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을 읽고 리뷰해 주세요.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 - 사랑했으므로, 사랑이 두려운 당신을 위한 심리치유 에세이
권문수 지음 / 나무수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병, 내가 걸린 병인 걸까. 좀처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게 버겁기만 하다. 사랑에서 ‘쿨’하다를 말만큼 치사하고 더러운 말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름날 씹다 뱉어서는 아스팔트 위에 눌어붙은 캐러멜마냥 아픈 사랑이란 게 그 뒷마무리가 서로 눈살이 찌푸려질 일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으나, 정작 나는 이별 다음을 깔끔하게 해결했다고 생각했다.

전화번호를 바꾸고, 마주 칠 일이 있을까봐 같이 다니던 교회를 나가지 않고, 항상 퇴근길에 들르던 그녀의 집 근처 버스 정류장을, 어쩔 수 없이 지나가야만 할 때면 자연스럽게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딱 한 번 새벽에 술에 취해서는 교회 지하에 숨어들어 새벽 기도 나온 할머니들이 드문드문 앉은 넓은 예배당 한쪽 귀퉁이에서 소리를 죽이면서 운 적이 있지만, 난 냉정하게 마무리한 편이다.

몇 년 후, 우연히 그녀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이 우리 사이를 알던 후배 입을 통해서 들었다. 그리고 지금껏 그때 일을 두고 잘했다고, 잘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다. 깔끔하게 비켜준 만큼 지금 남편인 사람을 만나는 데 도움이 되면 됐지, 방해는 아니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런데 그 후, 난 이렇다 할 사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설레지 않은 적이 없던 게 아니지만 누구를 만나도 마음이 그때만큼 일지 않았다. 티를 내지 않았지만 평소 모습과도 또 다르게 묵묵한 태도에 상대는 실망을 했다. 그들이 떠나갈 때 나에 대한 핑계를 직접적으로 대더라도 순순히 인정했다.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일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휘저을 수는 없다.

테라피스트들은 한 사람의 행동이 가져온 결과를 놓고 그 사람을 치료하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의 ‘현재’를 있게 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상처가 비슷해도 그 사람의 상처는 절대 다른 누군가의 상처와 같은 취급을 받아서는 안 된다. 45P

미국에서 전문 심리 상담 테라피스트로 근무하는 권문수는 자신이 상담한 이들의 사례를 기반으로 <두 번은 사랑하지 못하는 병>, 사랑을 두려워하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펴냈다. 책에 실린 사례는 보통 중증 사례라 부를 만 하지만 알고 보면 나처럼 지루한 경증을 앓는 이들을 위한 책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상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다. 누군가 그 상처를 건드리면 화를 내거나 그 사람과 거리를 두려고 한다. 상처를 가진 사람들의 반항은, 그 상처가 클수록 더 격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170P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 일이라면 그들의 상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주변 사람들의 무관심과 방치’. 이 구절에서 나는 스스로 자유롭지 못했다. 난 그러고 보면 그녀를 위해 깔끔하게 정리를 한 게 아니라 내 스스로 남들이 보는 시선이 두려워서 알지 못하도록 덮어두었을 뿐이지는 않았을까.

우리는 얼마나 논리적으로 행동하고 논리적으로 말할까. (…) 사실 성욕이나 식욕 등 인간의 본능과 연관된 심리를 보면 우리가 어릴 때부터 배워온 사회규범이나 도덕, 혹은 종교 교리에 들어맞는 ‘논리’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어쩌면 인간은 원래 비논리적인 게 본성일지도 모른다. 60~61P 

에곤 실레의 그림에 눈이 가기도 한, 가벼이 읽은 책 한 권으로 그때의 일을 다시 헤집고 싶은 생각은 없다. 또 내가 무뎌진 건 단순히 그때의 헤어짐 때문만은 아니고, 그 사이 전혀 새로운 사람이라고 해도 될 만큼 나를 바꾸어버린 환경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논리로 해결할 게 아닌데, 박음질해놓고는 두었던 그때의 묵은 주머니를 뜯어내는 게 하나의 과정이 되리라는 단서를 얻었다.

