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어를 금하노라>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고등어를 금하노라 - 자유로운 가족을 꿈꾸는 이들에게 외치다
임혜지 지음 / 푸른숲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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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녹색평론> 편집자이자 생태운동가인 김종철 선생님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허나 커다란 대학교 세미나실이 무색하게 몇 안 되는 사람들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김종철 선생님은 오붓하니 좋다고 했다. 어차피 자신과 같은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몇 안 되는 터, 들을 귀 있는 사람들만 들으면 족하다 한다.  

생태에 바탕을 두고 종과 획으로 대한민국 사회를 진단하는 그의 얘기는 내가 몰랐거나 혹은 알아도 그러려니 하는 관성으로 사는 부분을 꼬집었다. 그의 얘기가 이른바, 보수 언론을 떠나 진보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쉬이 나오지 않는 이야기였다.

일례로 들자면 그는 오는 12월 코펜하겐에서 열리는 기후협약을 두고 큰 기대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기후협약을 맺는 주체들이 정권 창출이 목적인 정치인들이고 보면, 그들의 선거판은 생리적으로 기업의 자본에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뿌리를 자본에 두고, 지구환경을 논한다는 자체가 난센스라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는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인 지구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데다,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그래도 이 정도면 됐지, 하는 식으로 살살 달래면서 세뇌를 한다는 것이다. 그이의 결론은 <녹색평론>지에서 늘 주장하듯이 자발적 공동체를 통한 순환 구조의 삶이며, 그게 가능한 이유는 딱 한 가지 ‘어울려 사는 재미’다. 그의 얘기는 내게 참 마중물 같아서 속에서 뭔가 솟구쳐 오르는 듯하나, 바쁜 일정에 쫓겨 강연을 채 다 듣지도 못하고 나와서는 도루묵이 되기 일쑤이다.

당장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를 확인하는 일이 바로 내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는 기쁨 아니겠는가? 사회가 뒤집어지거나 말거나 변치 않는 나의 가치를 확인한 것. 이것이 인생의 횡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77쪽

마침 김종철 선생님의 말씀에 잘 맞는 삶을 읽었다. <고등어를 금하노라>의 저자 임혜지는 독일 남자와 독일에서 사는 52세 평범한 주부로 독일에서 건축 박사 학위를 받았으나, 그녀의 이름이 그 방면에서 그다지 유명한 것 같지는 않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는 우리가 결혼 초반에 직업 세계에서 승승장구하지 못했다는 이유도 일부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 인생관이 확고하게 서기 전에 일에 대한 유혹이 먼저 들어왔다면, 승부욕이 강한 우리의 성격으로 보건대 진로를 그 방향으로 결정했을지도 모른다. 85쪽

그녀 스스로 말하길, 그녀는 프리랜서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거나 하는 식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실력이 부족하거나 경쟁에 뒤쳐졌다가 보다 남편과 두 아이가 여유자작하게 늘 행복한 삶이 화두이다.

물론 그랬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지금과 다른 종류의 기쁨을 맛보았을 것이다. 내가 지금 아무런 후회 없이 이렇게 행복한데, 내가 가지 않은 길이라고 해서 폄하할 이유는 없다. 나는 이런 행복감이 나만의 거짓말인지 아닌지 고민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 누리고 있는 것을 무척이나 사랑한다는 사실이다. 86쪽

그럼 그녀의 혼혈 아이들이 독일 최고 명문대라도 수석 합격한 것일까. (독일에는 세계적 명문 랭킹 대학이 없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 게 한두 개 대학의 실력이 국력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개의치 않는단다.) “우리 아이가 공부는 못해도 성격은 좋으니 걱정 마세요.” 아이의 유급을 걱정하는 학교 선생님을 두고 엄마랍시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내가 읽었을 때, 이 책은 국민 필독서가 되어야 할 책이다.

“어라? 고등어 먹는 게 왜 변태야? 개고기는 괜찮고 고등어는 변태야? 자기는 독일 사람이니까 생선 안 먹고 자랐지. 나는 한국 사람이라서 고등어가 고향 음식이란 말이야.” “그럼 앞으로는 당신만 먹어. 다른 사람들까지 먹을 필요는 없잖아. 바다 생선 안 먹고도 잘 살아온 사람들까지 맛을 들여 엄청나게 먹어대니 씨가 안 마르겠어? 정작 생선에 의지해온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빼앗긴 셈이고 말이야. 그건 변태야.”  “으이그, 그럼 나도 먹지 말라는 소리지. 그냥 안 먹고 말지. 어떻게 나 혼자 먹으려고 고등어를 굽겠어? 근데 당신 말이 맞네. 알았어.” 63쪽 

고등어를 금하노라, 라는 제목의 연유가 된 대화는 친환경 혹은 동물보호 단체 회원들의 대화가 아니다. 평범한 저녁 식탁에 모인 식구들끼리 나누는 대화다. 침 튀어가며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이러니 어떠니? 하고는 그래? 알았다, 는 식이다. 평범하다고 하지만 몸에 배이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삶이다. 이게 고행이 아니라 머리로 따지고 마음으로 이해하기 전에 즐거운 일상이다.

