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가 지상에서의 훌륭한 삶에 관해 어떤 논의를 할 때라도, 동물적 활력과 동물적 본능이라는 특정한토대를 전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토대가 없다면 우리네 인생은 재미가 없어진다. 문명이란 이것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덧씌워진 어떤 것이어야 한다. 금욕적인 성자와 고립되어 사는 성자는 이런 점에서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 소수의 성자들은 공동체를 풍부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성자들로만 이루어진 세상은 지겨워 죽을 지경일 것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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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안단테
엘리자베스 토바 베일리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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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결에 피부를 심하게 긁는 아이를 지키며 깨어있는 나,는 종종 외롭다. 책을 한 손에 들고 있지만서도. 세상 어딘가에 나처럼 희미한 불빛 속에서 멀뚱거리고 있는 이가 또 있을까, 짧은 말이라고 건네 보고 싶어진다. 작가 엘리자베스 베일리는 그런 내게 달팽이를 소개해 준다. 캄캄해지면 잠을 깨는 달팽이. 지난 며칠 동안, 아이 곁에서 <달팽이 안단테>를 조용히 펼쳐들고 달팽이라는 작은 존재를 알아가는 밤들은 설레였다. 비가 온 후나, 상추를 씻다가 마주쳤던 달팽이. 나는 너를 잠깐만 보고, 아이에게 전달했구나. 몸이 아파서 일어서거나 앉지를 못하는 작가는, 침대에 누워 달팽이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녀와 달팽이가 사는 은자의 시간은 고요하지만 생동감이 넘친다.



베일리는 스위스 여행 중 이름 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전신이 마비된 그녀는 살던 집을 떠나, 작은 아파트에서 간병인의 도움을 받으며 지낸다. 어느 날, 그녀의 친구가 제비꽃 화분과 달팽이 한 마리를 가져온다. 처음에 베일리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편지 봉투에 자그마한 구멍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보며 혹시 달팽이가 배가 고픈 것이 아닌가 싶어 꽃잎 하나를 놓아준다. 시든 꽃잎 하나를 먹는 모습을 한 시간 동안 지켜본 베일리는 새로운 친구를 만난 듯 기뻐한다. 달팽이가 먹으면서 내는 ˝아주 작고 정겨운 소리는 내게 특별한 동무와 공간을 함께 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제, 베일리의 유일한 관심사는 ‘어떻게 하면 달팽이를 더 잘 보살펴 줄 수 있을까‘다. 그녀는 달팽이에게 숲과 비슷한 환경을 만들어 주려고 유리 용기를 준비하고 숲에서 가져온 풀과 잎사귀, 다양한 이끼류, 나무껍질로 채운다. 작은 물웅덩이 구실을 할 은백색 홍합 껍데기도 넣고.



달팽이의 생태에 관해 알고 싶은 베일리는 과학책과 문학책을 탐독한다. 복족류는 대량멸종 위기에서도 진화하여 지구상에 5억 년 동안 존재하고 있다. 달팽이는 창자,심장, 허파, 그리고 2,640개의 이빨이 있다. 도망갈 줄도 알고 남을 침략할 줄도 안다. 5,000개에서 10만 개까지 거대 신경세포를 가지고 있어서 새로운 냄새나 맛을 알게 되면 기억해 두었다가 그것에 맞춰 움직인다. 침을 찌르며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 열악한 환경에서 동료 달팽이를 좋은 장소로 유도하는 관찰이 담긴 연구 자료는 흥미롭기만 하다.



어린 달팽이가 칼슘을 찾아 형뻘 되는 달팽이 등에 붙어 내려오지 못할 때, 베일리는 지켜보고만 있지 못하고 손가락으로 달팽이를 떼어내 준다. 달팽이가 포토벨로버섯만 먹으면 너무 물릴 것 같아 그녀는 옥수수 녹말가루에 물로 개워준다. 하지만 배탈이 난 달팽이는 비틀거리며 유리 용기의 꼭대기에 앉아 배설물을 온갖 구멍으로 내보낸다. 그런 달팽이를 보며 베일리는 마음 아파한다.