사실 사랑의 상처를 치료한다는 것은 거짓말인 것 같다. 그것은 치료되는 게 아니라 잊어버리거나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그게 바로 ‘치료’라면 할 말이 없지만 말이다. 46P 

무감각해질 것, 어쩌면 나한테 필요한 것은 덮었던 걸 파내고 평평하게 다지는 일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섹스나 결혼과 동떨어지지는 않았으나, 그런 식으로 귀결된 사안은 아닌 듯하다. 사랑은 복잡하고도 그 고민을 다른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실, 책을 읽고 나서도 사랑의 상처로 전문 테라피스트를 찾는 미국의 환경이 부럽기 보다는 프로작 처방이 빈발하는 나라답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허나 책을 통해서 조언을 얻는 일은 도움이 되겠다 싶다. 사랑은 내가 먹고 싸고 자는 일을 그만두는 순간, 그러니까 죽지 않는 한 같은 본능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사랑병을 정신병이라 얘기하고 유사한 점들을 이야기했지만, 사랑병은 다른 정신병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큰 차이점이 있다. 바로 ‘예방’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예방을 해서도 안 된다. ‘우울증의 예방’은 말이 성립되지만, ‘사랑병의 예방’은 있을 수가 없는 말이다. 사랑은 본능이기 때문이다. 82P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봇이 인간이 될 수 있을까>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로봇이 인간이 될 수 있을까? - 수수께끼와 역설의 유쾌한 철학퍼즐 사계절 1318 교양문고 14
피터 케이브 지음, 남경태 옮김 / 사계절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죽음을 멈추게 하는 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알았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영원한 삶을 누렸던 로봇은 죽음을 손에 넣으면서 인간과 동등해졌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로봇이 인간이 될 수 있을까? - 수수께끼와 역설의 유쾌한 철학 퍼즐>의 제목이자 질문에 나름 떠오른 대답이다. 이 거창한 대답은 철학책이 아니라 일본 애니메이션 ‘돌아온 캐산(CASSHERN Sins)’의 대사다.  

유쾌한 퍼즐에 만화 대사, 딱 맞지 않는가? 역으로 말하면 만화도 머리 싸매고 봐야 하냐는 불평을 들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자못 제목은 진지하지만 책은 스스로 정의하길, 유쾌하게 즐겨라! 라고 주문을 한다.   

만약, 이 책이 도서관 분류번호 100대의 항상 새것인양 자리를 지키고 있는 철학책들 마냥 칙칙한 외모와 두꺼운 몸피를 자랑했다면, 덩달아 그 무게에 질려 저런 명쾌한(?) 답을 만화에서 찾아낼 생각을 했을까 싶다. (29. “나는 로봇이다”에서는 철학적으로 인간만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전제 하에 전개를 진행한다. 다시 말해 로봇이 영원히 산다는 전제는, 책과 하등 상관이 없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를 꼽으라면 역시 ‘뜬 그름 잡는 얘기’처럼 들리고 발가락이 비비 꼬이는 알쏭달쏭한 방식으로 푸는 대신, 철학 논제가 일상에서 비롯되었고, 또 일상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면서 또 그 시도가 꽤 괜찮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효과는 같은 당의정인 셈이다. 이는 역시 ‘사람을 먹으면 왜 안 되는가’의 저자로도 알려진 피터 케이브가 철학자인 동시에 작가이자 방송인인 데에서 기인한다.   

그렇다고 이 책이 만만한가 하면, 독자마다 명백히 다르겠지만,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오가는 틈틈이 책을 읽는 평소 내 버릇을 두고 얘기하자면 “그렇지 않다”. 이 책 서른세 가지 퍼즐은 알기 쉬운 사례와 코믹한 일러스트에 더해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어서 후딱 읽고 치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데 역시나 해답을 강요하거나 던져주는 대신 스스로 생각하라는 식으로 입을 싹 닦는 바람에 그 세계에 발을 들여놓으려면 꽤 진지하게 고민을 하게 된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비치는 태양빛을 보고 발을 내딛었다가 길이 없는 너른 벌판을 앞에 둔 상황이랄까. 당황스러울 수도 있지만 현재 내가 당장 고민 중인 문제들, 예컨대 직장, 연애, 우정 등과 관련된 퍼즐을 찾을 수도 있어 새로운 처방이 되기도 한다. 짧은 단락이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여지를 두는 바람에 우선 초벌로 읽고, 침대 맡에 두고는 재벌로 읽는 중이다.  

