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무덤은 구름속에>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그들의 무덤은 구름 속에 -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아우슈비츠 이야기
아네트 비비오르카 지음, 최용찬 옮김 / 난장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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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아이리스 장
 

홀로코스트란 단어는 유태인 대학살을 정의하기에는 정치적으로 옳지 못하다. 홀로코스트는 ‘제물’이라는 뜻으로 유대인을 신에 대한 제물인 양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쓰는 말이지만 당사자는, 혹은 당사자의 후손들에게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들의 무덤은 구름 속에>(원제 : 엄마, 아우슈비츠가 뭐예요?)를 쓴 아네트 비비오르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그녀 남편 쪽도 사정은 비슷하다. 600만 명(400만 명에서 700만 명까지 추산)이라는 어마어마한 유태인 학살에서 자유로운 유태인 후손은 없다.

1948년생인 저자 역시 수만 명의 유태인 언니 오빠들처럼 몇 년 더 일찍 태어났던들 어떤 일을 겪었을지 모를 일이다. 저자에게 유태인 민족 대학살은 남이 아닌 자신의 문제이다. 이후 유태인 학살 관련 전문 역사가가 된 저자는 13살 난 딸아이를 위해 비극을 쉽게 풀어서 써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역사가인 나에게 아우슈비츠를 서술하고, 유대인 민족 학살이 어떻게 진행되어 갔는지를 묘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긴 해도, 단순히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설명이 안 되는 핵심은 여전히 남아 있다.” 왜 나치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잡아 죽이는데 에너지를 쏟아 부었는지 이 책은 아울러 저자 자신에게 그 이유를 되묻는 작업이다.

이 말은 독일인들이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나치와 전시 국제법에 따라 싸운 대부분의 독일군은 별개라는 주장과도 일치하는 의문이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유대인을 잡아들이고, 죽이는 일이 과연 승리의 최우선 요건이었을까?

자살하기 전에 유태인들을 몰아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남긴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의 광기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어쩌면 ‘되풀이되지 말아야할 과거’를 위해 학살의 역사와 더불어서 그 배경인 ‘반유대주의’에 대한 설명에 힘을 더한다. 왜냐하면 말살을 당할 만큼, 유대민족의 과오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보이는 역사적인 반유대주의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유대민족이 지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에 더해, 악마로 취급당했던 전력을 담담하게 말한다.  페스트 전염병 당시에도 유대인에게 죄를 덮어씌웠고, 부활절에는 기독교인 아이를 잡아다가 피를 먹었다는 소문을 가감 없이 소개한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패배이후 독일은 경제적 파탄 책임을 1%도 안 되는 유대인에게 돌린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거의 독일인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고, 사회 각층에서 엘리트로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타락의 원흉으로 주목 받았다.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유대인은 몰살의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순혈주의를 내세운 선동 헤게모니로 당시 아우슈비츠에는 집시들이 유대인과 같은 취급을 받아서 죽었고, 독일인이라도 정신병자, 불구자, 장애인들은 불임 시술을 받거나 마찬가지로 희생이 되었다.

가슴 아픈 얘기를 아이에게 들려주고, 아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을 때에는 역사가 반복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고, 익히 서구사회에서 냉철하게 역사청산과 교육을 통해서 교훈으로 남겼다지만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이 위의 ‘반유대주의’ 논리와 과연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종교적인 터부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번져 국가 간 전쟁과 테러로 21세기가 얼룩지고 있고, 이스라엘은 당한 만큼 화풀이를 하는 것인지, 팔레스타인과의 관계에서 조롱거리가 된 지 오래다. 그래서 이 책은 또 다른 의미로, 역설적으로 유대인이 읽어야 할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 그것이 바로 저항이다. 바로 이 저항 개념에서부터 우리는 유대인 저항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른다, 라고 옮긴이의 입을 통해 저자는 말하지만 이 논리는 유대인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팔레스타인 민족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남 얘기할 것 없이 우리에게도 1923년 9월, 관동대진재학살(關東大震災虐殺)의 뼈저린 경험이 있다. (이때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조선인과 같은 취급을 받아 사형을 당했다.) 또 80년 5월, 군부의 광주 대학살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지만, 지금 우리 현실에서 장애인, 이주외국인, 다문화가정 등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들이 받는 멸시와 조롱과 차별을 떠올리면 할 말이 없다.