이들이 4인 식탁에서 서로 존중하는 방식은, 과장을 하자면 고등어를 통해서 세계인을 대상으로 확장한다. 그깟 고등어 안 먹는 게 뭐가 대단할까 싶지만, 구호가 크면 클수록 늘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증거일 뿐이지 않은가. 내 가족이 소중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반대로 누군가 공존을 위해 노력할 때 우리 가족의 삶이 행복하다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인다. 물론 당연하다고 말을 하지만 대부분 말 뿐이다.  

1등을 외치는 승자독식사회의 절정인 한국에 비해 독일이 좀 더 성숙한 분위기라는 건 알지만 그 안에서도 이런 가치가 보편은 아니라고 말한다. 삶이 예배가 되는 삶이라는 구호를 많이들 쓰는데, 딱 이들이 사는 방식이 삶이 공존이 되는 삶이다.

그렇다고 이 책이 거창한 이슈로 무게를 잡는 책이 아니다. 임혜지 아줌마의 독일생활기는 폐경을 맞은 뒤 조심스런 성생활, 극과 극인 남편과의 아옹다옹 다툼, 난독증으로 고생했던  두 아이의 어린 시절, 한국과 독일을 떠나 밉살스런 아줌마들(특히 시어머니)의 소소한 일상부터 독일국적을 취득하지 않았다고 했을 때 놀라는 독일인들과 한국인들의 이중적인 태도 등등 그녀를 둘러싼 삶 전반을 조근조근 설명한다. 

그녀와 그녀의 식구들의 이야기도 읽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무엇보다 내가 보고 읽고 참여한 환경, 인권, 교육, 나치즘(독일이다 보니 특히) 등 민감하고 무겁고 중요한 주제에 대해 이렇게 여유롭고 편안하고 아기자기한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풀면서도 핵심을 정확하게 꿰뚫어서 설명한 세미나, 강연, 책, 캠페인을 알지 못한다.

나는 나처럼 조금은 치사하고 비겁한 보통 사람도 자유와 자긍심에 빛나는 삶을 살고 싶어 한다는 걸 고백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지구 저편에서 이미 그렇게 살고 있거나 또는 그렇게 살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격려를 받고 싶었다. 281쪽 

보통 사람, 이 책을 학자나 정치가나 운동가 딱지 붙는 치들이 쓰지 않았다고 해서 평가가 절하되거나 이대로 흐지부지 책 무덤에 파묻혔다가 파지가 되는 건 아닐까, 조마심이 난다. 책을 읽고 이런 우려를 하기는 정말 처음인데 이 책의 주제는 바로 이런 권위의식의 철저한 깔아뭉개기다! 특히 이데올로기에서 도덕으로 살짝 갈아탄 권위주의! 하여, 자칫 여성주간지에 실릴 만한 주부 에피소드가 수필집 코너가 아니라 인문학 코너에 분류되었는지 누구든 이 책을 보면 그런 의심을 거두지 않길 바란다.

누가 읽어도 좋지만 무엇보다 부모와 아이가 꼭 함께 읽고, 토론하고, 대화를 나눴을 때 제대로 빛을 발하리라 믿는다. 대한민국 부모라면 사사건건 간섭하는 자녀의 가치관, 진학, 성, 장래 희망, 가치관 등을 두고 그녀는 아이들의 선택과 판단에 맡긴다. 유독 그녀가 한 가지만은 막았는데, 중독 우려가 있는 컴퓨터 게임이다. 그녀가 막는 딱 한 가지를 우리 부모들은 인정하고, 나머지는 정 반대다. 누가 정답일까? 하나마나한 소리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누가 보통 사람이고, 누가 이상한 사람인지 판단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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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책쟁이들>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한국의 책쟁이들 - 대한민국 책 고수들의 비범한 독서 편력
임종업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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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문맹률이 작년 기준으로 1.7%인 현실로 보면, ‘한국의 책쟁이’라는 한겨레신문 정기 꼭지는 꽤 근사한 생각이다. 하지만 문맹률과 독서량이 반비례할 법한데, 또 그게 아닌 것 또한 현실이다. 가을이 독서의 계절이라지만 그 역시도 무색하다.  