미학, 형이상학, 법학, 정치학, 윤리학 등이 골고루 있어서 ‘하루에 하나씩 읽으면 한 달치, 일주일에 하나씩 읽으면 반 년치’라는 복용 원칙을 잘 지킨다면 정신에 이로운 종합비타민으로 꽤 효과를 보지 않을까 싶다. 세파를 따라 흐르지 말고, 역설의 삶을 살기 위한 퍼즐들은 내 스스로가 비로소 인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로봇 혹은 부품이 아닐 수 있는 방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머리 나는 뜸치료
주영호 지음 / 문이당 / 2009년 10월
평점 :
품절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겠으나,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인체를 미의 기준으로 삼은 8등신이 황금비율이라는 당최 와 닿지 않는 비율이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는 형국이다.

서양 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머리가 크고 다리가 짧은 동양에서도 그 영향은 대단한데, 202cm의 밀로의 비너스가 완벽한 8등신으로, 경국지색을 대표한다. 8등신의 원리에는 수학적 비율에 대한 당시 철학자들의 이상이 담겨 있어서 서양에서도 흔치는 않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를 보면 또 전혀 다른 비율을 보이지만, 시대별 인체의 완벽한 조화를 찾는 경우는 생존 본능에 따라서도 어쩌면 인간의 당연한 본성이다. 그래서 몸의 보이는 분 어디 한 군데가 부족할 경우, 사람들은 부조화를 견디지 못한다.

신체장애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비록 운동역학적(?)으로 사는 데에 전혀 지장이 없음에도 말이다. 이른바, 탈모 증세가 가장 심각한 고민에 해당하는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비례도’, 비트루비우스적 인간을 봐도 정수리가 아니라, 머리카락을 포함한 비례를 따지고 있다. 이런!

<머리 나는 뜸 치료>는 이런 일까지 열을 받은 상황이 땅, 그러니까 두피를 황폐하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열이 자꾸만 위로 뻗치니 털이 남아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오행법(五行法)의 원리를 통해 몸의 장기를 다스리면 털은 자연스럽게 자란다고 말한다.

이는 탈모 예방이 아니라 탈모 치료를 말하는 바라, 사실이라면 꽤나 획기적인 일이다. 과연, 사실일까? 무엇보다 서양 의학에서 말하길, 모근은 한 번 죽으면 살아나지 않는다고 하여, 자연스럽게 이식 수술을 권장한다. 

모낭 세포는 절대 죽지 않는다. 다만 잠들어 있을 뿐이다. 만일 서양 의학에서 주장하는 대로 모낭 세포가 죽어 없어진다면 그 부분의 피부가 다 벗겨져야 마땅하고 대머리인 사람들은 살갗이 업어져 두개골이 훤히 드러나야 정상이다. 83쪽

침술 및 뜸치료 전문가인 저자 주영호 씨의 주장이다. 이 말을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는 망설여질 수밖에 없는데, 그는 그간 나이든 분들을 치료하면서 얻은 임상 결과를 내세운다. 그렇다고 검은콩 등을 권하는 한의학의 주장을 답습하는가 하면, ‘오장육부의 균형을 맞추는 치료법과는 크게 어긋한 변종 치료법’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뜸치료의 장점이라면 한의학의 근본 원리가 그렇지만, 머리카락이 나는 자리가 서양 의학처럼 미시적인 접근이 아니라 거시적인 접근으로 몸 건강 전체를 더불어 돌볼 수 있다는 점이다. 머리카락과 가장 밀접한 관계가 있는 장기인 폐와 대장에 해당하는 금(金)을 돌보기 위해서는 상생인 토(土)에 해당하는 비장과 위장을 달래야 하고 이는 오행을 따라 자연스럽게 돌며 몸 전체 순환을 유기적으로 돕는다.

