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린 시절 자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SNS에 공개하는 부모를 먼저 비판하는 것이 현명하다. 어떤 부모는 아기의 알몸 사진이 귀엽다고 SNS에 공개하기도 하는데, 소아성애자의 표적이 될 수 있다.

 

 

 

 

성기는 신체 일부이며 당연히 주변 환경에 따라서 체온 변화가 나타난다. 추울 때 몸에 발산하는 열이 피부 표면 밑을 흐르는 혈액에 전해지면 그 피부 부위가 따뜻해진다. 여성의 성기는 온도 변화에 예민하다. 왜냐하면, 신경의 결합조직인 루피니 소체(Ruffini‘s corpuscle)가 체온을 감지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3]

 

 

 

 

 

 

 

 

 

 

 

 

 

* 김훈 《칼의 노래》 (문학동네, 2014)

 

 

《공터에서》 묘사 논란 때문에 《칼의 노래》의 ‘젓국 냄새’도 다시금 비판의 도마 위에 올랐다. 그 유명한(?) ‘여진의 젓국 냄새’이다. 여진은 이순신과 같이 밤을 보낸 여성이다.

 

그날 밤, 나는 두 번째로 여진을 품었다. 그 여자의 몸은 더러웠다. 그 여자는 쉽게 수줍음에서 벗어났다. 다리 사이에서 지독한 젓국 냄새가 퍼져나왔다. 그 여자의 입 속은 달았고, 그 여자의 몸 속은 평화로웠다. 그 평화에는 다급한 갈증이 섞여 있었다.[4]

 

작가는 전쟁통에 제대로 씻지 못한 여진의 불결한 상태를 여성의 질 냄새로 비유했다. 과학적인 사실을 근거로 이 문장의 문제점을 따져본다.

 

 

 

 

 

 

 

 

 

 

 

 

 

 

 

 

 *  옐토 드렌스 《마이 버자이너》 (동아시아, 2017)

 

 

정상인의 질 내는 pH3.6∼4.5로 약한 산성을 띤다. 이것은 주요 생식기관인 여성의 질을 보호하는 유산균 박테리아가 질 내에 살면서 계속해서 젖산을 생성, 산성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질이 다른 균에 감염되면 이 산성도가 깨져서 분비물이 많아지게 되고, 오래된 생선 냄새와 유사한 악취가 일어난다. 김훈의 ‘젓국 냄새’를 본 남성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여성이 질을 자주 씻지 않으면 지저분한 냄새가 나는구나.’ 이런 인식은 남자나 여자 모두에게 ‘여성의 질 냄새는 수치스럽고, 불결하다, 문란하다’는 편견을 심어준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친구나 아내를 위해 질 세척을 권하기도 한다. 특이한 질 냄새가 난다고 해서 여성의 질이 불결하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질 냄새가 생기는 원인은 다양하다. 남성과 성관계를 자주 할수록 여성의 질은 정액에 노출되는데, 질 내 미생물 보존 상태가 교란된다. 그래서 질에 생선 냄새가 나고, 심하면 질염이 생길 수 있다. 질 세척은 안 해도, 그렇다고 너무 자주 해도 질 냄새가 생긴다. 질 세척을 자주 하면 질 내 유산균 같은 이로운 미생물마저 죽인다. 질 세척을 자주 할수록 난소의 건강이 악화하여 난소암 발병률이 높아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참고2]  여자친구의 질에서 나는 생선 냄새를 맡는 게 죽어도 싫어도 섹스를 하고 싶은 남자들에게 유용한 충고를 한다. 여자친구에게 질 세척을 강요하지 말고, 섹스할 때 콘돔을 착용해라. 생선 냄새가 나는 것은 여자친구 잘못이 아니다.

 

사실 《공터에서》에서 읽으면서 내가 불편하게 느낀 묘사는 따로 있다. 양갈보는 미군을 상대하는 매춘부를 가리키는 은어이다. 그런데 참말로 신기하다. 《공터에서》를 비판하는 독자들은 왜 이 문장에서는 침묵하는 걸까. 《공터에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으면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인용 · 공유한 ‘딸아이의 작은 성기’ 같은 사소한 것만 보고 분노하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

 

마장세는 구두 통을 메고, 자석에 끌리듯이 미군과 양갈보의 뒤를 따라갔다. 꽉 조이는 스커트에 여자의 엉덩이가 도드라졌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엉덩이가 흔들렸다. 하얀 다리가 미군의 바짓가랑이와 보폭을 맞추었다. 아, 여자의 엉덩이는 왜 저렇게 도드라지는 것일까. 저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그 엉덩이는 꽃이 피듯이, 해가 뜨듯이 그렇게 명료하게 마장세의 눈앞에서 도드라져 있었다. 여자의 엉덩이가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라는 사실에 마장세를 놀랐다.[5]

 

 

 

 

 

 

 

 

 

 

 

 

 

 

 

* 데즈먼드 모리스 《털 없는 원숭이》 (문예춘추, 2011)

* 플로렌스 윌리엄스 《가슴 이야기》 (Mid, 2014)

 

이 문장이야말로 ‘남성 중심적 · 관음증적 시선’을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는 왜 ‘여자의 엉덩이’를 도드라진 ‘여성의 가슴’처럼 묘사한 것으로 느껴질까. 여성의 엉덩이를 남성을 위한 성적 신호로 묘사한 이 문장이 심각하다는 걸 느끼지 못한다면 데즈먼드 모리스(Desmond J. Morris)의 《털 없는 원숭이》 96쪽과 플로렌스 윌리엄스(Florence Williams)의 《가슴 이야기》의 2장 ‘젖가슴의 기원’을 꼭 ‘함께’ 읽어보시라. 플로렌스 윌리엄스는 여성의 가슴이 엉덩이를 모방한 성적 기호라고 주장하는 데즈먼드 모리스의 가설을 반박한다.

 

 

 

 

 

 

 

[1] 김훈 《공터에서》 95쪽

 

[참고 1] 『소설가 김훈, 신작서 ‘소아 성기 묘사’ 논란… “관음적 시선 불쾌”』 여성신문, 2017년 2월 13일

 

[2] 나탈리 앤지어 《여자, 그 내밀한 지리학》(《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 구판) 107쪽

 

[3] 옐토 드렌스 《버자이너 문화사》(《마이 버자이너》 구판) 56쪽

 

[4] 김훈 《칼의 노래》(2001년 구판, ‘생각의나무’ 출판사) 39쪽

 

[참고 2] 『질 세척 자주 하는 여성 난소암 위험 2배』 연합뉴스, 2016년 8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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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걀부인 2017-03-07 15: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이런 논란이 있었군요. 동의와 반대를 떠나 우리의 시선을 다시한번 재점검해야할 시기임을 느낍니다. 여성이 저 역시 남성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 기존의 틀 속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반성하거나 각성해야하는 지점들이 한둘이 아니거든요. 페미의 대세속에서 많이 배워야하는 요즘입니다.

cyrus 2017-03-07 20:58   좋아요 0 | URL
좋은 말씀입니다. 저는 남성 중심 사고가 반영된 언어, 그리고 시선들을 비판하는 일이 남성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교정의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yureka01 2017-03-07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로 논란 거리는 아닌 거 같은데요...
저도 딸아이 아기일때 기저귀 자주 갈았죠.
초딩때까지도 목욕을 시켰어요....

