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우리에게 세계에 대해 얼마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전통적인 대답은 세계의 모든 현상은 일정한 인과 관계의 법칙을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에 과학으로 이 법칙을 알면 세계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우리는 ‘결정론’이라고 부른다.

 

라플라스(Laplace)는 결정론적인 세계관을 구축한 프랑스의 수학자이다. 그는 자신이 수많은 계산을 하는데 필요한 자료와 계산력만 있다면 향후 전체 운행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예측할 수 있다고 말했다. 세상만사 별자리 운행하듯이 계산만 다 한다면 향후 어떻게 움직일지를 다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필요한 계산을 다 할 수 있는 존재를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한다. 고전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원인과 결과의 연결로 이루어진 인과율이 작용하므로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이 어렵지 않다고 보았다. 단지 수많은 변수와 복잡하고 많은 계산을 수행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본질적으로 미래란 인과율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있다고 믿었다.

 

 

 

 

 

 

 

 

 

 

 

 

 

 

 

 

 

 

* 카를 포퍼 《열린사회와 그 적들》 (민음사, 1984, 2006)

*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공산당 선언》 (책세상, 2018)

 

 

 

하지만 ‘불확정성의 원리’가 등장하면서 비결정론이 힘을 얻게 되었다. 불확정성의 원리란 입자의 위치와 속도가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입자의 속도가 정해지는 순간 위치가 달라지고, 반대로 입자의 위치를 정하려고 하면 속도가 달라진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관찰 장비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입자의 속성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확률로만 파악할 수 있다고 한다. 불확정성의 원리는 물리학뿐만 아니라 철학과 사회과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불확정성의 원리는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적절한 근거가 되었기 때문이다. 불확정성의 원리에 영향을 받은 카를 포퍼(Karl Popper)《열린사회와 그 적들》(민음사)에서 인류의 운명과 역사가 결정되거나 닫혀 있지 않으며 발전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가 반드시 무너지고 필연적으로 공산주의 세상이 도래할 것이라는 예측한 마르크스(Marx)의 결정론적 역사관을 비판했다. 포퍼는 개인의 존엄과 자유의지가 존중되고 비판이 보장되며 자아실현의 길이 열려있는 ‘열린사회’를 인간과 사회 발전의 이상향으로 보았다. 그의 입장에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따라 미래가 바뀔 수 있다는 확신이 반영되어 있다.

 

결정론의 허점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결정론은 학문의 세계뿐만 우리 일상 구석구석에 위세를 떨치고 있다. 한때 유전자가 외모는 물론 지능 · 기질과 질병까지도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 유행한 적이 있다. 유전자 결정론은 인간의 본성을 오랜 진화과정을 겪어 온 유전자의 관점으로 설명하려 한다. 그리고 유전자가 인간의 행동까지도 결정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제 이런 주장은 요즘 과학에서 설득력을 얻지 못하는 형편이다. 오히려 환경이 유전형질에 끼치는 영향이 밝혀지면서 유전자와 환경이 얼마나, 어떻게 서로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 40주년 기념판》 (을유문화사, 2018)

 

 

 

1976년에 출간된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이기적 유전자》(을유문화사)유전자 결정론을 설파한 책으로 오해받곤 한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머리카락, 피부색, 키 등 외모는 유전되지만, 사회적 행동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즉 인간의 사회적 행동은 학습이나 경험에 의해 달라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도킨스는 인간의 사회적 행동도 유전자에 의해 좌우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의 보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생존 기계’이다. 유전자는 자신의 보존 이외에는 관심이 없는 이기적인 존재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유전자에 프로그램된 대로 살 수밖에 없다. 번식(생식)도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것이며, 생명체는 유전자를 보존시키기 위해 번식을 하게 된다. 그의 도발적인 책은 진화론적 관점으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방식에 대한 논쟁을 촉진했다.

 

사실 이 열띤 논쟁은 《이기적 유전자》가 출간되기 일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1975년에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Edward Osborne Wilson)《사회생물학》(민음사)이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사회적 반향이 생겨난다. 이 책 역시 《이기적 유전자》처럼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의 사회적 행동을 분석하고 있지만, 일반 대중을 위해 쓰인 책은 아니었고 대학 교재였다. 그런데 《사회생물학》이 진화생물학자들 간의 논쟁을 일으킬 정도로 문제작이 되었을까? 사회생물학은 인간을 포함하여 동물의 행동이 종(種)의 유전적 구성에 의해 결정된다는 이론이다. 도킨스는 윌슨의 입장을 응용하여 ‘이기적 유전자’ 이론으로 발전시켰다.