그래서 발모에 좋은 뜸자리는 몸 전체의 균형을 맞추는 자리와도 일치한다. 그리고 오장육부에 따른 치료인 만큼, 동맥경화, 마른 비만, 콩팥 기능 이상 등 각 증상에 따른 혈자리를 보충으로 더한다.

다만, 효과를 보려면 적어도 8개월 동안, 한 번 뜰 때 같은 자리를 세 번, 열흘간 쉬지 않고 뜨고 사흘을 쉬는 3-10-3 법칙을 지켜야 한다는 게 쉽지는 않은 일이다. 아무려나 머리숱이 적어서 고민이라면 족삼리, 상거허, 하거허, 충양이라는 혈자리만이라도 기억을 해서 뜸을 들여 보자. 밥도 그렇고, 뜸을 들여서 손해 볼 게 없는 건 적어도 확실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의 무덤은 구름속에>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그들의 무덤은 구름 속에 - 엄마가 딸에게 들려주는 아우슈비츠 이야기
아네트 비비오르카 지음, 최용찬 옮김 / 난장이 / 2009년 9월
평점 :
품절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  아이리스 장
 

홀로코스트란 단어는 유태인 대학살을 정의하기에는 정치적으로 옳지 못하다. 홀로코스트는 ‘제물’이라는 뜻으로 유대인을 신에 대한 제물인 양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심코 쓰는 말이지만 당사자는, 혹은 당사자의 후손들에게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들의 무덤은 구름 속에>(원제 : 엄마, 아우슈비츠가 뭐예요?)를 쓴 아네트 비비오르카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우슈비츠에서 죽었다. 그녀 남편 쪽도 사정은 비슷하다. 600만 명(400만 명에서 700만 명까지 추산)이라는 어마어마한 유태인 학살에서 자유로운 유태인 후손은 없다.

1948년생인 저자 역시 수만 명의 유태인 언니 오빠들처럼 몇 년 더 일찍 태어났던들 어떤 일을 겪었을지 모를 일이다. 저자에게 유태인 민족 대학살은 남이 아닌 자신의 문제이다. 이후 유태인 학살 관련 전문 역사가가 된 저자는 13살 난 딸아이를 위해 비극을 쉽게 풀어서 써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역사가인 나에게 아우슈비츠를 서술하고, 유대인 민족 학살이 어떻게 진행되어 갔는지를 묘사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이긴 해도, 단순히 이해할 수 없는, 그래서 설명이 안 되는 핵심은 여전히 남아 있다.” 왜 나치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잡아 죽이는데 에너지를 쏟아 부었는지 이 책은 아울러 저자 자신에게 그 이유를 되묻는 작업이다.

이 말은 독일인들이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나치와 전시 국제법에 따라 싸운 대부분의 독일군은 별개라는 주장과도 일치하는 의문이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유대인을 잡아들이고, 죽이는 일이 과연 승리의 최우선 요건이었을까?

자살하기 전에 유태인들을 몰아낼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을 남긴 히틀러와 그의 추종자들의 광기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는 어쩌면 ‘되풀이되지 말아야할 과거’를 위해 학살의 역사와 더불어서 그 배경인 ‘반유대주의’에 대한 설명에 힘을 더한다. 왜냐하면 말살을 당할 만큼, 유대민족의 과오랄 게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보이는 역사적인 반유대주의다. 예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유대민족이 지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에 더해, 악마로 취급당했던 전력을 담담하게 말한다.  페스트 전염병 당시에도 유대인에게 죄를 덮어씌웠고, 부활절에는 기독교인 아이를 잡아다가 피를 먹었다는 소문을 가감 없이 소개한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패배이후 독일은 경제적 파탄 책임을 1%도 안 되는 유대인에게 돌린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거의 독일인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았고, 사회 각층에서 엘리트로 두각을 나타냈음에도 타락의 원흉으로 주목 받았다.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유대인은 몰살의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순혈주의를 내세운 선동 헤게모니로 당시 아우슈비츠에는 집시들이 유대인과 같은 취급을 받아서 죽었고, 독일인이라도 정신병자, 불구자, 장애인들은 불임 시술을 받거나 마찬가지로 희생이 되었다.

