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실격 외 세계문학의 숲 5
다자이 오사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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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실격人間失格 

명랑사회 구현. 해묵은 비타민 음료 광고에서 당시 인기절정 걸 그룹은 명랑댄스로 명랑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열심히 춤을 춘다. 모니터 앞에 가만히 앉아 몇 번이고 반복 재생해서 보니 명랑해지는 듯도 하다. 하지만 방금 지은 표정은 ‘어딘 모르게 음산하고 불길한 것’이고 ‘애초에 이건 웃는 얼굴이 아’니라는 <인간실격> 요조의 어린 시절 얼굴과 닮지 않았을까. 어린 요조는, 기획사가 됐든 가난한 집안이 됐든, 명랑사회를 위해 피곤을 무릅쓴 그녀들을 봤던 걸까.

나는 바른생활 교과서에 나오는 정의감이니 뭐니 하는 도덕성에는 별 관심이 없어요. 오히려 서로가 서로를 속이면서 맑고 밝고 명랑하게 살아가는, 혹은 살아갈 자신이 있는 것 같은 인간이 내게는 난해하기만 합니다. 사람들은 끝내 내게 그런 요령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것만 알았다면 나는 인간을 이토록 두려워하며 죽을 둥 살 둥 광대 짓 서비스 따위는 하지 않았겠지요. <인간실격> 27쪽

자살이 다자이 오사무가 스스로 자신에게 내린 죄의 대가 실격 판정 '벌'일까. 번번이 여자를 끼고 물에 뛰어들었다가 자신만 살아남은 파렴치한이래도 변명의 여지가 없는 그를 보면, 삶이란 이리 구차한 것으로 지독하게 살아보자, 는 역설을 읽는다. 만개했다가 한 번에 지는 벚꽃 이미지는 칼날이 잘 들어가지도 않을 법한 근육질로 몸을 단련하고서 할복자살한 미시마 유키오가 죄다 차지했지 병약하고 나약한 다자이 오사무의 투신자살로 돌아갈 몫은 아니다. 흐흐. 죽죽는 순간까지도 빛나는 가면이 되고 싶었던 미시마 유키오를 다자이 오사무가 살아 봤다면(다자이 오사무가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 특유의 웃음을 지어보였을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에게 ‘광대 짓’ 절정이 혹시 자살 시도가 아니었을까. 그가 할복자살을 할 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건 짐작이 가지만 목을 매달거나 독약을 먹거나 아니면 건물에서 뛰어 내리는 대신, 살 여지가 있는 투신자살을 택했던 이유는 ‘죽을 둥 살 둥’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줄을 타는 광대여서가 아니었을까. 여자와 같이 뛰어내렸다가 혼자 살아남은 상황만 보면 지독한 이기주의자처럼 보인다. 하지만 산다는 건 누구라도 이기적이지 않은가. 어쩌면 혼자 살아남았을 때 그는 ‘실제’로 죽을 각오를 한 그녀를 위해 최고의 광대 짓을 해보인 것 아닐까 짐작한다. 

여자 상인이 남자 상인보다 나를 두 배나 유효하게 사용한 것 같아요. 여자의 욕심이란 남자의 욕심보다 한층 철저하고 야비해서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구석이 있습니다. 화폐 230쪽

단편 소설 <화폐>에서 100엔 짜리 지폐가 말하는 진술은 참 이기적인 편견이지만, 다자이 오사무의 삶에서 여자가 남자보다 2배 이상 ‘유효’했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옳고 그름으로 판단할 수 없는 그 지독한 애증 관계에 기꺼이 몸을 던진 건 오사무인데, 무섭고 야비하다고 야유를 보내고 있으니, 참 속편하고 얄미운 화상이다. 그래도 여자가 아니라면 그가 어디에서 위로와 위안을 찾았을까, 하면 끙 하고 만다. (미시마 유키오가 부러워했던 게 요런 점이었을 게다.)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갑니다. 내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이른바 ‘인간’의 세계에서 단 한 가지 진리라고 생각되는 건 그것뿐입니다. 인간실력 135쪽