침대에 누워 달팽이의 움직임을 따스한 시선으로 따라가는 베일리. 그녀는 마치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아기를 바라보는 엄마와도 같았다. 작가는 달팽이의 생태에 관해 하나씩 알아가며 인간은 자연세계의 작은 생명체와 함께 진화해 왔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더 이상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의 생존이나 내가 속한 종의 생존문제가 아니라 생명 자체가 진화를 멈추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았기에. <달팽이 안단테>를 읽으며, 어둠 속 어딘가에서 꽃잎을 갉아먹고 있을 달팽이의 소리를 들어 보려고, 겨울잠을 자고, 소통을 하고, 사랑을 나누는 달팽이를 눈앞에 그려보려고. 나는 온 몸을 집중했다. 이 책이 끝나지 않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인간은 고귀하다.
다른 살아 있는 생명체들보다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을 잘 앎으로써
바로 생명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_에드워드 o.윌슨 <바이로필리아>,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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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1-02-07 22: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런 밤이 있었어서 짠해요 ㅠㅠ나도 긁고 애기도 긁고...그땐 이런 좋은 책 찾아 읽을 궁리는 못하고 터진 얼굴 비비는 작은 두 손 꼭 붙들고 천기저귀로 묶고 난리였네요... 달팽이처럼 느리긴 해도 힘든 날들 지나가더라구요.

청공 2021-02-09 04:56   좋아요 1 | URL
ㅠ에구 고생하셨겠어요. 지금은 다 지나갔다니 다행이네요. 넘 힘들 날은 책도 눈에 안 들어와요ㅠ저희 아이도 언젠가는 괜찮아지길,매일 소원빌어봐요.
 

달팽이 두 마리가 사랑을 나누는 시간은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최대 일곱 시간이 걸릴 수 있는데 모두 3단계를 거친다. 

첫 번째는 달팽이들이 서로 점점 더 가까워지는 오랜 구애 단계로서 대개 서로를 동그랗게 에워싸고 애무를 하다가서로의 더듬이를 접촉한다. 그러다 서로가 좋아하는 상대가아니라는 것이 확인되면 구애행위를 중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이 잘 진행된다면 어떤 종은 서로 사랑의 화살을 찌르는 행위를 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 달팽이들은 나선형 방향으로 서로를 안고 짝짓기를 한다. 이때 어떤 종은 서로 동시에 정액을 교환하는데 다른 종들은 처음 짝짓기에서는 수컷이나 암컷이었다가 다음 번 짝짓기에서는 역할을 바꾼다. 

마지막으로 완성 단계에 이르러 휴식을 취한다. 달팽이 두 마리는 여전히 아주 가까이 붙어 있다가 각자의 집으로 들어가서 미동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는다. 어떤 때는 일곱 시간 동안 그렇게 가만히 있는 경우도 있다. - P145

아툴 가완디는 2009년 3월, 『뉴요커』에 기고한 글에서 ‘인류는 모두 격리를 고문처럼 생각한다" 라고 썼다. 질병은 사람을 고립시킨다. 고립된 사람은 남의 눈에 띄지 않는다. 보이지 않게 되면 자연스럽게 잊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 달팽이……… 우리 달팽이는 내 영혼이 증발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우리 둘은 온전히 하나의 사회를 이루었다. 그것은 우리서로 고립감에 빠지지 않게 도와주었다. 달팽이가 사라지자- 날이 저무는 것처럼 내게는 더 이상 기댈 희망이 없었다.
- P152