가슴 아픈 얘기를 아이에게 들려주고, 아이들을 위해 이 책을 썼을 때에는 역사가 반복되는 불상사를 막기 위함이고, 익히 서구사회에서 냉철하게 역사청산과 교육을 통해서 교훈으로 남겼다지만 지금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들이 위의 ‘반유대주의’ 논리와 과연 다른지는 잘 모르겠다. 

종교적인 터부는 기독교와 이슬람교로 번져 국가 간 전쟁과 테러로 21세기가 얼룩지고 있고, 이스라엘은 당한 만큼 화풀이를 하는 것인지, 팔레스타인과의 관계에서 조롱거리가 된 지 오래다. 그래서 이 책은 또 다른 의미로, 역설적으로 유대인이 읽어야 할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 살아남기 위한 투쟁, 그것이 바로 저항이다. 바로 이 저항 개념에서부터 우리는 유대인 저항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할지도 모른다, 라고 옮긴이의 입을 통해 저자는 말하지만 이 논리는 유대인이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는 팔레스타인 민족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남 얘기할 것 없이 우리에게도 1923년 9월, 관동대진재학살(關東大震災虐殺)의 뼈저린 경험이 있다. (이때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조선인과 같은 취급을 받아 사형을 당했다.) 또 80년 5월, 군부의 광주 대학살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지만, 지금 우리 현실에서 장애인, 이주외국인, 다문화가정 등 사회적 약자 혹은 소수자들이 받는 멸시와 조롱과 차별을 떠올리면 할 말이 없다.

나치의 광기와 연합국의 무관심이 부른 엄청난 학살의 기록, 그리고 팔에 푸른색 잉크로 새긴 문신이 남은 채로 살아가는 생존자들이 산 역사로 증언하는 시대에 딸아이에게 어쩌면 ‘유태인’이라는 정체성이 또 다른 악몽으로 다가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철저한 기억은 없고, 철저한 망각만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이어 친일파가 쥔 기득권이 군사정권으로 이어진 뼈아픈 과거가 그리 멀지도 않은 일이고, 이제야 친일인명사전이 편찬되었다. 이를 사죄하는 친일파 후손도 있으나, 폄하를 하고 핏대를 세우는 것들이 국회의원이랍시고 TV에서 당당하게 떠들어댄다.

아무리 속내에 정파 관계가 얽혔다지만 개인 영달을 위해 할 소리, 안 할 소리를 가려야 하는데, 그걸 못 가린다. 13살짜리 얘를 위해 썼다는 이 책을 그들에게 먼저 읽히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차폰, 잔폰, 짬뽕>을 읽고 리뷰해주세요.
차폰 잔폰 짬뽕 - 동아시아 음식 문화의 역사와 현재
주영하 지음 / 사계절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대학로에 나가면 짬뽕 전문점을 종종 들린다. 가격도 저렴하고, 또 바쁜 시간에는 바로바로 나오는 데다, 매콤한 맛이 요즘처럼 쌀쌀할 때는 딱 제격이다. 너무 자극적이어도 물리기 마련이라 뭘 먹을까 하다가, 하루는 근처 호텔주방장 출신 중국인이 주방장이라는 중식당에 들어갔다. 가장 기본이랄 수 있는 짬뽕과 자장명과 탕수육을 시켰다. 
 

그곳에서 먹은 짬뽕 맛은 좀 더 부드럽긴 했지만, 솔직히 별반 차이가 없었다. 자장면도 마찬가지였는데, 딱히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지만 뭔가 좀 아쉬웠다. “청요리를 시켜야 차이가 나지, 일반식이야 뭐”하고 말았는데, <차폰, 잔폰, 짬뽕>을 읽어보니 무심코 한 말이 딱 맞았다. 
 

이른바, 식사 메뉴가 아닌 요리 메뉴라고 부르는 고급 음식도 한국식으로 바뀐 게 맞지만 짬뽕, 자장면은 말 그대로 한국에서 새롭게 정착을 한 요리이니 중국인이 요리하든 한국인이 요리하든 큰 차이가 없을 수밖에. 정확하게는 화교(華僑) 음식이라고 불러야 한다. 
 