마침내 자살을 하고 말았지만 당시 그의 몸은 지독한 결핵이 갈아먹고 있었다. 그에게는 더 이상 ‘명랑성과 건강성을 대표하는 단편’을 다작으로 써대는 광대 짓을 반복하면서 인간 탐구를 계속할 여지가 없어진 뒤다. 내내 술, 마약, 여자만 좇았으니 미시마 유키오의 힐책처럼 자업자득이래도 할 말이 없지만 ‘모든 것은 그저 지나간다. 그것뿐이다’는 잠정 결론에 도달한 이상 39년 인생이면 족하지 싶었을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센스도 있고, 술만 마시지 않았다면, 아니, 마셨어도…, 하느님 같이 착한 아이였어.” 소설에서 요조를 기억하는 마담의 입에서 흘러나온 아쉬움 가득 담긴 여운이다. 소설 밖에서도 기행으로 얼룩진 망나니가 아닌 순수하고 센스도 있고 착한 아이로 기억되길 바라는 그의 소망은 이루어졌을까. 죽고 2달 뒤에 발표된 <인간실격>을 읽고 당시 일본 독자들이 어떻게 판단을 내렸을지 의문이다. 다만 마담의 마지막 말은 요조를 만난 적이 없고 오로지 요조가 쓴 ‘수기’만 읽은 소설가 ‘나’가 진술하는 후기에 등장하는 <인간실격> 마지막 문장이기도 하다. 지금 막 소설을 읽은 독자인 나와 다르지 않다. 나약한 인간 막장기라 불러도 절절한 독백을 솔직하게 늘어놨지만 마지막 만큼은 다르게 기억되고 싶은 욕심일까. 아니다. ‘광대 짓’에서 더도 덜도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누군가에게 그의 소설이 위안을 준다면 지금껏 벌인 ‘광대 짓’이 무의미하지만은 않았다는 반증이다.

그이 보다 오래 살아야 한다면 광대 짓을 하면서도 견딜 수 있을 만큼 뻔뻔하거나, 광대 짓이 광대 짓일 줄 모르고 살거나 둘 중 한 가지여서는 아니어야 한다. '당신은 기꺼이 광대 짓을 해보이며 위로를 주고 싶은 누군가가 있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한다면 그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요조를 그렇게 기억하는 인물은 부모, 형제, 친구, 아내가 아니다. 관객인 그들은 정작 요조의 광대 짓을 웃고 즐기면 그뿐이었지만, 광대 화장을 지우고 찾아갔던 술집 마담은 달랐다. 내가 벌인 광대 짓을 알아차리고 기꺼이 외상으로 술 한 잔을 따라주는 일이면 족하다는 것이다. 알아보는 누군가가 있기 마련이다. 

요조가 한 말처럼 모든 것은 지나간다. 무심히 졸졸졸 흐르는 냇물이라도 보고 있으면, 다자이 오사무는 흐르는 물에서 물리적 개념으로 우주 전체를, 종교적 개념으로 이승과 저승을 아우른 온전한 세상의 회전을 봤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지금도 어딘가에서 광대 짓을 하고 있을 것이다. 자꾸만 둘이 단짝이라는 생각이 가시지 않는 미시마 유키오도 기꺼이 동참해서 듀엣으로 말이다. 

<인간실격>은 책 한 권으로 묶기에는 어중간하다. 다자이 오사무가 결핵이 걸리지 않았더라면 그의 인간실험이 좀 더 오래 갔을 것이고 장편소설 한 권 분량이 나왔을 것이다. 뭐,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싶은 건 독자 생각이지만 책 편집자라면 고심할 부분이다. 시공사에서 나온 <인간실격>은 단편소설 <비둘기비늘 옷>, <로마네스크>, <새잎 돋은 벚나무와 마술 휘파람>, <개 이야기>, <화폐>가 같이 실렸다. 의도한 부분인지는 몰라도 다자이 오사무가 이전부터 물을 어떻게 생각해왔는지 짐작할 만한 편린이 있다. 