나치의 광기와 연합국의 무관심이 부른 엄청난 학살의 기록, 그리고 팔에 푸른색 잉크로 새긴 문신이 남은 채로 살아가는 생존자들이 산 역사로 증언하는 시대에 딸아이에게 어쩌면 ‘유태인’이라는 정체성이 또 다른 악몽으로 다가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철저한 기억은 없고, 철저한 망각만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이어 친일파가 쥔 기득권이 군사정권으로 이어진 뼈아픈 과거가 그리 멀지도 않은 일이고, 이제야 친일인명사전이 편찬되었다. 이를 사죄하는 친일파 후손도 있으나, 폄하를 하고 핏대를 세우는 것들이 국회의원이랍시고 TV에서 당당하게 떠들어댄다.

아무리 속내에 정파 관계가 얽혔다지만 개인 영달을 위해 할 소리, 안 할 소리를 가려야 하는데, 그걸 못 가린다. 13살짜리 얘를 위해 썼다는 이 책을 그들에게 먼저 읽히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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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폰, 잔폰, 짬뽕>을 읽고 리뷰해주세요.
차폰 잔폰 짬뽕 - 동아시아 음식 문화의 역사와 현재
주영하 지음 / 사계절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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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학로에 나가면 짬뽕 전문점을 종종 들린다. 가격도 저렴하고, 또 바쁜 시간에는 바로바로 나오는 데다, 매콤한 맛이 요즘처럼 쌀쌀할 때는 딱 제격이다. 너무 자극적이어도 물리기 마련이라 뭘 먹을까 하다가, 하루는 근처 호텔주방장 출신 중국인이 주방장이라는 중식당에 들어갔다. 가장 기본이랄 수 있는 짬뽕과 자장명과 탕수육을 시켰다. 
 

그곳에서 먹은 짬뽕 맛은 좀 더 부드럽긴 했지만, 솔직히 별반 차이가 없었다. 자장면도 마찬가지였는데, 딱히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뭔가 좀 아쉬웠다. “청요리를 시켜야 차이가 나지, 일반식이야 뭐”하고 말았는데, <차폰, 잔폰, 짬뽕>을 읽어보니 무심코 한 말이 딱 맞았다. 
 

이른바, 식사 메뉴가 아닌 요리 메뉴라고 부르는 고급 음식도 한국식으로 바뀐 게 맞지만 짬뽕, 자장면은 말 그대로 한국에서 새롭게 정착을 한 요리이니 중국인이 요리하든 한국인이 요리하든 큰 차이가 없을 수밖에. 정확하게는 화교(華僑) 음식이라고 불러야 한다. 
 

서민음식인 짬뽕은 중국 푸젠의 지역 음식인 ‘탕러우쓰멘’이 일본의 무역도시인 나가사키에 중국인 마을인 당인촌이 번성하면서 ‘시나우동’으로, 이후 ‘잔폰’으로 바뀐 음식이다. 각종 재료를 넣고 육수에 삶은 면을 넣은 ‘잔폰’은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간 한국식의 매운 ‘짬뽕’과는 맛이 다르게 담백하다고 하니, 지금 우리가 먹는 ‘짬뽕’은 말 그대로 한국에서 새로운 음식으로 바뀐 셈이다. 그러니, 중국인 주방장이 만들었다고 한들 그 맛이 그다지 다를 리가 없다. 
 

민속학을 공부한 주영하 교수가 쓴 이 책에서는 단순히 요리의 경로만 추적하지는 않았다. 짬뽕만 해도 16세기 일본 개방 정책이 세계 포르투갈, 네덜란드, 중국 등 열강과의 교역이 이루어졌고, 17세기 이후 쇄국으로 유일한 무역도시인 나가사키에 중국인들만 당인촌(작가는 세계 최초의 공인 차이나타운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이 세워진 배경이 있다. 
 

그리고 주로 일본과 한국에서 뿌리를 내린 중국 남방지역 중국인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이런 관계망에서 중국에서 일본을 돌아 한국으로 짬뽕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마구 뒤섞어 놓았다’는 의미로도 쓰는 짬뽕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침략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비슷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낸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중국음식에 따라 나오는 단무지 역시, 중국음식이 한국에서 번성할 당시 화교들이 일본과 한국에서 같은 경제권에 속해 있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군대 시절, 그렇게 먹고 싶었던 자장면의 추억이 알고 보면 일제 이후, 60~70년대 경제 부흥기에 따른 추억이지 아주 오랜 추억이 아니라는 지적이 그렇고, 제주도 음식에서 더 이상 향토 음식을 찾아볼 수 없고, 육지 음식이 점령한 ‘주변부 음식 문화의 운명’은 중국 천편일률적인 소수민족 통합 정책 이후 소수민족의 고유 음식 문화가 빠르게 사라지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흔히 55개 소수민족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중국 정부 공인’이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고 에둘러 꼬집는다.) 
 