원인을 꼽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고, 그저 ‘보기’에 능한 이들은 많아도 ‘읽기’에 능한 이가 점점 드물기만 하다. 그래도 늘 애들한테 책을 읽어라, 읽어라 입버릇이 달라붙은 우리이고 보면 책 위에 책 두께만치로 먼지가 더께마냥 눌어붙을지언정, 귀한 줄은 아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책 한권 들고 다니는 게 폼이 난다는 풍토라, 책시장이야말로 물건 회전이 가장 빠르고, 유행을 가파르게 치고 올라오는 바닥이다. 책 한 권을 내고 ‘모 아니면 도’인 로또판인거야 다 아는 사실이다 보니, 하루키의 신작 선인세가 십수억 원에 달하는 게 이해 못할 일도 아니란 말이다. 평론가가 말하길 인터넷 서점에 올라오는 리뷰를 보면 상품이 책일 뿐이지, 내용은 일반 기성품 품평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한숨을 쉰다.  

신간이 억수로 쏟아져 나오는 요즘 과거 오래된 애물단지, 유행이 지나도 한참 지난 책을 보물단지마냥 끼고 사는 사람들 이야기가 책으로 나왔다. 임종업 한겨레신문 선임 기자가 자신이 신문에 쓴 기사를 모아서 낸 <한국의 책쟁이들>이다. 

해묵은 고전도 개정판이 시시때때로 나오는 판에 때깔(디자인)이 볼품없는 책들은 상품가치가 뚜욱 뚝 떨어져서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마련이다. 개중 책 중간상 김창기 씨 역시 책을 책으로 보기보다는 골동품 정도로 보는 장사꾼이지만, 그의 얘기가 한 자락 끼어있다고 해도 책 전체를 나무랄 정도는 아니다. 어쨌거나 그이 같은 이가 있어서 책에 소개된 나머지 인물들이 빛나는 것도 맞는 말이다.

책과 함께 평생을 살아온 이들의 각자가 책 한 권으로 나와도 모자라지 않겠으나 짤막한 신문 기사라는 애초의 한계에 몇 가지 얘기만 도드라져 보이는 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또 각자 비중이 차별을 둘 수 없었던 것 또한 같은 이유로 마땅치 않다. 띄엄띄엄 기사로 읽을 때는 몰라도 한꺼번에 몰아넣고 보니 기사마다 자연스럽지 않고 짜낸 듯이 보이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려나, 이 책은 임종업 기자의 것, 그의 입맛에 맞춘 것이니 불평은 그냥 이 정도다. 이들이 한국대표인지는 몰라도, 적어도 서권기 문자향書卷氣 文字香, 이들은 몸에서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나는 상서로운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이 취미로 혹은 재산불리기로 ‘모으기’만 열중했다면 이 정도 경지에 이르지 못할 사람들이다. 

책에 소개된 인물들의 고민은 대충 한 가지로 모인다. 서재다. 거저로 기증을 하겠대도 만만치 않다는 얘기가 기사 여기저기에서 나온다. 사료 가치든, 희소가치든 뭐든 특출하지 않은 책은 갈 곳도 마땅치 않다. 그렇다면 파지나 불쏘시개로나 쓰일 일이다. 장서가 개인의 호불호에 따라 쌓은 책은 그래서 딱 자신의 업이다. 책을 읽는 일이 행복한 만큼 사다 나른 책들은 넘지 못할 산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이 사재기를 해서 산 게 아닌 이상, 그 특출한 안목은 우리의 역사이기도 하고, 또 상품만 판을 치는 책 시장에서 물려 배워 익힐 만한 건 확실하다. 위에서 선인세 얘기를 들먹였지만, 반대로 누구라도 팔리지 않는 책을 출간할 때에는 용기 혹은 무모함이 필요한 법이다.

이럴 때 책쟁이들의 존재는 그들의 뒤를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경지는 다 제각각이지만 내가 아는 책쟁이들만 해도 꽤 되는데, 책 같지 않은 책을 사는 건 어설피 아는 이들이나 범하는 실수지 이들의 책責이 아니다. 이 책에서 잘 드러나거니와 내가 아는 그들은 책 한 권을 사도 꼼꼼히 따지는 안목을 가진 이들이다. 책에 미친 대표적 인물 이덕무의 호 오우아거사(吾友我居士)처럼 책이 좋아서 스스로가 스스로의 친구로 살면서도 세상 만물과 친구로 사는 이들이 곧 이 다음 권을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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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이 결혼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심리학이 결혼을 말하다 - 두려움과 설레임 사이에서 길을 찾다
가야마 리카 지음, 이윤정 옮김 / 예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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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경사는 안 간다. 조사만 갈거야.” 
친구가 뭔 소리를 하나 싶었다. 서른 중반인 그녀는 봄, 가을 주말이면 결혼식, 돌잔치로 항상 바빴다. 어차피 결혼하면 회수할 돈이고, 게다가 성격 좋고, 오지랖도 넓고, 발도 꽤 넓어서(실제로도 발이 큰 편이지 싶다) 식만 올리면 하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올 것이라는 기대에 꽉 차 있었단 말이다. 그녀의 입은 꽉 맞물려 있었다. 
 