소설적 표현의 디테일이 관음증으로 까여야 하다니..ㅎㅎㅎㅎ
진짜 그런건 깔 게 아니고
좀더 큰 테마를 비평해야할텐데 말이죠...

사소한 것에는 까칠하게 까면서,
정작 중요한 담론에는 건들지 않더군요...

cyrus 2017-03-07 21:01   좋아요 1 | URL
김훈 작가가 다른 작가와 차별화하는 문장을 만들려는 욕심이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어떤 문장들은 빼도 되고, 아기 성기 묘사하는 내용도 그래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7 17: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왜 이게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나저나, 꼼꼼한 사이러스 님의 성의에 감동하고 갑니다..

이참에 이 포스트를 이달의 당선작으로 강력 추천합니다..

cyrus 2017-03-07 21:04   좋아요 0 | URL
아기 성기 묘사가 있는 문장을 근거로 작가의 반 페미니즘적 입장을 비판하는 리뷰를 봤어요. 김훈이 인터뷰에서 페미니즘을 경시하는 듯한 발언을 한 건 문제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문장까지 싸잡아 비난하는 것이 너무 억지스러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7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저는 김현 시인이 굉장히 비겁한 태도로 김훈을 공격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가 아마 괘씸하게 여겼던 부분은 한때 최고은( 아니다.... 최보은 기자였나 ? ) 하튼 그런 대화에서 여성을 비하하는 김훈의 생각이 담겨 있어서 꽤오랫동안 논란이 되었는데, 김현은 그것에 대한 화답처럼 느껴집니다 . 김훈의 신작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말이죠..

cyrus 2017-03-07 21:08   좋아요 0 | URL
그런 일이 있었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한국 소설을 안 읽는데다가 국내 문단에 소홀했거든요.

페미니즘을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김훈의 작품을 타당한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비판하면 좋은데, 그런 내용이 많이 나오지 않아서 아쉬워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03-07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털없는 원숭이 책에서 저도 저문장을 읽고나서 모리스 등신이구나,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제 글에 이 사람 비판한 것도 있는데... 엉덩이 형태가 가슴을 모방했다고.. 그런 바보같은소리가 어디있냐교.. ㅋㅋㅋ

cyrus 2017-03-07 21:09   좋아요 0 | URL
데즈먼드 모리스를 깐 곰발님의 글을 읽어보고 싶어요. 저보다 더 재미있게 깠을 것 같습니다. ^^

stella.K 2017-03-07 1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나도 작품을 안 읽어봐서 잘 모르겠지만
이게 왜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네.

이걸 가지고 문제를 삼을 것 같으면
하루키나 <롤리타> 같은 건 번역되지 말아야지.
1Q84 같은 경우 아오마메 부분은 여자잖아.
결국 하루키는 남자 작가아냐?
이렇게까지 노골적일 필요있나?
하루키는 변태는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지.
근데 하루키는 그냥 끝판으로 다 보여 주거든.
그렇다고 누가 욕하는 사람 없잖아.
중요한 건 김훈이 그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뭐냐는 거 아니겠냐?
전체를 보고 얘기해야지 단편적인 거 가지고 작가까지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건 좀 지양해야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꼭 본질 가지고 얘기 안하고 비본질 가지고 따지더라.
하긴 이러다 김훈도 뒤통수 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만...ㅋㅋ

cyrus 2017-03-07 21:15   좋아요 1 | URL
어떤 독자는 문제 있는 소설의 묘사에 반응하지 않는 다른 독자들을 욕하던데요. 보는 눈이 없다면서요.. ㅎㅎㅎ

저는 제 글에 대한 반론이 나올거로 예상했고, 기대했어요. 그런데 반응이 썰렁해서 제가 무안해지네요. 곰발님처럼 전투적이면서 시니컬하게 글을 썼어야 했는데.. ㅎㅎㅎ

분노의휘갈김 2017-03-07 20: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허나 마장세의 생각을 묘사하는 부분 마저도 마장세라는 인물을 전달하기 위한 서술일뿐 한쪽 성을 깔보는 인식이 드러난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cyrus 2017-03-07 21:18   좋아요 0 | URL
사실 마장세의 시선에 대한 묘사는 보는 사람들마다 반응이 다를 겁니다. 다만 페미니스트 입장에서는 여성의 신체가 남성의 구경거리가 전락한 묘사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transient-guest 2017-03-08 0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을 잘 뜯어보셨네요. 저는 글쓴이의 의도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똑같이 성행위묘사를 찍어도 하나는 에로가 되고, 아나는 멜로가 되잖아요. 무엇이든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하는건 안 좋은 것 같아요. 원론적인 비판 같은 것도 별로...비판하기 위해 존재하는 비판 같은거.. 참 싫죠...

cyrus 2017-03-08 08:58   좋아요 2 | URL
맞습니다. 이번 김훈 작가의 신작소설에 대한 악평 대부분은 과거 작가의 반 페미니즘 발언까지 언급하면서 비판한 내용이 많았어요. 과거 발언이 잘못된 건 사실이지만, 이걸 굳이 리뷰에까지 언급해서 책에 평을 하는 방식이 이해할 수 없었어요. 이건 리뷰가 아닙니다. 그냥 책이나 작가에 대한 감정적인 표현에 불과합니다.

북프리쿠키 2017-03-08 1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무실에서 계획서 검토해달라고 하면
전반적으로 내용을 봐야되는데
기껏 띄어쓰기나 오타 잡아내는 사람들이 있죠.

cyrus 2017-03-08 13:35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도 리뷰 쓸 때 정말 쓸 내용이 없으면 오타나 꼬투리 잡을만한 내용이 있는지 찾아봅니다.

레삭매냐 2017-03-08 14: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서 보고 싶지는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고 싶어 예약 신청을 했는데 자그마치
순번이 7번이나 되고, 전에 빌려간 사람이 2월
에 반납했어야 하는 책을 아직까지 끼고 있어서
언제나 읽게 될지 모르겠네요...

cyrus 2017-03-08 15:10   좋아요 0 | URL
레삭매냐님이 사는 곳, 서울의 도서관은 예약 대기자를 많이 받아주는군요. 대구 도서관은 무조건 예약 대기자는 2명으로 제한되어 있어요. 저는 운 좋게 대구시청 작은도서관에 있는 걸 대출예약해서 생각보다 빨리 읽을 수 있었어요. 레삭매냐님의 리뷰가 기대됩니다. ^^

