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이 결혼을 말하다>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심리학이 결혼을 말하다 - 두려움과 설레임 사이에서 길을 찾다
가야마 리카 지음, 이윤정 옮김 / 예문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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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제 경사는 안 간다. 조사만 갈거야.” 
친구가 뭔 소리를 하나 싶었다. 서른 중반인 그녀는 봄, 가을 주말이면 결혼식, 돌잔치로 항상 바빴다. 어차피 결혼하면 회수할 돈이고, 게다가 성격 좋고, 오지랖도 넓고, 발도 꽤 넓어서(실제로도 발이 큰 편이지 싶다) 식만 올리면 하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올 것이라는 기대에 꽉 차 있었단 말이다. 그녀의 입은 꽉 맞물려 있었다. 
 

문제는 그녀에게 결혼 상대가 없다는 게다. 골드미스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꾸준하게 직장 생활을 해서 작은 회사라도 과장 자리에 올랐으니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조건이지만, 정작 주변에는 (나 같은) 친구들만 그득했다. 성격이 좋다보니 따르는 남자도 없지 않았는데, 의외로 털털한 성격에 까다롭지 않을까 싶었지만 결혼 상대를 고르는 눈은 그렇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주변에 싱글인 건 몇 안 되는 사람들 뿐, 결혼 닦달도 슬슬 들어가더란 말이다. 그녀는 대부분 자기보다 어린 신부를 보는 고역과 친구들의 둘째 아이 돌잔치에 갈 때마다 받는 눈총을 견디지 못했다. 차라리 결혼 대신 일에 몰두하겠다는 여장부인 그녀는 술만 취하면 내 어깨에 기대어 울곤 하는 가녀린 몸, 아니 가녀린 성격인데 말이다.

이성 친구인 내가 곰곰이 따져보았다. 그녀가 아내로 괜찮을까? 솔직히 확신이 안 들었다. 그녀의 연애를 보았을 때, 그녀가 보는 친구와 애인과 결혼 상대자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경제, 외모, 사회적 지위를 까다롭게 따진다는 게 아니라, 친구에게는 너그러운 그녀가 애인한테는, 특히 결혼 얘기가 오갈 만큼 사귄 남자에게는 꽤 엄격한 생활 태도를 요구하더란 말이다.

친구와 남편을 대하는 자세가 너무 다른 그녀, 사실 좀 피곤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나이가 들고, 학교, 회사, 교회, 동아리 등에서 지위나 입지가 어느 정도에 오른 그녀라면 자신의 짝을 두고, 주변의 시선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요구는 과연 스스로의 발로일까? 

‘우리가 지향해야 할 것은 그런 이상한 감정, 경쟁, 사회의 압력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그 후에는 결혼을 하든 말든, 아이를 낳든 말든 사실 별 차이는 없다. 그랬을 때 결혼한 사람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도 자신이 선택한 인생에 만족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12쪽

정신과 의사인 가야마 리카가 쓴 <심리학이 결혼을 말하다>을 보면, 내 친구가 가장 개인적인 부분, 즉 양보하지 못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조건들이 알고 보면 사회의 종용에 따른 무의식적인 발로에서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둔다.

우리나라처럼 만혼 증가, 결혼 기피, 인구 감소가 사회의 화두인 일본의 현재 결혼 풍도에 대한 분석서인 이 책은 ‘왜 여성들은 결혼을 기피하는가’에 대해 개인, 부모, 여성(젠더로서), 국가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혼인 저자는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만인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결혼 기피 풍조의 배경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는 현실을 꼬집고 있다. (정신과 의사이자 교수인 그녀조차 이 책을 쓰기 전까지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고, 어쩌면 스스로도 개인적이라 치부했던 부분일 수 있다. 미혼 여성을 강박증 환자로 몰아가는 실로 무서운 이데올로기다!) 

이 책이 어려운 논문이 아닌 일에 바쁘고 치이는 여성들을 위한 맞춤실용서처럼, 욘사마에 열광하는 중년 여성들, 연예계, 정치계, 문화계 여성들의 사연, 클리닉을 운영하면서 만난 환자들의 사례 등 다양한 예를 두어서 이해하기 쉽다.

