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딸, 우리 땅에 서다 - 개정판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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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그건 사랑이었네"까지 읽고나서 한비야씨에게 그야말로 매료가 되었다. 이처럼 멋지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좀 더 힘을 내서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힘이 불끈 솟아나곤 한다. 물론 좀 지나면 또 무기력해지지만. ^^
 

  7월 기말고사 이후에 아이들에게 독후감 쓰기 수행평가를 2시간 연속 시키고 나서 난 이 책을 완독해버렸다. 읽어야지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읽고 나서의 느낌은 그 전의 책들보다 덜하지만 나에게 무한의 희망을 안겨주었다. 역시 한비야 언니 최고다!!!!

 

  그 중에서 끝 부분에 인용한 글이 맘에 들어서 옮겨 본다.

 

  281쪽

  몇 년 전 어느 책에서 읽었던 일화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이정표가 되고 있다.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이야기이다. 세계 제일인자라는 데 이견이 없는 이 거장은 70이 넘는 나이에도 하루에 5시간 이상씩 맹훈련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루는 기자가 물었다.

  "선생님은 세계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으신 일인자이시고 나이도 많으신데 왜 그렇게 연습을 열심히 하십니까?"

  이 노장 음악가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건 내 소리가 지금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나도 이렇게 살고 싶다. 내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하여 아낌없이 쓰고 가고 싶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어떤 모습으로, 어떤 타이틀로 살든지 이 점 하나 잊지 않고 산다면 적어도 남에게 짐이 된다든지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에게 딱 알맞은 말이다. 아직 30의 중반. 하고 싶은 일도 더 찾아보고, 여러 가지 일도 마구 벌여 놓아도 될 법한 나이 아니인가? 뭐가 그렇게 두려운지... 걱정을 줄이자.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거늘... 힘을 내야 한다.

  나에게 힘을 주는 한비야씨의 책. 너무나 고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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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샘 2010-09-18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한비야님의 책을 두 권 읽었는데, 이상하게도 리뷰는 안 써지네요. 그냥 맘에 담아 두기로 했습니다.
 
안녕, 싱싱 사계절 1318 문고 59
차오원쉬엔 지음, 전수정 옮김 / 사계절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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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싱싱”을 다 읽고 났을 때의 첫 느낌은 차가운 얼음물을 마시고 난 뒤의 시리도록 차가운 청량감이었다. 아, 이토록 맑고 순수한 아이들의 감성을 이렇게 감동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니! 몇년만에 차오원쉬엔 작품을 다시 만난 감동은 처음부터 강렬하지는 않았지만 잔잔히 퍼져나가는 여운이 오래 남는 작품이었다. 예전에 “빨간 기와”를 다 읽은 다음, 서점에서 “까만 기와”를 보자마자 망설이지 않고 구입했을 때의 설렘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야풍차’에서 얼바옌즈는 가난으로 지쳐 살아가지만, 영혼만은 살아 꿈틀대는 씩씩한 소년이다. 얼바옌즈는 어른들도 올라가기 힘든 태풍 속에서 흔들리는 풍차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 풍차의 남은 돛을 내리려고 하다가 바람에 먼 곳으로 떨어지고 만다. 말라 죽어가는 새싹을 살리기 위해 물을 대주던 풍차를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려는 얼바옌즈의 순수한 의지. 소년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정없이 땅에 내동댕이쳐질 때도 있겠지만 어려운 일을 피하지 않고 용기와 패기를 갖고 정면으로 부딪치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삶이 아니겠는가! 거칠지만 삶의 진실을 외면하지 않는 삶. 소년은 그렇게 크는 것이다.