건조기후 2017-03-09 18:1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젠더 문제는 결국 바로 그 젠더 문제이기 때문에 남성과 여성이 결코 하나의 지점에(는 커녕 비슷한 지점에조차도) 도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감하네요. 단지 여아의 성기 표현 하나때문에 분노하는 거라고 생각한다면 사안을 너무 단순하게 보시는 거예요. 그만큼 여성의 신체가 얼마나 함부로 표현되고 묘사되는지 문제의식을 갖지 못 할 만큼 익숙해져 있는 것이기도 하겠고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딱 두 가지만 말씀드리면, 우선 한국의 남성작가가 쓴 소설 <공터에서>와 여성이 쓴 과학도서인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를 비교하는 것은 대상이 잘못된 것 같습니다. 물론 소설분야에도 김훈 소설의 여성비하적 표현보다 더 심각한 책이 넘치고 넘치고 넘치겠지만 그 또한 비교할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무언가가 불쾌하고 불편해서 문제를 제기할 때 ˝이 보다 더 심한 사례도 있는데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핵심을 비껴간 비겁한 대응이라고 생각합니다. 갓난아기를 성적 대상화했다는 비판을 하기 위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성적 묘사와 표현을 조사하고 연구해서 아 이 정도면 비판할만 하구나, 결론을 내린 이후에야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김훈의 문장이 불쾌하다는 것이 다른 건 괜찮다는 의미가 아닌데요.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딸아이의 기저귀를 갈면서 성기를 보고 안쪽은 따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성들의 보편적인 정서가 아닙니다. 아기 엄마가 딸아이 질 안쪽이 따뜻할 거라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자기는 물론 딸아이든 누구든 질 안쪽이 따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지 않아요. 그것은 질에 삽입하는 사람의 느낌이고, 이도순이 딸아이를 보는 시각이 아니라 김훈이 여자 아기를 보는 시각입니다. 소아성애적이라고 비난하는 이유입니다. ‘관음증적 시선‘이라고 표현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여성의 심리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관심이 없는 작가가 이도순의 눈을 빌어 은밀하게 아기의 성기를 감상하는 것이 관음증적이라는 뜻입니다. 성기를 몰래 본 게 아니고 드러내놓고 봤으니 관음증이 아니라니 ;; 관음증이라는 단어를 너무 단순하게 지시적 의미로만 받아들이시는 것 같습니다.

설사 아기의 질 안쪽이 따뜻하다고 생각하는 여성이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김훈이라는 작가가 그렇게 여성 캐릭터를 세밀하게 그리는 작가가 아니라는 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세밀하게는 커녕 지금까지 일관되게 젓국, 생리혈 등등 여성의 존재의미를 오로지 질이라는 신체기관 하나에만 국한시켜왔던 작가입니다. 성적 욕구를 충족하는 대상이거나 생명을 잉태하는 도구로서의 여성 이외에 여성이 한 인간으로서 갖는 가치관이나 심리에는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작가가 딸아이의 성기를 바라보는 애 엄마의 감정이랍시고 작가 본인이 여성의 질을 바라보는 눈으로 표현하니까 역겹고 어처구니가 없는 겁니다.

김훈의 과거 인터뷰가 저 문장에 대한 비난을 증폭시켰던 것은 사실이고, 책에 대한 비판과 인터뷰에 대한 비판이 혼재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런 여아 성기 묘사의 문제에 있어서 그가 실제로도 지독한 성차별주의자라는 사실을 완전히 배제하고 생각할 수 있나요? 작가의 가치관이나 성향을 작품과 별개로 봐야할 경우도 있지만 작품이라는 게 결국 작가 내면세계의 정수를 담은 결과물이기에 결코 따로 볼 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을 폄하하고 혐오하는 성차별적 사고방식을 가감없이 드러낸 작가의 인터뷰를 비판하는 것이 책 속의 성적 표현을 비난하는 것과 다르다고 보진 않습니다. 겹치는 부분이 있으니까 겹쳐지는 게 당연한 겁니다.

책을 읽지도 않았으면서 캡처된 문장 하나로 침소봉대하는 것이 아니라 저 문장 하나만으로도 읽기가 싫은 기분을 결코 이해하지 못 하실 것 같습니다. 욕을 하더라도 읽어나보자 하고 여러 번 시도를 해봤지만 정말 책을 만지기조차 싫더군요. 지금까지 줄곧 반복되어온 여성혐오패턴을 다시 눈에 담고 싶지 않습니다. 단순히 문장 하나에 과잉반응하는 것이 아니에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여성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면서 쌓여왔던 분노가 지난 강남역사건에서 비로소 터져나왔듯이 한국문단에서 지금까지 수없이 난무해온 여성혐오 여성비하적 표현에 대해서도 비로소 문제제기가 되고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이 확산되고 있는 배경이 있고, 각종 사회문제를 비롯해 모든 분야에서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이루어지는 맥락속에서 저런 표현에 대한 비판이 있는 겁니다. 문장 하나로도 충분히 문제지만, 이런 배경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두 가지만 말씀드린다고 했는데 쓰다보니 길어졌네요. 더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끝이 없을 것 같아서 이쯤에서 줄여야할 것 같습니다. 좀 더 상세하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능력의 한계네요.

cyrus 2017-03-10 10:5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건조기후님. 댓글을 남겨주신 점 감사드리고요, 답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몇 시간 동안 건조기후님의 댓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 번 읽었어요. 건조기후님의 생각에 대한 제 입장을 신중하게 밝히고 싶었고, 제가 잘못 생각한 점이 있는지 검토해봤습니다. 그래도 건조기후님이 제 의견에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제가 페미니즘에 대한 배움이 부족해서 미흡한 점이 있을 겁니다.

저는 김훈의 성기 표현 문장을 둘러싼 논란을 단순하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신체가 남성 중심적 시각이 반영된 채 묘사된 것에 심각하게 생각하고,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습니다.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이라는 글에서 마장세가 매춘부의 엉덩이를 바라보는 장면을 비판했습니다.

김훈의 성기 표현 문장과 아기의 클리토리스를 묘사한 나탈리 앤지어의 글을 비교한 점이 잘못되었다는 건조기후님의 지적이 옳습니다. 사실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을 쓰기 전까지 정말로 두 문장을 비교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나탈리 앤지어의 글을 인용한 의도가 있었습니다. 글쓴이와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나탈리 앤지어의 글을 인용했으면 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했어요. 아니면 남성 작가가 쓴 글이라고 소개하면 이 또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해요. ‘(나탈리 앤지어의) 어머니’를 ‘아버지’로 살짝 바꿔서 썼다면 어땠을까요? 여러 가지 반응이 있겠지만, 아마도 글쓴이가 아기의 클리토리스를 바라보는 점, 그리고 ‘자기 딸들의 생식기가 마음에 들었다’라는 표현 때문에 불쾌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은 김훈의 성기 표현 문장 논란을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사안으로 판단해서 쓴 글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보다 더 심한 사례도 있는데 그 정도 가지고 뭘 그러냐?”라는 의도로 글을 쓰지 않았어요. 나탈리 앤지어의 글을 ‘이보다 더 심한 사례’로 설정한 것도 아니고요. 제가 그런 의도로 글을 썼으면, 여성이든 갓난아기든 성기를 묘사한 다른 작가의 글을 인용했겠죠.