이 책에서 가장 주목할 분석은 지금은 누구나 당연시 여기는 서양의 기독교적인 결혼관인 일부일처제가 도입된 배경에 대한 접근이다. 저자는 서양에서 일부일처제가 도입되면서 동시에 진화론과 유전학이 소개된 역사를 들춘다. 유전적 우열이 곧 국력이라는 우생학적 접근이 여성들을 무조건 결혼으로 내몰고, ‘결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도 상대가 없어서 결혼을 못한다는 식으로 얼버무리’는 미혼 여성을 사회적 패배자로 몰고 있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가장 개인적인 영역에 속하는 연애, 결혼, 출산이라는 인생의 중대사가 어느새 사회를 위한 것, 국가를 위한 것으로 탈바꿈한 상황, (…) 이런 의식은 지금도 여전히 정치가나 지식인들 사이에서 만혼화나 저출산 문제가 외교나 연금 문제와 같은 차원에서 논의되는 현실에 대해 우리는 느끼는 위화감과 맥락을 같이 한다’ 170쪽

문제는 여성들이 자각하는 대신  ‘일본의 경우 전통적 성역할 분담에 근거한 바람직한 가정을 만들려는’ 의도에 젊은이들이 순순히 따르는 ‘자발적인 국민 우생운동’이 부활했다고 지적한다. 
 

사실, 이런 분석은 일본보다 빠르게 노령화 사회로 들어선 우리에게도 익숙한 구호이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농어촌에 기반을 둔 지자체마다 외국에서 신부 맞선을 주선하는 고육책까지 마련하면서 고심하는 형편이다. 그리고 언론을 비롯해 나부터도 ‘아이를 키우기 좋은 환경 개선’을 결혼 증가의 최우선 조건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양계장 불을 밝히면 닭이 알을 낳듯 환경을 조성하면 정말 결혼이 증가하고 저출산 문제가 해결될까? 아직 그 수순의 고민은 육아에 엄청난 부담을 갖는 우리 현실에서는 먼 얘기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은 사회와 국가가 해야 할 기본적인 의무이지 저출산 문제의 대책이 될 수는 없다”고 못 박는다.

속이 다 시원한 명쾌한 대답이다.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만, 일본이 유럽 사회처럼 아이를 키울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는가, 그리고 그 이후의 결혼관이 동일할 것인가, 라는 문제로 보면 유럽 수준의 보육 서비스, 육아 지원 사업의 확장은 단순히 저출산 대책이기보다 결혼과 가족과 국가를 둘러싼 사회 전반의 패러다임 전환이 뒤따를 것임으로 우선 유보할 지점이다.

심리학자인 저자는 이를 무시한다기보다 ‘심지어 여건도 안 되었는데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 애를 낳으라고? 누구를 위해서? 니미 뽕이다’가 맞을 것이다. “공공연한 협박”을 멈추는 순간, 적어도 결혼을 개인적인 문제로 전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결혼을 떠나서 행복해지려면 현재 자신의 삶이 자발적인 선택의 결과라고 긍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랬을 때,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두고 따져보면서 주저하다가 나중에 그만큼 가치 있는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지를 두고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조사만 찾겠다는 친구에게 딱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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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원작 <나생문> 초대 이벤트
라쇼몽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61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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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생문 - 한가지 사건, 그리고 남겨진 네가지 진실…
장르 : 연극
기간 : 2009년 9월 25일 ~ 2009년 11월 1일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4관(원더스페이스 동그라미극장)   
시간  : 평일 8시 / 토 3시, 7시 / 일 4시 (월 쉼)
원작 : 아쿠다카와 류노스케
연출 : 구태환
출연 : 박윤희, 이용성, 최필립, 박정길, 박초롱, 장원영, 김성철, 유우재, 이미화, 서강우, 인선호, 남궁민희
기획: 극단 수, 코르코르디움   







열린 문으로
2003년, 극단 수의 창단 공연으로 선을 보인 연극 ‘나생문(羅生門)’은 일본의 세계적인 명감독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의 동명의 영화 ‘라쇼몽(羅生門 Rashomon, 1950)’을 무대로  옮긴 작품이다. 일본 최고의 신인문학상인 아쿠다카와상이 기리는 일본 근대 문학의 정수 아쿠다카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나생문’과 ‘덤불속’을 각색한 영화 ‘라쇼몽’은 1951년 베니스영화제 그랑프리와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세계적인 걸작이다. 

 

원작의 아우라에 영화의 무게가 더한 '라쇼몽'은 극단이라면 무대화를 욕심낼만큼 찬란하지만 자칫 빛에 올려 눈이 멀지도 모르는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더욱이 인간의 내면을 예리하게 파고들은 주제에 독특한 구성을 더했다면 웬만해서 덤벼들 용기를 내기 힘들다.     