‘열한 번째 붉은 천’에도 물에 빠진 아이를 구하기 위해 외뿔 소를 몰며 죽을 힘을 다해 달렸던 곰보 할아버지의 간절한 소망이 나타나 있다. 외뿔 소를 사오던 날 길들여지지 않은 소가 날뛰는 바람에 시간을 허비하게 되고 그로 인해 물에 빠진 한 아이의 목숨을 잃고 만다. 바로 그날 곰보 할아버지는 소의 한쪽 뿔을 잘라 버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다짐을 했을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진심도 알아주지 않은 채 세상과 점점 고립되어 살아갈 지라도, 죽어가는 아이를 반드시 살려놓고야 말겠다는 곰보 할아버지의 집념. 그로 인해 결국 자신은 죽게 되었지만 자신이 살려놓아야 할 어린 생명을 외면하지 않았던 그의 곧은 마음. 세상은 이로 인해 더욱 아름다워진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까?



‘안녕, 싱싱’에서의 싱싱도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야성 그대로의 순수함이 가득한 어린 아이이다. 여지청으로 싱싱의 집에 머물게 된 야 누나는 싱싱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보고, 이를 더욱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준다. 겁이 많고 나약하기만 한 야 누나가 날이 갈수록 야위어가자 싱싱은 달빛 호수에 가서 황금 잉어를 잡기 위해 온 힘을 다한다. 오직 자신을 인정해주었던 야 누나를 위해서 얼어 죽는 한이 있어도 꼭 황금 잉어를 잡겠다는 일념 하나로 끝까지 버텨낸다. 새파랗게 얼어붙은 입술을 깨물며 꽁꽁 얼어서 곱은 손으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싱싱은 황금 잉어를 결국 잡고야 만다. 야 누나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싱싱은 슬픈 이별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야 누나와 함께한 아름답고 순수한 시절이 그의 가슴에 평생 남아 그의 삶을 빛나게 해줄 것이다. 하늘에서 항상 반짝이는 별을 뜻하는 ‘싱싱’ 처럼.



마지막 작품 ‘흰 사슴을 찾아서’에는 죽음의 문턱에서 추위와 배고픔, 무서움에 떨면서도 끝내 이겨낸 아이들의 처절한 사투가 그려져 있다. 새하얀 사슴을 찾아 나섰던 다예, 쉐야, 린와, 션션은 무너져 내린 눈 더미 때문에 오두막에 갇히고 만다. 네 아이들은 깜깜한 암흑 세계에 갇혀 다시는 살아 나갈 수 없을 거라는 절망에 쌓여 죽음을 직면하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네 아이들은 가장 삶과 동떨어진 이 암흑의 세계에서 자신들의 솔직한 마음을 마주하게 된다.

린와는 말린 고기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참혹한 배고픔 속에서 혼자 몰래 먹어 버리고, 추위를 피하기 위해 담요를 혼자 덮고 있으며, 바닥으로 굴러 떨어진 페인트 통을 과일 통조림으로 알고 혼자 몰래 먹으려다 페인트인 것을 알고 뱉어내며 괴로워한다. 이런 린와의 이기적인 마음도 어쩌면 가장 솔직한 아이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진짜 배 통조림을 발견한 다예도 혼자 먹고 싶은 마음에 잠시 망설인다. 하지만 언젠가 마주쳤던 ‘맑고 순수하고 선량함이 가득 담긴 위의 눈동자’를 떠올리고는 지독한 부끄러움을 느낀다. 결국 모두 다 죽을 수 있는 최악의 순간, 다예는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배 통조림을 다 같이 나눠먹으며 함께 하는 소중함에 대해 깨닫게 된다. 이런 다예를 보며 린와는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만약 이 통조림이 자신에게 왔다면 혼자 먹으려고 했을 것이 아닌가?’ 린와는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진심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온 몸이 차갑게 얼어가던 션션이 자신의 아버지가 일부러 린와의 아버지를 죽인 것은 아니었다고 린와에게 사과를 청하고, 린와는 이를 받아들이게 된다. 린와는 절대 용서할 수 없었던 션션의 아버지를 용서하게 된다.