한차례 용소 깊숙이 가라앉았다가 상반신이 둥실 물 위로 튀어 올랐다. 눈을 감고 입을 조금 벌리고 있었다. 푸른색 셔츠 여기저기 찢어지고 채집 가방은 아직 어깨에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뿐, 다시 쑥 물 밑바닥으로 끌려 들어갔다. (145쪽)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이윽고 몸을 하늘하늘 흔들며 똑바로 용소를 향해 다가갔다. 순식간에 빙글빙글 나뭇잎처럼 빨려들었다. (153쪽) '물고기비늘 옷' 

지로베는 간간이 강에서 목욕을 했다. 바닥 깊이 잠수해서 가만히 있기도 했다. 싸움이 한창일 때 아차 잘못해서 발이 미끄러져 강에 굴러 떨어졌을 경우를 고려한 수행이었다. 강이 온 동네를 흐르고 있으니 어쩌면 그런 경우도 있을 터였다. (173쪽) 그(사부로)에게 떠밀린 두부 가게 막내아들은 강물에 떨어지면서 가느다란 양쪽 다리로 오리처럼 세 번 천천히 허공을 할퀴듯 버둥거린 뒤에 풍덩 빠졌다. 파문이 강물의 흐름을 따라 한 칸쯤 아래쪽으로 옮겨간 뒤에 그 파문이 한가운데서 한쪽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179쪽) '로마네스크'

글쎄, 그 의대생이 나를 버리고 여관을 나간 뒤에 곧바로 세토우치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게 아니겠어요. 그때 일하는 아줌마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얼핏 들렸습니다. “혼자서 죽다니 너무 바보 같지 뭐야. 그렇게 예쁘장한 사내라면 내가 언제든지 함께 죽어줄 텐데.” (229쪽)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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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밤 세계문학의 숲 4
바진 지음, 김하림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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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거리를 따라 걸으면서 그녀는 때때로 거리 양옆을 바라보다가, 카바이드 등불이 찬바람에 꺼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이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밤은 매우 추웠다. 그녀는 온기가 필요했다. (317쪽) 멀리서 손전등 불빛이 가늘게 반짝였다. 마치 친숙한 친구의 눈빛 같아서 그는 갑자기 온기를 느꼈다. 그러나 빛은 곧바로 사라져버렸다. 그의 주위는 여전히 그리 진하지 않은 어둠뿐이었다. 한기가 그의 등을 계속 찔러서 몸이 떨려왔다. (8쪽) 

일본이 전쟁에서 진 그해 10월 즈음, 바진의 소설 <차가운 밤>의 부인 청수성의 시점으로 바라본 중국 충칭 거리의 스산한 밤풍경, 소설의 마지막 구절은 더 이상 공습을 알리는 긴급 경계경보가 울리지 않으나 소설 도입부 남편 왕원쉬안의 시점으로 본 충칭 밤거리 풍경과 같은 시공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비슷하다.

 “굶어죽겠군. 물건을 팔아보았자 다 먹어치우니……. 전쟁에서 이기면 바로 집에 돌아갈 줄 알았는데.” “승리는 그들의 승리지, 우리의 승린가.” (316쪽) 1년 사이, 일본이 망하고 세상은 달라졌으나 대부분 인민들에게 가난한 일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차가운 밤이다. 승전경축일에 왕원쉬안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일본이 충칭까지 밀고 온다는 소식에도 떠나지 않았던 시어머니와 아들 샤오쉬안은 충칭을 떠났다. 더욱 추운 밤이다.

그나마 가진 모든 걸 시선을 수습하는 데에 써버렸을 늙은 시어머니와 어린 아들에게 세상은 혹독할 것이다. 자신을 미워했던 시어머니 그리고 사이가 어색했던 아들, 자신을 사랑하는 천주임이 있는 란저우로 돌아가는 길밖에 도리가 없다. 어쩌면 이제 남은 인생을 지독스레 지루하고 불행했던 가족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 생긴 셈이다. 하지만 청수성도 읽은 독자도 가슴이 묵지근하다.

가정 내 구도만 놓고 보면 이는 지독스레 일주일 내내 반복하는 막장 드라마와 똑같다. 어떤 면에서 이 작품이 지식인인 왕원쉬안의 내면을 묘사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면서도 쉽게 읽히는 이유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을 읽는 내내 충칭의 자욱한 포연 같은 안개처럼 작품을 내리 누르는 사회 불안이 읽힌다.