무엇보다 짬뽕이 일본어에서 유래를 했다고, 국어순화 차원에서 ‘초마면’으로 쓰자고 하지만 초마면은 다른 음식이라고 점, 전주비빔밥을 세계 음식으로 발전시키겠다고 해서, 시장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던 음식이라는 현실을 뒤엎고 임금님 수랏상에 오른 음식으로 둔갑한 점 등 우리가 상대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 진실과 다르게 왜곡되는 부분이 꽤 많다는 지적을 한다. 
 

우리가 무심코 먹는 음식 한가지에도 정치 경제적인 역사가 함께 한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사회적, 생태적,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먹을거리 관계망에 더해 한편으로 내가 먹는 음식에 알게 모르게 치열한 정치적인 함의가 있다는 생각에 번뜩 정신이 든다. 그래서 저자의 바람이 단순히 농사꾼들이나 시민단체의 지적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지역의 농수산물로 만든 향토 음식을 외식 업체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밥상에서도 살려 낼 고민을 농정 당국에서는 반드시 해야 한다. 지역의 먹을거리 자주권은 이제 국가의 먹을거리 자주권이며, 21세기를 슬기롭게 살아가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제주 음식이 육지에 포섭되어 박물관의 쇼윈도로 들어간 지금, 자칫 한국 음식도 그런 사정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196쪽, <2부. 국민국가, 로컬푸드를 포섭하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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팡세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9
B. 파스칼 지음, 하동훈 옮김 / 문예출판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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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한 개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자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다. 그를 짓눌러버리는 데는 전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줄기 증기, 한 방울의 물도 그를 죽이는 데는 충분하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짓눌러버릴지라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자보다 한층 고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죽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것들을 하나도 모르기 때문이다. <팡세> 180쪽

갈대 같은 존재인 인간,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는 존엄을 갖출 수 있다. 생각에 온 힘을 다했을 때 위대한 갈대로 거듭난다. 파스칼의 갈대는 한낱 갈대이나 우주를 채우는 존재이고, 몸은 나약한 뿌리로 지탱하나 땅과 하나 되는 의지이며, 바람에 휘청거리나 세상 만물의 소리와 교합한다. 우주와 합일치 되는 순간, 갈대는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이나 시간’을 가득 채운다.

프랑스의 수학자, 물리학자, 철학자, 종교 사상가로 그 누구보다 생각하는 갈대이고 싶었던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의 <팡세>는 사람들을 신앙심으로 인도하기 위해 쓴 <기독교 변증론> 초고다. 그러나 그의 인도는 “무조건 믿으라, 그러면 천국 간다”는 식으로, 다른 갈대가 흔들린다고 덩달아 휩쓸리는 갈대이길 바라지 않았다.

11살에 이미 <소리의 전파에 관한 논고>를 썼고, 독학으로 유클리드 기하학을 생각해냈으며, 16살에 <원뿔곡선시론>을 발표한 천재 수학자는 확증이 불가능한 신앙 앞에 마주 서서 컴퓨터처럼 치밀하면서도 지독하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였다. (파스칼은 계산기와 컴퓨터 원리를 발명했다. 컴퓨터 프로그래밍 언어 파스칼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에게 사고하지 않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나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상상할 수는 없다. 그러한 것은 돌이나 혹은 짐승일 것’이라고 말한다. 신앙으로의 귀의 이전에 신앙을 찾는 자기 자신, 그의 생각은 당연히 인간 존재 자체를 두고 깊은 물음으로 이어진다.

누가 나를 이 세상에 내놓았는가, 이 세상이 무엇인가, 나 자신이 무엇인가를 나는 모른다. 모든 것에 관해서 나는 지족한 무지 속에 있다. (…) 내가 도처에서 보는 것은 무한뿐이며, 이 무한은 나를 일개의 미립자처럼, 또 한순간이 지나면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 그림자처럼 둘러싸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바의 전부는 내가 마침내 죽으리라는 것뿐이지만, 내가 가장 모르는 것은 어떻게 해서도 피할 수 없는 바로 이 죽음이라는 것이다. 107쪽

파스칼의 갈대가 장자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의 물아일체와 합치하는 듯, 엇갈리는 지점이다. 호접지몽이 일반적으로 덧없는 인생에 대한 비유로 쓰인다면, 파스칼의 갈대는 인간의 위대함과 비참함의 변증법을 통해 신을 향한 사랑으로 귀의한다.