아무려나, 올해로 다섯 번째 공연이니, 성공적으로 안착한 연극 전환이 반가운 일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초연이든 재공연이든, 영화가 항상 우위를 점할 게 분명한만큼 항상 비교가 따를 것이고, 그때마다 무게에 짓눌릴 우려 역시 항상 존재한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속성을 다룬 다양한 변주 가능성도 발견 할 수 있지만, 아직은 기대치도 가능성도 높지 않아 보인다.


오사카 인근 궁궐의 남문(南門)인 나생문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에고(ego)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을 상징한다. 나생문은 요즘 논란인 공항의 투시 X레이 검열대처럼 인간의 본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거울인 셈이다.

 

속살은 드러내도 속내는 드러내지 않는 인간 본연의 이야기는 여전히 유효하다. 영화로도 2010년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탄생 100주년을 기리는 의미로 ‘라쇼몽’의 헐리우드 리메이크 판이 나온다는 소식이 들린다. 스테디셀러인 소설은 물론, 영화도 클래식 마스터피스를 넘어서 새로운 방식으로 부활하고 있는 중이다.


 

바람이 부네
극단 수가 영화판에서 부는(혹은 불지도 모르는) 이슈에 기대 연극을 올리는 건 아니다. 1~2년 터울로 다섯 번째인 '나생문'은 극단 수의 대표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는 극단 대표이자 연출인 구태환의 의지라고 할 것이다. 내가 본 바로는 구태환이 원작을 두고 섣부른 실험을 시도하는 연출은 아니다.

 

피터 쉐퍼의 묵직한 작품 ‘고곤의 선물’ 연출을 통해 구태환의 힘을 확인한 바 있다. 정동환이 고곤으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한 데에는 구태환의 연출이 분명 한 몫을 단단히 했다. 그의 연출 경험과 감성이 총동원되었을 ‘고곤의 선물’을 ‘나생문’보다 먼저 본 참이다. 그는 원작에 비교적 충실했다. 이름만으로도 관심을 끄는 작품이고, 작품성에 더해 흥행성을 갖춘 작품이니, 정기적인 무대화 작업이 이해가 안 가는 바는 아니지만, 한편으로 구태환이 뭔가 뛰어넘고 싶은 걸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나무 숲을 흔들며
키 높은 대나무를 빽빽하게 세워 숲을 이룬 배경은 ‘고곤의 선물’에서 중극장 규모의 무대 배경을 세로로 극장 끝까지 길게 세운 거대한 접이식 창문들을 떠올리게 했다. 세로로 극장을 꽉 채운 무대는 가로 배경에 익숙한 눈에 한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관객의 눈높이와 배우들의 키를 넘는 배경은 인간을 미니어처 화한다. 넘어설 수 없는 운명 혹은 본성을 타고난 인간의 몸부림이 벌어지기에는 적합한 무대이다. 

 

영화에서 중심 포커스를 지배했던 나생문은 무대 구석으로 보잘것 없이 비켜나 있다. 게다가 숲에 가려 명패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숲이, 심연을 알 수 없는 그 깊이가 중심응 잡는다. 숲 안쪽에는 타악을 담당하는 고수가 버티고 있다. 하지만 대나무 사이로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고수는 숲과 물아일체가 된 상황이다. 북소리가 울리고 연극이 시작된다. 북소리는 숲의 소리다.

 

‘나생문’에서 진실은 오직 숲 만이 알고 있다. 이를 두고 인간들이 제멋대로 해석해낸다는 걸 연극은 무대와 소리로 드러낸다. 주체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 시점 이동이 자유로운 영화보다는 숲이 그렇듯 터를 중심으로 모이는 연극에서만 가능한 강조점이다. 특히, 죽은 무사를 불러내기 위해 무녀와 혼령이 하나로 접신하는 굿판은 북소리가 정점에 달하하면서 화려하고 박진감이 넘치는 장면을 선보인다.

 

대사 없이 북소리와 하나 되어 무용과 가면극이 어우러진 퍼포먼스는 공인 들인 흔적이 역력하다. 무용수 출신 배우들은 조명의 변환, 암전에서도 숲을 넘나들며 좁은 무대를 최대치로 활용한 동선에 따라 유기적으로 움직인다. 따로 떼어내도 손색이 없다. ‘고곤의 선물’에서 주인공 담슨의 내면을, 그리고 보는 관객의 가슴을 후비고 들어오는 인상적인 코러스 장면이 겹치는 대목이다. (나생문과 고곤이 서로 꼬리를 무는 구태환의 연출 교차점을 발견하는 재미를 더한다.)