문제는 그녀에게 결혼 상대가 없다는 게다. 골드미스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꾸준하게 직장 생활을 해서 작은 회사라도 과장 자리에 올랐으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조건이지만, 정작 주변에는 (나 같은) 친구들만 그득했다. 성격이 좋다보니 따르는 남자도 없지 않았는데, 의외로 털털한 성격에 까다롭지 않을까 싶었지만 결혼 상대를 고르는 눈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주변에 싱글인 건 몇 안 되는 사람들 뿐, 결혼 닦달도 슬슬 들어가더란 말이다. 그녀는 대부분 자기보다 어린 신부를 보는 고역과 친구들의 둘째 아이 돌잔치에 갈 때마다 받는 눈총을 견디지 못했다. 차라리 결혼 대신 일에 몰두하겠다는 여장부인 그녀는 술만 취하면 내 어깨에 기대어 울곤 하는 가녀린 몸, 아니 가녀린 성격인데 말이다.

이성 친구인 내가 곰곰이 따져보았다. 그녀가 아내로 괜찮을까? 솔직히 확신이 안 들었다. 그녀의 연애를 보았을 때, 그녀가 보는 친구와 애인과 결혼 상대자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경제, 외모, 사회적 지위를 까다롭게 따진다는 게 아니라, 친구에게는 너그러운 그녀가 애인한테는, 특히 결혼 얘기가 오갈 만큼 사귄 남자에게는 꽤 엄격한 생활 태도를 요구하더란 말이다.

친구와 남편을 대하는 자세가 너무 다른 그녀, 사실 좀 피곤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이가 들고, 학교, 회사, 교회, 동아리 등에서 지위나 입지가 어느 정도에 오른 그녀라면 자신의 짝을 두고, 주변의 시선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요구는 과연 스스로의 발로일까?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그런 이상한 감정, 경쟁, 사회의 압력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 후에는 결혼을 하든 말든, 아이를 낳든 말든 사실 별 차이는 없다. 그랬을 때 결혼한 사람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자신이 선택한 인생에 만족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12쪽

정신과 의사인 가야마 리카가 쓴 <심리학이 결혼을 말하다>을 보면, 내 친구가 가장 개인적인 부분, 즉 양보하지 못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조건들이 알고 보면 사회의 종용에 따른 무의식적인 발로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둔다.

우리나라처럼 만혼 증가, 결혼 기피, 인구 감소가 사회의 화두인 일본의 현재 결혼 풍도에 대한 분석서인 이 책은 ‘왜 여성들은 결혼을 기피하는가’에 대해 개인, 부모, 여성(젠더로서), 국가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혼인 저자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인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결혼 기피 풍조의 배경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는 현실을 꼬집고 있다. (정신과 의사이자 교수인 그녀조차 이 책을 쓰기 전까지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어쩌면 스스로도 개인적이라 치부했던 부분일 수 있다. 미혼 여성을 강박증 환자로 몰아가는 실로 무서운 이데올로기다!) 

이 책이 어려운 논문이 아닌 일에 바쁘고 치이는 여성들을 위한 맞춤실용서처럼, 욘사마에 열광하는 중년 여성들, 연예계, 정치계, 문화계 여성들의 사연, 클리닉을 운영하면서 만난 환자들의 사례 등 다양한 예를 두어서 이해하기 쉽다.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할 분석은 지금은 누구나 당연시 여기는 서양의 기독교적인 결혼관인 일부일처제가 도입된 배경에 대한 접근이다. 저자는 서양에서 일부일처제가 도입되면서 동시에 진화론과 유전학이 소개된 역사를 들춘다. 유전적 우열이 곧 국력이라는 우생학적 접근이 여성들을 무조건 결혼으로 내몰고, ‘결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상대가 없어서 결혼을 못한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미혼 여성을 사회적 패배자로 몰고 있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가장 개인적인 영역에 속하는 연애, 결혼, 출산이라는 인생의 중대사가 어느새 사회를 위한 것, 국가를 위한 것으로 탈바꿈한 상황, (…) 이런 의식은 지금도 여전히 정치가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만혼화나 저출산 문제가 외교나 연금 문제와 같은 차원에서 논의되는 현실에 대해 우리는 느끼는 위화감과 맥락을 같이 한다’ 170쪽

문제는 여성들이 자각하는 대신  ‘일본의 경우 전통적 성역할 분담에 근거한 바람직한 가정을 만들려는’ 의도에 젊은이들이 순순히 따르는 ‘자발적인 국민 우생운동’이 부활했다고 지적한다. 
 