병을 앓아 하반신 마비로 목발에 의지할 수는 아픈 몸으로도 파스칼은 포르루아얄 수도원 생활을 엄격하고 철저한 고행으로 일관했다. 지병으로 인해 39세에 갈대처럼 짧은 삶을 마감하였으나 병으로 완성하지 못한 채로 남긴 단편적인 초고는 이후 정리를 통해 <팡세>로 세상을 밝히는 사고(불어로 팡세)의 불이 되었다. 파스칼의 친구들이 초고를, 후세에 걸쳐 다시 정리한 900여 개 단편 모음집은 따라가기가 쉽지는 않다. 허나 가감이 없는 만큼 인간에 대한 파스칼의 절절한 애정을 고스란히 엿볼 수 있다.

‘그는 횃불을 들고 대지를 비췄다.’ 파스칼이 몽테뉴의 <수상록>에서 발췌한 문구이다. 이후 신에 대한 사상을 넘어서 수많은 실존주의자들의 선구자가 된 치열한 사고의 결정체 <팡세>는 돌 혹은 짐승이 들끓는 갈대밭에서 그래도 높고 환하게 타오르는 횃불이다.* 

밑줄긋기
인간이랑 모든 각도에서 보지 않았다는 데는 화를 내지 않지만 오류를 범했다는 말을 듣기는 싫어하는 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인간이란 원래부터 모든 것을 볼 수 없다는 사실과 감정의 지각은 항상 진실한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보고 있는 방면에서는 본래 오류를 범하는 일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12쪽

감성은 이성을 허위의 외관으로써 기만하고, 또 감성이 이성에게 주는 이러한 속임수를 이번에는 감성이 이성에게 받곤 한다. 이성이 그것을 보복하는 것이다. 넋의 정념은 감성을 교란하고 그릇된 인상을 그에게 부여한다. 양자는 서로 다투어 속고 속인다. 55쪽

나는 때때로 운명에 대해 스스로 역행하려고 애쓴다. 운명을 극복하는 영광은 나로 하여금 즐겁게 운명을 극복하게 한다. 그 대신 나는 때때로 행운 속에서도 싫증을 일으킨다. 66쪽

현재는 결코 우리의 목적이 아니다. 과거와 현재는 우리의 수단이요, 미래만이 우리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살기를 원하고 있다. 또 행복해지려고 언제나 준비하고 있지만 어떻게 해도 행복해질 수가 없다. 93쪽 

나는 손도 발도 머리도 없는 인간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왜냐하면 머리가 발보다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경험뿐이니까.) 그러나 나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을 상상할 수는 없다. 그러한 것은 돌이나 혹은 짐승일 것이다. 1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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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훈의 향연 - 끝나면 수평선을 향해 새로운 비행이 시작될 것이다
한창훈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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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기분 풀어진 주인처럼 인자스러워졌다. 진짜 봄인가. 봄이라 해도 되나 몰라. 아무래도 될 듯싶다. 포근하다. 비로소 나는 내 식솔들, 고양이와 동백나무와 가문비나무와 온갖 벌레와 풀잎들에게 말했다. 이곳에 진정 봄이 왔음을 선포한다. 다들 안녕. (…)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견디느냐 못 견디느냐의 차이뿐이다. 253~254

기다리면 올 것은 온다, 그러니 견디어라. 책 마지막 문장이 내 속을 따스하게 풀어준다. 견디지 못하고 얼마나 도망치고, 외면하며 겉으로 아닌 척 하나 이대로 살아야 되나 싶었던 시절이 누구라고 없었겠나. 

늦가을 방으로 들어온 모기 한 마리 앵앵 날갯짓 덕에, 왼손 검지 따끔함에, 술 취해 선잠을 자다가 얼결에 일어나 무심코 집어든 소설가 한창훈의 산문집 <한창훈의 향연>을 붙들고는, 새벽 기도회 나가는 어머니가 튼 라디오 찬송가 소리가 들릴 즈음이 되어서는, 겨울 재촉하는 창 밖 빗소리가 거문도 해무가 뭉쳐 내리는 듯 했다.