숲만 아는 비밀을 품고
하지만 극 일관성을 허물고 과하게 강조한 빙의 장면은 영화와 확실히 차별을 두는 대목이다. 연극은 전반적으로 무사와 산적의 대결 구도 등 합이 잘 맞는 결투 장면을 선보이지만, 연극인데다 소극장이라는 한계에 확연히 드러나 답답한 인상을 준다. 그리고 빼어난 솜씨로 사투를 벌이는 대목은  이후 나무꾼의 엇갈린 진술을 위한 복선의 의미가 크다. 

 

무당의 빙의는 무대극이 갖는 장점인 넌버벌 퍼포먼스 활용, 이승과 저승의 이원적이면서도 하나로 갈무리되는 동양적 세계관 강조 외에 또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영화에서는 산적, 무사 부인, 나무꾼, 무사 영혼의 진술을 등가로 놓지만, 연극은 무사의 진술에 비중을 높히기 위한 전제로 보인다. 
 

무사는 무녀의 입을 통해서만 진술을 할 수 있는 유일하게 죽은 인물이다. 앞선 산적과 부인의 증언에서, 무사는 보석이 박힌 검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탐욕스런 인물, 혹은 강간을 당한 아내를 보살피기는커녕 자결을 종용하는 경멸어린 시선을 던지는 냉혈한으로 그려진다. 죽은 것도 억울한데, 죽었다고 마구 난도질 당한다.

 

무당의 입을 통한 무사의 진술은 산적이 아닌 부인을 향해 칼끝을 겨눈다. 아내는 산적에게 강간당한 뒤에 오히려 산적에게 반해서 무사를 죽이라고 종용을 했고, 아내의 이런 태도에 질려버린 산적이 심지어 자신을 동정해서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무사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자결을 선택해 떳떳한 죽음읆 맞이했다고 항변한다.



기가 막힌, 혹은 귀를 막은 세상이여
세 사람 중 누구의 말이 진실일까. 죽은 무사의 항변이 가장 애처로워 보이나, 나무꾼이 털어놓는 뒤이은 고백에서 무사의 가식과 허울이 벗겨진다. 나무꾼의 진술은 산적 한 명 이길 실력은 없고 체면만 내세우다가 어이없는 자기 실수로 죽는 무사의 허울과 그 허울에 기대어 종의 신분을 벗으려고 계급 상승을 택한 부인은 인간 본성이 가장 치사하게 구현되는 권력에 대한 완벽한 조롱으로 이어진다. 보잘것없는 남편의 실체를 확인하고도, 무사 부인이라는 가면을 벗지 않기 위해 남편을 180도 다른 인물로 묘사한 부인과 죽어서까지도 체면치레를 위해서라면 부인 따위, 한낱 종 출신의 과시용 인형 따위는 안중에 없는 무사의 실체가 드러난다. 

 

무사의 칼을 훔친 나무꾼이나 무사의 아내를 강간한 산적 역시 숨기려고 들거나 꾸미려 드는 인간 본성이 탄로나지만, 그들은 시체의 머리카락이라도 뽑아서 가발을 만들어 팔아야 하는 가발장수와 마찬가지로 최하층민이다. 에도 시대의 ‘88만원 세대’ 굴레를 기준으로 본다면, 지배층인 무사 부부의 허위와 가식을 이들과 등가로 놓는 게 과연 옳은지를 두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두 배 차이를 보이는 오십보 백보는 사회 기준으로 보면 같을 수가 없다. 

 

 

구태환은, 재판관처럼 내내 진술을 들은 관객들에게 그 의문을 던진다. 아, 무리한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상관이 없는 건 이는 과거의 일이라는 것이다. 극중 이 사건의 객관적 관찰자인 가발장수와 스님, 중요한 건 이들의 선택이다. 

 

우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대신 옷을 벗겨가는 가발장수와 불법(佛法)보다 불법(不法)이 득세한 세상에 진저리를 치고 파계를 선택한 스님은, 진실을 마주섰을 때 일반적인 두 가지 선택지를 보여준다. 인정하거나 회피하거나, 둘 중 무엇 하나 쉽지 않은 선택이자 극 중 대립각을 세우지만 결과적으로 이 둘이 보는 세상은 암울하다는 것, 동일한 세상이다. 그래서 두 가지 선택은 서로 꼬리를 물고 돌 수밖에 없는 하나의 굴레가 되고 만다. 파계승은 민머리를 감출 가발이 필요하고, 가발장수는 가발을 팔 수 있는 파계승이 필요하다. 