건조기후님이 딸아이 성기를 바라보는 ‘여성의 보편적인 정서’를 언급하셨는데요, 건조기후님 말씀대로 김훈처럼 생각하는 여성이 없을 거예요. 딸아이 기저귀를 가는 아버지들도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 거고, 역시 김훈의 묘사에 불쾌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는 건조기후님이 언급한 ‘여성의 보편적인 정서’를 보면서 그 개념의 반대를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탈리 앤지어의 어머니가 자기 딸들의 생식기에 마음에 들어 하는 감정이 ‘여성의 보편적인 정서’에 부합되지 않는지 궁금했어요.

[어머니는 자기 딸들을 생각했고, 토실토실한 외음부 안에 눈에는 잘 안 보이지만 만지면 느낄 수 있는 클리토리스가 깔끔하게 들어가 있는 자기 딸들의 생식기가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건조기후님의 논리대로라면 여성들이 자기 딸의 생식기가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어머니가 딸아이를 보는 시각이 아니라 남성 중심적 시각입니다. 왜냐하면, 일부 남성은 ‘두드러지게 튀어나오는 클리토리스’를 선호하지 않고, 무조건 ‘깔끔하게 들어가 있는 클리토리스’가 예뻐서 좋아하는, 왜곡된 시각을 가지고 있어요. 건조기후님의 논리대로라면 제가 이 댓글에 인용한 문장도 비판받을 여지가 있습니다.

관음증을 단순하게 바라봤다는 건조기후님의 지적을 인정합니다. 소설, 각종 미디어에서의 ‘관음증적 시선’에 대한 개념이 뚜렷하게 확립되어 있지 않아서 협소한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관음증’에 대해서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했습니다.

<공터에서>를 읽으면서 김훈이 ‘가부장제의 힘에 벗어나지 못한 구시대적인 작가’로 보였습니다. 당연히 <공터에서>를 통해서 가부장제로 인해 주변에만 머무는 여성 인물(이도순)과 가부장제의 힘에 종속된 여성 인물(박상희)를 봤습니다. 제 리뷰를 보셨는지 모르지만, 제목이 『여성도 슬퍼했고, 아팠다』입니다. 안 보셔도 됩니다. 만약에 읽어보신다면, 제 글의 문제점을 알려주셔도 좋습니다.

김훈의 과거 반페미니즘 발언, 그리고 작품 속에 드러난 성차별주의를 모조리 덮자고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을 쓴 것이 아닙니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남성 작가들의 성차별적 · 남성 중심적 발언과 묘사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옳고 그름을 따지면서 교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김훈의 성기 표현 논란 분위기가 너무 일찍 소강상태를 보인 게 아쉽습니다. 저는 점점 식혀지는 ‘뜨거운 감자’를 건드려봤고, 다른 관점으로 이 문제에 접근해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제 입장이 무조건 옳은 건 아닙니다. 『김훈을 비판하면서 놓친 것』 또한 타당성 있게 설명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지만, 저도 ‘여성이 여성으로서의 존재를 찾기 위한 노력’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건조기후 2017-03-14 09: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페미니즘 공부가 많이 부족하고 또 제가 여성을 대표하는 입장은 아니지만 단지 여성의 가슴이나 엉덩이, 성기같은 것을 묘사했다고 해서 무조건 여혐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 페이퍼에서 마장세가 여성의 엉덩이를 바라보는 부분이 오히려 여성혐오 아니냐 하셨는데 저는 이 대목은 그렇게 불쾌하지 않습니다. 물론 소설이 아니라 실제라면 다를 것이고 또 어떤 분들은 소설이라고 해도 불쾌할 수 있겠죠. 저는 되려 마장세가 아주 짠하게 느껴지는데, 사실 미군의 옆에 붙어가는 여성을 바라보면서 저런 기분을 느끼는 남성 캐릭터는 여성 입장에서 보면 굉장히 한심하고 토 나오는 캐릭터이긴 한데 분명히 현실에 존재하고 있고 소설에서 그리지 못 할 캐릭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요.

불쾌하냐 아니냐 기준을 명확하게 딱 선을 긋기는 어렵습니다. 남성들이 여성을 저런 시선으로 보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긴 한데 왜 꼭 성적 대상화된 여성만을 소설에 등장시키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거든요. 저런 사람이 존재하는 것과 저런 캐릭터가 소설의 재료로 취사선택되는 것은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선택의 기준에 작가의 가치관과 사상이 담겨 있는 것이겠고요. 세상은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는데 여전히 구시대적인 여성관에 사로잡힌 작가를 작가라고 할 수 있는지, 결국 문학이란 인간에 대해 천착하는 것인데 여성을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작가를 작가라고 할 수 있는지, 저는 이제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님의 댓글에서 굉장히 의아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여성이 클리토리스가 튀어나오지 않은 깔끔한 생식기를 좋아하는 것이 왜 남성중심적 시각입니까? 남성이 선호하는 것과 여성이 선호하는 것이 같으면 여성이 남성의 선호를 따라가는 것인가요? 이해가 되지 않네요. 여성이 좋아하는 건 여성이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성도 클리토리스가 튀어나오지 않는 것을 좋아할 수 있죠. 당연한 것 아닌가요? 여성들이 왜 자기 몸을 남성의 시각으로 본다고 생각하세요? 남자들에게 인기를 얻기 위해 성형을 하는 여자들도 있긴 하지만 페미니즘에 관심이 많으시고 여성들의 존재를 찾는 데 노력하시겠다고 하시면서 여성이 자기 몸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은 모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탈리 앤지어의 책에서 인용하신 부분을 처음에는 아버지가 한 말이라고 바꿔볼까 하셨다는데, 기본적인 인식부터 굉장히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요. 성적인 언행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발화자의 성별인데 그것을 바꿔서 반응이 어떨까를 보려고 하셨다니 좀 당황스럽네요. 어머니가 한 말이라면 단순한 취향을 표현한 것입니다. 아버지가 한 말이라면 당연히 아기를 성적 대상화한 것이고 여성을 소유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딸의 성기가 아버지의 마음에 들어야 하나요? 왜 여성의 성기가 남성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까? 당연히 이런 비판이 따랐겠죠.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 잘 모르겠네요. 김훈의 아기 성기 묘사도 과학적인 시각으로 중립적으로 봐야한다는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

저 위의 댓글도 쓸까말까 하다가 답답해서 쓴 것인데, 조금이라도 여성의 입장이 이해되기를 바랐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던 것 같네요. 나름대로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 페이퍼를 성실하게 작성하신 것은 알겠지만 진심으로 페미니즘에 관심이 있으신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 기본적인 이해조차 잘 못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사실 늘 이런 한계를 느끼기 때문에 말하다 지칠 것이 뻔해서 댓글도 쓸까말까했던 것인데 역시 우려대로네요. 제가 더 이상 이러쿵저러쿵하는 의미는 없는 것 같고, 평소에 워낙 다독하시는 분이니 앞으로도 관심이 있으신만큼 많이 읽으시고 사고의 깊이도 더해지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cyrus 2017-03-14 10:2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건조기후님. 답글 남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건조기후님의 답글을 읽고 난 후 제 첫 번째 의견(댓글)을 다시 검토해봤습니다. 제가 뭘 잘못 생각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으면서 깊이 있는 글을 쓰는 것이 목표인데, 그 목표를 달성하려면 한참 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페미니즘의 기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점을 인정합니다. 건조기후님의 충언,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나탈리 앤지어의 말을 아버지 입장으로 바꿔보려는 제 생각은 불순한 의도로 한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제 의견을 전달하는 데 역효과가 된 건 사실입니다. 이런 생각은 잘못되었습니다. 김훈의 아기 성기 묘사를 비판하는 의견을 과학적 관점으로 검토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건조기후님의 의견을 듣고 보니 제 생각이 많은 분의 공감을 끌어내지 못했습니다.