어젯밤 무겁게 툭툭 술상 발밑으로 소주병뚜껑과 뒤섞여서 떨어지고도 갈치 주둥이에 매달린 낚싯줄 납덩이처럼 입 안에서 깔깔하고 텁텁하게 찌꺼기들이, 갈칫국 한 사발 들이킨 듯 책 한 권 독파에 말끔히 가실 수 있구나, 해서 신기하기도 하다. 소설가는 말하길,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혹독한 계절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과 맞물려 있다. 

습습한 갯것들이 먹여 키운 한창훈의 소설을 읽고는 참 구성지면서도 재밌다 했으나, 관광객처럼 그뿐이었다. 관광 잘 하고 돌아와서는 힘내서 일하자 하면 뭔가 좁아터진 게 넓어지는 맛도 알겠지 했는데. 63년생인 그이보다는 한참 젊은 축인데도 닻 같고 돛 같은 당신도 늙는군요. 저도 그래요, 라고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방금 전에 전어 눈알 같은 눈물 한 방울 떨굴 뻔했다.

그이의 첫 산문집은 소금기 밴 흰머리 섞인 봉두난발 머리카락이 하늘로 뻗대 있는 삶 이력이 만선처럼 담겼다. 이제껏 그이의 소설로 난간 위에서 수면 위 출렁이는 모양새만 봤다면, 지금은 갯바위에 게고둥처럼 배를 붙이고 누워 바닷물 속으로 고개를 들이고 물속에서 아린 눈을 뜨고, 그래도 휘익 한 번 본 기분이다.

실제 바다 속에 용궁은 없고 구멍 난 그물, 폐타이어 등속이 그득하듯이 책 속에도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닷가로 돌아온 시절 내내 외로움, 시련, 고독, 가난과 그에 따른 악다구니리가 미역 점액질처럼 진득하다.

허나 싸질러 놓고 사는 게 인간의 생겨먹은 꼴인 것을, 바다는 그래도 ‘수십만 마리의 학꽁치 떼, 서해안으로 산란하러 가는 중인 그것을 하나같이 알이 통통 배고, 흰 정소가 가득 차 있었다. 떠난 곳에 남은 것은 이렇듯 생명들의 이동과 내림’, 향연이다.

이 책에 회에 양념 도배하듯 가타부타 설명을 다는 게 구차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마디만 더 하자면 먼 뱃길 나갔다가 돌아오는 부모의 작은 동력선 엔진소리처럼 반가운 책이다. 해풍을 맞은 쑥이 약효가 좋듯이 이 책에 실린 그이 주변 인물들의 얘기 또한 이전에 알던 이들인가 싶게 뱃속에 회가 동한다. 그래서 몇 권 더 소설, 시집을 사러 나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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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를 금하노라 - 자유로운 가족을 꿈꾸는 이들에게 외치다
임혜지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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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시기가 우리 대에서 끝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자식 대에는 목욕이란 풍습이 존재했던 호시절을 환상처럼 그리며, 선조들이 참 파렴치하게 지구를 말아 먹었다고 원망할지도 모른다. 아, 나는 파렴치한 사치를 누리고 있구나. 누가 이런 나를 본다면 참 궁상스럽게 산다고 생각하겠지? 어쩌다가 목욕 한 번 하면서.-50쪽

"어라? 고등어 먹는 게 왜 변태야? 개고기는 괜찮고 고등어는 변태야? 자기는 독일 사람이니까 생선 안 먹고 자랐지. 나는 한국 사람이라서 고등어가 고향 음식이란 말이야."
"그럼 앞으로는 당신만 먹어. 다른 사람들까지 먹을 필요는 없잖아. 바다 생선 안 먹고도 잘 살아온 사람들까지 맛을 들여 엄청나게 먹어대니 씨가 안 마르겠어? 정작 생선에 의지해온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빼앗긴 셈이고 말이야. 그건 변태야."
"으이그, 그럼 나도 먹지 말라는 소리지. 그냥 안 먹고 말지. 어떻게 나 혼자 먹으려고 고등어를 굽겠어? 근데 당신 말이 맞네. 알았어."-63쪽

평소에 말수가 적은 그 친구는 과일 장수에게 왜 소비자들이 남아공 과일을 사지 말아야 하는지 또박또박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보이콧을 하는 사람들이 유럽에도 소수였다는 것을. (…) 나중에 남아공에서 인종차별법이 철폐되고 흑백 차별 없이 자유 총선거를 치러 정치적으로나마 인종차별이 없어지는 일이 외국의 경제적 압력이 큰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를 듣고 괜히 마음이 흐뭇했다. 남아공의 인종차별을 정치적으로 종결시키는 데 내 힘도 한몫한 게 아닐까 해서.-69~70쪽