<차가운 밤>에서는 전쟁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늘 긴장감이 돌지만 뜬소문으로만 끝났을 뿐, 일본군이 오지 않은 충칭은 5주 반 동안 계속된 대학살로 26만 명 민간인이 학살을 당한 난징과 다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당시 중국 인민들에게 닥친 불안이 지식인의 눈을 통해 뛰어난 심리 묘사로 드러난다.

전쟁을 직접 다루지 않으나 구습, 불평등, 착취, 차별 등 사회 전반에 걸친 부조리가 구를 장롱 위에 올려놓지 않으면 밤새 가죽을 파먹는 쥐처럼 전쟁을 통해 확연하게 드러난다.   전쟁의 파문은 가장자리에서도 떨림과 긴장은 멈추지 않고 왕원쉬안이 교정을 보는 싸구려 종이처럼 한 가정을 가볍게 찢어버리고는 입을 닫았다. 하지만 교육자로 세상을 깨우려는 그의 이상은, 자유를 누리고 싶은 아내의 꿈은, 참한 며느리를 원하는 시어머니의 바람은 전쟁이 아니더라도 쉽게 이루어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바진이 일본이 패망한 직후인 1946년에 쓴 소설이 고발극이나 찬양극으로 치닫지 않고 중국 인민들의 삶을 깊숙이 관통하는 작품이라는 점은 바진이 중국의 대문호로 불리는 까닭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소설이 예감이라도 하듯이 이후 반세기를 더 사는 동안 중국의 굴곡진 이데올로기의 격류에서 “개인주의, 무정부주의, 애정지상주의에 빠진 극단적 개인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으면서 강제 노동을 당하고 재산을 몰수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번역을 맡은 김하림 교수는 바진 생전, 그와의 만남을 감격스레 회고한다. 바진이 유창하지는 않으나 항일운동을 하면서 만난 조선인들의 ‘불굴의 투쟁 정신과 뛰어난 활동에 감복’해 간단하게나마 한국어를 익혔다는 대목이 나온다. 바진이 소설의 배경으로 삼은 충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40년 이후 해방 전까지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았던 곳이다.

오른쪽 구석에서 고개를 처박고 쓸쓸하게 술을 마시던 중년 사내가 갑자기 일어나 술값을 치르고 나갔다. 그 사내가 나가자 주인이 새하얀 얼굴의 손님을 향해, 방금 나간 손님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오는 단골로, 말하기도 싫어하고 과음도 하지 않으며 안주는 언제나 두부 두 모로, 매일 제시간에 왔다가 제시간에 가는데, 어떤 사람인지 직업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55~56쪽

왕원쉬안이 거닐던 충칭의 밤거리, 청수성이 천주임과 점심을 먹고 들리던 세련된 국제커피숍, 길모퉁이 선술집을 서술하는 행간에서 조심스럽게 수심에 잠긴 임시정부 요인들 얼굴을 본다. <차가운 밤>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나, 한편으로 소설의 무거운 분위기가 암시하듯 이후 우리의 근현대사의 아픔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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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 세계문학의 숲 3
토머스 드 퀸시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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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이 상비약으로 팔리던 시절이 끝난 지 오래, 아마도 난 죽을 때까지 아편이 주는 고통, 허무, 낭패와 기쁨, 만족, 희열을 느낄 기회가 없을 것이다. 죽기 직전에야 독한 진통제로 잠시 맛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아무튼 지금까지 내가 모르는 세계이다. 악마의 약, 마약으로 불리는 것들이 가진 유혹의 강도는, 마약중독자들의 피폐한 삶을 공익방송 다큐로 보면서도 좀처럼 고개를 돌리기가 쉽지 않다. 토머스 드 퀸시의 수필집 <어느 영국인 아편쟁이의 고백>은 사회가 금기시하는 아편 중독의 세계를 제3자의 선입견을 담지 않은 순수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고백록이다.  