 

 

 

 

 

 

 

 

 

 

 

 

 

 

 

 

 

 

 

*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 《인간 본성에 대하여》 (사이언스클래식, 2011)

* 케빈 랠런드, 길리언 브라운 《센스 앤 넌센스》 (동아시아, 2014)

 

 

 

우리나라에 번역된 《사회생물학》은 절판된 상태라 구할 수 없다. 그렇지만 《사회생물학》의 후속편 격이라 할 수 있는 《인간 본성에 대하여》(사이언스북스)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사회생물학적 분석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1978년에 나왔으니 올해가 출간 40주년이다. 진화론 논쟁을 주제로 다룬 책들에서 《사회생물학》이 당대에 끼친 영향력을 언급하고 있어서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진화론 논쟁의 역사와 그 핵심을 잘 정리한 《센스 앤 넌센스》(동아시아)는 사회생물학의 주요 입장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하다. 이 책에 따르면 윌슨은 사회생물학으로 인간의 성적 차이, 공격성, 종교, 동성애 등을 설명하려고 했으며 “머지않아 사회과학은 생물학으로 흡수될 것”이라고 예측했다고 한다. 사회과학자들의 비판이 거셌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윌슨의 도발적인 주장은 ‘사회생물학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그와 함께 하버드대학교에서 활동했던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는 윌슨을 ‘환원주의자’라고 비난했다.

 

 

 

 

 

 

 

 

 

 

 

 

 

 

 

 

 

* 스티븐 제이 굴드 《판다의 엄지》 (사이언스북스, 2016)

 

 

 

굴드는 평생 결정론의 함정에 빠진 과학의 어두운 이면을 비판하는 일에 앞장선 학자이다. 그는 윌슨뿐만 아니라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도 비판했다. 《판다의 엄지》(사이언스북스)도킨스를 비판한 칼럼(8장 『이타적인 집단과 이기적인 유전자』)이 수록되어 있다. 굴드는 도킨스의 주장이 ‘서구의 과학적 사고에 얽매인 악습’, 즉 환원주의, 결정론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 리처드 도킨스 《악마의 사도》 (바다출판사, 2015)

 

 

 

그렇다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이기적 유전자》를 어떻게 읽어야 할까? 나는 앞서 이 책이 ‘유전자 결정론을 설파한 책’이라고 오해를 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 결정론’을 옹호하는 책이라기보다는 ‘유전자 관점(gene’s-eye view)을 옹호하는 책으로 봐야 한다. 유전자의 관점에서 진화 과정을 이해하고, ‘다음 세대에서 출현빈도가 증가할 형질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기적 유전자》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면 알겠지만, 도킨스는 자신의 주장이 ‘유전자 결정론’으로 변질하는 것에 대해 무척 조심스러워 했다. 이 책, 아니 ‘이기적 유전자’라는 제목만 보고 도킨스를 ‘유전자 결정론자’라고 단정할 수 없다. 도킨스는 《악마의 사도》 (바다출판사)에 수록된 『유전자는 우리가 아니다』라는 글에서 유전자 결정론을 ‘도깨비’로 비유하면서 매장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도킨스는 인간을 자유 의지가 전혀 없는 유전자의 노예라고 절대로 주장하지 않았다. ‘유전자 관점’과 ‘유전자 결정론’에 대한 아주 작은 차이가 지나치게 부풀리거나 왜곡돼는 바람에 잘못 알려진 측면이 있다. 자유 의지에 기반한 비결정론적 세계관에서 인간은 환경 영향을 극복하고 주체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존재이다. 물론, 자유 의지가 ‘없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분명한 점은 인간은 주변 환경 속에서 자발적으로 결단을 내리고 행동할 수 있다. 자유 의지는 우리를 조종하는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할 수 있는 힘이다. 나는 《이기적 유전자》 11장에서 그 힘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우리에게는 우리가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서 안주할 여지도 없고 전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가르칠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3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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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0-29 15: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29 16:36   좋아요 0 | URL
<센스 앤 넌센스>에서 본성과 양육을 확실하게 구분하거나 양자 중 한쪽만 옹호하는 자세를 ‘넌센스’라고 말해요. 북사랑님이 읽으려는 책이 궁금해서 검색해보니 이 책의 저자는 본성과 양육을 상호작용한다고 주장하네요. 저 역시 저자의 주장에 공감해요. 이 책, 읽어봐야겠어요. ^^

2018-10-29 16: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10-29 16:37   좋아요 0 | URL
제가 ‘입자’를 양자로 착각해서 잘못 썼네요. 알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페크pek0501 2018-10-29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극복할 힘이 있다고 설파한 도킨스의 글에서
저는 오히려 그럴 힘이 인간에게 없기 때문에 저런 말을 하는 거구나, 하고 생각했었죠.