 

숲의 노래를 들으라
가발장수 역, 장원영은 탁월한 선택이다. 나무꾼과 스님의 이야기를 거드는 추임새 역할 정도일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느물느물하고 탐욕스러운 닳고 닳은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나무꾼의 허울을 벗겨내는 걸 보면 날카롭고 한편으로 삶의 이면을 들여보는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한다. '나생문'을 축약해서 보면 바로 가발장수다. 


 

이요성(이상 산적 분), 장원영 등 배우진을 비롯해 극단 수에 익숙한 작품이고 보면 극의 전개나 흐름이 영화에 충실한 점은 못내 아쉽다. 영화가 워낙 탁월하고 뛰어난 이야기 전개 방식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다섯 번째 무대라면 뭔가 다른 시도를 두고 자신과의 경쟁이 불붙을 만하지 않았을까 싶은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쩌면 보지 못한 네 번의 ‘나생문’에서 그 도가 있었고, 녹여낸 무대가 이번 작품인도 모르겠다. 

내내 강한 바람소리로 관객들에게 자신의 존재 환기시킨 숲은, 새벽을 깨우듯 아기의 울음소리를 빌어 부질없어 보이는 세상에 희망을 울린다. 분명 비루한 인생으로부터 시작된 저주받은 아기이고, 그 운명이 또 다시 숲 살인사건의 반복, 산적, 가발장수, 나무꾼일망정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하라는 지침이다.

 



 사진 출처 - 극단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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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을 리뷰해주세요.
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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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편의 단편을 모은 작품의 영어판 표제는 `길들지 않은 땅Unaccustomed Earth‘이다. <그저 좋은 사람>은 옮긴이 혹은 편집자가 국내 판으로 옮기면서 바꾼 제목이다. 인도 벵갈 출신 부모를 두었지만 이주민인 부모를 따라 영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지금껏 줄곤 살면서 글을 쓰는 줌마 라히리의 소설집은, 스스로가 겪었고 또 겪고 있을, 미국 혹은 다른 나라를 떠도는 인도 이주민들의 삶을 자분자분하게 다룬다.

그러니 너대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에서 따온 단편소설 ‘길들지 않는 땅’이 표제로 내세우기에 더 맞지 싶지만, 내 정서에는 ’길들지 않은 땅‘보다는 역시 ’그저 좋은 사람‘이 잘 맞았다.

조금 있으면 엄마를 찾으며 소리를 치고 아침을 달라고 할 것이다. 아이는 아직 어렸고, 수드하는 아이에게 그저 좋은 사람일 뿐 다른 의미는 없었다. 그녀는 부엌으로 가서 찬장을 열어 위타빅스 한 봉지를 꺼내고 우유를 냄비에 데웠다. ‘그저 좋은 사람’ 209~210쪽

돌이 갓 지난 아이에게 엄마의 존재는 그저 좋은 사람일 뿐이지 않은가. 우유를 먹여주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재워주기만 하면 누구라도 상관없는 일이다. 사실이지만 애써 외면하려고 드는 냉혹한 인식은 주인공 수드하와 남동생 라훌과의 관계 확장이다.

인도인 부모를 두었으나 이민한 부모를 따라 미국에서 나고 자란 남매의 삶이란 사실 한국에서 나고 자라 자국어를 모르는 이주민 아이들과, 순혈주의를 강조하는 한국이고 보면 다문화가정 아이들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소설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도인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뤘다는 게, 한국의 이주민 아이들, 다문화가정 아이들의 처지와 절대 상반되지만 말이다.

‘성공한 이주민 자녀들의 삶’을 다른 이 소설은 당장 쫓겨날 처지에 있거나 경제적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상황조차 풀지 못하는 우리 처지에서 보면, 먼 얘기이나 아이들의 성장 이후 정체성 문제가 그 못지않은 중요한 갈등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수드하는 ‘어린 시절은 주목받지 못하고 지나갔지만, 남동생만은 미국의 어린아이로 제대로 된 기억을 남겨주겠다고 마음먹’는다. 미국 사회에서는 인도인 부모(부모는 은퇴한 이후에 다시 인도로 돌아간다. 이런 회귀는 소설집 곳곳에서도 비슷하게 등장한다.  

부모 세대는 어쩔 수 없이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는 암시이다.)보다 여섯 살 많은 수드하가 부모에 가깝다. 그 역할을 자진해서 맡았던 ‘그저 좋은 사람’인 수드하에게 전도유망했던 라훌의 방황과 보잘것없는 미국하층민으로 전락한 모습이 마지막 꽤나 실망스러운 것이다.