사실, 이런 분석은 일본보다 빠르게 노령화 사회로 들어선 우리에게도 익숙한 구호이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농어촌에 기반을 둔 지자체마다 외국에서 신부 맞선을 주선하는 고육책까지 마련하면서 고심하는 형편이다. 그리고 언론을 비롯해 나부터도 ‘아이를 키우기 좋은 환경 개선’을 결혼 증가의 최우선 조건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양계장 불을 밝히면 닭이 알을 낳듯 환경을 조성하면 정말 결혼이 증가하고 저출산 문제가 해결될까? 아직 그 수순의 고민은 육아에 엄청난 부담을 갖는 우리 현실에서는 먼 얘기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은 사회와 국가가 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이지 저출산 문제의 대책이 될 수는 없다”고 못 박는다.

속이 다 시원한 명쾌한 대답이다.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만, 일본이 유럽 사회처럼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는가, 그리고 그 이후의 결혼관이 동일할 것인가, 라는 문제로 보면 유럽 수준의 보육 서비스, 육아 지원 사업의 확장은 단순히 저출산 대책이기보다 결혼과 가족과 국가를 둘러싼 사회 전반의 패러다임 전환이 뒤따를 것임으로 우선 유보할 지점이다.

심리학자인 저자는 이를 무시한다기보다 ‘심지어 여건도 안 되었는데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 애를 낳으라고? 누구를 위해서? 니미 뽕이다’가 맞을 것이다. “공공연한 협박”을 멈추는 순간, 적어도 결혼을 개인적인 문제로 전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결혼을 떠나서 행복해지려면 현재 자신의 삶이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랬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두고 따져보면서 주저하다가 나중에 그만큼 가치 있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지를 두고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조사만 찾겠다는 친구에게 딱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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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원작 <나생문> 초대 이벤트
라쇼몽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1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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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생문 - 한가지 사건, 그리고 남겨진 네가지 진실…
장르 : 연극
기간 : 2009년 9월 25일 ~ 2009년 11월 1일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4관(원더스페이스 동그라미극장)   
시간  : 평일 8시 / 토 3시, 7시 / 일 4시 (월 쉼)
원작 : 아쿠다카와 류노스케
연출 : 구태환
출연 : 박윤희, 이용성, 최필립, 박정길, 박초롱, 장원영, 김성철, 유우재, 이미화, 서강우, 인선호, 남궁민희
기획: 극단 수, 코르코르디움   







열린 문으로
2003년, 극단 수의 창단 공연으로 선을 보인 연극 ‘나생문(羅生門)’은 일본의 세계적인 명감독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동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 Rashomon, 1950)’을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일본 최고의 신인문학상인 아쿠다카와상이 기리는 일본 근대 문학의 정수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나생문’과 ‘덤불속’을 각색한 영화 ‘라쇼몽’은 1951년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걸작이다. 

 

원작의 아우라에 영화의 무게가 더한 '라쇼몽'은 극단이라면 무대화를 욕심낼만큼 찬란하지만 자칫 빛에 올려 눈이 멀지도 모르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더욱이 인간의 내면을 예리하게 파고들은 주제에 독특한 구성을 더했다면 웬만해서 덤벼들 용기를 내기 힘들다.     

아무려나, 올해로 다섯 번째 공연이니, 성공적으로 안착한 연극 전환이 반가운 일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초연이든 재공연이든, 영화가 항상 우위를 점할 게 분명한만큼 항상 비교가 따를 것이고, 그때마다 무게에 짓눌릴 우려 역시 항상 존재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속성을 다룬 다양한 변주 가능성도 발견 할 수 있지만, 아직은 기대치도 가능성도 높지 않아 보인다.


오사카 인근 궁궐의 남문(南門)인 나생문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에고(ego)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을 상징한다. 나생문은 요즘 논란인 공항의 투시 X레이 검열대처럼 인간의 본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울인 셈이다.

 

속살은 드러내도 속내는 드러내지 않는 인간 본연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로도 2010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의미로 ‘라쇼몽’의 헐리우드 리메이크 판이 나온다는 소식이 들린다. 스테디셀러인 소설은 물론, 영화도 클래식 마스터피스를 넘어서 새로운 방식으로 부활하고 있는 중이다.


 

바람이 부네
극단 수가 영화판에서 부는(혹은 불지도 모르는) 이슈에 기대 연극을 올리는 건 아니다. 1~2년 터울로 다섯 번째인 '나생문'은 극단 수의 대표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극단 대표이자 연출인 구태환의 의지라고 할 것이다. 내가 본 바로는 구태환이 원작을 두고 섣부른 실험을 시도하는 연출은 아니다.