우리는 힘을 합치면 어떤 자연 재해가 일어날지라도 다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은
그만큼 자연재해의 위력이 크다는 걸 말하듯이, 도킨스의 말은 유전자의 힘이 세다는 걸 말해 주고 있는 것 같거든요.
어쨌든 도킨스의 그 말은 우리 인간에게 힘을 실어 주는 것 같아 좋습니다. 사실 인간이란 마음만 강하게 먹으면 못할 게 없는 존재니까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cyrus 2018-10-30 17:05   좋아요 0 | URL
그럼요. 인간은 완벽하지 않지만, 연대하는 힘을 잘 이용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변 환경을 바꿀 수 있어요. ^^
 
여성의 진화 - 몸, 생애사 그리고 건강
웬다 트레바탄 지음, 박한선 옮김 / 에이도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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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렵과 채집 시대의 인류는 수명은 짧았지만, 체력은 좋았다. 윤택한 삶을 살며 장수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각종 알레르기 질환을 비롯한 암, 당뇨와 같은 생활습관병에 시달리고 있다. 진화 의학자들은 이 난제의 해법을 진화론의 관점에서 찾고 있다. 진화의 관점에서 인간의 질병과 건강을 새롭게 해석하는 학분 분야를 진화 의학(evolutionary medicine)이라고 부른다. 진화 의학은 1990년대에 진화생물학자 랜돌프 네스(Randolph Nesse)[주1]조지 C. 윌리엄스(George C. Williams)가 연구하기 시작한 새로운 의학이다. 진화 의학자들은 질병의 증상을 없애는 데만 관심을 집중하고 있는 현대 의학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질병에 걸리게 되는 궁극적인 원인을 인류의 진화 과정과 인체의 구조적 특성을 통해 밝혀내고자 한다. 진화 의학이 나온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아직은 본격적으로 의학계에 도입되고 있지 않다. 진화생물학에 대한 기존 의학계의 이해 부족 때문이다.

 

진화 의학은 인간의 몸을 다른 모든 동물과 마찬가지로 오랜 진화의 역사를 거쳐 만들어진 산물로 본다. 예를 들어 음식을 비만의 원인은 게으른 생활 습관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의 유전자가 구석기 시대의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구석기 시대의 인류는 채식, 어류와 해산물을 주로 먹었다. 풍요로운 음식을 즐기기 시작한 지는 겨우 1만 년밖에 되지 않았다. 농경 시대의 인류는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정착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곡식, 감자 등 탄수화물 섭취가 갑자기 늘어나게 되었다. 이런 음식을 자주 먹게 되면서 섭취 열량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되었다. 따라서 비만, 고혈압, 당뇨 등 ‘현대의 문명병’의 위험에 노출된 이유가 우리의 식생활이 너무 빠르게 진화한 탓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의 유전자는 구석기 시대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농업 혁명으로 우리의 식생활만 엄청나게 달라져 버린 것이다.

 

질병은 인류의 발전과 함께 그 탄생과 진화를 반복하고 있다. 과연, 실제 문명과 의학기술의 발전에 따라 우리는 더 건강해지고 있는 걸까. 과거와 비교하면 질병으로부터 훨씬 더 자유로운 걸까. 진화론적 관점으로 여성의 몸과 건강을 살피는 《여성의 진화》는 바로 이런 의문에서 출발한다. 책의 저자인 생물 인류학자 웬다 트레바탄(Wenda Trevathan)은 초경, 임신, 출산, 완경[주2] 그리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삶을 하나하나 톺아보면서 진화적 요인이 여성의 몸과 마음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한다. 이 책은 단순히 생물학적 · 의학적 지식의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여성의 건강과 연관 지어 논의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현대 여성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질환은 여성의 몸이 문명화에 따른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해서 생긴 결과다. 예를 들어 유방암이 나날이 급증하는 원인을 해부학적 구조에서 찾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진화에서 찾아야 한다. 과거 여성들은 초경이 늦었고 그 직후 임신을 했으며 완경을 빨리 맞이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 여성들은 이들보다 초경이 일찍 시작하며 생리 횟수가 많다. 구석기시대 여성들이 평생 150번 정도 생리를 한 데 반해 현대 여성은 400번 정도 생리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성 호르몬이 유방암의 발병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초경이 빠르고 완경이 늦으면 그만큼 여성의 몸은 호르몬에 노출된 기간이 길기 때문에 유방암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즉 임신과 출산 횟수가 많으면 유방암 발병률이 낮아지지만, 상대적으로 임신과 출산 경험이 적거나 없으면 발병 우려가 높아지는 것이다.