어느 날 밤, 새끼 달팽이한 마리가 자기보다 먼저 태어난 새끼 달팽이 한 마리를 따라서 유리용기 벽면을 가로질러 오르고 있었다. 그 새끼 달팽이는 지기 형뻘 되는 달팽이의 껍데기 위로 슬금슬금 기어 올랐다.그러자 형뻘 되는 새끼 달팽이가 몸을 돌리고 아우뻘 되는 새끼 달팽이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서로 더듬이를 거칠게 흔들어댔다. 하지만 형뻘 되는 달팽이가 아우뻘 되는 달팽일 등에서 떨어뜨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형제들 간에 싸우는 것처럼 보였다.녀석들의 일에 개입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가까스로 잠시 일어나 앉아 등에 올라탄 새끼 달팽이를 떼어내 부스러진 알껍데기 더미 옆에 내려놓았다. - P158

인간은 고귀하다.
다른 살아 있는 생명체들보다 더 뛰어나서가 아니라
다른 생명체들을 잘 앎으로써바로 생명에 대해서 
더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 에드워드 0. 윌슨, 바이오필리아 (1984)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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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는 기억력이 있다. 새로운 냄새와 맛을 감지하면 몇주 또는 몇 달 동안 기억해두었다가 거기에 맞춰 행동할 줄알았다. 연체동물을 연구하는 론 체이스는 달팽이가 두뇌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라고 썼다.

용의주도함과 통찰력은 달팽이가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인다... 느릿느릿 기어다니는 달팽이의 모습은 그 얼마나 위엄있고, 생각이 깊고, 진지하며 수줍어하면서도 동시에 단호하고 자신만만한가! 정말로 달뺑이는 내면에 깊이 잠자고 있는 숭고한 정신의 상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 P114

달팽이들은 생식기관과 감각기관을 꽤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것으로알려져 있다. 그들은 가볍고도 동시에 강력한 갑옷으로 몸을 보호한다.
그들은 필요한 만큼 활동적이다. 그리고 다른 동물들보다 더 자극적인음식을 좋아한다. 요약하면, 그들은 매우 풍요롭고 부지런한 종족이다.
그들은…… 달아날 줄도 알고 남을 침략할 줄도 안다.
그들은 무언가 추구할 줄도 알고 누구를 미워할 줄도 안다.

_올리버 골드스미스, 『지구와 살아 있는 자연의 역사, (1774) - P96

달팽이가 포토벨로버섯밖에 먹지 않으니 너무 물릴 것 같았다. 그래서 녀석에게 옥수수 녹말과 가루를 섞어 물로 촉촉하게 개어 주었다. 지역 협동조합 지도소에서 보낸 소책자에서 권한 것이 바로 이 식단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큰 잘못이었다. 

달팽이가 과식하여 탈이 난 것이다. 달팽이는 비틀거리며 유리용기 꼭데기로 기어올라갔다. 심하게 체해서 고통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녀석은 몇 시간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온갖 구멍으로 배설물을 쏟아냈다.
너무 안쓰러웠다. 녀석이 옥수수 녹말에 체해서 회복되지않는다면, 너무 이기적인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늘 곁에 함께 있어주는 녀석도 없이 어떻게 나 혼자 이 질병을 이겨낼 수 있단 말인가?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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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이 되자 보시코는 어두워진 바깥을 향해 창문을열었고, 방 안으로 나방과 모기가 날아들었다. 하지만 모스크바 이바노브나의 커다란 가슴속에서 울리는 심장 고동 소리가 보시코의 귀에도 들릴 만큼, 사방은 정말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심장 고동 소리는 규칙적이면서, 경쾌하고도믿음직스럽게 들려왔는데, 만일 이 심장을 전 세계와 결합시킬 수만 있었어도, 이 심장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의흐름을 조정해 줬을 것만 같았다. 

심지어 모스크바의 재킷 앞부분에 앉아 있던 모기와 나방들마저도,그녀의강인하면서도 따스한 몸뚱이 안에서 울려 퍼지는 왁자지껄한 삶의 소리에 놀라서, 다른 쪽으로 날라가 버렸다. -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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