 

피터 쉐퍼의 묵직한 작품 ‘고곤의 선물’ 연출을 통해 구태환의 힘을 확인한 바 있다. 정동환이 고곤으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한 데에는 구태환의 연출이 분명 한 몫을 단단히 했다. 그의 연출 경험과 감성이 총동원되었을 ‘고곤의 선물’을 ‘나생문’보다 먼저 본 참이다. 그는 원작에 비교적 충실했다. 이름만으로도 관심을 끄는 작품이고, 작품성에 더해 흥행성을 갖춘 작품이니, 정기적인 무대화 작업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한편으로 구태환이 뭔가 뛰어넘고 싶은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나무 숲을 흔들며
키 높은 대나무를 빽빽하게 세워 숲을 이룬 배경은 ‘고곤의 선물’에서 중극장 규모의 무대 배경을 세로로 극장 끝까지 길게 세운 거대한 접이식 창문들을 떠올리게 했다. 세로로 극장을 꽉 채운 무대는 가로 배경에 익숙한 눈에 한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관객의 눈높이와 배우들의 키를 넘는 배경은 인간을 미니어처 화한다. 넘어설 수 없는 운명 혹은 본성을 타고난 인간의 몸부림이 벌어지기에는 적합한 무대이다. 

 

영화에서 중심 포커스를 지배했던 나생문은 무대 구석으로 보잘것 없이 비켜나 있다. 게다가 숲에 가려 명패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숲이, 심연을 알 수 없는 그 깊이가 중심응 잡는다. 숲 안쪽에는 타악을 담당하는 고수가 버티고 있다. 하지만 대나무 사이로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고수는 숲과 물아일체가 된 상황이다. 북소리가 울리고 연극이 시작된다. 북소리는 숲의 소리다.

 

‘나생문’에서 진실은 오직 숲 만이 알고 있다. 이를 두고 인간들이 제멋대로 해석해낸다는 걸 연극은 무대와 소리로 드러낸다.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 시점 이동이 자유로운 영화보다는 숲이 그렇듯 터를 중심으로 모이는 연극에서만 가능한 강조점이다. 특히, 죽은 무사를 불러내기 위해 무녀와 혼령이 하나로 접신하는 굿판은 북소리가 정점에 달하하면서 화려하고 박진감이 넘치는 장면을 선보인다.

 

대사 없이 북소리와 하나 되어 무용과 가면극이 어우러진 퍼포먼스는 공인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무용수 출신 배우들은 조명의 변환, 암전에서도 숲을 넘나들며 좁은 무대를 최대치로 활용한 동선에 따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따로 떼어내도 손색이 없다. ‘고곤의 선물’에서 주인공 담슨의 내면을, 그리고 보는 관객의 가슴을 후비고 들어오는 인상적인 코러스 장면이 겹치는 대목이다. (나생문과 고곤이 서로 꼬리를 무는 구태환의 연출 교차점을 발견하는 재미를 더한다.)


숲만 아는 비밀을 품고
하지만 극 일관성을 허물고 과하게 강조한 빙의 장면은 영화와 확실히 차별을 두는 대목이다. 연극은 전반적으로 무사와 산적의 대결 구도 등 합이 잘 맞는 결투 장면을 선보이지만, 연극인데다 소극장이라는 한계에 확연히 드러나 답답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빼어난 솜씨로 사투를 벌이는 대목은  이후 나무꾼의 엇갈린 진술을 위한 복선의 의미가 크다. 

 

무당의 빙의는 무대극이 갖는 장점인 넌버벌 퍼포먼스 활용, 이승과 저승의 이원적이면서도 하나로 갈무리되는 동양적 세계관 강조 외에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산적, 무사 부인, 나무꾼, 무사 영혼의 진술을 등가로 놓지만, 연극은 무사의 진술에 비중을 높히기 위한 전제로 보인다. 
 

무사는 무녀의 입을 통해서만 진술을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죽은 인물이다. 앞선 산적과 부인의 증언에서, 무사는 보석이 박힌 검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탐욕스런 인물, 혹은 강간을 당한 아내를 보살피기는커녕 자결을 종용하는 경멸어린 시선을 던지는 냉혈한으로 그려진다. 죽은 것도 억울한데, 죽었다고 마구 난도질 당한다.

 

무당의 입을 통한 무사의 진술은 산적이 아닌 부인을 향해 칼끝을 겨눈다. 아내는 산적에게 강간당한 뒤에 오히려 산적에게 반해서 무사를 죽이라고 종용을 했고, 아내의 이런 태도에 질려버린 산적이 심지어 자신을 동정해서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무사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자결을 선택해 떳떳한 죽음읆 맞이했다고 항변한다.