아편에 수반되는 자비로운 감정의 확대는 결코 열병의 발작이 아니라, 원래 공정하고 선량했던 마음의 충동들과 싸우고 그것을 혼란시킨 뿌리 깊은 고통이 제거되면 마음이 자연히 되돌아가는 그 상태로 건강하게 회복되는 것이다. 90쪽 

그의 생생한 고백을 들어보면, 아편을 경계하라는 주제를 책 전반에 걸쳐 근거에 깔아두었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와 거리가 먼 진술이 등장한다. 그는 아편보다 감정을 맥없이 풀어버리는 술을 더 경계하라고 조언한다. 드 퀸시가 아편을 복용할 당시, 영국에서 감기약처럼 약국에서 팔았다는 전제를 고려하더라도 아편이 일상을 지배하는 세상이라니. 아편중독자들로 득시글거리는 매춘가가 먼저 떠오르지만, 드 퀸시가 아편을 처음 복용했던 19세기 초반 영국은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Age)가 막 시작될 즈음으로 산업혁명과 자유무역으로 세계 지배를 예고했던 시절이다.  

다만 동시대 소설인 찰스 디킨즈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알 수 있듯이 산업사회로의 전환은 농민계급의 몰락으로 명과 암이 뚜렷한 시기이기는 하다. 드 퀸시는 청소년기 기숙학교에서 도망친 뒤 극빈하게 지내는 내내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평생을 따라다닌 지독한 위장병을 앓았고, 이외에도 이런저런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는 74세까지 살았다. 아편중독자로 반평생이상을 살았으면서도 동시대 작가들 가운데 가장 오래 산 셈이다. 그가 당시 민중의 삶과 괴리된 채로 쾌락을 즐긴 중산층으로만 볼 수는 없다. 호황을 맞은 직물 상인 집안이기는 했으나 아버지의 이른 죽음 이후, 퀸시 집안은 내내 넉넉하지 않았다. 청소년기 창녀 앤과의 일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드 퀸시는 당시 계급상승에 안달이 난 중류층이 아니었다. 

대다수 사람들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과 슬픔에 이런저런 형태로 동정심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들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경향이 있지만, 그 당시 나는 오히려 그들이 낙에 공감하는 것으로 내 관심을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 그들은 투덜투덜 불평을 늘어놓을 때도 있었지만, 얼굴 표정이나 말로 인내와 희망과 평온함을 표현할 때가 훨씬 많았다. 일반적으로 보면, 적어도 이 점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보다 훨씬 철학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100~101쪽 

낭만주의자로 그의 삶과 고백이 곧 아편중동을 사소한 문제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물론 아니다. 이 책은 책날개에서 소개하듯이 자신의 삶에 걸쳐 수십 년 동안 지속할 수 있었던 탐닉에 대한 기록, 그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이야기이다. 19세기 영국 문화를 보는 사료로 수필집의 가치가 다시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시공사 판은 꼼꼼하게 주석을 달아 놓아 당시 시대에 대한 이해가 없더라도 어렵지 않게 읽힌다.  

다소 자극적으로도 보이는 제목처럼 아편 때문에 벌어질법한 파란만장한 삶을 기대했다면 굳이 읽을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언론을 비롯해 영화, 소설 등 재구성한 상품으로 만나는 대중 장르 물에서 봤던 관련 사건사고 등은 일체 벌어지지 않는다. 그는 아편을 즐기고 글을 쓰면서 여생을 보낸 어쩌면 유일무이한 시절을 누린 행복한 작가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아편에 대해 일방적 정보뿐인 시대에, 아편을 다룬 보고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그 감흥을 공유할 길이 없으니 지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지지 못하고 즐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탐닉 보고서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심정이 과연 행복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책이 세계문학으로 엮여서 나왔다면 그 이유가 탁월한 문체-소설가 김석희의 번역도 나쁘지 않지만 원문으로 보지 않는 이상 역시 의미 없는-외에도 아편을 비롯한 중독자들이 나락으로 바로 추락하지 않도록, 적어도 떨어질지언정 천천히 돌아가는 지침서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마약, 섹스 등 쾌락으로의 질주가 아니더라도 사회나 스스로 한계를 정한 틀 밖으로 나아갈 힘을 북돋는다. 사회가 금기하는 것들을 갈망하거나 익히 중독된 이들에게 체험을 바탕으로 한 사유를 담은 이 책은 얇지만 지루한 19세기 수필집이 아닌 육화하여 인간들과 함께 했던 신, 예수의 일대기를 다룬 4복음서와 다르지 않다. 