당장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확인하는 일이 바로 내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는 기쁨 아니겠는가? 사회가 뒤집어지거나 말거나 변치 않는 나의 가치를 확인한 것. 이것이 인생의 횡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77쪽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우리가 결혼 초반에 직업 세계에서 승승장구하지 못했다는 이유도 일부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 인생관이 확고하게 서기 전에 일에 대한 유혹이 먼저 들어왔다면, 승부욕이 강한 우리의 성격으로 보건대 진로를 그 방향으로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랬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과 다른 종류의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내가 지금 아무런 후회 없이 이렇게 행복한데, 내가 가지 않은 길이라고 해서 폄하할 이유는 없다. 나는 이런 행복감이 나만의 거짓말인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을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사실이다.-85~86쪽

아이들 나이가 십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우리 부부는 그나마 쥐고 있던 고삐도 늦추고 느긋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어른이라고 우리가 더 잘하는 것도 없으면서, 부모라는 이유로 아이들을 과소평가하고 참견하는 일이 낯간지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 곁에 친구처럼 있어줄 뿐이다.-96쪽

우리 교육의 목적은 아이들이 평생 신념과 사랑을 가지고 전념할 일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다. 공부든 기술이든 상관없다. 공부 잘해서 성공한 판나 교수도 조직의 노예가 도리 수 있고, 평범한 기술자도 주인 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다. 나는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늘 강조했다.
"너에 관해서 너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 엄마 아빠도 네 일에 관해서 너보다 더 잘 알 수는 없어."-103쪽

느낌과 감은 당장에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우니 남 보기에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그만큼 총괄적인 성격이라고 나는 믿는다. 느낌과 감에는 경험과 기억, 잘되고자 하는 인간적 본능, 진화론에 입각한 인류의 지혜가 녹아 있다고 생각한다.-110쪽

"그, 그걸 말이라고 해? 공부도 안 끝난 애가 임신하면 어떡해? 그 애 인생은 어떻게 되고?"
"인생이 어떻게 되긴? 우리 아직 건강하겠다, 부모가 힘껏 도와줄 텐데 아기 키우면서 공부하면 되지 무슨 걱정이야? 그런 걸로 사람 인생 안 망쳐. 그런 것보다 더 무서운 건 우울증이나 마약 같은 마음의 병이야. 그건 부모가 암만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잖아."
남편은 화를 낼까 말까 망설이는 눈치더니 결국 "그래, 당신 말이 맞아" 하고 대답했다.-118쪽

어떤 질문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나를 우습게 보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무적으로 여겨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찾았다. 재미있게도 평소에 빠릿빠릿하게 잘 따라오는 학생들은 나와 비슷한 아이디어를 냈고, 평소에 이해가 좀 느린 학생들은 나와는 다른, 그러나 때로는 나보다 나은 아이디어를 냈다.-233쪽

졸업식 날 부모들은 그 말썽 많았던 수학 전공반의 평균 점수가 2점(미국식으로 B에 해당)이란 소리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낙제 점수로 시작한 열등생들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상위권의 성적을 낸 것이다. 또 이 사건에서 자칫 피해자가 됐을 수도 있는 우등생들은 협동 작업을 통해 스스로의 힘으로 창조적인 공부를 경험하고 좋은 점수까지 유지했다.-242쪽

‘능력의 평등’과 ‘기회의 평등’은 구별되어야 한다. 일을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이 똑같은 대우를 받는다면 일에 대한 의욕을 잃겠지만,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는 사회에서는 구성원 모두가 열심히 노력한다. 자칫 잘못하면 보조금을 받아 연명했을 사람도 세금을 납부하는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다-244쪽

시험 볼 때 책, 참고서, 필기 노트를 사용해도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달달 외워서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응용 능력을 묻는 창조적인 문제가 출제되기 때문이다. 옆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싸우는 시스템이랄까? 자율성과 창조성을 바탕으로 깊이 있는 공부와 연구를 하는 것은 치열한 경쟁 시스템에서 옆 사람의 눈치를 보면서는 절대로 불가능하다.-246쪽

나는 나처럼 조금은 치사하고 비겁한 보통 사람도 자유와 자긍심에 빛나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걸 고백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지구 저편에서 이미 그렇게 살고 있거나 또는 그렇게 살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격려를 받고 싶었다.-2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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