기가 막힌, 혹은 귀를 막은 세상이여
세 사람 중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죽은 무사의 항변이 가장 애처로워 보이나, 나무꾼이 털어놓는 뒤이은 고백에서 무사의 가식과 허울이 벗겨진다. 나무꾼의 진술은 산적 한 명 이길 실력은 없고 체면만 내세우다가 어이없는 자기 실수로 죽는 무사의 허울과 그 허울에 기대어 종의 신분을 벗으려고 계급 상승을 택한 부인은 인간 본성이 가장 치사하게 구현되는 권력에 대한 완벽한 조롱으로 이어진다. 보잘것없는 남편의 실체를 확인하고도, 무사 부인이라는 가면을 벗지 않기 위해 남편을 180도 다른 인물로 묘사한 부인과 죽어서까지도 체면치레를 위해서라면 부인 따위, 한낱 종 출신의 과시용 인형 따위는 안중에 없는 무사의 실체가 드러난다. 

 

무사의 칼을 훔친 나무꾼이나 무사의 아내를 강간한 산적 역시 숨기려고 들거나 꾸미려 드는 인간 본성이 탄로나지만, 그들은 시체의 머리카락이라도 뽑아서 가발을 만들어 팔아야 하는 가발장수와 마찬가지로 최하층민이다. 에도 시대의 ‘88만원 세대’ 굴레를 기준으로 본다면, 지배층인 무사 부부의 허위와 가식을 이들과 등가로 놓는 게 과연 옳은지를 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두 배 차이를 보이는 오십보 백보는 사회 기준으로 보면 같을 수가 없다. 

 

 

구태환은, 재판관처럼 내내 진술을 들은 관객들에게 그 의문을 던진다. 아, 무리한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상관이 없는 건 이는 과거의 일이라는 것이다. 극중 이 사건의 객관적 관찰자인 가발장수와 스님, 중요한 건 이들의 선택이다. 

 

우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대신 옷을 벗겨가는 가발장수와 불법(佛法)보다 불법(不法)이 득세한 세상에 진저리를 치고 파계를 선택한 스님은, 진실을 마주섰을 때 일반적인 두 가지 선택지를 보여준다. 인정하거나 회피하거나, 둘 중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선택이자 극 중 대립각을 세우지만 결과적으로 이 둘이 보는 세상은 암울하다는 것, 동일한 세상이다. 그래서 두 가지 선택은 서로 꼬리를 물고 돌 수밖에 없는 하나의 굴레가 되고 만다. 파계승은 민머리를 감출 가발이 필요하고, 가발장수는 가발을 팔 수 있는 파계승이 필요하다. 


 

숲의 노래를 들으라
가발장수 역, 장원영은 탁월한 선택이다. 나무꾼과 스님의 이야기를 거드는 추임새 역할 정도일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느물느물하고 탐욕스러운 닳고 닳은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나무꾼의 허울을 벗겨내는 걸 보면 날카롭고 한편으로 삶의 이면을 들여보는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한다. '나생문'을 축약해서 보면 바로 가발장수다. 


 

이요성(이상 산적 분), 장원영 등 배우진을 비롯해 극단 수에 익숙한 작품이고 보면 극의 전개나 흐름이 영화에 충실한 점은 못내 아쉽다. 영화가 워낙 탁월하고 뛰어난 이야기 전개 방식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다섯 번째 무대라면 뭔가 다른 시도를 두고 자신과의 경쟁이 불붙을 만하지 않았을까 싶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쩌면 보지 못한 네 번의 ‘나생문’에서 그 도가 있었고, 녹여낸 무대가 이번 작품인도 모르겠다. 

내내 강한 바람소리로 관객들에게 자신의 존재 환기시킨 숲은, 새벽을 깨우듯 아기의 울음소리를 빌어 부질없어 보이는 세상에 희망을 울린다. 분명 비루한 인생으로부터 시작된 저주받은 아기이고, 그 운명이 또 다시 숲 살인사건의 반복, 산적, 가발장수, 나무꾼일망정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하라는 지침이다.

 



 사진 출처 - 극단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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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을 리뷰해주세요.
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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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의 단편을 모은 작품의 영어판 표제는 `길들지 않은 땅Unaccustomed Earth‘이다. <그저 좋은 사람>은 옮긴이 혹은 편집자가 국내 판으로 옮기면서 바꾼 제목이다. 인도 벵갈 출신 부모를 두었지만 이주민인 부모를 따라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지금껏 줄곤 살면서 글을 쓰는 줌마 라히리의 소설집은, 스스로가 겪었고 또 겪고 있을, 미국 혹은 다른 나라를 떠도는 인도 이주민들의 삶을 자분자분하게 다룬다.