‘유전자가 부모에게서 바로 온 게 아니라 더 멀리, 잊혀진 근원에서 온 듯’한 라울의 생김새는 코시안이 그렇듯이 벗지 못할 굴레다. 그렇다고 생김새에 따른 인도식 삶이 맞지도 않는다. 속내는 피자와 커피를 즐기는 미국인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두려움은 이제 자신의 아이에게로 전염된다. 인도인 유전자를 타고 태어나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영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엄마, 나이 차가 많이 지는 이복 누나를 데리고 결혼한 나이 많은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한국과 다문화사회인 미국, 인도인들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영국에서의 삶이 똑같이 변주될 수는 없지만 수드하를 비롯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갈등과 방황이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연작소설 <헤마와 코쉭>의 두 주인공 헤마와 코쉭은 먼 옛날 유목민이었던 인도유럽어족 선조들처럼 세계를 떠돈다. 이들에게 미국은 각기 미국 이주민 부모의 여정에 따랐을 뿐인  중간 경유지에 지나지 않는다. 

인도에서 태어나서 부모를 따라 미국에서 자라서 사진기자가 되어 남미로 중동으로 유럽을 떠도는 코쉭은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헤마를 만난다. 그는 떠돌이 생활을 접고 편집자로 홍콩으로 떠나기 직전이다. 10대 시절, 같은 벵갈 출신이라는 이유로 잠시 같이 기거했던 코쉬를 기억하는 헤마 역시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 전공으로 교수가 되었고, 관광 겸 이탈리아를 찾았다가 코쉭을 만난다. 그녀는 전통적인 인도 남자와 결혼을 하러 인도로 떠나기 전이다.

이들은 20년 만에 과거 흐릿한 인도식 가족의 보잘것없는 추억을 되새기며 뜨겁게 사랑을 나누지만, 정착과는 거리가 먼 두 ‘세계인’의 삶은, 각자 나라나 민족이나 공동체가 아닌 스스로의 힘으로 거둔 성과를 포기하지 못한다. 각자의 삶의 반경에 따라 이들은 헤어진다.

이들은 서로 그저 좋은 사람, 이방인이다. 소설집은 내내 찐득하게 엉겨 붙지 못하는 그저 좋은 사람들인 채인 이들의 미약하고 흐릿한 흔적들을 세심하고 꼼꼼하게 되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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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철학자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김모세.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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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 때문에 예수가 스스로 글을 남기지 않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예수는 근본주의를 극복하고자 했으며, 아무리 보편적인 것처럼 보이는 텍스트라 할지라도 특정한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어떤 텍스트도 그 자체로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다. 242쪽
 

“신을 매몰시키는 파괴자들의 소란함이 들리지 않는가? 신의 부패가 느껴지지 않는가? 신은 죽었다! 신은 여전히 죽어 있다! 그리고 신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들이다!”

신의 죽음은 프리드리히 니체가 쓴 유명한 단상이다. 니체는 기독교에 절대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적대적인 사상에서도 계몽주의 유럽의 비판적 이성이 기독교에서 기원했음을 명시하고 있다.

니체는 수도원 등 엄격한 방식의 진실에 대한 탐구, 종교 교육을 통한 의식의 명료함, 신의 법칙을 찾기 위한 과학적 의식의 발전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지적인 명료함’에 이르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의식의 명석함은 비판적 이성으로 ‘날이 서게’ 되어 결국 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본래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니체가 말하길, 신을 죽인 것은 그 누구도 아닌, 기독교인들이었다.

니체의 말은 기독교에 대한 적대이기 이전에, 기독교에 대한 반성-매우 도발적이고 극단적이며 반성의 여부를 개의치 않았으나-을 촉구하는 글이기도 했다. 니체와 같은 신에 대한 강한 반발은 콩트,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프로이트 등 계몽주의 후기의 철학자들에게서 다양한 방식으로 제기되었다.

철학자이자 종교사학자인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그리스도 철학자>에서 그들의 이런 반발은 필연적이고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말한다. ‘서구의 여정을 살펴보면 종교적 제도의 압제로 인해 이성과 법에의 의지가 필연적인 것이 되었음을 볼 수 있’으며 ‘근대성은 고유한 종교적 모태, 즉 기독교라는 모태 내에서 오랜 기간 동안 성숙의 시기를 지나고 난 뒤에야 발전’했고 ‘그 단계가 지난 이후에야 종교적 모태로부터의 돌아섬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모태에 대한 반발, 부정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그 혈연관계는 끊으려야 끊을 수가 없는 것이다.