영국 소설가 로버트 스티븐슨이 뮤지컬 원작으로 유명한 중편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이상한 사건>을 쓸 당시 병원에서 마약성분인 LSD가 든 맥각으로 치료를 받는 와중이었다. 프로이드가 심리학 저서를 발표하기 전, 이미 인간의 선과 악, 이중성을 다룬 수작으로 꼽히는 소설을 출간한 1886년 역시 빅토리아 시대였다. 스티븐슨 외에도 당시 많은 작가들이 어떤 경로로든 마약을 복용했다고 한다.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스티븐슨 역시 드 퀸시의 수필집에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비록 드 퀸시는 변명이든 뭐든 아래와 같이 진술하지만 말이다.

의사들은 내 감정에 대한 공연한 배려나 고려 때문에 내 송장을 확보하고 싶다는 뜻을 표명하기를 주저하지 말기 바란다. 장담하거니와, 내 몸뚱이처럼 비정상적인 육체를 ‘실물 실험’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나에게 큰 명예가 될 것이다. 이 생에서 그렇게 많은 고통을 나에게 안겨준 내 몸뚱이가 죽은 뒤에 그런 앙갚음과 모욕을 당할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나에게 큰 기쁨을 줄 것이다. 18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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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1 세계문학의 숲 1
알프레트 되블린 지음, 안인희 옮김 / 시공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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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Berlin Alexanderplatz] 

찬바람이 쌩쌩 부는 베란다 책장에는 오래된 가계부와 성경과 낡은 수첩 모음 사이 1983년 발행판 중앙일보사 오늘의세계문학전집이 두서없이 꽂혀 있다. 30권 중에 20권정도 밖에 남지 않았지만 보르헤스, 오에 겐자부로 등 그 당시만 해도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작품이 수록된 선집이다. 작가지망생이었던 먼 친척 누군가가 이민을 가면서 두고 간 책이 돌고 돌아 우리 집까지 온 것이다. 난 이 중에서 알프레드 되블린의 작품을 봤을까.

알프레드 안더쉬였다. 비슷한 이름의 독일 작가의 작품, 그러니까 착각이었다. 사실 서너 페이지 읽다 말기도 했다. 올해 출간한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서는 오래 묵은 책냄새가 났다고 할 밖에 없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을유문화사에서 신장판세계문학전집으로 1979년에 발간된 적이 있었다. 본 적도 없다. 그러니까 난 이 소설을 80년쯤 지난 지금 처음 손에 잡아본 것이다.

그렇다면 읽지도 존재하지도 않았던 이 책의 흔적을 난 뒤졌을까. 익숙한 무언가, 내가 분명히 전에 알고 있는 뭔가와 혼동할 만한 익숙한 무엇이 있었을까. 그렇다고 두 권 분량 소설이 읽기 쉽다거나 흔한 소설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흥미진진한 범죄이야기’라고 말하는 비평가가 있다고 하지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펭권문고 서스펜스 소설과는 아주 먼 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든 독일 베를린에서 벌어지는 시점은 1927년 가을부터 1929년 이른 봄 1차 세계대전 패배 이후 패전국으로 승전국에게 부담해야 했던 무거운 짐으로 사회 전체가  위축되었던 시절이다. 1929년 세계공황 이후 나치 정당이 발현하기 직전까지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중심으로 음울한 독일 사회가 생동감 있게 펼쳐진다. 생동감이 있다는 표현이 맞나 싶기는 한데, 끓는점 직전의 독일사회의 불안을 법전, 신문기사, 광고, 백과사전, 연설문, 공고문, 편지, 일기, 유행가 가사를 그대로 따와서 삽입했다는 의미이다.  

당시 베를린을 그대로 박제한 듯 옮겨온 방식은 독일인들에게 각별한 향수 혹은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키는 시대 정서를 어느 정도 반영하는 지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세심하게 일일이 각주를 달았다고 해도 소설 한권쯤으로 내가 이해했다면 거짓말이다. 더군다나 날것 그대로의 차용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장치로 쓰였다기보다는 전과자, 부랑자, 장애인의 낙인이 찍힌 임노동자 프란츠 비버코프의 부정확한 진술과 상상과 회상을 보충하기 위한 가공하지 않은 실마리로 왜 당시 베를린은 그럴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설명과 반증으로 차용했다는 혐의가 더 짙은 편이다.