 

포유류의 성장에서 접촉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갓 태어난 동물이 살아남으려면 어미가 반드시 새끼를 핥아줘야 한다. 연구에 따르면 어미가 핥아주지 않은 새끼 양은 일어서지도 못한 채 죽어버린다. 접촉은 인간에게도 중요하다. 진화론적 측면에서 아기를 업고 다니고, 끼고 자고, 먹고 싶다고 하면 언제든지 젖을 물리는 육아 방식은 아기와 산모 모두에게 너무나 적합하다. 옥시토신(oxytocin)은 출산 후 아기를 돌볼 때에도 그 분비량이 많이 늘어나는데, 아이와 산모 사이의 유대감을 크게 만들고 모유 수유를 돕는다. 코르티솔(cortisol)은 신체가 스트레스에 반응하고 감염에 맞서 싸우도록 하는 호르몬이다. 아기를 안아서 달래면 옥시토신이 분비되어 코르티솔 수치가 내려간다. 하지만 안아주지 않고 계속 울게 내버려 두는 일이 잦아지면 아기의 코르티솔 분비가 촉진되면서 아기의 성장과 정서, 뇌 발달까지 저해할 수 있다. 모유 수유의 장점은 아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옥시토신은 임신으로 이완된 산모의 자궁을 임신 전 상태로 복귀시키는 역할을 하며, 출산 후의 출혈을 멎게 한다.

 

이 책에서는 남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저자는 여성의 몸이 번식(생식, 출산과 육아) 성공에 초점을 맞춰 진화해온 과정을 설명한다. 그렇다고 저자가 여성의 몸을 ‘출산을 위한 도구’로 여기고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저자는 “여성의 유일한 삶의 목표가 번식이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348쪽). 《여성의 진화》는 ‘여성을 위한’ 책이다. 저자는 다이어트를 위해 구석기 시대의 식단으로 바꾸자는 식의 실현 불가능한 건강 비결을 제시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에 대해 잘 모르는 여성을 비난하지 않는다. 결국 책이 가장 크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소녀에서 할머니까지 아우르는 여성 전체가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다. 남성이 이 책을 읽고 여성의 생리 · 임신 · 출산의 수고로움을 안다면 건강한 여성들이 정말 살만한 사회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주1] 《여성의 진화》 19쪽에 랜돌프 네스가 ‘랜디 네스’로 되어 있다. 랜디가 ‘랜돌프’의 애칭이라서 틀린 표기는 아니지만, 공식적으로 알려진 정확한 이름은 ‘랜돌프 네스’이다.

 

[주2] 책에서는 ‘폐경’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폐경은 ‘여성으로서 생명이 끝난다’는 부정적 어감이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이 리뷰에선 ‘폐경’ 대신 ‘완전한 성숙’이란 긍정적 의미를 담은 ‘완경’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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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8-10-28 2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소녀에서 할머니까지 아우르는 여성 전체가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이다 - 그래야 하는 것인데 여성에게 함부로 대하는 남성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또는 불행해진 여성들이 많은 게 현실이죠.

cyrus 2018-10-29 15:16   좋아요 1 | URL
임신과 출산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여성은 임신과 출산을 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합니다. 몰상식한 남성들은 임신을 ‘벼슬‘이라고 말하는데,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당연히 이런 사람들은 여성의 몸을 잘 모르니 여성의 건강권 보장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 없어요. 여성도 건강권을 지킬 수 있는 국민이에요. 정부는 모든 연령의 여성의 건강권을 보장할 수 있는 정책을 먼저 만들어야하는데, 출산 장려 정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일에만 치중하고 있어요. 제가 봐도 지금 우리 사회는 여성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사회는 아니에요.
 
자연이 만든 가장 완벽한 도형, 나선
외위빈 함메르 지음, 박유진 옮김 / 컬처룩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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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만으로도 소름 끼치는 만화가 있다. 이토 준지(伊藤潤二)《소용돌이》는 기괴한 이미지와 상상력이 돋보이는 공포만화이다. 쿠로우즈라는 작은 마을에 사는 소녀 키리에는 남자친구인 슈이치로부터 “아버지가 이상하다”는 말을 듣는다. 슈이치의 아버지는 소용돌이 모양에 집착하고, 그 후 마을에서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소용돌이와 나선 모양에 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마을 전체가 거대한 소용돌이 모양으로 변해버린다. 이 만화에서는 손가락 끝의 지문, 귓속 달팽이관, 하늘로 오르는 연기까지 황당할 만큼 온갖 군데서 소용돌이가 발견된다. 이토 준지는 우리 삶에 흔히 찾을 수 있지만 의식하지 못하던 그 단순한 형태를 공포의 소재로 삼았다.