죽음과 암흑을 상징하던 눈 속에 파묻힌 오두막이라는 폐쇄적인 공간이 오해했던 이들의 마음을 풀어주는 용서와 화해의 공간이 되고,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공동체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는 희망과 밝음의 공간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삶의 희망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결국 자신들의 힘만으로 찬란한 태양이 비치는 눈더미 밖으로 빠져 나온다.



매번 아이들을 혼내고 가르치는 입장에서 아이들을 불완전한 존재라고만 생각했는데, 이 소설에서처럼 아이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배울 때가 있고 아이들이 선생인 나보다 훨씬 낫다고 느낄 때가 많다. 시험 성적이 올랐는데도 집에 가서 말할 사람이 없다는 아이의 글을 읽으며, 어떤 행동을 해도 무조건 혼나는 학생과가 싫다며 며칠째 학교에 나오지 않는 우리 반 꼴찌를 생각하니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너희들도 성장의 고통을 겪으며 치열하게 살고 있거늘, 어른인 우리들은 힘들고 외로웠던 그 시절을 어느새 잊고서 너희들을 더욱 힘들게만 했구나.’

힘겨운 삶을 살고 있지만 결코 쉽게 포기하지도 않고, 삶을 힘차게 헤쳐나가는 이 소설 속의 소년들의 모습이 꽤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너무 오래 잊고 지냈던 그 시절, 잘 다듬어지지 않아 거칠고 어설프지만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그 순간을 잊지 않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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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2
정유정 지음 / 비룡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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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 중학생 아이들과 좌충우돌 지내다 보면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과정은 늘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몸으로 깨닫게 된다. 이 소설에 나오는 15살 준호, 정아, 승주를 보면서 새삼 우리 아이들이 겪게 될 성장의 고통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나 또한 그 당시에는 절실하게 힘들고 혼란스러웠던 중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곤 했다. 그런데도 아이들에게는 흔들리지 말라고 너만 힘든 것이 아니라고 쉽게 말하고 있으니 삶은 이렇듯 잘 잊혀지나 보다. 절대 못 잊을 것 같은 그 기억들도 다 잊혀지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동안 가정의 말 못할 사연들로 인해 학교 생활에 적응을 잘 못 하던 몇몇 안타까웠던 아이들이 떠오른 건 당연할 지도 모른다.

    아이들에게 뭔가 가르쳐주고 혼내는 입장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이 먼저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라곤 했다. 그러면서 항상 나만 상처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작년 고입 원서 마감을 하루 앞두고 여학생 한 명을 안타깝게 유예시키면서 뭔가가 잘못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아버지, 오빠와 함께 셋이서 살아가며 모든 살림을 도맡아서 하던 그 아이는 버거운 삶의 짐을 어쩌지 못하고 집을 나가고 말았다. 몇 번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자리를 잘 잡지 못했다. 학기 초 독서 공책에 책을 읽고 난 느낌을 빼곡히 써 놓기도 하고, 청소 시간에도 모두들 대충 하고 가려고 하는 와중에도 구석구석 쌓여있는 먼지까지 말끔하게 쓸어주어서 항상 어른스러웠던 그 아이. 아이들과의 소소한 감정 싸움으로 힘들어하는 나에게는 그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던 그 아이가 어느 순간 학교에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행방 불명’이 되었다고 했다. 그 아이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순간 나는 도대체 무엇을 했던 것일까? 집에라도 한 번 찾아가 보았을 것을. 어쩌다 학교에 나왔을 때 같이 떡볶이라도 먹으며 수다라도 왕창 떨어볼 것을. 뒤늦은 후회와 안타까움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아이의 사정은 들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졸업은 해야 하지 않겠냐며 적응을 잘 해 보라고 힘 빠지는 이야기만 했던 나의 모습이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행방 불명’을 듣고 나서도 출석부에 무단 결석 처리밖에 할 수 없는 내 모습이 비참하게 느껴졌고, 기어이 유예 처리를 하고 출석부 그 아이 이름에 빨간 줄을 그을 때는 비통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 아이가 혹시 잘못 되었다면 도저히 얼굴을 들고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바쁜 생활 속에서도 가끔씩 그 아이 생각을 하곤 했다. 
 