여성의 신체 부위를 묘사했다고 해서 여성 혐오, 성차별적인 묘사라고 주장하고 싶지 않습니다. 건조기후님의 말씀에 공감합니다. 마장세가 엉덩이를 바라보는 시선을 묘사한 장면이 여성 혐오인지 아닌지 의견이 엇갈릴 듯합니다. 건조기후님처럼 그 묘사가 여성 혐오라고 생각하지 않은 분들이 있으니까요. 서로 다른 관점을 시선의 차이로 이해하겠습니다.

여성도 깔끔한 클리토리스를 선호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의견에서 남녀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 얽매 여셔 그 점을 헤아리지 못했어요. 그렇지만 과거의 남성들은 깔끔한 클리토리스를 선호했고, 자신의 취향을 여성에게 강요했습니다. 중세 사람들은 클리토리스가 튀어나온 여성을 ‘마녀’로 규정했고, 클리토리스의 형태를 여성의 또 다른 얼굴로 봤습니다. 여성들은 클리토리스를 예뻐 보이려고 화장을 했습니다. 남성들의 만족을 위해서죠. 남성들은 예쁘면서도 깔끔한 형태의 클리토리스를 선호했고요, 남초 커뮤니티나 군대에서 깔끔한 클리토리스를 선호한다고 말하는 남자들을 만난 적 있어요. 이렇게 생각하는 남자가 소수일지 아니면 생각보다 많은 건지 모르겠습니다.

《마이 버자이너》와 나탈리 앤지어의 《여자, 내밀한 몸의 정체》에 호르몬 이상으로 튀어나온 클리토리스를 가진 여성들의 사례가 나옵니다. 튀어나온 클리토리스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성들은 그녀들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냥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런 남성중심적 사고와 편견은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자유를 억압합니다. 그리고 예쁜 클리토리스를 만들기 위해 미용 수술을 합니다. 《마이 버자이너》에 보면 네덜란드의 소녀들은 자신의 클리토리스가 못생겼다고 생각해서 고민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미용 목적의 클리토리스 성형 수술이 있습니다. 《마이 버자이너》의 저자가 이런 현상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제가 인용한 문장은 《마이 버자이너》의 구판 《버자이너 문화사》입니다. 제목만 다를 뿐, 저자와 내용은 동일합니다.

“여성 성기 미용 의사는 성기의 비대칭을 모조리 바로잡을 수 있다고 자랑한다. 그 의사를 인터뷰한 저널리스트는 수많은 사진들을 보았는데, 엄청나게 다채로운 개개인의 다양성이 천편일률적으로 다듬어져 일종의 표준 음부로 탈바꿈한 데 무척 놀랐다. 우리가 보는 포르노 사진들 역시 손질을 통해 다듬은 것이다. 젊은 여성들이 그토록 닮고 싶어 하는 모델은 점점 비현실적인 무언가가 되고 있다.” (《버자이너 문화사》 428쪽)

여성이 매끈한 클리토리스를 선호하는 건 그 여성 개인의 취향입니다. 그렇지만, 남성들이 좋아하는 포르노 배우처럼 여성이 클리토리스를 예쁘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여성이 자기 몸의 주인이라면 클리토리스가 크든 작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면 됩니다. 클리토리스가 크다면서 무시하고, 놀리는 남성은 여성의 몸을 남성이 소유하는 대상으로 생각합니다. 또 여성의 몸은 무조건 아름다워 해야하며 그 아름다움을 유지해야 ‘사람’으로 인정합니다. 그래서 저는 튀어나온 클리토리스를 선호하지 못한 것을 남성 중심적 시각으로 봤던 것입니다. 제 입장을 오늘 ‘마이페이퍼’로 정리할 생각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남성 중심적 시선 때문에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자신의 몸을 가꾸려고 하고, 여성 스스로 자신의 몸을 사랑하는 자유를 인정하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저는 여성이 자기 몸의 주인이 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남성들의 편견과 시선 때문에 여성이 자기 몸의 주인이 되지 못하는 갑갑한 상황을 지적하고 싶었습니다.

다락방 2017-03-14 18:23   좋아요 2 | URL
뒤늦게 덧붙이기가 저어되지만, 건조기후님께 감사드리고 싶어서 부러 씁니다. 저는 이 페이퍼를 읽고 너무 당황스러웠습니다. 이 불쾌함을 백번 얘기해도 전할 수 없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고, 저 역시 긴 댓글을 쓸까 하다가 피로함이 느껴졌어요. 게다가 주루룩 달린 댓글들을 보니 이 지점에 대해 제가 제 불쾌함을 적는다해도 전달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그냥 뒤로 빠졌습니다. 페미니즘 얘기하면서 다른 남성 알라디너와도 얘기하다 벽을 느껴본지라 제 힘으로 이걸 전달할 순 없을거라 포기했어요. 그런데 건조기후님은 제가 포기한 걸 해주셨네요.


제가 일전에도 사이러스님께 한 번 말씀드린 적 있었던 것 같은데요, 여기 계신 다른 분들 역시 책을 많이 읽으시는 분이고 또 그 나름의 관점과 생각을 갖고 계실겁니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 그렇게들 비난한다면, 또 화를 냈다면, 사이러스님, 그건 그들이 뭔가를 놓쳐서가 아니라, 뭔가를 보았기 때문일겁니다.

cyrus 2017-03-14 18:45   좋아요 0 | URL
건조기후님이 제 글의 결함, 그러니까 제가 문제의 사태를 심각하게 깨닫지 못한 점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두 번이나 댓글을 남겨주신 건조기후님이 정말 감사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페미니즘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아니면 잘못 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글을 썼습니다. 물론, 잘못 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페미니즘에 부합되지 않는 입장을 드러내는 제 글을 불편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겁니다. 네. 제가 페미니즘의 기본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서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그분들 덕분에 제가 뭘 잘못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글을 쓴 이유가 비판을 감수하면서까지 제 입장을 공개해서 어디가 잘못됐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 문제점을 스스로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역시 제가 보지 못한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다락방님 말씀처럼 제가 다른 분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제 글쓰기가 옳은 건지 확신할 수 없지만, 올바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글쓰기로 제 자신을 교정하고 싶습니다.