 

슈이치의 아버지는 소용돌이의 매력에 빠져 결국 자기 자신이 소용돌이가 돼 죽는다. 슈이치의 아버지처럼 다양한 자연현상에서 나선을 찾는 데 열을 올리고 있는 과학자가 있다. 노르웨이의 고생물학자 외위빈 함메르(Øyvind Hammer)는 나선형 화석을 연구하다 나선의 매력에 푹 빠진 ‘나선 마니아’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여기저기서 나선형이 보이고, 그것에 대해 남들에게 얘기하지 않으면 참지 못하는 증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노르웨이의 나선 마니아는 거대한 세상이 품고 있는 크고 작은 나선의 실체와 그 신비스러운 매력을 알리기 위해 책 한 권을 쓰게 됐다.

 

아주 오랜 옛날에 슈이치의 아버지와 같은 과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연계 속에 있는 나선이 세상의 질서일지도 모른다고 인식했다. 기원전 3세기 고대 그리스에 활동한 수학자 아르키메데스(Archimedes)는 나선을 수학적으로 정의한 논문을 썼다. 그의 이름이 붙여진 ‘아르키메데스 나선’은 일생 생활 속에서 친숙하게 볼 수 있는 나선의 기본 형태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이 나선에 영감을 얻어 펌프를 고안했다. 그의 어이없는 죽음은 너무나도 유명하다. 아르키메데스는 시라쿠사가 로마에 함락된 것도 모르고 땅에 원을 그리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로마 병사가 자신의 집에 침입하자 화가 난 아르키메데스는 병사에게 “내가 그린 원을 밟지 마라!”라고 외쳤다. 물론, 병사는 칼로 그를 내리쳤다. 만약 아르키메데스가 ‘나선 마니아’였다면, 그가 죽기 전에 땅에 그렸던 것은 원이 아니라 나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선도 ‘완벽한 도형’이기 때문이다.

 

 

 

 

 

 

함메르는 나선처럼 아름답고, 영원한 느낌을 강렬하게 불러일으키는 도형은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가 쓴 책 제목은 《자연이 만든 가장 완벽한 도형, 나선》이다. 얼핏 보기에 나선은 완벽하지 않은 도형인 것 같지만, 인류는 나선 안에 일정한 규칙이 숨어 있으며 그 규칙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는 자연계 속에 있는 나선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자연현상의 원리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물이 흐르면서 생기는 소용돌이를 예리하게 관찰하여 자신의 노트에 스케치로 남겼다. 그는 나선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양한 형태의 나선을 그림에 그려 넣었다.

 

이 책에 나선과 관련된 수학 공식이나 수학적인 내용이 나오긴 하지만, ‘고생물학자가 쓴 수학책’은 절대로 아니다. 저자는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수많은 나선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 이 책을 보고 있으면 하루에 수십 개 정도의 나선을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선 형태만 보고도 ‘아르키메데스 나선’과 ‘로그 나선’를 구별할 수 있다. 당신이 어느 날인가부터 나선과 소용돌이 형태에 의식하기 시작했다면, ‘나선에 대한 광기’에 전염됐다고 봐야 한다. 독자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저자의 ‘음흉한 계획’을 알아차린다. 노르웨이의 나선 마니아는 자신의 증상을 전염시키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는 책 머리말에서 이미 독자들에게 경고했다. 감수성이 예민한 분은 이 책을 읽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그렇다면, 이 책의 정체는 무엇일까? 수학책인가 아니면 생물학책인가? 그것도 아니면 나선에 대한 광기를 전염시키는 마도서(魔導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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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믹 커넥션 - 우주에서 본 우리 사이언스 클래식 35
칼 세이건.제롬 에이절 기획, 김지선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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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어디에 있는 거지?”

 

 

외계 생명체의 존재 여부를 논할 때 자주 거론되는 말이다. 우주 어딘가에 우리와 같은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까.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Enrico Fermi)는 이 문제를 토론하던 중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외계인이 존재한다면 그들 모두 어디에 있는 거지?” 페르미가 방정식 계산을 해보니 우주에는 무려 100만 개의 문명이 존재해야 한다는 가설이 도출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많은 외계 문명이 있다면 왜 아직 외계 생명체가 인류 앞에 나타나지 않은 걸까. 지금껏 외계 문명의 신호가 수신된 적은 없다. 페르미의 의미심장한 질문은 이론상으론 외계 문명이 존재하지만, 실제론 볼 수 없다는 ‘페르미의 역설’로 알려졌다.