그러니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따온 단편소설 ‘길들지 않는 땅’이 표제로 내세우기에 더 맞지 싶지만, 내 정서에는 ’길들지 않은 땅‘보다는 역시 ’그저 좋은 사람‘이 잘 맞았다.

조금 있으면 엄마를 찾으며 소리를 치고 아침을 달라고 할 것이다. 아이는 아직 어렸고, 수드하는 아이에게 그저 좋은 사람일 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찬장을 열어 위타빅스 한 봉지를 꺼내고 우유를 냄비에 데웠다. ‘그저 좋은 사람’ 209~210쪽

돌이 갓 지난 아이에게 엄마의 존재는 그저 좋은 사람일 뿐이지 않은가. 우유를 먹여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누구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사실이지만 애써 외면하려고 드는 냉혹한 인식은 주인공 수드하와 남동생 라훌과의 관계 확장이다.

인도인 부모를 두었으나 이민한 부모를 따라 미국에서 나고 자란 남매의 삶이란 사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자국어를 모르는 이주민 아이들과,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한국이고 보면 다문화가정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소설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도인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는 게, 한국의 이주민 아이들,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처지와 절대 상반되지만 말이다.

‘성공한 이주민 자녀들의 삶’을 다른 이 소설은 당장 쫓겨날 처지에 있거나 경제적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상황조차 풀지 못하는 우리 처지에서 보면, 먼 얘기이나 아이들의 성장 이후 정체성 문제가 그 못지않은 중요한 갈등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수드하는 ‘어린 시절은 주목받지 못하고 지나갔지만, 남동생만은 미국의 어린아이로 제대로 된 기억을 남겨주겠다고 마음먹’는다. 미국 사회에서는 인도인 부모(부모는 은퇴한 이후에 다시 인도로 돌아간다. 이런 회귀는 소설집 곳곳에서도 비슷하게 등장한다.  

부모 세대는 어쩔 수 없이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는 암시이다.)보다 여섯 살 많은 수드하가 부모에 가깝다. 그 역할을 자진해서 맡았던 ‘그저 좋은 사람’인 수드하에게 전도유망했던 라훌의 방황과 보잘것없는 미국하층민으로 전락한 모습이 마지막 꽤나 실망스러운 것이다.

‘유전자가 부모에게서 바로 온 게 아니라 더 멀리, 잊혀진 근원에서 온 듯’한 라울의 생김새는 코시안이 그렇듯이 벗지 못할 굴레다. 그렇다고 생김새에 따른 인도식 삶이 맞지도 않는다. 속내는 피자와 커피를 즐기는 미국인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은 이제 자신의 아이에게로 전염된다. 인도인 유전자를 타고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영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엄마, 나이 차가 많이 지는 이복 누나를 데리고 결혼한 나이 많은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한국과 다문화사회인 미국, 인도인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영국에서의 삶이 똑같이 변주될 수는 없지만 수드하를 비롯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갈등과 방황이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연작소설 <헤마와 코쉭>의 두 주인공 헤마와 코쉭은 먼 옛날 유목민이었던 인도유럽어족 선조들처럼 세계를 떠돈다. 이들에게 미국은 각기 미국 이주민 부모의 여정에 따랐을 뿐인  중간 경유지에 지나지 않는다. 

인도에서 태어나서 부모를 따라 미국에서 자라서 사진기자가 되어 남미로 중동으로 유럽을 떠도는 코쉭은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헤마를 만난다. 그는 떠돌이 생활을 접고 편집자로 홍콩으로 떠나기 직전이다. 10대 시절, 같은 벵갈 출신이라는 이유로 잠시 같이 기거했던 코쉬를 기억하는 헤마 역시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 전공으로 교수가 되었고, 관광 겸 이탈리아를 찾았다가 코쉭을 만난다. 그녀는 전통적인 인도 남자와 결혼을 하러 인도로 떠나기 전이다.

이들은 20년 만에 과거 흐릿한 인도식 가족의 보잘것없는 추억을 되새기며 뜨겁게 사랑을 나누지만, 정착과는 거리가 먼 두 ‘세계인’의 삶은, 각자 나라나 민족이나 공동체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거둔 성과를 포기하지 못한다. 각자의 삶의 반경에 따라 이들은 헤어진다.

이들은 서로 그저 좋은 사람, 이방인이다. 소설집은 내내 찐득하게 엉겨 붙지 못하는 그저 좋은 사람들인 채인 이들의 미약하고 흐릿한 흔적들을 세심하고 꼼꼼하게 되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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