너드 2017-03-16 04: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죄송스런 말씀입니다만 책도 책인데, 많은 사람들이 열받은 건 김훈의 인터뷰 시 여성에 대한 쓰레기같은 워딩들 때문이에요. 궁금하시면 검색해 보시면 수두룩하게 뜨니까 참고하시구요. 여성혐오와 남성우월주의에 찌든 그의 워딩의 저열함이란 사이러스님의 상상을 초월할 거예요 정말... 미리 눈뽕(...) 조심하시길 바라요... 그리고 여기에 반대 댓글이 잘 달리지 않는 건 알라딘 특히 모바일의 경우 지금 이 댓글 페이지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너무 까다로워서일 거예요. 접근성이 이렇게나 떨어지니 여기에 댓글이 뭐가 달렸는지 알기가 너무 어렵죠..(저만 해도 책 상세페이지 아래 의견 섹션은 그냥 책 살까말까 독자들 반응이나 보는 용도였지 이렇게 답글 달려고 들어오는 건 처음이라 헤맸어요 ㅋㅋ 의견 나누는 창구 접근성이 이렇게 떨어지는 거 진짜 고쳐야 해요 알라딘...)

cyrus 2017-03-16 09:4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Jeremias님. 죄송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초면에 댓글을 남기기가 망설였을 텐데 의견을 밝혀주셔서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공터에서>를 읽기 전부터 김훈의 반페미니즘 발언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습니다. 한때 김훈의 소설을 읽은 독자로서 크게 실망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지적한, <칼의 노래>와 <화장>의 여성 차별적 묘사도 다시 봤습니다. 비판받을 만한 문장이었습니다. 몇몇 분들의 의견을 듣고 나니까 <공터에서>의 성기 묘사에 독자들이 불편함을 느낀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제 글에 반대 댓글이 달리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겁니다. 첫 번째 이유는 Jeremias님이 말씀하신대로입니다. 북플 이전의 알라딘 서재 시절에는 회원들은 컴퓨터로 서재 글과 댓글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북플이 생기니까 스마트폰으로 글을 보게 되고, 분량이 긴 글을 읽기가 불편해요. 댓글도 마찬가집니다. 제가 지금 쓰고 있는 긴 내용의 댓글을 스마트폰으로 입력하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댓글은 컴퓨터로 접속해서 남기는 편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제 서재가 ‘비회원 계정으로 댓글 달기’ 설정을 막아놨습니다. 비회원 계정으로 악의적인 댓글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건조기후님이나 Jeremias님처럼 자신의 입장을 떳떳하게 밝히거나 소신 있게 비판하는 분들을 환영합니다. 서로 간의 입장 차이가 있으면 상대방에게 설득할 수는 있어도, 상대방이 틀렸다는 식으로 공격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욕설이나 인신 모욕 발언이 들어있지 않으면, 저를 비판한 다른 분들의 댓글을 지우지도 않습니다. 만약 제 서재에 ‘비회원 계정’으로 댓글을 달 수 있었다면, 거의 욕설로 도배되었을 겁니다. ^^;;

너드 2017-03-17 0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댓글을 어떻게 다는지 몰라 새로 냄깁니닼ㅋㅋㅋ 아 그러셨군요 저는 그런 기능(비회원 계정 댓글 막는)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너무나 신기.. 각설하고 사이러스님의 의견 나눔에 관한 성숙한 태도는 너무나 존경스럽습니다. 감사드려요.
 
혜성 사이언스 클래식 30
칼 세이건.앤 드루얀 지음, 김혜원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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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핼리 혜성이 나타났던 1835년에 태어났다. 혜성은 1910년에 다시 온다. 나는 혜성과 함께 갈 것이다.” 

 

미국의 작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자신의 임종 날짜를 핼리 혜성이 나타나는 날로 예견했다. 정말로 그는 1910년 4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기 전날에 핼리 혜성의 꼬리가 지구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마크 트웨인은 죽음에 초연한 품격을 보이면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혜성의 등장이 두렵지 않았는가 보다. 혜성이 나타나기 전부터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에 무시무시한 소문이 퍼졌다. 핼리 혜성이 늘어뜨린 꼬리 부분을 지구가 통과하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혜성 꼬리를 감싼 독가스에 질식사할 것이라는 소문이었다. 어떤 이들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자살했다. 온 세계가 핼리 혜성에 공포를 떨었으나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핼리 혜성은 76년마다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혜성이다.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먼드 헬리(Edmund Halley)는 1531년과 1607년, 1682년에 나타난 혜성이 모든 같은 것이란 사실을 밝혀내고, 1758년 12월 25일 다시 찾아올 것이란 사실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이 혜성에 천문학자의 이름이 붙게 됐으며, 가장 최근에 혜성이 지구에 근접한 날은 1986년 2월 9일이다. 그러나 76년마다 찾아오는 우주의 손님을 기쁘게 맞이할 수가 없었다. 핼리 혜성이 나타나기 일주일 전에 미국의 우주왕복선 챌린저호가 폭발해 그곳에 탑승한 7명의 대원이 전원 사망했기 때문이다. 칼 세이건(Carl Sagan)은 희비가 교차하는 역사적 순간을 모두 지켜봤다. 칼 세이건의 책 《혜성》은 1985년에 발간되었다. 아마도 그는 이듬해에 나타나게 될 핼리 혜성과 챌린저호 발사 소식에 한껏 기대감을 부풀었을 것이다. 핼리 혜성이 나타난 지 10년 후에 그의 영혼은 아주 먼 우주로 날아갔다.

 

고대인들은 혜성을 재앙의 전조로 여겼다. 혜성을 부정적으로 보는 인식은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여전히 남아 있다. 지구 종말론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나오는 떡밥 중의 하나가 '딥 입팩트(Deep Impact)'나 '아마겟돈(Armageddon)' 같은 혜성 및 소행성 충돌이다. 2012년 12월 21일에 지구촌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마야 종말론’은 해프닝으로 끝나버렸지만, 종말론의 '종말'은 없을 것 같다. 혜성을 종말의 날을 앞당기는 신의 등장이라고 떠벌리는 자들에게 나는 수학자 라플라스(Laplace)의 말을 빌려 "저는 그런 허무맹랑한 가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1]라고 말하고 싶다.

 

아무리 과학 공부가 먹고 사는 게 별 도움이 없다고 해도 혜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물질로 이루어져 있으며, 혜성과 소행성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어야 한다. 중 · 고등학생들이 배우는 기본적인 과학 지식만 알고 있으면 지구에 근접하는 혜성이 무섭지 않아 보인다. 혜성은 지구에 잠깐 근접하다가 사라지는 우주의 손님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의 시작과 끝, 그와 운명을 같이한 특별한 존재이다.

 

미국의 천문학자 프레드 휘플(F. Whipple)은 혜성이 얼음과 가스, 먼지가 뭉쳐진 ‘더러운 얼음 덩어리’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1986년 핼리혜성을 관측하기 위해 보낸 탐사선 조토(Giotto)의 근접 촬영을 통해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단단한 얼음 덩어리였던 혜성은 태양 주위를 지나가면서 태양열과 태양빛을 받아 녹아 증발하게 된다. 여기서 가스와 먼지가 튀어나와 핵 주위를 둘러싸는 대기층인 코마(Coma, 혜성의 머리 부분)와 꼬리를 만들어낸다. 과학자들은 혜성이 생성되는 곳을 태양계 바깥쪽에 존재하는 오르트 구름(Oort cloud)과 카이퍼 벨트(Kuiper belt)로 추정한다. 오르트 구름은 수소와 헬륨으로 이뤄져 있으며 그 안에 약 1조 개의 혜성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카이퍼 벨트(Kuiper belt)는 해왕성에서 16억 km 떨어져 있는 얼음과 운석의 띠로 태양계 생성 때 행성이 되지 못한 소행성의 잔해로 추정된다.