 

만약 외계 생명체들이 태양계에 근접해 지구를 바라본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때에도 우리가 믿는 것처럼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유일한 생명체가 사는 축복받은 별일까. 그들이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본다면 지구는 작고 보잘것없는 변방 행성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끝없이 넓은 우주의 한편에 놓인 창백한 점에 불과한 지구라는 별에 사는 존재일 뿐이다. 천문학자 칼 세이건(Carl Sagan)은 우주에 티끌처럼 외롭게 떠 있는 지구를 ‘창백한 푸른 점’이라고 명명했다. 공허하며 침묵만 감도는 우주. 외계 생명체에 대한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 그는 외계 지적 생명체 탐사 프로젝트(SETI)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1972년 세계 최초의 목성 탐사선 파이오니어 10호(Pioneer 10)를 발사했을 때 세이건이 한 일은 인간(남성과 여성)의 모습과 태양계 속 지구의 위치 등이 그려진 명판을 싣는 것이었다. 이 명판에 새겨진 메시지는 외계 생명체에게 보내는 지구인의 자기소개서다. 이후 세이건은 TV 시리즈 <코스모스(Cosmos)>로 ‘대중 과학자’로 자리매김했다. 천문학을 쉽고 감동적인 언어로 설명한 <코스모스>는 과학의 문외한들을 지구 밖으로 초대했다. 그만큼 과학의 경이와 신비를 일반 대중에게 널리 퍼뜨린 사람은 없었다.

 

사실, 세이건은 <코스모스>에 출연하기 전부터 이미 스타였다. 파이오니어 10호가 목성을 향해 탐사 궤도에 오른 뒤 이듬해 세이건이 쓴 《코스믹 커넥션(The Cosmic Connection)은 출간 첫해에만 50만 부가 팔렸다. 《코스믹 커넥션》은 TV 시리즈 <코스모스>의 프로토타입(Prototype, 초기형)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도 《코스모스》에서 볼 수 있는, 섬세하고 감성적이면서 정곡을 찌르는 세이건의 문체가 흐르고 있다. 출간된 지 40여 년이 지났고, 그사이 수많은 과학의 진전이 있었지만 《코스믹 커넥션》의 매력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 대중적이면서도 문학적인 세이건의 문체는 온갖 과학 지식과 소소한 경험을 종횡으로 엮어 우주라는 거대한 주제를 명쾌하면서도 알기 쉽게 독자들에게 전달해주고 있다.

 

책은 1970년대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성과였던 파이어오니 호와 매리너(Mariner) 우주 탐사 계획을 바탕으로 화성, 금성의 실체를 소개한다. 그밖에도 우주를 떠돌던 먼지가 의식 있는 생명이 되는 과정, 외계 생명체의 존재 문제 등 우주에 대해 인류가 알게 된 것들, 알게 된 과정들, 그리고 알아야 할 것들을 흥미진진하게 펼쳐 보인다. 책을 관통하는 것은 ‘우주의 위치에서 바라본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7년 뒤에 나올 《코스모스》가 이 질문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다. 인간은 우주 일부이다. 그러므로 우주와 인간은 근본적으로 연결돼 있다. 인간은 가늠할 길 없는 우주라는 무한 공간의 부속일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유독 우주에 대해 알려고 한다. 우주를 알아가는 것은 인류 필연의 과정이자 필수적인 일이다. 이 과정을 통해 세이건은 인류가 무한한 우주 속에서 그만큼 나약한 존재임을 상기시켜주는 동시에 겸손함을 일깨운다.

 

 

 우리의 지구 중심주의에는 일상적인 편리함이 있다. 우리는 여전히 지구가 돈다기보다는 태양이 뜨고 진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우리는 여전히 우주가 우리의 편의를 위해 돌아가고 있다고, 그리고 우리만이 살고 있다는 식으로 생각한다. 우주 탐사는 약간의 겸손함도 가져다주리라. (pp. 136)

 

 

지구 중심주의에 벗어나 우리의 위치를 우주에 이동시켜 ‘나’를 포함한 전 인류를 내려다본다면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책에는 우주에 다른 생명이 있을 것을 확신하는 그의 마음이 절절하게 녹아있다. 그는 금성을 지구화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낙관적으로 전망했으며 은하 어딘가에 있을 선진 외계 문명은 블랙홀을 이용해 우주를 이동할 것이라고 상상했다. 과거에 있을 법한 상상이 이렇게 재미있게 읽힐 수가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또한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즐거움의 하나이다. 비과학적인 가설과 상상은 그냥 웃어넘기자. 세이건은 누구보다 외계 생명체의 흔적을 열심히 좇았으면서도 늘 회의주의적 칼날은 놓지 않았다. 그는 점성술을 비판했고, 고대 인류에게 문명을 안겨준 외계 생명체가 존재했다는 주장(초 고대 문명설)을 부정했다.