서민음식인 짬뽕은 중국 푸젠의 지역 음식인 ‘탕러우쓰멘’이 일본의 무역도시인 나가사키에 중국인 마을인 당인촌이 번성하면서 ‘시나우동’으로, 이후 ‘잔폰’으로 바뀐 음식이다. 각종 재료를 넣고 육수에 삶은 면을 넣은 ‘잔폰’은 고춧가루가 많이 들어간 한국식의 매운 ‘짬뽕’과는 맛이 다르게 담백하다고 하니, 지금 우리가 먹는 ‘짬뽕’은 말 그대로 한국에서 새로운 음식으로 바뀐 셈이다. 그러니, 중국인 주방장이 만들었다고 한들 그 맛이 그다지 다를 리가 없다. 
 

민속학을 공부한 주영하 교수가 쓴 이 책에서는 단순히 요리의 경로만 추적하지는 않았다. 짬뽕만 해도 16세기 일본 개방 정책이 세계 포르투갈, 네덜란드, 중국 등 열강과의 교역이 이루어졌고, 17세기 이후 쇄국으로 유일한 무역도시인 나가사키에 중국인들만 당인촌(작가는 세계 최초의 공인 차이나타운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이 세워진 배경이 있다. 
 

그리고 주로 일본과 한국에서 뿌리를 내린 중국 남방지역 중국인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이런 관계망에서 중국에서 일본을 돌아 한국으로 짬뽕이 들어온 것이다. 그리고  ‘마구 뒤섞어 놓았다’는 의미로도 쓰는 짬뽕은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침략한 동아시아 지역에서 비슷한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도 밝혀낸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중국음식에 따라 나오는 단무지 역시, 중국음식이 한국에서 번성할 당시 화교들이 일본과 한국에서 같은 경제권에 속해 있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군대 시절, 그렇게 먹고 싶었던 자장면의 추억이 알고 보면 일제 이후, 60~70년대 경제 부흥기에 따른 추억이지 아주 오랜 추억이 아니라는 지적이 그렇고, 제주도 음식에서 더 이상 향토 음식을 찾아볼 수 없고, 육지 음식이 점령한 ‘주변부 음식 문화의 운명’은 중국 천편일률적인 소수민족 통합 정책 이후 소수민족의 고유 음식 문화가 빠르게 사라지는 이유와 다르지 않다. (우리가 흔히 55개 소수민족이라고 하는데, 이 말에는 ‘중국 정부 공인’이라는 말을 붙여야 한다고 에둘러 꼬집는다.) 
 

무엇보다 짬뽕이 일본어에서 유래를 했다고, 국어순화 차원에서 ‘초마면’으로 쓰자고 하지만 초마면은 다른 음식이라고 점, 전주비빔밥을 세계 음식으로 발전시키겠다고 해서, 시장에서 간단하게 끼니를 해결하던 음식이라는 현실을 뒤엎고 임금님 수랏상에 오른 음식으로 둔갑한 점 등 우리가 상대적으로 관심을 두지 않는 사이 진실과 다르게 왜곡되는 부분이 꽤 많다는 지적을 한다. 
 

우리가 무심코 먹는 음식 한가지에도 정치 경제적인 역사가 함께 한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내가 먹는 것이 바로 나”라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사회적, 생태적,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먹을거리 관계망에 더해 한편으로 내가 먹는 음식에 알게 모르게 치열한 정치적인 함의가 있다는 생각에 번뜩 정신이 든다. 그래서 저자의 바람이 단순히 농사꾼들이나 시민단체의 지적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상기하게 된다. 
 

지역의 농수산물로 만든 향토 음식을 외식 업체뿐만 아니라 지역민의 밥상에서도 살려 낼 고민을 농정 당국에서는 반드시 해야 한다. 지역의 먹을거리 자주권은 이제 국가의 먹을거리 자주권이며, 21세기를 슬기롭게 살아가기 위해 해결해야 할 문제다. 제주 음식이 육지에 포섭되어 박물관의 쇼윈도로 들어간 지금, 자칫 한국 음식도 그런 사정에 빠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196쪽, <2부. 국민국가, 로컬푸드를 포섭하다>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