 

혜성은 지구 생명의 근원에 대한 비밀을 풀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이다. 혜성 표면에 얇은 물 성분의 얼음층이 있다. 지구상에 있는 물이 혜성으로부터 유래됐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은 생명체의 탄생에도 혜성이 큰 연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혜성은 오래전 지구가 형성될 무렵 이 행성에 물과 생명의 물질을 가져다준 생명의 모태인 동시에, 백악기 말 충돌로 공룡을 비롯한 지구상의 생물 대부분을 몰살시켰듯 거대한 재앙이기도 하다. 칼 세이건은 혜성이 인류의 미래와 운명이 달린 '창조적 파괴'의 힘을 지닌다고 했다.

 

그래도 혜성과 소행성이 지구에 근접한다고 해서 쫄 필요가 없다. 사실 우리가 걱정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 그게 바로 핵무기이다. 소행성의 충돌로 인해 생긴 먼지가 수년 동안 햇빛을 가려 가뭄과 한발을 가져와 지구 생태계에 치명타를 가했다. 칼 세이건은 이 재앙의 결과를 대량의 핵무기로 인류가 절멸하는 '핵겨울' 시나리오와 유사하다고 봤다. 진짜 우리가 무서워하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 우주에서 오는 혜성이 아니라 인류가 스스로 만들어낸 재앙인 핵무기다.

 

2061년 7월 28일에 핼리 혜성이 지구에 방문할 것이다. 필자가 그때까지 살아있으면 74세가 된다. 먼 50여 년 동안에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 칼 세이건은 스스로 자멸하는 방법을 터득한 인류의 미래를 걱정했다.

 

"최근에 우리는 자멸하는 방법들을 마련했다. 핼리 혜성이 다음번에 지구 가까이 오는 2061년까지 얼마나 많은 인간이 남아 있을지 정말로 의문이다."[2]

 

그의 말이 '슬픈 예지'가 되지 않길 바란다. 혜성은 2061년에 다시 온다. 나는 그것과 함께하고 싶다. 그러려면 인류가 미래를 생각해서 정신 차려야 할 텐데…….

 

 

 

[1] 칼 세이건 《혜성》275쪽 ("나는 가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2] 같은 책, 4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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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7-03-03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싸이러스님 드디어 읽으셨네요.
별 다섯개 주시다니ㅎ
가격이 ㅎㄷㄷ해서 눈팅만ㅠ.ㅠ

cyrus 2017-03-03 16:00   좋아요 2 | URL
진짜 이 책은 소장해야 합니다. 이 책을 엄청 보고 싶어서 집에서 거리가 먼 도서관에서 빌려왔어요.. 오랜만에 책 한 권을 새벽까지 다 읽었어요. 책 속에 사진과 도판이 많아서 내용을 이해하기 쉬웠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장을 읽으니까 가슴이 뭉클했어요.. 세이건.. 당신은 대체.. ㅎㅎㅎ

북프리쿠키 2017-03-03 16:22   좋아요 0 | URL
소장용 구입으로 낙찰ㅠ
아직 코스모스,창백한푸른점도 못 읽었는데ㅎ

2017-03-03 16: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03 16:14   좋아요 1 | URL
76년이면 사람의 평균 수명입니다. 아무리 100세 인생 시대라고 해도 자연 재해나 전쟁이 일어나면 오래 살기 힘들어요. ^^;;

에로틱번뇌보이 2017-03-03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구의 속삭임‘도 읽다 말았는데 ‘혜성‘은 언제 읽죠? 지금 ‘풀하우스‘를 읽고 있는데 스티븐 제이 굴드 이름을 보니 반갑네요~

cyrus 2017-03-04 11:23   좋아요 0 | URL
저는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을 아직 안 읽어봤어요. ^^

겨울호랑이 2017-03-03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움베르트 에코의 「중세」4부작에 필적하는 세이건의 3부작이군요..^^: ㅋ 전 다음 핼리 혜성은 보기 힘들 것 같아요.. cyrus님께서 제 몫까지 봐주시길 ㅋㅋ

cyrus 2017-03-04 11:24   좋아요 1 | URL
겨울호랑이님. 연의가 과학에 관심이 있으면 핼리 혜성 이야기 꼭 해주세요. 연의는 핼리 혜성을 볼 수 있을 겁니다. ^^

북다이제스터 2017-03-03 2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2061년이라...ㅠㅠ

cyrus 2017-03-04 11:24   좋아요 0 | URL
저도 그때까지 살아있을지 모르겠어요.. ㅎㅎㅎ

AgalmA 2017-03-03 2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고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ㅋㅋ...낯설고 재밌네요. 고대부터 생태 진화를 설명하는 거 생각하면 틀렸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왠지 따지기 좋아하는 스티븐 제이 굴드가 살아 있다면 그 명칭에 한 소리 첨가할 것도 같고ㅎㅎ

cyrus 2017-03-04 11:26   좋아요 1 | URL
고고학이 유물을 발굴하고, 역사를 연구하는 학문으로 인식해서 그런지 ‘고고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가 낯설게 느껴집니다. ^^;;

보슬비 2017-03-03 2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호.... 소장욕 불태우가 하는 책이군요. 찜해두었다가, 특별한날 선물 사달라고 졸라야겠어요. ㅎㅎ 소장하고 싶은 책은 제가 구입하는것보다 선물 받을때가 더 기분이 좋아요. ㅋㅋㅋㅋ

cyrus 2017-03-04 11:28   좋아요 0 | URL
맞아요. 가격이 비싼 책을 선물로 받을 때가 제일 기분 좋습니다. ^^

2017-03-04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3-04 16: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7-03-08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티븐 제이 굴드 양반의 책은 사서 소장만
하고 있네요.

몇 페이지 읽다 말고 마저 읽을 생각도 안하고 ㅋㅋ

cyrus 2017-03-08 15:08   좋아요 0 | URL
<레오나르도가 조개화석을 주운 날>만 읽었어요. 그런데 2012년에 나왔던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들이 절판되었어요. 중고 책 판매자들이 좋아하겠어요. ^^;;

 
신의 입자 - 우주가 답이라면, 질문은 무엇인가
리언 레더먼 & 딕 테레시 지음, 박병철 옮김 / 휴머니스트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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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에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이 있었다. 물질의 질량 생성에 관여하는 입자로 알려진 힉스 입자(Higgs Boson) 발견에 성공했다. 대단한 연구업적으로 현대 과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이 뉴스는 전파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일반인들에게 있어서는 단위조차 생소한 미시의 세계에서 원자보다도 더 작은 입자들을 충돌시키고 관측하는 입자물리학 연구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이야기 정도로 치부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신의 입자(God particle)》가 뒤늦게나마 다시 번역돼 나온 것은 여간 흥분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1993년에 나온 이 책은 일명 ‘신의 입자’로 불리는 힉스 입자에 한발씩 다가선 책이다. 책의 공동 저자 중 한 사람인 리언 레더먼(Leon Lederman)은 미국 국립 페르미 가속기 연구소 명예소장을 지냈고, 중성미자의 정체를 밝힌 연구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고대의 원자론으로부터 돌턴(J. Dalton), 러더퍼드(E. Rutherford)의 원자모형을 거쳐 현대적 원자모형으로 발전해오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오랜 기간에 걸쳐 수많은 물리학자가 축적해 온 성과를 바탕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입자의 세계를 생생하게 펼쳐 보인다. 이 책이 나온 이듬해에, 페르미 가속기 연구소의 입자가속기를 이용해 ‘톱 쿼크(Top Quark)’의 존재가 확인됐다. 이로써 물질의 형태를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입자인 쿼크 6종 모두 발견되었다.