 

《코스믹 커넥션》은 외계 생명체에 대한 탐사 프로그램의 의미를 다시 차분히 인식하게 되면서 동시에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수필 같은 책이다. 그의 명쾌한 논리, 그리고 그것에 덧붙여 그의 글을 읽는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그의 진솔하고, 인간적인 면모가 이 책의 재미를 배가시킨다. 이 책을 딱딱한 과학책의 범위를 벗어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우주를 사랑하는 수필가다운 면모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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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17 1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8-09-18 12:17   좋아요 0 | URL
우주에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인간의 모습은 아닐 겁니다.

transient-guest 2018-09-18 0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계인의 진위여부는 모르겠지만 UFO의 존재는 확실하게 믿습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면 갑자가 지구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보다 더 크고 멋진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ㅎ

cyrus 2018-09-18 12:24   좋아요 0 | URL
저는 UFO를 비과학적인 현상으로 봅니다만, UFO에 대한 대중의 폭발적 관심 덕분에 우주를 알고 싶어 하는 호기심이 자연스럽게 늘어났다고 생각합니다. 우주를 연구하는 천문학자들은 아마도 어렸을 때 t-guest님처럼 그런 생각을 했었을 겁니다. 그래서 천문학자가 될 수 있었던 거죠. ^^

페크pek0501 2018-09-20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래에는 우주 여행뿐만 아니라 어느 별에서 살 것인가를 스스로 선택해서 사는 세상도 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지구에서 살 것인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살 것인가를...

cyrus 2018-09-21 18:32   좋아요 0 | URL
다른 행성에서 오래 살면 지구의 생활이 그리워질 수 있겠어요. 그런데 그때도 지구는 살기 좋은 행성으로 남아 있을까요? ^^;;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 우리가 몰랐던 원자과학자들의 개인적 역사
로베르트 융크 지음, 이충호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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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7월 16일 새벽 4시, 미국 뉴멕시코 주 앨라모고도 부근 사막. ‘카운트다운 제로’와 함께 불덩어리가 치솟으면서 거대한 인공 햇빛이 떠올랐다.

 

 

천 개의 태양의 빛이 하늘에서 일시에 폭발한다면,

그것은 전능한 자의 광채와 같으리라.

나는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현장에서 세계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의 전 과정을 지켜보던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의 책임자 오펜하이머(Oppenheimer)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가 읽었던 고대 인도의 경전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ītā)》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이제 이것과 똑같은 폭탄이 24일 후 일본의 한 도시 상공에서 투하될 것이었다. 미국 정부는 투항하지 않는 일본을 쓰러뜨리기 위해 이 ‘세계의 파괴자’를 내던질 계획이었다. 나가사키 주민들은 ‘팻맨(fat man)’라는 이름이 붙여진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쏟아낼 비극의 태양을 맞게 될 운명이었다. 눈부신 섬광, 무시무시한 버섯구름과 함께 이날 이후 인류는 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갖게 되었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원자력이 이렇듯 막대한 인류의 재앙을 초래할지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과거의 명저가 다시 태어났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은 원자핵의 실체를 밝히려는 과학자들의 지난한 여정과 원자폭탄이 만들어진 과정을 그린 논픽션이다. 이 책의 국역본은 1961년에 출간됐지만 절판되었다. 저자 로베르트 융크(Robert Jungk)는 과학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물리학자들의 ‘아름다운 시절’과 ‘고통스러운 시절’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그들의 삶과 업적을 흥미롭게 풀어냈다. 러더퍼드(Rutherford), 아인슈타인(Einstein), 하이젠베르크(Heisenberg), 닐스 보어(Niels Bohr) 등 여러 과학자가 원자력 연구에 나섰지만, 누구도 원자핵의 힘이 엄청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었다. 원자폭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미지의 에너지를 발견한 기쁨을 느낌과 동시에 원자폭탄이 가져올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두려워했다.

 

하이젠베르크는 우라늄을 핵무기의 수준으로 농축하는 일이 당시 독일의 상황에서는 매우 무리라는 것을 알고서는 안심했다. 그는 원자력 연구의 방향이 ‘전쟁터’가 아닌 ‘연구소’로 향해지길 바랐다. 하지만 독일에서 히틀러(Hitler)가 권력을 잡으면서 물리학자 사이에 두려움은 더 커졌다. 하이젠베르크도 원자폭탄을 이용한 독일의 승리를 바라지 않았다. 한편 미국의 물리학자들은 히틀러가 틀림없이 원자폭탄을 개발해서 전 세계를 공포로 몰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심지어 보어는 자신의 절친한 제자이자 동료인 하이젠베르크가 나치(Nazis) 정부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개입했다고 의심했다.