베를린에 대한 강박에 가까운 (적어도 독자 입장에서 그렇게 보이는) 집착은, 이 작품 출간 이후 히틀러 광기를 피해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 시민권을 얻고, 다시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기까지 떠돌면서도 독일을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 운명을 타고난 유대계 독일인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망명자로 떠돌던 그이의 인생이 나와 무슨 상관이람.

요사이 소설을 자주 읽는 편이 아니지만 10대 후반과 20대를 돌아보면 어느 시점에서 강하게 나를 뒤흔든 소설의 전조는 늘 세상과 갈들을 빚는 작가들 혹은 주인공들의 이야기였다.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지 못하는 이들의 말들은 가볍고 또 거칠 것이 없었다. 예를 들면 이상의 <날개>나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부터 이인성의 80년대 소설들과 여전히 읽을 때마다 짜릿한 95년 작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대학을 갈까말까 고민할 때 우연히 발견한 하일지의 <경마장 가는 길>이 그렇다.

길거리를 헤매고 있든, 골방에 처박혀 있든 소설 주인공들은 항상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는 인물들인 동시에 휴화산이지만 구덩이 깊은 중심에 꺼지지 않은 용암의 흐름처럼 뜨겁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과 군사독재 시절과 세기말을 단순히 ‘불안’이라는 코드로 한 묶음으로 둘 수 있을까 싶지만, 작가들 역시 적어도 그 소설을 쓸 당시에는, 부침이 많았던 시절로 기억한다.

대학을 가서 졸업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는 동안 멀어지면 더 이상 뜨겁지도 않고 흐름이 멈춘듯 보이는 속살 같은 이야기들은 더 이상 내 차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후 다시 찾은 작가들 역시 어느 순간 소설을 쓰지 않거나 쓸 수 없거나 형편없었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은 그렇게 내 지난 시절의 가난과 목마름을 헤집는다. 사춘기 시절이, 재수생 시절이, 대학을 휴학하고 떠돌던 시절이 행복하지는 않았으나 절절하게 고민하면서 굵고 넓은 나이테를 만든 시기였음은 분명하다.

이 작품의 동일하지 않은 화자와 철학적 진술들은 프란츠 비버코프의 것이 아니다. 알프레드 되블린의 것이 거름망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투사되고 있지만 ‘소리나 그림이나 문자 텍스트를 인용하는’ 영화 기법을 가지고 풀어쓴 방식은 번역자의 말처럼 ‘20년대 말의 베를린 자체가 이 소설의 주인공일지도 모른다’는 진술과 맞닿아 있다. 동시에 그 광장을 중심에 둔 시대에 대한 정밀한 묘사와 진술은 나 역시 작가의 시선으로 프란츠의 행보를 따라 그대로 그 광장으로 데려가서 나의 고백으로 탈바꿈한다. 파스빈더 감독의 1980년작 영화로 이 소설 다시 읽는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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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동화집 1 안데르센 동화집 1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지음, 빌헬름 페데르센 외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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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관광지로 제주도보다 더 많은 외국인이 찾는 곳이 있다. 14만평짜리 남이섬이다. 하지만 정작 가보면 눈길을 잡아끄는 휘황찬란한 뭔가가 있는 게 아니다. 잠깐 왔다 가는 이들의 눈에 뭐가 보이는지는 다 다르겠으나 담백한 가정식처럼 돌 하나, 나무 한 그루처럼 평소 눈여겨보지 않았던 소소한 것들에 사연을 담아 작은 섬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중 남이섬에 첫 발을 들여놓는 곳, 선착장 근처 물가에 여인상이 하나 서 있다. 이른바, ‘남이섬 인어공주’(www.namisum.com/_ver01/_bbs_iw2000/?link_code=0704)다. 그리 잘 만든 작품인가 싶은데, 이야기를 담으니 풍성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요 작은 섬을 ‘나미나라’라 하여 채우고 있는 건 정작 눈에 보이지 않은 사연들이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종종 눈에 띄는 인어공주상의 원조인 안데르센의 나라, 덴마크의 코펜하겐에 있는 인어공주상도 크기가 80cm에 불과한 작은 동상에 불과하지만 관광객들이 꼭 찾는 인기 관광명물이다. 동화의 아버지, 안데르센의 상상력을 한껏 담은 동화책은 아이들에게 일용할 양식으로 지금도 널리 사랑받고 있고, 또 남이섬의 예처럼 다양한 문화 콘텐츠로 변주되고 확장되면서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 ‘인어공주’는 안데르센의 창작 동화이나, 물속 세상을 다룬 이야기는 안데르센 당시 유럽 민담이나 독일 시인 푸케 시 등으로 알려진 소재이다. 유럽이 아니더라도 동서양에 고루 걸쳐 민담과 전설로 바닷속 세상을 전제로 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고, 판소리 ‘심청전’나 고대소설 ‘별주부전’ 등으로 우리에게도 꽤 친숙한 편이다. 안데르센동화집은 스토리텔링의 놀라운 힘을 확인시켜주는 유명한 일례이다.