  그 와중에도 한 해가 시작되고 시끄럽고 정신없는 42명의 또 다른 아이들을 만나 그 아이 생각이 거의 잊혀질 무렵 우연히 모교를 찾아온 그 아이의 오빠를 만나게 되었다. 만나자마자 그 아이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잘 지내는 것 같다고 했다. 그 아이는 또 다른 공간에서 나름대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 아이 오빠의 손을 잡아주면서 꼭 안부 좀 전해달라고 했다. 내가 얼마나 걱정을 많이 했는지 아냐고 잘 지낸다니 너무 다행이라는 말을 덧붙였을 것이다. 그리고 성장의 아픔으로 인한 그 아이의 상처가 잘 아물기를 간절히 바랬다. 준호와 정아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 준 것처럼.

    친구인 규환이의 부탁으로 중요한 사명을 띠고 여행을 시작하게 된 준호. 어린 시절 아련히 떠나버린 아버지를 아직 잊지도 못했는데 엄마는 재혼을 해서 신혼여행을 떠나버렸다. 아버지를 잊을 수는 없지만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믿음은 서서히 흐려지기만 한다. 1980년 광주의 어딘가에서 조용히 죽어갔을 지도 모르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자 시인인 준호의 아버지. 밤에 악몽에 시달려 무서워 아버지의 서재를 찾아가면 아름다운 시를 낭송해주던 따사로운 목소리. 내가 준호였어도 잊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아픔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정신질환자인 아버지로부터 매일 맞고 쫓기는 삶에 지친, 그리고 아버지의 학대를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엄마로부터 버림받고 싶은 정아. 자식들을 위해서 그저 남편으로부터 맞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엄마를 이해할 수 없다. 정아는 이런 엄마를 떠나고 싶다. 이해하고도 남는다. 속옷 차림으로 미친 개 '루즈벨트'와 아버지로부터 쫓기다가 얼떨결에 여행에 동참하게 된 정아는 얼마나 그 처절한 현실로 다시 돌아가기 싫었을까? 그렇게라도 간절히 떠나고 싶었을 것이다. 

  버림 받은 준호와 버림 받고 싶은 정아는 엉뚱한 여행을 통해 서로의 아픔에 대해서 가슴 깊이 이해하게 된다. 남의 아픔이라고 해서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깨달음도 가슴에 새기면서. 준호, 정아, 승주는 그들만의 비밀을 공유하면서 세상을 견디며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어떤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그들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바다 속에서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유유히 헤엄치는 ‘고래’가 있기 때문이다. 
 

    작년 우리 반 그 아이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떠나야만 했을까? 무엇이 그리도 그 아이를 참을 수 없게 했을까? 또 그 아이의 ‘고래’는 무엇이었을까? 지금쯤, 자신의 삶을 지탱해줄 무언가를 찾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렇다면 나의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정신없고 시끄러워도 끝날 시간이 되면 나만 애타게 기다리는, 이제는 너무나 정이 들어버린 우리 반 42명의 아이들이 아닐까 싶다. 그 아이들이 있기에 내 삶이 빛나는 것 아닐까? 며칠 전 출장을 간 사이 청소를 엉망으로 해서 어떻게 혼낼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들고, 가끔은 내 마음을 너무 몰라줄 때도 많으며, 아프다고 조퇴를 하더니 곧장 집을 나가서 40여일 동안 애를 태우다 돌아온 아이도 있었지만 그들은 성장의 고통으로 흔들리고 있는 아직은 감싸줘야 할 영혼들 아닌가? 아직은 어설프기에 더욱 순수한 영혼들. 이들이 흔들릴 때 옆에서 위로가 되어주고 즐거울 때 함께 웃어주며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들이 정신없고 엉뚱한 여행을 한 것처럼 천진난만하고 시끌벅적한 아이들과 유쾌한 동행을 계속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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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 추콥스키 동화집 1
코르네이 추콥스키 지음, 바스녜초프·카녭스키·코나셰비치·스테예프 그림, 이항재 옮김 / 양철북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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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 동화는 처음 접하는 것이어서 이 책을 읽으며 낯선 느낌이 강했다. 처음부터 ‘해충’ 이미지가 너무나 강한 바퀴벌레가 나와서 더욱 특이했을 것이다. 며칠 전에 인간들이 이유 없이 갖고 있는 ‘바퀴벌레’에 대한 혐오와 편견은 해충약을 팔고자 하는 회사의 ‘계략’일 수 있다는 글을 읽었는데도 불구하고 바퀴벌레는 전혀 친근하지 않았다.