 

1941년 하이젠베르크는 보어가 있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강연하게 되었고, 자신의 내적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보어를 만나 대화를 나누기로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책은 이렇게 설명했다.

 

 

불행하게도 코펜하겐에서 하이젠베르크와 보어 사이에 중요한 면담은 처음부터 꼬이고 말았다. 보어는 하이젠베르크가 자신을 위해 열린 리셉션에서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옹호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사실, 하이젠베르크는 자신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 사교계에서는, 특히 외국에서는, 개인적으로 말할 때와 다르게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보어는 전체주의 정권하의 강압적 환경에서 터득한 이중적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중략]

 

하이젠베르크는 독일 물리학자들이 느끼는 강압적인 압력을 이해해달라고 호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서서히 조심스럽게 대화의 방향을 원자폭탄 문제로 돌렸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상대방이 같은 행동을 하기로 동의한다면 그런 무기의 제조를 막기 위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할 것이라고 솔직하게 선언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두 사람이 과도하게 신중한 태도로 이 문제에 접근하는 바람에 결국 대화는 목표했던 것에서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천 개의 태양보다 밝은》 pp. 175)

 

 

보어는 하이젠베르크의 발언을 통해 독일이 원자폭탄 제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독일 물리학자들에 대한 보어의 불신은 미국 정부에 원자폭탄을 설계해야 한다는 확실한 명분을 주었다. 진주만을 공격당한 미국의 입장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고, 종전을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원자폭탄을 선택했다.

 

제2의 전운이 감돌기 전에 유럽의 물리학자들은 지적인 모험을 연구의 가장 큰 목적으로 삼았다. 그때야말로 학자들의 뜨거운 열정을 느낄 수 있었던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고통스러운 시절’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정치 세력 간에 대량파괴 무기를 만들기 위한 경쟁이 불붙으면서 이들이 쌓아 올린 연구 성과는 원자폭탄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을 탄생시키는 데 활용됐다. 책은 역사의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자신의 연구가 무기로 현실화하는 악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물리학자들의 고뇌와 시대적 아픔을 전달한다. 당시 과학자들이 지녔던 순수한 학문적 호기심, 과학기술의 새로운 도약을 향한 열정, 원자력의 힘에 대한 두려움 등은 가치의 우열을 가릴 틈 없이 하나의 용광로에 던져졌다. 원자폭탄은 어느 한 사람의 독창적 발명품이 아니라 혼돈의 시대가 만들어낸 현대과학의 총체였다. 이 책에 나오는 과학자들은 역사의 주인공이자 피해자였다. 혼돈의 시대는 과학자들을 연구실에서 불러냈고, 그들을 괴롭게 만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역사는 냉정하다.

 

 

 

 

 

※ Trivia

 

하이젠베르크는 독일이 점령한 코펜하겐에서 강연을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그는 이 일을 기화로 자연스럽게 옛 스승이자 친구인 닐스 보어를 찾아갔다. (pp. 173)

 

→ ‘기화로’를 ‘기회로’로 고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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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종 2018-09-05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어와 하이젠베르크의 면담이 성공했다면 역사가 바뀔 수 있었을까요? 조금씩 어긋나면서 묵직하게 흐르는 역사를 보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사건이었는가 싶다가도, 그래도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바뀔 여지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뭐든 타이밍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선택의 변곡점에서 보다 나은 방향으로 진행될 수 있게 적절한 개입이 이루어질 절묘한 타이밍이요.
과학의 양면성은, 부작용이 두려워 멈추기에는 지적인 호기심이 못지 않게 강한 이들이 늘 안고 가야하는 딜레마인가 봅니다.

cyrus 2018-09-05 11:47   좋아요 0 | URL
서로 간의 오해를 불식시키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면 핵무기 개발 시기가 미루어졌을 거예요. 그렇게 된다면 냉전 시기에 핵무기가 만들어졌을 수도 있어요.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와의 대화가 성공한다고 해도 분명 어느 시기부터 핵무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

나비종 2018-09-05 11:57   좋아요 0 | URL
핵무기에 대해서는 제 생각도 cyrus님과 같습니다. 조금 늦어졌더라도 만들어졌겠죠?ㅡㅡ;
또, 일본이 아니었더라도 그 무기를 사용할 명분을 누군가는 만들어서 어딘가에서 한 번은 터졌을 거라는 것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