시공주니어에서 안데르센이 남긴 200여 편의 동화 가운데 156편을 완역본으로 출간하는 ‘안데르센 동화집’ 시리즈를 총 8권으로 발간하고 있다. 작품 순서까지 당시 출간에 맞추고 초창기 삽화를 그대로 싣는 등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개작하기보다는 안데르센과 그의 작품을 복원하는 데에 중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작업을 통해 안데르센의 이야기가 지금처럼 널리 읽히고 사랑받는 이유를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짚어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안데르센의 어린 시절과 가족사, 안데르센 동화의 특징, 젊은 시절 화보와 작품마다 전문가의 해설을 곁들여 작품의 출처, 의의와 배경을 소개하면서 작품의 이해를 돕는다.

‘인어공주’를 예로 들면 인어공주는 안데르센의 자아로, 바닷속 세상은 안데르센이 태어나고 자란 하층 계급사회를, 왕자가 사는 물위 세상은 덴마크 상류사회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사람 취급을 못 받고 괴물 취급을 받는 인어공주가 두 발을 얻은 뒤 걸을 때마다 칼날을 밟는 듯한 고통과 시련을 받는 일련의 과정은 상류 사회를 동경하는 배우지망생이었으나 퇴짜를 맞고, 소설가가 된 뒤에도 동화를 발표할 때마다 비난받기 일쑤였던 당시 심정을 반영하고 있다고 풀어낸다. ‘인어공주’는 평단의 싸늘한 평가에 동화를 쓸 마음을 접고 소설 집필에만 전념하던 안데르센이 착상과 플롯이 떠올라 ‘도저히  쓰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어서’ 쓴 작품이라고 한다. 

만약 당시 그가 역경을 겪지 않았더라면 인어공주는 물거품이 되지 않고 왕자와 행복하게 잘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애초 왕자님이 탄 배가 폭풍우를 만나지 않았을 수도 있고, 막내 공주가 호기심을 가질 일도 없이 다른 언니들처럼 바닷속에서 만족하면서 살았다는 식의 무난한 이야기가 나왔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그랬다면 평단에서 계몽적, 교육적 측면은 없고 환상적인 묘사에만 집착한다거나 ‘폭력적이고 비도덕적이라 어린이한테 읽히면 안 될 작품’(작은 클라우스와 큰 클라우스)이라는 혹독한 비판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허나 우리는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비극적 정서를 담아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은 ‘인어공주’는 영원히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안데르센 스스로가 14살에 배우가 되겠다고 무작정 시골 마을에서 대도시 코펜하겐으로 떠났듯이, 그가 보는 아이들이란 어른들의 생각처럼 어리지도 않고 어수룩하지도 않으며 어리석지도 않은 작은 어른임을 익히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반대로 ‘벌거숭이 임금님’(원제 : 황제의 새 옷)처럼 허위와 허풍으로 가득한 어른들을 일깨워줄 이야기로 썼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추억을 되살리기는커녕 뜨끔해하면서 안데르센 동화집을 읽는 이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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