20세기 중, 후반까지 ‘개인과 인간 사회의 필연적 진보’라는 개념은 유럽 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원동력‘이다. 그런데 과학, 제도, 국가 등 눈부신 발전을 이끈 이 같은 개념이 중국이나 인도나 아프리카가 아닌 유럽에서 그것도 18세기에 도드라진 이유는 왜일까?

순환이 아닌 무한한 발전을 의미하는 선(線)적 세계관인 진보는 재림과 종말이라는 기독교 종말론에서 기인했으며, 18세기가 진보의 시대가 된 이유 또한 기독교라는 자궁을 막 뚫고 나온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스도 철학자>는 복음서에 기록된 ‘있는 그대로’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라, 고 역설하고자 하는 책이다.

진보는 ‘사실상 종교적 신화에 대한 극단적 대립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근대의 신화는 스스로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던 종교의 전형적인 특징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유럽의 철학사를 통해서 기독교의 우위를 내세우거나 변명을 하려는 의도를 내비치는 건 아니다.

저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유럽 기독교 역사를 냉정하게 구분한다. 유럽의 뿌리는 기독교가 아니라 ‘그리스, 로마, 켈트를 비롯해 거슬러 올라가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적인 것’이며 기독교가 고대 유산을 흡수하여 유럽의 모태가 되었다고 진술한다. 더욱이 초기 기독교 이후 유럽에서의 기독교 역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가리고 왜곡하였으며, 종교전쟁, 면죄부 판매 등 정치적인 사건으로 점철되었고 냉정하게 지적한다.

‘저자는 결국 ’사랑‘에 대한 메시지로 책을 마무리하고 있다. 사랑이란 가장 평범하고 진부해 보이면서도, 가장 강력하고 궁극적인 가치이며, 인류의 미래가 걸려 있는 가치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옮긴이가 말처럼 결국 그의 얘기는 원점으로 되돌아간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인권 선언으로 대표되는 ‘자유, 평등, 박애’ 등 인류의 보편 가치는 혁명가들에게 있어 이성에 기초를 둔 규범으로 여겼을 뿐, 예수님의 가르침에서 영감을 받은 가치들이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예수님 천당, 불신 지옥’ 식의 밑도 끝도 없는 강요, 간증식의 카더라 식의 설교, 좀 더 나아가 개인의 성숙한 삶을 배경으로 한 ‘양과 양치기’ 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한국 기독교는 이미 포이어바흐가 1841년에 제기한 “종료란 인류의 유아적 본질”이라는 논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한국의 다른 종교에서도 발견되는 특징이다.)

배경을 이해하지 않고서 ‘유럽의 기독교는 이미 30여 년 전에 거의 빈사 상태’를 무조건 신앙심의 부족으로 치부하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가르침은 중세 민중을 무지로 몰아넣고 면죄부를 파는 짓이나 다를 바 없다. 혹은 이 책 한 권만 읽어도 알 사실을, 설령 몰랐다고 하면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라고 하신 2000년 전 예수님의 우려(마태 15장 14절)를 그대로 답습하는 꼴이다.

니체, 마르크스에 대한 일부 발췌 폄하를 비롯해 위의 사례는 한 때 교회에 다니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얘기들이다. 누구에게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지 모르겠으나, 유럽의 철학사를 기독교의 관점에서 되짚은 이 책은 나에게는 복음과도 같은 책이다.

전에 교회에 다닐 때 품었던, 이후 내던져두고 그저 세상 살기에 바빴던, 몇 가지 의문들이 <그리스도 철학자>를 통해 풀렸다. 또한 보잘것없었던 유럽 철학사에 대한 이해 역시 기독교인의 눈으로 보매, 한층 높아졌다. 이제 눈을 맑게 씻어 예수님의 있는 그대로의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담고 새겨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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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빛>을 리뷰해주세요.
검은 빛 매드 픽션 클럽
미우라 시온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지진해일을 두고 선과 악을 물을 수 있는가, 늙음은 누군들 피하고 싶으나, 그 운명을 두고 악이라고 하지 않듯이 지진해일, 쓰나미는 자연의 섭리이다. 쓰나미를 피할 수 있는 방법이란 고작 바다에서 최대한 경계하고 멀리하는 길 뿐이다. 쓰나미를 피하려고 바다를 찾지 않는다? 늙지 않겠다고 불로초를 찾아 나선 당태종의 헛된 욕망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짓이다.  

도쿄 근처의 작은 섬 미하바 주민 271명 중 266명의 생명을 앗아간 쓰나미. 노부유키, 미카, 다스쿠는 2%의 확률로 살아남은 마을 아이들이다. 말 그대로 천운이다. 하지만 이 아이들이 살아난 이유가 있다.  

