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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여행
가쿠다 미츠요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05년 6월
평점 :
가쿠다 미쓰요의 "납치 여행"을 간신히 다 읽었다.
21개월된 딸, 44개월될 아들 사이에서 내 시간을 내기란 너무나도 힘들다. 오늘은 딸아이의 손에 이끌려 아파트 곳곳을 누비는 틈틈이 조금씩 시간을 내서 일주일 만에 정말로 간~신~히 다 읽은 것이다.
그런데 조금은 뭔가 아쉬운 느낌이랄까, 뭐 그런 느낌이다. 로드 무비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너무 가볍게 끝난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정리되지 않지만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이게 이 작가가 즐겨 쓴다는 "여운"의 느낌일까? 아쉬움, 부족함, 가벼움=여운?? 알 수 없다. 내가 이 작품을 너무 평가절하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기도 한다. 아무래도 작년에 읽은 "여름이 준 선물"에 버금가는 감동을 주지 못해서 자꾸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리라.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몇 가지 인상적인 장면들이 많다.
바닷가에서 자신의 속이야기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해주던 치즈와의 만남, 아빠를 납치범이라고 온 천하에 알리고 경찰서에까지 갔던 일, 밤바다에서 아빠와 수영하며 느꼈던 황홀한 기분, 절에서 자며 공동묘지 근처를 한밤에 거닐며 보았던 반딧불이의 신비로운 불빛(할머니가 들려 주었던 으시시한 소문 이야기), 공원에서 바베큐를 먹고 버려진 텐트 속에서 잠을 자며 캠핑하던 일, 버려지고 바퀴에 바람이 다 빠져 덜컹거리는 자전거를 새벽까지 타고 아빠 친구집에 가서 돈을 꾸던 일(가다가 중간에 라면 하나를 아빠와 같이 나눠 먹던 일이며, 12시가 넘을 즈음 지쳐 공원에서 서로에게 기대어 잠을 잤던 기억도 부러운 장면 중 하나이다.)
어쩌면 나도 하루같은 이런 여행을 꿈꾸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무작정 떠나자는 생각 뒤로 줄줄이 따라오는 온갖 근심, 걱정들... 밥은 어떻게 먹지? 잠은 어디서 자고? 돈은 얼만큼 쓰게 될까? 빨래는 어디서 하지? 더위와 고생에 지쳐 너무 지저분해 보이지 않을까? 갔다 와서 괜히 갔었다는 생각이 들면? 하여튼 걱정이 한도 끝도 없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감수하고 떠나는 자에게 이 책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값진 체험이 주어지는 것이다. 물론 하루의 아버지처럼 현대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책임감이 강하고 매사에 꼼꼼하며 미래에 닥칠 일에 대비할 수 있으며 항상 깔끔하고 깨끗하고 항상 규칙적으로 출근했다 퇴근하는 모범적인 사람? 재미없는 사람 아닐까?)을 모두 만족할 수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지만...
하루의 아버지보다도 이 책에서 주목하는 사람은 하루의 이모 유코이다. 참으로 맘에 드는 인물이다. 이 소설에서 그리 많이 언급된 인물은 아니지만 인생을 즐길 수 있는 하루의 아빠와 코드가 어느 정도 맞는 인물이 아닐까 싶다.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제일 소중한 것을 고르고 나면 선택할 수 없는 것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지거든. 싫으면 잊어버려도 되고, 좋으면 같이 있어도 되고. 그런 것들이 아무래도 상관없어진 후에 생각해 보니까, 그렇게 싫은 것도 아니라는 걸 알겠더라구. 그래서 내가 너희 집에 자주 놀러 가잖니." 146쪽
하루는 유코 이모의 이 말을 이해할 수 없다고 되어있지만 나로서는 참으로 맘에 드는 말이다. 유코가 언니와 엄마가 싫었다고 자기 조카인 하루에게 고백하는 것처럼, 나도 사실은 나의 아빠라는 사람이 정말 너무너무 싫고 유코가 말한 것처럼 부모는 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없는 것인지 안타깝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최상의 선택 내지 탁월한 선택은 아닐지라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남편(결국 이 사람이 유코가 말하는 선택할 수 있는 것 중에서 제일 소중한 것이 되는 것일까?)이 있기에 아빠 와의 불편한 관계도 참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 생각났는데 이 소설이 그리 탐탁치 않았던 것은 바로 아빠와 딸의 여행이라는 설정으로 인해 내 맘이 계속 불편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만약 나보고 이런 설정 하에서 지금의 우리 아빠와 단 둘이 여행을 하라고 했다면 나는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빠를 싫어하는 나 자신을 용납하기가 힘들고 이런 나를 나의 자식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상상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빠는 싫다는 나의 생각은 아마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난 아직도 친정에 얹혀 살고 있다.
이번 방학 때는 제발 이 지겨운 공간을 떠나 단 일주일이라도 하루와 같은 조금은 초췌하고 보기에는 지저분할 지라도 자유분방한 여행을 떠났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이런 감정 변화에 둔감한 남편은 아직도 여행을 떠나려는 마음 조차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얼른얼른 서둘러야 하는데. 방학을 이렇게 서로의 감정을 긁으며 같은 공간에서 죽일 수는 없지 않은가?
하루가 부러울 뿐이다. 그런 아빠를 두었다는 것이. 아빠 와의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있다는 것이. 아마도 이 모든 추억거리들이 하루를 키우게 될 것이다. 여름이 준 선물에서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류를 자라게 한 것 처럼. 그러고 보니 두 소설 사이에도 비슷한 점이 있었군. 놀라운 발견이다. 아니, 뭐 그렇게 놀라울 것도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