 

90년대에 힉스 입자의 실체를 규명하는 연구는 ‘물리학의 성배(聖杯)’를 찾는 일이었다. 물리학에서는 우주가 보이지 않고 신비스런 장(場, field)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힉스장은 우주 공간 어디에나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입자가 힉스장을 지나가면서 얼마나 힉스장과 상호작용을 많이 하는가에 따라 입자의 질량이 결정된다. 상호작용이 강할수록 질량이 무거워진다. 톱 쿼크가 무거운 것은 힉스장과 반응을 많이 하기 때문이고, 질량이 없는 광자는 아예 반응하지 않는다. 이처럼 힉스 입자는 입자들이 성질은 비슷하지만 질량이 크게 다른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다. 힉스장을 풀장에 비교하면 입자는 수영선수들이고, 수영선수들이 헤엄을 치면서 물과 부딪칠 때 비로소 질량이 생성된다고 보면 이해가 빠르다. 스코틀랜드 출신 과학자 피터 힉스(Peter Higgs)의 이름을 따 명명된 힉스 입자는 이러한 상호작용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 단서로 고안된 개념이다. 힉스 입자를 찾는 유일한 방법은 거대한 가속기를 이용해 양성자를 빠른 속도로 충돌시켜 태초의 환경을 재연하는 것이다. 힉스 입자는 매우 높은 에너지 상태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일상에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 특별히 눈여겨볼 인물이 있다. 물리학의 기초이론에 변혁을 일으킬만한 연구업적을 남긴 과학자들이 정말 많다. 과학자들은 축적된 이론을 바탕으로 계속 진보했다. 고전물리학의 기틀을 완성한 뉴턴(I. Newton), 상대성이론을 정립하여 뉴턴의 시대를 넘어선 아인슈타인(A. Einstein), 불확정성 이론을 주창한 하이젠베르크(W. Heisenberg) 등이 있다. 아무튼, 더 열거하면 끝이 없다. 그런데 레더먼은 자신의 책에 과학과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의외의 인물을 페르미 연구소에 소환한다. 그 인물이 바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데모크리토스(Democritos)다.

 

 

 

 

 

 

 

고대로부터 여러 철학자는 “만물의 근원은 무엇일까?”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동안 고대 그리스인들은 자연 현상이 신에 의해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데모크리토스는 자연 속의 물질이 극히 작은 기본 구성 요소들로 결합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는 물질을 계속해서 잘라 나가면 궁극적으로는 더 이상 자를 수 없는 작고 단단한 입자에 도달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 가상의 입자에 그리스어로 ‘더 이상 쪼갤 수 없는’이라는 의미를 지닌 ‘원자(atom)’라는 이름을 붙였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은 과학적으로 접근한 실험적 연구라기보다는 사색과 직관에 의한 것이라서 오늘날의 과학이론과 무관하다. 그렇지만 그의 주장은 인간이 어디에서 왔느냐는 존재성을 놓고 철학적인 고뇌로부터 시작, 만물의 근원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그 실체를 검증할 수 있는 것이다. 빛은 눈으로 볼 수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고, 전자란 전류를 느끼기에 그 실체를 검증할 수 있다. 이렇게 검증이 가능할 때 이를 존재한다고 말한다. 어떠한 방법으로 그 실체가 검증되지 않으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뜻에서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한 끝에 힉스 입자를 알아낸 인류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 존재를 느끼지 못했다. 레더먼이 《신의 입자》를 출간하기 전에 원제를 ‘빌어먹을 입자(Goddamn Particle)’로 지으려 했다. 그 당시 힉스 입자의 존재를 증명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을 빗댄 것이다.

 

힉스 입자의 발견이 대단치 않게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입자의 성질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고 팽창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이 궁금증은 아주 오래전 데모크리토스가 먼저 시작했고, 아인슈타인은 더 나아가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에 도달하기 위해 시도했다. 힉스 입자는 바로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한 중요한 단서이다. 궁극의 이론에 아주 가까이 다가선 것은 틀림없지만 모든 것들의 의미는 여전히 희미할 뿐이다. 그래도 과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 세상의 모든 자연법칙을 설명할 수 있는 하나의 원리에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 “신은 우주를 구성하면서 얼마나 많은 선택을 했을까”라는 아인슈타인의 질문도 상식 수준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주가 어떻게 탄생했느냐를 밝히는 것은 우리 인간의 영역이다. '신의 입자'는 실생활에 쓸모 없고, 무척 어려워보이는 존재이지만, 그 존재의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나가는 과정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 '신의 입자'는 우리가 알아야 할 좋은 입자(Good particl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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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8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02 13:43   좋아요 0 | URL
국가의 전폭적이면서도 장기적인 지원 없이는 과학 성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돈 되는 연구에만 지원하는 것은 기초과학 성장을 포기하는 거나 다름 없습니다.

oren 2017-02-28 2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님의 글 덕분에 데모크리토스에 대한 이야기가 담긴 책을 좀 뒤져봤더니, 동시대 철학자였던 플라톤이 데모크리토스에 대해 굉장한 라이벌 의식을 느꼈다는 사실도 알게 되는군요. 그의 가르침이 나중에 에피쿠로스(BC342∼270)에게로 이어졌다가, 루크레티우스(BC99∼55)를 거쳐 그로부터 훨씬 뒤인 근세의 기계론적 유몰론에 와서야 크게 주목받는 철학적 주제가 되었다고도 하고요. 데모크리토스의 생각이 그토록 기나긴 연결을 거쳐 마침내 힉스 입자에까지 연결된 건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네요. 2,400년 전에 그가 남긴 말도 놀랍고요.
* * *
˝나는 페르시아의 왕국을 얻기보다 오히려 하나의 원인 설명(main aitiologian)을 찾아내길 원한다.˝ -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중에서

cyrus 2017-03-02 13:45   좋아요 1 | URL
《신의 입자》를 읽으면서 데모크리토스 같은 고대 철학자들의 생각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비록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이 말이 생각났습니다.

AgalmA 2017-03-01 0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힉스 입자 발견은 연역의 또다른 쾌거로군요~
지적 탐험이 펼쳐질 이 책 기다려지는데요^^

cyrus 2017-03-02 13:47   좋아요 0 | URL
부럽습니다. Agalma님! 《신의 입자》는 소장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1990년대의 과학 고전이라고 불릴 만한 이유가 있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