  물론 이 책에서도 바퀴벌레는 모든 동물들이 두려워하는 ‘해충’으로 나온다. 바퀴벌레보다 몇 십배는 더 큰 동물들이 처음 보는 바퀴 벌레의 심상치 않은 외모만 보고 두려워 벌벌 떤다. 마치 처음 보는 것들에 대해서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아이들처럼. 사자, 코뿔소, 곰 , 코끼리 같은 동물들이 자신들의 새끼를 바퀴벌레에게 바쳐야 한다는 현실 앞에서 꺼이꺼이 우는 것이다! 이런 우스꽝스러운 현실을 보고 캥거루는 ‘바퀴벌레란 고작 다리도 가늘고 보잘 것 없는 작은 벌레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어느 동물도 믿지 않는다. 이 때, 용감한 참새가 나타나 폴짝폴짝 뛰며 다가와 바퀴벌레를 먹어 치운다. 동물의 왕이라고 일컬어지는 덩치 큰 모든 동물들도 무서워 다가가지도 못하던 바퀴벌레를 단숨에 먹어 치운 참새의 참된 용기가 돋보인다. 어려서부터 이 동화를 읽으면서 자란다는 러시아 어린이들은 덩치가 크지 않아도, 힘이 세지 않아도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한 참새의 용기를 자연스럽게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나오는 ‘악어’에 나오는 바냐도 ‘참새’처럼 용기있는 인물이지만 더욱 구체적으로 나올 뿐만 아니라 동물들과 공존하는 평화로운 세계를 꿈꾼다. 악어를 필두로 한 아프리카 동물들은 인간 세계에서 동물원과 수족관에서 학대받고 있는 동물들을 구하기 위해 도시로 몰려간다. 귀여운 소녀 랄랴가 아프리카 고릴라에게 잡혀 가자 모든 사람들은 도망을 가 버리고 오직 용감한 바냐만이 남아 랄랴를 구한다. 그리고 동물원 우리에 갇혀 있는 동물들의 ‘우리를 깨부수고, 쇠사슬을 끊어 버리고, 철창을 영원히 부수고’ 자유롭게 해 준다. 단, 동물들에게 우리 밖으로 나와 ‘아무도 잡아먹으면 안 된다’는 약속을 하고서.