13살 동갑내기인 노부유키와 미카는 밀회를 즐기기 위해 산사를 찾았다가 목숨을 건졌다. 다스쿠는 노부유키를 늘 따라다닌다. 아버지 요시키에게 잠시도 쉬지 않고 얻어맞는 10살 다스쿠는 먼 친척뻘 형인 노부유키가 유일한 피난처다. 이미 비굴함이 몸에 밴 다스쿠는 노부유키의 냉대에도 늘 따라다닌다.  

하지만 노부유키도 다스쿠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한다.  등대할아버지에게 콘돔을 사서 미카와 섹스를 한다는 사실을 다스쿠가 아는 까닭이다. 다스쿠는 입을 다무는 조건이 암묵적인 약속이 된 셈이다.

한가롭고 평화롭게 보이는 작은 섬. 하지만 그 속내는 아이들에게 담배, 포르노 잡지, 콘돔을 팔아 생계를 근근히 유지하는 전직 등대지기, 가정 폭력을 일삼는 요시키, 그리고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마을 주민들의 비열한 세계이다. 그리고 그 영향은 유전병처럼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이어졌다.

그리고 갑작스런 쓰나미가 지나간 자리에는 평소 모습 그대로 죽은 마을 주민들이 썩어간다. 죽는 순간까지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은 사람들, 시체가 썩는 악취가 진동하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비로소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인간의 추악함을 깨닫는다. 게다가 마치 짠듯(?) 살아난 인물은 요시키의 아버지와 미카의 어린 몸을 탐내는 관광객 야마나카와 아이들의 비밀을 아는 등대 할아버지다.

섹스에 눈을 떠서 오로지 미카 생각에 몰두하는 노부유키, 자신의 외모에 끌리는 동급생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미카, 아버지의 매를 피해 도망친 다스쿠. 이 아이들의 은밀한 비밀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아이들은 천운이 아니라 저주받은 섬의 운명을 고스란히 질어진 채로, 폐허가 된 섬에서 도시로 나온다.

이제 기존의 이중적인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어른들의 세계다. 노부유키는 미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가정을 꾸리지만 가식으로 사랑하고 일할 뿐이다. 미카는 노부유키를 통해서, 또 야마나카를 유인할 때 체득한 방식으로  가장의 세계인 연예계에 진출한다. 공장을 전전하는 다스쿠는 여전히 아버지가 두렵고, 노부유키에 대해 집착을 한다.

일본 소설의 추세인지 모르겠으나, 극단적인 살인마 대신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은근한 불로 데우듯이 일상을 깨지 않는 숨은 폭력의 속성을 잡아내는 소설류가 눈에 띤다. 잔잔한  웅덩이 밑을 근접카메라로 들여다보면 잔혹하게 먹고 먹히는 야생이 보이듯이 일본 사회를 망원렌즈가 아닌 접사렌즈로 들여다본다.

다스쿠의 노부유키에 대한 오랜 애증을 과연 “오리새끼가 처음 본 뭔가를 어미로 여기듯”한다는 식의 정리, 다스쿠와 노부유키의 아내 나미코가 불륜에 빠지는 계기, 그리고 위에서도 지적했듯 하필 섬에서 살아난 딱 3명인 어른들이 하나같이 이후 사건 전개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이고, 노부유키가 자신을 이용대상 이외로 보지 않는 미카의 속셈을 뒤늦게 알아차린다는 점 등 몇몇 무리한 설정이 눈에 띤다.

그러나 남편 노부유키와 아내 나미코의 이중적인 관계를 묘사하는 대목마다, 사건 전개와 관계없이 꽤 치밀하고 사실적이라 직격을 날린다. 노부유키의 은밀한 비밀을 모두 알아버린 나미코, 그리고 나미코를 사랑하지도 않고 다스쿠와의 불륜을 뻔히 알면서도 행복한 가정 흉내를 내는 노부유키의 관계가 쓰나미까지 끌고 와서 트라우마를 뒤집어씌우지 않아도 오히려 섬뜩하고 오싹하다. 

이들 부부는 이제 서로의 추악한 약점을 알고 있다. 등가의 추악함은 은밀한 거래를 통해 평온으로 이어지고, 이들 부부는 소설 마지막까지 평범한 공무원과 가정주부로 남는다. 현실은 우리가 소설에서 바라듯 권선징악도 아니고, 길에서 만나는 평범한 누구라도 그런 존재일 수 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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