  ‘우리는 총을 부수고, 총알을 파묻을 거야. 너희들은 발톱과 뿔을 잘라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이보다 더 진실에 가까운 말은 없을 것이다. 어른들은 어린 바냐가 알고 있는 이렇게 쉬운 일을 아직도 실천하지 못해 서로 총부림을 하고 적대시하며 서로를 비난하고 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바냐가 표범의 등에 올라타서 거리를 다니고, 독수리 위에 걸터앉아서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 자신의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했는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상태. 그 누구에게도 해가 가지 않는 이 모습을 추콥스키가 원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바냐와 랄랴는 늑대가 만들어준 만두를 먹고, 산양이 읽어주는 질 베른의 동화책을 듣고, 하마가 들려주는 자장가를 들으며 소파에 앉아 평화롭게 잠에 빠져든다. 잠에 빠진 바냐의 표정에서 좀전까지 동물들을 향해 권총을 겨누던 살벌한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마지막 쪽에서 악어에게 달려가는 바냐를 흐뭇하게 쳐다보고 있는 백발의 인자한 할아버지가 아마도 ‘추콥스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악어와 함께 달콤한 차를 마시며 모든 동물들과 아이들이 평화롭게 지내는 그런 곳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리고 평화를 얻기 위해서는 아이 같은 순수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 씻기 싫어하는 아이를 겁주기 위해 뛰쳐나온 ‘위대한 세면기 모이도디르’의 그림은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어린 아이들이 이 그림을 본다면 씻지 않으면 엄청난 일이 일어날 거라는 무서운 상상(!)으로 인해 도저히 안 씻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씻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거대한 세면기가 벽에서 떨어져 나와 나만 쫓아다닌다는 상상을 하는 이 순간 왜 이리 유쾌한지 모르겠다. 아마도 씻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구워 삶다시피 해서’ 씻겨야 하는 엄마의 심정을 한 번이라도 느껴 본 사람이라면 이 그림을 본 순간, 웃음이 터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

 

  이색적이고 낯설었지만 우리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추콥스키의 동화가 재미있었고 다음 이야기가 기대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어린 아이들에게 어느 누구와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방식에 대해 어렵지 않게 부담감 없이 쉽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다르다고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 우리가 너무나 잘 못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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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섬고개 친구들
김중미 지음 / 검둥소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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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달쯤 자정을 넘기며 늦게 온다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김중미의 "꽃섬고개 친구들"을 다 읽었다. 

 

이 책의 주인공 선경이와 한길이를 통해  

우리 사회 곳곳에 숨어 있는 "폭력"을 잔잔하게 풀어 놓고 있었다.

종교와 관련된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말에 대한 나의 편견 때문인지

이 책을 사놓고 1년이 지나도록 읽지 않고 한쪽 구석에 오랫동안 꽂아 놓고만 있었다.

그런데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 클럽"을 다 읽고 우연히 책을 잡게 되었는데

오랜 시간 묵혀 놓은 것에 비해 글이 참 잘 읽혔다.

 

여러 가지 것들을 많이 느꼈지만

그 중에서도

학교안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한 부분

한길이의 친구 태욱이가 수학교사에게 "인권 유린"(성폭력)을 당하는데도

어느 누구도 나서서 말리지도 않으며

수치스러움을 당하는 태욱이 조차 '어차피 나서봤자 우리만 손해이니 조용히 살자.'고 하는 그 모습

마치 내 모습을 보는 양, 안타깝고 속상하고 창피하고 그랬다.

 

그러면서 나도 점점 아이들에게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가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꼭 때려야만 말을 듣는다고 생각하는 나의 모습.

윗 사람들에게는 작은 불만도 말하지 못한채 참고 살면서

가르치는 아이들에게는 작은 잘못도 못 넘어가는 이중적인 모습.

요즘 지각 몇 번 했다고 습관적으로 때리곤 했는데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리지 않는 연습을 하도록 해야겠다.

같은 길을 걷고 있는  

내 친구가 절대로 아이들을 때리지도 벌을 주지도 않는다고 했는데

새삼 존경스럽다.

옳다고 믿는 일을 그대로 실천하는 친구.

 

나는 겉으로는 고고한 척, 깨끗한 척 했지만

실상은 너무나 이중적으로 살아온 듯한 느낌이 든다.

 

 

열심히 책을 읽으며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누구한테 손내밀어야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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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바람 2009-09-13 0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라는 구절이 생각나네요. 하지만 그 많은 학생들은 어떻게 다 사랑으로 할까요? 시간은 없고 열정도 점점 사그러지는데... 언제나 고민하는 선생님의 모습이 보입니다.저도 체벌에 대해 회의적이지만 소극적으로 수용합니다.떄리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죠. 하지만 효과는 가장 빠르고 가장 눈에 보이니 늘 3번 정도 생각하고 체벌을 한 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